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조보감 國朝寶鑑
정조대왕 어제 서문(正祖大王御製序文)
《실록(實錄)》과《보감(寶鑑)》은 모두 사서(史書)이다. 그러나 그 체재는 다르다. 크고 작은 사건과 득실 관계를 빠짐없이 기록하여 명산(名山)에다 보관해 둠으로써 이 세상이 다할 때까지 전하려는 것은《실록》이며, 훈모(訓謨)와 공렬(功烈) 중에서 큰 것을 취하여 특별히 게재해서 후세 사왕(嗣王)의 법으로 삼게 하려는 것은《보감》이다. 《실록》은 비장성(?藏性)이 있는데 반해《보감》은 저명성(著明性)이 있으며. 《실록》은 먼 훗날을 기약하는 데 반해 《보감》은 현재에 절실한 것이다. 이 둘은 모두 없어서는 안 될 것이지만 우(虞) 하(夏) 상(商) 주(周)의 사서(史書)를 공자가 100편으로 정리한 취지에 비추어보면《보감》이 더욱 근사한 점이 있다.
국가를 소유한 자는 모두《실록》을 갖고 있지만 《보감》의 경우는 우리 조정에만 있는 것으로 그 작업이 광묘(光廟) 때부터 시작되었다. 전대를 상고해 보았을 때 송(宋) 나라의《삼조보훈(三朝寶訓)》《전법보록(傳法寶錄)》과 명(明) 나라의《조훈록(祖訓錄)》《문화보훈(文華寶訓)》등의 책 또한 선조를 선양하거나 후손에게 교훈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언동(言動)을 병기(倂記)하여 선조의 덕업까지 알게 하며 간략하면서도 빠뜨리지 않고 미더워서 증거로 삼을 만한 것으로는 우리나라의《보감》만한 것이 없으니, 대성인의 제작이 정말 훌륭하다고 하겠다.
그러나《보감》은 세 책이 있을 뿐이다. 《국조보감》은 태조, 태종, 세종, 문종 네 임금까지만 수록하였고,《선묘보감(宣廟寶鑑)》과 《숙묘보감(肅廟寶鑑)》은 각각 한 책씩으로 되어 있고 전후의 임금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니, 모두 훌륭하기는 하지만 결국 미비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만일 정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중종, 인종, 명종, 인조, 효종, 현종, 경종 이 열두 임금의 훈모와 공렬이 기술되지 않는다면 비록 그것을 명산에 보관해 두어서 본래 취지가 실추되는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누가 그것을 기웃거려 보기라도 하겠는가. 그래서 우리 선대왕께서는 이것을 보충 편집할 뜻을 갖고 일찍이 신하들과 토의를 거쳤으나 미처 착수를 하지 못하셨다. 내가 왕위를 계승한 지 5년이 되는 신축년(1781) 9월에 선대왕의《실록》이 완성됨에 따라 《보감》을 찬수(纂修)하기로 상의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선대왕께서는 효제(孝悌)를 도의 근본으로 삼고 환과(鰥寡)를 정치의 우선으로 삼으셨다. 50여 년 동안 염려하면서 오로지 선왕의 뜻을 받들어 사업을 계승해 갈 것만을 생각함으로써 신하들을 모두 화합하게 하였고 또 큰 계획 위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진실로 선대왕의 덕업을 만 분의 일이나마 선양해서 후세의 임금들에게 귀감이 되게 하는 길은 여기에 더할 것이 없다. 《보감》의 편수작업을 마땅히 서둘러야 하고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인데, 그전에 보충 편집을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은 아마 오늘을 기다리느라고 그랬는지 모를 일이다.
대체로 열두 임금의 빛나는 공덕과 업적을 끝내 특별히 써서 전하지 않는다면 내가 종묘 사직을 봉승(奉承)하는 의미가 어디에 있다고 하겠는가.《시경》과《서경》에 수록되어 있는 성왕(成王)과 주공(周公)의 풍송권계(諷誦勸戒)가 비록 문왕과 무왕의 일을 언급한 것이 많지만 그럴 때마다 반드시 태왕(太王)과 왕계(王季)를 추술(追述)하여 공유(公劉)와 후직(后稷)의 발자취까지 언급하고 있으니, 이것은 아마도 선양할 왕업을 삐뜨리지 아니하고 후왕이 귀감으로 삼을 것을 확대시키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감히 가까운 임금만
전적으로 챙기고 대수가 먼 임금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관각(館閣)의 신하들에게 명하여 열두 임금의《실록》을 모두 가져다가 간추려서 편집하게 하였던 것인데, 다음해 3월에 작업을 마쳤다. 그렇게 해서 열두 임금 및 선대왕의《보감》이 모두 완성되었다. 그리하여 네 임금의《보감》및《선묘보감》과 《숙묘보감》을 통틀어 하나로 묶고 왕대별로 순서를 정하였다. 그리고 그 명칭을《국조보감(國朝寶鑑)》이라고 하였다. 모두 68권의 분량이다.
나는 이 책을 경건한 마음으로 받아 읽고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아, 아름답고도 완벽하도다. 400년을 전수해온 심법(心法)과 전장(典章)이 모두 여기에 있지 않은가. 학문을 업으로 삼고 덕을 닦는 요체와 하늘을 공경하고 선왕을 받드는 실상 및 국고를 낭비하지 않고 백성을 사랑하며 교육을 흥기시키고 풍속을 바로잡는 방법에 대해서 열성(列聖)이 서로 인용한 것 등, 모든 조항을 나열하여 빠뜨리지 않고 모두 기록하였으니, 그 공업과 덕화가 한없이 빛나서 해와 달처럼 밝고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듯하다. 이것이야말로 영원히 지속되어서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더욱 빛날 일이다. 이 작업은 선대왕의 뜻이었는데 지금 그 완성을 보았으니 어찌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이 책에 나아가서 선대왕의 심법(心法)을 우러러 체득하고 선대왕의 전장(典章)을 발전시키는 한편, 열성조의 심법과 전장의 본뜻을 찾아서 열성조 및 선대왕이 나에게 주신 것을 실추시키지 않고 나의 후손들에게 또 물려주는 것이야말로 나의 책임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임금에게 신하가 있는 것은 하늘에 사시(四時)가 있는 것과 같다. 열성조의 성덕과 대업도 오히려 훌륭한 신하들이 좌우에서 도와준 것에 힘입은 것인데. 더구나 과매(寡昧)한 내가 여러 신하들의 정성어린 도움이 없었더라면 어찌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옛날 임금의 신하들은 역시 현재 조정 신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였다. 그 아름다운 법과 훌륭한 정책을 이 책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으니 이 책을 귀감(龜鑑)으로 삼는 것이 어찌 나 한 사람에게만 해당하겠는가. 《시경》주송(周頌) 민여소자(閔予小子)에 "아, 황왕(皇王)이시어, 그 효성에 계승할 생각을 잊지 못하겠습니다." 하였고, 또《시경》주송 경지(敬之)에 "나의 사업을 도와서 나에게 훌륭한 덕행을 제시해 달라."고 하였다. 어찌 서로 협조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이것을 적어서 서문으로 삼는다.
때는 내가 왕위에 오른 지 6년째 되는 임인년(정조6, 1782) 10월이다.
헌종대왕 어제 서문(憲宗大王御製序文)
옛날 우리 정종대왕(正宗大王)께서는 성지(聖知)는 하늘을 계승하셨고 도덕(道德)은 백왕에 으뜸이셨으며, 제작(制作)은 창조적이었고 성명(聲明)은 세계적이었다. 자신을 성취시킴으로써 사물까지 성취시켜 몸소 태평 시대를 이룩한 것이 24년 세월이었다. 더욱이 종묘 사직을 숭봉하여 선왕의 법을 계승하고 선왕의 공렬을 선양하는 것을 행동지침으로 삼았으니 이런 이유 때문에 경사(卿士)와 서민들이 그 큰 효도에 감복하였던 것이다.
처음에 우리 세조대왕께서 태조, 태종, 세종, 문종 네 임금의 모훈(謨訓) 중에서 후왕의 감법(監法)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을 간추리게 하여 《국조보감》이라고 하였다. 그 뒤에 선조 숙종 양조의 《보감》을 따로 책으로 만들었지만 문자의 통일성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 영종대왕(英宗大王)께서 이것을 하나로 통일시키려고 했는데 미처 착수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차에 정묘(正廟) 초기에 이르러 비로소《영묘보감(英廟寶鑑)》을 편수하고 이어서 미처 편찬하지 못했던 열두 임금의 《보감》을 모두 한 책에 정리하였으니, 대체로 처음부터 끝까지의 기간은 300년쯤 될 것이다. 여러 임금을 거친 뒤에 비로소 책이 완성되었으니 아름다운 일이다. 정묘(正廟)께서 직접 서문(序文)을 지으셨는데 그 중에 "나의 자손들에게 물려주는 문제는 나의 책임이다." 라고 한 말씀은 위대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서경》주서(周書) 군아(君牙)에 "우리 후인을 인도하시되 정당한 방법으로 하시니……"하였고, 《시경》소아(小雅) 초자(楚茨)에 "자자손손이 교체하지 않고 면면히 이어가리라." 하였으니, 소자(小子)인 내가 어찌 감
히 공경히 따라서 계속적으로 이루어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순종대왕(純宗大王)께서 증자(曾子)와 민자건(閔子騫)의 행실을 몸소 행하시고 요순의 덕을 몸에 지니시고 공검인외(恭儉寅畏)를 기본으로 하는 도리를 정치에 적용하셨디. 이렇게 30여 년 세월을 하루같이 지내오셨으니 그 아름다운 계획과 정책에 대해 대대적으로 내세울 만한 것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우리 황고(皇考)이신 익종대왕(翼宗大王)은 명달(明達)한 자질과 인효(仁孝)한 성품으로 잘도 계승하시어 덕망으로 성인이 되셨으니 비록 대통은 잡지 못했지만 왕으로 추숭하는 예는 이미 거행하였다. 더구나 대리청정하던 4년 동안에 베푼 두터운 은택과 지극한 선(善)은 돌아가신 뒤에도 잊지 못 할 점이 있으니, 지금 이 삼종(三宗)의《보감》을 후속적으로 찬집하는 문제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 이는 바로 천지 사이에 세워 귀신에게 질정을 받아서 백세 후에 성인을 기다릴 일이다.
계획을 이미 함께하여 모든 작업 과정을 마쳤으니 광묘(光廟)의 일과 영묘(英廟)의 뜻과 정묘(正廟)의 계지술사한 성대함을 우러러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해는 곧 우리 동조전하(東朝殿下)의 육순이 되는 해이며 자성전하(慈聖殿下)께서 춘추가 50을 바라보는 해이니 우리 집안에 흔하지 않은 경사이다. 그래서 옥돌에 새겨 기념하고 가곡에 올려 전파해서 자성전하의 덕을 만분의 일이나마 선양하고 또 우리 순종(純宗) 익종(翼宗) 두 대왕의 휘호(徽號)를 추존하여 올렸으니 소자인 나의 다함이 없는 정성에 조금이나마 맞는지 모르겠다. 때마침 《보감》도 완성이 되어 마치 합주를 하는 듯하니, 종방(宗邦)의 다행이 무엇이 이보다 크겠는가. 원편(原編)에 이미 정묘(正廟)의 어제서문(御製序文)이 있으므로 소자인 내가 감히 그 예를 그대로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이것 역시 선왕을 받들어 효도할 것을 생각하는 일대 의체인 것이다.
내가 왕위에 오른 지 14년이 되는 무신년(헌종 14, 1848) 8월에 이 글을 쓰다.
순종황제 어제 서문(純宗皇帝御製序文)
《국조보감》이라고 하는 책은 처음 광묘(光廟) 정축년(1457)에 비롯되었고, 정묘(正廟) 임인년(1782)에 크게 정비되었으며, 이어서 헌종(憲宗) 무신년(1848)에 삼조(三朝)의 《보감》이 완성되었다. 이에 열성(列聖)이 서로 전하는 심법(心法)과 정모(政謨)가 찬연히 구비되고 질서가 잡혀서 영구적으로 귀감(龜鑑)이 되기에 충분하게 되었는데, 오로지 헌종 철종 양조의 《보감》만이 미처 연이어 찬집되지 못하였다.
선왕이 하던 사업을 계속적으로 계승해갈 책임이 우리 후왕에게 있는 한 소자인 내가 그 일을 어찌 사양하겠는가. 《서경》상서(商書) 열명(說命)에 "선왕이 이루신 법을 귀감으로 삼아서 영원히 허물이 없게 하소서." 하였고, 《시경》대아(大雅) 가락(假樂)에 "타박하지도 않고 잊어버리지도 않으면서 선왕의 옛법을 잘 따르겠다." 하였으니, 후세의 사왕(嗣王)들이 왕통을 이어서 지켜 나가는 도리는 오로지 선왕이 이룩하신 법을 귀감으로 삼고 옛법을 잊어버리지 않는 데 있다. 그러나 먼 데에 있는 것을 귀감으로 삼는 것보다는 가까운 데 있는 것을 귀감으로 삼는 것이 훨씬 더 친근하고 절실하다. 그것은 자신이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아 그 영향을 직접 받음으로써 상상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도 감동의 효과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 우리 헌종(憲宗) 철종(哲宗) 두 임금의 풍족한 공로와 성대한 덕업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말하고 있다. 헌종의 경우는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라 왕권을 잡고서 어진이를 우대하고 외척(外戚)을 멀리하니 조정이 깨끗해졌고, 철종의 경우는 오랜 세월을 외지에서 고생을 하셨기 때문에 농사짓는 일의 어려움을 알고 있었으므로 슬픔에 어린 조서가 사책(史策)에 끊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30여 년의 재위 기간 동안 기후가 적절하여 곡식들이 풍년이었고 변방이 조용하여 백성들이 생업에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지금까지 어린이 늙은이 할 것 없이 모두가 성화(聖化)를 노래하면서 아직도 주현(朱絃)과 녹죽(綠竹)에 대해 간절히 생각하고 있다. 이것이 어찌 가까운 것으로 법 삼을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간혹 두 임금의 재위 기간이 길지 않아서 백성들에게 혜택이 오랫동안 미치지 못한 것을 아쉽게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주(周) 나라의 성왕(成王) 강왕(康王)과 한(漢) 나라의 효문제(孝文帝) 효경제(孝景帝)와 명(明) 나라의 인종(仁宗) 선종(宣宗)과 같은 훌륭한 임금들이 서로 계승하던 시기를 놓고 정치가 아주 잘되던 때라고 말하는데, 그들의 재위 기간을 따져보면 짧게는 10년, 길게는 3,40 년에 불과하지만 그 유풍(遺風)과 선정(善政)은 백성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였고 국가의 기조를 수백 년 동안이나 면면히 이어가게 하였다. 우리 두 임금도 재위 기간을 합하면 겨우 29년이다. 그러나 친한 이를 친히 여기며, 어진이를 어질게 여기고 즐겁게 해주심을 즐겁게 여기고 이롭게 해주심을 이롭게 여기게 하는 덕화를 펴심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오랫동안 잊지 못하게 하고 있다. 억만년토록 한도 끝도 없이 이어갈 우리나라의 기틀을 열어주신 것으로써 성왕 강왕과 짝할 만하고 한 나라와 명 나라보다도 우수하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짐이 이미 관각(館閣)의 원로 신하들에게 명하여 일록(日錄)을 채집하고 유문(遺聞)을 모아서 두 임금의 《보감》을 각각 네 권으로 찬술해서 전에 만든《보감》에다 잇는 한편, 전편(前編)을 약간 산삭 혹은 보완한 다음 전체를 합하여 일관된 체재로 구성된 책을 만들었다. 이어 10개월 만에 판각(板刻)하여 간행까지 마쳤다. 책은 모두 90권이다.
아, 두 임금의 치화(治化)가 허공에 구름이 지나가듯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으니 만약 이 책이 없다면 소자인 내가 무엇을 법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드디어 서문(序文)을 써서 스스로 격려하는 의미를 부여한다.
융희 3년(순종 3, 1909) 6월에 이 글을 쓰다.
국조보감을 올리는 전문[進國朝寶鑑箋][수.1]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김상철(金尙喆),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이복원(李福源), 보국숭록대부 행판중추부사 치사봉조하 서명응(徐命膺) 등은 삼가 교지를 받들어 《국조보감》의 속찬 작업을 마치고 삼가 전문을 받들어 올립니다.
상철 등은 황공한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상언(上言)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천년의 성인이 나셔서 대인의 문명을 모으시고 하나로 통일된 책을 완성하여 열조(列祖)의 모훈(謨訓)을 실었으니, 마치 오늘을 기다리느라고 그동안 궐문(闕文)으로 지내온 것만 같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제왕의 정치력은 모두 책에 소상히 실려 있습니다. 문왕과 무왕이 창업하고 대통을 이어 지키고 한 것은 당 나라의 《정관정요(貞觀政要)》에서 입증할 수 있고 성신(聖神)의 태평 정치는 송 나라의 《삼조보훈(三朝寶訓)》에 아직도 실려 있습니다. 《보감》의 체재는 엄격한 비각(?閣)의 체재와 다르기에 별도로 편집을 하였고 의의는 왕부(王府)의 헌법과 같아서 길이 법으로 남겨주었습니다.
아, 우리 집에는 열아홉 성인이 전해오는데 성덕을 한두 가지로 기록하기 어렵습니다. 규모를 처음에 정하면서 신라와 고려의 방만한 풍속을 개혁하였고 중엽에 예악을 크게 정비하면서 은 나라와 주 나라의 절충한 법조문을 참작하였습니다. 오세(五世)에 걸쳐 선위(禪位)한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백성들이 그 지극한 덕을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었고 양조(兩朝)에 걸쳐 반역을 소탕한 공렬에 대해서는 하늘이 실로 종실을 도왔습니다. 국토를 재차 조성함에 중흥한 공업이 다함이 없고 중국을 향하는 마음에 황조(皇朝)의 뜻을 잊지 않았습니다. 강토는 북쪽을 개척하고 남쪽은 내빈하도록 하였으며, 제도는 《육전(六典)》과《오례의(五禮儀》를 지었습니다. 해와 달이 빛나니 도신(塗莘)의 상서를 대신 짓고 바람과 구름이 시기에 응하니 조정에는 팔원팔개(八元八愷)의 칭찬이 많습니다. 여러 성인이 정일(精一)한 법을 서로 전하니 후손들의 아름다운 법이 매우 빛나고 왕위에 오른 세월이야 차이가 있지만 영원히 아름다운 소문이 그치지 않습니다.
오직 영고(英考)는 왕위에 계신 지가 가장 길었으므로 인후한 소리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자리 잡았습니다. 행실이 다른 왕들보다 월등하여 만화(萬化)의 기반을 효제(孝悌)에다 두었고 정치는 오극(五極)이 융성하여 한 세상을 인도하여 회귀시켰습니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성은 요(堯) 임금의 나이에 이르러서도 더욱 도타웠고 나라에 근면하고 가정에 검소한 덕은 비록 우(禹) 임금이라도 더할 수가 없었습니다. 50여 년 동안 정사 하나와 말씀 한 마디가 모두《시경》과 《서경》의 경전 내용에 부합하는데, 아, 오늘날의 어느 공경 어느 선비가 교화를 받아 성취되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에 400년 동안의 평화로운 정치를
상고해 보니 어찌 성대했던 은 나라처럼 6, 7명의 현성(賢聖)이 나는 정도에 그치겠습니까.
정신으로 교화하는 오묘함은 마치 공중에 구름이 지나는 듯하고 친한 이를 친히 하고 어진이를 어질게 여기며 즐겁게 해주심을 즐거워하고 이롭게 해주심을 이롭게 여기게 하려는 생각은 길이 사해의 밖에까지 혜택이 머물렀습니다. 사당에 노래를 올려서 비록 다시 뵈온듯한 정성을 위로하였으나 사적(史籍)을 명산에 보관해 두게 되니 매번 어디에서 상고할 것인가 하는 탄식이 있었습니다.
광묘(光廟)가 《보감》을 창출한 것을 생각해 보니, 성스러운 뜻으로 우리 후인을 계도하신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천양(闡揚)은 네 임금으로부터 시작하였는데 이것을 계승하여 찬집한 것은 만세토록 무궁하기를 기약한 것이었습니다. 예묘(睿廟)와 성묘(成廟) 때에도 이런 생각은 있었지만 사향하지를 못하였고, 선조(宣祖)와 숙조(肅祖)의 기록은 각각 책으로 엮어졌지만 연합되지를 못하였습니다.
선조(宣祖)에 이르러 궐장(闕章)을 모두 들어냈지만 이 일을 성명(成命)으로 내리기까지는 오히려 늦은 감이 있었고, 개탄스럽게도 신하들이 서두르지 않아 오랫동안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몇몇 성인(聖人)이 경영한 것을 열람해 보니 때로는 미진한 부분이 있었고, 조정과 초야는 시각이 서로 다르므로 문헌을 고증할 수 없어 한탄이요, 세월이 자꾸만 멀어지면 훌륭한 덕화가 혹시라도 사라질까 두려웠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주상전하께서는 내성외왕(內聖外王)의 학문으로 조공종덕(祖功宗德)의 기반을 계승하셨습니다. 집현전(集賢殿)의 옛 규례를 수개하니 시인(詩人)이 역복(?樸)의 송(頌)을 올리고, 봉모당(奉謨堂)의 새로운 편액을 게재하니 태사(太史)가 규벽(奎璧)의 상서를 점쳤습니다. 찬란한 빛을 가슴에 쌓으셨으니 성명이 우주에 뻗침을 다하였고 향기가 피어 올라서 하늘을 밝히는 선성에 짝하였습니다. 모든 법은 다 정미함에 근본을 두고 변함없는 생각은 계지술사에 근실하였습니다. 그리하여《실록》의 작업을 마치고 나자《보감》의 후속 작업을 명하였습니다.
국상에 따른 성상의 사모하는 정성이 바야흐로 새로워서 이미 앞 영왕(寧王)의 대업을 기술하였고 난대(蘭臺:함인정(涵仁亭))의 비첩(?牒)을 상고하여 우리 열조의 전서(全書)를 이룩하였습니다. 함정(涵亭)에서 옥음을 받들어 심악(沁嶽:강화도)의 금궤를 열었습니다. 법온(法?)이 술잔에 넘쳐흐르니 글을 쓴 노고를 다하였고 신장(宸章)이 찬란하니 모습을 직접 뵈온 듯한 효성이 아련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들이 하해와 같은 성덕을 측량하기에는 재주가 짧으나 하늘을 사모하는 정성이야 간절합니다. 연대순으로 편찬해서 거칠게나마 그 과정에 충실하였고 범례(凡例)를 마련한 것은 모두 직접 여쭈어 재가를 받은 것을 자료로 하였습니다. 7개월 만에 완성되니 세《보감》이 비로소 통합되었습니다. 순서(順序)를 세대별로 정한 것은 역사서의 체재가 그러한 것을 상고한 것이며 상약(詳約)을 시기에 맞춘 것은 예의 뜻에 비추어 볼 때 부족한 감이 없습니다. 60편에 크게 드러난 공렬이 찬란하여 햇살을 받은 듯 바람이 이는 듯하고, 수백 년 동안 미처 하지 못한 공로가 참으로 금성옥진(金聲玉振)을 이루었습니다.
법곤(法袞)을 계승하여 주왕(周王)이 단서(丹書)를 받은 의식을 인용하였고 비궁(?宮)에 제사를 올리니 송전(宋殿)에 옥첩을 보관하는 제도를 모방하였습니다. 이미 성상의 효도에 빛을 더하였으니, 임금의 정성을 예감(睿監)에 두기를 바랍니다. 어렵게 창건한 왕업이라 항상 돌보아야 한다는 책임을 생각하였고 드높은 공화(功化)를 우러러 유지해갈 방법에 더욱 노력했습니다. 오직 간언을 받아들이고 현인을 구하는 것은 진실로 전해오는 가법이 있고 형벌과 관작에 신중을 기한 것은 옛 법에 손색이 없습니다.
하늘이 성인을 내셨으니 어찌 한번 다스리게 할 뜻이 없겠으며 귀감이 선왕에 있으니 사문에 느낌이 있을 것입니다. 비록 역사에는 공로가 없을지라도 최선을 다한 것은 사실입니다. 신들은 두렵고 간절한 마음을 견딜 수 없어 삼가 찬집한 《국조보감》68권을 전문(箋文)과 함께 받들어 올립니다.
상의 6년(정조 6, 1782) 11월 일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김상철(金尙喆),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이복원(李福源), 보국숭록대부 행판중추부사 치사봉조하 서명응(徐命膺) 등은 삼가 전문을 올립니다.
국조보감을 올리는 전문[進國朝寶鑑箋]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조인영(趙寅永),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영 경영ㆍ홍문관ㆍ예문관ㆍ춘추관ㆍ관상감사 정원용(鄭元容), 보국숭록대부 행 지중추부사 겸 판의금부사 홍경모(洪敬謨), 숭정대부 판돈녕부사 김난순(金蘭淳) 등이 삼가 교지를 받들어 《국조보감》의 속찬 작업을 마치고 삼가 전문을 받들어 올립니다.
조인영 등이 황공한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상언합니다. 삼가 열조(列祖)의 세계도(世系圖)를 받들어서 500년의 경록(景?)을 느껴보았고, 크게 삼종(三宗)의 보훈(寶訓)을 기술하여 19실(室)의 원편(原編)을 계승하였습니다. 처음과 끝이 금성 옥진(金聲玉振)을 이루었으니, 옛날의 천구(天球)와 홍벽(弘璧)보다 월등합니다.
이 책을 귀감(龜鑑)으로 삼을 것을 생각하니, 진실로 전대의 전모(典謨)에 부합합니다, 소중히 보존해온 심법(心法)은《중용(中庸)》의 정일법(精一法)을 서로 전한 것이며, 책에 실려 있는 치공(治功)은 홍범(洪範)의 삼덕(三德)을 다 펼친 것이었습니다. 석실(石室)의 경함(瓊函)에 비교하면 규모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선원(璿源)의 옥첩(玉牒)을 모방하였으니 상략이 같지 않습니다.
아, 광묘(光廟) 초년에 처음으로 네 임금의 기록을 정리하기 시작하고, 원릉(元陵)이 후속 사업을 함으로써 한 계통의 책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정종대왕(正宗大王)께서는 불세출의 자질을 타고나신데다 큰일을 해볼 만한 시운까지 받으셨으니, 천덕(天德)과 인문(人文)의 근본에 대해서는 우순(虞舜)과 하우(夏禹)에 입증할 수 있습니다만, 내성외왕(內聖外王)의 공로에 대해서는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를 가지고 어찌 논할 수 있겠습니까.
정통(正統)을 존중하여 노사(魯史)를 계승하니 자나깨나 국가의 운명에 대한 걱정이요, 여러 책들을 수집하여 송유(宋儒)의 의리를 모으니 가을볕에 말린 듯이 단단하고 강물에 씻은 듯이 깨끗합니다.
아, 하늘을 마주 대하여 빛나는 선왕의 업적을 생각하고, 온종일 부지런히 힘써서 길이 옛법을 따르고자 진념하였습니다. 드디어 전서(全書)의 차례를 두게 된 것은, 진실로 초정(初政)의 발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사원(詞苑)의 신하를 선발하여 제술(製述)의 임무를 분담시키고, 비각(?閣)의 사서(史書)를 상고하여 모두 성상의 재가를 받았습니다. 성자 신손(聖子神孫)이 연이(燕?)하면서 전수받은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문모 무열(文謨武烈)의 큰 은혜를 잊지 못한 때문입니다.
또 우리 순종대왕(純宗大王)께서는 덕이 만백성에게 두루 미치고 공이 하늘에까지 참여되었습니다. 30여 년 동안 베푸신 덕화(德化)는 팔방의 끝까지 고무시키는 정치였습니다. 북극성(北極星)은 움직이지 않아도 뭇 별들이 따르듯이 몸소 검박함으로 솔선하였고, 동해(東海)까지 이르러도 그곳 백성들이 효성을 기준으로 하니 행동은 신명을 관철하였습니다. 양이(洋夷)와 도이(島夷)의 이단(異端)적인 말을 물리치니 백성들의 윤리가 안정되었고, 황지(潢池)의 조무라기들을 평정하려고 국가적인 토벌을 벌였습니다. 이것을 비유해보면 시기 적절한 비가 곳곳에 내리자 모든 생물이 다 태화원기(太和元氣)를 얻은 듯하고, 비록 떠가는 구름이 아무런 기척이 없어도 그 생각은 해서산추(海?山?)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듯합니다.
역시 생각건대, 우리 익종대왕(翼宗大王)께서는, 모든 정치를 대신하면서 게을러질까를 걱정하였고, 높고 넓은 성덕으로 중광(重光)을 도왔습니다. 인효(仁孝)하고 영명(英明)함이 매우 빛나니 참으로 지극한 덕은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며, 노래하는 자와 송사하는 자가 돌아갈 데가 있게 되었으니 세상을 구제할 크나큰 계책을 다한 것입니다.
종묘의 제기(祭器)로 어버이를 드러내기 위하여 제물을 갖추었으며, 사당의 장식은 제사를 돕기 위하여 마음과 예절을 다하였습니다. 잘 따르는 정사로 궁핍함을 떨쳐버리게 한 것은 서민들을 위해서였고, 국가의 기반이 되는 집에서 교육시킨 인재들은 바로 아름다운 선비들이었습니다.
아, 굉장한 정치를 서로 계승하였지만, 미처 《보감》의 속찬 작업을 착수하지 못하였습니다. 헌장(憲章)을 조술(祖述)한 공은 전대의 성왕이 이미 후대의 성왕에게 전승하였고, 선조의 왕업을 계승하는 것은 오늘날의 글이 옛글을 참고로 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주상전하께서는 조종이 창건하여 지켜온 기반을 계승하여 천지의 경륜이 되는 도리에 힘쓰셨
습니다. 임금의 윤음(綸音)이 전파됨으로 예악(禮樂)의 근원을 널리 찾았고, 아름다운 현상이 점에 맞으니 위로 도서(圖書)의 부(府)에 반응하였습니다. 신전(神殿)을 지어서 엄숙하고 화락한 분위기를 더함에 사모하던 모습을 자주 뵈옵고, 교릉(喬陵)을 옮겨서 지기가 응집된 상서를 획득하니 길이 묘소의 안녕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젊은 나이에 좋은 시기를 잡으셨기에 봉력(鳳曆)이 원기의 조화를 이루었고, 태평한 시대에 아름다운 현상을 맞이하여 귀주(龜疇)가 복을 모았습니다.
그러므로 선조를 받드는 일념을 가지고, 후손에게 물려줄 법을 추구하였습니다. 육경(六慶)에 부합하여 비로소 칭도함에 드러난 명호를 빛나게 하고, 삼원(三元)을 따라서 경건히 고하고 이에 하례하는 의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영왕(寧王)의 이훈(彛訓)을 집성하고 보니, 바로 우리 임금의 의리로 일어난 깊은 마음입니다. 사모하는 마음을 부쳐서 성신에게 질정해도 의심할 여지가 없고, 규범의 자료를 제작하여 범례(凡例)를 만들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들이 지난해로부터 편찬 사업을 비로소 시작하여 금년 가을이 되어서야 겨우 교정을 다 보았습니다. 재주와 학식은 부족하면서 감히 임금을 사실대로 묘사하기를 기약하였지만, 과정이 지체되어 산삭하고 기술하는 데에 부끄러운 점이 있었습니다. 달을 표시하고 해를 기록하는 데 있어 간략하게 하기도 하고 번다하게 하기도 한 것은 본문에 충실히 따랐기 때문이며, 하늘을 존경하고 조상을 추존하는 큰 원칙과 큰 법은 옛날의 체재에 따라 성실히 준수한 것이었습니다.
이 60년 동안 펼친 덕화는, 진실로 세 성인의 법이었습니다. 환히 비추는 해와 달처럼 눈부신 문장력을 간직하셨으며, 힘차게 흐르는 강물과 같은 결단성은 전학(典學)에 기반을 두었습니다. 책머리의 서문을 이어서 지으시니 임금의 문장이 더없이 빛나고, 책을 올리는 예를 다시 행하니 임금의 모습이 더없이 단정합니다. 이는 옛일에 빛을 더하고 오늘날에 크게 갖추어진 것입니다.
마땅히 호연(濩淵)에 항상 눈을 두어서 금경(金鏡)을 삼고, 매번 이른 아침과 깊은 밤에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옥음(玉音)을 받드는 듯이 하였습니다. 여러 임금에 걸쳐 제시해온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친한 이를 친히 하고 어진이를 어질게 여기며 즐겁게 해주심을 즐거워하고 이롭게 해주심을 이롭게 여기게 하는 데에 있으며, 백세에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술책은 바로 광직(匡直)으로 위로하여 찾아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검소와 근면성으로 말하면 우(禹) 임금의 공로에 비해도 차이가 없으며, 말씀과 신중성으로 말하면 비록 문왕(文王)의 덕이라 해도 더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모두 만화(萬化)의 근원으로 하나를 예로 해서 나머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 나라 안에만 국한하지 않고 이 즐거움이 하늘까지 미칩니다. 비록 역사를 따로 기술한 수고로움은 없었지만 어찌 임금을 생각하는 정성이야 잊겠습니까.
신들은 북받치고 떨리는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삼가 이번에 지은 《국조보감》14권을 전문과 함께 받들어 올립니다.
상의 14년(헌종 14, 1848) 10월 일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조인영(趙寅永),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정원용(鄭元容), 보국숭록대부 행지중추부사 겸 판의금부사 홍경모(洪敬謨), 숭정대부 판돈녕부사 김난순(金蘭淳) 등이 삼가 전문(箋文)을 올립니다.
국조보감을 올리는 표문[進國朝寶鑑表]
정일품 보국숭록대부 태자소사 대훈 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 정일품 보국숭록대부 대훈 궁내부대신 민병석(閔丙奭), 종일품 숭록대부 규장각대제학 이용원(李容元) 등이 삼가 칙지(勅旨)를 받들어 《국조보감》을 계속 찬집하여 간행 작업을 마치고 삼가 표문을 받들어 올립니다.
이완용 등은 황공한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상언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훌륭한 자손이 능히 그 덕을 닮아서 만년토록 왕가(王家)의 세계(世系)를 계승하였고, 큰 원칙과 법이 다 이 책에 실려 있어서 양조의 보훈(寶訓)을 기술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오늘을 기다린 듯하므로 아, 전왕을 잊지 못합니다.
생각건대, 우리 열성조의 원대한 계획은 실로 제왕가의 귀감이 됩니다. 국정(國政)을 논하고 바로잡는 즈음으로부터 그 훌륭한 말씀들을 기록하였으며, 정령을 실시하는 내용이 서책에 펼쳐져 있음을 보겠습니다. 전칙(典則)을 제시하니 그것은 바로 하부(夏府)의 훌륭한 법령 조목이라 하겠으며, 문장(文章)이 찬란하니 마치 주서(周序)의 아름다운 제기와 같습니다.
문헌(文獻)으로 고증하고자 한다면 우선 조종(祖宗)을 법으로 삼아야 합니다. 태조(太祖) 이하 6, 7인의 성인이 계승하다가 세조조에 이르러 《보감》을 처음 기술하였고, 정묘(正廟) 때 19실(室)을 모아 엮었고, 또 헌묘(憲廟) 때에 계속 완성하였습니다. 아름다운 성덕(盛德)을 표현할 때 하늘을 모사하듯 해를 그리듯 하였으며, 정사(正史)의 체재를 모방하여 달을 표시하고 연도를 기술하였습니다.
한 마디 말과 한 구절 글이라도 모두가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요체가 되고, 남아 있는 분위기와 혜택은 모두가 친한 이를 친히 하고 어진이를 어질게 여기며 즐겁게 해주심을 즐거워하고 이롭게 해주심을 이롭게 여기는 생각들입니다. 29년 동안의 지극한 정치를 계승하였는데, 어찌 한두 가지의 일만 열거하는 데 그치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우리 헌종성황제(憲宗成皇帝)께서는 처음부터 큰 기반을 안정시키셨고, 젊은 나이에 훌륭하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한 사당에다 삼세(三世)의 왕을 모시니 궁중에 기뻐하는 경사가 도타웁고, 15년 동안에 해내(海內)가 보살펴주는 그 은덕을 입었습니다. 하늘이 영무(英武)한 자질을 내셨는데 우현좌척(右賢左戚)이 보필하였으며, 날마다 온문(溫文)의 학덕이 진취하니 내성외왕(內聖外王)이 되었습니다. 환관과 궁첩을 접견할 때에는 봐주는 듯한 인상을 주지 않았으며, 가뭄과 적변을 주달하는 날에는 덕음에서 가련해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한 우리 철종장황제(哲宗章皇帝)께서는, 인자함으로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니, 크게 하늘과 부합하였습니다. 외지에 가서 오랫동안 수고하셨기에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실정을 진념하였고, 진실로 그 중도를 간직하여서 정(精)과 미(微)에 의한 하나의 법을 전수하였습니다.
전 국토가 태평한 시대의 시운에 오르니 곡식은 자주 풍년이 들었고, 삼정(三政)에 관해서는 개혁할 방안을 모색하니 백성들의 와언(訛言)이 스스로 정화되었습니다. 시기적절한 비가 만물을 윤택하게 해주면서도 고요하기가 마치 신공(神功)을 거두어 간 듯하고, 한 점 구름이 허공을 지나는 듯 광탕해서 그 지덕(至德)을 이름짓기가 어렵습니다. 후일에 제시해 줄 수 있는 것으로 모두 우리 왕가에서 법을 전수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아마도 이는 선왕의 덕과 말씀을 후손이 잘 계승하고 잘 기술하기를 기다린 듯합니다.
삼가 우리 대황제폐하(大皇帝陛下)께서는, 태황(太皇)의 내선(內禪)을 계승하시어 제국(帝國)의 중흥(中興)을 이루었습니다. 일찍부터 청궁(靑宮)에서 덕을 길렀으니 마치 문왕(文王)이 왕계(王季)에게 조알(朝謁)하던 것과 같았고, 단의(丹?)에서 왕명을 받음으로부터 마치 우제(虞帝)가 제요(帝堯)를 협조하듯이 하였습니다. 송사하는 백성들이나 노래하는 서민들은 모두 우리 임금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사방의 농사꾼과 장사꾼들은 성인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편당(偏黨)을 해소하여 탕평책을 쓰니 왕도(王道)가 이것으로 바루어졌고, 문식과 바탕을 참작하여 손익을 가하니 정치의 덕화가 새로워졌습니다. 삼묘(三廟)를 받들기 위한 의식을 행하니 예로 비추어 보아 서운한 점이 없었으며, 2대(代)의 《보감》을 제작할 것을 생각하여 오히려 뜻은 가졌지만 미처 겨를을 내지 못하였습니다. 선대의 빛나는 얼을 반드시 발양하기를 요하는 마당에 믿을 만한 역사 기록이 아니라면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드디어 윤칙을 내려서 편찬 사업을 착수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상고하는 문제를 간편한 쪽으로 추구하니 의절(儀節)을 규장각(奎章閣)으로 하여금 전담하게 하고, 직책과 담당은 생략을 하다보니 교정관(校正官)과 찬집관(纂輯官)이 함께 작업을 하였습니다. 무신년(戊申年)이 다시 돌아오니 지난 옥첩(玉牒)을 열람함에 사모하는 마음이 더하고, 매일처럼 정무 보는 시간에 관료들을 면려하여 과정을 독촉하였습니다. 매번 간략한 것을 취하고 번다한 것을 산삭하여 초고를 누차 바꾸었고 범례를 만들어서 한결같이 그전 규례를 따랐습니다. 예악(禮樂)과 형정(刑政)은 일관된 체재로 구성된 책에서 비로소 갖추어졌고, 선사(繕寫)와 감인(監印)을 통해 10개
월 만에 완성되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들은 삼장(三長)에 따른 재주가 부족하여 한 글자도 보충한 것이 없습니다. 임금의 서문(序文)을 받으니 하늘의 은하수가 밝게 빛나는 듯하고, 임금의 위로하는 술을 받으니 은혜가 강물처럼 넘쳐흐릅니다. 사당에다 책을 올리니 남은 생각이 악기에 아련하고, 명산에다 잘 보관하여 후세에 옥첩이 고증되기를 기다립니다. 바야흐로 세초(洗草)를 마치게 되니 다시 법으로 삼을 잠계(箴戒)를 올립니다.
