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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학년 여행일지
멩이
첫날
새벽에 내 가슴은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가슴을 열고 지금 이 순간을 기쁨으로 맞이하라고. 깨어나니 여행 예감이 좋다. 네 시 조금 넘어 깨어 아내는 명상을 하고, 나는 인터넷으로 지방의 식당 정보를 좀더 찾아보았다.
6시 조금 넘어 집을 나섰지만, 학교에 도착한 것은 8시가 넘어서였다. 미안했다. 한 시간을 예상했는데 두 시간이나 걸렸다. 부지런히 짐을 챙겨 실어 출발하니 벌써 반이 넘었다. 운전도 서툴지만 길을 모르니 난감하다. 길이라도 잘 아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더러는 졸고 더러는 자는 아이들을 태우고 다시 길을 잘못 들었다가 겨우 11시 가까워 수원역에 도착했다. 피곤했다. 봉기를 만나 아이들과 아점을 먹고 비가 오는 관계로 자전거 3대를 케리어에 매달고 한 대는 분해해 싣고 떠났다. 비오는 출발에 나도 맥이 좀 빠졌다. 길과 운전에 익숙한 봉기가 옆에 타니 마음은 훨 든든하다. 그래도 한 차례 딴 길로 들었다가 다시 1번 국도로 들었다. 아직 길에 눈이 서툴다.
길을 읽는다는 것은 뭘까? 길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뭘까? 사정없이 거칠게 달리는 것 같지만, 흐름을 타며 부드럽게 흐르는 자동차들의 행렬을 느끼며 피로와 함께 놀라움을 느낀다. 운전은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먹이를 찾는 육식성 동물이 되었다고 할까? 낧은 국도와 새 국도를 번갈아 드나들며 나는 낡고 누추한 것이 그립다.
평택 지나 비가 가늘어지자 자전거를 결합해 아이들은 두어 시간 탔다. 돌풍과 폭우가 쏟아지기 전까지. 하지만 아이들 말대로 기관총으로 퍼붓는 듯하고 뺨을 갈기는 빗줄기와 자전거를 휘청이게 하는 바람 때문에 결국 편의점에 대피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홈빡 젖은 몸을 한 아이들과 몸을 녹이기 위해 컵라면을 먹었다.
결국 인근 유치원에 자전거를 맡기고 우리는 미리 양해를 구해둔 각원사를 향해 카니발을 몰았다.
각원사는 전통적 기법을 따라 지었지만 규모가 큰 현대식 절이다. 법강스님이 외출하셔서 종원스님의 안내를 받아 뜨끈뜨끈한 방 둘에 들었다. 아이들은 샤워를 하고, 옷과 신발을 방에 널어 말렸다. 5시 반에 저녁공양을 했다. 아이들의 반응이 좋다. 6시가 되자 타종이 있었다. 우산을 쓰고 가볍게 산책을 했다. 봉기는 피곤한 몸에 코를 골며 금새 잠이 들었다. 옆방 아이들이 두런거리다가 잠든다. 미안하고 고맙다. 아무튼 유쾌하게 여행을 해줘 고맙다.
오늘이 내 생일이었다. 아내는 재첩을 넣은 미역국을 끓여주었다.
둘째 날
공주 갑사에서 일박을 한다.
천안 각원사. 새벽 4시 도량석과 예불소리를 들었다.
산안개와 부슬비 속에 아이들과 산책을 마치고 종원스님께 인사를 드렸다. 따뜻한 잠자리와 공양에 대한 신세를 고스란히 입고 마음의 고운 빚으로 남길까 아이들과 의논하다가 숙박료로 예정했던 5만원의 돈을 보시하기로 했다. 떡까지 싸주셨는데 그걸 신발장 옆에 놓고 나왔다.
전날 유치원에 세워둔 자전거를 찾기 위해 천안시를 좀 헤맸다. 출발시간은 9시.
천안부터는 길이 좋아졌다. 자동차가 적어지고 길도 간명해 잃을 염려가 거의 없었다.
새로 뚫린 1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고개를 만났다. 차령고개. 옛날 차령고개 대신 편해진 길이지만 자전거 여행자들에겐 고난의 길이었다. 결국 일행은 멈추고 자전거를 끌며 고개를 넘었다. 그것이 산에 대한 예의라는 듯.
그리고 내리막길을 달리는 기분이라니. 자동차와는 비교할 수 없는 상쾌함이다. 그런데 봉기와 앞선 아이들과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중간에 끼어드는 차가 생겼다. 아무래도 봉기가 지친 모양이다. 스쿠터를 타면서 자전거를 거의 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 에스코트 차량을 봉기가 몰고 내가 자전거를 인계받았다. 아이들과 자전거를 같이 타게 되니 마음의 짐이 덜어지고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공주 진입전 제오의 자전거 체인이 끊어져 차에 실었다.
공주에 진입하는 도로는 1차선이다. 우리 일행 때문에 정체가 생겼고 중간에 성급히 앞지르기를 하려는 차도 생겼다. 그래 길가 쪽으로 약간 붙으면서 달렸다.
