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4월 30일(부활 후 네 번째 주일)
마태복음 7:1~14
천국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하십니까?
하늘사랑교회, 소망교회 주일오후 연합예배 설교문
남난희라는 등산가가 쓴 ‘하얀 능선에 서면’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남난희라는 작가가 부산 금정산에서 시작하여 설악산까지 태백산맥을 혼자서, 그것도 눈 덮인 겨울 산을 등산한 경험을 기록한 책입니다.
이 책에서 가장 감명 깊은 대목이 있는데 수십 일을 밤낮없이 혼자 하얀 눈 쌓인 산등성이를 걷다 보니, 사람이 그리워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너무 고독하고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은 작은 눈 사람을 만들어 옆에 두려고 눈을 뭉쳐보았지만, 아무리 뭉쳐보아도 눈사람 모습이 되지 않았습니다. 추운 날씨에 금방 내린 신설(新雪)은 뭉쳐지기를 거부했습니다.
숨 쉬는 사람이 아니어도 좋으니 그냥 눈사람으로만 있어도 좋겠는데, 눈은 사람 모양이 되기를 거부했고, 그 곁에서 그의 고독은 더욱 커갔습니다. 그는 끝내, 너무 외로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답니다.
느낌이 오는지요?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들, 친구들이 늘 옆에 있고, 함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출처: 신만교, 「순례자 영성」(서울: TOBIA, 2020), 50.
마태복음 5,6,7장은 산상수훈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본문입니다. 산상수훈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에는 그 유명한 주기도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먼저, 다 함께 1~2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왜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할까요? 아까 소개해 드린 황 권찰 부부처럼, 비판은 또 다른 비판을 낳을 뿐, 문제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우리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자그마한 티는 잘 발견하면서도 정작 내 눈 속에 있는 큰 들보는 깨닫지 못합니다. 과연 들보가 무엇입니까? 들보는 기둥을 가로질러 큰 집을 지탱하는 크고 두꺼운 목재를 가리킵니다. 우리 몸에 가시 하나만 박혀도 큰 고통을 느끼게 되는데, 정작 내 눈 안에 이런 큰 들보가 박혀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관대하기 때문입니다. 비판하는 사람은 형제의 자그마한 실수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정작 자신이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을 때에는 그것을 감추기 위해 전전긍긍합니다.
또 우리가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이유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이 있을까요? 야고보서 4장 11절과 12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재판자가 아니라, 단지 율법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율법의 준행자일뿐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에게는 이웃을 비판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지 않은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끔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서 다른 교회를 가면 강사로 식사 대접을 받습니다. 한번은 관심법을 하시는 장로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식사를 맛있게 먹고 있는데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어느 목사님이든 그분의 설교를 몇 분만 들어보면 그 설교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은 딱 한 번 들어보니 대단한 분이시네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물었습니다. “장로님을 어떻게 그런 능력이 생기셨어요?”
질문이 멋쩍으신지 “아니 그냥 저는 그렇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야기하는 도중에 그 장로님의 아들이 아주 큰 교회의 부목사님으로 섬기고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짓궂은 질문을 했습니다.
“장로님! 아드님 목사님이 아버지 장로님 같은 교인을 만나는 복을 달라고 기도해 드릴까요?” 그러자 손을 내저으며 “안 됩니다. 목사님! 저 같은 사람 만나면 힘들어서 목회 못할 겁니다.”라며 손사래를 치셨습니다.
우리는 가끔 설교를 들을 때 은혜 받는 자가 아닌 판단하는 자리에 앉는 함정에 빠집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사용하고 계시는 종을 내가 가진 짧은 성경 지식이나 영적 경험으로 판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려 가장 앞자리에 앉아서 마음을 다하는 겸손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하나님께서 종들을 세우시고 성령으로 역사하고 계시는데 한편에서 누군가에게 그 사람의 설교를 판단하는 은사를 주신다면 얼마나 무질서하겠습니까?
-출처: 이동현, 「오늘이 마지막 예배라면」(서울: 교회성장연구소, 2017); 「생명의 삶 플러스」(서울: 두란노, 2023년 4월호), 25에서 재인용.
마태복음 1장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마 1:1-3).”
저는 이 부분에서 마음이 걸렸습니다. “왜 하필 예수님의 족보에 다말의 이름이 나올까?” 솔직히 다말의 이름은 저의 눈에 거슬리는 ‘티’와 같은 이름입니다.
다말이 누구입니까? 유다의 며느리로서, 훗날 시아버지 유다와 잠자리를 같이 하여 아들을 낳은 여인이 아닙니까? 왕이신 예수님의 족보에 이런 부도덕한 일을 저지른 여인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것이 제 눈에는 티처럼 보였습니다.
어디 그뿐이던가요? 성경을 몇 줄만 더 읽어 내려가다 보면, 여리고 성의 천한 기생이었던 라합의 이름도 등장합니다.