먼 곳에서도 취하고 가까운 곳에서도 취하니 만세토록 나라를 다스릴 규범이요, 고문(古文)에도 있고 금문(今文)에도 있는 것은 한 부의 소중히 보존해 온 전모(典謨)입니다. 이는 후손들의 훈계가 될 것이므로 마땅히 성헌(成憲)을 허물로 삼지 말아야 할 것이며, 한가로운 여가에 힘입어 반드시 마음을 맑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씨(史氏)가 다 기록하지 못하여 대체적인 것만 들었으며, 천자(天子)가 각별한 안목이 있어서 오히려 이것을 귀감으로 삼았습니다. 공으로 말하면 비록 하찮아 말할 것이 없으나 이 책은 천지와 더불어 폐기되지 않을 것입니다. 감히 소견을 첨부하여 임금께서 보시도록 올립니다.
신들은 북받치고 떨리는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삼가 이번에 찬술한 《국조보감》 8권을 표문(表文)과 함께 받들어 올립니다.
융희 3년(순종 3, 1909) 6월 일에 정일품 보국숭록대부 태자소사 대훈 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 정일품 보국숭록대부 대훈 궁내부대신 민병석(閔丙奭), 종일품 숭록대부 규장각대제학 이용원(李容元) 등이 삼가 표문을 올립니다.
국조보감 원편(原編) 편찬 제신(編纂諸臣)
봉교(奉敎) 총재대신(總裁大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신 김상철(金尙喆)
교정(校正)
원임대제학(原任大提學)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 겸 영경연사(兼領經筵事)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신 이복원(李福源)
원임대제학(原任大提學)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치사봉조하(致仕奉朝賀) 신 서명응(徐命膺)
찬집(纂輯)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행 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 신 채제공(蔡濟恭)
정헌대부(正憲大夫) 지돈녕부사 겸 지춘추관사(知敦寧府事兼知春秋館事) 신 조준(趙?)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사 동지성균관사 홍문관제학(工曹判書兼知經筵春秋館事同知成均館事弘文館提學) 신 이명식(李命植)
자헌대부(資憲大夫) 한성부판윤 겸 지춘추관사 예문관제학(漢城府判尹兼知春秋館事藝文館提學) 신 김익(金?)
자헌대부(資憲大夫) 행 강화부유수 겸 진무사 삼도통어사 지춘추관사(行江華府留守兼鎭撫使三道統禦使知春秋館事) 신 서호수(徐浩修)
자헌대부(資憲大夫) 형조판서 겸 지춘추관사 동지경연사 오위도총부도총관(刑曹判書兼知春秋館事同知經筵事五衛都摠府都摠管) 신 김노진(金魯鎭)
가의대부(嘉義大夫) 호조참판 겸 동지경연춘추관사 오위도총부부총관(戶曹參判兼同知經筵春秋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 신 서유린(徐有隣)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兵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 신 정창성(鄭昌聖)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우윤 겸 동지의금부춘추관사 오위도총부부총관(漢城府右尹兼同知義禁府春秋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 신 홍양호(洪良浩)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우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承政院右副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 신 민종현(閔鐘顯)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부사직 겸 춘추관수찬관 지제교(行龍?衛副司直兼春秋館修撰官知製敎) 신 이병모(李秉模)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참의 겸 규장각직제학 춘추관수찬관 지제교(吏曹參議兼奎章閣直提學春秋館修撰官知製敎) 신 정지검(鄭志儉)
통정대부(通政大夫)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규장각제학 지제교(弘文館副提學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奎章閣提學知製敎) 신 심염조(沈念祖)
고교(考校)
통훈대부(通訓大夫) 전 행홍문관수찬 지제교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 동학교수(前行弘文館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東學敎授) 신 조성진(趙城鎭)
어모장군(禦侮將軍) 행 용양위부사과 겸 춘추관기사관(行龍?衛副司果兼春秋館記事官) 신윤행원(尹行元)
어모장군(禦侮將軍) 행 용양위부사과 겸 춘추관기사관(行龍?衛副司果兼春秋館記事官) 신윤이상(尹履相)
통훈대부(通訓大夫) 전 행홍문관응교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편수관(前行弘文館應敎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編修官) 신 이종섭(李宗燮)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승정원주서 겸 춘추관기사관(行承政院注書兼春秋館記事官) 신 이조승(李祖承)
창신교위(彰信校尉) 용양위부사과 겸 춘추관기사관(龍?衛副司果兼春秋館記事官) 신 홍인호(洪仁浩)
조봉대부(朝奉大夫) 병조정랑 겸 춘추관기사관(兵曹正郞兼春秋館記事官) 신 이석하(李錫夏)
병절교위(秉節校尉) 충무위부사과 겸 춘추관기사관(忠武衛副司果兼春秋館記事官) 신 이노춘(李魯春)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사간원정언 겸 춘추관기사관(行司諫院正言兼春秋館記事官) 신 이익운(李益運)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경기도사 겸 춘추관기사관(行京畿都事兼春秋館記事官) 신 이현묵(李顯?)
승의랑(承議郞) 병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兵曹佐郞兼春秋館記事官) 신 박종정(朴宗正)
어모장군(禦侮將軍) 행 용양위부사과 겸 춘추관기사관(行龍?衛副司果兼春秋館記事官) 신 이동직(李東稷)
선략장군(宣略將軍) 행 용양위부사과 겸 춘추관기사관(行龍?衛副司果兼春秋館記事官) 신 조윤대(曺允大)
선사(繕寫)
통훈대부(通訓大夫) 전 행홍문관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前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 신 이경일(李敬一)
통훈대부(通訓大夫) 전 행홍문관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前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 신 윤동만(尹東晩)
통훈대부(通訓大夫) 종부시정 겸 춘추관기사관(宗簿寺正兼春秋館記事官) 신 이운빈(李運彬)
어모장군(禦侮將軍) 행 용양위부사과 겸 춘추관기사관(行龍?衛副司果兼春秋館記事官) 신 서배수(徐配修)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정 겸 춘추관기사관(軍資監正兼春秋館記事官) 신 박성태(朴聖泰)
어모장군(禦侮將軍) 행 용양위부사과 겸 춘추관기사관(行龍?衛副司果兼春秋館記事官) 신 최훤(崔?)
어모장군(禦侮將軍) 행 용양위부사과 겸 춘추관기사관(行龍?衛副司果兼春秋館記事官) 신 송전(宋銓)
어모장군(禦侮將軍) 행 용양위부사과 겸 춘추관기사관(行龍?衛副司果兼春秋館記事官) 신 어석광(魚錫光)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공조정랑 겸 춘추관기사관(行工曹正郞兼春秋館記事官) 신 박장설(朴長卨)
어모장군(禦侮將軍) 행 용양위부사과 겸 춘추관기사관(行龍?衛副司果兼春秋館記事官) 신 허전(許?)
어모장군(禦侮將軍) 행 용양위부사과 겸 춘추관기사관(行龍?衛副司果兼春秋館記事官) 신 이일운(李日運)
어모장군(禦侮將軍) 행 용양위부사과 겸 춘추관기사관(行龍?衛副司果兼春秋館記事官) 신 이엽(李燁)
계공랑(啓功郞) 권지승문원부정자 겸 춘추관기사관(權知承文院副正字兼春秋館記事官) 신 오익환(吳翼煥)
계공랑(啓功郞) 권지승문원부정자 겸 춘추관기사관(權知承文院副正字兼春秋館記事官) 신 이현도(李顯道)
참정(參訂)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중추부사 치사봉조하(領中樞府事致仕奉朝賀) 신 김치인(金致仁)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신 정존겸(鄭存謙)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신 서명선(徐命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신 정홍순(鄭弘淳)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신 이휘지(李徽之)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 신 홍낙성(洪樂性)
숭정대부(崇政大夫) 행 용양위사직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 규장각제학(行龍?衛司直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奎章閣提學) 신 김종수(金鐘秀)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 겸 동지경연사 예문관제학(兵曹判書兼同知經筵事藝文館提學) 신 이성원(李性源)
자헌대부(資憲大夫) 행 용양위부사직 겸 지의금부사 동지성균관사 홍문관제학(行龍?衛副司直兼知義禁府事同知成均館事弘文館提學) 신 정민시(鄭民始)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 신 서유방(徐有防)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우승지 겸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承政院右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 신 이재학(李在學)
어제교열(御製校閱)
원임 규장각제학(原任奎章閣提學)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 신 이복원(李福源)
원임 규장각제학(原任奎章閣提學)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신 이휘지(李徽之)
원임 규장각제학(原任奎章閣提學)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행 판중추부사 치사봉조하(行判中樞府事致仕奉朝賀) 신 서명응(徐命膺)
원임 규장각제학(原任奎章閣提學)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신 채제공(蔡濟恭)
원임 규장각제학(原任奎章閣提學) 숭록대부(崇祿大夫) 행 판돈녕부사(行判敦寧府事) 신 황경원(黃景源)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 숭정대부(崇政大夫) 행 의정부좌참찬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行議政府左參贊兼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 신 김종수(金鐘秀)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 자헌대부(資憲大夫) 형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사 예문관제학(刑曹判書兼知經筵春秋館事藝文館提學) 신 유언호(兪彦鎬)
원임 규장각직제학(原任奎章閣直提學) 자헌대부(資憲大夫) 예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춘추관사 홍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禮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弘文館提學同知成均館事) 신 정민시(鄭民始)
원임 규장각직제학(原任奎章閣直提學) 자헌대부(資憲大夫) 행 평안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관향사 평양부윤(行平安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管餉使平壤府尹) 신 서호수(徐浩修)
자헌대부(資憲大夫) 한성부판윤 겸 지의금부춘추관사 동지경연사 오위도총부도총관(漢城府判尹兼知義禁府春秋館事同知經筵事五衛都摠府都摠管) 신 정창성(鄭昌聖)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승정원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예문관직제학 상서원정(行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藝文館直提學尙瑞院正) 신 엄숙(嚴璹)
원임 규장각직제학(原任奎章閣直提學)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참의 지제교(吏曹參議知製敎) 신 심염조(沈念祖)
규장각직제학(奎章閣直提學) 통정대부(通政大夫)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지제교(弘文館副提學兼經筵參替官春秋館修撰官知製敎) 신 정지검(鄭志儉)
원임 규장각직각(原任奎章閣直閣)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우윤 동지의금부사 지제교(漢城府右尹同知義禁府事知製敎) 신 이병모(李秉模)
원임 규장각직각(原任奎章閣直閣) 통정대부(通政大夫) 수원춘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원주목사 지제교(守原春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原州牧使知製敎) 신 김희(金憙)
원임 규장각직각(原任奎章閣直閣)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지제교(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知製敎) 신 김우진(金宇鎭)
원임 규장각직각(原任奎章閣直閣) 통정대부(通政大夫) 성균관대사성 지제교(成均館大司成知製敎) 신 서정수(徐鼎修)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承政院左副承旨兼經筵參贊 官春秋館修撰官) 신 이시수(李時秀)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성균관사예 교서관교리 별겸춘추 한학교수 중학교수 지제교 문신겸선전관(行成均館司藝校書館校理別兼春秋漢學敎授中學敎授知製敎文臣兼宣傳官) 신 김재찬(金載瓚)
원임 규장각대교(原任奎章閣待敎)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이조정랑 별겸춘추 한학교수 동학교수 지제교(行吏曹正郞別兼春秋漢學敎授東學敎授知製敎) 신 서용보(徐龍輔)
원임 규장각대교(原任奎章閣待敎) 어모장군(禦侮將軍) 행 충무위부사과 별겸춘추 남학교수 지제교(行忠武衛副司果別兼春秋南學敎授知製敎) 신 정동준(鄭東浚)
어제서사(御製書寫)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규장각직제학 지제교(承政院左副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奎章閣直提學知製敎) 신 정지검(鄭志儉)
감인(監印)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 겸 동지경연성균관사 홍문관제학(戶曹判書兼同知經筵成均館事弘文館提學) 신 이성원(李性源)
자헌대부(資憲大夫) 형조판서 겸 지춘추관사 동지경연사 오위도총부도총관(刑曹判書兼知春秋館事同知經筵事五衛都摠府都摠管) 신 정창성(鄭昌聖)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부사직 지제교 겸 선전관(行龍?衛副司直知製敎兼宣傳官) 신 심염조(沈念祖)
어모장군(禦侮將軍) 행 용양위부사과 겸 춘추관편수관(行龍?衛副司果兼春秋館編修官) 신 조성진(趙城鎭)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교서관교리(行校書館校理) 신 성대중(成大中)
규장각검서관(奎章閣檢書官) 선교랑(宣敎郞)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 신 이덕무(李德懋)
규장각검서관(奎章閣檢書官) 선교랑(宣敎郞)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 신 유득공(柳得恭)
규장각검서관(奎章閣檢書官) 선교랑(宣敎郞)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 신 박제가(朴齊家)
규장각검서관(奎章閣檢書官) 선교랑(宣敎郞) 사재감주부(司宰監主簿) 신 서이수(徐理修)
국조보감 속편(續編) 편찬 제신
봉교(奉敎) 총재대신(總裁大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신 조인영(趙寅永)
교정(校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신 정원용(鄭元容)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행 지중추부사 겸 판의금부사(行知中樞府事兼判義禁府事) 신 홍경모(洪敬謨)
숭정대부(崇政大夫) 판돈녕부사 겸 지춘추관사(判敦寧府事兼知春秋館事) 신 김난순(金蘭淳)
정헌대부(正憲大夫) 의정부좌참찬 겸 지춘추관사 규장각검교제학(議政府左參贊兼知春秋館事奎章閣檢校提學) 신 김흥근(金興根)
정헌대부(正憲大夫) 공조판서 겸 지춘추관사 규장각제학(工曹判書兼知春秋館事奎章閣提學) 신 박영원(朴永元)
찬집(纂輯)
숭정대부(崇政大夫) 판돈녕부사 겸 지춘추관사(判敦寧府事兼知春秋館事) 신 김난순(金蘭淳)
정헌대부(正憲大夫) 의정부좌참찬 겸 지춘추관사 규장각검교제학(議政府左參贊兼知春秋館事奎章閣檢校提學) 신 김흥근(金興根)
정헌대부(正憲大夫) 예조판서 겸 지춘추관사 홍문관제학 규장각제학(禮曹判書兼知春秋館事弘文館提學奎章閣提學) 신 박영원(朴永元)
자헌대부(資憲大夫) 행 수원부유수 겸 총리사 지춘추관사(行水原府留守兼摠理使知春秋館事) 신 이약우(李若愚)
자헌대부(資憲大夫) 청녕군(淸寧君) 겸 지춘추관사(兼知春秋館事) 신 김동건(金東健)
자헌대부(資憲大夫) 행 광주부유수 겸 수어사 지춘추관사(行廣州府留守兼守禦使知春秋館事) 신 조두순(趙斗淳)
자헌대부(資憲大夫) 행 용양위대호군 겸 지춘추관사(行龍?衛大護軍兼知春秋館事) 신 서기순(徐箕淳)
고교(考校)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통례원우통례 겸 춘추관편수관(行通禮院右通禮兼春秋館編修官) 신 조연창(趙然昌)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홍문관부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行弘文館副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 신 심승택(沈承澤)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성균관사성 겸 남학교수 춘추관편수관(行成均館司成兼南學敎授春秋館編修官) 신 박승휘(朴承輝)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사헌부집의 겸 춘추관편수관(行司憲府執義兼春秋館編修官) 신 이인석(李寅奭)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홍문관수찬 지제교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 동학교수(行弘文館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東學敎授) 신 정익조(鄭翊朝)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사헌부집의 겸 춘추관편수관(行司憲府執義兼春秋館編修官) 신 심의면(沈宜冕)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홍문관부수찬 지제교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行弘文館副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 신 박내만(朴來萬)
선략장군(宣略將軍) 행 용양위부사과 겸 중학교수 춘추관기주관(行龍?衛副司果兼中學敎授春秋館記注官) 신 유치숭(兪致崇)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홍문관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 신 김세균(金世均)
어모장군(禦侮將軍) 행 용양위부사직 겸 춘추관기주관(行龍?衛副司直兼春秋館記注官) 신 이교영(李敎英)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홍문관부응교 지제교 겸 경연시강관 춘추관편수관(行弘文館副應敎知製敎兼經筵侍講官春秋館編修官) 신 심응태(沈膺泰)
선략장군(宣略將軍) 행 용양위부사과 겸 춘추관기주관(行龍?衛副司果兼春秋館記注官) 신 김익진(金翊鎭)
선사(繕寫)
어모장군(禦侮將軍) 행 용양위부사직(行龍?衛副司直) 신 유진오(兪鎭五)
선략장군(宣略將軍) 행 용양위부사과(行龍?衛副司果) 신 이유응(李裕膺)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홍문관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 별겸춘추(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別兼春秋) 신 이민(李)
선략장군(宣略將軍) 행 용양위부사과(行龍?衛副司果) 신 유진한(柳進翰)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홍문관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 신 조희철(趙熙哲)
선략장군(宣略將軍) 행 용양위부사과(行龍?衛副司果) 신 김원식(金元植)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홍문관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 신 이승보(李承輔)
선략장군(宣略將軍) 행 용양위부사과(行龍?衛副司果) 신 박효묵(朴斅?)
통덕랑(通德郞) 행 사간원정언 별겸춘추(行司諫院正言別兼春秋) 신 홍우명(洪祐命)
선략장군(宣略將軍) 행 용양위부사과 문신겸선전관 별겸춘추(行龍?衛副司果文臣兼宣傳官別兼春秋) 신 김병운(金炳雲)
참정(參訂)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신 권돈인(權敦仁)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신 김도희(金道喜)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 신 박회수(朴晦壽)
숭록대부(崇祿大夫) 행 이조판서(行吏曹判書) 신 서희순(徐憙淳)
정헌대부(正憲大夫) 행 용양위대호군(行龍?衛大護軍) 신 이가우(李嘉愚)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 규장각검교직각(工曹參判奎章閣檢校直閣) 신 윤정현(尹定鉉)
통정대부(通政大夫) 성균관대사성 규장각검교대교 지제교(成均館大司成奎章閣檢校待敎知製敎) 신 남병철(南秉哲)
어제교열(御製校閱)
원임 규장각제학(原任奎章閣提學)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 신 조인영(趙寅永)
원임 규장각제학(原任奎章閣提學)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신 정원용(鄭元容)
원임 규장각직제학(原任奎章閣直提學)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판서 겸 홍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工曹判書兼弘文館提學同知成均館事) 신 김학성(金學性)
규장각직제학(奎章閣直提學)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용양위호군 겸 춘추관수찬관 지제교(行龍?衛護軍兼春秋館修撰官知製敎) 신 김대근(金大根)
규장각직제학(奎章閣直提學) 가의대부(嘉義大夫) 개성부유수 겸 관리사 춘추관수찬관 지제교(開城府留守兼管理使春秋館修撰官知製敎) 신 조병준(趙秉駿)
원임 규장각직각(原任奎章閣直閣) 숭정대부(崇政大夫) 행 수원부유수 겸 총리사(行水原府留守兼總理使) 신 김좌근(金左根)
원임 규장각직각(原任奎章閣直閣) 자헌대부(資憲大夫) 행 용양위대호군 겸 지춘추관사(行龍?衛大護軍兼知春秋館事) 신 이경재(李景在)
원임 규장각직각(原任奎章閣直閣) 가의대부(嘉義大夫) 공조참판(工曹參判) 신 김정집(金鼎集)
원임 규장각직각(原任奎章閣直閣)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용양위호군(行龍?衛護軍) 신 오취선(吳取善)
원임 규장각직각(原任奎章閣直閣)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용양위호군 겸 오위도총부부총관(行龍?衛護軍兼五衛都摠府副摠管) 신 서유훈(徐有薰)
규장각검교직각(奎章閣檢校直閣)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지제교 (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贊官知製敎) 신 윤치영(尹致英)
원임 규장각대교(原任奎章閣待敎)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 겸 예문관제학(知中樞府事兼藝文館提學) 신 김영순(金英淳)
원임 규장각대교(原任奎章閣待敎)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부호군 지제교(行龍?衛副護軍知製敎) 신 김영근(金英根)
규장각검교대교(奎章閣檢校待敎)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부호군 지제교(行龍?衛副護軍知製敎) 신 남병철(南秉哲)
규장각검교대교(奎章閣檢校待敎) 통정대부(通政大夫) 성균관대사성 지제교(成均館大司成知製敎) 신 이우(李?)
규장각검교대교(奎章閣檢校待敎)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 겸 조사오위장 지제교(僉知中樞府事兼曹司五衛將知製敎) 신 이유원(李裕元)
규장각검교대교(奎章閣檢校待敎) 어모장군(禦侮將軍) 행 용양위부사과 지제교 중학교수(行龍?衛副司果知製敎中學敎授) 신 홍순목(洪淳穆)
어제서사(御製書寫)
숭록대부(崇祿大夫) 행 호조판서(行戶曹判書) 신 서희순(徐憙淳)
감인(監印)
숭록대부(崇祿大夫) 행 호조판서(行戶曹判書) 신 서희순(徐憙淳)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신 김정집(金鼎集)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승정원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예문관직제학 상서원정 동지성균관사(行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藝文館直提學尙瑞院正同知成均館事) 신 윤치수(尹致秀)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홍문관응교 지제교 겸 경연시강관 춘추관편수관(行弘文館應敎知製敎兼經筵侍講官春秋館編修官) 신 조연창(趙然昌)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성균관전적(行成均館典籍) 신 임백연(任百淵)
규장각검서관(奎章閣檢書官) 조봉대부(朝奉大夫)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 신 김철의(金徹義)
규장각검서관(奎章閣檢書官) 조봉대부(朝奉大夫) 빙고별제(氷庫別提) 신 김주교(金周敎)
총서(總敍)
세종(世宗)이 《송사(宋史)》를 예람하다가, 국사원(國史院)에서 정사(正史)인 《실록》을 찬진한 후에 다시 또 조종의 큰 계획과 정책을 수집하여 《보훈(寶訓)》을 편찬함으로써 근신(近臣)들의 강독에 대비했다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면서 이르기를, '이것을 법으로 삼을 만하다' 하고, 예문관 대제학 권제(權?),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 등에게 명하여 태조촹태종의 원대한 계획과 정책을 발췌하여 두 임금의 《보감》을 편집토록 하였는데 결국 완성시키지 못하였다.
세조 2년(정축) 1월에 상이, 세종대왕이 마무리하지 못한 일을 완성시키고자 하여 태조촹태조촹세종촹문종의
큰 계획안과 정책을 수집하게 하는 한편, 수찬청(修撰廳)을 개설하게 하였다. 그리고 집현전 대제학 좌찬성 신숙주(申叔舟)와 집현전 대제학 판중추원사 권람(權擥)에게 모두 지춘추관사를 겸임토록 하고, 이조참의 이극감(李克堪)과 판전농시사 강희맹(姜希孟)과 판사재감사 성임(成任)에게 모두 춘추관 편수관을 겸임하게 해서 당상관을 삼고, 예문관 직제학 한계희(韓繼禧), 우보덕 직집현전 김지경(金之慶), 우문학 예문관 응교 김수녕(金壽寧)에게 모두 춘추관 기주관을 겸임하게 하고 낭청을 삼았다.
그리고 《보감》은 사실 송 나라 국사원(國史院)에서 찬술한 《보훈》의 체재를 따른 것이므로 정사(正史)인 《실록》과 병행되어야 한다고 하고, 수찬에 참여한 신하들을 모두 사관(史官)으로 칭하였다. 이듬해인 3년(무인) 1월에 7편의 책이 완성된 다음 전문(箋文)을 갖추어서 올리니, 상이 보고 잘 만들었다고 하고 당상관 5명에게는 안구마(鞍具馬)를 하사하고, 낭청 3명은 가자하였다. 그리고 다시 잔치를 열어줌으로써 수찬에 참여한 신하들이 기쁨을 만끽하고 파하였다.
서문(序文)은 다음과 같다.
예로부터 국가가 안정된 정치 속에서 오랜 세월을 면면히 이어간 경우는 그 자손들이 조종(祖宗)의 유훈(遺訓)을 잘 지켜서 감히 실추시키지 않았기 때문이고, 반대로 잠시 얻었다가 바로 빼앗겨서 국가를 오래 지속시키지 못한 경우는 선세(先世)의 유훈이 있어도 자손들이 그것을 멸시하여 버리고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체재를 계승하고 문덕을 지켜가는 훌륭한 임금이 행여 어길세라 조심조심 성헌(成憲)을 따르면서 감히 자만하거나 잘난 체하지 않는 것은 이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태조대왕은 왕업을 개창하여 자손이 이어갈 대통을 마련해 놓음으로써 그 계책을 만세에 남겼으며, 태종대왕과 세종대왕은 태평한 시대를 만나 안팎이 안정을 되찾고 공덕과 정치의 결실을 보게 되자, 국가와 민족의 실정에 알맞는 예(禮)와 악(樂)을 제정하여 백성과 함께 하였다. 문종대왕도 왕업을 제대로 계승하여 정치를 잘하였다. 대체로 네 임금의 훌륭한 법과 관대한 정치를 비롯하여 성모(聖謨)가 사업에 투영되고 성정(聖情)이 언행에 보이는 것들이 《실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만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것들이 금궤(金?)에 보관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천순(天順) 원년(元年) 봄에 우리 전하께서 신숙주 및 지춘추관사 권람, 편수관 이극감에게 명하기를,
"과매한 내가 왕업을 계승하였으니 제대로 감당해내지 못할까 두렵지만 오직 조종(祖宗)을 법으로 삼아 최선을 다하고 감히 안주하지는 않겠다. 세종께서 일찍이 권제와 정인지 등에게 명하여 태조, 태종 두 임금의 《보감》을 편집하게 하였으나 착수하지 못했다. 그대들이 네 임금의 계책과 교훈을 찬술토록 해서 과매한 나로 하여금 선왕의 사업을 기술할 바가 있게 하고 또 자손들로 하여금 대업을 쌓아가는 것이 어려운 만큼 천명을 응집시키고 인심을 결집시키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라."
하시어, 신들이 엄명을 받들어 감히 실력이 부족하다고 사양하지 못하고 책을 완성하여 올렸는데, 나 신숙주에게 서문을 지으라고 명하셨다.
삼가 생각건대, 상(商) 나라 탕왕이 박(?) 땅의 왕업을 열어놓으니 6, 7명이나 되는 훌륭한 임금이 계승하였고, 문왕과 무왕이 주(周) 나라의 왕업을 마련해 놓으니 성왕과 강왕은 그것을 잘 지켜왔고 선왕(宣王)은 중흥시켰다. 이렇듯 상 나라와 주 나라의 사직이 수백 년에 달했지만 조종(祖宗)이 남기신 교훈을 잘 지키는 정도에 불과했다. 우리나라 열성(列聖)께서는 성신(聖神)으로 서로 계승하여 제왕의 도를 천양함에 있어서 그 덕이 여러 임금들보다 높았고 사물의 변화하는 양상을 꿰뚫어 지혜가 만물에 미쳤다. 행동거지와 호령을 내리는 것이 모두 지극한 이치요 지극한 도리였다. 열성들은 이미 가고 없지만 그 정신과 사상은 이 책에 깃들어 있다. 자손들로 하여금 이 점을 생각하게 해서 조종이 정사에 근면하던 모습과 강학하던 모습을 보게 되면 마음을 가다듬어서 정치에 반영하는 도리를 생각하게 될 것이고, 조종이 구언(求言)하던 모습과 납간(納諫)하던 모습을 보게 되면 사견을 버리고 타인의 의사를 존중하는 아름다움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성실히 보살펴야 한다는 훈계를 체득하게 되면 반드시 천명과 인심의 사이에 신중을 기하게 되고, 어진 자는 등용하고 사악한 자는 물리쳐 버리는 계책을 법으로 삼는다면 군자와 소인의 정리를 판단하는 기준이 설 것이니, 어느 것을 끌어다가 활용해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항상 선왕이 앞에 와서 계신 것처럼 여긴다면 필시 조심하는 마음이 들어서 스스로를 반성하게 될 것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서 차마 엉뚱한 짓은 못할 것이다. 이렇게만 한다면 내가 먹은 마음이 바로 조종의 마음이 될 것이고, 내가 하는 정치가 바로 조종이 계획했던 정치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二帝)와 삼왕(三王)의 정치는 언급할 것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이 책은 영원히 우리 자손들의 보감(寶鑑)이 될 것이고 우리 전하께서 조종을 받들어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것들을 선양해서 후손들에게 남겨준 법이라 하겠다. 아, 극진한 배려가 아닐 수 없다.
천순(天順) 원년 12월 일 수충협책정난동덕좌익공신(輸忠協策靖難同德佐翼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 집현전대제학 지춘추관사 겸판병조사 성균대사성(議政府左贊成集賢殿大提學知春秋館事兼判兵曹事成均大司成)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는 삼가 서문(序文)을 쓰다.
전문(箋文)은 다음과 같다.
수충협책정난동덕좌익공신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집현전대제학 지춘추관사 겸판병조사 성균대사성 고령군 신숙주, 수충위사협책정난동덕좌익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同德佐翼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중추원사 집현전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판이조사(判中樞院事集賢殿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兼判吏曹事) 길창군(吉昌君) 권람(權擥), 추충좌익공신(推忠佐翼功臣)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참의 겸춘추관편수관(吏曹參議兼春秋館編修官) 이극감(李克堪) 등이 삼가 교지를 받들어 《국조보감》의 찬술 작업을 마친 다음 이렇게 선사(繕寫)하여 올리면서, 신 숙주(叔舟) 등은 황공한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상언(上言)합니다.
삼가 제왕의 세계(世系)에 의한 천운에 따라 열성(列聖)의 탄탄한 기반을 계승하시니 금궤에 보관해 둔 글이 실로 만세의 표본이 됩니다. 좁은 식견이지만 최선을 다해 이 글을 편찬해서 성상께 올립니다. 살펴보건대 요순(堯舜)의 공덕은 전모(典謨)를 상고하여 들어서 쓸 수 있고 문무(文武)의 정치는 서책에 그대로 실려 있어서 실추되지 않고 있으니 이는 모두 당시의 헌장(憲章)을 완비해서 후인의 모범이 되게 한 때문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태조대왕께서는 타고난 용맹 지략과 날로 치솟는 성인다운 공경으로 삼척검(三尺劍)을 들고 큰 공로를 세워 왕업을 처음으로 열어놓았고 임금의 자리에 올라 관대한 정치를 펴서 후손에게 넘겨주셨습니다.
태종대왕은 성덕이 몸에 있으셔서 사물에 앞서 그 기미를 살피셨고, 난리를 무력(武力)으로 평정하여 종묘 사직을 다시 안정시켰으며, 문덕(文德)으로 태평시대를 이루어 예악과 형정(刑政)이 사방에 달하였습니다.
세종대왕은 세상에 보기 드문 임금으로 가능성이 있는 시기를 당하였으니 우뚝 솟은 공렬과 빛나는 글은 그 제작이 삼대(三代)에 앞서며 인(仁)으로 감화를 시키고 의(義)로 연마를 하시니 그 교화가 군생(群生)에 흡족하였습니다. 문묘(文廟)를 계승함에 미쳐서 마련해 두신 법을 살펴서 잘 지켰습니다. 요(堯)와 순(舜)이 주고받은 것은 모두 유정유일(惟精惟一)의 사상을 가지고 전수한 것이며, 우(禹)와 고요(皐陶)가 서로 문답한 것은 모두 어느 때 무슨 일이든지 천명을 경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조종의 모훈(謨訓)은 실로 자손의 표본이 됩니다. 문무성신(文武聖神)과 총명예지(聰明睿智)를 두루 갖춘 주상전하께서는 음양의 섭리에 입각하여 기준을 세우시고서 항상 큰 일을 놓칠까 염려하셨고 사성(四聖)을 계승하여 거듭 빛내시고도 앞으로 지켜가야 할 도리를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이에 사국(史局)에다 분부하여 이 작업을 착수하게 하시니 신들은 모두 보잘것없는 자질을 가지고 성상의 성대한 위임을 받았기에 회요(會要)의 남긴 뜻을 체득하고 장고(掌故)의 오랜 법을 수집하였습니다. 정령(政令)을 알맞게 실시하는 그 요점을 대략 기술해서 세상에 교육의 요점을 제시함으로써 정치의 강령을 모두 제시하였습니다. 비록 편마는 정밀하게 못했지만 살펴보기에는 편리하게 하였습니다. 더욱 살피시고 받아들여서 시행할 수 있게 하소서. 예나 지금이나 알맞으니 잘하는 정치에 아름다움을 더하게 되었고, 잘도 계승하고 잘도 기술하셨으니 다시 복력(卜曆)의 장구함을 기약하게 되었습니다. 신들은 북받치는 두려움에 몸둘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삼가 전문을 함께 받들어 올립니다.
천순 원년(天順元年) 12월 일에 수충협책정난동덕좌익공신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집현전대제학 지춘추관사 겸판병조사 성균대사성 고령군 신숙주, 수충위사협책정난동덕좌익공신 숭정대부 판중추원사 집현전대제학 지
경연춘추관사 겸판이조사 길창군 권람, 추충좌익공신 통정대부 이조참의 겸춘추관편수관 이극감 등은 삼가 전문을 올립니다.
예종(睿宗)은 일찍이 《세조보감》을 찬집하게 해서 《국조보감》에 연속시키고자 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성종(成宗) 2년(신묘) 9월에 상이 보경당(寶慶堂)에 거둥하여 밤에 입직한 경연관 박효원(朴孝元)을 불러 《국조보감》을 강하였는데, 대체로 송 나라 때 근신(近臣)들이 《보훈(寶訓)》을 강하던 규례를 적용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술을 하사하였다. 이후부터는 경연관 2원을 입직하게 하였다. 10년(기해) 5월에 영의정 한명회(韓明澮)가 상주(上奏)하기를,
"태조촹태종촹세종의 성덕과 대업이 《국조보감》에 실려 있는데 세조조는 아직도 빠져 있습니다. 세조의 말씀과 병법(兵法)을 찬집하여 책으로 만들어서 《국조보감》에 연속시키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고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에게 명하여 편찬해서 올리도록 하였는데, 끝내 완성시키지 못하였다. 지금 문원(文苑)의 고가(故家)에 간혹 세조와 성종 때의 일을 기록한 필사본 《속보감(續寶鑑)》이 있는데, 서거정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의례(義例)는 《보감》과 크게 다르고 문체가 마치 패관소설(稗官小說)과 같으며, 또 《필원잡기(筆苑雜記)》를 많이 인용하였는데 《필원잡기》는 바로 서거정이 지은 것이니, 필시 자기가 쓴 글을 인용할 리가 없다. 더구나 서거정은 성종 때에 졸하였으니 《성종보감》을 미리 찬술하였을 리도 없다. 그것이 위작이라는 것을 단연코 알 수 있겠다.
중종(中宗) 31년(병신) 5월에 찬집청(撰集廳)을 설치하여 조종조의 아름다운 법과 훌륭한 정치를 편찬해서 《국조보감》에 연속시키게 하였다. 찬집청이 장차 춘추관의 실록을 상고하려 하자, 부제학 성륜(成倫) 등이 아뢰기를,
"실록을 상고하는 문제는 매우 중대한 일입니다. 더구나 조종에 대하여 법으로 삼을 만한 일은 《국조보감》에 모두 실려 있으니 지금 다시 편찬한다고 하더라도 또 다시 더할 것이 없고 폐조(廢朝)의 경우 경계로 삼을 만한 일에 있어서도 보고 들은 시기가 오래지 않으니 찬집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로부터 큰 일이 있으며 《실록》을 상고하는 것은 규례이다. 《보감》을 찬집하면서 《실록》을 상고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찬집청을 이미 설치하였으니 중지할 수 없다."
하였다. 그러나 끝내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명종(明宗) 2년(정미) 6월에, 군자감 판관 윤령(尹齡)이 《국조보감유초(國朝寶鑑類抄)》 2권을 찬진하였는데, 28개 항목으로 구성하였다. 그 항목은, 다스림[爲治], 학문함[爲學], 경연에 근면함[勤經筵], 효도와 우애에 힘씀[敦孝友], 학교를 진흥시킴[興學校], 교화를 밝힘[明敎化], 예절과 음악을 논의함[議禮樂], 이단을 물리침[闢異端], 대신을 공경함[敬大臣], 언로를 개방함[開言路], 능력자를 등용함[求賢能], 인재를 판별함[辨人才], 수령을 잘 가림[擇守令], 농업과 양잠을 권장함[勸農桑], 형벌을 신중히 함[愼刑罰], 요역을 줄임[省?役], 경외하는 마음을 숭상함[崇敬畏], 천재를 조심함[欽天災], 백성들의 질병을 걱정함[勤民?], 감계에 주의함[謹鑑戒], 검약을 숭상함[崇儉約], 안일과 욕심을 경계함[戒逸欲], 세자를 보양함[養世子], 외척 등을 가르침[敎戚屬], 환시들의 자행을 막음[防宦侍], 변방 장수를 존중함[重邊將], 무비를 엄격하게 함[嚴武備], 이적들을 잘 다스림[馭夷狄]이었다.
상이 그 뜻을 가상하게 여기고 첨정(僉正)으로 승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인조(仁祖) 19년(신사) 1월에 대제학 이식(李植)이 상차하였는데, 그 내용 중에 '《선묘실록》을 기자헌(奇自獻)과 이이첨(李爾瞻) 등이 구록(舊錄)을 몰래 삭제하고 멋대로 무필(誣筆)을 첨가하였으니 그 행위가 마치 장돈(章惇)과 채경(蔡京)이 선인 고왕후(宣人高王后)를 무함했던 것과 간궤(姦軌)가 동일합니다. 아직 없어지지 않은 야언(野言)과 가록(家錄)을 국(局)을 열어서 다시 찬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또 대신의 말에 따라 이식이 집에서 편찬할 수 있게 전적으로 일임하였다. 그리고 전교하기를,
"찬수를 마친 후에 후세에 모범이 될 만한 성모(聖謨)를 초출하여 별도로 한 책을 만들어서 올리도록 하라."