금강을 따라 공산성과 곰나루를 바라보며 달려 공주대교를 통과했다. 넓게 자락을 펼치며 흐르는 금강의 아름다움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뒤따라오는 차들 때문에 멈출 순 없었다. 순식간에 공산성 아래 구시가지, 옛 시장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공주시장에 들어갔다. 우선 체인이 끊어진 제오의 자전거를 수리점에 맡기고 점심으로 공주수제비를 먹기 위해 ‘얼큰이수제비집’에 갔다. 내겐 맵기만 한 수제비를 아이들은 맛나게 먹었다. 다소 음식을 가리는 인국이가 그 맵고 양도 많은 빨간 국물을 깨끗이 비우자 모두 놀랐다. 시장에서 과자와 삼겹살과 상추와 봉기의 고무신을 샀다. 시골장터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남은 활기찬 곳이었다. 특히 휘영이가 빵과자를 사고 좋아했다.
공산성 아래 자전거포로 돌아와 자전거를 찾고 다시 갑사로 향했다. 아저씨의 말로는 24키로라는데. 맞바람이 계속 불어 중간중간 힘들었다.
종일민박이라는 곳에 도착하니 하필 1박2일 팀이 박찬호 선수와 묵었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저녁에 삼겹살 파티를 했는데, 김치가 빠져서 그랬는지 느끼하다며 아이들은 많이 못먹었다.
셋째 날
전주, 호텔한성에서 일박을 했다. 가장 긴 구간으로 78킬로미터를 달림.
전주에서 4년을 살았던 탓에 아는 분들이 좀 계신 곳이었다. 평생교육센터장으로 있는 지인의 도움으로 편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방값까지 자신이 지불하면서 우리에겐 다소 과분한 방이었다. 우리들 말로 럭셔리.
몸이 피곤한 탓에 아이들은 일찍 일어날 수 없었다. 애초 계획은 아침에 갑사를 구경하는 것이었는데, 결국 봉기와 나만 갑사 산책을 했다. 아름드리 소나무 숲과 어린 아기의 배내 머리같이 보드라운 신록이 눈에 담겼다. 행복했지만, 아이들과 함께 하지 못해 아쉬웠다.
역시 어른인 나와 아이들이 맞이하고 담는 세상은 분명 다르다. 내 욕심껏 되지 않아 약간 화도 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지점이다. 내 마음의 불편함을 느끼며 욕심의 단면도 보았다. 내 마음 잠시 놓는 게 쉽지 않는 때가 있다.
갑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예전에도 보았던 공우탑이다. 절을 세우기 위해 열심히 일을 했던 소가 죽자, 절에서는 소를 위해 공우탑을 세워 명복을 빌어 주었다. 그 마음이 잊혀지지 않고 이렇게 아름답게 전해오고 있다.
산책과 기상이 늦어져 출발시간도 늦어졌다. 갑사가 너무 좋아 전주까지의 길이 그렇게 먼 줄 잠시 잊기도 했다. 처음엔 새로 놓은 국도 대신 옛 도로로 달리면서 농촌의 풍광을 아이들이 맘껏 즐기도록 하고 싶었다. 하지만 역시 옛 도로의 기복과 굴곡은 출발부터 힘을 빼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길과 풍광의 아름다움 대신 지불해야할 댓가가 너무 많았던 모양이다. 1시간 정도 그런 도로를 달린 뒤, 결국 다시 1번 국도를 탔다. 상월에서였던 것 같다. 아쉬움이 남았지만 현명한 선택이었다.
공주장의 맛을 본 휘영의 제안으로 논산장에 들렀지만 빵과자 같은 건 없었고, 대신 율무차를 사고, 다시 출발했다. 점심은 연무대를 지나 한적한 솟대마을 정자에서 먹었다. 효자의 전설이 얽힌 마을이었다. 시골정자에서 끓여먹는 라면과 삶은 계란의 맛은 일품이었다.
그러나 전주가 아직 40킬로 이상 남아 있었다. 다시 출발했지만 30여 킬로를 남기고 휘영과 제오가 지쳐 자전거를 차에 싣고 나와 인국이만 계속 달렸다. 인국이의 기록계는 어느 내리막길에서 시속 58킬로를 찍었고, 인국이는 그 기록에 대단히 만족해했다. 더구나 하루 78킬로의 주행이 주는 성취감이 꽤 컸던 것 같다. 인국이는 58킬로가 찍힌 속도계를 사진에 담았다.
