기숙사, 유치원, 박물관이었던 100년 넘은 이 건물 정체?
발간일 2022.07.13 (수) 15:271891년 설립, 인천화교 마음의 고향 산동동향회
한국의 화교는 특이하게도 그들만의 사회를 이루고 살아왔다. 특히 1946년에는 한반도 각 지역에 상공회의소 역할을 한 화상회(華商會)가 ‘여한화교자치구(旅韓華僑自治區)’로 되면서 화교 사회의 시간을 다시 1884년 화상지계(華商地界) 즉, 조계지(租界地) 시절로 되돌린다. 같은 시기 중국 톈진(天津)에는 조선이 조선주천진공관(朝鮮駐天津公館)을 설립했고 그 주변으로 조선촌(朝鮮村)이라는 한인(韓人) 사회가 설립되어 지금까지 남아있다.
1884년 중국의 상인 즉, 화상(華商)들은 조선정부에서 경매하는 화상지계인 선린동(善隣洞) 토지를 낙찰받고 분기별로 지세(地稅)를 내면서 무역을 했다. 화상의 상(商)은 ‘무역’이라는 의미에서 파생하여 ‘무역 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갖는다.
인천 화교사회는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북방회관을 ‘산동동향회(山東同鄕會)’로 불렀는데 이 조직이 한반도 화교 사회에서 상당했다는 기록들이 발굴되고 있다. 인천의 북방회관은 1891년에 설립하고 각방들이 회관을 설립하여 동향과 교민들을 위한 봉사와 복지를 주된 활동으로 삼았다. 인천화교들의 마음의 고향인 산동동향회 관련 사진들을 통해 동향회의 역사와 변천을 살펴본다.
■ 1930년
▲ 사진 1. 1930년 산동동향회 건물에서 찍은 단체 사진. 화교들의 복지단체였던 산동동향회 건물은 국철 인천역 부근 올림포스호텔 아래에 위치했다. (출처 부극정 제공)
[사진 1] 1930년대 산동동향회 건물에서 찍은 단체 사진이다. ‘중국인 다아스포라’의 저자인 진유광이 이야기하는 산동동향회에 대한 회고록을 보면 “회관은 1층짜리 단층 건물에 불과했지만, 내부 가구 장식 등은 모두 중국 상하이에서 운반해 온 것들이었다. 그래서 산동동향회관은 당시 인천에서 가장 화려하고 호화로운 건물이었다. 1층만으로는 그 용도를 다 충족시킬 수 없게 되자 1920년에 4층으로 증축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사진이 바로 그때의 기념사진인데 1920년이 아니고 1930년 되겠다.
첫째 줄 중앙에는 부유공이 있고 첫째 줄 오른쪽에서 3번째 인물이 인천화농회(仁川華農會) 회장이자 1940년대 이름을 떨쳤던 무역회사 만취동(萬聚東)의 창업자 왕승탑이다. 1929년에는 산동동향회는 동향회관 건물 내에 ‘공립노교소학교(公立魯僑小學校)’를 설립해 학생의 학비를 면제하고 교사들의 월급을 황금으로 지급할 정도로 그 경제적 세력이 막강했다. 사진 위를 보면 교모(校帽)를 쓴 학생들이 보이는 이유다.
▲ 사진 2. 1930년 말 인천 산동동향회 건물 재건축 기념 연회 때 촬영 (출처 부극정 제공)
[사진 2] 1930년 말 인천 산동동향회 건물 재건축 기념 연회 때 촬영한 모습이다. 산동방과 광방 그리고 남방의 수장과 서양 상인이 등장한다. 당시 인천 화교사회의 수장들이 한자리에 모여 촬영했기에 매우 의미 있는 사진이다. 이때 산동방(山東幇)의 수장은 부유공(傅維貢)이고 남방은 왕성홍(王成鴻), 광방은 양문용(梁文勇)으로 추정하고 중앙에 서양인은 세창양행(世昌洋行) 혹은 제물포연초회사와 관련 있는 인물로 추측한다. 그리고 권번(券番)의 예인(藝人)들도 보여 당시 기념 연회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겠다.
산동동향회 건물은 제물포연초회사 건물과 관련이 많다. 인천 중구청 자료에 따르면 제물포연초회사는 1901년 그리스인이 인천 중구 사동(沙洞)에 설립한 연초공장이 시발점이었고 이곳이 문을 닫자 지배인이었던 미국인이 이어서 제물포연초회사를 설립했는데 이곳이 산동동향회 바로 옆이다.
제물포연초회사는 1921년 조선총독부가 연초전매법을 실시할 때까지 영업하였다고 한다. 산동동향회는 1930년 말 바로 옆 제물포연초회사의 건물을 사들여 기존의 1층 건물과 함께 재건축해 사용한다.