효종(孝宗) 5년(갑오) 4월에 전교하기를,
"옛사람의 말에 '요순을 법으로 삼고자 하면 마땅히 조정을 법으로 삼아야 한다.' 하였다. 자손으로서 마땅히 준행해야 할 것은 《국조보감》만한 것이 없는데 요즘 세상에는 보기가 쉽지 않다. 이 책을 교서관으로 하여금 인출해서 널리 반포하게 하라."
하니, 참찬관 김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현재 《국조보감》은 문종조(文宗朝) 이상까지만 수록되어 있습니다. 세조조(世祖朝)부터 선조조(宣祖朝)까지의 사실을 민간에서 더러 수집해 둔 것이 있으니, 이번 기회에 국(局)을 설치하여 이것까지 연속해서 편찬하여 전서(全書)를 만들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 말을 받아들여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더니, 대신들이 모두 찬성하였으며,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는 누구보다 더 적극성을 보였다. 그래서 국을 설치하도록 하고 김수항(金壽恒)을 도청(都廳)으로 삼았는데, 결국 완성하지 못했다.
숙종(肅宗) 6년(경신) 11월에 공조 참판 이단하(李端夏)가 상소하기를,
"신의 아비가 실록을 개수(改修)하던 날에 직접 인조대왕께서 내리신 '작업을 마친 뒤에 《실록》 중에 후세에 모범이 될 만한 성모(聖謨)를 간추려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올리라.'는 분부를 받았는데, 그 일을 완성하지 못하고 신의 아비가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말았으니 이것이 저에게는 가장 큰 유감입니다. 지금 그 범례를 참고하기 위해 선묘조(宣廟朝)의 《수정실록》을 이봉(移奉)하면서 《국조보감》에서처럼 모열(謨烈)과 정교(政敎)를 초출해서 임금께서 보실 수 있게 한다면 선왕의 법을 기준으로 삼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의 아비가 분부를 받고도 마무리하지 못한 한도 오늘에 와서 풀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 상소를 비국에 내리자, 비국이 복주하기를,
"이단하의 아비인 고 대제학 이식이 직접 인조의 분부를 받았으나 그 일을 완성하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지금 비사(?史)를 뽑아서 열람하는 마당에 이단하에게 이 일을 겸임하여 그 사실들을 간추려 책을 완성하게 함으로써 인조의 성명(成命)에 부응하고 그 아비의 못다 한 뜻을 마무리할 수 있게 한다면 공적으로 보나 사적으로 보나 다 원만할 것입니다. 모두 상소 내용대로 시행하소서."
하였다. 그후 7년(신유) 1월에 이단하가 비국 당상으로서 차대(次對)에서 주달하기를,
"고 상신 이경여(李敬輿)가 효묘조(孝廟朝)에 건의하여 《국조보감》을 계속해서 편찬하기를 간청한 일이 있었는데 지금 영상 김수항이 도청이 되었지만 아직도 착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실록청에서 당상관 한 사람을 더 차출하여 이 일을 전담하게 하소서. 강화유수 이선(李選)이 고열(考閱)에 남다른 안목을 갖고 있으니 그에게 위임해서 완성할 수 있게 하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는데, 결국 완성시키지 못했다. 10년(갑자) 4월에 이단하가 《선묘보감》 10편을 편찬하여 차자와 함께 올리니, 상이 하교하여 칭찬하고 말을 하사하라고 분부하였다.
차자(箚子)는 다음과 같다.
의정부 좌참찬 이단하는 삼가 아룁니다. 신의 선부(先父)인 이식(李植)이 인조조(仁祖朝)에 상차하여 선묘조의 날조된 역사를 바로잡기를 간청하자, 조정이 그 작업을 일임했습니다. 인조(仁祖)가 '편찬하는 작업을 마친 뒤에 후세에 모범이 될 만한 성모(聖謨)를 뽑아 별도로 한 책을 만들어서 올리도록 하라.'고 분부하셨는데, 일을 끝마치기 전에 신의 아비가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저에게는 가장 큰 유감입니다.
신이 경신년 겨울에 선조(先朝)의 《실록》을 개수하는 임무를 받았기에, 삼가 선묘조(宣廟朝)의 《수정실록》에서 그 범례를 참고하기 위해 이봉(移奉)하였습니다. 만일 그 중에서 《국조보감》에서처럼 모열(謨烈)과 정교(政敎)를 초출해서 임금께서 보실 수 있게 한다면 선왕의 법을 기준으로 삼는 데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의 아비가 분부를 받고도 마무리하지 못한 한을 이제는 풀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뜻으로 상소하여 간청하였더니, 묘당에 내려 복의(覆議)하게 하였습니다. 묘당의 복의가, 상소의 내용에 따라 시행하기를 청하여, 상께서 그것을 윤허하셨습니다.
신이 《선묘실록》 전부를 살펴보고 간추려서 4책으로 만든 다음, 사원(史院)의 여러 동료들에게 두루 보이고 총재관의 면밀한 검토와 산정을 거쳤으며, 또 탑전에 품달하여 책명을 《선묘보감》으로 하자고 청하였습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효묘조(孝廟朝) 고 상신(相臣) 이경여(李敬輿)가 《국조보감》을 계속적으로 편찬하기를 건의하여 국(局)을 설치하려 했다가 못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 일을 다른 날에 혹시라도 다시 거행하게 되면 이번에 뽑은 것을 편입시키는 것이 좋을 듯해서 그래서 책명을 《보감》으로 한 것인데, 미처 올리지 못하고 신이 갑자기 시골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뒤에 총재관의 진달로 인하여 옥당으로 하여금 교정(校正)과 선사(繕寫)를 함께 해서 올리도록 하였는데, 유신(儒臣)이 초본(草本)을 보니 의문나는 곳이 많아서 임금께 올릴 것을 베껴 두는 문제에 대해서는 신이 올라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지금 신이 서울에 와서 직접 보고 다시 교정을 보아 대략 오류를 바로잡기는 했지만, 다시 《실록》 인출본과 대조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의심스러워서 확정지을 수 없는 문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록》을 직접 본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이기도 하고 또 단지 이 일 때문에 사고(史庫)를 열기를 계청하는 것은 불가한 문제였습니다. 일후에 만일 실록을 참고하라는 분부가 있을 경우 옥당이 주어(奏御)한 책까지 내오기를 청하여서 참고하는 것도 사의에 합당한 일인 듯하기에 의문되는 부분을 지금 우선 책 상단에다 찌를 붙여 올립니다.
신이 또 생각건대, 국조의 맨처음 《보감》은 다섯 임금의 사실인데 3책에 불과하고, 이번에 초출한 것은 한 임금의 일인데 4책이나 됩니다. 분량의 차이가 나는 것 때문에 보는 사람이 이것을 의심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고사(古史)를 보면 책수가 많고 적은 것은 사적(事蹟)이 번잡하냐 간단하냐에 달려 있고 일정한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선묘조(宣廟朝)에는 왕권이 극에 달하여 무너지고 큰 난리통에 중흥을 하다보니 국조에 일 많기로는 이 시기만한 때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현인들의 행위를 통해 예우가 비상했던 성상의 덕망에 대해 알 수 있고, 충신의 절의를 통해 타고난 인재 양성의 성화(聖化)를 볼 수 있습니다. 왜구를 토벌한 사실에서는 더욱 성조 공렬을 알 수 있으니, 지나간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 앞으로 다시 실책을 범하지 않도록 하는 방도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 세 가지에 대해서는 보다 상세하게 수록하였습니다. 후일 《보감》을 이어서 편찬할 때에 그대로 두거나 삭제를 하거나 하는 문제는 그 당시 붓을 잡은 자의 견해에 달려있기 때문에 신은 지금 많이 추출한 것을 가지고 혐의롭게 여기지는 않겠습니다. 총재관의 의견 역시 그렇습니다. 오직 성명께서 살펴주소서. 신이 이 일을 맡고서 오랫동안 완성시키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서야 올립니다만 소략하거나 잘못된 부분이 아직도 많습니다. 그저 황공할 뿐입니다. 재결(裁決)해 주시기 바랍니다.
영조(英祖) 5년(기유) 9월에 상이 태조촹태종촹세종촹문종촹선조는 모두 《보감》이 있는데 그 밖의 열조(列朝)는 모두 누락되었다는 것을 문제로 삼고 기존 《보감》에 이어서 계속적으로 편찬하여 일관된 문자로 만들고자 하여 대신에게 문의하였더니, 모두 좋다고 하였다. 그래서 문학에 안목이 있는 사람을 잘 가려 뽑아서 편집을 준비하도록 명하였다가 결국 사체(事體)가 중대하여 쉽사리 성취시킬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그 명을 취소하였다. 이어서 전 대제학 윤순(尹淳)에게 명하여 지춘추관사를 겸하게 하고 찬집청을 설치하여 《숙묘보감》을 편찬하게 하였다.
그해 10월에 범례(凡例) 세 개 조항을 어필로 써서 내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이번에 이 《보감》을 찬집하라고 한 것은 우리 성고(聖考)의 40여 년 동안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보살피고 정사에 최선을 다하고 간언을 따르고 선비를 우대하며 검소를 실천하신 성대한 공렬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니, 아무리 정밀하게 뽑아 편찬한다 하더라도 낱낱이 기록할 수는 없다. 장주(章奏)인 경우는 단지 어떤 일로 인하여 포상을 내린 것만 기록하고 원소(原疏)도 《국조보감》의 예에 의거하여 그 대략만 기록하도록 하라.
1. 기해년의 예설(禮說)에 대한 일은 우리나라 예이니만큼 어찌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전후의 장주(章奏)가 매우 많아 사(史)도 있고 기(記)도 있는데 만일 일일이 기록한다면 지극한 덕을 간결하게 해서 널리 드러내는 뜻이 아니며, 또 요약해서 사람을 깨우치게 하는 것도 아니니 모두 기록하지 말도록 하라.
1. 사문(斯文)에 관한 일은 바로 유림들 사이에 일어난 일이므로 국가의 예절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그리고 사설(辭說)이 호번하여 사(史)에 수록한 것도 있으며 기(記)에 수록한 것도 있으니, 지금 예설을 수록하지 않는 것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일체 수록하지 말도록 하라.
때마침 장령 신처수(申處洙)가 예설과 사문을 《보감》에 수록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발계(發啓)하여 윤순을 논핵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예설(禮說)과 사문(斯文)에 관한 기록을 수록하지 말라는 것은, 이미 직접 써서 내린 범례(凡例)에 제시했는데, 오늘날 어떤 신하가 감히 이의를 제기한단 말인가. 그가 발계한 것도 보면 말만 엉뚱할 뿐이 아니다. 사문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어찌 왕실을 높이는 데에 비할 수 있겠는가. 군부(君父)의 수서(手書)를 준수하지 않고 막중한 《보감》을 저지한 자는 결코 예사로운 규정에 따라 처치할 수 없다. 신처수를 갑산부(甲山府) 극변(極邊)으로 멀리 귀양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이 일 때문에 윤순(尹淳)이 수어사(守禦使)의 밀부(密符)를 반납하고 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상이 누차 출사하기를 권했지만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사성 이덕수(李德壽)에게 명하여 춘추관 수찬관을 겸하고 당상관(堂上官)을 대임하여 편찬 사업을 전담하게 하는 한편, 부호군(副護軍) 유엄(柳儼)은 춘추관 편수관을, 홍문관 교리 정우량(鄭羽良)은 춘추관 기주관을, 사간원 정언 윤지원(尹志遠)과 부사과 이재후(李載厚)와 승문원 부정자 남태제(南泰齊)촹박수(朴璲)촹유일(柳逸)촹남태온(南泰溫)은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게 하고 모두 낭청으로 삼았다.
12월에 다시 범례(凡例) 한 개 조항을 써 내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신사년 10월 8일 대처분(大處分) 중 비망기의 내용이 매우 분명하고 엄격하였다. 어찌 후세에 사라지게 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다시 제기하는 것은 차마 잊지 못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국승(國乘)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므로 여기에는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고 범례에 대략 기술해서 후세에 전한다.
6년(경술) 2월에 이덕수가 15편의 책을 만들어서 전문(箋文)과 함께 올리니, 상이 당상관에게 안구마를 하사하고, 낭청 유엄과 정우량은 가자하고, 윤지원 이하는 모두 승서(陞敍)하였다.
전문(箋文)은 다음과 같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성균관대사성 겸춘추관수찬관 지제교(成均館大司成兼春秋館修撰官知製敎) 신 이덕수(李德壽)는 삼가 교지를 받들어 《숙묘보감》의 편찬을 마치고 성실히 선사(繕寫)해서 올립니다. 그리고 신 이덕수는 황공스러운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상언(上言)합니다.
삼가 선왕을 사모하는 성모(聖慕)를 부쳐서 큰 사업을 해보고자 하여, 비각(?閣)에 둔 글을 열람하여 사실대로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이제는 편찬의 공정을 다 마쳤기에 임금께서 한가한 시간에 보시기를 주제넘게 기대해 봅니다. 모르긴 해도 성고(聖考)의 40여 년의 공적은 실로 후왕들에게 영원한 모범이 될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선왕의 덕은 상하 사방에 두루 통해서 미더움을 받았고, 정성을 다하여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는 공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습니다. 완벽하지 못한 전장(典章)을 다시 보완하니 규정과 제도가 다 빛나고, 유신(儒臣)을 예우하니 오가는 깃발과 예물이 길을 이었습니다. 정치와 교육은 위로 삼대(三代)를 갈음할 만하고 인자함과 은혜로움은 모든 곳에 두루 미쳤습니다. 오직 정령을 실시하는 사이에 일마다 요순과 부합하였으므로 글과 말이 모두 전모(典謨)에 잘 맞았으니 마땅히 책으로 만들어서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사업을 기술한 데에서 효성은 더욱 드러나고 기반을 계승한 데서 도리는 더욱 빛납니다. 뭇 신하들을 신칙하여 한층 더 정밀하게 하니 치우침도 무리지음도 없고, 열성을 법으로 삼아 정치를 바로잡았으나 잘못을 탓하거나 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법이 되는 효성은 전에 없던 휘열(徽烈)이 모이게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이 편찬하는 직책을 맡기는 했지만 윤색(潤色)한 공은 적습니다. 취사(取捨) 문제는 모두 성상께 품달하여 재가를 받았고 논찬(論撰) 문제는 곧 《실록》을 근거로 하였습니다. 하늘과 땅의 온축한 정도를 파악하지 못하면서 감히 요점을 들어 강령을 제시할 수 있겠습니까만 다만 편찬에 게을리하지 않은 정성
을 쏟음으로써 오직 사실대로 기록하고 사실대로 발췌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대체로 시기에 알맞게 활용할 수 있는 일상적인 것도 신중을 기해서 쓰지 않은 경우가 없지만, 바꿀 수 없는 대원칙에 관계되는 것은 별도로 순서를 정하여 수록하였습니다.
참으로 정일(精一)에 의한 마음을 전하는 법에 도움이 될 것이니, 어찌 아침저녁으로 눈요기하는 자료만 되겠습니까. 행동과 말씀을 기록하면서 작은 선(善) 하나라도 놓칠까 염려하였고 나름대로 규칙을 갖고서 우러러 선열들을 법으로 삼기를 기대하였습니다. 하늘을 바라고 성상을 우러르는 간절함에 두려운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삼가 전문을 함께 받들어 올립니다.
상의 6년(경술) 2월 일에 통정대부 성균관대사성 겸춘추관수찬관 지제교 신 이덕수는 삼가 전문을 올립니다.
정조(正祖) 5년(신축) 7월에 하교하기를,
"실록이 완성되었으니 우리 선왕의 50년 동안의 성대한 공렬을 세상에 영원히 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비사(?史)를 석실(石室)에 보관해 두는 것은 아무에게나 보여주거나 들려주어서는 안 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오직 《보감》은 성덕(聖德)을 갖추 기술하여 천양(闡揚)하는 정성을 부치는 것이다. 그러나 전편(前編)의 조례에 각각 다른 점이 있으니, 널리 찾아보고 상세히 물어서 처음을 삼가는 체모를 잃지 않는 것이 실로 사의에 합당하다.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 각신은 내일 입시하게 하라."
하였다. 다음날, 상이 함인정(涵仁亭)에 거둥하여 제신을 불러서 《영조보감(英祖寶鑑)》의 의례(義例)에 대해 물었다. 그런 후에 상이 이르기를,
"지금 경들을 부른 것은 의도한 바가 있어서이다. 광묘조(光廟朝)에 《보감》을 편찬한 후로 단지 선묘(宣廟)와 숙묘(肅廟) 두 임금의 《보감》만 있고 나머지 열두 임금은 아직도 글이 정리되지 않았다. 비단 세 《보감》이 하나로 통일된 문자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들은 바에 의하면 《국조보감》이 한동안 전해오지 않다가 100년 전에 처음으로 고로(故老)의 집에서 얻어가지고 인출하여 세상에 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러 《보감》이 서로 연속되지 않고 각각 따로 있게 한다면 세월이 흐르고 일이 지나가고 나면 또 《국조보감》이 한동안 전해지지 않던 것처럼 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이번 기회로 인하여 열두 임금의 《보감》과 세 《보감》 및 《영묘보감》을 모두 편찬하여 한 책으로 합본을 만든다면 열성조(列聖祖)의 덕업(德業)을 천양하고 열성조가 계획한 일을 이루는 데에 있어서 두 가지가 다 거의 만족스러워지지 않겠는가. 경들은 어떻게 여기는가?"
하니, 신하들이 일제히 대답하기를,
"이는 여러 임금 동안 미처 착수하지 못했던 일이니 만약 완성시킬 수만 있다면 이는 어찌 우리나라의 억만년 동안 누릴 경사가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그리하여 상이 조준(趙?)촹이명식(李命植)촹김익(金?)에게 지춘추관사를 겸임하게 하고 찬집 당상에 차정하여 영조조의 사실을 편차해서 교정소(校正所)로 보내도록 명하였다. 또 원임 대제학 이복원(李福源)과 서명응(徐命膺)에게 명하여 이식(李植)과 이덕수(李德壽)의 예에 따라 집에서 교정을 보아서 《보감》의 체재를 완성시키게 하였다. 그 낭청 세 사람에게는 편수관과 기주관과 기사관을 겸하게 하고 원임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에게 검섭(檢攝)을 담당하게 하였다.
《영묘보감》을 완성하고 나서 열두 임금의 《보감》까지 차례로 작업을 하였다. 상이 춘추관 당상을 시켜 외사고(外史庫)의 《실록》을 간추려낼 즈음에 음식 등의 제공을 외읍이 담당해야 하는 폐단과 서두르다 보면 빠뜨리게 되는 걱정이 있을까 염려하였다. 이에 전교하기를,
"그전 선묘조에 《동국명신록(東國名臣錄)》을 찬술하면서 열조의 《실록》을 상고하도록 명하였던 사실이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 유고(遺稿)의 부록 중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조신(朝臣)의 언행(言行)을 기록하면서도 오히려 《실록》을 상고하는데, 더구나 《보감》을 찬차하는 경우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리고 《실록》은 개수(改修)로 인하여 수차례 이봉(移奉)한 전례가 있다. 《보감》을 찬차하는 것이 어찌 《실록》을 개수하는 것과 다른 점이 있겠는가."
하고, 이어서 춘추관 당상관에게 명하여 강화(江華) 정족산성(鼎足山城)에 가서 정종촹단종촹세조촹예종촹성
매번 한 편이 끝날 때마다 계속해서 교정소(校正所)로 보냈는데 교정소에서는 《영묘보감》을 교정보던 규정대로 하였다. 교정소의 거취(去取)와 증손(增損) 문제는 또 규장각에서 모두 상에게 품달하여 재가를 받아서 거행하였다. 예악(禮樂)의 도수에서부터 전장(典章)의 연혁에 이르기까지 《실록》에 수록된 것이 미비하거나 명유(名儒)가 의문을 제기한 것을 많이 연구해서 밝혀 놓았다. ― 예를 들면 문종의 사당을 협실로 이봉한 것은 본래 연산조(燕山朝)의 일인데 전후의 예를 의논하는 신하들이 다 알지 못하는 것을 지금 그것을 표출하여 기록하였다. 종묘의 아악과 속악을 구성(九成)으로 하는 변론에 대해서 전후의 이름난 선비와 훌륭한 신하들이 다 보지 못했던 것을 지금 발휘해서 밝혀놓았다. 검교(檢校)의 직관(職官)에 대해서 사람들이 그 본말을 알지 못하고 있는데 지금 그것을 정종조(定宗朝) 편에다가 소상하게 실어놓았으며, 해자낭제(亥子囊制)에 대해서 세상에서는 그것이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는데 지금 그 내용을 성종조 편에다가 자세하게 적어 놓았다. 이와 같은 종류의 내용이 매우 많다. 이것은 모두 성지(聖旨)에 의한 것이다. ― 이어서 세 《보감》의 의례(義例)를 참고하여 68권으로 합본하였다. 그러고도 미처 정갈하지 못한 것이 있을까 염려하여 다시 시임 대신, 원임 대신 및 시임 문임(文任)에게 명하여 반복해서 교정을 보아가지고 다시는 고칠 것이 없게 한 뒤에 감인청(監印廳)을 설치하여 새기도록 하였다.
상이 세 《보감》의 인출에 모두 활자(活字)를 사용하도록 하였는데, 활자로 전서(全書)를 인출하는 것 역시 선왕의 뜻을 받들어 사업을 계승하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나 활자는 약간의 종이만 겨우 찍어내고 나면 곧바로 해체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 영구적으로 전할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한다고 여기고서 우선 활자로 한 책을 찍어서 그 한 책을 가지고 재목(梓木)에다 번각하여 선왕의 정신과 사업을 계승 발전시키는 취지와 영구적으로 전할 수 있는 방법 모두를 병행하여 폐지되지 않게 하라고 명하였는데, 그 일을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작업을 완료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300년 동안 열성조가 뜻한 일이 이번에 비로소 이루어졌고 또 그 편서(編書)의 규모와 의례(義例)도 세종조의 중요한 정사(政事)를 모두 수록한다는 근본 취지와도 잘 맞고 보면 세종조에 뜻했던 일을 이제서야 비로소 대완성한 셈이다.
6년(임인) 11월에 일을 감독했던 여러 신하들이 진서의(進書儀)에 따라 상께 책을 올리니, 상이 직접 공손한 자세를 하고서 그 책을 받았다.
처음에 상이 일을 맡은 여러 신하들에게 하교하기를,
"옛날에 《경국대전》을 완성하고 나자, 세조의 뜻하신 사업을 이루었다 하여 세조의 사당에다 고헌(告獻)한 일이 있다. 그렇다면 이 《보감》이야말로 어찌 열성조의 뜻한 사업 중에서 큰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책을 완성한 뒤에 국법에 따라 종묘에다 고헌하도록 하고 마치 대훈(大訓)과 보기(寶器)를 주(周) 나라 사당에다 간직해 둔 것처럼 이것도 이어서 각실에다가 보관해 두도록 하라."
하였다. 그래서 책보(冊寶)를 올리는 의식을 적용하여 종묘에 고헌하였다. 그리고 각실의 《보감》을 서궤(書櫃)에 담아 각실에다 보관함으로써 만세의 규정이 되게 하였다.
순조(純祖) 19년에 옥당(玉堂) 조정화(趙庭和)가 상소하여 정조조(正祖朝) 《보감》을 찬집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대신에게 묻자, 우의정 남공철(南公轍)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요청하고 싶었던 일입니다. 즉시 국(局)을 개설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상이 허락했으나 결국 착수하지 못하였다.
헌종(憲宗) 12년(병오) 7월에 상이 대신에게 이르기를,
"《국조보감》을 정종조 이후로는 아직도 이어서 찬집하지 못했는데 그동안 겨를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순종(純宗)과 익종(翼宗)의 《보감》을 함께 편찬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이 아뢰기를,
"정말 궐전(闕典)이 되었으니 편찬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는데, 이듬해 정미년(1847) 2월에 상이 또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을 불러서 보고 하교하기를,
"《보감》을 지금 계속해서 편찬하도록 하라."
하니, 영중추부사 조인영(趙寅永)이 아뢰기를,
"선왕의 정신과 사업을 계승 발전시키려는 성상의 의도를 신은 진실로 우러러 흠모합니다."
하였다. 상이 신하들에게 명하여 《보감》의 첫 권을 돌려가며 보게 하였는데, 조인영이 아뢰기를,
"열두 임금의 《보감》을 찬집할 때에는 사고(史庫)에 보관해 둔 《실록》에서 직접 초출했었습니다만 지금 세 임금의 사실은 다시 《실록》을 상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각의 《일성록(日省錄)》과 《정원일기(政院日記)》와 각사(各司)의 장고(掌故)를 참고해서 수집할 수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그 말을 수락하고 이어서 문원(文苑)의 신하들에게 명하여, 찬집 당상은 지춘추관사를 겸직토록 하고 낭청은 편수관과 기주관과 기사관을 겸직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조인영을 총재관으로, 판중추부사 정원용(鄭元容) 등은 교정을 맡게 해서 책이 완성되고 나니 전부 14권이었는데, 속편(續編)과 원편(原編)을 묶어서 한 계통의 책으로 만들었다.
상이 직접 서문을 지어 정조(正祖) 어제 서문(御製序文)의 다음에다 실었다.
다음해인 무신년 9월에 모든 작업을 마치고 진서의(進書儀)에 따라 책을 올리니, 상이 그것을 공손히 받아서 태묘에 고헌하고 각실에다 보관하기를 마치 책보(冊寶)를 진상하는 의식처럼 하였다. 이 책이 완성된 것은 성상의 결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의례(義例)와 의절(儀節)은 모두 정조의 사업안을 준수하였으니 선조의 사업을 계승 발전시켜서 후손들에게 교훈으로 물려줌으로써 만세의 본보기로 삼게 하려는 것이다.
금상(今上)의 융희(隆熙) 2년 9월에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헌종(憲宗)과 철종(哲宗) 두 임금의 《보감(寶鑑)》을 그동안 편찬해 올리지 못한 것은 실로 숙원 사업 중의 하나였다. 지금은 관제가 그전과 달라서 거창하게 《보감》을 찬수하는 청(廳)을 설치할 필요없이 규장각으로 하여금 전담하여 찬수하게 하라."
하고, 이어서 대제학 이용원(李容元) 등에게 명하여 찬집관(纂輯官)으로 삼고 또 위원(委員) 몇 사람을 차출하여 《일성록(日省錄)》과 지문(誌文)과 행장(行狀) 및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와 각사(各司)의 장고(掌故)를 가져다가 참고 수집해서 연도별로 편찬하게 하였다. 또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 등에게 명하여 교정을 보게 하였다. 책이 완성되니 모두 8권이었는데 속편과 원편을 묶어서 한 가지 계통의 책으로 만들었다.
상이 직접 서문을 지어 정묘(正廟)촹헌묘(憲廟) 어제 서문(御製序文)의 다음에다 실었다.
일을 착수한 지 10개월 만에 모든 작업을 마치고 진서의(進書儀)와 태묘에 봉장(奉藏)하는 의식을 한결같이 무신년에 시행했던 대로 따랐다. 이 책을 속찬하게 된 것은 성상의 결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선조의 사업을 계승 발전시켜서 선조를 더욱 빛나게 함으로써 만세에 법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범례(凡例)
1. 영조가 즉위한 지 5년째 되는 해에 《국조보감》을 편찬하고자 하여 열성조의 《실록》을 상고하게 하고 신하들 중에 문학(文學)에 남다른 안목이 있는 자를 널리 선발하도록 하였는데, 끝내 착수하지 못하고 말았다. 우리 성상께서 《영묘보감(英廟寶鑑)》을 편찬하는 시기를 당하여 《국조보감》까지 함께 편찬하라는 명이 있
었다. 이는 열성조의 광전(曠典)을 수명(修明)한 것일 뿐만 아니라 영조조의 숙원 사업을 50년이 지난 지금 이루게 된 것이기도 하다.
1. 우리 왕조에 세 개의 《보감(寶鑑)》이 있는데, 하나는 《국조보감(國朝寶鑑)》이고, 나머지 둘은 《선묘보감(宣廟寶鑑)》과 《숙묘보감(肅廟寶鑑)》이다. 이 책들의 범례가 서로 차이가 있으므로 다 성지를 받들어 전대 임금의 사실을 가지고 후대 임금에 비추어보고 후대 임금의 일을 가지고 전대 임금의 사실을 참고하여 통일된 문자가 되기를 힘썼다.
1. 《국조보감》에는 어휘(御諱)와 어자(御字)를 표기하지 않았고, 《선묘보감》에는 단지 등극(登極)한 후의 어휘만을 표기하였으며, 《숙묘보감》에는 어휘와 어자에다 소자(小字)까지 모두 표기하였는데, 이번에는 성지(聖旨)를 받들어 《소미통감(少微通鑑)》의 예를 따라 책의 첫머리 휘호(徽號)의 뒤, 원년(元年)의 앞에다 어휘(御諱), 어자(御字), 재위(在位), 성수(聖壽), 능호(陵號)를 기재함으로써 체재가 근엄하고 가지런하게 하였다.
1. 《국조보감》은 연기(年紀)가 자세히 표기되어 있고 간지(干支)는 간략히 표기되어 있으며, 《선묘보감》과 《숙묘보감》의 경우는 연기가 먼저 표기되어 있고 간지가 다음에 표기되어 있다. 전사(前史)를 상고해 보면 대체로 간지는 천시(天時)라는 점에서 연기의 위에다가 표기하였고 연기는 인사(人事)라는 점에서 간지의 아래에다 표기하였다. 이는 사가(史家)의 성헌(成憲)인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통감》의 체재에 따라 간지를 먼저 표기하고 연기는 뒤에 표기하였다.
1. 세 책의 《보감》은 일반적으로 높이어 공경할 곳을 모두 별행으로 썼기 때문에 한 줄에 서너 글자도 채 안 되는 경우가 있어서 간단하게 편찬하려는 체재에 방해가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 성지(聖旨)를 받들어 열성조의 지문(誌文)과 장문(狀文)의 체재에 따라 모두 한 글자씩 띄우고 명(命) 자나 교(敎) 자 등의 글자는 구본(舊本)에 따라 이어서 썼다.
1. 《선묘보감》에는 일반적으로 정리하면서 잘못 표기된 자구(字句)임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곳에는 모두 주석이 달려 있다. 예를 들면, 기적(?的)의 '적(的)' 자에 "《실록》에 '적(?)'으로 되어 있다."라는 주석과, 도합(圖合)의 '도(圖)' 자에 "《실록》에 '위(圍)' 자로 되어 있다."라는 주석이 있는데, 이와 같은 부분이 매우 많아서 보기에 현란스럽다. 그래서 이번에는 곧바로 주석에 의거하여 원문을 바로잡고 주석은 모두 삭제하였다.
1. 《국조보감》은 편목(篇目)을 태조(太祖) 1, 태종(太宗) 1 등으로 표기하고, 그 밑으로 다른 임금도 모두 그와 같이 표기하였다. 《보감》은 전사(前史)와 다르므로 장중한 맛이 들게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각 편목의 열성(列聖) 아래에다 모두 '조(朝)' 자를 덧붙였다.
1. 대체로 사계절의 첫 달에는 반드시 춘(春)촹하(夏)촹추(秋)촹동(冬)의 네 글자를 추가로 표기하고 중월(仲月) 이하는 표기하지 않았다. 간혹 계절의 첫 달에 표기하지 않고 중간 달과 끝 달에 춘촹하촹추촹동을 표기한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사실을 기록한 책은 고치지 않는다.' 는 예에 따른 것으로 《국조보감》도 여기에 따른 것이다. 《선묘보감》과 《숙묘보감》은 그렇지 않았는데, 이번에 《국조보감》의 예에 따라 바로잡았다.
1. 세 《보감》의 서사(敍事)와 입문(立文)이 서로 맞지 않은데도 추가로 개정할 수 없는 것은 다시 신편(新編)에 범례를 만들어서 실었다. 예를 들면 《국조보감》은 왕조마다 반드시 위 모묘(某廟)의 몇째 아들로 시작하였는데, 선묘와 숙묘 두 《보감》은 매번 아무 대왕 몇 년으로 시작하였다. 그래서 지금 신편(新編)에는 대체로 전선(傳禪)의 자리는 《국조보감》에 따랐으니 《국조보감》이 모두 전선의 자리이기 때문이며, 승통(承統)의 자리는 선묘(宣廟)와 숙묘(肅廟) 양 《보감》에 따랐는데 양 《보감》이 모두 승통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또 《국조보감》에는 모후(母后)를 쓰지 않았는데, 《숙묘보감》에는 특별히 모후를 썼으므로 지금 신편에는 열조마다 모두 모후를 쓰지 않았다. 이는 《국조보감》을 따른 것인데 《국조보감》은 이 책의 원편(原編)이기 때문이다. 단묘편(端廟編)에 모후를 쓴 것은 소릉(昭陵)을 회복하는 장본(張本)이어서였고, 중묘편(中廟編)에 모후를 쓴 것은 추대를 사양하는 장본이어서였고, 인묘편(仁廟編)에 모후를 쓴 것은 해주부(海州府)에서 태어났으므로 계운궁(啓運宮)을 추숭하는 장본이어서였는데, 그렇게 한 것은 《숙묘보감》이 원편의 일례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 본뜻은 의의가 없던 것을 의의가 있게 하고 일정하지 않은 것을 일정하게 해서 전체가 하나가 되어 일체 흠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 문조(文祖)가 대리할 때에 모훈(謨訓)을 계승하여서 속편에 문의(文意)를 드러내어 규례를 창시한 것은 사실 선조의 교훈을 드러내서 발양시키려는 효성이었다. 편목의 묘호(廟號) 아래 대리(代理)로 쓰고 기년(紀年)은 순조(純祖) 기년으로 썼다.
1. 열성조의 묘호와 휘호를 책머리에 수록하지 못했던 부분은, 헌묘(憲廟) 무신년에 영묘(英廟)의 휘호를 추후하여 기재한 예에 따라 써 넣었다.
1. 태조, 정조, 순조, 문조의 추존한 제호(帝號)를 삼가 책머리에 썼다. 원편 내에 서사(敍事)와 입문(立文)은 지금 감히 추급하여 고치지 않았다.
1권 태조조(太祖朝)
태조 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太祖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
휘(諱)는 단(旦), 자(字)는 군진(君晉)이며, 초휘(初諱)는 성계(成桂), 자는 중결(仲潔)이다. 지원(至元) 을해년(충숙왕 복위 4, 1335) 10월 11일(기미)에 영흥(永興) 흑석리(黑石里) 사저(私邸)에서 탄강하였다. 재위 기간은 7년이며, 상왕위(上王位)에는 10년 동안 있었다. 영락(永樂) 무자년(태종 8, 1408) 5월 24일(임신)에 승하하였다. 향년은 74세이고 건원릉(健元陵) ―양주(楊州)에 있다.― 에 장사지냈다.
1년(임신, 1392)
○ 7월. 병신(17일)에 상이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였다. 앞서 고려조(高麗朝)의 정치가 문란하여 민심이 이반(離反)하였는데, 상의 훈덕(勳德)이 이미 융성해지자 중외(中外)가 흠모하고 인심이 모두 귀의하였다. 어떤 사람이 빽빽이 모인 군중 속에서 큰소리로 말하기를,
"천명과 인심이 이미 귀속된 곳이 있는데, 어찌 속히 왕위에 오르도록 권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태종이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남은(南誾)과 함께 계획을 세웠다. 남은이 비밀리에 이조 판서 조인옥(趙仁沃), 판삼사사(判三司事) 조준(趙浚), 충의군(忠義君) 정도전(鄭道傳), 대사성(大司成) 조박(趙璞) 등 52인과 함께 태조를 추대하기로 협모(協謀)하였다. 그러나 상이 진노할까봐서 감히 고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중(侍中)인 배극렴(裵克廉) 등이 드디어 사람들과 함께 국보(國寶)를 모시고 잠저(潛邸)로 나아가서 거리를 메웠으나, 상은 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간이 늦어지자 배극렴 등이 기다리다 못해 문을 밀어젖히고 곧바로 들어가서 청사(廳事) 위에다가 국보를 올려 놓고 죽 늘어서서 절을 하면서 '천세(千歲)'를 불렀다. 그리고 합사하여 왕위에 오르기를 권하였다. 상은 거부하면서 이르기를,
"예로부터 왕자(王者)가 흥기할 때에는 천명을 받지 않으면 불가한 일이었다. 나는 실지로 부덕한데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응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에워싸고서 물러나지 않고 더욱 간절하게 왕위에 오를 것을 권하니, 하는 수 없이 수창궁에서 즉위하였다.
백관이 조하례(朝賀禮)를 올리자, 상이 겸양하여 어좌(御座)에 오르지 않고서 받았다. 육조 판서 이상을 궁전 위로 올라오게 하고 이르기를,
하고, 이어서 중외의 대소 신료들에게 그전처럼 직무를 살피도록 하교하였다.
이때에 종묘와 사직의 제도를 마련하고 왕씨(王氏)의 후손들을 두어서 그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과거법을 제정하고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예를 저술하였으며, 수령의 선발에 신중을 기하였으며, 절의(節義)가 있는 사람을 정포(旌褒)하였으며, 홀로된 사람들을 애처롭게 여기는 한편, 궁핍한 사람을 구제해 주었다. 그리고 요역과 부세를 감면하면서도 국용(國用)을 넉넉하게 하였으며, 형벌을 신중히 하고 경계(經界)를 바로잡았다. 그리하여 모든 정치가 일신(一新)되었다.
○ 대사헌 민개(閔開) 등이 상소하기를,
"첫째, 기강(紀綱)을 수립하소서. 국가의 정치를 잘하는 사람은 안위(安危) 문제를 따지지 않고 기강이 제대로 수립되지 못한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옛날 주(周) 나라가 쇠퇴했을 때 제후(諸侯)들이 멋대로 굴었지만 수십 세대를 전해가고도 천하가 뒤엎어지지 않았던 것은 국가에 기강이 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앞서간 왕조의 흥망(興亡)을 귀감으로 삼아서 한 시대의 기강을 수립하고 후왕들에게 모범을 제시해서 영원히 전해가게 하소서.
둘째, 상벌(賞罰)을 분명하게 하소서. 상벌은 임금의 가장 큰 권한입니다. 공이 있는데 상을 주지 않고, 죄가 있는데 벌을 주지 않는다면, 비록 요순이라 할지라도 정치를 잘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상벌이 공평하면 공도(公道)가 밝아져서 사람들이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상벌을 실시할 때는, 마땅히 천지가 만물에 대해서 북돋우어 주고 없애는 것을 무심(無心)한 상태에서 진행하여 조그마한 사심도 그 사이에 용납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해야 합니다.
셋째, 군자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하소서. 군자와 소인은 진실로 구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른말을 하고 정론(正論)을 펴면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며 조정에 나아가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물러나서는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아 고치게 할 것을 생각하는 한편, 웅대한 뜻을 품고서 종묘 사직이 있는 줄만 알고 자기 자신은 돌보지 않는 자는 군자입니다. 그에 반해 간사하게 아첨을 떨며 아부해서 빌붙고 권세를 훔쳐서 농락하는가 하면 좋은 점은 제가 다 차지하고 겉으로 은혜를 베푸는 척하면서 굽신거리되 진실로 저에게 이롭겠다 싶으면 남의 말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 자는 소인입니다. 군자는 서로 마음을 합치기도 어려운 만큼 소원해지기가 쉽고, 소인은 친하기는 쉬워도 물리치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당(唐) 나라 현종(玄宗)은 자기 한몸으로 요숭(姚崇)과 송경(宋璟)을 등용해서 개원(開元)의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였으나, 이임보(李林甫)와 양국충(楊國忠)에게 정치를 맡기는 바람에 천보(天寶)의 난리를 초래하였으니, 이것만 보아도 군자와 소인 중에 누구를 등용하고 누구를 물리치느냐에 따라 국가의 치란과 흥망이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서경》 대우모편(大禹謨篇)에 '현인을 임용하면서 소인을 끼워 넣지 말고, 사악한 일을 척결하면서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지 마소서.' 하였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진실로 현인인 줄을 알면 그가 비록 잘못이 있더라도 나오게 해서 등용하고, 진실로 아첨을 떠는 사람인 줄 알면 그가 비록 공로가 있다고 하더라도 배척해서 멀리하소서.