물론 나도 힘들었다. 따가운 봄햇살에 얼굴이 빨갛게 익고 눈알에 핏대도 섰다. 전주 숙소에 도착한 시간은 거의 5시 가까이 되어서였다. 4시경 전주에 접어들었지만, 시가 워낙 커져서 우리가 머물 중심가까지 가기 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꽤 규모가 큰 모텔급인 한성호텔에 머물며 우리는 밀린 빨래를 하고, 샤워 아닌 목욕까지 할 수 있었다. 나는 7시 경엔 1층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전주의 지인들과 만났다. 워낙 피곤해 쉬고 싶었지만 나를 위해 모여준 정성을 생각해 자리를 끝까지 지키니 12시가 넘었다. 중간에 숙소에 올라가 하루닫기 노트를 점검하고 집에 다녀온 봉기를 보았다. 아이들이 장난을 치다 벽걸이를 떨어뜨려 유리가 깨졌다. 변상을 해주려 했으나 주인이 한사코 마다해 결국 하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변상을 하지 못한 것이 걸린다.
넷째 날
남원 가는 길
아침은 호텔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했다. 콘 프레이크, 모닝빵, 크라상, 김밥, 바나나 등의 과일들, 주스, 삶은 계란 등 깔끔하고 푸짐했다. 무료로 제공되는 아침이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맛이 좋았으므로 거기서 아침을 마치고, 콩나물국밥집으로 가지 않았다.
떠나며 수현에게 전화를 했다.
전주를 나서며 풍남문과 전동성당을 둘러보고 한옥마을을 통해 국도를 탔다. 휘영이가 두통을 호소해 휘영이는 그냥 차를 타고, 제오가 맨 앞에서 탔다. 의외로 오르막길에 제오의 속도가 일정해 인국이와 내가 따라가느라 고생을 했다. 임실까지 오르막이 계속되어 힘들었지만, 임실부터는 내리막길이라 좀 나았다. 제오는 임실치즈를 먹어보고 싶어했으나 길가에 임실치즈를 파는 곳에 없었다. 주인을 구해준 개의 이야기가 전하는 오수에 머물며 점심을 해먹으려 했으나 남원이 코앞으로 느껴져 제오와 인국이 내처 달렸다. 오수의 개동상을 지나치며 아쉬운 마음이 남았지만, 지켜보기로 했다.
하지만 배가 고팠는지, 결국 국도변에 자전거를 세우고 라면을 끓여 점심을 먹었다. 휘영이의 두통이 거기서도 낫질 않아, 어린이 타이레놀을 먹였다. 효과가 있었다.
춘향터널을 빠져 나오자, 거기서부터는 남원, 시원한 내리막길!
남원에 도착한 것은 2시경이었다. 역전 골목에 있는 한성여관은 전형적인 70년대식 여관이었다. 아이들의 기억엔 제일 추레하고 좁은 곳이었다. 주인 할머니도 계속 같은 말을 하는 분이었지만 선량하신 분이었다. 한 시간 휴식을 취하고, 광한루원을 방문했다. 아이들은 쉼없이 이야기에 취해 구경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연못에서 2000원짜리 잉어밥을 사자 셋은 오작교 위에서 열심히 모이를 주며 놀았다. 그런데 악동처럼 모이로 잉어의 머리를 맞추는 게 아닌가? 완전히 개구쟁이들이었다.
그곳에서 나와 현식당이라는 추어탕집에 갔다. 가격은 7천원. 현지 용어로 젠피가루(초피가루)를 넣어 먹으니 추어탕이 더 맛있었다. 음식을 좀 가리는 인국이가 먹지 못해 그것을 나머지 사람들이 갈라먹고, 인국이는 나중에 혼자 분식집에서 먹었다.
구간이 긴 편이 아니라 어렵지 않은 하루였다.
광한루를 돌아보는데 카메라에 문제가 발생했다.
다섯째 날
순천만.
마지막 날이다. 예보는 전국적인 강풍과 비를 알리고 있었다. 아침부터 화제는 당연 날씨였고, 언제 자전거를 차에 싣느냐가 화제였다. 천안에서 비로 된통 고생한 덕에 비에 대해 약간 과민해져 있었다.
밥으로 된장찌개를 해먹고 두 번째로 긴 구간인 70킬로 정도를 목표로 한 탓에 8시에 출발했다. 하지만 곡성 압록강을 지나는 17번 국도에서 자전거 통행을 금해 다시 돌아와 구례로 곧장 향하는 19번 국도를 탔다. 저녁에 코끼리의 전화에서 들은 대로 오르막길이 장난이 아니었다. 이러다 지리산을 관통하는가 싶었다. 4명이 모두 자전거를 탔지만 1시간 반의 줄기찬 오르막길에 모두 지쳤다. 간식과 휴식을 취하고 자전거를 끌고 걸어 올라가는데 역시 잘 못 따라온다. 더구나 이번엔 빗방울이 몇 낱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결정타였다.
결국 자전거를 싣고 고개를 넘기로 했다. 하지만 자전거를 싣고 달리기 시작하자, 불과 이삼백 미터 앞에서 구례로 뻗는 터널과 내리막길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번 여행 최대 시련지였고 아쉬웠던 지점이다. 그곳만 통과했어도 아이들이 얻는 성취감도 달랐을 것이다. 적어도 구례까지는 단숨에 도착하고, 어쨌든 순천까지 달릴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17번 국도는 자전거 진입을 금했지만.
