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말씀의 향기♣ No2589
11월24일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 기념일/연중 제34주간 화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UZLoRHBJYdc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혹독한 고통은 영원한 나라를 보다 적극적으로 준비하라는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아직까지도 교회 교도권에 대한 철저한 불순명과 황당무계한 교리, 유치찬란하면서도 이상야릇한 현상을 강조하며, 점점 더 보편 교회와 멀어져가고 있는 한 단체를, 공동체 형제들과 함께 유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입만 열면 외치는 것이 치유요 기적이더군요. 모든 가르침이나 간증의 전개 방식은 대동소이했습니다.
"중병에 걸려 백약이 무효였다. 절망과 두려움 속에 오늘 내일 하고 있던 중, 은혜롭게도 그분을 만나뵙게 되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던 중, 강렬한 한 줄기 치유의 빛이 내게 다가왔다. 갑자기 끔찍했던 통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박수와 함께 아멘!) 들어올 때 타고 왔던 휠체어는 필요없게 되어 내 발로 걷어 차버렸다! (아멘!) 제대로 걷지도 못했었는데 덩실덩실 춤을 추며 집으로 돌아왔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었는데, 주치의 선생님께서 깜짝 놀라시며 하시는 말씀! 암세포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함성과 함께 아멘!)
나약한 한 사람을 철저하게도 신격화시키고 우상화시키며 교회 분열을 획책하고, 교묘한 방법을 총동원해서 선량한 교우들을 현혹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경고 말씀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루카 복음 21장 8절)
물론 매일같이 여기저기 쑤시고 아픈 사람들, 불치병이나 병이 깊어감에 따라 백약이 무효인 사람들에게 있어 치유라는 것, 너무나 달콤하고 큰 유혹으로 다가옵니다. 여기 저기 나대고 있는 사이비 교주들은 이런 우리 인간의 심리를 이용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라고 보면 정확합니다. 심각한 병고로 인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혹독한 고통, 기도빨이 센 누군가를 만나 순식간에 치유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경우는 로또 맞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갑작스레 찾아온 병고 앞에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노력을 하는게 정답입니다. 첨단 의학의 도움을 받아, 빨리 원인을 찾아야겠습니다. 병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파악해야겠습니다. 전문성을 지닌 의료진들의 판단에 모든 것을 맡기고, 적극적인 치료와 함께 슬기로운 투병생활을 시작해야겠습니다.
물론 그러한 치료 과정에서 신앙은 큰 도움을 줍니다. 난데없이 찾아온 병고를 수용하지 못하고 억울해 하며 밤낮없이 울부짖고 있는다면, 병세는 더 깊어질 것입니다. 병상에서 보다 열심히 기도하며, 모든 것을 주님 손에 의탁하고 마음 편히 지낼 때, 반드시 좋은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마음을 크게, 낙관적으로 먹고, 이왕 다가온 병고를 친구처럼 맞아들이며, 어떻게 하면 잘 다스릴까 고민하고, 의료진들의 권고에 따라 최선을 다해 성실히 환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노력이 곧 치유의 기적을 불러올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전후로 수많은 사람들이 메시아임을 자처하고 등장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마지막 예언자라고 외쳤습니다. 기원후 44~45년경 로마 총독 시대에는 테우다스라는 사람이 나타나 한 바탕 난리를 쳤습니다. “얼마 전에 테우다스가 나서서, 자기가 무엇이나 되는 것 처럼 말하였을 때에 사백 명 가량이나 되는 사람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해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끝장이 났습니다.”(사도행전 5장 36절)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갈릴래아 사람 유다가 나서서 백성을 선동하여 자기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게 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버렸습니다. 한번 당해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거짓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워낙 교묘하고 달콤해서
진의를 식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적극적으로 이용합니다. 그럴듯 하게 자신을 포장합니다.
따라서 어딘가를 갔는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고 애매할 때는 즉시 사목자들의 의견을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에 순종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다 묵시 문학은 세상 끝날을 꽤나 무시무시하게 표현합니다. 전쟁과 반란, 파괴와 질병 등 참담한 광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당시 그와 유사한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 한 가지! 전쟁과 반란, 파괴와 질병 같은 대참사들도 크신 하느님의 인류 구원 계획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가 겪고 있는 바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질병이 곧 종말의 징조는 아닙니다. 참혹하고 끔찍한 일이지만 이 또한 다 지나갑니다. 그런 혹독한 고통은 다가올 영원한 나라를 보다 적극적으로 준비하라는
하느님의 초대이기도 합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칼이 무뎌지면 적이 활개를 친다>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7NVGqDjwgHw
------------------
오늘 복음도 역시 종말에 관한 말씀이십니다. 몇몇 사람이 성전의 화려함에 대해 말합니다. 이는 내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외적인 화려함에 사람들이 집중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 성전이 멸망하는 과정이 세상의 멸망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표징은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큰 자연의 재앙이 올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재앙을 넘어 하늘의 무서운 일들과 표징들이 일어나면 그때가 마지막입니다.
온 세상은 하나의 커다란 성전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이 외적으로는 화려하겠지만 하느님을 버리게 되는 때가 올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과정에서 무엇이 먼저 일어나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려주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스도는 ‘진리’이십니다. 이 말은 세상과 교회 안에서 먼저 진리가 흐려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교회가 명확한 진리를 알려주고 있지 못하면 교회는 물론이요, 세상도 거짓 그리스도들에게 속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진리가 흐려져 무엇이 진리인지 구분하지 못하게 되면 그때 전쟁도 잦아지고 자연재해도 잦아질 것입니다.
1992년 9월 11일 추석, 경상남도 마산에서 조상님 산소에 갔다가 내려오던 한 사람이 고압선 철탑에 무언가 매달려있는 것을 봅니다. 30대 젊은 여성이 목을 매어 자살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쓴 유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10월 28일을 앞두고 세상 살기가 싫어졌어요.”