넷째, 간쟁(諫諍)하는 말을 받아들이소서. 경(經)에 '천자에게 간쟁하는 신하가 7명이 있으면 도가 없는 국가라 할지라도 천하를 잃지 않게 되고, 제후에게 간쟁하는 신하가 5명이 있으면 도가 없는 국가일지라도 그 나라를 잃지 않는다.' 하였는데, 이 말은 만세의 격언(格言)입니다. 신하의 처지에서 간쟁하는 것은 자신을 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국가를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임금의 권위는 우레와 같고 임금의 권세는 엄청납니다. 우레와 같은 위엄을 무릅쓰고 엄청난 권세에 맞서서 약석(藥石)이 되는 말을 진달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한 마디 말을 따르느냐 마느냐에서 화(禍)와 복(福)이 일어나고, 한 가지 일을 폐기하느냐 설치하느냐에 따라 이해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항상 가르쳐서 인도하여 간언을 구하고 환한 얼굴을 하고서 받아들이는 한편, 그 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그 신분을 드러내어 주더라도 선비는 오히려 두려워서 감히 간언을 올리지 못하는데, 더구나 위엄으로 짓누르고 세력으로 억압한다면 약석이 되는 말은 올려질 길이 없고 임금의 총명을 가리우는 재앙이 기약하지 않아도 이르게 될 것입니다. 《서경》 이훈(伊訓)에 '간언을 거역하지 않고 따르시며……' 하였고, 또 '임금께서 간언을 따르시면 성(聖)이 됩니다.' 하였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유의하소서.
다섯째, 참소하는 말을 근절하소서. 순(舜) 임금이 '짐은 참소하는 말이 선인이 행할 일을 방해하고 짐의 백성을 놀라게 해서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것을 미워한다.' 하였습니다. 참소하는 말이 사람을 현혹시키기 쉬운 점에 대해서는 대순(大舜) 같은 성인으로도 오히려 염려하였으니, 정말 두렵게 여겨야 할 일입니다. 대체로 참소하는 무리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임금을 유혹합니다. 그렇다고 듣기 좋은 말과 정중한 표현으로 요청하는 말을 따라주기도 하고 은근슬쩍 하는 참소나 긴박하게 하는 참소를 들어주게 되면, 출척(黜陟)과 상벌(賞罰)이 모두 정당성을 잃게 되어, 위급한 상황이 바로 닥칠 것입니다. 《시경》 소아(小雅) 교언(巧言)에 '군자가 참소하는 말을 믿음으로써 혼란이 닥쳐온다.' 하였으니, 만약 정확한 안목으로 간인(姦人)을 살핀다면 백사(百邪)가 빠져나가지 못하고 참소하는 말이 두절될 것입니다.
여섯째, 안일과 욕심을 경계하소서. 《서경》 고요모(皐陶謨)에 '안일과 욕심으로 제후국을 가르치지 말아서……'라고 하였습니다. 안일과 욕심이 덕을 해치는 경우가 어찌 한 가지뿐이겠습니까. 궁실을 안락하게 꾸미고 싶어하는 욕망과 음식을 감미롭게 하려는 욕심, 비빈(妃嬪)과 잉첩(?妾)의 시중, 놀이 사냥의 오락 그리고 짐승 기르기와 화초 가꾸기, 이것들이 모두 인성(人性)을 해치고 인정(人情)을 방탕하게 하기에 충분한 것들인 만큼,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천명(天命)은 무상하여 오직 덕이 있는 자를 돕습니다. 만약 조그마한 기미라도 살피지 않고 잠시만이라도 조심하는 마음을 갖지 않아서 한 생각 잘못하여 안일과 욕심에 빠져 들게 되면, 하늘의 시청(視聽)에 따른 반응은 실로 두려울 정도로 나타납니다.
일곱째, 절약과 검소를 숭상하소서. 궁실을 높게 하지 않고 의복을 화려하게 하지 않은 것은 하우(夏禹)의 성덕이며, 백금(百金)을 아끼고 검은 명주옷을 입은 것은 한 문제(漢文帝)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들이 귀하기로는 천자(天子)가 되었으며 부유하기로는 사해(四海)를 소유하였지만, 오히려 절약과 검소를 이같이 하였는데, 더구나 동한(東韓)은 지리적으로 산과 바다 사이에 끼어 있어서 인구와 재정이 풍부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세입과 세출을 따지지 않고 낭비를 해서야 되겠습니까. 고려조에서는 재변이 조금만 발생하여도 공구수성(恐懼修省)할 줄은 모르고 부처를 섬기고 신을 섬기는 일에만 힘썼으니, 그 엄청난 비용은 다 따질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것은 전하께서도 환히 아시는 일입니다.
원컨대, 이제부터라도 하우(夏禹)와 한 문제(漢文帝)의 검소한 덕을 본받아서 복식(服飾), 기용(器用), 연향(宴享), 상사(賞賜) 등에 속하는 일들은 일체 검소하게 하고 부처와 신을 위한 급하지 않은 비용은 모두 줄이소서. 임금이 하는 모든 일에 사치성을 배제한다면 백성들이 감동을 받아서 역시 후덕한 인품을 갖게 될 것입니다.
여덟째, 궁위(宮衛)를 엄격하게 하소서. 궁위를 설치하는 것은 임금의 권세를 높이고 내외를 엄격하게 구분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천부적인 자질을 가지고 집을 교화시켜서 국가로 만드셨으니, 잠저(潛邸) 시절의 친구와 인아(姻?)의 혈속들이 간혹 연줄을 따라서 출입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문지기는 따지지 못합니다. 청알하는 것이 이로 말미암아 성행하고 참소하는 말이 이로 말미암아 들어가게 되어, 내외(內外)가 이간되고 정형(政刑)이 문란해질까 염려됩니다. 궁문을 지키는 군사로 하여금 직책이 없이 마음대로 궁문을 출입하는 자를 모두 일제히 단속해서 금지시키게 하시고, 특히 부녀자나 무당, 아부하는 무리들을 더욱 물리치소서."
하니, 상이 가상하게 여기고 받아들였다.
○ 시중 조준(趙浚)이 전문(箋文)을 올리기를,
"신이 처음에 현릉(玄陵 고려 공민왕(恭愍王)의 능호)을 섬겨 궁중에서 시봉하였으나 중간에 비운을 만나는 바람에 문을 닫고 들어앉아 글이나 읽으면서 여생을 마치려 했습니다. 그런데 전하를 잠저에 계실 때 한 번
뵈었으나 구면처럼 여겨졌으니, 이는 하늘이 신과 전하를 만나게 한 것입니다.
무진년 1월에 전하께서 대장 최영(崔瑩)과 함께 15년 동안 백성에게 해독을 끼친 흉악한 자들을 숙청하였으니, 이는 전하가 잔인한 무리를 제거한 덕이 백성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최영은 학식이 없는 사람으로 위주(僞主)와 함께 요동(遼東)을 침범하기로 하고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넜지만, 전하께서는 대의를 들어 회군(回軍)함으로써 삼한(三韓)의 백성들로 하여금 피폐한 상황을 면하게 하였으니, 이는 세상을 구제한 전하의 공이 종묘 사직에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때에 신을 천거하여 대사헌으로 삼으시니, 신은 아는 것을 모두 말하였고 전하께서는 그 말을 모두 따르셨습니다. 그리하여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키고 공도(公道)를 밝혔으며,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고 간사한 무리를 척결하였습니다. 이렇듯 백성의 저해 요인을 제거하고 상국과 우호 관계를 맺는 한편 위조를 축출하고 왕씨(王氏)를 옹립하자, 천자가 가상히 여기고 사신을 보내 격려하였으니, 이는 한 나라를 광복(匡復)한 전하의 공이 천하에 알려진 것입니다.
초기에 전하께서 신을 천거하여 대사헌으로 삼았을 때 전하께서는 의욕적으로 만세를 위하여 태평 시대를 열어줄 것을 하늘의 신명에게 고하였습니다. 간사한 무리들의 비방을 배격하고 거실(巨室)의 노여움을 범하면서 사전(私田)으로 인한 해묵은 폐단을 혁파하니, 백성을 도탄(塗炭) 속에서 구제할 수 있었고 병사와 군량을 어려운 상황에서도 풍족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누선(樓船)도 만들고 성보(城堡)도 쌓아 무위(武威)를 떨치고 조로(漕路)를 통하게 하니, 삼한(三韓)에 40년 동안 끊이지 않았던 왜구에 대한 근심이 하루아침에 해소되었습니다.
과전(科田)을 경기(京畿)에다 두어서 사대부를 우대하고, 군전(軍田)을 주(州)와 군(郡)에다 두어서 군사를 양성하였으며, 향리(鄕吏)와 진원(津院)에게까지 모두 전지를 지급하니, 전지에는 일정한 규정이 있게 되었고 국가에는 완성된 법이 있게 되어 제각기 일정한 한계가 있게 됨으로써 서로 침해하거나 빼앗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겸병(兼倂)을 근절시킴에 따라 백성들의 전택(田宅)이 확정되었고 부렴(賦斂)을 가볍게 함에 따라 가족 없이 외롭게 살아가는 자들의 의식(衣食)이 넉넉해졌으며, 봉록(俸祿)을 후하게 함으로써 염치가 유행되었고 창고를 충실하게 함으로써 국가의 비용이 풍족해졌습니다.
전하와 신은, 탐오한 관리가 백성을 괴롭히고 용렬한 장수가 도적을 양성하는 것에 분개한 나머지 국가에 건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대신을 천거하여 병권을 부여하고 여러 도를 순시하면서 출척(黜陟)을 시행하게 하니, 번진(藩鎭)은 군율을 적용함에 따라 패배하고 달아나는 걱정이 근절되었고, 주군(州郡)은 법을 시행함에 따라 탐심 많고 잔인성 있는 기풍이 사라졌습니다.
영장(令長)이 서리 출신인 경우에는 그 관질을 올려주되 선발에 신중을 기하고 대간과 육조의 보거(保擧)를 적용하게 하니, 전리(田里)에는 걱정 어린 소리가 사라지고 떠돌이 생활을 하던 자들도 본업을 찾아 돌아오는 즐거움이 있게 되었습니다. 죄를 짓고 도망하거나 관직을 모독하는 관리는 신문해서 그의 향리로 돌려보내고, 사이비 인격자와 교활한 토박이를 공략하여 그 음호(蔭戶)에 대해 부역을 가하게 하였습니다.
현(縣)마다 재(宰)를 두고 역(驛)마다 승(丞)을 두게 하니, 황무지가 변하여 반듯한 읍이 되고 잡초가 바뀌어 좋은 곡식이 되었습니다. 천록(天祿)을 축내는 불필요한 관리와 천공(天工)을 더럽히는 환폐(宦嬖)들, 함부로 관직을 차지하고 있는 공상(工商)과 조례(?隷)들, 전토를 많이 차지하고 있으면서 놀고 먹는 승려들, 공로(功勞)도 없이 군(君)에 봉해진 자와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나약한 자제들을 법을 제정하여 도태시키니, 요행을 바라는 문은 닫히고 벼슬을 향해 치닫는 길도 막혔습니다.
가묘(家廟)를 세워서 기제(忌祭)를 지내게 한 것은 풍속을 중후하게 하는 일이었고, 학교(學校)를 넓혀서 교수(敎授)를 두었던 것은 인륜을 밝히는 일이었습니다. 문치(文治)는 이미 흡족하고 무위(武威)도 먼 곳까지 미쳐서 동쪽에 있는 왜구가 예물을 받들고 찾아왔고 유구(琉球)나 남만(南蠻)도 중역(重譯)을 거쳐 조공하였습니다.
왕씨(王氏)의 16년 동안 이미 망해 버린 가업이 실로 전하의 도움으로 회복되었는데도 왕씨는 혼미하여 알지 못하고 도리어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위신(僞辛)을 추종하는 난역의 무리들과 토지와 관직을
상실한 무리들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근거 없는 말로 비난을 일삼는 한편, 전하를 지적하여 권력이 편중되었다고 하고 신들을 무함하여 붕당을 만들었다고 하면서 전하를 제거하기 위한 흉칙한 계략을 수없이 세웠습니다.
금년 3월에는 전하께서 세자가 중국에 가서 조회하고 돌아왔을 때에 서울 서쪽 수백 리 먼 곳까지 가서 맞이하였고 또 직접 사냥을 해가지고 와서 하례(賀禮)를 올리려 했습니다만, 불행하게도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초가(草家)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런데 간신 정몽주(鄭夢周)는 전하의 도움을 받은 사람으로 총재가 되더니 국정(國政)을 장악하고 왕씨를 편들면서 대간을 사주하여 신과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이 전하의 심복이 되었다고 몰아세웠습니다. 그리고 기회를 틈타 잔꾀를 부려 죄목을 덮어씌운 다음, 가장 먼저 신들을 쫓아내고 이어서 전하를 해치려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전하께서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서둘러 돌아왔습니다.
4월 4일에 사람들의 공분(共憤)으로 정몽주는 죽임을 당했지만, 전하께서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을 폈기에 그 나머지 간악한 무리들은 한 사람도 주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병이 들어서 빈객을 사절하고 사제(私第)에 누워 있으면서도 오히려 왕씨가 깨닫기를 바랐고 상 주고 벌 주는 권한이 위에서 나오기를 바랐지만, 왕씨는 그것을 역시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흉악한 무리들이 더욱 날뛰게 되니 화란이 곧바로 닥칠 위기였습니다.
7월 14일이 되니, 하늘은 노여워하고 민심은 떠나서 삼한(三韓) 전체가 선뜻 전하를 추대하였습니다. 천명과 인심이 이미 여기까지 이르게 되자 전하께서 조(曹) 나라 자장(子臧)의 절개를 지키고자 하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하께서는 왕씨를 강릉(江陵)의 간성(杆城)에 봉하였으니 이는 성탕(成湯)이 걸왕(桀王)을 남소(南巢)에 방출한 것과 같은 의미이며, 왕씨의 모제(母弟)를 기현(畿縣)의 마전(麻田)에 봉하고 신성왕(神聖王 고려 태조)과 공민왕(恭愍王)의 제사를 모시게 하였으니 이는 무왕이 미자(微子)를 송(宋) 나라에 봉한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여러 왕자를 강화도(江華島)와 거제도(巨濟島)에 안치시키고 관곡(官穀)을 지급하게 한 것은, 한(漢) 나라와 위(魏) 나라 이후로 개혁을 주도했던 임금이 따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전에 만약 전하께서 나라를 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면 압록강에서 회군할 때에 어찌 죽을 고비를 겪으면서 목숨을 걸고 왕씨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논의를 주장했겠으며, 기사년 겨울에 조서(詔書)가 왔을 때에 어찌 종친(宗親)의 장(長)을 뽑아서 왕씨에게 정권이 돌아가게 했겠으며, 어찌 서둘러 이미 성인이 된 세자를 세워서 국가의 기반을 정하고자 했겠으며, 어찌 기꺼이 경연을 열어서 명유(名儒)를 좌우에 나오게 하여 《정관정요(貞觀政要)》를 바치게 하여 아침저녁으로 그 가르침을 받게 했겠으며, 어찌 기꺼이 서연을 마련하여 선비들을 동궁에 모아놓고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올려 날마다 정치하는 방법을 강론하게 했겠으며, 어찌 기꺼이 상상(上相)의 정권을 내놓고 택리(宅里)를 자서(子壻)에게 나누어 준 다음, 고향으로 돌아가 쉬기를 바란 것이 두세 번에 이르렀지만 더욱 그칠 줄을 몰랐겠으며, 지난해 가을에 또 어찌 기꺼이 왕자를 천자(天子)에게 알현시키기를 건의했겠습니까.
이렇게 전하의 왕씨를 위한 지극한 정성과 지극한 충성은 하늘이 살피는 바이고 삼한(三韓)이 다 아는 바인데 왕씨는 참소하는 역적에게 현혹되어 연 소왕(燕昭王)이 악의(樂毅)를 대하듯이, 제 양왕(齊襄王)이 전단(田單)을 대하듯이 하지 못하고 반대로 운대(雲臺)의 훈신을 도마 위의 고기로 여겼습니다. 이것 때문에 하늘이 왕씨의 덕에 염증을 느끼고 전하의 왕업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국사에 근면하고 가사에 검소한 것은 하우(夏禹)가 우순(虞舜)을 계승하게 된 동기이며, 간언을 거부하지 않고 따르며 잘못을 시정하는 것에 인색하지 않은 것은 상탕(商湯)이 하(夏) 나라를 물려받게 된 동기이며, 상 나라 정치를 반대하고 천하를 다스린 것은 무왕(武王)이 주(周) 나라를 세운 이유입니다. 현신(賢臣)을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한 것은 전한(前漢)이 융성하게 된 원인이며, 소인을 가까이하고 현신을 멀리한 것은 후한(後漢)이 무너지게 된 원인입니다.
지금 하늘이 이미 전하께 명을 내리시어 삼한(三韓)의 부모가 되게 하였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삼왕(三王)의 지극한 정치를 법으로 삼고 양한(兩漢)의 득실을 거울로 삼아 조심하고 또 조심하면서 이것만을 생각하시고 억만 세대가 지나가도록 성자 신손(聖子神孫)의 귀감이 되게 하소서."
○ 양부(兩府), 육조, 대간에게 명하여 각각 현량(賢良)과 유일(遺逸)을 천거하게 하였다.
○ 개국공신을 결정하여 차례대로 공적을 따져서 상을 주도록 하였다. 비(碑)를 세워 공을 기록하기도 하고 각(閣)을 세워 초상을 그려두기도 하였으며, "적장자(嫡長子)를 세습시켜 그 관록을 잃지 않고 영원히 받도록 한다."는 글을 맹세하는 글에 기록해서 하사하기도 하였다. 일을 가지고 신임을 하면 의심하는 일이 없었다. 간혹 한가한 시간에는 신하들과 함께 내정(內庭)에서 격구(擊毬)도 하고 간혹 연향의 자리도 자주 마련하였으며, 공신들도 상의 환흡(歡洽)에 찬 정분을 받았으니 상하 모두가 간격이 없었다. 신하에게 질병이 있으면 의원을 보내 치료하게 하고 계속 사람을 보내서 문병을 하게 하였으며, 죽었을 때에는 간혹 빈차(殯次)에 직접 가서 지나치리 만큼 비통해 하기도 하였다. 또 휼전(恤典)과 부증(賻贈)에 대해 임금의 은혜가 넉넉하였다.
공신은 비록 죄가 있어도 반드시 곡진하게 죄를 용서하여, 상이 재위하는 동안은 공신 중에서 형을 받고 죽은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 평주(平州) 온천에 행행하였다가 야차(野次)에 가마를 멈추고서 상락백(上洛伯) 김사형(金士衡), 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과 함께 잠저(潛邸) 때 서로 잘 지냈던 정리와 개국(開國)에 수고한 일들을 말하면서 잔술을 주고받았는데, 서로 친근하기가 마치 옛날과 같았다.
○ 전중경(殿中卿) 변중량(卞仲良)이 병조 정랑 이회(李?)와 함께 말하기를,
"예로부터 정권(政權)과 병권(兵權)을 한 사람이 겸임하지는 않았다. 병권은 종실(宗室)에 있어야 하고 정권은 재보(宰輔)에게 있어야 하는데, 지금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등이 이미 병권을 장악하고 또 정권마저 장악하니, 이는 실지로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하였다. 변중량이 이것을 의안군(義安君) 이화(李和)에게 말하고 이화가 상에게 고하였다. 상이 중량을 불러 물으니, 중량이 사실대로 대답하자, 상이 노여워하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들은 모두 나의 수족과 같은 신하들로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을 변치 않을 자들이다. 만약 이들을 의심한다면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이 말을 한 자는 필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하고, 대사헌 박경(朴經)에게 명하여 순군(巡軍)과 함께 다스려서 변중량은 영해(寧海)에, 이회는 순천(順天)에 유배보내도록 하였다.
○ 감찰 김부(金扶)가 감찰 황보전(皇甫琠)과 함께 동료 김중성(金仲誠)의 집에서 술을 마시고 시중(侍中) 조준(趙浚)의 집을 지나가면서 말하기를,
"제아무리 큰 집을 지어도 어찌 오래 살 수 있겠는가. 뒤에는 필시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될 것이다."
하였는데, 조준이 이 말을 듣고 상께 아뢰었다. 상이 노여워하면서 이르기를,
"조준은 개국의 원훈(元勳)인 만큼 국가와 운명을 함께 할 사람이다. 그런데 김부가 조준더러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였으니, 이는 바로 조선(朝鮮)의 사직(社稷)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하고, 명하여 그를 속히 극형에 처하도록 하고, 김부와 함께 술을 마신 사람 18명도 파직하게 하였다.
○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이문화(李文和), 삼사 좌승(三司左丞) 이고(李皐)를 경기 좌우도 안렴사(按廉使)로, 예조 전서(禮曹典書) 조박(趙璞), 사헌 중승(司憲中丞) 심효생(沈孝生), 호조 전서(戶曹典書) 김희선(金希善), 대장군 정탁(鄭擢), 사농 경(司農卿) 정당(鄭當)을 양광(楊廣), 경상(慶尙), 전라(全羅), 교주(交州), 강릉(江陵), 서해도(西海道) 안렴사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부덕한 내가 신민(臣民)의 추대로 인하여 애써 대보(大寶)에 올랐으므로 밤낮없이 조심하고 있다.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를 구상하고 백성에게 혜택을 주게 된 것은, 오히려 중외(中外)의 관료들이 나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서 나를 잘 도왔기 때문이다. 대체로 대소의 군관(軍官)과 민관(民官) 중에서 만약 기발한 전략으로 승리를 하였거나, 최선을 다하여 강적을 막았거나, 정사를 공평하게 하고 송사의 심리를 잘하였거나, 백성을 알뜰히 보살핀 자가 있거든 모두 이름을 아뢰도록 하라. 내가 그들을 탁용(擢用)하도록 하겠다.
이와 반대로 행군시에 군율을 지키지 않았거나, 소문만 듣고 도망쳐 버렸거나, 장오(臟汚)에 빠져 직무를 폐기했거나, 관직에 있으면서 불경스러운 행동을 한 자가 있거든, 양부(兩府)의 관원 이상은 감금하여 신청하고,
하였다.
○ 대호군 이부(李扶)와 봉상 소경(奉常小卿) 허해(許?)가 불손한 말을 하였다. 대사헌 남재(南在) 등이 상소하기를,
"예로부터 제왕(帝王)이 흥기할 때에는, 오직 천명(天命)을 따랐고 세류(世類)는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너그럽고 인자한 도량을 가지신 전하께서 왕씨(王氏)의 마지막 혼란기를 당하여 천명이 돌아오고 신하들이 추대함에 따라 문득 대보에 오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부와 허해 등은, 전하께서 죽은 목숨을 다시 살려 주신 은혜를 생각지 않고 요망스런 말로 선동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이들을 유사로 하여금 국문하여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제왕이 흥기할 때에는 세류를 상관하지 않는 것이 오래된 일이다. 대명황제도 필부(匹夫)로 천하를 얻었으니, 세류의 말을 어찌 개의할 필요가 있겠는가. 더구나 우연히 집안 사람과 말한 것을 국문까지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간관이 상소하여 굳이 청하니, 상이 단지 외지로 귀양을 보내도록 하였다.
○ 배극렴(裵克廉), 조준(趙浚), 김사형(金士衡),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등이 아뢰기를,
"왕자(王子)와 제군(諸君)의 의복, 거마, 추종자를 갖추지 않아서는 안 되며, 용도를 풍족하게 하지 않아서도 안 됩니다. 본과(本科) 이외에 전토(田土)를 더 내려 주소서."
하니, 상이 조용히 잠저 때의 일을 말하면서 이르기를,
"본과의 100여 결(結)만으로도 굶주리는 상황에 이르지는 않는다. 만약 여기에다 또 더 주게 되면 사람들은 필시 나더러 자식들에게 사정을 쓴다고 할 것이다. 더구나 경기(京畿)의 전토(田土)는 한계가 있는데, 어찌 함부로 더 줄 수 있겠는가. 경들이 만약 더 지급하고자 한다면 먼저 공신들에게 지급하고 나서 그 규정에 따라 지급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하였다. 남은이 아뢰기를,
"공신들은 과전(科田) 외에 이미 별사전(別賜田)이 있으니, 왕자에게 전토를 더 주는 것이 어찌 안 될 일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남은을 쏘아보면서 말하기를,
"나더러 이미 공신에게 사급한 전토를 다시 자식들에게 사급하라는 말인가."
하였다.
○ 간관이 상소하기를,
"공론(公論)은 천하 국가의 원기(元氣)입니다. 따라서 간쟁(諫諍)은 공론의 뿌리라고 할 수 있고 영유(?諛)는 공론의 해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를 소유한 자가 항상 그 뿌리를 배양하고 그 해독을 제거한다면, 정당한 논의가 매일같이 나올 것이고 귀에 솔깃한 말들이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명철한 임금과 훌륭한 신하가 서로 만나서 정치에 필요한 체재를 모두 갖추었으니 언급할 만한 일이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신들이 공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간절하게 말하는 것은, 바로 전하께서 넓은 아량을 지니심으로써 귀에 거슬리는 말을 싫어하지 않게 하고 뽐내는 기색이 없이 자신을 굽히는 것을 꺼려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가르쳐 인도하여 간언을 구한 다음, 정성과 신의를 가지고 그것을 받아들이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신들은 마땅히 숨기는 일이 없이 다 말씀드릴 것입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이해를 모두 진달하여 지체되는 일이 없게 할 것이고 국가의 원기가 원활하게 운행되도록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치의 체제에 관계되는 일이면 숨기지 말고 진달하도록 하라. 내가 모두 받아들이도록 하겠다."
하였다.
○ 간관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듣건대, 임금의 마음은 정치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임금의 마음이 바른가 그렇지 못한가에 천하국가의 치란안위(治亂安危) 문제가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존양(存養)과 성찰(省察)의 공부를 깊이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따라서 대순(大舜)의 긍긍업업(兢兢業業)과 탕왕(湯王)촹문왕(文王)의 율률익익(慄慄翼翼)은 바로 태평과 화락의 근본이 됩니다.
선유 진덕수(眞德秀)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지어서 경연에 올렸는데, 그 글의 내용을 보면, 맨 처음에는 제왕이 정치하는 차서를 언급하였고, 다음에는 제왕이 학문을 하는 근본을 언급하여 이것들이 모두 몸과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이른바 '강(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첫머리에 도술(道術)을 밝힐 것, 인재(人才)를 구분할 것, 정치 체제를 살필 것, 민정(民情)을 관찰할 것 등을 언급한 것은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요체이고, 다음에 언급한 경외(敬畏)를 숭상할 것, 일욕(逸欲)을 경계할 것 등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요체이고, 다음에 언급한 언행(言行)을 조심할 것, 위의(威儀)를 바르게 할 것 등은 '수신(修身)'의 요체이고, 다음에 언급한 배필(配匹)을 소중히 할 것, 내치(內治)를 엄격하게 할 것, 국본(國本)을 확정할 것, 척속(戚屬)을 가르칠 것 등은 '제가(齊家)'의 요체인데, 이것은 이른바 '목(目)'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성현(聖賢)의 훈전(訓典)을 싣고, 다음에는 고금의 사실을 실었으니, 임금이 마땅히 알아야 할 이치와 마땅히 행해야 할 일들이 모두 여기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잠저에 계실 때부터 서사(書史) 보기를 좋아하셨으니 이치를 궁구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학문과 몸을 닦고 사람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고 익숙하게 강구하셨을 줄 믿습니다. 이 점에 대해 어리석은 신들이 어찌 감히 문제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경연을 설치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명분만 있고 진강(進講)하는 때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전하의 생각에는 '반드시 넓은 집과 큰 뜰이 모두 다 배울 것들인데 하필 상전(常典)에 구애되어 날마다 경연에 나아가야만 배운다고 하겠는가.' 하실 것입니다만, 신들이 생각하기에는 임금의 학문은 말만 외우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날마다 경연에 나아가서 선비를 맞이하여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은, 한편으로는 훌륭한 선비들을 만날 때가 많아서 덕성을 기를 수 있고, 한편으로는 환관과 궁첩들을 가까이할 때가 적어서 게으름을 떨쳐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창업을 한 임금은 자손들의 본보기가 됩니다. 전하께서 만약 경연을 급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신다면 후세에 이것을 구실로 삼아 그 폐단이 반드시 '배울 필요 없다.' 하는 데 이르고 말 것이니 어찌 간단한 문제라고 하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날마다 경연에 거둥하시어 성학(聖學)을 강론하셔서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학문을 다하고 수신제가(修身齊家)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효과를 볼 수 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서 명하여, 대사성 유경(劉敬)과 내사사인(內史舍人) 유관(柳觀)을 하루씩 걸러 입직하여 《대학연의》를 진강하게 하였다. 또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조서(曺庶)에게 명하여 홍범(洪範)을 써서 올리게 하였다.
○ 공조 전서(工曹典書) 이민도(李敏道)가 시무에 관한 논의로 상서(上書)하기를,
"첫째, 현재(賢才)를 천거하고 폐관(廢官)을 복구하소서. 현재는 국가의 기반이므로 국가의 치란 문제가 실로 이들을 진출시키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제갈 무후(諸葛武侯)가 촉주(蜀主)에게 말하기를 '현신을 친근히 하고 소인을 멀리한 것 때문에 전한(前漢)이 흥기하였고, 소인을 친근히 하고 현인을 멀리한 것 때문에 후한(後漢)이 망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이 말은 실로 세상에 보기 드문 격언(格言)입니다. 고려조 말기에 소인배를 등용하고 충신을 내쫓은 것 때문에 스스로 멸망하고 만 것은 전하께서도 직접 보신 일입니다. 거울로 삼을 일이 먼 곳에 있지 않으니 경계하지 않으시면 안 됩니다. 《서경》 대우모에 '일반 관직을 폐기하지 말게 하소서. 그것은 하늘이 할 일을 사람이 대신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였습니다. 군자가 벼슬 자리에 있게 되면 모든 정사가 잘되고, 소인이 벼슬 자리에 있으면 모든 일이 무너지고 마는 법이니, 신중을 기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둘째, 아첨하는 신하를 멀리하고 참소하는 말을 근절하소서. 아첨하는 사람은 임금의 비위를 잘 맞추는 것이
특징입니다. 대간(大姦)은 충신(忠臣)과 유사하기 때문에 임금은 그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충신으로 여기고서 그들이 하는 말이면 다 들어주고 그들이 세운 계획이면 다 따라주어서 시비를 어지럽게 하거나 충신을 무함하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사람을 등용할 때 충직한 사람과 아첨떠는 사람을 구분하여 서로 섞이지 않게 하소서. 대체로 분명한 논리를 가지고 전혀 굽히지 않은 채 간쟁하는 자는 충직한 사람이고, 굽신거리면서 고분고분하는 자는 아첨떠는 사람입니다. 진실로 충직한 사람인 줄을 알았다면 그를 진출시켜 친근히 하고, 정말 아첨떠는 사람인 줄을 알았다면 그를 물리쳐서 내쫓으소서.
셋째, 종묘를 세우고 음사(淫祀)를 금지하소서. 고려조는 음사를 숭상하여 신은 하나인데 두어 곳에 나누어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혹은 하루에도 몇 곳에 두어 번씩 제사를 지내기도 하여 사전(祀典)을 더럽힌 관계로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하늘의 뜻에 순응하여 명을 받아 한 시대의 정치를 혁신시키려 하면서 다시 고려조의 폐습을 답습해서는 안 됩니다. 예조로 하여금 상정(詳定)해서 시행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가상히 여기고 받아들였다.
○ 우시중 조준(趙浚), 판중추원사 남은(南誾), 좌승지 이근(李懃) 등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래에 하늘의 견책이 자주 나타나고 있으니, 필시 하늘이 의도한 바가 있는 것이다. 무진년 무렵에 주벌을 받은 자들의 가산과 노비가 모두 관청에 귀속되고 처첩과 자손들은 고립되어 살아가기 때문에 슬픔과 원망이 깊어가고 있다. 하늘의 견책은 아마도 이런 일들 때문인 듯하다. 무진년 이후부터 즉위하기 이전까지의 기간 중에 적몰(籍沒)에 연좌된 자들을 모두 사면하고 가산과 노비를 모두 처자에게 주어서 생업(生業)을 이루도록 하라." 하였다.
2년(계유, 1393)
○ 4월. 상이 가뭄을 걱정한 나머지 도평의사에 전지(傳旨)를 내려서, 궁핍한 자를 보살필 것, 억울한 일을 심리할 것, 유능한 자를 등용할 것 등, 대체로 백성들에게 편리한 일들을 계획해서 아뢰게 하였더니, 이날 저녁에 비가 내렸다.
○ 선공감이 세자의 저택에 정자(亭子)를 지으려 하자, 상이 이 소식을 듣고 도승지 이직(李稷)에게 이르기를,
"근년에 공사가 매우 빈번한 것은 모두 부득이한 것들이다. 내가 어찌 좋아서 하는 일이겠는가. 세자는 정자가 없어도 된다. 짓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 양광도 안렴사 조박(趙璞)이 와서 알현하고, 면직을 요청하면서 아뢰기를,
"신은 일찍이 조그마한 공도 없이 외람하게 1등 공신에 참여하였으니, 실로 포의(布衣)로서는 최고의 대접인 만큼, 마음에 스스로 편치가 못합니다. 그런데 또 한 도(道)를 맡기시니 마치 모기가 산을 지고 있는 것과 같으니,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예로부터 신하가 명을 받고 외지에 나갔다가 도리어 참소를 받은 자가 많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신에게 내리신 이 직임을 거두시어 신의 목숨을 제대로 보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어찌 이런 말을 하는가. 나는 신하를 대할 때에 비록 칭찬하는 자가 있더라도 반드시 살피고, 헐뜯는 자가 있더라도 반드시 살펴서 기필코 그 실상을 캐낸 뒤에야 상을 줄 사람은 상을 주고 벌을 줄 사람은 벌을 주었다. 그러니 경은 가서 직임을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 환관 김사행(金師幸)이 아뢰기를,
"상의원에 소속된 인물로 서북 지역에 있는 자는 대부분 빠져 있으니 사람을 차정하여 보내서 점검하게 하소
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내장(內藏)의 사사로운 일이지 국가의 긴급한 사항이 아니다. 이보다 먼저 사람을 차송하는 문제의 폐단에 대해서는 내가 자세히 들어 알고 있는 바인데 감히 역말까지 번거롭게 하겠는가."
하였다. 김사행이 여러 번 애써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하교하기를,
"예로부터 왕이 된 자는 처음 왕업을 정할 때에 전조(前朝)의 후예들이 자신의 후환이 될까 염려하여 대부분 의심을 갖고 기필코 제거하고자 하였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하늘이 나에게 명하여 한 나라의 임금으로 삼았으니, 우리나라 안에 살고 있는 자는 모두 나의 백성들이다. 한결같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하늘의 뜻에 보답하는 길이다.
그래서 공양군(恭讓君)은 편의에 따라 안주시켰고 처자와 하인들도 그 전처럼 모여 살게 하였다. 다만 그 족속들만은 섬에 살게 하였으니 이들의 생활이 어려운 것에 대하여 나는 매우 민망하게 여긴다. 왕씨의 족속으로 거제도에 있는 자를 정해진 기한 안에 육지로 내보내서 각각 주군(州郡)에 안치시킨 다음, 생업을 이루게 함으로써 안정된 처소를 잃지 않게 하라. 그 중에 만약 재간이 있는 자가 있거든 가려 뽑아서 보고하라. 내가 임용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이에 거제도에 있던 왕씨를 모두 완산(完山), 상주(尙州), 영주(寧州)에 나누어 살도록 하고, 이어서 왕강(王康)과 왕승보(王承寶)를 불러들였다.
○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유경(劉敬)이 아뢰기를,
"신은 지극한 은혜를 입어 높은 벼슬에 있으나, 국가에 보답하지 못하고 국록만 축내고 있습니다. 사직하고서 신선술(神仙術)을 배우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가 나의 인정을 받은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데, 지금 그대가 훌쩍 떠나버린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겠는가. 그리고 신선술을 배운다고 하는 자들은 반드시 임금과 어버이를 버리고 만다. 그대가 지금 나를 버리는 것은 불충(不忠)이며, 어버이를 버리는 것은 불효(不孝)인데, 신선술을 배우겠다고 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였다.
3년(갑술, 1394)
○ 대간과 형조가, 왕강(王康)촹왕승보(王承寶)촹왕승귀(王承貴)촹왕격(王?)을 섬으로 옮길 것을 요청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다시는 이 일에 대하여 언급하지 못하게 하자,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이들을 비록 후하게 대해 준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필시 은혜롭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왕강은 지모(智謀)가 남보다 뛰어나고 왕승보와 왕승귀의 용맹도 당할 자가 없으니, 이들이 서울에 있게 되면 필시 예측할 수 없는 변란을 선동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상은 또 윤허하지 않았다. 그리고 왕강 등에게 이르기를,
"경들은 쓸 만한 인재들이기 때문에 불러다가 서울에 두고서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이번에 간관이 섬으로 옮기기를 요청하였지만, 나는 들어주지 않았으니, 경들은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고려조 말기에 요역(?役)이 번잡해지자 백성들은 고통스러워하였다. 그래서 내가 즉위한 이후로 이들을 안집시켜서 편히 살아갈 수 있게 하려고 다짐했었다.
성(城)은 국가의 방패막이로서 침입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는 기능을 하는 만큼, 정비를 잘 해두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지난 가을에 경기(京畿), 양광(楊廣), 서해(西海), 교주(交州), 강릉(江陵)의 백성들을 징발하여 도성(都城)을 수리하였다. 그러나 워낙 큰 역사이다보니 죽은 자가 많았다. 나는 이 점을 민망하게 여긴다. 성을 쌓는 데 참여한 무리들을 돌려 보내고 그들의 집에 3년 동안 복호(復戶)하도록 하라."
하였다.
○ 황제가, "본국이 요동으로 사람을 보내 포백(布帛)과 금은(金銀)을 가지고 예를 행하는 것처럼 하여 변장(邊將)을 꼬드기고, 또 사람을 보내 여진(女眞)을 설득하여 은밀히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게 했다."는 등의 일로 수조(手詔)를 내려 문책을 하자, 표문(表文)을 올려 이 사실을 변명하였다. 그 대략에,
"요동에서 예를 행한 것은 이것 역시 상국(上國)을 받드는 뜻에서 사신이 왕래할 즈음에 손님과 주인이 서로 주고받는 의례적인 행사일 뿐입니다. 예의상 그렇게 한 것인데 꼬드겼다는 말은 당치 않습니다. 그리고 여진(女眞)의 경우는 동녕(東寧)에 예속되어 있어서 이미 군사가 되었으므로 의레 차정한 것인데, 어찌 사람을 보내 설득하려 했겠습니까.