결국 우리는 순천까지 자동차를 이용했고, 내 마음도 무거웠다. 기대와 아쉬움 때문에. 결말이 너무 맥빠졌다.
하지만 순천만에 접한 순천만민박에 도착하니 다시 기운이 났다. 바다와 갈대밭의 장관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이들의 지쳐 숙소에 도착하자 일제히 잠에 빠져들었다. 우선 봉기와 산책을 했다. 일정과 날씨를 생각하니 마음에 여유가 없어지면서 맥이 쭉 빠졌다. 휴식을 취한 아이들과 오후엔 뻘밭과 바다가 보이는 어촌마을을 여행의 심리적 종착지로 생각하고 갔다. 멋진 포즈로 사진을 남기고 닳은 꼬막 껍데기를 주웠다. 의외로 약간 심드렁한 반응. 나만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피로일까 동기부족일까? 동기면에서 좀더 채워주지 못한 것 같아 내심 반성을 많이 했다. 하지만 서울에서 순천이라는 자전거 대장전을 마친 아이들 마음에도 알게 모르게 물금처럼 뭔가가 남았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저녁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를 봤다. 모두들 진지했다.
시내 우리식당에 가 백반정식을 먹었다. 소문처럼 반찬 가짓수가 장난이 아니게 많았다. 처음엔 그게 너무나 신기했으나, 먹다보니 익숙해졌다. 아이들은 대만족이었지만, 나는 오히려 약간 평범한 느낌을 받았다.
장을 보고 숙소로 돌아와 여행평가회를 하고 잠을 잤다. 고생이 심해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여행이라는 의견, 다음엔 부산까지 해보고 싶다는 의견, 편했던 숙소와 다양한 숙소에 대한 인상, 자전거 여행의 스킬부족에 대한 아쉬움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밤엔 계속 비바람이 몰아쳤다. 비 내리는 순천만의 맹꽁이 소리도 들렸다.
지금은 새벽닭이 운다. 날이 밝고 있다.
오늘은 남원을 거쳐 전주, 서울로 다시 올라가야 한다.
여섯째 날
아침, 비는 오지 않았다. 순천만의 갈대는 정갈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빛바랜 노랑, 깨끗했다. 바다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길고 긴 뻘이 새삼 땅의 넓이를 실감케 한다. 트인 곳이 주는 특이한 공허와 위안으로.
김치볶음밥을 해먹고, 입석을 향해 출발했다. 구례를 지나 노고단길을 지나려했으나 입장료가 있어서 19번 도로로 돌아갔다. 길은 많다. 그리고 어느 것이 최선의 길인지는 비교할 수 없다. 길에 객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길을 몸으로 통과한 자들의 최선이 있을 뿐이다. 모든 길은 신성하고 고유하다.
노고단을 피해 운봉쪽으로 돌아가는 길이 그랬다. 육모정에서 운봉 가는 길은 환상의 협곡길이다. 최고의 드라이브가 되었다. 겨누듯 그러나 다정하게 마주한 좁은 협곡이 마치 거대한 연록의 꽃송이처럼 싱그럽다. 안개구름이 응결해 뚝뚝 떨어지는 산 자체가 봄의 자궁같다. 가득 차오른 신록이 봄비와 함께 단숨에 스며들었다. 자동차를 타며도 길에 이렇게 홈빡 반할 수 있다니.
산내 지나 입석마을에 도착하여 아이들을 내려주었다. 먼저 도착해 일정을 보내고 있는 여자아이들의 낯을 보니 피곤과 두통으로 앓는 친구도 있었지만 대체로 잘 적응하며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깜콩이 타준 모과차를 한잔 마시고, 봉기와 함께 전주를 향해 출발했다. 깜콩의 낯은 피로해 보였다. 남원에서 추탕을 먹고, 전주에 도착하니 2시였다. 케리어가 무너져 다시 설치하고 자전거를 올렸다.
이제부터 혼자만의 서울행이었다. 고속도로 대신 1번 국도를 탔다. 의왕에 도착한 것이 7시였으니, 5시간을 달린 셈이다. 목과 등의 경직 때문에 피로가 쉽게 몰려들었다. 올라가는 도로에서 입술 위에 물집이 잡히고 있었다. 결국 피로가 안겨준 훈장을 코밑에 붙이고 서울에 도착했다. 천안 지나 평택부터는 내내 서행하게 되고 정체가 되었다.
형이 사준 저녁을 먹고 성미산 학교에 도착하니 9시가 넘었다. 자전거와 짐을 내리고 집으로 가는 전철을 탔다.
내 몸엔 길의 피로가 가득 쌓였다.
고속의 국도를 달리며 느낀 피로와 긴장은 뭔가 당한 느낌이 들게 한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아스팔트에선 수학적 속도와 거리의 탐욕을 얻은 것 같다. 늘 어딘가 도착하고 싶다. 하지만 길에 숨은 무수한 삶과 마음들을 보라. 그것은 수만의 백과사전 같다. 그래서 길은 두근거린다. 길엔 무수한 삶이 숨어 있으므로.