▲ 사진 3. 1930년 산동동향회 응접실에서 촬영한 사진. (출처 부극정 제공)
[사진 3] 1930년 산동동향회 건물 재건축 낙성식을 전체 내빈과 함께 촬영한 사진으로 장소는 산동동향회 응접실이다. 남방의 수장인 왕성홍으로 추정되는 사람과 서양인의 각별한 친분이 있어 보인다. 자료에 따르면 왕성홍은 영어와 일어에 능통한 인물로 인천화교학교의 초대 교장과 인천 화상상공회의 회장을 맡을 정도로 인천화교 사회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한 인물이다. 본적이 중국 안휘성(安徽省)이며 인천에서 생을 마감했다.
■ 1950년
▲ 사진 4. 1951년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파괴된 산동동향회 (출처: 구글코리아 www.google.co.kr)
▲ 사진 5. 1953년 촬영한 사진으로 전쟁으로 파괴된 산동동향회 건물이 보인다. (왼쪽 건물) (출처: 공유마당 gongu.copyright.or.kr)
[사진 4, 5]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면서 산동동향회 건물은 큰 타격을 받는다. 1930년 재건축되었던 산동동향회 건물은 전쟁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산동동향회 건물은 총 4개 동(棟)이다. 초창기 지어진 1층짜리 건물과 사진에서 보이는 두 동의 건물 그리고 불타는 건물 뒤쪽 건물 이렇게 해서 4개 동이다.
■ 1968년
▲ 사진 6. 1968년 사진으로 6.25 이후 이 건물은 리모델링을 거쳐 인천화교학교 학생들의 기숙사로 사용됐다 (출처: 인천화교중산중학교)
[사진 6] 산동동향회 건물은 인천화교학교 변화에 따라 그 기능과 역할을 달리했다. 인천화교학교는 1958년 중학교가 1964년에는 고등학교 교과과정이 생긴다. 전쟁 이후 국제·국내 사정에 의해 화교들이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면서 1960년대에는 화교인구와 학생수가 급등했다. 인천화교학교에 교사(校舍)가 부족해지자 산동동향회 왼쪽 건물을 수리하여 교사로 사용한다.
■ 1977~1980년
▲ 사진 7. 인천화교학교는 1978년 산동동향회 전체를 리모델링을 하여 기숙사로 사용하는데, 이 사진은 당시 기숙사 낙성식 때 찍은 사진으로 화교학교 여교사 모습이다.
▲ 사진 7-1. 1980년대 산동동향회 전체 건물 모습이 보인다. 출처:(인천 중구청 건축과)
[사진 7] 1977년 인천화교학교는 기존 교사를 헐어낸 자리에 4층짜리 교사를 신축한다. 그러면서 1978년 산동동향회 전체를 리모델링을 하여 인천화교학교 기숙사로 사용하는데, 이 사진은 당시 기숙사 낙성식 때 찍은 사진으로 제물포연초회사였던 건물을 수리한 것이다. 1층은 여학생 기숙사 2층은 남학생 기숙사로 사용했다.
[사진 7-1] 산동동향회 1980년대 전체 건물의 모습이다. 오른쪽 건물은 당시 제물포연초회사 건물로 1층은 화교학교 여자기숙사이고, 2층은 남자기숙사다. 1930년에 신축한 왼쪽 부분의 건물 1층은 기숙사 식당과 조리실이다. 2층은 직원의 숙소이자 교사로 사용했던 공간이다. 건물 옥상 입구 바로 오른쪽에는 화장실 건물이 있고, 맞은편에는 1891년 초창기 1층짜리 산동동향회 건물이 수리된 상태로 있다. 이 건물은 교생들의 숙소로 사용했다. 그리고 오른쪽 건물 옥상에 건물은 완전히 소실되어 잡초와 야생화가 무성한 공터였다.
■ 1990년
▲ 사진 8. 1990년대 사진으로 1층 건물이었던 산동동향회는 한국전쟁으로 일부 소실되었다. (출처: 김보섭 작가)
[사진 8]은 산동동향회 옥상에 있던 건물로 1891년 초창기 북방회관 즉, 산동동향회 1층짜리 건물 모습이다. 전쟁 때 지붕과 벽 한쪽이 전체가 소실되어 수리된 모습이다. 사진을 찍은 곳은 이미 완전히 소실된 공터고 저 멀리 화교학교의 강당인 부흥당(復興堂)이 보이고 자유공원의 석정루(石汀樓)가 보인다.
■ 2022년
2000년대에 들어와 산동동향회 건물 전체가 다중이용시설로 임대되고 이후 주차장을 만들기 위해 완전히 철거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건물이 초창기 산동동향회의 건물이었는지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이후 산동동향회 건물은 잠시 인천화교학교 부속 유치원 교사로 사용하다가 다시 임대하여 세계소방차박물관으로 변모했다가 2022년 현재는 골동품 경매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글 주희풍 인천화교학교 행정부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