다만 요동도사(遼東都司)가 탈환불화(脫歡不花)를 데려올 때에 그 관하(管下)의 백성들이 즉시 따라나서지 않은 자가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그곳을 편하게 여겨서 그런 것이지 신이 억지로 머물게 해서 우리나라에 공직(供職)하는 일이 없게 하고 각각 그들의 구업(舊業)을 지켜가게 한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정도전이 말을 만들었다.- 황제가, 표문의 말투가 거만하다는 것으로 더욱 노여워하여 요동에 명하여 조선의 사신을 들여보내지 못하게 하였다. 그 때문에 사신이 요동에 가서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온 자가 다섯이나 되었다.
황제가 사신을 보내 상에게 친아들을 보내라고 유시할 때에 우리 태종(太宗)은 정안군(靖安君)으로 계셨다. 상이 이르기를,
"천자가 만일 하문을 할 경우 네가 아니면 대답할 수가 없다."
하니, 태종이 대답하기를,
"신이 종묘 사직의 만년대계를 위하는 일에 어찌 사양하고 회피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눈물을 흘리면서 이르기를,
"체질이 본래 허약한데 1만 리나 되는 길을 탈 없이 다녀올 수 있겠느냐?"
하였다. 조정의 대신들이 모두 태종이 다녀오는 것을 어려운 일로 여겼다.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使) 남재(南在)가 아뢰기를,
"정안군이 1만 리나 되는 길을 떠나려 하는데 우리들이 편하게 지내다가 이곳에서 죽는 것이 옳은 일인가?"
하고, 함께 가기를 자청하였다. 드디어 태종에게 명하여 조반(趙?), 남재와 함께 표문을 받들고 경사(京師)에 가게 하였다.
중국 선비들이 태종을 보고 모두 조선 세자(朝鮮世子)라고 칭하면서 깍듯이 대하였다. 연부(燕府)를 지날 적에 태종황제는 당시 연왕(燕王)의 신분으로 태종을 친견하고 극진한 대접을 하였다. 태종이 연(燕)을 떠나 길을 가다가, 태종황제가 안연(安輦)을 타고 조회차 경사(京師)로 급히 가는 것을 만났다. 태종이 말에서 내려 길가에 서서 알현하니, 태종황제가 수레를 멈추게 하고 연(輦)의 휘장을 즉시 열어서 한동안 온화한 말을 하더니 지나갔다. 태종이 경사에 도착하니, 황제가 두세 번 인견하였다. 태종이 표문(表文)을 주달하여 자세히 변명하니, 황제가 극진한 예우를 하여 돌려보내고 이어서 조빙(朝聘)하는 길을 열어주도록 명하였다.
○ 도승지 한상경(韓尙敬)에게 명하여 도평의사(都評議司)에 교지를 전하게 하면서 이르기를,
"왕씨가 선조의 제사를 끊어버리자 하늘이 나로 하여금 나라를 세우게 하였으니 이는 실로 백성을 위한 것이다. 만약 하늘을 공경하지 않고 백성을 보살피지 않으면 필시 하늘이 재앙을 내릴 것이다. 예로부터 세상이 잘 다스려지지 못한 경우는 임금과 신하가 서로 잘 만나지 못해서 그렇다. 내가 비록 부덕하지만, 매번 생각하기를 '경들이 시기에 맞추어 나와서 나의 팔다리가 되어 대업을 창건하였으니 마땅히 밤낮없이 최선을 다하여 하늘의 뜻에 보답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었다. 내가 늙고 병들어서 정사를 게을리하고 단지 경들만 믿고
있지만 정치를 잘 해보려는 마음을 어찌 잠시인들 잊어본 적이 있었겠는가. 경들은 마땅히 제각기 마음을 다하여 부족한 점이 많은 나를 보필하도록 하라."
하니, 시중 조준(趙浚)과 김사형(金士衡) 등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대답하기를,
"신들이 어리석은 자질을 가지고 성상의 인정을 받게 되었는데, 감히 최선을 다해서 은혜의 만분의 일이나마 돕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4년(을해, 1395)
○ 4월. 재변으로 인하여 구언(求言)을 하였다. 하교하기를,
"시기적으로 양기(陽氣)가 한창인 달에 이같은 음산한 천변이 발생하니, 변고가 심상치 않아 나는 매우 두려워하고 있다. 인사(人事)에서 빚어지는 득실에 따라 하늘의 재상(災祥)은 유별로 반응을 보이곤 하기 때문에 옛날 슬기로운 임금들은 매번 천재(天災)를 만나면 반드시 인사에서 그 원인을 찾거나, 혹은 자신을 반성하여 그 원인을 찾거나, 혹은 여러 사람들의 말을 널리 구하여 그 원인을 찾았다.
내가 하늘을 대신해서 만물을 다스린다고는 하나, 혼자서 다스릴 수는 없다. 그래서 재상들과 함께 하려는 것이니, 시정(時政)의 득실과 생민(生民)의 애환을 숨김없이 진달하라. 그렇게 하면 아마 잘못을 시정해서 하늘의 견책에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 정도전에게 명하여, 신궁(新宮)과 여러 전(殿)의 이름을 짓게 하니, 정도전이 이름을 짓고 그 이름을 지은 취지를 함께 써서 올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궁의 이름은 '경복궁(景福宮)'으로 하소서. 신이 살피건대, 궁궐은 임금이 정사를 보는 곳이며, 사방이 우러러보는 곳입니다. 신하와 백성이 함께 조성한 것이므로 제도를 장엄하게 해서 존엄성을 보이고 명칭을 아름답게 해서 감동을 불러일으키도록 해야 합니다.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 이후로 궁전의 이름을 그대로 두기도 하고 바꾸기도 하였으나 존엄성을 과시하고 감동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 있어서는 그 취지가 동일합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3년째 되는 해에 한양(漢陽)에다 도읍을 정한 다음 먼저 종묘를 세우고 이어 궁실을 축조하였습니다. 이듬해 을해년에 친히 곤룡포와 면류관을 착용하고 선왕(先王)과 선후(先后)를 새로 지은 사당에다 배향하고 여러 신하들을 새로운 궁전으로 불러들여 잔치를 벌였는데, 이것은 조상신의 은혜를 넓게 하고 후손들에게 복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술을 세 순배 돌리자, 신 정도전에게 분부하시기를 '지금 도읍을 정하여 사당에다 향사를 올리고 신궁(新宮)도 낙성을 고하게 되어 여러 신하들과 여기에서 잔치를 하는 것이니, 그대는 한시바삐 궁전의 이름을 지어서 국가와 함께 그 아름다움이 영원히 전해지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신이 명을 받아 손을 모아 절을 하고 《시경》 대아(大雅) 기취(旣醉)에 있는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니 후왕의 앞날에 큰 복[景福]을 받게 하리라.'는 글을 외우고서 신궁의 이름을 경복(景福)으로 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이제는 전하와 자손들이 만년토록 태평스런 왕업을 누릴 수 있고 사방의 백성들도 길이 감동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춘추》에 '민력(民力)을 소중히 하고 토공(土工)을 삼가야 한다.' 하였으니, 어찌 임금이 된 자로 하여금 한갓 백성만 괴롭게 해서 자신을 받들도록 하라는 것이겠습니까. 넓은 집에서 한가로이 지내실 때에는 빈한한 선비들을 도울 생각을 하고 전각에 서늘한 바람이 일면 그 맑은 그늘을 함께 나눌 생각을 하신 뒤라야 거의 백성들의 봉양을 저버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아울러 말씀드립니다.
연침(燕寢)의 이름은 '강녕전(康寧殿)'으로 하소서. 홍범(洪範) 구주(九疇)의 오복(五福)에 세 번째가 강녕(康寧)입니다. 대체로 임금이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고 덕을 닦아서 황극(皇極)을 세우게 되면 오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강녕은 오복 중의 하나인데, 가운데를 들어서 나머지를 알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고 덕을 닦는 문제는 많은 사람이 함께 보는 곳에 있으므로 억지로 하는 이도 있습니다만, 편안히 혼자 계실 때는 안일에 빠지기 쉽고 경계하는 마음이 나태해지게 되어서 마음가짐은 바르지 못한 것이 있게 되고 덕은 닦아지지 않은 면이 있게 되어서 황극은 세워지지 않고 오복은 무너지고 맙니다. 옛날 위 무공(衛武公)이 자신을 경계한 시(詩)에 '군자를 벗으로 사귈 때의 너의 태도를 보니 얼굴을 부드럽게 하여 무슨 잘못이 없을까 염려하더라만, 너의 집에 혼자 있을 때도 옥루(屋漏)에 부끄럽지 않게 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무공이 경계하고 삼가는 것이 이러했기 때문에 90세가 넘도록 살았으니, 황극을 세워서 오복을 누린 분명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그 공부하는 문제는 평소 혼자 있는 데서 비롯됩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위 무공의 시를 법으로 삼아 안일을 경계하시고 경외하는 마음을 두어서 황극의 복을 누리신다면 성자 신손(聖子神孫)이 잘 계승해서 천만세를 전해갈 것입니다. 그래서 연침을 '강녕전(康寧殿)'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동소침(東小寢)은 '연생전(延生殿)'이라고 하고, 서소침(西小寢)은 '경성전(慶成殿)'이라고 하였습니다. 천지(天地)는 만물을 봄에 싹트게 하여 가을에 성숙시키고, 성인은 만물을 인(仁)으로 살리고 의(義)로 제재를 가합니다. 그러므로 성인이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릴 때에 정령(政令)을 시행하는 것을 천지가 운행하는 대로 따라 합니다. 동소침을 '연생전'이라고 하고 서소침을 '경성전'이라고 한 것은 전하께서 천지의 생성하는 도리를 법으로 삼아 그 정령을 시행하는 것을 명시하는 것입니다.
연침의 남전(南殿)은 이름을 '사정전(思政殿)'으로 하소서.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을 수 있고 생각지 않으면 잃게 됩니다. 대체로 임금은 자신의 한 몸으로 숭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수많은 사람 중에는 지혜로운 사람, 어리석은 사람, 어진 사람, 불초한 사람이 섞여 있기 마련이고, 수많은 일 중에는 옳은 일, 그른 일, 이로운 일, 해로운 일이 섞여 있기 마련입니다. 임금된 자가 깊이 생각하고 세밀히 살피지 않는다면 어떻게 일의 타당성 여부를 파악해서 처리할 수 있겠으며, 사람의 현우(賢愚)를 살펴서 진퇴시킬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임금이 되어 어느 누가 존영(尊榮)을 누리고 싶어하지 않고 위태로움은 피하고 싶어하지 않았겠습니까만, 옳지 못한 사람을 친근히 한 결과 계획이 옳지 못하여 패망에 이르게 되는 경우는 그 원인이 생각하지 않은 데에 있습니다. 《시경》에 '어찌 생각지 않아서이겠소! 집이 멀어서일 뿐이오.'라고 하였는데, 이 말에 대해 공자는 '생각지 않는다면 몰라도 먼 것이 무슨 상관인가.' 하였고, 《서경》에 '생각을 하면 슬기로워지고 슬기로워지고 나면 성(聖)이 된다.' 하였으니, 생각은 사람에게 있어서 그 활용도가 절대적입니다.
이 전(殿)에서 매일 아침 정사를 보시게 되면 모든 정무를 거듭 모아서 전하께 품달하게 될 터인데 조칙을 내려 지휘할 때에 더욱더 생각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은 이 전(殿)의 이름을 '사정전(思政殿)'으로 할 것을 요청합니다.
또 그 남쪽에 있는 정전(政殿)을 '근정전(勤政殿)'이라 하고 그 문을 '근정문(勤政門)'이라 하소서. 천하의 모든 일이 근면하면 다스려지고 근면하지 않으면 황폐화되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오히려 그러한데 더구나 정사(政事)와 같은 큰 일이야 어떠하겠습니까. 《서경》에 '걱정이 없을 때에도 경계를 하여 법도를 잃지 말라.' 하였고, 또 '안일과 욕심으로 제후국을 가르치지 말아서 삼가고 조심하소서. 하루이틀 사이에 일의 조짐은 만 가지로 일어납니다. 여러 관직을 비워두게 하지 마소서. 하늘의 일을 사람이 대신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이는 순(舜)과 우(禹)가 근면했던 바입니다. 또 '아침부터 시작하여 점심 때가 되고 저녁 때가 되도록 식사할 겨를이 없이 백성을 모두 화락하게 하는 일에 힘쓰셨다.' 하였는데, 이는 문왕(文王)이 근면했던 바입니다. 임금이 되어 근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편안히 봉양하는 것이 이미 오래되면 교만과 안일이 생기기 쉽고, 또 아첨하는 사람이 부추겨서 말하기를 '천하국가 때문에 정신을 피곤하게 하여 수명을 단축시킬 것이 없습니다.' 하고, 또 '이미 숭고한 지위를 차지하셨는데 어찌 유독 자신을 낮추어서 수고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면서, 혹은 여악(女樂)으로, 혹은 유전(遊?)으로, 혹은 완호(翫好)로, 혹은 토목(土木)으로 일반적으로 황음무도(荒淫無度)에 속하는 일이면 뭐든지 말을 합니다. 그러면 임금은 그것에 솔깃해져서 자신이 나태함으로 빠져드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 임금들이 삼대(三代) 시절의 임금만 못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니 임금이
그러나 한갓 임금이 근면해야 한다는 것만 알고 근면해야 할 이유를 모른다면 그 근면은 잗달고 각박한 데로 흘러서 보잘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아침에 정사를 듣고, 낮에는 방문을 하고, 저녁에는 법령을 다스린다.' 하였으니, 이것은 임금의 근면을 말한 것입니다. 또 '어진이를 찾는 데에 부지런히 힘쓰고 어진이에게 맡기는 것을 신속히 한다.' 하였으니, 신은 이런 취지로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동쪽과 서쪽에 있는 누각(樓閣)의 이름은 '융문(隆文)'과 '융무(隆武)'로 하소서. 문(文)은 정치를 이루고, 무(武)는 난리를 진정시키는 것이므로 이 두 가지는 마치 사람의 팔과 같아서 어느 한쪽도 폐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대체로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찬란하고 군사와 병기가 빠짐없이 정비되어 있는데다 사람을 등용하는 경우에도 문장(文章)과 도덕(道德)이 출중한 선비와 과감성과 용맹이 뛰어난 자를 중외에 배치시킨다면 이것은 모두 융문(隆文)과 융무(隆武)의 극치인 것입니다. 따라서 전하께서 문(文)과 무(武)를 함께 써서 장구한 정치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오문(午門)의 이름을 '정문(正門)'으로 하소서. 천자와 제후가 그 위치는 비록 다르나 남면(南面)을 하고서 정치를 하는 것은 모두 정(正)에 근본을 두고 있는 것이니 대체로 그 이치는 하나인 것입니다. 고전(古典)을 상고해 보면 천자의 문을 '단문(端門)'이라고 했는데, 단(端)이란 정(正)을 말하니, 지금 오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 칭하소서. 명령(命令)과 정교(政敎)가 필시 이 문을 통해 나갈 것인데 이때 살펴보고서 윤허한 후에 내보낸다면 참설이 행해지지 않고 교만과 거짓이 발붙일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또 부주(敷奏)와 복역(復逆)이 필시 이 문을 통해서 들어오게 될 것인데 이때 살펴서 이미 윤허한 후에 들여보내게 한다면 간사한 일이 진달될 수 없고 공적을 상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을 닫아서 괴이한 말을 하는 간사한 백성을 근절시키고, 문을 열어서 사방의 현인을 오게 하는 이것이 모두 정(正)의 큰 것입니다."
하였다.
○ 상이 경신(30일) 밤에 판삼사사 정도전 등 여러 훈신을 불러 술을 마시면서 풍악도 잡혔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상이 정도전에게 이르기를,
"과인이 이 자리에 이른 것은 경들의 덕택이니 서로 공경하고 삼가서 자손 만세까지 이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정도전이 대답하기를,
"제 환공(齊桓公)이 포숙(鮑叔)에게 묻기를, '어떤 방법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하겠는가.' 하니, 포숙이 대답하기를, '원컨대 공께서는 거(?) 땅에 있던 때를 잊지 마시고, 중부(仲父 관중(管中)을 지칭)께서는 함거(檻車)에 있던 때를 잊지 마소서.' 한 일이 있습니다. 신이 원컨대, 전하께서 말에서 떨어지던 때를 잊지 마시고 신도 갇혔던 때를 잊지 않는다면, 자손들이 만세를 이어가는 것을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악공(樂工)이 문덕곡(文德曲)을 부르자 정도전을 쳐다보면서 이르기를,
"이 곡은 경이 지어서 올린 것이니 경은 일어나서 춤을 추어보라."
하자, 정도전이 바로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 그래서 갖옷을 하사하고 즐겁게 지내다가 자리를 파하였다.
○ 일찍이 한산백(韓山伯) 이색(李穡)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상이 문덕(文德)촹무공(武功) 두 곡을 듣고서 이르기를,
"노래로 공덕을 송축하는 것이 실로 실정보다 지나쳐 매번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나는 몹시 부끄럽다."
하니, 정도전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이런 마음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노래를 짓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5년(병자, 1396)
○ 황제가, 신정 하례를 올리는 표전(表箋)을 보고 희모(?侮)가 담긴 글자가 있다고 노여워하면서 표문을 지은 정도전을 불러들이도록 하였다. 정도전이 병이 났다고 핑계를 대자, 예문 춘추관 학사 권근(權近)이 청하기를,
"표문을 지은 일에 대해서는 신도 참여하여 알고 있습니다. 원컨대, 사신을 따라 중국에 가겠습니다."
하니, 상이 부르지 않았는데 갈 것 있느냐고 만류하였다. 권근이 아뢰기를,
"신이 고려 말기에 중한 질책을 받고 거의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뻔하였는데, 다행히 전하께서 감싸 주신 덕분에 성명(性命)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국가 초기에 또 수용해 주시니 재생시켜 주신 은혜는 하늘처럼 가이 없는데 신은 은혜를 갚지 못하였습니다. 원컨대, 중국에 가서 하늘과 같은 복을 거의 변명할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성은의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하리라고 봅니다."
하였는데, 상이 은밀히 황금을 노자로 주었다. 압록강에 이르니, 사신 패라(?羅)가 여러 재상들에게 입대(入對)할 내용에 관하여 묻고 권근에게는 묻지 않으니, 권근이 말하기를,
"대인은 왜 나하고만 말을 하지 않습니까?"
하니, 패라가 정색을 하면서 말하기를,
"지금 그대는 부른 일도 없는데 스스로 왔으니, 그대 나라의 충신(忠臣)인 것이다. 황제가 무엇을 묻겠으며, 그대는 무엇을 대답할 것인가?"
하였다. 조정에 들어가자 예부가 표문을 지은 사람을 억류하고 본국에 자문(咨文)을 보내려 할 때에 권근을 불러 자초(咨草)를 보게 하니, 권근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 마당에 표문이 아니면 실정을 진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들이 해외에서 태어나 학문이 능숙지 못하여 우리 임금의 충성이 천자에게 제대로 주달되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는 신들의 죄일 뿐입니다."
하니, 황제가 그 말을 수긍하고 잘 대접해 주었다. 그리고 시(詩) 18편을 짓게 하였는데, 매번 한 편씩 올릴 때마다 황제가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어서 유사에게 신칙하여 술과 안주, 기생과 풍악을 마련하게 하고 그를 3일 동안 유관(遊觀)하게 하였다. 또 시를 지어 올리게 하고 황제도 장율시(長律詩) 3편을 지어서 하사하고, 문연각(文淵閣)에 벼슬을 하도록 하였다. 한림학사 유삼오(劉三吾), 허관(許觀), 경청(景淸), 장신(張信), 대덕이(戴德彛)와 서로 주선하면서 매번 상의 대국을 섬기는 정성에 대해 말하자, 황제가 이 말을 듣고 노련한 수재(秀才)라고 자주 말하더니 이어서 돌려보내라고 명하였다.
○ 항왜 구육(?六) 등이 토산물을 가지고 와서 진상하니, 상이 인견하고 의관(衣冠)을 하사하였다. 구육이 아뢰기를,
"듣건대, 전하께서는 항복한 자를 보살펴 주시고 지난날의 악한 행동은 따지지 않으신다고 하였습니다. 원컨대, 토지를 청하여 백성이 되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항복한 자가 유독 너만이 아니며, 항복을 받는 자도 유독 나만이 아니다. 천하가 모두 이러하니 네가 떠난다고 굳이 쫓아가지 않을 것이며 네가 찾아온다고 굳이 막지는 않을 것이다. 거취 문제는 오직 네 마음속에 달려 있다. 너는 너의 동료에게 가서 말하라. 그 중에 어찌 복지(福智)가 있는 자가 없겠느냐."
하니, 구육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물러갔다.
6년(정축, 1397)
○ 마전군(麻田郡)에서 죽은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에게 치제(致祭)하기를,
"하늘땅과 백성들에게 공로가 있는 자는 만세토록 다함이 없는 제사를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경의 선세(先世)가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제도와 문물을 500년을 이어왔으니, 그 공덕이 백성에게 미친 것이 깊다. 그
러므로 마땅히 오래도록 다함이 없는 제사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망하고 흥하는 것은 변함없는 하늘의 도리이다. 전조(前朝) 말기에 이르러 정치력을 상실하고 백성을 원망으로 시름하게 하더니 결국 선세의 사당으로 하여금 제사를 이어가지 못하게 하고 말았다.
부덕한 내가 하늘의 은총을 받았기에 혁명한 초기에 고전(古典)을 상고해 보고 어진이를 숭상하는 경에게 작읍(爵邑)을 봉하여 선세의 제사를 이어가게 한 것은, 실로 삼대의 예를 따른 것이다. 앞으로 선대의 예물을 가다듬어서 신중을 기하고 효성을 다하여 나라와 함께 그 행복을 누리고자 하였는데, 몇 년도 채 되지 않아서 하늘이 가만두지 않으시니 참으로 애통하다. 부음(訃音)을 듣고 난 후로 몹시 애석한 마음이 들었다. 이에 유사하게 명하여 예장(禮葬)을 치르게 하고 영구(靈柩) 앞에 치전(致奠)을 하게 하니, 경이 혼매하지 않다면 나의 지극한 심정을 체득하기 바라노라."
하였다. 이어서 그의 아들 상장군 왕조(王?)를 귀의군(歸義君)에 습봉(襲封)하여 왕씨(王氏)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그 도의 관찰사에게 명하여 근처 고을의 정부(丁夫)를 징발하여 고려 태조(高麗太祖) 신성왕(神聖王)의 사당을 마전(麻田)에 건립하게 하였다.
○ 경상 전라도 도안무사(都安撫使) 박자안(朴子安)이 항왜(降倭)를 응접하여 군사 기밀에 실책을 범한 일로 그 죄가 참형에 해당되었다. 이서(移書)하여 주벌을 가하도록 하였는데, 일이 왜적들에게 관계된다 하여 비밀에 부치고 선포하지 않아 외부인은 알지 못하였다. 그의 아들 박실(朴實)이 우리 태종의 잠저로 찾아갔는데, 때마침 여러 종친들이 찾아오자 태종이 문에 나와 영접을 하였다. 박실이 땅에 엎드려 통곡을 하면서 아비의 목숨을 살려 달라고 간청을 하자, 태종이 불쌍하게 여기고서 여러 종친들과 함께 그의 사형(死刑)을 용서해달라고 청하고자 하였다. 종친들이 아뢰기를,
"이는 국가의 비밀스런 일인데 상이 만일 어디에서 알았느냐고 물으시면 무슨 말로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내가 그 책임을 지도록 하겠다."
하고, 즉시 대궐에 나아가 내관 조순(曺恂)으로 하여금 계청하게 하니, 조순이 아뢰기를,
"이는 비밀스런 일인데 어떻게 알았습니까?"
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사람을 처벌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국가의 큰 일인데 외부인이 어찌 모를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조순이 들어가 아뢰자, 상이 이에 깨닫고 즉시 박자안의 사형을 용서해 주게 하였다. 역마(驛馬)를 보내 명을 전하니, 자안이 막 사형을 당할 찰나에 목숨을 구하였다.
박실(朴實)은 본래 재능이 없었다. 그런데 태종이 그가 아비 구한 것을 훌륭하게 여겨 금려(禁旅)를 맡게 하였는데 벼슬이 2품에 이르렀다.
○ 전라도 수군 만호 최원충(崔原忠)이 왜선 1척을 포획하여 병장(兵仗)을 바쳤다. 상이 이르기를,
"최원충이 배 1척을 모두 포획했다고 한다면 어찌 사로잡은 자가 한 사람도 없을 수 있겠는가."
하고, 친종호군(親從護軍) 김첨(金瞻)에게 명하여 이 배를 조사하게 하였더니, 이 배는 과연 사신가는 배였다. 그리고 판전농시사 김정경(金鼎卿)을 파견하여 이르기를,
"최원충이 사자(使者)을 죽이고 그 예물을 탈취하여 휘하의 사람들과 나누어 가졌으니, 사형을 받아도 남는 죄가 있다. 너는 김첨과 함께 법에 따라 신문해서 처형하여 대중에게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 도당(都堂)에 명하기를,
"불씨(佛氏)의 도(道)는 마땅히 청정과욕(淸淨寡欲)으로 종지(宗旨)를 삼아야 할 터인데, 지금 사원(寺院)의 주지(住持)라고 하는 자들이 산업(産業)을 경영하기에 힘쓰고 있으며, 심지어 이른바 색계(色戒)를 범하고도 뻔뻔스럽게 부끄러워할 줄을 모른다. 그들이 죽고 나면 그 제자들이 사사(寺社)와 노비(奴婢)들을 법손(法孫)이 대(代)를 이어 전수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심지어 서로 송사(訟事)를 하기까지 한다. 내가 잠저에 있을 때부터 그 폐단을 혁파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유사로 하여금 조사해서 보고하게 하라."
○ 유구국(琉球國)의 왕이 사신을 보내 신하임을 자칭하고, 전문(箋文)을 바치면서 왜국에 포로가 되었던 우리나라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섬라국(暹羅國)의 왕도 사신을 보내 방물(方物)을 진상하였다.
삼국(三國)의 말기에 평양(平壤) 이북은 모두 야인(野人)의 사냥하는 곳이었다. 고려가 남쪽 지역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살게 하고 의주(義州)부터 양덕(陽德)까지 가로질러 장성(長城)을 쌓게 하였으나, 생활에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자주 반란을 일으켰으며 심지어 군사를 출동시켜 토벌까지 하였다. 또 남쪽 지역은 왜구가 날뛰었다. 이리하여 동서 수천 리와 연해(沿海) 수백 리가 성곽은 불에 타고 들녘은 백골이 널려 있어 인가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안변(安邊) 이북은 대부분 여진(女眞)에게 점거되어 정령(政令)이 미치지 않았다. 예종(睿宗)이 장수를 보내 깊숙이 들어가서 승첩하여 공을 세우고 성읍(城邑)을 세웠으나 얼마 후에 다시 빼앗겼다.
상이 즉위한 이후에 성교(聲敎)가 먼 곳까지 미치니 백성들은 비로소 생업에 안정을 찾게 되고 전야(田野)는 날로 개간되었으며 인구도 날로 증가하였다. 야인(野人)의 추장이 모두 잠저를 섬기면서 동서로 정벌할 경우에는 어디든지 따라다녔다.
상이 즉위한 후에 만호(萬戶)와 천호(千戶)의 관직을 적당히 주어서 이두란(李豆蘭)으로 하여금 여진(女眞)을 안집시키게 하니, 피발(被髮)하던 풍습이 모두 관디를 착용하고 금수와 같은 행동을 바꾸어 예의의 가르침을 익혔으며, 우리나라 사람과 서로 혼인을 하고 복역(服役)과 납부(納賦)하는 것도 다 같은 편호(編戶)에 들었다. 그리고 추장(酋長)에게 부역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모두 백성이 되기를 원하였다. 공주(孔州) 이북에서부터 갑산(甲山)에 이르기까지 읍(邑)과 진(鎭)을 두어 백성의 일을 다스리고 학교를 세워 경서(經書)를 가르치니, 문무(文武)에 의한 정치가 다 실현되었고 1천여 리나 되는 땅이 모두 조선(朝鮮)의 영토가 되었다.
풍습이 다른 강 건너 지역들이 다투어 의(義)를 사모하여 직접 와서 조회하는 자도 있고, 자제를 보내는 자도 있고, 벼슬 받기를 요청하는 자도 있고, 내지로 이주하는 자도 있었으며, 기르는 말이 좋은 망아지를 낳으면 모두 자기들이 소유하지 않고 다투어 진상하였다. 강 근처에 거주하는 자들이 우리나라 사람과 다투었을 경우 관청에서 사리의 옳고 그름을 따져 감옥에 가두거나 곤장을 때려도 감히 원망하는 일이 없었다. 또 변장이 사냥할 때면 모두 삼군(三軍)에 소속되기를 자원하여 짐승을 잡으면 관청에 헌납하였으며, 법률을 어기면 벌을 받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과 차이가 없었다.
○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가 아뢰기를,
"한(漢) 나라 군정(軍政)은 처음에 우격(羽檄)을 사용하여 천하의 병사를 소집하였고 뒤에는 호부(虎符)를 사용하여 군국(郡國)의 신의를 규합하였습니다. 교서(膠西)가 멋대로 군사를 출동시키려 하자 궁고(弓高)가 힐문하였고, 엄조(嚴助)가 절(節)을 가지고 군사를 출동시키려 하자 군수가 거절하였으니, 병사를 소집하는 데에 있어서 치밀성이 이런 정도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간사한 마음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여씨(呂氏)들의 변(變)과 칠국(七國)의 변란이 갑자기 발생하였으나 대비책이 평소에 갖추어져 있었고, 북호(北胡)와 남월(南越)이 수년 동안 군사를 연합하였으나 국가의 기반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고조(高祖)가 군사를 직접 관여하여 그 문제점을 깊이 연구하여 400년을 이어갈 수 있는 굉장한 규모를 마련한 결과일 것입니다.
바라건대, 이 제도에 따라 유사로 하여금 호부(虎符)를 만들게 하소서. 그리하여 내외의 군사를 징발시킬 일이 있을 경우에 삼가 교지(敎旨)를 받들어 호부로 군사를 징발하게 하고, 호부가 없이 군사를 소집할 경우에는 멋대로 징발한 것으로 논죄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을 동북면 도선무순찰사(東北面都宣撫巡察使)로 삼아 군현의 지계(地界)를 확정하게 하고 또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정도전이 종사관 최긍(崔兢)을 보내 지계를 확정한 일을 아뢰니, 상이 중추원 부사 신극공(辛克恭)을 도선위사(都宣慰使)로 삼아 정도전에게 수서(手書)를 보내면서 옷과 술을 하사하였다. 그 글에,
하였다.
7년(무인, 1398)
○ 봉화백 정도전과 화산군(花山君) 권근(權近)을 성균관 제조로 삼고 4품 이하 유사(儒士)를 모아 경사(經史)를 강습하게 하였다.
○ 이문화(李文和)에게 명하여 도당에 전지(傳旨)하기를,
"송 예조(宋藝祖)가 국용(國用) 외에 별도로 내고(內庫)를 설치하였는데 마치 사장(私藏)과 같았다. 그러나 일찍이 근신에게 말하기를, '군사 문제와 기근에 대해서는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한다. 일에 닥쳐서 많이 거두는 것은 좋은 대책이 아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짐은 팔주(八州)의 백성이 오랫동안 오랑캐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겨 500만 민(緡)을 저축하게 해서 태행산(太行山) 뒤의 여러 군(郡)을 상환 받도록 하겠다.' 하였는데, 그렇다면 송 나라가 내탕(內帑)을 설치한 것은 사장이 아닌 것이다. 본래 천화(泉貨)와 금백(金帛)을 유사에게 나누어 명한 것은 직수(職守)를 전임하게 하기 위한 것이고, 정수(定數)를 조사하게 한 것은 돈이 새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 내가 유비고(有備庫)를 설치한 이유는 전적으로 군수(軍需)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들어오는 전곡(錢穀)과 포백(布帛)을 삼사로 하여금 수입을 따져서 지출토록 하고, 만일 군사를 징발할 일이 있게 되면 그때 가서 전지의 뜻을 취하여 적당량을 헤아려서 사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 경상도 관찰사가 굶주린 백성을 구제해 주기를 청하니, 좌정승 조준(趙浚)이 아뢰기를,
"굶주린 백성은 제도(諸道)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모든 국고(國庫)를 열어서 이들을 구제한다면 신은 아마도 국고에 남은 곡식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국고에 곡식이 있는데 어찌 구제해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 가뭄 때문에 구언(求言)을 하니, 상언하는 자들이 모두 토목 공사를 속히 혁파할 것, 여관(女官)과 환관(宦官)의 직을 도태시킬 것, 이른 아침부터 정사에 대해 들을 것, 군자를 가까이하고 소인배를 멀리할 것 등으로 대답하였다. 이에 궁궐 짓는 것을 그만두고, 오직 공신의 처모(妻母)를 옹주(翁主)에 봉한 것 외에 궁주(宮主), 옹주(翁主), 택주(宅主), 여관(女官)의 녹(祿)까지도 모두 중지하게 하였다.
이문화로 하여금 도당에 묻게 하기를,
"경들이 한 말이 간절하기는 하지만 그 일에 대해 바로 쓰지 않고 그 사람을 바로 지적하지 않은 채 은근슬쩍 풍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였다.
○ 형조 판서 유관(柳觀)이 아뢰기를,
"사람이 타고난 기질은 경한(輕悍), 강과(剛果), 유나(柔懦), 겁약(怯弱)이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간혹 진범인데도 곤장을 견디어내고 끝내 공초에 승복하지 않는 자가 있고, 무함을 받고도 고통을 참지 못해서 결국 죄를 뒤집어쓰는 자도 있습니다. 그런데 형벌을 담당하고 있는 자가 사람들이 승복하는 것만 좋아하고 인명이 얼마나 소중한가는 전혀 고려하지 않다 보니 법조문 밖의 형벌을 만들어서 온갖 방법으로 신문을 해대곤 합니다. 그리하여 죄상(罪狀)이 드러나기도 전에 곤장의 아래에서 죄인을 죽게 함으로써 성상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
바라건대, 중외의 형벌을 담당하고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단지 율문(律文)에 따라서 고문을 실시하고 법조문 밖의 형벌은 일체 금지하게 하소서. 항상 말과 얼굴빛을 살피고 그 증거를 찾아서 진실 여부를 밝혀내도록 하고 함부로 매를 때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가상히 여기고 받아들였다.
2권 정종조(定宗祖)
정종 의문장무 온인순효 대왕(定宗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
휘는 경(?), 자는 광원(光遠), 초휘는 방과(芳果)이다. 지정(至正) 정유년(공민왕 6, 1357) 7월 1일에 함흥(咸興) 귀주동(歸州洞) 사저에서 탄강하였다. 왕위에는 2년 동안 있었으며, 상왕위에는 19년 동안 있었다. 영락(永樂) 기해년(세종 1, 1419) 9월 26일(무진)에 승하하였다. 향년은 63세이고 후릉(厚陵) -풍덕에 있다.- 에 장사지냈다.
즉위년(무인, 1398)
○ 상(上)은 태조의 둘째 아들이다. 성품이 온화하고 검소하였으며 용맹과 지략이 남보다 뛰어났다. 고려에 벼슬하여 여러 관직을 거친 다음 장상(將相)에 이르렀으며, 일찍이 태조를 따라가서 전공(戰功)을 세우기도 하였다. 태조가 즉위한 후에 영안군(永安君)에 봉해졌다. 홍무(洪武) 무인년(태조 7, 1398) 8월에 정안군(靖安君)-태종 대왕-이 정도전(鄭道傳)의 난을 평정하자, 태조가 정안군을 세자로 삼으려 하였다. 정안군이 서열을 가지고 상에게 사양하니, 이에 상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9월에 내선(內禪)을 받고 경복궁(景福宮)의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하였다. 태조를 태상왕(太上王)으로 높이고, 빈(嬪) 김씨(金氏)를 책봉하여 덕비(德妃)로 삼았다.
1년(기묘, 1399)
○ 1월. 1일에 상이 태상왕께 조회하고 정전으로 돌아와서 조하(朝賀)를 받고 신하들에게 잔치를 열었다.
평양부윤 성석린(成石璘)은 의기도(?器圖)를 올리고, 경기좌도 관찰사 이정보(李廷?)는 역년도(歷年圖)를 올리니, 경기우도 관찰사 최유경(崔有慶)은 무일도(無逸圖)을 올리니, 상이 모두 가상하게 여기고 받았다.
○ 상이 경연에 거둥하여 의기도를 벽에다 걸어 놓고 신하들에게 보이니, 지경연사 이서(李舒)가 그릇이 비면 기울어지고 가득 차면 엎어지는 이치에 대해 의미를 확장하여 설명하고 가득 차면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으로 갖추 진달하니, 상이 기뻐하였다.
○ 처음으로 사관(史官)을 경연에 입시하게 하였다. 문하부(門下府)가 상소하기를,
"사관의 직책은 대체로 임금의 언동과 시정(時政)의 잘잘못을 숨기지 않고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는 것은 반성의 자료로 삼도록 하고 경계도 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전조(前朝)의 말기에는 주색에 빠져 법도가 없다 보니 사관이 사실대로 기록하는 것을 꺼려하여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전조의 실정(失政)을 거울로 삼아 사관으로 하여금 날마다 좌우에서 모시고 앉아 임금의 언동과 시정을 기록하게 해서 만세의 대원칙으로 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우정승 김사형(金士衡)을 파견하여 경사(京師)로 보냈는데, 건문황제(建文皇帝)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해서이다. 상이 홍제원(弘濟院)에서 전송하였다.
○ 호서 지방의 백성들이 궁성(宮城)에 사용할 기와와 이엉을 운송하는 역사와 조군(漕軍)의 어염(漁鹽)에 대한 역사를 견감하였는데, 충청 감사 이지(李至)의 청을 따른 것이다.
○ 호서에 기근이 들자, 본도의 군자(軍資)를 가지고 구조해 주게 하였다.
○ 올적합(兀狄哈) 등이 와서 조회하였다.
○ 각도 감사에게 내려주는 쌀을 제외하고 실직에 따라 녹(祿)을 반사하였다.
○ 2월. 상이 제릉(齊陵)에 행행하여 한식제(寒食祭)를 친행하고 개성(開城) 유후사(留後司)를 둘러보았다. 수창궁(壽昌宮) 북원(北苑)에 올라가서 좌우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전조 태조(太祖)의 지혜로 여기에다 서울을 정한 것이 어찌 우연이었겠는가."
하였다.
○ 상이 개성에서 돌아왔다.