일곱째 날
숲길 첫날.
새벽밥을 먹고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하니 8시. 다행히 20분차를 탈 수 있었다. 책을 읽다 자다 하면서 실상사 앞에 도착했다. 실상사 앞 냇물의 바위들은 흡사 오랜 도반이나 되는 듯 반갑다. 나는 돌과 바위가 좋다. 방죽 길을 따라 걷다가 깜콩과 통화를 하고 숲길이 시작되는 매동 마을로 방향을 돌렸다. 주유소 앞에서 임실 버스를 타고 막 내리는 아이들을 만났다. 늘 그대로인 사람들이 반겨 반갑다. 거기서부터 재잘재잘 어슬렁어슬렁 트레킹을 시작했다. 멀리 구름과 닿아 있는 지리산을 조망하며 걷는 기분이 일품이다. 걸으며 나는 나를 지리산에 조금씩 풀어 놓았다. 지리산 길가엔 하얀 민들레가 참 많았다. 내가 하얀 민들레를 제일 많이 본 곳이다. 창원 마을 가는 길에 본 통과한 숲과 다락논들. 그리고 순박한 간이 편의점 아주머니들의 인심에 마음이 흐뭇해진다. 지팡이를 짚고 간 희진이를 제외하면 아이들도 힘들지만 제법 경쾌해 보인다. 느릿느릿 트레킹이었지만 의외로 속도가 빨랐다. 점심은 간이 휴식처에서 끓여준 라면과 아침에 숙소에서 아이들과 깜콩이 싼 김밥을 먹었다.
삼삼오오 두런두런 걷는 아이들의 모습이 참 예뻤다. 그것 아이들은 알까?
길을 걸으며 나는 길의 노래를 생각했다. 내리고 오르고 굽고 곧으며, 숲과 논밭과 마을을 통과하며, 간간히 감나무와 오동나무를 지나며, 길은 노래를 부르는 거다. 새만 노래하고 나무만 노래하고 햇살만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노래는 어디에나 있다. 찰찰 찬 논물엔 쉼 없는 잔물결들이 있다. 숲과 들은 바람과 햇살의 연주로 가득하다. 길은 이런 모든 노래를 품고 부르며 이어지고 있다. 몇 십 년 전 단 한번의 용트림으로 승천하는 용처럼 멋진 비늘을 가진 조선소나무야, 너는 서있다. 너도 노래한다. 거기 아이들이 재잘재잘 걸으며 자신을 섞어넣는다. 길이 그렇듯, 모든 존재하는 사물은 저마다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물론 나도 내 노래를 부를 것이다. 삶 자체가 협주고 교향곡인 셈이다.
창원 마을 도착하기 전에 들른 느티나무가 보이는 쉼터에서는 천원에 마음껏 마시는 식혜집이 있었다. 과객에서 돈을 받고 무엇을 파는 것이 아직은 낯설고 익숙치 않은 산골 아주머니의 후한 인심에 그립고 그리운 인정의 단면을 본다. 돈을 받는다는 것을 부끄러움으로 안다는 것은 역시 사람에 대한 끌림 때문일 것이다.
창원의 정노숙 김석봉 부부 댁도 그랬다. 숙박과 식사값에 대해 어려워하는 정노숙 님의 약간은 수줍고 난처한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저녁밥상은 정말 생명의 밥상의 이력이 그대로 녹아 있어 오히려 황송했다. 밤중엔 김석봉 환경운동연합 대표님의 삶의 기로와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들은 따끈한 구들방에서 뒹굴며 놀았다. 대숲이 흔딜리는 황토집이었다.
여덟째 날
아침에 일찍 깨어 마을 산책을 했다. 윗당산은 어제 하고, 아랫당산과 옆쪽에 있는 노거수를 보았다. 일찍 일을 나서는 할머니들의 모습은 어디서나 눈에 띈다. 서울에서 뭐 볼 게 있다고 이런 산골을 찾아왔냐며, 자식들은 모두 대처로 떠나고 늙은이들만 혼자 사는 마을의 형편을 얘기하는 할머니의 말씀을 들으니 시대의 유행에서 벗어나 살지 못하는 다수의 삶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300년 이상 된 느티나무의 품위 주변을 한참 어슬렁거렸다. 나는 이렇게 말 없는 자연의 친구들로부터 많은 위안을 얻는다. 폐가 한 채를 둘러보며 사진을 찍다가 돌아왔다.