인천의 한 산부인과에서 또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산부인과 의사가 30대 임산부를 설득 중이었습니다. 낙태 수술을 하겠다는 여인을 말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10월 28일에는 아이가 있으면 안 돼요. 무거워서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거든요.”
이번엔 군포에서 엄마, 아빠와 삼 남매가 한꺼번이 사라진 일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10월 28일이 되면 이런 것들은 아무 필요가 없어져요”라고 하며 집안의 모든 가재도구를 친척들에게 나누어주고 어디론가 사라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데에는 한 목사가 쓴 책이 주요했습니다. 성산동 ‘다미선 교회’의 ‘이장림 목사’이고 그가 쓴 책이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였습니다. 휴거 이후 7년 대환란(3차대전과 대학살)으로 50억 명이 고통 중에 죽게 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노스트라다무스가 1999년 인류의 멸망을 말한 것에 빗대어 7년 환난이 시작되는 때는 1992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오셔서 십억 명을 하늘로 들어 올릴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도들은 이 예언이 맞는다는 꿈을 꾸어 간증하였습니다. 여기저기 교회들이 이 예언에 가세하기 시작하며 약 10만 명의 개신교 신도들이 1992년 10월 28일 24시에 휴거되기 위해 준비하였습니다.
이장림 목사의 책 마지막 구절은 이렇습니다.
“당신은 종말을 위한 마지막 카운트다운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모르는가? 이것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고도 구원받을 기회를 놓친다면 그것은 당신의 책임일 것이다.”
10만 명이란 인원은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닙니다. 이렇게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정부는 이장림 목사를 잡아들였습니다. 그의 통장엔 신도들이 낸 돈 약 34억 4천만 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는 자발적으로 신도들이 낸 것이기에 그것으로는 기소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사기 혐의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다 그의 집에서 채권이 발견되었는데 만기일이 1993년 5월 22일이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이장림 목사는 그것은 자신은 휴거가 되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기에 이 환란의 때에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활동비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증거로 그에게 사기죄가 적용되어 구속되게 됩니다.
이것으로 사람들이 휴거를 믿지 않게 되었을까요? 더 많은 신도가 교회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예언자라 믿는 이가 박해받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미선 교회에서는 휴거 되는 사람들에게 출입증을 주어 그 사람들만 흰옷을 입고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수많은 인파와 기자들이 다미선 교회에서 휴거가 일어나는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휴거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현재 이장림 목사는 이름을 바꾸고 어디선가 또 교회를 이끌고 있다고 합니다.
[출처: ‘10만 명을 겁에 떨게 한 증발 사기극’, 꼬꼬무 6화, 유튜브 SBS NOW]
이장림 목사의 주장에 기름을 부었던 사건은 1991년 초에 일어났던 걸프전이었습니다. 최초로 TV로 생중계되는 전쟁의 참상은 많은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했습니다. 그런데 1992년 10월 28일 자정에 이장림 목사는 감옥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고 합니다.
악의 세력을 알아보는 것은 단순합니다. 분명 그들은 진리를 말한다고 하면서도 돈을 추구하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성전이 금으로 되어 있고 귀한 돌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자랑했던 것과 같습니다. 세상 것을 좋아하면 진리의 칼은 무뎌집니다. 그러면 수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날 것이고 더불어 수많은 자연재해와 전쟁, 사건·사고의 소식이 들릴 것입니다.
누군가 나의 칼이 무서워 덤비지 못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무도 자를 수 없는 무딘 칼이라면 마구 덤벼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의 환란 전에 가짜 그리스도들이 많이 생겨날 것이라고 하신 이유는 이것을 의미합니다. 진리의 칼이 무뎌질 때 악의 세력들이 넘쳐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우리가 다른 그리스도교 종파들이나 사이비들의 교리에 속아 넘어갈 것을 걱정할 정도로 교리 지식이 얇아졌을까요? 우리 교회의 진리의 칼이 무뎌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공격으로부터 두려워 떨기 이전에 나의 칼부터 점검해야 합니다. 어떤 공격도 두렵지 않은 말씀과 교리로 무장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과 세상을 위해 지금 회개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남이 휘두르는 칼에 겁먹지 말고 내 칼이 날카로운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21,5-11: 예루살렘의 멸망 예고
오늘 복음에서 보면, 어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과 화려함에 감탄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그 성전이 돌 위에 돌이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파괴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로마가 성전을 무너뜨리고 예루살렘을 불태울 것이며 이스라엘은 주님을 살해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뒤 이 모든 일을 겪어야 했다.
성전이 언제 무너질 것이며 당신께서 오시기 전에 어떤 표징들이 나타날 것이냐는 질문에, 주님께서는 그 표징들에 대해 일러 주시며 그때가 언제인지는 알려주시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많은 사람이 오류에 빠져 참된 믿음을 버리고 떠나갈 것이다. 그러면 마침내 주님의 날이 올 것이다. 주님께서 첫 번째 오심은 속죄를 위해서였고 두 번째 오심은 더 많은 이가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주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일어날 일을 알려주시며 그들에게 경계하라고 하신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8절)고 하신다. 두 번째로 오실 때에는 비밀리에 오시지 않고 무시무시하고 화려하게 오실 것이다. 세상을 정의로 심판하기 위하여,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내려오실 것이다.
하느님은 참으로 진실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미리 말씀해 주셨다. 또 모든 말씀을 읽고 들었다. 우리는 언제 종말이 오는지 우리 모두 들었다. 그때에는 전쟁과 지진과 환난과 기근이 일어날 것이다(마르 13,7-8). 그러므로 우리는 모순된 행동을 하고 있다. 이런 일에 관한 말씀을 읽을 때에는 그 말을 믿다가 막상 그 일이 일어나면 불평을 늘어놓곤 한다.