○ 3월. 개성으로 서울을 옮길 때에 한양(漢陽)의 궁궐은 초창기였고 민가도 갖추어지지 않았다. 백관(百官)과 군민(軍民)은 모두 옛 서울을 그리워하고 태상왕도 생각을 떨구지 않고 있었다. 상이 서울 옮기는 문제를 종실과 대신들에게 물으니, 모두 좋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달 무인(7일)에 상이 태상왕을 모시고 길을 떠나 경진(9일)에 개성 도읍지에 도착하였다. 상이 매번 태상전(太上殿)에 뵈러 갈 때면 의장대는 동구 밖에 머물게 하고 기마병 두어 사람만 데리고 들어가서 조용히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물러 나오곤 하였다.
○ 동북면 및 강원도 선군(船軍)을 혁파하고, 서북면 및 경기, 경상, 충청, 전라, 풍해 등 여러 도의 선군을 견감시켜 주도록 명하였다. 당시에 선군이 방수(防戍)하는 문제는 여러 도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어 있었다. 상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백성이 겪는 고초 중에 선군만큼 심한 것이 없다. 요즘 왜구가 설치지 않아서 변경이 조금 잠잠하니, 윤번으로 서는 수군(戍軍)을 요해처에다 나누어 배치해서 봉화(烽火)로 서로 연락하고 격문(檄文)을 띄워 서로 모이게 한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드디어 도평의사에 묻고서, 관동(關東) 및 동북면의 방수하는 선군을 모두 혁파하도록 하고, 그 나머지 제도(諸道)는 열에 한둘을 감해 주었다.
○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문신으로 하여금 하루씩 걸러 회강(會講)하게 하였다. 처음에 고려 인종(仁宗)이 연영전(延英殿)의 이름을 집현전으로 고치고 문학(文學)하는 선비를 선발하여 두었었는데, 국초(國初)에 이르러서는 그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대사헌 조박(趙璞)이 서적을 많이 비치해 두고 관각(館閣)의 직함을 띠고 있는 문신으로 하여금 하루씩 걸러 모여서 경의(經義)를 토론하여 고문(顧問)에 대비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그 말을 따랐다. 조준(趙浚), 권중화(權仲和), 조박(趙璞), 권근(權近)을 제조관(提調官)으로 삼고, 문신 중에서 5품 이하는 교리(校理)에 충원하고, 7품 이하는 설서(說書)와 정자(正字)에 충원하였다. 얼마 후에 집현전의 이름을 보문각(寶文閣)으로 고쳤다.
○ 충청, 전라, 풍해 등 제도(諸道)에 기근이 들자, 경차관을 나누어 보내 구휼하게 하고 또 수령의 성실 여부를 규찰하게 하였다.
○ 4월. 태상왕이 금강산(金剛山)에 행행하려 하자, 상이 간청하기를,
"지난해에 있었던 수재와 한재 때문에 백성은 기근이 들어 있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초여름이어서 농사일로 바쁩니다. 대가(大駕)가 가시는 길에 아무리 호종(扈從)을 간소화한다고 하더라도 백성들의 생업에 방해가 될까 싶습니다."
하니, 태상왕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아비는 자식을 위하여 말하고 자식은 아비를 위하여 말하는 법이니, 어찌 생각하지 않고 말하였겠는가."
하고, 가지 않았다.
○ 예조에 하교하기를,
"제릉(齊陵)에 행할 제의(祭儀)를 종묘(宗廟)의 제의에 따르도록 하라."
하니, 예조가 아뢰기를,
"능에 지내는 제사는 고례(古禮)가 아닙니다. 신의왕후(神懿王后)가 비록 종묘에 들지는 못했지만 이미 원묘(原廟)에 모시고 사계절에 따라 제사를 지내고 있으니, 또 능에다 제사를 지내는 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고 단지 희생만 쓰지 말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 처음 태상왕 원년에 예조에 명하여, 마전현(麻田縣) 앙암사(仰巖寺)에 고려 태조의 영정을 모실 곳과 별도로 전우(殿宇)를 지어 고려 태조 및 혜종(惠宗), 성종(成宗), 현종(顯宗), 문종(文宗), 충경(忠敬), 충렬(忠烈), 공민(恭愍) 등 7왕을 제사지내게 할 것을 의논하여 결정하게 하였으나, 미처 착수하지 못하였다. 6년이 지난 뒤에야 경기 관찰사에게 명하여 정부(丁夫)를 징발해서 사당을 짓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완성되니, 제의(祭儀)대로 타향(妥享)하였다.
○ 5월. 상이 백관을 거느리고 태상왕께 진연(進宴)하니, 태상왕이 매우 기뻐하면서 띠고 있던 황금대(黃金帶)를 직접 풀어 상에게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아비가 죽고 나서 자식에게 전해지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다. 어찌 아비와 자식이 직접 주고받아서 친애하는 정을 다하는 것만한 일이 있겠는가."
하니, 상이 머리를 조아리고 사례하였다. 종실과 공경이 번갈아가며 일어나서 상수(上壽)하고 저녁이 다하고 나서야 파하였다.
○ 일본국 대장군이 사신을 보내 방물(方物)을 진상하고 포로로 잡혀간 남녀 100여 인을 모두 돌려보냈다. 상이 어전에서 인견하고 내사(來使)를 4품 반열에 서서 예를 행하게 하였다.
○ 올량합(兀良哈)이 이리를 진헌하였다. 상이 연신에게 이르기를,
"이 짐승이 비록 먼 곳에 사는 사람이 진헌한 것이기는 하지만 궁원(宮苑)에서 사육하자면 매월 닭 60마리가 든다. 어찌 쓸모 있는 가축으로 쓸모 없는 짐승을 기를 수 있겠는가."
하고, 들에 풀어주도록 명하였다.
○ 상이 종묘(宗廟)가 새 도읍지에 있으므로 친히 제사를 지낼 수 없다 하여 종묘를 개성으로 옮기고자 하니, 참찬문하부사 이거이(李居易)가 그것이 불가하다는 것을 극력 진달하고 또 대신을 보내어 대행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 7월. 경외(京外)에 남형(濫刑)으로 인한 폐단을 금지하도록 명하였다.
○ 8월. 하교하기를,
"옛날 순(舜)은 용(龍)에게 '참소하는 말이 선인(善人)의 일을 저해하는 것을 미워한다.'는 말로 명하였고, 기자(箕子)는 무왕(武王)에게 '백성은 사당(邪黨)을 두지 않는다.'는 말로 고하였다. 전조의 말기에 붕당을 서로 만들고 참소를 서로 숭상하여 망하게 되었다. 그 남은 잔재가 없어지지 않고 서로들 모여서 남을 참소하고 선동하는 자들이 많았다. 오직 너희 묘당은 나의 지극한 뜻을 받아들여서 엄격하게 금령을 실시하여 전조의 풍습을 일시에 바꾸고 우(虞)와 주(周)의 정치를 만회하여 조선의 억만년 사업이 영원히 지속되게 하라."
하였다. 당시에 여러 공신들이 각각 군사를 거느리고 사적으로 알현하는 것이 성행하여 서로 참소하고 헐뜯었기 때문에 이 하교가 있었다.
○ 어용(御容) 및 정사공신(定社功臣),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 등 17인의 초상을 그리도록 하였는데, 이는 방석(芳碩)의 난을 평정하였기 때문이다.
○ 문하부(門下府)가 상서하기를,
"구언을 하고 간언을 받아들이는 것은 임금의 요도(要道)입니다. 전일에 대간이 상소한 것을 혹 윤허를 내리지 않기도 하고 혹 궁중에 두고 내리지 않기도 하시니 언로가 막혀 아랫사람들의 실정이 진달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하건대, 앞으로는 대간이 아뢴 것을 곧바로 윤허를 내리도록 하소서.
여름부터 가을까지 조회를 보거나 정사를 듣는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하늘과 땅 위에서 발생하는 변괴가 누
삼년상은 만세에 변치 않을 법이며, 기복(起復)의 제도는 일시적인 변례입니다. 국가가 위급한 시기에는 장수와 재상의 재주를 겸비한 자일 경우 본정을 빼앗고 기복시키는데, 이것이 어찌 평화로운 세상에서 행할 일이겠습니까. 원하건대, 최질(衰?)을 착용한 상인(喪人)을 기복시켜 직임을 부여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상이 가상하게 여기고 받아들였다.
○ 행대(行臺)의 감찰(監察)을 각도에 나누어 보내서 민간의 이해 관계와 수령의 득실 문제와 호족(豪族) 중에서 백성을 괴롭히는 자를 염찰하게 하였다.
○ 9월. 상이 해주(海州)에서 사냥을 하고 이어서 온천에 가서 질환을 씻고자 하였다. 헌부가 왜구를 아직 평정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만두기를 간청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다음날 참찬문하부사 이무(李茂)에게 이르기를,
"어제 헌사(憲司)의 간언을 따르지 않았더니 밤새도록 마음이 편치 않았다. 더구나 백성의 폐가 되는 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가는 것을 중지하도록 명하였다.
○ 10월. 천둥과 번개가 크게 치고 우박이 내렸다. 하교하기를,
"하늘의 경고가 이러하니 나는 매우 두렵다. 양부(兩府)와 각사(各司)로 하여금 형정(刑政)의 득실과 민간의 애환을 밀봉해서 보고하게 하라."
하였다.
○ 처음으로 조례상정도감(條例詳定都監)을 설치하고 백관의 장주(章奏)를 내려서 의의(擬議)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 태상왕이 누누이 상에게 이르기를,
"나를 시위하고 있는 장사(將士)들이 종일 수직(守直)하고 있으니, 내가 민망하오. 어찌 철수시키지 아니하는 거요?"
하니, 상이 부득이 철수하도록 명하였다. 태상왕이 매우 기뻐하면서 좌우에게 이르기를,
"왕의 성품이 순후하여 일찍이 내 마음을 거스른 적이 없으니 참으로 효자이다."
하였다.
○ 상이 백관을 거느리고 태상왕을 위하여 향연을 열었다. 심덕부(沈德符)와 성석린(成石璘)이 시연(侍宴)하였고 밤이 깊어서야 파하였다.
○ 태상왕이 신도(新都)에 행행하였다.
○ 11월. 가병(家兵)을 혁파하도록 하였다. 처음에 고려 말기부터 가병을 두는 그릇된 제도가 있었는데, 조선 초기까지도 오히려 미루고 개정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대간이 서로 상소하기를,
"지금 조정은 제각기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문에는 무기를 진열하며 간혹 갑옷을 입고 무기를 소지한 채로 궁문을 출입하는 등 마치 전쟁 중에 적과 대치하는 때와 같으니, 선왕의 법도를 좇아 나라를 잘 다스려 가는 데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원하건대, 옛 제도를 준수하여 종친(宗親) 중에 충의(忠義)가 있는 자를 선발해 맡기고 그 나머지는 사병을 거느리지 말게 해서 공신을 보전하는 도리를 다할 수 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드디어 종친과 훈신을 간택하여 제도의 군사를 나누어 맡게 하고 그 나머지 사병을 거느리고 있는 자는 모두 혁파하게 하였다.
○ 태상왕이 신도에서 돌아왔다. 상이 백관과 의장대를 거느리고 장단(長湍) 나루에서 태상왕을 영접하였다. 행악(行幄)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헌수(獻壽)하니, 태상왕이 먼저 가도록 명하였다.
○ 6품 이상은 각각 현량(賢良)을 천거하게 하였다.
○ 왜구가 풍해도(?海道) 및 서북면(西北面)을 침략하자, 상이 항왜 구륙(仇陸) 등을 보내 이들을 초유(招諭)하게 하였다. 구륙 등이 선주(宣州)에 가서 만호 등시라로(藤時羅老) 등을 만나 상의 위엄과 덕망을 가지고 유
○ 12월. 헌사(憲司)가 상소하기를,
"시어소(時御所)의 담이 낮고 좁아서 무기를 소지한 자가 아무 때나 마음대로 출입합니다. 원컨대, 지금부터 중문(中門)의 안팎을 환관(宦官)과 갑사(甲士)를 시켜 지키게 하고, 수행하는 사람도 한결같이 《경제육전(經濟六典》에 의거하여 무기를 소지하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서무를 분담 처결하는 것은 유사가 제각기 있기 마련인데, 간사한 소인들이 곧바로 대내에 직접 호소하니, 정사하는 체모가 아닙니다. 원컨대, 이제부터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소장(訴狀)은 금지하여 받아들이지 말게 하소서.
조정에 벼슬한 자가 간혹 부모가 병이 있다고 말하는 자도 있고 집에 일이 있다고 말하여 함부로 구전(口傳)을 요구하며 심지어 포마(鋪馬)까지 받아 주현(州縣)을 활보하는 자가 있습니다. 원컨대, 이제부터는 규찰하여 추고하고 논핵해서 그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가상하게 여기고 받아들였다.
○ 문하부(門下府)가 상소하기를,
"세말(歲末)에 자급을 따르는 정사는 오래되었습니다. 도력장(都歷狀)을 가지고 그 사람의 근만(勤慢) 상태를 따져서 근면한 자는 승급하고 태만한 자는 파면하여, 새로 제수된 자로 하여금 이듬해의 관록을 받고 그 해의 일을 성실히 행하게 하는 것을 '세말도목정(歲末都目政)'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반록(頒祿)을 기다려 제수하기로 한다면 관직을 병들게 하는 자가 요행으로 녹을 받게 되고 도목(都目)에서 관직을 받은 자는 녹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을 어찌 관직을 맡기고 녹을 반사하는 의의라 하겠습니까. 한결같이 성헌(成憲)에 따라 제수하는 법을 실시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 상이 태상왕을 모시고 잔치를 열었다. 조용히 말씀드리기를,
"두 정승이 다 해직을 요청하니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태상왕이 이르기를
"조준(趙浚)과 김사형(金士衡)은 인걸(人傑)이오. 그러나 굳이 사양한다면 심덕부(沈德符)와 성석린(成石璘)이 대신할 만하오."
하였다. 그래서 상이 두 사람을 제배하여 좌우 정승으로 삼았다.
○ 우정승 성석린이 종제(從弟)의 상(喪)을 당한 관계로 정무를 보지 않자,
도평의사사가 아뢰기를,
"대신이 비록 상중에 있다고 하더라도 만일 국가에 큰 일이 있을 경우에 특지를 내려서 직무를 보러 나오게 하는 것을 정식으로 삼으소서."
하니, 따랐다.
○ 각도의 도관찰사와 경력과 도사에게 모두 경직(京職)을 겸차(兼差)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판중추원사 정홍(鄭洪)의 말을 따른 것이다.
2년(경진, 1400)
○ 1월. 1일에 신하들이 헌수(獻壽)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태상왕이 성거산(聖居山)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태상왕이 성거산에서 돌아오자 상이 백관을 거느리고 나아가 태상왕께 헌수하였다.
○ 상이 경연에 거둥하였다. 지경연사 권근(權近)이 상주하기를,
"임금의 학문이란 비단 독서하는 것만이 아니고 반드시 마음을 바르게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마음이 가려진 곳이 있게 되면 한마디 말을 대답하고 한 가지 일을 처리할 때에도 모두 정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니, 상이 그 말을 매우 그럴 듯하게 여겼다.
○ 문하부가 상소하기를,
"전조(前朝)가 사람을 등용할 때에 반드시 대성(臺省)의 서경(署經)을 거치게 했던 것은 인재를 정밀하게 선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5품 이하만 단지 본부의 서경을 거치도록 하고, 4품 이상은 곧바로 관교(官敎)를 주고 있습니다. 사람을 등용하는 것은 하나인데 고신은 나누어져 둘이 되어 있으니 아무래도 오래 유지될 수 있는 법이 아닙니다.
대성은 공론이 있는 곳이므로 시뢰(諡?)와 구전(口傳) 등의 일을 모두 규찰토록 하고 있는데 일반 관직의 제배하는 정도를 어찌 살피게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원컨대, 관교의 법을 개혁하여 고신을 대성으로 하여금 서경을 하여 내게 하소서."
하고, 사헌부도 아뢰기를,
"태상왕이 인심(人心)이 이합하는 시기를 당하여 특별히 관교의 법을 적용하여 훈로가 있는 선비를 대우했는데 이는 일시적인 편의를 취한 것이지 만세에 법이 될 만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수성(守成)할 시기를 당하셨으니 초장기에 임시로 실시했던 법을 마땅히 개정하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도평의사사에 물어보고 각품(各品)의 고신을 대성에서 서경을 하게 하는 법을 다시 시행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 2월. 정안공(靖安公)을 책봉하여 왕세자로 삼았다. 상이 정안공을 왕세자로 책봉할 뜻을 태상왕께 아뢰니, 태상왕이 이르기를,
"이는 국가의 장구한 계획이다."
하였다. 이에 상이 하교하기를,
"국가의 근본이 정해지고 나서 대중의 뜻이 정해지는 법이다. 동모제(同母弟) 정안공은 개국 초기에 큰 공로를 세웠으니 지금 세자로 삼고 내외의 모든 군사에 관한 일을 감독하게 하라."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세자부(世子府)를 인수부(仁壽府)로 호칭하도록 하였다.
○ 도평의사사가 각도 관찰사로 하여금 각 주현(州縣)의 역(驛)을 살펴서 합병시킬 곳은 합병시키고 감축시킬 곳은 감축시키게 하기를 청하니, 그 말대로 따랐다.
○ 3월. 1일에 일식이 있었다. 상이 소복(素服) 차림으로 신하들을 데리고 나가 북을 쳐서 구제하였다.
○ 상이 왕세자를 데리고 제릉(齊陵)을 알현하였다.
○ 왕세자가 신도(新都)에 가서 종묘(宗廟)에 알현하였다.
○ 왕세자가 도성으로 돌아왔다.
○ 처음으로 선잠(先蠶)에 제사를 지냈다.
○ 4월. 각사에 명하여 아일(衙日)마다 소회를 진달하게 하였다.
○ 대사헌 권근이 아뢰기를,
"명기(名器)는 임금의 대보(大寶)이므로 문란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근래에 제수하는 법을 보면 실직을 따지지 않고 간혹 첨설전서(添設典書)를 승직시켜 검교중추(檢校中樞)로 삼기도 하고, 검교중추를 초배하여 성재(省宰)로 삼기도 하니 매우 온당한 일이 아닙니다. 원컨대, 앞으로는 실지로 전서를 제수받은 자를 검교중추에 승직시키고 실지로 중추를 제수받은 자를 성재에 승직시킨다면 제수하는 법이 질서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따랐다. 검교(檢校)는 곧 임시로 직무를 대행한다는 명칭이다. 당송(唐宋) 시대부터 이미 그 관직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에 검교란 관직을 둔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 처음으로 경군관(京軍官)을 12패로 하여 하루씩 걸러 숙직하게 하는 법을 확정하였다.
○ 사병(私兵)을 혁파하도록 명하였다. 대사헌 권근이 상소하기를,
"병권(兵權)은 국가의 큰 권한입니다. 노(魯) 나라의 삼가(三家)와 진(晉) 나라의 육경(六卿), 한(漢) 나라 말
오직 우리 태상왕께서는 개국 초기에 특별히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를 두어서 병권을 전담하게 하였으니 그 규모가 굉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역명의 초기에 인심이 안정되지 않았으니, 마땅히 훈신과 종친으로 하여금 각각 사병을 맡게 해서 만약을 대비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사병이 다 제거되지 않았고 사병을 맡은 자가 도리어 반란을 선동하여 그 화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있었는데 하늘의 도움으로 전하께서 난리를 평정하고 사직을 안정하셨습니다만, 오늘날까지도 사병을 혁파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간이 이미 상소하여 혁파하기를 청하였으나, 전하께서는 종친과 훈신을 걱정할 대상이 아니라고 보고 다시 병권을 맡기셨는데 얼마 후에 그 화란이 집안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이 일로 비추어 보면 사병은 단지 난리의 불씨일 뿐, 유익한 점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지금 또 혁파하지 않으면 앞으로 닥쳐올 화란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외방의 군마(軍馬)를 여러 절제사(節制使)에게 나누어 소속시켜 놓았으니 번상(番上)의 번거로움과 징발의 소요스러움으로 그 폐단이 매우 많습니다. 수많은 배종과 빈번한 사냥 때문에 극도로 시달리고 있는데다 눈비를 맞아가며 사문(私門)에 직숙하게 하니 사람들의 마음이 원망으로 차 있습니다. 오늘날의 폐단이 이것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원컨대, 앞으로는 서울에 머물고 있는 각도의 여러 절제사를 혁파하고 경외(京外)의 군마(軍馬)를 모두 삼군부에 소속시켜 공가(公家)의 군병이 되게 하고 사문(私門)의 직숙은 일체 금지시켜 '옛날 사가(私家)에 무기를 소장하지 않는다.'는 의의에 부응하게 하소서."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상이 세자와 함께 상의해서 그 날 즉시 여러 절제사의 군마를 혁파해서 모두 그들의 집으로 돌려보냈다.
○ 문하시랑 찬성사 하륜(河崙)에게 명하여 관제(官制)를 다시 정하게 하였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의정부(議政府)로, 중추원(中樞院)을 삼군부(三軍府)로, 좌복야(左僕射)와 우복야(右僕射)를 좌사(左使)와 우사(右使)로, 중추원 승지(中樞院承旨)를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로, 중추원 당후(中樞院堂後)를 승정원 당후(承政院堂後)로, 도평의사사 녹사(都評議使司錄事)를 의정부 녹사(議政府錄事)로 개정하였다. 다시 예문관(藝文館)에 대학사(大學士) 1원, 학사(學士) 2원을 두게 하고 삼군(三軍)을 담당하는 자와 도총제(都摠制) 이하는 모두 의정부사(議政府事)를 겸임하지 못하게 하였다.
○ 종실(宗室) 중에 기년복(朞年服)과 대공복(大功服)에 속하는 친족을 모두 군(君)에 봉하되, 부마(駙馬)를 포함한 모두에게 직임을 맡지 못하게 하였다. 이는 대사헌 권근(權近)의 말을 따른 것이다.
○ 5월. 왕세자는 상에게 헌수하고, 세자빈은 중궁에게 헌수하였다. 의안공(義安公) 이화(李和) 등이 잔치에 참여하였고 한밤중이 되어서야 파하였다.
○ 상이 경연에 거둥하였다. 지경연사 하륜이 상주하기를,
"전조의 신씨(辛氏)가 즉위한 초기에는 서연(書筵)을 설치하고 유사(儒士)를 뽑아 날마다 학업에 나아가더니 뒤에는 소인배의 유혹으로 사냥과 성색(聲色)에 빠져 패망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내가 그 당시 시독관이 되었으나 여주(麗主)는 그것을 싫어하여 나에게 장군의 임무를 주고 그는 날마다 임견미(林堅味) 등과 사냥을 익히더니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지금 나는 늙어서 학문을 할 수는 없지만, 임금이 한창 나이에 항상 유신(儒臣)을 접하여 정치하는 도리를 강론한다면 그 유익함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 6월. 태상궁(太上宮)과 태상부(太上府)를 지어서 궁은 덕수궁(德壽宮)으로 하고 부는 승녕부(承寧府)로 하였다. 판사(判事), 윤(尹), 소윤(少尹), 판관(判官), 승(丞), 주부(主簿) 등의 관직을 두게 하고 반차(班次)는 삼사의 아래에 있게 하였다.
○ 환왕(桓王)의 진전(眞殿)을 계성전(啓聖殿)으로 호칭하였다.
○ 하륜이 아뢰기를,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 당시에 오랜 가뭄이 들었다. 좌정승 성석린과 우정승 민제 등이 각각 힘써 경계하는 글을 올렸다. 상이 공손한 태도를 하고서 이르기를,
"경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 참으로 지극하다 하겠다. 과인은 기질이 본래 게을러서 비록 힘써서 하늘의 뜻에 부응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러나 경들이 충심으로 나를 깨우쳐 주니 내가 어찌 감히 힘쓰지 않겠는가."
하고, 이날 상이 공구 수성하여 저녁이 다할 때까지 편히 있지를 않았다.
밤이 되자 많은 비가 내렸고, 그 비가 3일 만에 그쳤다.
○ 노비변정도감(奴婢辨定都監)을 다시 설치하였다. 처음에 태상왕이 노비법(奴婢法)이 문란해질 것을 염려하여 변정도감을 설치하였는데, 상이 즉위하고 나서 대성(臺省)과 형조(刑曹)에 소속시켰다. 문하부(門下府)가 상소하여 논하기를,
"대간은 탄핵을 주관하고 형조는 형벌의 결정을 담당하므로 노비를 겸하여 다스리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하여, 드디어 그만두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대사헌 권근의 말에 따라 다시 도감을 설치하여 15방으로 나누어 담당하도록 명하였다.
○ 조사(朝士)를 선발하여 순군(巡軍)의 관직에 충원하도록 명하였다. 좌산 기상시 박은(朴?)이 상소하기를,
"순군의 관직은 순작(巡綽)과 포금(捕禁)을 담당하고 겸하여 형옥을 다스리는 직책입니다. 그런데 종종 무식한 무리들로 하여금 요행스레 여기에 참여하게 하여 대답하기 어려운 말로 신문하고서 참혹한 형벌을 적용하는 등, 죄없는 자에게 잔학하게 함으로써 화기(和氣)를 손상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원컨대, 앞으로는 조사 중에서 충분한 기량과 학식이 있는 자를 선발해서 그 직임에 차임하되, 법 외의 형벌은 엄히 금지하도록 해서 형옥(刑獄)에 신중을 기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 성균 학정(成均學正) 정이오(鄭以吾)가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동궁에게 감무(監撫)하는 직임을 맡게 하고서 궁중에다 별도로 삼군부(三軍府)를 설치하여 궁갑(宮甲)을 많이 양성하시니, 동궁이 감무하는 의의가 어디에 있습니까. 궁갑을 혁파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이오의 말이 내 뜻에 맞는다."
하고, 곧바로 진무소(鎭撫所) 갑사(甲士)를 혁파하고 개장(鎧仗)을 모두 삼군부로 보냈다. 단지 잠저 때 휘하에 있었던 100명만 머물러 두었다.
○ 7월. 태상왕께 '계운신무(啓運神武)'라는 존호를 올렸다. 상이 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덕수궁에서 조회하고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올린 다음 중외에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이어서 상수(上壽)하고 즐겁게 놀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파하였다. 태상왕이 봉숭도감(封崇都監)의 신하들에게 단초(緞?)와 구마(廐馬)를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 과전(科田)을 신고하고 넘겨 받는 문제를 한결같이 전제(田制)에 의거하도록 명하였다. 문화부 낭사 박은(朴?) 등이 상소하기를,
"전조의 말기에 기강이 해이해져서 전제가 크게 무너졌었는데, 우리 태상왕이 즉위한 초기에 경계를 정하고 전제를 바로잡아 자손만세에 법이 되게 하였으니, 지금은 준수하고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대체로 과전(科田)을 받은 자가 간혹 죄를 범하거나, 후손이 없거나, 과전 외에 남는 전토가 있을 경우에 과전이 부족한 자와 새로 와서 벼슬한 자로 하여금 신고하고 넘겨 받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 천례(賤隷)는 도성 안에서 말을 타지 못하게 하였다.
○ 판삼사로 치사(致仕)한 최영지(崔永沚)를 해주(海州)에 유배하였다. 처음에 최영지가 서북면(西北面) 도순문사(都巡問使)로 평양성(平壤城)을 축성하면서 전 왕조 능묘(陵墓)의 묘석(墓石)을 뽑아간 것이 많았다. 이때에 이르러 박은 등이 상소하여 그의 죄를 논의하니, 상이 최영지는 무인(武人)이어서 의리를 모른다고 여기고 단지 유배 보내라고만 명하였다.
○ 8월. 동북면(東北面)의 백성들이 기근이 들어서 창고를 열어 구제하였다.
○ 9월. 상이 세자와 함께 덕수궁(德壽宮)에 나아가 잔치를 열고 축수하는 잔을 올렸다. 태상왕이 시를 짓기를,
"나이 들어 칠십인데 마음이 통하는고야[年雖七十心相應]"
하니, 상이 이어서 화답하기를,
"밤 깊어 삼경인데 마냥 흥겹소이다[夜已三更興不窮]"
하고, 즐겁게 놀다가 파하였다.
○ 제주백(濟州伯)이 태자(太子)에게 환자(宦者)를 보내 좋은 말 3필과 금환(金環)을 바쳤다.
○ 10월. 유구국왕(琉球國王) 찰도(察度)가 사신을 보내 전문(箋文)을 올리고 방물(方物)을 바쳤다. 그 세자 무녕(武寧)이 왕세자에게 예물을 바쳤다. 사자(使者)가 또 별도로 토산물을 좌정승 민제(閔霽)와 우정승 하륜(河崙)에게 주니 민제 등이 다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먼 길을 와서 성의껏 빙례(聘禮)를 차리니 경들은 거절하지 말고 받은 다음 후하게 보답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11월. 상이 왕세자에게 선위(禪位)하였다. 하교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조종(祖宗)이 인후(仁厚)로 덕을 쌓아 큰 명을 모으셨는데, 우리 계운신무 태상왕(啓運神武太上王)이 국가의 기초를 마련할 즈음에 왕세자가 기선(機先)도 환히 알고 천명도 환히 알아서 먼저 대의(大義)를 주창하여 왕업을 세웠으니 우리 조선이 개국하기까지 너의 공이 정말 많았다. 그러므로 당초에 세자를 세우려고 의논했을 때 사람들의 기대가 다 너에게로 돌아갔었는데, 예기치 않게 권간(權奸)이 어린 얼자를 세워 종묘 사직을 뒤엎으려고 하였으나 하늘이 그의 마음을 달래어 대책을 세워 난리를 평정해서 종묘 사직을 안정시켰으니, 우리 조선이 재차 조성된 것도 너의 공로에 힘입은 것이다.
당시에 국가는 이미 너의 차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네가 굳이 사양하며 거듭 아뢰자, 태상왕이 착하지 못한 나를 적장자라 하여 왕위에 오르도록 명하셨다. 내가 사양해도 되지를 않아서 애써 왕위에 오른 지가 지금 3년이 되었으나 하늘은 윤허하지 않고 인심은 믿고 따르지 않아서 가뭄과 황충(蝗蟲)이 재해가 되고 요얼이 거듭 닥쳤다. 이것이 다 어리석고 덕이 없는 소치이므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 하늘과 땅에 부끄럽다. 더구나 나는 평소에 풍질(風疾)이 있어서 많은 일을 대하기에 어지러우니 신경을 써서 정무에 임하다 보면 아무래도 숨을 거두는 지경에 이르고 말것이다. 무거운 짐을 풀어서 덕망이 있는 자에게 맡기면 위로는 하늘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리라 생각한다.
아, 너 왕세자는 강명한 덕을 타고나서 지혜와 용맹의 자질도 탁월하다. 일찍이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안정시킬 도량을 가지고 난리를 평정하여 정상으로 회복한 공을 이루었으니, 이는 사람들도 노래하는 바이며 종묘 사직도 힘입은 바이다. 훌륭하고 덕이 있는 자가 대통을 계승해야만 한다는 견지에서 나는 왕위를 내놓아 너에게 전하도록 하고 나는 장차 사저로 물러가 여유있는 생활을 하면서 100세까지 살도록 하겠다.
아, 하늘과 사람의 마음은 반드시 덕이 있는 자에게로 가고 종사의 대통은 마땅히 지친에게 전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세대간에 서로 전하는 것은 실로 옛날과 오늘날의 공통된 의의이다. 너는 더욱 덕에 공경하고 언제나 염려하는 마음을 갖도록 해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보살펴 만세토록 싫어하는 일이 없게 하라."
하였다. -권근이 지었다.- 판삼군사 이무(李茂)는 교서(敎書)를, 도승지 박석명(朴錫命)은 국보(國寶)를 받들고 인수궁(仁壽宮)에 나아가니, 세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받지 않았다. 상이 다시 거듭 유시하니, 세자가 애써 명을 받들었다. 드디어 '상(上)'을 높여 '상왕(上王)'으로 삼고 존호를 올려 '인문공예(仁文恭睿)'로 하였다. 부
3권 태종조 1
태종 성덕신공 건천체극 대정계우 문무예철 성렬광효 대왕(太宗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
휘는 방원(方遠), 자는 유덕(遺德)이다. 지정(至正) 정미년(공민왕 16, 1367) 5월 16일(신묘)에 함흥(咸興) 귀주동(歸州洞) 사저(私邸)에서 탄강하였다. 왕위에는 18년 동안 있었으며, 상왕위에는 4년 동안 있었다. 영락(永樂) 임인년(세종 4, 1422) 5월 10일(병인)에 승하하였다. 향년은 56세이고 헌릉(獻陵) -광주(廣州)에 있다.- 에 장사지냈다.
즉위년(경진, 1400)
○ 상은 태조의 셋째 아들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른 데가 있고 재주도 탁월한 데가 있었다. 고려의 정치가 어지러워 민심이 떠나 버린 것을 보고 강개한 나머지 세상을 구제할 마음을 가졌다. 하륜(河崙)이 평소에 사람의 관상 보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태종을 보고 마음을 바쳐 섬겼다. 매번 볼 때마다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분에게 하늘을 덮을 영기(英氣)가 있다."
하였다.
임신년 가을에 여러 장상(將相)과 함께 은밀히 대책을 정하고 국가의 기초를 열었다. 태조가 즉위하자 정안공(靖安公)에 봉하였다.
무인년에 정도전(鄭道傳)과 남은(南誾) 등이 어린 얼자를 세우고 여러 적자를 제거하려는 모의를 하였는데, 그 불씨를 제거하고 나니 백성들이 다 마음을 돌렸다. 그러나 태종은 굳이 공정대왕(恭靖大王)에게 사양하였다.
공정대왕 2년(경진)에 대신이 세자로 봉입하기를 청하니, 공정대왕이 이르기를,
"이는 나의 뜻이다."
하고, 드디어 세자로 책봉하여 군국(軍國)에 관한 중대한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
처음에 대성(臺省)이 상소하여, 사병(私兵)을 혁파하여 모두 삼군부(三軍府)에 소속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참찬문하부사 이거이(李居易)가 언짢은 마음을 품고 곧바로 패기(牌記)를 납부하지 않았다가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폄직되었다. 경상도 관찰사 조박(趙璞)이 지합주사(知陜州事) 권진(權軫)에게 말하기를,
"이거이가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조준(趙浚)의 말을 믿었던 것을 후회한다.' 하기에, 무슨 까닭인가 하고 물었더니, 이거이가 말하기를, '사병을 혁파할 당시에 조준이 나더러 하는 말이 「왕실을 호위하기 위해서는 군사를 강하게 하는 것만한 일이 없다.」하기에, 내가 그 말을 믿고 즉시 패기를 납부하지 않았다가 죄를 얻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하였는데, 권진이 간의대부에 제수되자, 조박이 한 말을 사적으로 더 보태어, 헌신(憲臣) 권근(權近), 간신(諫臣) 박은(朴?) 등과 함께 번갈아가면서 상소하여 조준과 이거이 등의 죄를 언급하니, 공정대왕이 이르기를,
"조준이 어찌 이런 말을 했겠는가."
하고, 그 상소를 내보내지 않으니, 권근 등이 다시 상소하여 굳이 청하였다. 당시에 조신(朝臣)이 조준의 평소의 잘못을 들추어 공박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그래서 조준을 옥에다 가두었다. 권근 등이, 각각 다른 곳에다 두고서 국문하기를 청하니, 공정대왕이 지신사 박석명(朴錫命)으로 하여금 상에게 의논드리게 하기를,
"대간이 모두 '이거이와 조박이 있는 곳에 사람을 각각 보내서 신문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옥(?獄)에 관한 일은 비록 외지에서 발생했더라도 반드시 경중(京中)으로 올리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알려
하고, 또 사적으로 박석명에게 이르기를,
"비록 하찮은 백성의 일일지라도 오히려 분명하게 판가름지어서 억울한 일이 없게 하려고 하는데, 더구나 조준은 원훈대신인데 서로 대면해서 변론을 하지 않고 그 죄를 얽어매는 것이 옳은 일인가."
하였다. 공정대왕이 순군(巡軍)에게 명하여 이거이와 조박을 잡아오게 하였다. 상이 윤저(尹?)를 불러 이르기를,
"주상께서 경이 마음을 공정하게 가져서 필시 아부하거나 사사롭지 않으리라고 여기시고 순군 만호로 삼은 것이니, 경은 신중을 기하라."
하고, 대성(臺省)의 장문(狀文)을 그에게 보여주며 이르기를,
"태상왕이 개국한 것과 주상이 사위(嗣位)한 것과 불초한 내가 세자가 되어 오늘날의 영광에 이른 것은 모두 조준의 공로이다. 지금 옛날의 공로를 잊고 허와 실을 규명하지 않은 채 단지 유사가 요청한 것만 믿는다면 황천상제가 심히 두려운 일이다. 경이 만일 조준으로 하여금 죄를 얻어 죽게 한다면 사람들이 경을 충신이라 하겠는가. 조준이 만약 이런 말을 했다면 그는 크게 죄를 지은 것이다."
하니, 윤저가 재배하고 나갔다. 대성이 다 함께 대궐 뜰에 나아가 사람을 나누어 보내서 국문하기를 다시 요청하였으나, 공정대왕이 윤허하지 않고 순군으로 하여금 치죄하게 하였다. 조박과 권진의 말이 대성의 상소 내용과 같지 않자, 공정대왕이 권근 등을 미워하였다. 이거이를 잡아다가 조박과 대질하여 심문하니, 조박이 고개를 숙이고 매우 부끄러워 하는 기색이 있었다. 조박(趙璞)은 이천(利川)으로 폄출(貶黜)시키고 권진(權軫)은 축산도(丑山島)로 귀양보냈다. 조준(趙浚)은 국문을 받고 정신이 혼미하여 정면으로 쳐다만 볼 뿐 한마디 말도 못하였다. 옥(獄)이 거의 이루어질 뻔하였으나, 상이 애써 구제해 준 덕분에 모면할 수 있었다.
○ 길재(吉再)가 고려(高麗) 신씨(辛氏)의 조정에 벼슬을 하여 문하 주서(門下注書)가 되었었는데, 왕씨(王氏)가 다시 왕위에 오르자, 관직을 버리고 선주(善州)로 돌아가 그의 모친을 봉양하니, 향당(鄕黨)이 그의 효성을 칭찬하였다. 상이 잠저 시절에 길재가 성균관에서 모시고 공부를 한 적이 있었다. 상이 서연관(書筵官)과 함께 유일(遺逸)의 선비를 논의하면서 이르기를,
"길재는 강직한 사람이다. 나와 일찍이 함께 공부하였는데, 보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하였다. 정자(正字) 전가식(田可植)은 길재와 같은 고향 사람이다. 그가 길재에 대한 집에서의 효행에 얽힌 미담을 갖추 말하니, 상이 삼군부에 영을 내려 이첩(移牒)으로 부르게 하였다. 길재가 전마(傳馬)를 타고 서울에 이르니, 상이 공정대왕에게 아뢰어 봉상 박사(奉常博士)를 제수하였다. 길재가 대궐에 나아가 사은하지 아니하고 상에게 상서하기를,
"길재가 옛날에 저하를 모시고 반궁에서 시(詩)를 공부한 적이 있었으니, 지금 신을 부르신 것은 옛정을 잊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길재는 신씨의 조정에서 과거에 올라 벼슬을 하였던 관계로 왕씨가 다시 왕위에 오르자,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치고자 하였습니다. 지금 옛정을 기억하여 부르시기에 길재가 와서 뵙고자 한 것이지 벼슬하는 문제는 길재의 본뜻이 결코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가 말한 것은 바꿀 수 없는 강상(綱常)의 도리이니, 그 뜻을 빼앗기가 어렵다. 그러나 부른 사람은 나이지만 벼슬을 준 사람은 주상이니, 주상에게 고사(告辭)하는 것이 옳다."