쑥을 캐러 윗당산에 아이들과 올랐다. 더러는 의자에 눕고 더러는 쑥을 캐고 더러는 흙장난을 하는 모습이 천국의 아이들이다. 어떤 의도도 없이 평화롭게 노는 사람의 모습은 얼마나나 아름다운가? 이러며 성장할 수 있다면. 4월의 눈이 쌓인 천왕봉과 지리산 능선을 바라보며 몇 백 년을 서 있는 윗당산의 느티나무는 얼마나 깊고 깊을까? 따뜻한 햇살에 보드랍게 편 쑥을 몇 줌 끊었다. 오전 휴식을 취하는 동안 깜콩과 나는 정노숙 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자신에 솔직하고 진실과 인간적 가치를 위해 살아가는 이의 아름다운 면모를 만날 수 있어 즐거웠다.
자식를 기르며 겪은 여러 이야기를 들으며, 아이들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새삼 실감하였고, 자신에 대한 반성도 되었다. 사실 나는 그렇게 세심하고 자상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잘 사용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냥 자연스럽고 편하게 하려고 생각날 때마다 노력할 뿐이다.
점심에 약초를 캐러 가자고 들르신 동네 할머니과 함께 아이들은 쑥버무리를 만들었다. 서울에서 자란 내게도 쑥버무리는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며느리에겐 찜솥의 땜을 준다는 얘기를 듣고, 이곳에선 쑥버무리를 쑥밥이라고 한다는 것도 알았다. 산에서 해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이 내겐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부추버무리도 그렇다.
아침에 먹은 두릅순, 옻순, 가죽나무순, 그리고 저녁에 산들바람 집에서 먹은 엄나무순도 인상적이었다. 나무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그렇게 많은 나물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도시인에게 오랫동안 잊었던 지혜와 행복을 떠오르게 한다.
버려진 강아지들을 돌보는 집이기도 했다.
점심을 먹고 금계 마을로 내려가 버스를 타고 실상사로 돌아왔다. 거기서 생명평화결사의 사무처장으로 일하고 있는 김도형 님을 만났다. 양심적 병역거부로 옥살이를 하고 생명운동을 하고 있는 젊은 친구인데 자신의 신념을 진지하게 실천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피곤한 아이들은 오래 집중할 수 없었다. 미안했다. 역시 몸이 먼저다. 상황에 맞게 아이들과 상의하며 계획을 만들고 변경하면 아쉽더라도 자기 선택의 영역과 즐거움을 생활 속에 꾸준히 확장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며칠 내가 계속 반성하는 것도 나지신을 포함한 교사의 욕심이다. 남자 아이들 자전거 여행을 하며 나는 내 기대와 목표치에 못 미치는 아이들을 보며 안타까움과 스스로에 대한 화를 느끼곤 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더 자연스럽고 또 옳다는 생각을 동시에 했다. 어떤 명분과 욕심도 옳지 않다. 사람 자체를 소중히 여기고 존중하는 것이 잊혀진다면 도대체 무엇이 남겠는가? 나는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람이고 도우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나의 편협과 자만에 대한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
산들바람은 사람이 그리웠다는 듯 애정과 자랑을 가지고 집 주변의 풀꽃과 약초, 효소들을 설명해주었다. 그저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아가기 위해 지리산 자락에 깃든 분으로 보였다. 지인이가 작은학교에 다니면서 엄마와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피곤한 아이들이 산들바람의 자연밥상과 삼겹살로 한껏 배를 채우고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니 흐뭇하다.
9시 넘어 추웠지만 오솔오솔 떨며 팔짱을 끼고 돌아온 밤길도 좋은 추억이 되었을 것이다. 여행은 정말 의도보다 의도하지 않은 것에서 소중한 순간들을 선사하는 것 같다. 삶도 그렇지 않겠는가?
참 창원마을의 점심 때, 쑥버무리를 만들어준 동네 할머니의 귀신과 도깨비 이야기도 있었다. 할머니는 헛것으로 보이는 동네사람의 모습을 귀신의 장난이라고 말하고, 피 묻은 작대기가 도깨비로 사람을 홀려 씨름을 하거나, 밤에 도깨비불로 일어난다고 했다. 목신에 대한 이야기와, 그런 기운에 대한 체험과 두려움, 신령으로 불리는 호랑이나 큰 짐승에 대한 외경 이야기를 들으며, 조상들의 세계관과 감성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의 피가 묻으면 그 기운이 생명을 얻어 도깨비가 된다는 생각과 귀신이 사람의 피를 보며 사라진다는 생각은 재미난 발상이다. 악심을 가진 귀신과 장난끼로 가득한 도깨비의 대비도. 거목에 목신이 깃들고, 배나무나 은행나무에 목신이 잘 깃든다는 것도. 산신령이 큰 짐승과 같은 외경에서 나왔다는 것도 재미난 일이다. 귀신을 제와하면 모두 자연의 생명에 대한 외경과 관련되어 있다.
안타까운 것은 창원 마을에서 몇 년 전부터 당산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을엔 커다란 창원 교회가 서있었다.