마지막 날에 민족과 민족이 맞서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날 것이다. 너희가 전쟁과 지진과 기근을 보게 되거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라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종말이 가까웠을 때, 일어날 표징들을 알려주신다.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고 하신다.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다.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마태 24,19)
‘예루살렘’하면 하느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셨고 당신 백성들과 만나신 얼마나 유서 깊은 곳인가? 그런데 그토록 파멸을 당했다는 사실은 당신의 어느 한 마디도 헛되지 않다는 교훈을 주는 것이며, 또한 예루살렘처럼 회개하지 아니하고 자기중심적으로 하느님을 따른다고 할 때에 이러한 파멸을 우리 자신도 당하게 될 것임을 경고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벌주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뜻을 역행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그 길을 가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언제나 주님의 뜻에 귀 기울이고 그분 안에 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무부처장) 신부님]
종말에 대한 성경 말씀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거짓 예언자들에 대한 언급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는 내용을 전하는 이들인데, 그들이 종말 때에만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거짓 예언자들의 그릇된 예언을 경고합니다. 참된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는 선포하는 말씀이 실현되는지 여부에 따라 구분됩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종말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종말이 언제 그리고 어떻게 오는지에만 관심을 둡니다. 어쩌면 두려움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인지도 모릅니다. 말 그대로 이 세상의 끝을 뜻하는 종말을 성경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소개합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지진과 전염병이 생겨나며, 하늘에는 표징들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표현으로 종말은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고 구원의 완성을 나타내기도 하기에, 두려움의 시간만이 아니라 희망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올 종말을 준비하기보다는 ‘지금’ 종말처럼 살아야겠습니다. 신앙인들은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미래에 있을 종말에 대비하여 삶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 마치 종말의 때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인에게 ‘언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종말에 관한 말씀은 우리가 현재의 삶에 좀 더 충실하도록 초대합니다.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회개하라는 경고>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5-6)
1)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실 때,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46)라고 꾸짖으셨습니다. ‘강도들의 소굴’로 전락한 성전은 없애는 것이 마땅합니다. (성전이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라는 말씀을, 허례허식으로 가득 찬 예배는 종식될 것이라는 예고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2) 하느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언젠가 종말이 완성되면 모두 소멸될 것입니다. 인간들이 자랑하는 문화, 문명, 학문, 예술, 과학 기술 등도 모두 그렇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하느님 뜻에 합당한 것은, 즉 참되고 선한 것은 모두 남아 있게 될 것이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루카 21,8-9)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루카 21,10-11)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짜 메시아와 종말론자들의 등장, 전쟁, 지진, 기근, 전염병, 어떤 천문학적 현상들은 ‘종말의 표징’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늘 있었던 재난들입니다. (‘종말의 표징’은 아니고, 회개하라는 경고입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라는 말씀은, 사이비 종교의 주장에 현혹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뜻인데,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은 자신들이 ‘재림 예수’ 라는 주장과 종말에 관한 주장입니다. 지난 이천 여 년 동안 그런 주장을 하는 사이비 종교가 끊임없이 등장했다가 사라졌고,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재림의 날’에 관해서,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루카 17,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번개가 치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누가 그것을 알려주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저절로 그것을 볼 수 있고 알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재림하시는 모습에 관해서는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루카 21,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권능과 영광’을 떨치면서 영광스럽게 재림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 누구나 그분이 심판관으로서 재림하시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다.” 라고 말씀하실 필요가 없고, “오늘이 바로 ‘재림의 날’이다.” 라고 알려줄 필요도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내가 그리스도다.’, 또는 ‘내가 재림 예수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백 퍼센트 가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날이 언제인가?”에 관해서는,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만 아신다(마태 24,36).” 라고 말씀하셨고, 또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24,50) ‘재림의 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르고, 미리 계산하거나 예측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자기들 마음대로 종말의 날짜와 시간을 계산해서 말하는 종말론자들의 주장은 백 퍼센트 거짓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전쟁, 지진, 기근, 전염병, 어떤 천문학적 현상들을 겪으면 흔히 “종말의 징조인가?”라고 생각합니다. 종말의 징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우선 먼저 회개부터 하는 것이 당연한데, 회개는 하지 않고 피하려고만 하고, 달아나서 숨으려고만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의 심판을 피해서 숨으려고 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지만, 회개하지 않는 것이 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다가 그런 일들이 지나가고 나면, “종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라고 안심하고, 그러면서 방심하고, 마음이 풀어져 버립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계속 그런 식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런 재난들이 종말도 아니고, 최후의 심판도 아니고, 종말의 징조도 아니지만, 바로 그런 재난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들에게는 그 일이 사실상 종말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야고 4,13-15)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느님께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지 않으면 연기처럼 사라지는 허무한 존재일 뿐입니다. 반대로, 하느님께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면, 하느님과 함께 참 생명을 누리면서 사는 영원한 존재가 됩니다.>
“전 지구적인 대재난들이 종말의 징조는 아니다.”, 또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같은 말을 듣고서 “종말이 곧 닥치는 것은 아니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생각은 오해이고 착각일 뿐입니다. ‘그날’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모른다는 뜻일 뿐입니다. 오늘이 그날일 수도 있고, 내일이 그날일 수도 있습니다. 대재난들이 종말의 징조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그것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바로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
[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14년에 ‘왕가네 사람들’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습니다. 건전한 가족드라마였습니다.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데 극중 할머니가 가족들에게 하던 대사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6.25를 겪은 사람은 5백만 명이 안 될 정도입니다. 90% 이상의 국민은 6.25 이후에 태어났습니다. 저도 6.25가 끝나고 10년 뒤에 태어났습니다. 할머니께서는 6.25의 참상을 다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가족들이 함께 지내면서 벌어지는 사건과 사고를 6.25 때의 난리와 비교합니다. 과장된 면이 있지만 할머니는 요즘 아이들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2020년 코로나를 겪으면서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을 것 같습니다.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다.” 박해 중에도 있었던 미사가 중단되었습니다. 교회의 가장 거룩한 전례인 사순과 부활을 교우들과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있는 미국도 가장 많은 확진자가 발생하였고, 한국에서 안부를 묻는 전화를 받아야 했습니다. 유럽은 확진자가 증가하면서 제2의 코로나가 시작되고 있다는 불안감이 생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스크 착용이 일상이 되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닌 코로나19가 사라질 수 있도록 백신과 치료제가 나오면 좋겠습니다.