하니, 길재가 드디어 상서하기를,
"신은 본래 한미한 사람으로 신씨의 조정에 벼슬을 하여 과거에 뽑혀 문하 주서(門下注書)에 이르렀습니다. 신은 들으니 여자에게는 두 남편이 있을 수 없고, 신하에게는 두 임금이 있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고향으로 돌려보내서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려는 신의 뜻을 이루게 하고 노모를 봉양하며 남은 여생을 마치도록 하소서."
하니, 공정대왕이 그 절의를 가상하게 여겨 융숭한 예로 대접하여 보내고 그의 집을 복호(復戶)해 주도록 명
○ 10월. -《선원보략》에는 11월로 되어 있다.- 상이 공정대왕의 내선(內禪)을 받고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였다. 신하들로 하여금 득실에 관하여 바른대로 말하고 숨기는 일이 없게 하도록 하였다. 또 경연에서 간관(諫官)으로 하여금 입시하여 일에 따라 규간(規諫)하도록 하였다.
○ 상이 《대학연의》를 강하면서 조고(趙高)의 일을 논하기를,
"환관(宦官)을 설치한 것은 본래 앞에서 일을 돕게 한 것이다. 어찌 국가의 권력을 맡겨서야 되겠는가."
하니, 승지 박신(朴信)이 아뢰기를,
"옛날 임금도 그것이 안 되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다만 아침저녁으로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그럴듯한 말로 아부를 할 경우에 임금이 분명하게 살피지 못하면 필시 그 꼬임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그 조짐을 사전에 막아야 하고 그 가능성을 미리 근절시켜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임금이 정성을 다하여 덕을 닦지 않음으로 해서 천재(天災)와 지괴(地怪)를 일으켜 놓고 문득 기양(祈禳)하는 곳을 설치하는 것은 잘못된 처사이다. 인사(人事)를 아래에서 바르게 행하면 천기(天氣)는 위에서 순해지기 마련이다. 인사가 순조롭지 못한데 천기가 순조로워지기를 요구한다면 될 법이나 한 일인가.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하였다.
○ 수창궁(壽昌宮)에 불이 났다. 상이 하교하기를,
"대체로 들은 바에 의하면 하늘과 사람의 관계는 서로 간격이 없어서 아래에서 정치를 잘못하면 위에서는 꾸지람을 상징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재이(災異)가 발생하는 것은 실로 사람의 행동으로 말미암는 것이니, 하늘의 경고가 두렵지 않은가. 부덕한 내가 왕통을 이어받아 정치가 제대로 되도록 밤낮으로 고심하였지만 사방은 넓고 정무는 많으니 어찌 능히 두루 알아서 잘못된 점이 없게 할 수 있겠는가.
근래에 뇌우(雷雨)가 타당함을 잃고 별자리가 경계를 보이고 있는데다 또 이달 임자일에 수창궁이 불에 타고 말았다. 잘못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따끔한 반성을 하는 바이다. 행동이 사리에 어긋나 덕을 손상시켜서 그런 것인가? 귀염받는 자들이 진출하여 사적인 알현이 행해져서 그런 것인가? 형벌이 미덥지 못해서 사람들에게 권면과 징계가 되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 관리의 등용과 면직이 타당성을 잃어서 인재들이 답답해 하고 있어서 그런 것인가? 향사(享祀)가 불결해서 신명들이 흠향하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부역이 균등하지 않아 서민이 원망하고 있어서 그런 것인가? 간사한 자들이 법을 문란하게 해서 옥송에 대한 원망이 적체되어 그런 것인가? 토호들이 행패를 부려서 마을이 수심 속에 젖어 있어서 그런 것인가? 이것들이 모두 위로 화기를 침범해서 재이를 부른 것들이다. 재이를 해소시킬 방법을 모색하고자 하면 마땅히 입바른 말을 찾아야 한다. 대체로 과인의 잘못과 좌우 신하들의 충성 여부와 정령의 합당성 여부와 백성들의 이해관계 등에 대하여 이 폐해를 타개할 방안을 숨김없이 극력 진달하라. 말이 채택할 만하면 상을 줄 것이고 설사 맞지 않는 말을 하였더라도 죄를 주지는 않을 것이다.
아, 중외의 대소 신료들은 제각기 소견을 가지고 밀봉해서 조목별로 상언하여 애써 서로들 경계하고 각자 맡은 직임을 다하여서 나의 부족한 점을 도움으로써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보살피려는 나의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니, 참찬문하부사 권근이 상서하기를,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겨우 1개월이 되었습니다만 그동안 지나친 분부를 내리신 적이 없었는데, 먼저 재구(災咎)를 내렸습니다. 이는 필시 전하를 경고해서 큰 사업을 하도록 하려는 것이니, 하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전하께서 따끔한 각성을 하시어 직언을 찾는다면 하늘에 대응할 방법을 찾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 정성과 효도를 독실하게 하소서. 신은 들으니, 옛날 문왕이 왕자시절에 왕계(王季)에게 하루에 세 번씩 알현을 하였다고 합니다. 전하께서도 동궁 시절에 태상왕을 섬기면서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으니 효성을 다했
둘째, 청정(聽政)을 부지런히 하소서. 옛날에는 임금이 매일 새벽에 조정에 앉아서 정사에 관하여 들었는데 진(秦) 나라 2세(二世)부터는 궁중에 깊이 거처하면서 환관으로 하여금 명을 전달하게 하였습니다. 수(隋)나라 양제(煬帝)는 또 5일 만에 한 번 조회를 보고 이것을 아일(衙日)이라고 하였는데, 간혹 궁중에 있으면서 나오지도 않고 멀리서 조례(朝禮)만 받기도 하고, 간혹 예만 받고 정무를 보지 않는 경우도 있고, 혹은 아예 그 예를 모두 폐지해 버린 경우도 있고, 단지 그 이름만 있고 그 실상은 없어서 날마다 패망의 길로 치닫게 되어 결국 국가를 잃고 마는 상황에까지 이른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직접 볼 수 있는 귀감입니다. 대체로 임금이 궁중 깊은 곳에 거처하면서 환관을 시켜 명을 전하게 하는 것은, 바로 안과 밖을 가리우고 간특한 자들이 날뛰게 하는 조짐이 됩니다. 멀게는 진(秦) 나라와 수(隋) 나라가 망한 것이나, 가깝게는 고려가 말기에 국가를 전복시킨 일은 영원한 경계로 삼을 만합니다. 신이 일찍이 경사에 가서 두어 달을 머무르면서 문연각(文淵閣)의 반열을 따라 황제가 매일 아침에 조정에 앉아 정사에 관해서 들으면 백관이 일을 주달하는 예를 직접 본 적이 있습니다. 신이 지금 청하건대, 그 법에 의거하여 의주(儀注)를 지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채택하여 시행하도록 하소서.
셋째, 조사(朝士)를 접견하소서.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그 예는 비록 엄격하지만 그 정리는 마땅히 친근해야 합니다. 옛날 임금은 늘 대신을 가까이하고 조정의 선비들을 불러서 접견하였습니다. 하루 동안에 경사대부(卿士大夫)를 접견할 때는 많고 환관 궁첩(宦官宮妾)을 가까이할 때는 적었기 때문에 참소하는 자가 자연히 진출하는 일이 없고 속이는 일이 자연히 발생하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임금과 신하의 도리가 미덥고 상하간의 실정이 가리워지지 않아, 임금은 충신과 소인을 분간할 수 있는 마음을 얻게 되고 신하는 털어놓고 아뢸 수 있는 유익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세의 임금은 궁중 깊숙이 거처하고 있어서 조회에 참여하러 온 신하들이 헛되이 절만 하고 물러갑니다. 군신간에 생각과 뜻이 서로 만나지를 못해서 간사한 자들이 윗사람을 업신여기고 우롱하면서 판단을 흐리게 하여 외정(外庭)의 득실과 민간의 이해에 대해서 전혀 모르게 함으로써 난망(亂亡)에 이르게 되는 것은 고금의 공통된 걱정거리입니다.
원컨대, 앞으로는 항상 정전에 앉아서 하루 종일 경사(卿士)를 접견하시되 외부에 사행(辭行)으로 가는 자나 외지에서 조회하러 오는 자는 관품(官品)의 귀천을 따지지 말고 모두 접견하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온화한 말로 위로해 주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아서 귀담아 들어준다면 신하들은 다 감격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고 전하께서는 민간의 일을 두루 알게 될 것이니 그 유익함이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넷째, 경연(經筵)에 부지런히 하소서. 제왕(帝王)의 도는 학문으로 말미암아 밝아지고 제왕의 정치는 학문으로 말미암아 넓어집니다. 예로부터 한 국가의 왕이 된 자가 반드시 경연을 설치하여 성학(聖學)을 강론했던 것은 진실로 이런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하는 즉위하신 이후로 비록 경연은 설치해 놓았지만 강학을 쉬는 날이 아마 많았을 것입니다. 전하는 천성이 영명(英明)하시고 학문이 해박하시니 유신(儒臣)의 진강(進講)이 어찌 새로운 것을 발휘하는 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전하께서 경연에 거둥하시어 정신을 집중하여 강구하신다면 마음속에 의리가 밝아져서 필시 하는 일 없이 한가하게 지내시던 때나 정무에 시달려 정신이 없을 때와는 차이가 있을 것이니, 성학(聖學)이 어찌 이 경연으로 인하여 더욱 진전되지 않겠습니까.
다섯째, 절의(節義)를 표창하소서. 예로부터 국가를 소유한 자가 반드시 절의가 있는 선비를 정포(旌褒)했던 것은 만세의 강상(綱常)을 견고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한 국가의 왕이 된 자가 의리를 들어 창업을 했을 때에 자신을 따르는 자는 상을 주고 자신을 따르지 않는 자는 죄를 주었던 것은 당연한 처사입니다. 대업이 이미 안정기에 들어 수성(守成)하는 시기가 되면 반드시 절의를 다한 전대의 신하를 포상하되 죽고 없는 자는 추증(追贈)하고 생존한 자는 징용(徵用)하여 모두에게 정려와 포상을 해 주어서 후세 신하의 절의에 대해
오직 우리나라는 천운을 받아 개국하여 세 분의 성인이 서로 계승하여 문치(文治)로 태평을 이루셨는데 절의에 대해 포상을 내리는 법은 아직도 거행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궐전(闕典)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보건대, 전조의 시중(侍中) 정몽주(鄭夢周)는 본래 한미한 선비인데 전적으로 태상왕(太上王)이 천거 발탁해 준 은혜를 입어 큰 벼슬까지 하였으니, 그의 마음에 어찌 태상왕께 후하게 보답하고자 하는 생각이 없었겠습니까. 그리고 그의 재주와 학식으로 어찌 천명과 인심의 귀착점을 몰랐겠으며, 어찌 왕씨가 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을 몰랐겠으며, 어찌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을 몰랐겠습니까. 그런데도 오히려 섬기던 임금에게 마음을 다하여 그 지조를 변치 않다가 죽음에 이르고 말았으니 이는 이른바 '대절(大節)에 임하여 빼앗을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통(韓通)은 주(周) 나라를 위하여 죽었지만 송 태조(宋太祖)가 추증을 하였고, 문천상(文天祥)은 송 나라를 위하여 죽었지만 역시 원 세조(元世祖)가 추증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몽주가 고려를 위하여 죽은 것만 유독 오늘날 추증하는 것이 불가하다는 말입니까.
광산군(光山君) 김약항(金若恒)은 전조에 사헌부 집의였는데 태상왕의 개국 초기에 추대한 신하 중에 그의 친구가 많아서 의리를 세울 계책을 가지고 달랬지만 그는 신하의 절의를 굳게 지켜 승낙하지 않았습니다. 명(明) 나라 조정이 표문의 말씨가 공순하지 못하다는 핑계로 우리나라에 죄를 주려 하자, 그가 태상왕의 명을 받고 중국에 가서 국문을 받았는데, 그 고문이 매우 고통스러웠지만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황제는 이를 가상하게 여기고 그의 죄를 풀어주었던 것입니다. 그 뒤에 다른 일로 인하여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으니 이는 그의 절의가 역시 가상하다 하겠습니다.
이 두 사람에 대해서는 마땅히 봉호와 증직을 더해 주고 그의 자손은 녹용해서 후인을 격려토록 하소서.
전 주서(注書) 길재(吉再)는 절개를 가진 선비입니다. 전하께서 동궁시절에 옛정을 잊지 않고 또 독실한 효성을 가상하게 여겨 상왕에게 아뢰어 벼슬까지 주었지만 길재는 자신이 일찍이 신씨 조정을 섬겼기 때문에 오늘날 신하 노릇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하자, 전하께서는 그의 말대로 고향으로 돌려보내서 그의 뜻한 바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길재가 지킨 것이 비록 중도와 정당성을 잃은 처사라고 하더라도 혁명(革命)을 지난 시점에서 오히려 옛 임금을 위하여 절개를 지키면서 작록(爵祿)을 사양한 자는 오직 이 한 사람뿐이었으니 어찌 고사(高士)라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예의를 갖추어 불러서 벼슬을 주도록 하되, 굳이 전에 가진 뜻을 지키고 기꺼이 오려 하지 않으면 곧바로 그 고을로 하여금 정문(旌門)을 세워 주고 복호(復戶)를 하게 하여 성대한 조정의 절의를 가진 자에게 포상을 내리는 법을 밝히게 하소서.
여섯째, 여제(?祭)를 지내소서. 예로부터 백성에게 공로가 있거나 죽음을 각오하고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은 제사를 지내주지 않는 경우가 없었고, 제사 지내줄 사람이 없는 귀신에 대해서는 태려(泰?), 국려(國?)의 법이 있었습니다. 지금 홍무(洪武)의 예제(禮制)에 그 법이 잘 갖추어져 있습니다. 우리 국가의 조제(朝祭)에 관한 예는 모두 황명(皇明)의 법을 따르고 있습니다만 오직 이 여제 한 가지 일만은 유독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어두운 가운데 억울함을 가졌거나 분한 마음을 품었거나 하여 맺혀서 흩어지지 않고 굶주려 먹을 것을 찾는 자가 어찌 없다고 하겠습니까. 이는 원망하는 기운이 쌓여서 역질(疫疾)이 발생하고 화기(和氣)가 손상되어 변괴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들입니다. 대체로 제사 지내줄 사람이 없는 귀신에게 여제를 지내는 법을 한결같이 홍무의 예제에 따라 시행하게 하소서. 이 두어 가지 일은 고차원적이어서 행하기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전하같이 영명(英明)하고 과단성 있는 불세출의 임금으로 도리어 전대의 인습적인 폐단이나 따르시고 수거(修擧)하여 행하지 않는 것이 가한 일이겠습니까. 진실로 전하께서 행하지 않으신다면 이는 영원히 행할 때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정몽주는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를 증직하고,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하게 하였으며, 김약항은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증직하게 하였다. 아울러 그들의 자손들을 녹용하게 하였다.
1년(신사, 1401)
○ 상이 오랜 가뭄으로 김과(金科)에게 명하여 《시경》운한(雲漢)을 진강하게 하였다. 이어서 이르기를,
"아무리 금주령(禁酒令)을 내려도 술을 마시는 자가 그치지 않으니 이는 내가 술을 끊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하고, 술을 올리지 못하도록 명하니, 나라 안의 사람들 중에 감히 술을 마시는 자가 없었다.
○ 승려가 금중(禁中)에서 주문 외우는 일을 그만두게 하였다.
○ 상이 《대학》을 강하여 장구(章句)를 끝내고 김과에게 이르기를,
"이 책을 읽고 나서 학문이 사람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알았다."
하니, 김과가 대답하기를,
"경연관이 다 하례를 올리고자 해서 이미 궁문(宮門)에 나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니 내가 능히 실천하기를 기다린 뒤에 하례를 올려도 늦지 않을 것이다. 책 한 권을 읽은 것이 어찌 하례할 일이 되겠는가."
하였다.
2년(임오, 1402)
○ 처음으로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여 백성들의 실정이 통하게 하였다.
○ 서운관(書雲觀)이 상언하기를,
"고려 태조가 삼한(三韓)을 통일한 초기에, 어떤 사람이 진언하기를, '산을 등지고 물이 거슬러 흐르는 지역에다 절을 짓고 부처를 안치해서 아무 도량을 설치하면 국가가 안정될 것입니다.' 하니, 바로 유사에게 명하여 지역에 따라 절을 짓게 하고 전토와 하민을 양급(量給)하게 하였습니다.
그 뒤의 임금과 신하들은 이 말을 더욱 신봉하여 큰 절을 창건해서 그것을 원당(願堂)이라고 칭하게 하고 전토와 하민을 시주로 바치니, 이로 말미암아 5백 년 동안 경외에 세워진 사사(寺社)가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이때부터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이 제각기 전토와 하민이 있는 절을 다투어 차지하고 매우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는데, 정도가 심한 자는 주색에 빠져 못 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절이 비록 수천 개나 되고 승려가 비록 수만 명이나 된다고 하더라도 그 행동이 이 모양이라면 그 도(道)가 설사 국가를 복되게 하는 이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겠습니까. 옛사람의 말에, '나라에 3년치 비축이 없다면 나라다운 나라가 되지 못한다' 하였고, 또, '군사를 오랫동안 출정시키면 국가의 비용이 부족해진다.' 하였습니다. 지금 국가의 비축분을 가지고 비추어 보면 병사 수만이 1년 동안 먹을 양식도 오히려 부족한데 만일 많은 군사를 일으키게 되면 장차 어떻게 대응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밀기(密記)를 배부한 경외의 70개 절 이외에 여러 절의 전토의 조세는 영원히 군자(軍資)에 소속시키고 노비도 제사(諸司)에 나누어 예속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상이 김첨(金瞻)을 불러 이르기를,
"벽 위에다 법으로 삼을 만한 전대의 일을 그림으로 그려서 관성(觀省)의 자료로 삼고자 한다."
하니, 김첨이 대답하기를,
"주 문왕(周文王)이 세자 시절에 왕계(王季)를 문안하던 모습과, 한 고제(漢高帝)가 태상황(太上皇)에게 헌수(獻壽)하던 모습과, 주 선왕(周宣王)의 후비(后妃)가 선왕이 늦게 일어나는 것을 간언하던 모습과, 당 장손황후(唐長孫皇后)가 임금은 현명하고 신하는 정직한 것을 하례하는 모습은 다 그림으로 그릴 만합니다."
하니, 상이 곧바로 벽 위에다 그림으로 그리도록 명하였다.
○ 청심정(淸心亭)에 거둥하여 글을 강론하였는데, 여름비가 그치지 않았다. 일찍이 시강관 김첨에게 이르기를,
"수 양제(隋煬帝)가 우세기(虞世基) 때문에 천하를 잃었다고 하는데 그런가?"
"우세기에게 진실로 죄가 있기는 합니다만 그를 등용한 자는 수 양제입니다. 그리고 성색(聲色)으로 망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성색은 실지로 천하를 패하게 하는 원인이라 하겠다."
하였다.
○ 상이 시독관 김과(金科)에게 명하여 무시로 소대하게 하였다. 매일 정사를 보는 여가에 편전(便殿)으로 거둥하여 그를 들어오게 해서 강론하게 하고 조용히 술을 내리기도 하였다. 김과도 그가 아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여 대답하고, 만일 의문나는 점이 있을 경우 권근(權近)에게 물어보고 대답하였다. 상은 천성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글을 읽을 때는 과정을 엄격하게 세웠다. 사서(史書)를 읽다가 책을 거두고서 김과에게 이르기를,
"내가 역대의 치란과 흥망에 대해서는 대략 알았다. 사서오경(四書五經)을 강독하고 싶은데 어느 책이 성리(性理)의 연원이 되는가?"
하니, 김과가 아뢰기를,
"제왕의 학문에 대해서 신이 어찌 감히 가볍게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정일집중(精一執中)이 제왕의 학문이다."
하고, 드디어《중용》을 강론하기로 하였다.
○ 상이 이르기를,
"원민생(元閔生)이 서북(西北)으로부터 왔다기에 지나온 곳에 대해 물어보니 곡식이 모두 말랐다고 한다. 어찌하여 하늘이 재앙을 내리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니, 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 조영무(趙英茂)가 대답하기를,
"잘못은 상국(上國)에 있으니 우리나라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옛사람은 재앙을 만나면 반드시 자신을 반성하고 남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았다."
하였다. 상이 가뭄을 걱정하여 눈물을 흘리고, 하루에 한번만 수라를 들었다. 공상(供上)을 위한 사냥을 혁파하도록 명하니, 지신사 박석명(朴錫命)이 아뢰기를,
"한 나라를 가지고 한 분을 받드는데 있어서 수백 사람이 사냥을 하는 정도는 폐단이 되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대간(臺諫)을 불러 유시하기를,
"근래에 언관이 대체(大體)는 고려하지 않고 작은 일에만 힘을 쓰고 있다. 이 때문에 임금과 신하가 서로 소원하고 동료가 서로 시기하여 심지어 서로 용납하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대들은 맡은 직책을 성실히 이행해서 대체를 세울 수 있도록 힘쓰라.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나의 과실을 말하지 않거나 관료들의 시비를 논핵하지 않고자 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단지 간언은 반드시 정당하게, 논핵은 공정하게 할 것을 기약할 뿐이다."
하니, 대답하기를,
"신들이 이미 분부를 받았는데 감히 조금이라도 사사로운 뜻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3년(계미, 1403)
○ 상이 본국에 서적(書籍)이 대단히 적어서 넓게 볼 수 없는 점을 우려하여,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고 구
리로 글자 자형을 떠서 활자를 만드는 대로 인출하게 하였다. 이직(李稷), 박석명(朴錫命), 이응(李膺)에게 명하여 그 일을 감독하게 하고 내부(內府)의 구리를 내다가 그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 이해에 태종황제가 즉위하니, 좌정승 하륜(河崙)을 보내 등극을 축하하였다. 하륜이 부개(副介) 조박(趙璞)촹이첨(李詹) 등과 의논하기를,
"천자가 이미 천하와 함께 새로운 시작을 하였으니, 우리 임금의 작명(爵命)과 인장(印章)도 그대로 둘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예부(禮部)에 신품하여 상주하였더니, 태종황제가 도지휘(都指揮) 고득(高得), 좌통정(左通政) 조거임(趙居任) 등을 보내와서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주었다. 상이 글을 내려 하륜 등을 포상하고 전토와 노비와 안장 갖춘 말을 하사하였다. 하륜 등이 사양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가서 천자에게 주달하여 우리 자손들에게 만세토록 가이없는 복을 끼쳐 주었으므로 전토와 노비를 주어서 자손들에게 전하게 하는 것이니 경들은 굳이 사양하지 말라."
하고, 드디어 청화정(淸和亭)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 상이 좌우에게 이르기를,
"대간이 사람의 죄를 청할 때에는 반드시 파직(罷職), 유배(流配) 등의 말을 하는데, 단지 '법률에 따라 시행하소서.'라고 청하는 것이 가하지 않은가. 대간을 불러서 이 점을 유시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옛사람의 말에 '임금이 말을 해놓고 스스로 옳다고 하면 경대부가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다.' 하였는데, 이렇게 하면 국가가 어찌 위태롭지 않겠는가. 경들은 이것을 본받지 말라."
하였다.
○ 경상도 조선(漕船) 34척이 바다 가운데에서 침몰하였다. 상이 이 소식을 듣고 조회에 임하여 슬픈 어투로 이르기를,
"책임은 실지로 나에게 있다. 이는 사람을 죽을 곳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쌀이야 아까울 것이 없지만, 죽은 사람이 무슨 죄인가."
하였다. 우대언(右代言) 이응(李膺)이 아뢰기를,
"육지로 수송하는 것이 수로로 운반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마(牛馬)를 수고롭게 하는 것이 오히려 사람을 죽게 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하였다.
○ 익안대군(益安大君) 이방의(李芳毅)의 집에 행행하였다. 방의가 오랜 병으로 부축을 받고 나와서 무릎을 꿇고 울먹이니, 상도 눈물을 흘렸다. 안장을 갖춘 말과 사냥매를 하사하고 술자리를 열었다. 상이 이르기를,
"형은 병이 심하오. 형을 번거롭게 하여 오래 앉아 있게 하였으니, 이제 돌아갈까 하오."
하니, 방의가 아뢰기를,
"전하가 신의 집에 행행하기도 쉽지 않고 신은 병이 깊어 상알(上謁)하러 갈 수도 없으니, 오늘은 신이 취하여 눕는 것을 보기 바랍니다."
하여, 상이 하루 종일 머물렀다. 방의가 부축을 받고 일어나 춤을 추었고 상도 일어나 춤을 추었다.
○ 우정승 성석린(成石璘)이 진계(進戒)하기를,
"전하께서 총명한 자질을 가지고 선도(善道)에 관하여 듣기를 좋아하시니 신들은 매우 기쁩니다. 그러나 처음만 근면하고 끝에 가서 태만하면 결코 덕(德)을 이룰 수 없습니다. 게으름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전하의 총명은 사물에 대하여 환히 알고 정사를 듣고 용단을 내리시는 것은 신(神)과 같이 정확하여 참소하는 말이 자연히 진출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러나 참소와 아첨을 일삼는 사람은 시비의 판단을 흐리게 하여 임금의 헛점을 파고 듭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신중을 기하소서."
"그대들은 기억해 두라. 《상서(尙書)》라는 책이 그 당시 임금과 신하가 서로 경계한 말이라는 것을. 지금 《상서》가 재미가 있다는 것을 더욱 알겠다."
하였다.
4년(갑신, 1404)
○ 원자유선(元子諭善) 설칭(薛?) 및 시학(侍學)과 시직(侍直) 등을 불러 이르기를,
"지금 원자를 위하여 요속(僚屬)을 많이 둔 것은 항상 가르치고 인도해서 그 덕을 이루게 하고자 함이다. 국가 운명의 장단과 백성의 기쁨과 슬픔이 실지로 여기에 달려 있는데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시직은 모두 공신의 자제들이다. 그들의 부형(父兄)을 내가 이미 의심하지 않고 등용하였으니 그들의 자제(子弟)들도 원자가 다른 날에 등용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대대로 보필하게 한다면 또한 아름답지 않겠는가. 그대들은 서로 경계하여 혹시라도 게을리 하지 말라."
하였다.
○ 상이 재보(宰輔)에게 이르기를,
"옛날 당 태종이 일찍이 아름다운 새매를 한 마리 얻어 팔뚝에 올려 놓고 있다가 위징(魏徵)이 오는 것을 보고 품속에다 감추었는데, 위징이 일을 주달하느라고 오래 있게 되자, 새매가 마침내 품속에서 죽고 말았다. 어찌하여 위징을 그렇게 무서워했는가?"
하였는데, 시중 조준이 아뢰기를,
"이는 위징이 훌륭한 것이 아니라 바로 태종이 훌륭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5년(을유, 1405)
○ 4월. 서리가 내렸다. 상이 너무 심하게 자책하니, 예조 판서 이문화(李文和)가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날마다 신중을 기하셔서 하늘의 견책에 답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참소와 간사함이 행해지고 있는가, 백성에게 원한이 있는가? 어찌 하늘의 견책이 이렇게 극도에 이르렀단 말인가."
하였다.
○ 원윤(元尹) 이백온(李伯溫)이 비부(婢夫)를 죽였는데, 상이 그의 죄를 사면시켜 주었다. 대사헌 이래(李來) 등이 청하기를,
"옛날에는 천자의 아비가 살인을 했을 경우 사구(司寇)가 법을 집행하여 논죄하면 천자도 사정을 쓰지 못하였습니다. 원컨대, 법대로 처벌하여서 죄없이 울먹이는 영혼을 위로하게 하소서."
하였다. 재삼 신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옳은 말이다. 도성 밖으로 내쫓도록 하라."
하였다. 이래 등이 합문에 부복하여 굳이 청하니, 상이 종부시(宗簿寺)로 하여금 순금사(巡禁司)와 함께 장형을 가하게 한 다음, 함주(咸州)로 유배 보내도록 하였는데, 헌부가 결박하여 보냈다. 상이 노하여 지평 이흡(李洽)을 결박하여 순금사의 감옥에 내렸다. 이래가 아뢰기를,
"백온의 형은 전조(前朝)에 살인을 하였는데, 백온이 지금 또 살인을 하였으니, 이 백온의 형제는 바로 전하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성덕(盛德)을 더럽힌 자들입니다. 그리고 결박하여 보낸 것은 도망갈 것을 우려해서 그런 것입니다."
"경은 이씨(李氏)의 사직신(社稷臣)이 아닌가. 어찌 종친을 이렇게 대우하는가."
하니, 이래가 아뢰기를,
"신들은 종친을 욕보이려는 것이 아니고 전하의 덕을 도우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대관이 다 물러가 대죄하였다. 간관 조서(趙敍) 등이 청하기를,
"이흡이 끝까지 법을 주장하니, 그의 죄를 용서하여 사람들의 소망을 위로하소서."
하니, 상이 드디어 석방시키고, 이래 등에게 명하여 관직에 나오게 하였다. 이래가 아뢰기를,
"사람의 일이 아래에서 느껴지면 하늘의 변고가 위에서 나타납니다. 지금 가뭄으로 인한 재해 때문에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고 깊이 반성하며 반찬수도 줄이고 술도 금하시니 진실로 아름다운 뜻입니다. 그러나 친히 정무를 처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좋은 의견들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날마다 정전에 거둥하시어 대신과 함께 일을 논의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형벌이 타당성을 얻은 연후에 하늘의 마음에 부합할 수 있는 법인데, 지금 사죄(死罪)를 다 용서해 주시니 간악한 자들이 어떻게 사라질 수가 있겠습니까. 앞으로는 가볍게 사유(赦宥)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정사를 듣지 않는 것은 게을러서가 아니라 마음이 편치 못해서이며, 내가 가볍게 사유한 것은 이것을 가지고 비를 빌려는 것이 아니라 비를 바라는 지극한 마음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려다 보니 그리 된 것이다."
하였다. 이래가 청하기를,
"병을 무릅쓰고 정사를 듣도록 하시고 다시는 가볍게 사면시키지 마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뒤에는 마땅히 하지 않도록 하겠다."
하였다.
○ 영의정부사 평양부원군 조준(趙浚)이 졸하였다. 상이 부음(訃音)을 듣고 통곡을 하였으며, 소선(素膳)을 들고 철조(輟朝)하였다. 세자와 함께 빈차(殯次)에 친림하여 상주(喪主)를 조위(弔慰)하였다.
처음에 태상왕이 잠저에 계실 때 평소 조준의 명성을 들었는데 그를 불러 일을 논의하더니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그를 밀직사사 겸 사헌부대사헌에 탁배하고 크고 작은 일을 모두 그에게 자문하니, 조준도 감격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알고 있는 바를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 유익한 일을 장려하는 한편 폐단을 제거하였다. 사전(私田)을 혁파하여 백성들의 실생활을 후하게 하였다. 세가(世家)와 거실(巨室)의 원망이 들끓었으나 조준이 더욱 강력하게 논집하였는데, 태상왕의 의견이 조준과 서로 맞아서 마침내 여러 논의를 배격하고 밀고 나갔다.
태상왕이 즉위하던 날 저녁에 조준을 와내(臥內)로 불러들여 이르기를,
경은 한 문제(漢文帝)가 대저(代邸)로부터 들어오던 날 밤에 송창(宋昌)을 위장군(衛將軍)에 제배하여 남북군(南北軍)을 진무하게 한 뜻을 아는가?"
하고, 인하여 도통사(都統使) 은인(銀印)과 화각(?角)촹동궁(?弓)을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오도(五道)의 병마를 모두 경에게 위임하여 총괄하게 한다."
하였다. 드디어 문하 우시중(門下右侍中) 평양백(平壤伯)에 제배하고 책훈 1등을 내렸다. 상이 잠저 때 일찍이 조준의 집을 지나간 적이 있었는데, 상을 중당(中堂)으로 맞이하여 정성껏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인하여 《대학연의》1부를 진상하며 아뢰기를,
이것을 읽고 나면 국가를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 좌사간 이은(李垠) 등을 불러 이르기를,
금년 봄과 여름에 가뭄으로 인한 재해가 너무 심하여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마음 졸이면서 깊이 반성하
하니, 이은 등이 아뢰기를,
지금 전하께서 가뭄을 염려하시어 봄부터 어선(御膳)을 줄이셨으니 걱정하고 두려워하시는 뜻이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대신과 여러 집사도 조심하면서 감히 태만하거나 방종하는 일이 없이 직무를 잘 수행하고 있으니, 전하께서 비록 권유하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신들에게 만일 의견이 있다면 어찌 감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근신에게 명하기를,
성랑(省郞)들이 근래에 금령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았으니 마땅히 술을 내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제릉(齊陵)을 알현하고 틈을 내어 농사를 둘러보았는데, 곡식이 익지 않은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조영무(趙英茂)가 아뢰기를,
신은 공신(功臣)이라 하여 부귀를 누리고 있는데 이렇게 흉년이 들었으니 백성을 어쩌면 좋겠습니까."
하고, 역시 울었다. 상이 이르기를,
예로부터 비록 재이(災異)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때는 없었다. 이는 실로 나의 부덕함이 하늘의 뜻에 부합하지 못한 소치이다."
하였다.
○ 상이 일찍이 세자에게 묻기를,
걸주(桀紂)를 어찌해서 독부(獨夫)라고 하는가?"
하니, 세자가 대답하기를,
인심을 잃어서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걸주는 천하의 주인이 되었지만 인심을 잃고 나자 하루아침에 독부로 전락하고 말았다. 더구나 나와 네가 만약 인심을 잃는다면 필시 하루아침도 이 자리에 있지 못하게 될 것이다. 소홀히 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6년(병술, 1406)
○ 상이, 죄수가 감옥에서 야위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지신사(知申事) 황희(黃喜)에게 이르기를,
"사형을 내려야 할 죄수라면 사형을 내렸어야지, 어찌 옥사를 지체하여 지레 죽게 한다는 말인가. 앞으로는 법관으로 하여금 옥사를 지체하는 일이 없게 하라."
하였다.
○ 황제가 태감(太監) 황엄(黃儼)을 파견하여 제주(濟州)에서 동불(銅佛)을 영입하게 하였다. 불상(佛像)이 사관(使館)에 도착하자, 황엄이 상더러 먼저 불상에다 절을 하게 한 뒤에 예를 행하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동불이 중국에서 온 것이라면 내가 당연히 절을 하여 경의를 표해야 하겠지만 조정의 의견이 지금 그렇지 않으니 어떻게 절을 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하륜과 조영무가 아뢰기를,
"황제가 불도(佛道)를 신봉하여 먼 곳에서까지 동불을 구하고 있고, 또 황엄이 고약한 위인이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니, 권도에 입각하여 불상에다 예배를 하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신하들은 의리를 지키는 자가 한 사람도 없다. 황엄을 이렇게 무서워하니 임금을 어려움에서 구제할 수 있겠는가. 고려조의 충혜왕(忠惠王)이 원(元) 나라로 잡혀갈 때 나라에서 아무도 구하려 드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위급한 상황에 처한다면 역시 이 지경이 되고 말 것이다. 임금은 행동을 경솔하게 해서는 안 되는 법인데 내가 부처에다 절을 한다면 예는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나라의 화(禍)와 복(福)은 천자한테 달려 있고 불상한테 달려 있지 않으니, 마땅히 천자의 사신을 먼저 뵈어야지 어찌 우리나라의 동불에게 절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황엄이 하늘을 쳐다보고 한참 있다가 미소를 지으며 행례하기를 허락하였다. 그래서 불상에다 절을 하지 않았다.
○ 상이 가뭄을 걱정하여 반찬 수를 줄이고 술을 금하였으며, 중외의 죄수들을 사면하였다. 좌우에게 이르기를,
"하늘이 비를 내리지 않는 것은 실로 과인이 우매하기 때문이다."
하고,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니, 좌우의 신하들이 감동하였다. 육조와 대간을 불러 이르기를,
"가뭄이 너무 심하다. 나는, 상을 주고 벌을 주는 데에 법이 없거나 사람을 등용하는 것이 타당성을 잃었거나, 궁궐에서 임금의 의복이나 거마 등이 제도에 지나쳐서 결과적으로 재변을 불러들인 것이 아닌가 싶다. 마땅히 제각기 숨기지 말고 직언을 하라. 내가 고치도록 하겠다. 대신 중에서 정부와 육조의 관리가 될 만한 자와 직질(職秩)은 비록 낮더라도 장수가 될 만한 자와, 대간이 될 만한 자의 이름을 갖추어 아뢰도록 하라. 내 그들을 등용토록 하겠다."
하였다.
○ 당시에 익명서(匿名書)를 적어서 거리에 걸어 놓은 것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그 내용은 모두 가뭄이 든 이유가 하륜이 정권을 잡은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하륜이 전문(箋文)을 올려 피위(避位)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문의 내용이 절실하니 실로 간하는 상소였다. 내가 방책(方策)에서 본 바에 의하면 재이(災異)가 발생하는 것은 재상의 잘못이 아니다. 오늘날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은 그 죄가 사실 나에게 있다. 어찌 경과 관계가 있겠는가. 갑신년 여름에 경이 오랜 가뭄으로 굳이 피위하기를 청하였으나 머지 않아 다시 홍수가 지는 재해가 있었다. 이를 보면 오늘날의 가뭄은 경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유언비어와 비방 따위는 내가 진실로 믿지 않는데, 경이 어찌 혐의를 두는가."
하니, 하륜이 대답하기를,
"정령(政令)은 정부(政府)로부터 나오는 것인데, 신이 그 책임을 지지 아니하고 장차 누구에게 맡기려 하겠습니까."
하였다.
7년(정해, 1407)
○ 상이 기도축문(祈禱祝文)을 살펴보고 좌우에게 이르기를,
"사신(詞臣)에게 유시하여 앞으로는 축문에 과인을 위하여 기도하는 말을 언급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 간관이 아뢰기를,
"옛날에는 재변을 만나면 삼공이 피위를 하였는데 지금 하륜과 조영무는 총애를 탐하여 사직하지도 않고 다시 제도를 세워 선왕의 법제를 문란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황엄은 황제가 총애하는 신하인데, 그가 말하기를, '국왕은 나를 비록 후대하지만 정부는 나를 심히 박대한다.' 하였습니다. 이 말이 만약 중국에 알려지면 듣는 자들이 필시 권한이 대신한테 있다고 여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래의 정승 중에서 하륜만한 자가 흔하지 않다. 대신은 생사고락을 함께 할 사람인데 어찌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가 있겠는가. 지금 이후로 그대들은 다시는 동요하지 말라. 그리고 대신들도 대체(大體)를 유지하도록 힘쓰라."
