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빨치산 남부군 45사단장, 남원 황의지의 삶과 투쟁 <1회>
아침을 여는 창/ 수필가 서호련
( 황의지 자서전 ‘장군의 후예’를 중심으로)
빨치산 남부군은 양민을 괴롭히는 자생적 빨치산 수준이 아닌, 대의명분적 국가관과 엄격한 규율을 갖춘 일사불란한 정규군의 형태와도 같다.
황의지가 말하는, 한국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역사를 담고 있는 이 빨치산전란을 회고하면서 이제 어떻게 하면 남북 간의 갈등과 긴장을 극복하고 통합과 화합을 이뤄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서 지리산을 에워싸고 전투를 벌였던 국군과 경찰은 1만 8 천여 명, 교전회수 1만 717회, 아군 전사자 6,330명, 빨치산의 희생자도 1만 수천 명에 이르렀다.
지금도 지리산엔 이름 모를 계곡마다 묻혀있는 2만여 원혼들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듯하다. 영하 40도의 혹한과 폭설 속 지리산계곡 눈구덩이에서 열흘간을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군경의 포위망을 견데 내고, 혹은 감옥에서 4-50년간을 이념을 변치 아니하고 옥살이를 하는 비전향 빨치산들의 초인간적인 투혼을 보면서 우리 세대의 해이된 국가의식과 정신무장에 대하여도 한번 생각해 보게 한다.
전북도민일보 손민애 기자가 쓴, 영화보다 더 극적인 삶을 살다간 마지막 빨치산 사단장 황의지의 자서전 ‘장군의 후예’의 서평이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박찬두 교수가 황의지(1923~2005)의 3권짜리 평전 ‘장군의 후예’를 세상에 내놨다.
저자는 이미 고인이 된 한국상고사학회 이중재 회장으로부터 우연히 빨치산 중 가장 눈부신 활약을 보인 마지막 빨치산 사단장 황의지를 소개받고, 그의 파란만장한 삶과 그 가문의 비극적인 역사를 들으며 범상치 않은 인물에 매료됐다.
이에 2001년 황의지를 만나 수일간을 직접 녹음을 하기도 하고 넘겨받은 원고와 자료를 토대로 3년여의 작업을 거쳐 원고를 완성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황의지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통해 조국의 비극적인 역사와 이념 갈등의 산물인 지리산 빨치산 전란의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주월리에서 태어난 황의지는 일제 시기와 6·25, 전후 좌우갈등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다.
조선시대 명재상 황희와 명장 황진, 선비 황현의 후예인 그는 아버지가 세운 민족사립학교에서 민족교사들을 통하여 남다른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고취해왔다.
그러던 중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되며, 온갖 수난을 겪게 된다. 일본의 중국 침략군인 중지파견군 일원으로 중국 난징에 주둔하던 중 전쟁은 끝났으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운명은 귀향이 아닌 강제노역. 소련의 전쟁포로가 돼 혹한의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를 전전하며 3년간 석탄을 캐는 채탄수로 일하게 된다.
포로송환협정을 통해 귀국한 뒤에도 고국의 암울한 현실에 부닥친다. 친일 경찰들이 아직도 득세하며 자신을 북한의 간첩으로 의심하는 현실에 분노를 느낀 그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지만 노동당전북도당이 자리 잡고 있는 회문산에 입산하여 전설적인 빨치산으로 활동하게 되고 이현상의 남부군 45사단장 자리까지 오른다.
1593년 2월, 불사조와 같은 그였지만 군경에 생포되었고 그 후 그는 전향해 지리산에 정착했다.
그렇지만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A급 감시 대상자로 분류되어 시달렸으며 전두환 정권 때는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혹독한 시련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지리산을 아끼고 반선마을의 생활 개선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아동 교육에도 남다른 열성으로 헌신하여 전라북도 교육감, 전라북도 도지사의 감사장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저자는 “빨치산 황의지를 통해 빨치산도 우리민족의 한사람이며 그가 품었던 이념은 우리민족이 당시에 품었던 보편적 이념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이제 반복되는 역사적 비극과 남북한 이념의 벽을 넘어 통합과 통일의 그날이 하루속히 이뤄지길 소망한다” 고 밝혔다.
( 송민애기자 서평 재정리)
<서호련 프로필>
- 고대 경영전문대학원 경영학 석사(MBA)
* '한국작가’ 문학상으로 등단.
* 저서 지리산의 새벽.
* 새사도교회 한국교구장, 주교 역임
* 현) 남원지역세무사회 회장
* 현) 남원국일회계사무소 대표. 세무사
♥출처/남원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