지구의 역사는 40억 년이 넘는다고 합니다. 생명의 역사는 30억 년이 넘는다고 합니다. 30억 년 생명의 역사에서 5번의 ‘멸종’이 있었다고 합니다. 유성의 충돌, 지진과 화산 폭발이 멸종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빙하기와 같이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생명이 멸종되었습니다. 90% 이상의 생명이 멸종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한 생명의 멸종은 다른 생명에게는 기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공룡이 멸종되면서 지구는 포유류의 세상이 되었고, 포유류의 한 종인 인간이 출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매년 5만 종 이상의 생명이 멸종되고 있다고 합니다. 멸종의 원인이 인간인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코로나19는 인간과 다른 생명이 서로 공존하라는 자연의 경고라고도 합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이른 새벽을 볼 수 있는 것은 커다란 축복입니다. 그것은 매일 부활하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걷히고 새벽빛이 밝아오는 것을 보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이른 아침에 1시간을 기도하는 것은 하루를 풍요롭게 살 수 있는 밑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어둠이 아무런 조건 없이 아침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을 봅니다. 기꺼이 비울 수만 있다면, 나눌 수 만 있다면 하루의 끝이 아쉬울 것 없습니다. 삶의 끝도 걱정될 것이 없습니다. 빈손으로 왔으니, 빈손으로 가는 것도 감사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걱정 때문에 지금 기쁜 마음을 날려 버리지 마십시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별로 없으니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다만 오늘을 충실하게 살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미 지나간 과거로 기억 될 것입니다. 오늘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 남게 될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복음을 보면, 예루살렘 성전을 보고 감탄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 성전이 허물어지리라고 예언하십니다. 이어 하늘과 땅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일들과 참혹한 시련을 경고하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묵시 문학의 영향을 받아 역사를 현세와 내세로 나누었습니다. 현세는 점점 악으로 물들어 가다 망하리라고 단정합니다. 그 뒤, 내세가 오면 이스라엘이 군림하게 되리라 믿었지요.
내세, 곧 새로운 세계를 맞으려면 진통의 시간이 필요한데, 이 시간은 사람들에 대한 심판을 곁들여 천재지변과 같은 공포의 날처럼 갑자기 올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한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리라고 확신하며, 새로운 세계를 맞기 위한 진통의 시기와 예수님의 재림 시기를 함께 묶은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는 두려운 일들이 일어난다고 여긴 것이지요.
이런 생각들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상한 자연 현상만 겪어도 일부 사람들은 이를 세상 종말과 하느님의 심판으로 연결하지요. 그러다 보니 오늘 복음처럼 자신이 메시아라고 외치는 사람들마저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대의 징표를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겪어야 할 핍박입니다. 덧붙여 예수님께서는 절대 두려워하지 말라고 용기를 북돋워 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떤 처지에 놓이든지 결코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되며, 어려운 고비마다 주님께 더욱 매달려야 하겠습니다.
=====================
[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 성전은 웅장하고 화려하였습니다. 성전 현관 기둥들은 흰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고, 순금으로 만든 큰 포도나무로 성전 전체를 꾸몄다고 합니다.
이 순금 포도나무의 포도송이가 사람만큼 커서 멀리서 성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성전이 마치 순금의 눈으로 덮인 산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사람들이 감탄하고도 남을 듯합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웅장하고 화려하게 성전을 꾸미고 하느님께서 참으로 이곳을 사랑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웅장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신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르게 생각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웅장하고 화려한 겉모습을 보지 않으시고 그 내면을 들여다보신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화려한 성전, 웅장한 성전을 지으면서도 그 내면에 불의함과 부정함이 가득 차 있던 유다인 지도자들을 향하여, 이 예루살렘 성전과 더불어 그들 모두가 파멸하게 되리라고 경고하신 것도 이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예언은 적중합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후 70년 로마군의 공격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고 성전 기물은 모두 약탈당하여,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부유하고 힘이 세다 하더라도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먼지처럼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와 그 임금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박해받는 초기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의 종말은 그다지 멀지 않은 사건으로 여겨졌습니다. 당시에는 예수님 재림의 희망이 가득 찼고, 죄악과 죽음에 대한 그분의 궁극적 승리의 선포는 박해를 견디고 신앙을 지키는 힘이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 전쟁과 반란, 큰 지진, 기근과 전염병 등의 표징들이 나타날 것을 예언하신 말씀을 떠올리던 제자들에게 세상의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은 곧 완성될 세상에 대한 희망이었습니다.