아홉째 날
입석에 있는 만만한 민박집의 비좁은 공간에서 잠을 자느라 여러 번 깨며 잤다. 여섯시 조금 넘어 일어나 일지를 좀 썼다. 오전에 남자 아이들과 옥수수 20여주를 심고, 임실 5일장에 갔다. 옥수수도 그랬지만 임실장에서 의외로 아이들은 심드렁했다. 점심 무렵이었고 확실히 북적거리는 맛은 없는 한가한 장이었다. 나는 조각을 한다고 작은 칼을 하나 샀다.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왔다. 희진이가 병원에 간 탓에 장 구경을 늦게 하고 오느라, 우리 일행이 먼저 돌아왔다.
오는 길에 아이들은 산내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놀았다. 시이소, 철봉, 미끄럼틀에서 놀며 사진찍기에 열중한 아이들. 참 밝다. 아이들은 또 금새 자연의 아이들이 되었다. 가르침이라는 행위의 무색함을 나는 이럴 때 느낀다. 사람은 스스로 크는 게 아닐까? 자연은 그 어떤 교사보다 믿고 의지할 만하고, 아이들에겐 놀이와 재미가 필요하다. 그것을 어떻게 존중할 수 있을까? 그러나 절대적인 것 또한 아무 것도 없다. 쉼 없는 변화 속에 상황상황이 만들어지고 있으니 무어라 단정할 일도 아니다.
시골 학교를 볼 때마다 느끼는 점이다. 이승복, 신사임당, 유관순, 세종대왕, 생각하는 사람, 책 읽는 소녀 등 시멘트로 조잡하게 만들어진 조상들에서 나는 고형이 된 박정희 시대의 유물을 대한다. 도대체 시대와 맞지 않아 보인다. 그것이 시골의 슬픔이라는 듯.
그렇게 뜨거운 한낮을 놀고 와, 해지기 전 다시 산책을 나갔다. 내일 할 명패 만들기에 쓸 자연 재료를 줍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남녀 학생들이 어울려 산책하며 장난치고 사진 찍는 재미에 다시 아이들은 흠뻑 빠져들었다. 봄빛 넘치는 지리산 자락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 그지없는 자연이 아름다움 속에 자연의 아이들이 뛰어논다. 천성이란 뭘까? 웃고 뛰노는 모습은 그 자체가 아름답고 행복한 천성이다. 행복에 의미란 그렇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 자체를 긍정하고 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녁을 먹고 아이들은 게임을 하다가 12시 넘어까지 얘기를 했다. 진로와 학교 문제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궁금하고 궁금했지만 애써 캐묻지는 않기로 했다. 아이들끼리 충분히 얘기하는 것의 경험과 의미로 중요한 시간이 되었으리라 생각했다. 덕분에 나는 마루에서 불편한 잠을 자다가 늦게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열째 날
실상사로 옮긴 날. 피곤했다. 밤늦게 잠을 잤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7시 반에 일어나 짐을 싸고 정릴 해 허겁지겁 나와 무거운 배낭과 케리어를 옮겨 오니 10시. 약속한 9시 반보다 30분이나 늦었다. 짐을 부리고, 솔밭에서 김혜경 선생님과 노간주나무 토막과 자연재료를 이용해 1시간 가량 문패 만들기를 했다. 남자아이들은 거친 듯 하면서도 명료하게 ‘선교금지’, ‘who are you', '空의 美’를 썼고 꾸밈도 적은 편이었으며, 여자아이들은 억세나 송피 등을 이용해 좀더 아기자기한 맛을 살리면서 행복과 감사의 생각들을 담았다. 나는 녹슨 철사에 솔방울을 달아놓고, 웃음이라는 글을 썼지만, 어째 글씨체가 어색했다. 깜콩 은 호두껍질과 나뭇가지를 이용해 ‘우리’라는 단어를 쓰고 테를 둘러 모두의 이름을 썼다. 한수 배웠다.
아이들이 발우공양을 거부해 더 상의해보려 했으나, 깜콩이 아이들의 의사를 벌써 전달해 종무소측에서 취소된 사항을 말해주었다. 발우공양엔 더 준비가 필요하므로 자꾸 번복하기 어렵다기에 그냥 공양만을 하기로 했다. 선입견을 넘어서고 새로운 체험에 도전할 기회를 놓치게 된 것이 안타깝다. 내가 좀 더 보완해야할 점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점심공양으로 국수를 먹고 나는 남자 아이들과 두어 시간 부족한 잠을 자며 쉬었다.
공양간 앞에 붙은 공양게가 새삼 가슴을 울린다. '이 음식은 어디서 왔는가?'
