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종종 그런 때가 있다. 삶의 위기 같은 것 말이다. 2024년 8월 3일, 바로 그 위기가 나에게도 찾아왔다. 0.3초의 위기라고 해야 할까? 종종 피곤한 졸음을 이기지 못해서 길가에 차를 세워 눈을 잠깐 붙이고 다시 운전대를 잡는 일이 있지만 그날도 새벽에 일찍 깨어서인지 운전하다가 졸음이 찾아와서 할 수 없이 조금 넓은 공간이 보여 차를 세웠다. 가져 다니는 쿠션을 머리에 받치고 잠깐 눈을 붙였을까? 눈이 떠져서 다시 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직 잠은 깨지 않은 가수면 상태였나보다. 졸음운전을 하고 말았다.
그날은 동해안 선교지역 장막회 참석을 위해 청도로 향하던 길이었다. 목적지까지 7km 정도를 남겨놓고 편도 2차선 지방도로를 달리고 있었기에 길은 좁고 피할 길도 별로 없는 외길이었다. 얼마나 운전했는지 기억도 없다. 눈을 뜬 순간 눈앞에 포터 한 대가 나타났다가 긴급히 사라졌다. 그랬다 내가 피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 차가 피한 게 맞다. 만일 그 차가 자기 차선을 고집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상상하기도 싫다. 나는 이미 중앙선을 넘어 상대방 차가 피해 갈 수 없도록 길을 막고 있었고 마치 죽음을 향해 돌진하듯이 자살 특공대처럼 거침없는 역주행을 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상황은 끝이 난 상태였다. 그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 나는 거기서 죽었을 수도 있었구나. 마치 사진기로 찍어둔 스냅사진처럼 위기일발의 그 순간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누구였을까? 피하기 힘든 그 좁은 막다른 지방도로에서 스치듯 죽음의 상황을 피해 갈 수 있도록 핸들을 돌리고 긴급하게 내 눈을 뜰 수 있도록 흔들어 깨우신 분이 ....
장막회 내내 그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장막회 내내 강사의 기별을 듣는 눈물이 나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술람미의 사도행전 갈라 콘서트는 세상에 찌든 내 삶을 향한 끊임없는 채찍질처럼 느껴져서 가슴이 먹먹해 힘들었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큰 사고를 당했지만, 기적같이 구원받고 그때부터 선교사의 삶으로 생애의 방향을 전향한 한 장로님 가정을 알고 있다. 그날 그 사건 후 두 사람은 평생을 하나님만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고 하던 모든 일을 접고 선교사로 떠났다. 세상에서 두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 된 것이다.
AD34년 사도 바울도 다메섹으로 가는 노상에서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낙마하는 사고를 당했다. 뭔지 모를 거대한 빛에 놀란 말이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사울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 최고의 자리를 향해 달려가는 이 완악한 바리새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만 들렸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십자가에 처형되어 죽은 줄만 알았던 사이비 종교 기독교의 하나님, 예수의 음성이었다. “주여, 뉘시오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날, 그 노상에서 사울은 죽었다. 그날 세상을 향한 그의 눈은 감았고 하늘을 향한 눈을 떴다. 다메섹으로 달려가던 그의 길은 이제 방향을 틀고 하늘 예루살렘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길은 세상 곳곳으로 뻗어 나갔다. AD 67년 로마의 어느 이름 모를 길 위에서 아무도 모르게 순교하는 그 순간까지 그는 그 길을 걸었다. 때론 바닷길로 때론 육지에서 거침없이 달렸다. 마지막 참수형 당하던 그 날 그는 비로소 AD34년 처음 예수님을 만나던 그해 산헤드린에서 투석형으로 죽어가면서 미소 짓던 스데반의 천사와 같았던 얼굴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사울이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났던 그 날로부터 1,990년이 지나 또 한 사람의 바리새인이 장막 집회로 가던 길에서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이제 나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할까? 고민이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