박해의 상황은 로마 제국에서 그리스도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고, 교회가 로마 제국에 선포되면서 끝났고, 어떤 교부들은 이것이 예수님 복음의 승리라고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2천 년의 역사 속에 교회는 다시 세속의 질서에 편입되어 복음의 순수성을 잃고 권력과 결탁하여 부패의 온상이 되기도 하였고, 중세 말 마르틴 루터는 종교 개혁 당시 교회 권력에 탐닉한 교회 지도자들과 이를 둔 투쟁의 상황을 세상 종말의 표징으로 보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세기말의 종말론과 시한부 종말론, 요한 묵시록을 재해석해서 재림 예수를 자처하는 수많은 이단들이 교회를 위협하고 신자들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에서 낫과 불로 나타난 하느님의 분노는 진리를 왜곡하는 이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새로운 형태의 박해와 교회 분열의 시도, 인간이 신이 되고 싶어 하는 과학적 무신론의 흐름은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종말은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완성이고 종결이며 하느님의 궁극적 승리의 선포입니다. 언젠가 맞이할 우리의 종말에 대한 두려움보다 하느님 안에서 완성될 생의 희망을 기억하고 선포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임을 잊지 맙시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부님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올해 처음으로 본당 신부를 나간 신부가 이런 말을 합니다. “본당 신부가 이렇게 힘든 줄 몰랐어요. 저의 의도를 알고 좋아할 줄 알았는데, 저를 싫어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저도 사랑만 받는 신부가 되고 싶은데, 그렇게 인기만을 추구해서는 사제 양심상 도저히 그럴 수 없네요. 너무 힘들어요.”
그러자 어느 선배 신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환영받는 사람은 딱 한 부류밖에 없어. 바로 사기꾼이야. 사기꾼은 자신의 사기 의도가 노출되지 않게 하도록 모든 이에게 환영을 받도록 만들거든. 그래야 사기를 치지. 너 사기꾼이 되고 싶어? 아니지? 그러면 딱 30%의 지지만을 목표로 살아. 그 정도로도 잘 사는 거야.”
어느 책에선가,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은 30%, 싫어하는 사람도 30%,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이 40%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100%의 지지는 예수님도 얻지 못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100%의 지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요구를 채우지 못해서 아프고 힘들다고 말합니다. 100%의 지지는 사기꾼만 가능한데도 말이지요.
오늘 복음의 장면은 성전에서의 마지막 설교에 관한 부분입니다. 사람들이 아름다운 성전을 보며 감탄의 이야기를 하자, 주님은 성전과 예루살렘의 파괴와 함께 세상의 멸망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사실 처음부터 세상 종말에 관해 이야기하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공생활 중에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셨고, 그 표징으로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과 같이 강력한 말씀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사람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라면서 자신의 변화보다 놀라운 표징을 보고 싶은 욕심만을 표현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 사람은 얼마나 되었을까요? 아마 30%의 지지도 없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몇몇 사람만이 예수님 곁에 남아 있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모든 이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사기꾼과는 차이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지했던 종교지도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에게 유익한 생각만을 사람들에게 제시하고, 하느님 말씀보다 인간이 쓴 글을 강조하면서 거의 모든 이의 지지를 끌어냈습니다.
그러나 이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거짓 예언자의 모습일 뿐입니다. 사기꾼이 아닌 참 그리스도를 쫓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우리도 더는 사기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비난도 주님을 위해서라면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
<진실한 이야기>
화려하고 매력적인 옷을 입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지요.
그녀의 옆에 또 다른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도 매력적이지만 초라한 옷을 입고 있는 그녀에게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초라한 옷을 입고 있는 그녀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은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으니 나눠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화려한 옷을 입은 여인에게 옷을 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여인은 흔쾌히 허락했고, 초라한 옷을 입고 있던 여인 역시 화려한 옷을 입고 함께 거리를 나갔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두 여인 모두에게 관심을 보였습니다. 초라한 옷을 입고 있었던 가난한 여인의 이름이 진리(truth)라 하고, 처음부터 매력적인 옷을 입은 여인의 이름은 이야기(story)라 한답니다. 즉, 이야기는 진리에 생명을 불어넣는 숨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진리 역시 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는 숨입니다. 바로 이때, ‘진실한 이야기’(true story)’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진리를 세상에 밝히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선포만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선포 전에 이야기(story)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진리에 이야기를 담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이야기에 나의 생활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모든 행위가 담겨 있어야 할 것입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휘둘리지 않는 삶>
예루살렘 성전은 기구한 운명을 겪었습니다. 세 번에 걸쳐서 세워지고, 세 번 무너졌습니다. 첫 번째 성전은 가장 화려한 왕권을 누린 솔로몬 왕 때 건축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죽고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게 되었으며 남 유다는 기원전 587년 바빌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성전은 무너졌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노예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 후 기원전 538년 바빌론을 제압한 페르시아의 키루스 황제에 의해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환 이후 제일 먼저 성전을 재건합니다. 그러나 이 제2의 성전 또한 기원전 170년 경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점령되고 맙니다. 시리아왕은 유다인을 말살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유다교를 핍박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폐허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성전 한가운데 제우스 신의 제단을 세우고 유다인들이 가장 부정하게 생각하는 돼지고기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습니다. 그 후 시리아가 멸망하고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써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로마의 헤로데왕은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의 성을 다시 화려하게 증축합니다. 이 성전이 다시 폐허로 변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예언을 하셨는데 오늘 복음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35년경 전후이고, 기원후 70년경 성전은 또다시 로마에 의해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예루살렘 성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유다인들 전체가 나라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이스라엘로 정착하기까지 유다인들은 참으로 험난한 길을 걸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아직 복원되지 못하고 그 자리에는 이슬람 사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다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의 성지로써 의미 깊은 땅이 되어 있습니다. 그토록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폐허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충만하였지만 하느님을 외면하고 은총을 담을 그릇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총을 받고도 감사하지 못하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언제 그런 재앙을 맞게 될지 모릅니다. 깨어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실 예루살렘이 스스로 돌아보고 회개의 길을 걸었더라면 멸망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앞서 겪게 될 환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헛된 예언자가 나타나고,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가 등장하며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과 기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 했습니다. 세상의 종말은 결국, 혼란을 겪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결코 헛된 예언에 속는 일이 없도록 하고 큰 표징들에 무서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사실 마음이 추우면 몸도 춥고 남도 추워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내가 평정을 지키고 있으면 바깥바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진대 어떤 표징이 일어나면 어떻고, 종말이 오면 어떻습니까? 그저 오늘을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작은 불은, 바람 앞에서 쉽게 꺼지지만, 큰불은 바람 앞에서 활활 탑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큰 사람은 환난 앞에서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런저런 소문으로 휘둘리지 않습니다.