3시엔 응묵 스님으로부터 절 방법을 배우고, 부처님 오신 날이 가까워 컵등 만들기를 했다. 예쁜 연꽃 컵등을 두 개 만들었다. 아이들이 몰두해 모두 재미있어 했다. 거친듯 간소한 인국이의 컵등, 의외로 소심하게 꽃잎과 받침이 화려한 휘영이의 컵등 등 저마다의 개성을 싷어 화려한 연꽃을 피웠다. 하지만 예쁜 연꽃 만들기에 치중해 양초를 꽂을 순 없게 되었다. 저녁 공양을 마치고 한생명 건물로 가 원공스님과 산내면 아이들의 영화동아리인 티네의 5컷 영화를 감상했다. 영화는 5분도 안 되는 것이었지만, 소개와 발표로 2시간 동안 진행되어 이래저래 피곤한 일행에게 지루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처음 영화를 제작해본 산내의 중학생들과 작은학교 아이들에겐 분명 뜻 깊은 순간이 되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주변의 응원과 자극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거기서 촬영을 담당한 홈스쿨러 학생을 보았는데, 글도 좋고 생각이 깊다.
끝나는 시간이 너무 늦어져 탑돌이 대신, 풍등 올리기를 했다. 보광전 앞 신라시대의 삼층석탑과 석등을 세바퀴 돌며 소원을 빌고 사람만한 풍등에 불을 붙여 올렸다. 바람 없이 잔잔한 날씨였던 탓에 풍등은 높게 높게 올라 별같이 보였다. 아름다웠다. 불을 피워 하늘 저 멀리 날릴 수 있다는 것은 역시 대단한 일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돋보이는 재미난 프로그램이 많았던 탓에 아이들도 재미있어 했다. 응묵 스님의 너그럽고 유연한 대처 때문이기도 했다.
마지막 날
4시에 목탁 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새벽 도량석 소리는 산사를 감싸며 깨우고 있었다. 늦게 일어나면 풀 뽑기라는 위협에 아이들도 모두 일찍 일어났다. 4시 반 새벽예불에 참석하고, 5시에 참선을 배웠다. 하지만 피로 때문에 나도 졸면서 참선을 했다. 인국이는 자세가 힘들어 고생을 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아토피와 알레르기로 고생이 심했던 제오는 리틀붓다 같았다.
죽으로 나온 아침 공양을 마치고 방에서 잠깐 눈을 붙였지만 피로가 풀리지 않고 머리가 아파왔다. 8시에 응묵 스님과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고, 9시엔 실상사 작은학교를 방문했다. ‘깨달음은 나무처럼 자라난다’는 교훈이 거대한 현판으로 달려 있었다. 자연 속에 있는 학교가 부러웠다. 예상외로 깊은 산골에 외따로 떨어져 있었고, 아이들은 백일리 같은 아랫동네에서 작은 그룹을 만들어 가정생활을 하며, 매일 등하교를 한다고 했다. 작은학교 바로 아래는 새로 터를 잡으며 마을 만들기를 하고 있었다. 굳이 산을 깎으며 깊은 산에 마을을 만들어야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아무튼 이왕 시작한 일이 잘 되길 바랄 뿐이다. 작은학교도 고등과정을 준비하며 내내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을 방문한 아이들에겐 별로 의미 있는 시간이 되지 못했다. 우선 학교 사정상 작은학교 아이들과의 담화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서먹하고 뻘쭘했다.
점심공양을 마치고 서울행 함양고속을 탔다. 절에서 절편을 싸주었으나, 휴게소에 내리자 아이들은 감자나 튀김 같은 것을 저마다 하나씩 사들고 돌아온다. 절편은 나와 깜콩만 먹었다. 아예 휴게소 간식을 위해 점심 공양의 양을 미리 적게 먹은 아이도 있었다. 이럴 땐 역시 아이구나 싶다.
성미산에 와서 간 첫 중등여행이었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좀더 아이들이 자연에 밀착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지 않았을까? 세밀히 준비할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자유로운 놀이 속에서 행복해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았고, 그 가운데 조용히 찾고 자신에 집중해 가는 친구들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다. 스스로 자라는 아이들에게 고마울 뿐이다. 자기만의 방식과 속도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기를 빈다.
첫댓글 4시에 일어나 명상에 들 수 있다니 놀랍습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
둘째날.. 새벽예불 부슬비와 안개.. 그림같습니다^^ 곰나루.. 공산성.. 고요하고 푸근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공주입니다.
세째날.. 멋진 인국이^^
네째날.. 아이들은 언제나 어른을 당황스럽게 합니다. 했으면 하는 일에는 언제나 지겨워하고 하지 말았으면 하여 돌아가도 어쩌면 그리도 잘 찾아서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반성도 하고 그런 아이들이 이쁘기도 합니다. 두통은 언게까지 계속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다섯째날.. 아이들이 지칠 때가 되었나 봅니다. 곡성에 코끼리라는 아이가 살았다가 이번 여름이 지나면 다시 살러 간다던데 혹 그 코끼리인가요?
그건 아니고요. 코끼리는 저희학교 선생님입니다. ^^ 두통이 생긴 친구는 타이레놀 먹고 곧 나았어요.^^
어제 못다 읽은 여섯째날부터 마지막날까지의 힘겹지만 아름다운 여행을 함께 누리듯이 읽어 보았습니다. 넉넉하게 담아 오신듯합니다. 훈장은 이제 떨어졌나요?ㅎㅎ 애 많이 써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