또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와 함께 고향을 떠났던 이방 여인 룻의 이름도 등장합니다. 또 다윗 왕과 간통하여 결국 다윗의 아내가 되었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의 이름도 등장합니다.
이런 불명예스러운 이름들이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연약한 여인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강물이 우리에게까지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는 형제의 티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의 슬픔과 상처를 치유하셨고, 오히려 영원한 왕의 족보에 그 이름이 올라가는 영광을 얻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처럼 놀랍습니다. 우리의 눈에 거슬리는 형제의 티가 문제가 아니라, 은혜의 눈으로 형제를 바라보지 못하는 내 눈 안의 대들보가 더 큰 문제였던 것입니다.
6절에서, 예수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의 말은 항상 옳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무언가를 이야기한 다음에는 주로 사용하는 말들이 무엇입니까? “내 말이 틀렸어?”,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잖아!”
정말 우리가 하는 말들 대부분은 진주와 같이 옳은 말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옳은 말이라도 형제를 비판하는 데 사용된다면, 그것은 마치 고귀한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천국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7절부터 11절에서 그 대안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7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무엇보다 기도를 강조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7, 8, 11).”
천국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강조하셨습니다. 특별히 이 기도는 형제를 위한 사랑의 기도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남을 대접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우리 한 음성으로 12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비판하지 말라, 기도하라, 남을 대접하라” 이 세 가지 가르침은 얼핏 보면 서로 연관되지 않은 말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서로 연관된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남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고 싶으십니까? 예수님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남을 비판하게 되면 우리는 남들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게 되겠습니까? 남들로부터 비판의 대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남을 위해 기도하면 우리는 남들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게 될까요? 남들로부터 기도의 대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비판의 대접과 기도의 대접 중 어떤 대접을 받기 원하십니까?
제가 한 가지 더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눈 속에 있는 티는 어떻게 빠질 수 있나요? 손가락으로 후빈다고 눈 속의 티가 빠지나요? 아닙니다. 눈물을 흘려야 빠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말고, 다른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어떻게 빠질 수 있을까요? 어차피 내 눈 아니니까 손가락으로 후벼 파면 될까요? 아니지요. 티는 눈물로 빼야 합니다.
여러분이 눈물의 기도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형제의 티가 보이거든 섣불리 비판하지 말고, 이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눈물로 기도할 때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가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 43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마 5:43~45).”
그렇다면 13절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비판하는 사람은 많다는 의미겠지요?
그러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형제를 비판하는 대신 눈물의 기도를 드리는 자가 그만큼 적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즉,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형제를 비판하는 대신,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이때 비로소 여러분이 속한 가정과 교회와 직장에서 천국 공동체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이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여러분이 “너는 어찌 그 모양이야!”라고 비판하는 대신 눈물 뿌려 기도해야 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교회에는 ‘의의 사도’도 필요하지만 ‘평화의 사도’도 필요합니다. 아마 교회에 비판에 익숙한 의의 사도만 있다면, 교회처럼 살벌한 곳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사랑과 축복으로 기도하는 평화의 사도가 많아진다면, 그 교회는 정말 행복하고 더욱 부흥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젊은 며느리에게 포장이 몹시 꼼꼼하게 된 소포가 왔다고 합니다. 며느리가 얼른 가위를 찾아 포장된 끈을 자르려고 하자, 시어머니가 말리면서 “얘야, 끈은 자르는 게 아니라 푸는 거란다.”라고 말했습니다.
며느리는 포장 끈의 매듭을 푸느라 한동안 끙끙거리면서 속으로 “가위로 자르면 편할 걸, 별걸 다 나무라셔.”라며 구시렁거리면서도 매듭을 다 풀었습니다.
그때,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보며, “끈을 잘라버렸으면 쓰레기가 됐을 텐데, 예쁜 끈이니 나중에 다시 써먹을 수 있겠구나.”라며 천진난만하게 웃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인연도, 관계도 잘라내기보다 푸는 습관을 들어야 한단다.”
혹시 여러분은 잘 풀어도 될 것, 쉽게 잘라버려 소중한 관계를 깨뜨려버린 일은 없으신가요? 이제부터는 얽히고설킨 매듭들이 있다면 실마리를 찾아서 하나하나 풀어가는 자세를 가지십시오.
-출처: 신만교, 「순례자 영성」(서울: 토비아, 2020), 35.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또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을 나도 사랑하고, 주님께서 섬기신 사람을 나도 섬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누군가를 비판하기보다는 주님의 마음과 사랑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섬기셔야 합니다. 형제를 위한 눈물의 기도만이 천국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좁은 문으로 들어가십시오. 형제에 대한 비판을 버리고 눈물의 기도로 형제를 대접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그들로부터 그러한 대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