소문의 사실과 진실을 살핍니다. 이렇게, 저렇게 쉽게 판단하고 단정 지으며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세상 종말에 앞선 외적인 혼란을 두려워 말고 오히려 마음 안에 평온이 없음을 염려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종말이 어떻게 오느냐를 걱정하기보다 현재의 내 삶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살펴야 할 때입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구원의 시대를 이미 살고 있고, 아직 그 완성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미래를 희망하면서 오늘을 최선으로 살 수 있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의 아마추어’가 아닌 ‘삶의 프로’가 됩시다.>
-한결같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삶의 프로, 삶의 성인’-
“만추晩秋의 수도원 아름다운 하늘길 축복 선물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사랑하는 자매님(형제님)!”
어제 여러분들에게 보냈던 메시지와 더불어 황홀한 아름다움의 만추의 하늘길 사진입니다. 보이는 세상이 이렇듯 아름답다면 보이지 않는 우리 궁극의 미래인 하느님 나라는 얼마나 아름답겠는지요! 오늘도 피정중이지만 시간을 내어 못보낸 분들에게 사랑의 선물을 할 작정입니다.
‘곱게 늙기’는 피정 주제인데 참으로 곱게 늙기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만추의 아름다운 수도원 하늘길 풍경입니다. 빛과 단풍의 절묘한 조화가 빚은 하느님의 살아 있는 작품처럼, 우리 인생도 은총의 빛과 순리대로의 한결같은 삶이 조화를 이룰 때 ‘곱게 살고 곱게 늙다가 곱게 죽기’의 아름답고 고운 삶과 죽음의 인생이될 것입니다. 말 그대로 삶의 아마추어가 아닌 삶의 프로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은 베트남의 순교자들,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를 포함한 117명 동료 순교성인들의 기념일입니다. 순교성인 현황은 베트남인 96명(사제37, 평신도 59), 외국인 21명(스페인 도미니코 수도회 출신 주교6, 사제5, 프랑스 외방 선교회 주교2, 사제8)입니다. 참으로 우리나라 가톨릭 교회의 박해 역사와 흡사한 역사를 가진 베트남입니다. 17세기에서 19세기 까지 3세기에 걸쳐 1만여명이 순교자들을 배출한 베트남 가톨릭 교회입니다.
참으로 잔인하고 잔혹한 갖가지 고문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순교의 죽음을 맞이했는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무엇보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 민주화 역사의 빛나는 성취로 이런 일체의 고문이 없어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격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어느 순교한 베트남 신학생이 쓴 감동적인 편지중 끝부분만 인용합니다.
“만일 우리가 현세에서 다시 못 본다해도, 내세에서 우리가 흠없는 어린양의 옥좌 앞에 서 있을 때 이것은 우리의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승리의 기쁨에 환호하며 그분께 한 목소리로 찬미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그 엄혹한 순교 상황에서도 승리의 기쁨을 앞당겨 살며 곱고 품위있게 죽음을 맞이한 젊은 순교 신학생입니다. 오늘 복음이나 제1독서의 묵시록은 종말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모두가 의도하는 바는 결코 우리에게 공포의 두려움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깨어 하루하루 종말론적 삶을 살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언젠가의 심판이 아니라 오늘이 바로 심판의 날이자 구원의 날인 것처럼 생각하여, 하루하루 한결같이 깨어 곱게 살다가 곱게 늙어 곱게 죽자는 것입니다. 오늘의 현재는 내일의 미래입니다. 오늘 최선을 다해 깨어 곱게 살면 내일의 미래는 전혀 걱정 안해도 됩니다. 내일은 내일이 잘 해결해 줄 것이니 바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의 때가 왔습니다.”
언젠가의 죽음으로 인생 수확의 때가 이르기 전 우리가 할 일은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하루하루 내적성장과 성숙의 여정에 충실하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일체의 유혹에 휘말리지 말고 어떤 상황에서도 무서워하지 말고 제 삶의 자리에서 충실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결코 부화뇌동, 경거망동 하지 말고 제 삶의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하며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이들은 하루하루가 종말이요 그 종말은 어둠이 아니라 희망의 빛, 구원의 빛으로 활짝 열린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짙은 구름속에서 배어 나오는 태양빛이요, 밤의 어둠이 깊어갈수록 가까워지는 일출의 빛나는 태양입니다. 희망과 기쁨의 구원을 상징하는 태양입니다. 이런 태양같은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 때 일희일비함이 없이 깨어 한결같이 곱게 살 수 있습니다.
어느 삽화가의 잔잔한 고백이 감동적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한결같은 노력으로 자기 경지에 이른 분입니다. 정말 아름답고 한결같은 삶의 프로입니다. 저절로 ‘프로는 아름답다!’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하지만 남들의 속도에 더는 흔들리지 않아요. 자기 증명에 대한 강박에서도 놓여나고요. 얼핏 무의미해 보이는 노력의 시간이 가져다 준 결과예요. 스스로 설득이 되는 지점까지 노력해본 자가 가질 수 있는 고요이지요. 자기를 끝까지 소진하면 오히려 결과에 겸허해져요. 더 할 수 있는 노력이 없을 때까지 해보면 남들이 뭐라든 스스로 인정할 수 있어요.
저의 눈에 반짝이는 작가들이 보여요. 자유롭고 거침없이 그리는 작가들이요. 배가 아프죠. 샘도 나요. 그런데 그게 전부예요. 며칠 질투하다 제자리로 돌아와요. 정보의 이해를 돕는 데에 최적화된 저의 그림체는 오랫동안 평범하다는 평을 들어요. 하지만 그것이 내 것이예요. 삽화가로 부단히 애쓴 10년이 만들어준 소중한 내 것이죠. 빛나는 재능을 가진 이들처럼 일필휘지로 그리지 못하지만, 제 책이 자랑스러워요.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고. 이것이 내가 만들 수 있는 최상의 것임을 알기 때문이에요.
온 힘을 다해 뛰어도 우리는 여전히 자기 자신밖에 되지 못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 볼 필요가 있어요.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윤곽을 확인하기 위해서요. ‘여기까지가 한계이고, 너는 최선을 다했어’라고 자신이 설득되는 지점을 찾기 위해. 경계에 울타리를 세우면 비로소 안심할 수 있는 마음이 있고, 보이는 소중함이 있어요.“
(한겨레;11월21일 ‘돌파하는 힘-유설화 삽화가)
이렇게 긴 개인의 인터뷰 기사를 인용하기는 처음입니다. 너무 아름다운 프로의 삶에 감동했기 때문입니다. 최선을 다해 제크기, 제모습, 제색깔, 제향기로 참나를 살 때 비로소 주님을 닮아 삶의 프로요 삶의 성인입니다. 우리 모두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한결같고 아름다운 삶의 프로, 삶의 성인이 되어 곱게 살다 곱게 늙다가 곱게 죽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루하루 한결같고 아름다운 삶의 프로, 삶의 성인이 되어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분이 오신다. 주님 앞에서 환호하여라. 우리를 다스리러 오신다. 그분은 우리를 의롭게, 진리로 다스리신다.”(시편96,13). 아멘.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세상 종말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5)
몇몇 사람이 성전 외양을 보면서 감탄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용을 충실히 보여주기 위해서 외형을 갖추는 것도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내면에 있지요. 우리가 감탄하고 경외하며 찬양해야 할 존재는 성전 건물이 아니라 성전 안에 계신 분이십니다.
육적 감각에 의존해 사는 이들은 감각을 통해 들어온 겉모습에 묶여 그 안으로 들어가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삶의 본질을 만나려면, 사물과 사건 표면에 그려진 정보에 매이지 않고 그 외피를 관통해 들어가서, 그 안에 새겨진 본질을 직면해야 합니다. 영적인 시각은 본질을 보면서 다듬어지고 향상되어 갑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 무서워하지 마라."(루카 21,8-9)
뭇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던 성전의 호화로운 장식들이 다 허물어진다고 하시니, 사람들이 놀라서 그때가 언제인지, 무슨 표징으로 알 수 있는지 여쭙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에 대한 즉답이 아니라, 그들이 그때를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 권고하십니다.
통제할 수 없는 자연재해, 증오와 폭력이 부른 전쟁, 그리고 생명과 관계를 파괴하는 전염병이 삶의 외연을 깨뜨릴 것이지만, 그에 못지않은 위험은 영혼을 속이고 기만하고 절망으로 이끌려 내면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악입니다. 하느님께서 섭리 안에서 준비하신 일을 인간 힘으로 막을 수는 없지만,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평생을 사랑하고 믿어 온 주님께 충실한 마음을 간직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추수와 수확의 장면이 펼쳐집니다. 묵시문학에서 곡식이나 열매의 추수와 수확은 종말에 이루어질 일을 뜻합니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묵시 14,15)
"포도가 다 익었습니다."(묵시 14,18)
그때는 주님 보시기에 세상이 무르익은 때일 겁니다. 인간의 선업과 덕행의 열매도 익어가지만, 죄악과 탐욕도 함께 농익어 곪을 지경에 이르렀을 겁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낫을 대실 수밖에 없는 순간이 된 겁니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여라. ... 모두 기뻐 뛰어라. ... 모두 환호하여라. ... 그분이 오신다. ... 세상을 다스리러 그분이 오신다."(화답송)
그저 듣기에도 무시무시한 종말의 장면이 독서에서 펼쳐지는데, 그에 대한 시편저자의 응답은 이처럼 기쁘고 환희 넘칩니다. 독서와 화답송의 이 상반된 분위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오늘의 화답송 시편은 종말이 파괴, 심판, 징벌과 함께 닥치리라는 글자들의 외피를 뚫고 들어가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마지막 날은 이 모든 것들로 분명 두렵고 혼란스럽겠지만, 본질에 도달하기 위해서 껍질들은 허물어지고 무너지고 사라져야 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날은 우리가 지상 삶의 지난했던 마라톤을 마치고 사랑하는 주님을 해후하는 사랑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또 온갖 부조리와 불공정이 판을 치던 이 세상에 비로소 주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경사롭고 축복 가득한 날이 될 것입니다.
그날에는, 겉꾸미던 모든 허세와 장식, 가면들은 벗겨지고 진정 알맹이만 남겠지요. 고이 간직하고 정성껏 닦아 매만지며 아름답게 피워온 영혼의 정수가 맑고 밝게 빛을 내면, 주님은 우리를 한눈에 알아보실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영혼의 본체이신 그분 안으로 익숙하게 잠겨 들겠지요.
기후변화, 코로나19 전염병, 차별과 폭력의 문화가 우리 문턱까지 들이닥친 요즘입니다. 그동안 미덕으로 알고 누리던 좋은 문화들을 잠시 멈추고 새 패러다임에 적응해야 하는 혼돈의 때이기도 하지요.
이 동요와 어둠을 틈타, 분열과 두려움을 조장하는 온갖 소문과 위협이 존재를 흔들려 다가오더라도 관심을 주지 않아야 합니다. 어차피 오게 되어 있는 그날은 반드시 올 것이니까요. 악은 우리의 두려움을 먹고 커가니, 그저 흘러가게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조심하여라, 따라가지 마라. 무서워하지 마라" 하시는 주님 목소리를 기억하고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하실 일은 기꺼이 받아들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충실히 하면서 시편저자와 함께 기쁨과 설렘으로 주님을 기다리면 좋겠지요. 이렇게 주님의 날을 기다리며, 우리의 한 해도 마무리가 되어 가는 중입니다. 새해를 기다리는 이 마지막 한주간이 내면을 정화하고 튼튼히 다지는 시간 되시길 축원합니다.
=====================
[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성경이 바로 천상적 음식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 독서 중에도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게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성경을 사랑하라, 그러면 지혜가 당신을 사랑할 것이다. 지혜를 사랑하라, 그러면 지혜는 당신을 안전하게 지켜 줄 것이다. 지혜를 존경하라, 그러면 지혜는 당신을 포옹할 것이다.”(성 예로니모 347~420)
♣성도들에게 성경(하느님 말씀)은 언제나 탁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성경은 우리의 전 삶을 지배해야 한다. 삶의 중심에 위치해야 한다. 성경은 일상의 삶의 원천으로 마르지 않는 하느님 말씀의 샘물을 마셔야 하며 그 물은 영생의 물이며 영원히 솟구치는 생명의 물이다. 성경이 결코 다양한 묵상 자료 중의 일부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 자체로서 시대를 초월해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성 예로니모 성인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성경에서 힘을 얻지 못하면 우리의 내적인 삶은 힘을 얻지 못한다. 우리의 수많은 봉사활동도 참된 열매를 얻지 못한다.
___________________
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성전에서 하신 긴 담화의 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예루살렘 성전파괴에 대한 예언과 세상종말이 오기 전의 표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전은 주님의 현존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거룩한 것이라 하더라도 본래의 의미를 벗어나면 그 존재의미를 잃게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성전 파괴에 대해서는 이미 예언자 미카, 예레미아, 에제키엘 등에 의해서 진술된 바 있었고, 옛 솔로몬 성전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기원전 586년에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에 의해 기원전 515년에 즈루빠벨의 치하에서 재건된 제 2성전이었습니다. 이 성전은 헤로데 왕에 의해 기원전 19년부터 확장되고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며지면서 그 본래의 의미를 잃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그 때와 표징을 묻는 이들에게 이르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말라.”(루카 21,8)
이는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에게 속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이비 메시아는 누구일까요? 대체, 우리는 누구에게 혹은 무엇에 속고 있을까?
그것은 물질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재물이라는 우상을 사이비 구세주로 따르고, 속아 넘어가고 있지는 않는지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세상에는 “돈을 많이 벌게 해주겠소.” 하고 외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결국에는 우상을 따르고 섬기도록 부추기는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 행세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입으로는 주님을 구원자라 고백하지만, 정작 무엇에 목매달고 쫓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 재물뿐만이 아니라, 세속정신을 따르고 섬기고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현대사회의 가장 큰 병폐로 지적하신 신자유주의 정신을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
또 우리에게는 아주 특별하고 고약한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녀석입니다. 우리는 남이 아니라 곧잘 자신을 속이고, 자신에게 속기도 합니다. 자신의 욕망과 생각, 자신의 견해와 뜻을 섬기고 추종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자기 자신’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 행세를 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디모테오에게 말합니다.
“그대 자신을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그대의 가르침의 내용을 잘 살피시오. 이렇게 꾸준히 일을 해 나가면, 그대 자신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모두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1티모 4,16)
분명, 우리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과 뜻에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루카 21,8)
주님!
속이지도 속지도 말게 하소서.
재물에 속지 않고, 세속에 속지 않게 하소서
제 견해와 편견, 제 생각과 허영에 속지 말게 하소서.
제 자신과 제 뜻에 속지 않게 하소서.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예수님께서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진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십니다. '성전'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집으로 만들어놓은 곳입니다. '하느님을 모셔놓은 곳'이고, 그래서 '하느님이 그곳에 계시다고 사람들에게 말하는 곳'입니다.
바로 그곳이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복음은 '재난의 시작'에 관한 말씀입니다.
어제 근처에 있는 관룡산과 구룡산을 다녀왔습니다. 비온 뒤여서 그런지 날씨는 구름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였고, 제법 쌀쌀한 날씨였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단풍으로 아름답게 물들어 있었던 피조물들이 이제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또 다른 본래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원 창조 때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자연의 피조물들이 '우리의 스승'입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를 보면 참으로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원창조 때의 모습으로부터 너무 멀어져 있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하느님의 마음'은 지금 여기를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기 위해 더 낮아지고, 더 희생하고, 더 너를 생각하는 마음인데...
우리의 마음은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안에서 서로 싸우면서, 더 높아지려고 하고, 더 가지려고 합니다. 그리고 성전의 모습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하느님을 소유하려고 하고, 하느님을 어떤 틀 안에 가두어두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들이 '원창조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재난'은 이와 같은 하느님의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되는 '하느님의 분노'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분노의 낫을 대기 전에' 얼른 정신차리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도록 합시다!
=====================
[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jG84Rmzov80&feature=youtu.be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 6)
허물어지고
바스러지는
낙엽이다.
허물어지기에
사람이다.
허물어지기에
겸손을 배운다.
허물어지는
우리 자신을
주님께서
껴안아 주신다.
허물어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우리들 삶이다.
허물어지는
여정도 기꺼이
받아주시는
주님의 사랑이다.
허물어진
우리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주님이시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자비이다.
새로워져야 할
우리들 삶이다.
부질없이
허물어지는
것들안에서
영원한 것을
다시 갈망한다.
우리에게는
어김없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이 계신다.
인간의 욕심은
이와같이
허물어지지만
주님의 사랑은
허물어지지
않는다.
허물어지는
모든 것에
주님의 자비가
가득하길
기도드린다.
세상에서
깃들이던
육신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될
것임을 진심으로
나는 믿는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