○ 김씨를 봉하여 왕세자의 숙빈(淑嬪)으로 삼고, 그 아비 김한로(金漢老)를 동지총제(同知摠制)에 제수하였다. 김한로를 불러 이르기를,
"경은 멀리는 심효생(沈孝生)을 귀감으로 삼고 가까이는 민씨(閔氏)를 경계로 삼도록 하라. 내가 어려서부터 경이 근후하여 부귀(富貴)를 잘 지켜갈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경의 딸을 간택하여 세자의 배필로 삼은 것이니, 경은 마땅히 내 말을 공경히 받아들여서 소홀히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8년(무자, 1408)
○ 모화루(慕華樓) 남쪽에 못을 팠는데 시일이 오래되도록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사헌부가 제조관 박자청(朴子靑)을 논핵하자, 상이 노여워하여 지평 최자해(崔自海)를 불러 책망한 다음 강제로 집으로 돌려보내니, 집의 권우(權遇) 등이 모두 대죄하였다. 좌사간 김상지(金相知)가 아뢰기를,
"대신(臺臣)은 말을 책무로 삼기 때문에 단지 직무를 다하고자 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이렇게 기를 꺾고 모욕을 주시니 이는 후세에 모범이 될 수 없습니다."
하였다. 대사헌 남재(南在)가 아뢰기를,
"대간(臺諫)은 임금의 이목(耳目)입니다. 말이 비록 맞지 않는 경우가 있더라도 죄를 주지 않는 것은 언로를 개방하고 시야를 넓게 해서 만세를 유지하기 위한 계획에서입니다. 박자청이 논핵을 받은 것은 논의할 것이 못 되지만, 만약 간신이 권세를 휘둘러 그것이 국가의 체제에 관계되는 일인데도 대간이 잠자코 말을 하지 않는다면 이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니, 곧바로 권우 등을 관직에 나오도록 명하였다.
○ 태상왕이 훙(薨)하였다. 상이 슬픔에 젖어 정사를 보지 아니하자, 영의정부사 하륜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은 삼가 임금의 덕은 효도보다 더 큰 것이 없고, 효도를 이루는 방법도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고 봅니다. 양암(諒闇)에 거처하는 법을 은(殷) 나라와 주(周) 나라 이전에는 이미 행하는 자가 없었고 고종(高宗)만이 행하였습니다. 주 성왕(周成王)이 죽자, 강왕(康王)이 즉위하여 신하들의 조회를 받으면서 면복(冕服)을 벗고 상복(喪服)을 다시 입었는데,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천자와 제후의 예는 사서인(士庶人)과 같지 않다.' 하였으니, 대체로 임금은 마땅히 천하 국가로 체통을 삼고 종묘 사직과 백성으로 계획을 삼는 한 왕위를 오랫동안 비워두어서도 안 되며, 왕권이 잠시도 나뉘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그 시기와 형편으로 볼 때 부득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은주(殷周)와 같이 성대한 시기에 인심이 순후하고 세도(世道)가 태평하였는데도 오히려 양암의 법을 행하기 어려웠는데 더구나 후세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한 문제(漢文帝)가 조서를 내려 단상(短喪)을 행하도록 한 후부터 역대 임금이 이것을 준수하여 다 삼년상을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진 무제(晉武帝)와 위 효문제(魏孝文帝)와 주 고조(周高祖)가 행하였지만 군국의 중대한 사무는 다 직접 처리하였습니다. 송(宋) 나라의 진종(眞宗)촹인종(仁宗)촹신종(神宗) 네 임금은 다 훌륭한 임금인데, 외정(外庭)의 신하들은 다 역월제(易月制)를 사용하였고 내정에서만 실지로 삼년상을 행하였습니다. 지금 당시의 제기(帝紀)를 고찰해 보니 좌조(坐朝)촹청정(聽政)촹제배(除拜)촹대사(大赦)와 같은 일이 모두 장례를 치르기 전에 있었습니다.
대체로 송 나라는 삼대 이후 정치와 교육이 활발하던 시기였으므로 선비다운 선비가 배출되었고 제도와 문물도 모두 후세의 법이 될 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외정의 신하들이 행상(行喪)하는 예를 모두 송 나라 제도를 준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 태상왕을 애절하게 사모하시는 효성이 지극하여 깊이 양암에 거처하시면서 정사를 들으려 하지 않으시니, 신하들은 명을 받을 데가 없어 어찌할 줄 모르고 있습니다. 전일에 신들이 삼가 백관을 거느리고 합사하여 정사를 듣도록 청하였지만 전하께서는 바로 윤허하지 않으시니 신들이 이 분부를 듣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순(舜)은 대효(大孝)로 일컫고, 주공(周公)은 달효(達孝)로 일컫는데, 이들은 모두 부모 형제의 변고를 만나 슬기롭게 대처한 분들입니다. 무인년 변란 때에 간사한 신하가 우리 태상왕이 편찮은 틈을 노려 어린아이를 끼고 반란을 도모함에 따라 종묘 사직의 안위가 위급한 사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전하께서 상황에 대처하여 주벌을 가함으로써 종묘 사직을 재차 안정시켜 만세에 길이 힘입게 하였으니, 우리 조선의 억만년토록 무궁한 사업을 태상왕은 앞에서 개척하시고 전하는 뒤에서 안정시킨 것으로, 변란에 슬기롭게 대처하고 선조의 대업을 잘 계승한 면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순과 주공에 비하여 손색이 없습니다. 이는 대개 종묘 사직을 염려하여 대효(大孝)를 행하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국가가 비록 조금은 안정되었다고 하지만 중외의 문제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삼대의 성대한 예를 본받아서 잠자코 말을 하지 않고 정사도 보려 들지 않으려 하시는데, 그렇게 하시면 신들의 생각에는 아마 모든 일이 필시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혹시라도 종묘 사직에 걱정이라도 끼치게 된다면 결국 대효는 깨지고 말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슬픔을 억제하고 변고에 순응하여 한결같이 송조(宋朝)의 제도를 따라서 소복차림으로 조회에 임하여 날마다 여러 정사를 들으심으로써 위로는 종묘 사직의 대효를 융성하게 하시고 아래로는 신민의 바람을 위로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태상왕이 개창한 왕업을 지속시키고 만세에 준수할 법을 남겨주도록 하소서."
하였다. 상소가 올라가자, 금중(禁中)에 머물러 두었다. 육조(六曹)가 또 백관을 거느리고 상소하여 청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 의정부가 청하기를
"전하께서 요즈음 음식을 드시는 것이 매우 부실하니 신들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평소에 성찬(盛饌)을 그다지 즐기지 않고 단지 한 가지 반찬만 들었던 것은, 성격 때문이지 슬픔이 북받쳐서 그런 것이 아니다."
하였다.
황엄(黃儼) 등이 객관(客館)에 있었다. 상이 담복(淡服) 차림에 소연(素輦)을 타고 객관으로 가서 황엄을 위로하니, 황엄이 기뻐하면서 고기 반찬을 들기를 청하였다. 상이 사양하기를,
"삼년상은 천자로부터 일반 백성들까지 차이가 없습니다. 지금 내가 담복(淡服)을 입은 것은 단지 사신(使臣)을 위해서 일뿐입니다. 궁중에 있을 때에는 최질(衰?)을 입기 때문에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였다. 황엄이 재차 청하였으나, 상이 굳이 사양하였다.
9년(기축, 1409)
○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 이무(李茂)가 죄를 지어 옥에 갇혔다. 옥관이 그의 아들 공유(公柔)를 함께 국문하였는데 공유가 곤장을 거의 90대를 맞고도 끝내 승복하지 않았다. 상이 듣고 이르기를,
"이는 국문한 자가 지나친 것이다. 자식이 아비를 위하여 숨기는 것이니 차라리 죽을지언정 어찌 감히 아비의 죄를 이루게 하는 일에 증언을 하겠는가."
하고, 즉시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 상이 재집(宰執)에게 이르기를,
"나는 무비(武備)가 소홀한 것에 대해 몹시 염려가 된다. 병사를 거느린 자로 하여금 기율(紀律)을 익혀서 알도록 하고 또 병서(兵書)도 읽게 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형관(刑官)이 사람의 죄를 의논할 때에 만약 공신(功臣)이거나 현관(顯官) 및 그의 자손의 경우는 비록 중죄를 범하였더라도 으레 가볍게 적용하고 세력이 없는 사람의 경우에는 일일이 범한 대로 연좌시키니 이것이 어
하였다.
○ 간관(諫官) 이종선(李種善) 등이 상소하기를,
"대간은 임금의 이목입니다. 위로는 임금을 보좌하고 아래로는 백사(百司)를 규찰하여 논주(論奏)할 때에 의논이 통일되지 않는 것이 하나라도 있을 경우 반드시 먼저 그 문제를 제거하고 옛일을 상고해 봅니다. 옛날 당 나라 어사대부 이승가(李承嘉)가 일찍이 여러 어사들을 불러 책망하기를, '요즈음 어사가 일을 논의하면서 대부에게 자문을 구하지 않는 것이 예라 하겠는가.' 하니, 소지충(蕭至忠)이 말하기를, '고사를 보면 대중(臺中)에 장관이 없다.' 하였습니다. 어사는 임금의 이목에 비유하는데 임금을 섬기다가 스스로 탄핵하는 일을 만약 먼저 대부에게 말한다면 대부를 탄핵할 경우 누구에게 말합니까. 또 송 인종(宋仁宗)이 하송(夏?)을 추밀원사(樞密院使)로 삼으니 대간이 그의 간사함을 번갈아 가며 논핵하였으나 상이 살펴보지 아니하고 급히 일어나자, 중승(中丞) 왕공신(王拱辰)이 상의 옷소매를 잡고 전후하여 18번이나 상소를 하니 그제서야 파직하였습니다. 전조의 정언 이첨(李詹)과 전백영(全伯英) 두 사람이 시중 이인임(李仁任)의 죄를 강력히 말하였으니 자기와 같지 않은 자를 제거한 후에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원컨대, 이제부터는 대간이 일을 논의할 즈음에 의견이 모두 동일하면 합사하여 주달하고 혹시 논의가 같지 않더라도 그 같지 않은 것을 제거할 필요 없이 사람마다 자유롭게 일을 논의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 동북면(東北面)에 기근이 들었다. 상이 이르기를,
"동북 지방의 백성들은 보리를 심지 않기 때문에 비록 보리가 익을 때를 만나도 반드시 구제해 주기만을 바라고 있다. 앞으로는 수령이 봄가을로 그 곳 백성들에게 보리 심기를 권유하게 하라."
하고, 인하여 좌우에게 이르기를,
"매번 산이 무너지고 물이 마르거나 일월(日月)촹성신(星辰)촹풍상(風霜)촹뇌우(雷雨)의 변고와 금조(禽鳥)촹충어(蟲魚)의 변괴를 만나면 항상 두려운 마음을 갖고 더욱 공구수성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어찌 가볍게 여기고 하늘의 경계를 만홀히 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 4월. 천둥과 번개가 대단했다. 우박의 크기가 탄환(彈丸)만 하였는데, 한 사람이 맞고 죽었으며 새들도 죽은 것이 많았다. 상이 좌우에게 이르기를,
"전기(傳記)를 상고해 보니 여름 우박은 정령이 까다롭거나 요역이 무거운 소치라고 한다. 이것을 적어서 의정부에 보여주도록 하라."
하였다.
○ 광연루(廣延樓)에 거둥하였다. 지사관원사 한상덕(韓尙德)이 나와서 아뢰기를,
"순(舜)은 성인인데도 고요(皐陶)가 단주(丹朱)처럼 되지 말라고 경계하였고, 당 태종(唐太宗)도 사리가 밝은 임금인데 위징(魏徵)이 수 양제(隋煬帝)처럼 되지 말라고 경계하였습니다. 지금 신도 신우(辛禑)처럼 되지 말라고 경계를 드리겠습니다. 전하께서 오랫동안 정사를 보지 않으시기에 신은 몸이 편찮으셔서 그런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 계절이 되면 매번 안질이 발생하곤 하였는데 금년에도 역시 그렇다."
하였다. 한상덕이 아뢰기를,
"정성을 다하여 사대(事大)를 하고 위엄으로 도적을 방어하여 중외(中外)가 아무 일이 없으니, 평화로운 시절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원컨대, 항상 경외하는 마음을 갖고서 사방에다 눈을 밝히시고 사방에다 귀를 열어 놓으시어 훌륭한 자는 진출시키고 그렇지 못한 자는 물리치소서. 편안할 때 위급함을 잊지 아니하고 다스려질 때 혼란스러움을 잊지 않는다면 오늘의 정치가 삼왕(三王)에 미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기뻐하며 이르기를,
하였다. 한상덕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정심(正心)과 성의(誠意)를 갖고 천지와 덕이 부합되도록 노력하시되 '나는 불민(不敏)하다.'고 하지만 않으시면 옛날 성인에 미칠 수 있습니다."
하고, 한상덕이 나가니, 상이 이르기를,
"한상경(韓尙敬)이 말을 매우 간절하게 하더니, 그의 아우도 그렇다. 내가 즉위한 이후로 간관이 진계(進戒)한 것이 한상덕만한 자가 없었다."
하였다. 다른 날, 정사를 볼 때에 한상덕이 또 나아가 아뢰기를,
"지금같이 무더운 여름에 기후가 고르지 못하여 비는 오랫동안 내리지 않고 서늘한 바람만 가을처럼 불어대니,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임금이 실덕(失德)을 해서 그렇습니까, 아니면 시정(時政)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그렇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사의 잘못에 대해서는 간관이 마땅히 스스로 알 것이다."
하였다. 한상덕이 아뢰기를,
"명령이 나오면 정부는 받아서 시행하기만 합니다. 신들이 혹시 듣는다 하더라도 그 일이 이미 시행되고 나서입니다. 전일에 간관(諫官)을 정부(政府)에 소속시키기를 청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고사(故事)는 어떤가?' 하고 물었다. 황희(黃喜)가 아뢰기를,
"국초에 이문화(李文和)와 윤사수(尹思脩)가 모두 간관으로 경력(經歷)을 겸임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아름다운 법이 아니다. 경력이 비록 중대한 직임이기는 하나, 재상에 소속된 관리이다. 임금의 동정과 정령의 득실에 대해 모두 지적하여 바로잡을 수 있는 자는 간관이다. 그러므로 간관으로 경력을 겸임하게 하는 것은 조정과 간관을 존중하는 처사가 아니다."
하였다. 한상덕이 또 아뢰기를,
"요즈음 대간이 다 일을 말하다가 파출되었는데, 죄가 당사자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서로 논의한 사람까지 국문을 당합니다. 이 때문에 사림(士林)이 서로 경계하여 간관이 사는 집의 문을 지나가지 않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의 언동이나 정령의 실시에 대하여 규제를 가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치가 이미 잘 되고 있고 백성이 이미 안정되었다.'고 말하지 마시고 매번 한가할 때에 깊이 반성하시면서 '마음먹고 있는 생각 중에 어느 것이 하늘을 거슬리는지, 시행하는 정사 중에 무슨 일이 백성들의 뜻과 어긋나는지를 생각하시면서 이미 지나간 것만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닥쳐 올 일도 항상 염려하신다면 재앙과 근심을 해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옛날의 현성(賢聖)들도 모두 이렇게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훌륭한 말이다."
하였다. 한상덕이 오히려 물러가지 않고 있자, 상이 이르기를,
"다시 말할 것이 있는가?"
하니, 한상덕이 아뢰기를,
"지난해의 흉년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살기가 어렵습니다. 유정현(柳廷顯)은 충청도에 있으면서 많이 거두어들이고 심하게 독촉해서 백성들을 거듭 괴롭혔으므로 신들이 이미 탄핵하였지만 때마침 사유(赦宥)를 거치게 되어 죄를 청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들으니, 전(傳)에 '백성들에게 많이 거두어들이는 신하를 두느니 차라리 도둑질하는 신하를 두겠다.' 하였습니다. 이것을 오늘날에 비추어 보면 국가의 재물을 훔치는 것은 중한 듯하고 백성의 재물을 거두어들이는 것은 가벼운 듯하지만, 옛사람이 경계한 속뜻은 심오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하고, 곧바로 묘당에 명하여 사실을 규명하여 아뢰도록 하였다.
○ 가뭄 때문에 술을 금하였다. 의정부가 술을 올리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술을 금하는 것은 유독 가뭄을 걱정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기근을 염려해서이기도 하다."
하고, 구언(求言)하는 하교를 내렸다. 예조 좌랑 정효복(鄭孝復)이 상언하기를,
"둔전(屯田)은 백성들이 다 같이 싫어하는 바이며, 여자는 환관이 거느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를 금지시키지 못하고서 어떻게 정치를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 중의 첫째입니다.
군사는 숫자만 많은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정예화되어 있어야 하며 관직은 반드시 다 갖추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적합한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시급하지 않은 관직이 많고 쓸데없는 군사가 많다면 백성이 어찌 괴롭지 않을 수 있겠으며, 국가가 어찌 가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 중의 둘째입니다.
승려가 국가에 무슨 도움을 주었다고 직첩(職牒)을 받고 좋은 말을 타는 것이며, 왜노(倭奴)는 우리 백성들에게 무슨 덕을 베풀었다고 곡식을 배로 실어다가 기근을 구제해 주는 것입니까. 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 중의 셋째입니다.
아, 공은 같은데 상에 차이가 있는 것은 귀천(貴賤)을 따르기 때문이며, 죄는 동일한데 벌에 경중이 있는 것은 친소(親疎)가 개입되어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상이 어떻게 권장의 구실을 할 수 있겠으며, 벌이 어떻게 징계하는 구실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에게 죄가 있어서 국내의 사람들이 모두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데도 오히려 그를 죽이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편치 못한데 국가가 위태롭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 중의 넷째입니다.
아, 정사마다 비난할 수 없고 사람마다 허물을 지적할 수 없는 법이니, 어찌 일마다 다 들어서 제시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검소하고 절약하는 것으로 백성들의 생활을 후하게 하고, 대궐을 높게 하지 말고 의복을 화려하게 하지 말아서 풍속을 변화시키소서. 재화를 천하게 여기고 덕을 귀하게 여겨서 이끗에 대해 말하는 신하를 양성하지 마시고, 본업을 후하게 하고 말업을 억제하여 일 없이 놀고 먹는 자들을 통렬히 금지하소서. 정상적인 부세 외에 진헌하는 물품을 받아들이지 마시고 쓸 물건 외에는 영선(營繕)을 허여하지 마소서. 일은 반드시 옛일을 지침으로 삼아 새로운 법을 만들지 마시고 대제(大祭)를 받들듯이 공경하는 마음을 갖고 백성의 일을 소홀히 하지 말며, 위협에 따라 죄를 범한 자는 처벌하는 일이 없도록 해서 지극히 인애로운 정치를 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도록 하소서. 확인되지 않은 말은 듣지 말고, 남의 의견을 듣지 않은 계획은 채택하지 말며, 노성(老成)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마소서. 《시경》 칠월(七月)을 반복하여 읽고 《서경》 무일(無逸)을 마음에 두고 깊이 생각하여 옛날 요촹순촹우촹탕촹문왕촹무왕의 선행(善行)을 오늘날의 선행으로 삼고, 고요(皐陶)촹이윤(伊尹)촹부열(傅說)촹주공(周公)촹소공(召公)이 자기 임금에게 경계한 말을 문득 오늘 직접 듣는 것처럼 여기소서. 부귀를 믿지 말고 숭고함도 믿지 말며 무기가 많은 것과 성곽이 완벽한 것과 지형이 험준한 것을 믿지 말고 항상 조심하는 마음을 갖고 천명을 공경하고 백성을 두려워하소서."
하니, 상이 보시고 오랫동안 칭찬하다가 이르기를,
"충직하다. 정신(廷臣)으로서 이같이 직언을 해 주는 자가 있지 않았다."
하고, 어필로 직접 '공은 같은데…'와 '죄는 동일한데…'의 글귀에 비점(批點)을 찍었다. 그리고 그를 사간원 우헌납에 탁배하였다.
○ 상이 좌우에게 이르기를,
"외척을 군(君)에 봉한 것은 우리 조정의 경우 상산군(象山君) 강계권(康繼權)에서부터 시작되었고 민씨(閔氏)도 다 군에 봉하였는데, 이는 옛날의 법도가 아니다."
하고, 예조 판서 이응(李膺)에게 이르기를,
"후비(后妃)의 친족을 군에 봉하는 것은 옛날의 제도가 아니니, 경은 역대의 제도를 상고하여 올리도록 하라."
○ 하교하기를
"대체로 듣건데, 예로부터 제왕의 시대에는 임금과 신하가 의견이 서로 일치하여 상대를 존중하고 협조해서 광명정대한 사업을 이룩한 다음, 오랜 정치로 안정을 유지하여 만세의 태평스러운 기반을 잡았다고 한다. 그후로 세상이 쇠퇴하고 도덕이 실추되어 인심이 순수하지를 못하니 참소와 간사함이 들끓고 서로를 위급한 데에 빠뜨리는 습성이 보편화되었다. 나는 이것을 민망하게 여긴다.
요사이 불량한 자들이 국가의 이해를 빙자하기도 하고 자신의 애증(愛憎)을 가지고 말을 만들어 왕래하면서 아부하는 계제와 벼슬길에 나가는 지름길을 만드는 한편 우리 임금과 신하 사이를 이간하고 우리 종실과 장상을 모함하니, 이들이 국가에 말로 다할 수 없는 화근이 될 것이다. 여기까지 말을 하고보니 나는 사실 가슴이 아프다. 의정부는 백관을 거느리고 호령을 하여 과인의 정치를 돕도록 하고, 대간으로 하여금 나의 지극한 생각을 본받아 들은 대로 숨기지 말고 진달하게 하라. 아무리 종실과 공신이라고 하더라도 일이 종묘 사직에 관계되는 것이면 마땅히 법대로 적용하겠다는 것이 이미 맹세문에 실려 있으니 나는 감히 용서해 주지 않을 것이다. 종묘 사직을 위한 계획이 있는 자는 직접 와서 친히 고하거나 봉서(封書)로 올려서 언로를 넓히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대학연의》에서 후부인(后夫人)이 법으로 삼거나 귀감이 될만한 일을 가지고 중궁(中宮)과 세자 숙빈(淑嬪) 이하의 궁인들을 가르치고자 해서 《대학연의》의 제가지요(齊家之要)를 써서 올리게 하였다.
○ 상이 인재가 옛날과 같지 않은 것을 한탄하였다. 진작시키고자 하는 뜻에서 성균관에 전지(傳旨)를 내리기를,
"유생들이 읽고 있는 경서(經書)를 적어서 올리도록 하라. 내가 유생들을 광연루(廣延樓) 아래로 오게 한 다음 문신으로 하여금 자세히 강론해 보도록 하겠다."
하고, 또 이직(李稷)촹조박(趙璞)촹유관(柳觀)촹이첨(李詹)에게 명하여 성균관에 가서 유생을 가르치게 하였다.
4권 태종조 2
10년(경인, 1410)
○ 사헌부 장령 곽덕연(郭德淵)을 불러 이르기를,
"민가의 노비로 본궁에 투속한 자가 있었다. 내가 듣건대, 그의 주인이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도 감히 말을 못하고 있다고 하니 그대들이 분명하게 판가름해서 투속하는 자들을 모두 금지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 여름. 가뭄이 들었다. 복사(卜師)에게 명하여 비올 시기를 점쳐보게 하고 서운관(書雲觀)에 명하여 기후를 살펴보게 하였다. 상이 술을 올리지 못하게 하고 밤새도록 잠자리에 들지도 않은 채 친히 기후를 살폈다. 근신에게 이르기를,
"산이 무너지고 물이 치솟는 것을 점서에서는 다 잘못이 임금에게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개의치 않는다. 매번 수해나 한재를 당하면 단지 백성들이 그 재해를 받는 것을 염려하였다."
하고, 드디어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 좌정승 성석린(成石璘)이 사직하기를,
"음양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여 수해와 가뭄이 계속 발생하는 것은 모두 늙은 신이 섭리(燮理)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현인을 방해하고 나라를 병들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해와 한재가 발생하는 것은 실지로 나의 부덕한 소치이다. 전에 하륜이 정승이 되어 법령을 개정하였는데, 당시에 수재와 한재가 발생하자 사람들이 그를 지적하여 비난하였다. 그 후에 조준(趙浚), 김사형(金士衡),
하였다.
○ 상이 백관을 거느리고 문소전에 나아가 담제(?祭)를 지내고 환궁하였다. 의정부가 백관을 거느리고 하례하기를 청하니, 상이 남은 슬픔이 가시지 않았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의정부가 아뢰기를,
"상을 마치고 나서 조하(朝賀)를 받는 것은 중대한 예이므로 폐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니, 끝내 허락하지 아니하고 제도에 명하여 전문(箋文)을 올려 축하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종친과 정부와 공신이 축수를 올리니, 상이 모후(母后)가 먼저 서거하신 것을 가슴 아파하였다. 대신과 더불어 모후를 부묘(?廟)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할 때에도 눈물을 흘리면서 슬픔을 감추지 못하였다.
○ 겨울. 풍해도(?海道)에서 강무(講武)하고 강음현(江陰縣)에서 묵었다. 천둥 번개를 동반하여 우박이 내렸는데, 말 2필이 벼락을 맞았다. 상이 어선(御膳)을 철회하고 돌아오는 길에 목촌(木村)에 이르자, 날씨가 갰다. 상이 울면서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부덕하여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니, 하늘이 이런 변고를 내린 것이다."
하고, 이어서 손위(遜位)할 뜻을 보이니, 이숙번(李叔蕃)이 아뢰기를,
"부모가 자식에 대하여 항상 그 단점만 지적하듯이 하늘이 전하를 인애하시기 때문에 재이(災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 재변 때문에 정무를 보려 하지 않으신다면 나태한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마땅히 근면하고 유념하시어 하늘의 뜻에 답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 서북면 도순문사 박은(朴?)이 아뢰기를,
"의주(義州)의 백성들이 지난해 가뭄으로 인하여 생업을 잃었는데, 금년에 또 왕명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청컨대, 금년의 전조(田租)를 감면해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 문제(漢文帝)가 누차 전조를 감면하여 백성을 구제한 일이 있지만, 우리나라는 땅이 좁고 인구가 적어서 전조가 매우 적다. 그리고 군수(軍需)로 쓰기도 해야 하기 때문에 조세를 감면할 수 없다. 그러나 의주는 다른 군과 비교할 수가 없으니, 박은의 말을 따르도록 하라."
하였다.
○ 상이 이르기를,
"호포(戶布)를 걷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호조 판서 이응(李膺)이 아뢰기를,
"군수(軍需)를 마련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록 군수 때문이라 하더라도 까닭없이 백성에게 거두는 것은 그릇된 법이다. 《주례(周禮)》에 '집에 뽕나무와 삼을 심지 않는 자는 이포(里布)를 물게 한다.' 하였는데, 이는 농상(農桑)을 권장하려는 의도이다. 이렇게 한다면 거두는 것이 명목이 있고 백성도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11년(신묘, 1411)
○ 상이 이르기를,
"대언(代言)의 임무는 막중하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요순의 도가 아니면 감히 임금에게 진언하지 않는
하였다.
○ 경연에 거둥하여 《맹자》를 강론하였다. "임금을 섬기는 자가 있으니, 이 임금을 섬기는 것은 임금의 비위 맞추는 것을 추구하는 자이다."에 이르러 이르기를,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예이다. 그런데 '이 임금을 섬기는 것은 임금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다.'라고 한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니, 조말생(趙末生)이 대답하기를,
"신하는 임금에 대하여 선도(善道)를 개진하여 군주의 사심(邪心)을 막아 임금의 실책을 바로잡는 것이 직분인데, 한결같이 임금을 섬기는 것으로 마음을 먹어서 임금의 실책을 보고도 말하지 않는다면, 이는 아부하여 용납되고 비위를 맞추어 기쁘게 하려는 자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 상이 서북촹풍해 등도에 가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지신사 김여지(金汝知)를 책망하기를,
"그대는 어찌 말하지 않았는가? 옛날 왕안석(王安石)이 '하늘의 변고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 하였는데, 그대가 이것을 본받고자 해서인가? 지금 듣건대, 그곳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다고 하니, 속히 관리를 파견하여 구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 처음에 중국 태복 소경(太僕少卿) 축맹헌(祝孟獻)이 환국할 때, 이색(李穡)의 자손들이 하륜(河崙)과 권근(權近)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맹헌에게 부탁하여 중국에 비명을 구하였다. 이때에 맹헌이 국자 조교(國子助敎) 진련(陳璉)이 지은 비명을 통사(通事)에게 보내왔다. 그 글에 "공양군(恭讓君)이 즉위하자, 용사하는 자가 공(公)이 자기 편이 되지 않은 것을 꺼려하여 장단(長湍)으로 내쫓았다."는 말이 있었는데, 상이 이 글을 보고 좌우에 이르기를,
"진련이 어떻게 이색의 행적을 알고 이처럼 자세하게 서술하였단 말인가. 전에는 본국 사신이 복서(卜筮)로 인하여 흔단을 일으킨 자가 있었다. 통사가 어떻게 맹헌과 사통할 수 있었는지 그를 불러 문책하라."
하였다. 성석린이 이색의 자손들이 중국에 사적으로 내통한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간원이 또 이색의 아들 종선(種善)에게 죄줄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종선이 자기 어버이를 드러내고자 한 것이니 무슨 죄가 있는가."
하였다. 간원이 또 하륜과 권근의 죄를 청하기를,
"비명에 '용사자가 공이 자기 편이 되지 않은 것을 꺼려하였다.'는 말은 누구를 지적하여 말한 것이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비명에 '경오년 5월에 윤이(尹彛)와 이초(李初)를 중국에 보냈다고 무고하여 공 등 수십 인을 청주(淸州)에 잡아두고 준엄한 법을 적용해서 죄를 꾸며 내려던 차에 갑자기 큰비가 와서 관사가 함몰되고 문사관(問事官)은 나무 위로 올라가서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이것을 보고 청주의 부로(父老)들이 공의 충성심에 감복되었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윤이와 이초가 중국에 호소한 것이 이미 분명한 증거가 있는데, 무고한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준엄한 법을 적용해서 죄를 꾸며 내려 했다.'는 말은 또 누구를 지칭하여 한 말이며, 수재가 난 것은 이색에게 과연 주공(周公)과 같은 덕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비명에 '임신년 7월에 우리 태상왕이 즉위하자, 공을 꺼려하던 자가 죄가 있다고 공을 무함하여 극형을 가하려 하였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생각하기에, 우리 태조께서 처음부터 개국할 의사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왕실에 충성을 다하려 하였는데, 이색이 그들의 무리들과 함께 태조를 몰아내려고 모의하였으니 그 화란을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어찌 죄가 없는데 극형을 가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른바 '공을 꺼려하는 자가 죄가 있다고 공을 무함하여 극형을 가하려 하였다.'는 말은 누구를 지칭한 것이겠습니까.
하였다. 하륜이 네 번 글을 올려 스스로를 변명하기를,
"이른바 공을 꺼려한 자란 남은과 정도전을 지목하여 말한 것입니다. 용사한 일과 음모를 꾸민 일이 다 태조의 명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이종학(李種學)을 의살(縊殺)하고 이숭인(李崇仁) 등 6~7인을 장살(杖殺)한 일을 태조가 어찌 알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숭인과 이종학의 죽음에 대해서는 내가 알지 못했던 일이다. 태조께서 강명(剛明)함으로 창업하던 초기에 이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하고, 즉시 헌사(憲司)에게 명하여 사실을 다시 조사해서 보고하게 하였더니, 과연 교서사(敎書使) 손흥종(孫興宗)과 체복사(體覆使) 황거정(黃居正)이 정도전과 남은의 지시를 받았다. 손흥종은 이종학에게 장형을 가해 죽지 않자 목을 졸라 죽였고, 황거정도 이숭인의 허리에 장형을 가하여 죽지 않자 말 위에다 가로로 싣고 이웃 고을로 실어보내 죽게 하였다. 황거정과 손흥종을 순금사(巡禁司)의 옥에다 가두도록 명하고, 의정부, 육조, 대간에게 이르기를,
"황거정과 손흥종이 권신의 뜻을 바라고서 이숭인과 이종학을 잘못 죽인 것이니, 하륜과 권근이 말한 용사자는 태조를 지칭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하였다. 순금사가 '출입인죄(出入人罪)'로 적용하니, 상이 이르기를,
"손흥종과 황거정은 태조의 명을 따르지 않고 권신의 사주를 받아 죄 없는 자를 함부로 죽여서 태조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을 더럽혔다. 이는 신하가 있는 줄만 알고 임금이 있는 줄은 모른 행위이니 당연히 중벌을 내려야 한다."
하였다. 옥관이 다시 '모살인죄(謀殺人罪)'로 적용하여 아뢰기를,
"주모자는 참형에 처하고 추종자는 교수형에 처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역시 수긍하지 아니하고 의정부에 내렸다. 의정부가 아뢰기를,
"황거정과 손흥종은 사실 정도전과 남은의 계획을 따른 것이며 이종학과 이숭인은 모두 고려의 잔당입니다. 정도전 등은 우리 사직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지 어찌 다른 마음이 있어서 그랬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말은 잘못되었다. 임신년 7월에 대업(大業)이 이미 정해졌는데 어찌 피차의 당이 있겠는가."
하였다. 공신 조영무(趙英茂), 한상경(韓尙敬), 정탁(鄭擢)이 상서한 것도 정부에서 올린 내용과 같았다. 상이 이르기를,
"정도전과 남은이 사적인 원한을 가지고 사신을 은밀히 사주하여 죄 없는 자를 잘못 죽였다. 내가 이숭인과 이종학을 위하여 복수하려는 것이 아니고 천하 만세를 위한 계책을 세우려는 것이다. 태조는 강명한 임금이셨다. 그런데도 오히려 이러한 신하가 있었는데, 후세에 혹시라도 용렬한 임금과 나약한 임금이 나오게 되면 신하가 이것을 본받아서 장차 못 하는 짓이 없을 것이다. 내가 춘추법(春秋法)으로 정도전과 남은에게 죄를 주고 그 법을 후세에 전하여 난리의 싹을 막고자 하는데, 형법을 담당하고 있는 자가 '법률에 임금을 속인 것에 대한 조항이 없다.' 하였다. 그래서 정부에 내려서 의논하게 한 것은 공론을 듣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경들이 어찌 갑자기 이렇게 청하는가?"
하고, 이에 정도전촹손흥종촹황거정을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자손은 금고(禁錮)시키게 하였으며, 남은은 개국한 공이 높다 하여 논죄하지 말게 하였다.
대간이, 성석린(成石璘) 등이 법률을 잘못 적용하였다고 탄핵하였으나, 상이 모두 관직에 나오도록 명하였다. 성석린 등이 상언하기를,
"정부는 백관의 우두머리인데 지금 대간의 논핵을 받았으니 다시 도당(都堂)에 나갈 면목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고, 김여지(金汝知)에게 이르기를,
"정도전이 흉포한 마음을 품고 은밀히 손흥종 등을 사주하여 죄 없는 자를 죽였다. 이숭인은 재주가 있었으니 진실로 꺼리는 대상이었지만 이종학이야 무슨 이유였는가? 이 두 사람의 죄가 죽어야 할 죄였다면 당연히 정당한 명분으로 주벌을 가해야 했다. 본래 죽을 죄에 해당하지도 않는데 감히 함부로 죽였으니 이는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이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그런데 대신이 종묘 사직에 관계되지 않는다고 하니 무슨 말인가? 조영무는 솔직하고 꾸밈이 적은 사람이니 책망할 것이 없다. 한상경과 정탁은 선비라고 하면서 역시 죄를 감해주도록 청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였다.
○ 고려가 덕적(德積)촹백악(白岳)촹송악(松岳)촹목멱(木覓) 등처에 봄가을로 환시 및 무당으로 하여금 여악(女樂)을 베풀고 제사를 지내게 하고서 '기은(祈恩)'이라고 하였다. 이때 이르러 상이 이르기를,
"신(神)은 예가 아닌 것을 흠향하지 않는다."
하고, 예관으로 하여금 고전(古典)을 널리 상고하여 혁파하게 하고, 조관을 보내 향을 받들고 가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병조가 또 중방(重房)의 구례(舊例)에 따라 매년 축수재(祝壽齋)를 설치해 왔다. 상이 이르기를,
"수요(壽夭)는 운수에 달려 있는데,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모두 혁파하게 하였다.
○ 상이 친히 태실(太室)에 강신제(降神祭)를 지냈다. 근신에게 이르기를,
"이번에 행한 향사에서 집사를 담당한 신하들이 각각 정성을 다하여 예의를 흐트러뜨리지 않았으니 나는 매우 기쁘다."
하였다. 전에는 친향(親享)한 후에 으레 재궁에서 향관(享官)을 제배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상이 이르기를,
"종묘에 친향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다. 그런데 향관을 제배하게 되면 후세에 법이 될까 염려된다."
하고, 드디어 중지하였다. 그리고 종헌관 하륜에게는 안마(鞍馬)를 하사하고, 봉조관 김승주(金承?), 찬례 안성(安省), 집례 허조(許稠) 및 여러 대언(代言)에게 각각 구마(廐馬) 1필씩을 하사하였다. 종실과 대신을 불러 광연루(廣延樓)에 음복연(飮福宴)의 자리를 마련하여 즐거움을 만끽하고 파하였다.
○ 상이 의정부와 육조에 이르기를,
"지금 국가에 별다른 일이 없는데도 내가 추운 겨울에 매일 조회를 보면서 번거롭게 경들을 일찍 조회에 나오게 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경들과 함께 태만함이 없이 근면하여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보살피는 도리를 다하고자 해서이다."
하니, 한상덕이 대답하기를,
"정사에 부지런한 것은 제왕의 미덕(美德)이며, 편안함에 맛을 들이는 것은 옛사람이 경계한 일입니다. 비록 일이 없더라도 매일 조회를 보시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법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였다.
○ 장령 이방(李倣)이, 지의정부사 박경(朴經)이 황거정(黃居正)과 손흥종(孫興宗)의 죄를 잘못 논의하면서 '몽롱(朦朧)하게 계문하였다.'고 탄핵하니, 의정부가 청하기를,
"몽롱하다는 말은 흰 것을 검다고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들이 이것을 보건대, 의정부 전체가 놀라고 있습니다. 원컨대, 이방을 유사에게 내려서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 말을 따라서 이방을 순금사의 옥에 내렸다. 이윽고 김여지에게 이르기를,
"이방의 일이 꼭 그른 것만은 아니지만, 내가 대신을 존중하는 까닭에 부득이 따른 것이다. 전에는 대신의 말을 듣고 간신(諫臣)을 옥에 가둔 적이 없었는데, 나도 이제 늙었다. 이런 것을 후사(後嗣)에게 보여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고, 드디어 용서해 주었다.
○ 겨울. 천둥이 일고, 목가(木稼)가 피었다. 상이 이르기를,
하고, 예조 참의 이지강(李之剛) 등을 제도에 나누어 파견하여 백성들의 고충을 묻게 하고 원옥(?獄)을 심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르기를,
"서울에 있는 형법을 담당하고 있는 관리가 한 사람이 아닌데도 오히려 잘못 판결을 내리는 경우가 있는데 더구나 주군(州郡)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옛날 조대림(趙大臨)의 옥사 때, 옥관이 조대림은 다그치고 목인해(睦仁海)는 봐준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황희(黃喜)를 파견하여 심문을 감독하게 해서 과연 그 실정을 캐내어 목인해를 처형한 일이 있었다. 만일 이때 다시 심문하지 않았더라면 필시 잘못 처단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후로 더욱 옥송(獄訟) 문제는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하였다. 이지강 등이 떠나기 앞서 하직하니, 상이 이르기를,
"재위한 지 10여 년 동안 천재 지변이 없는 해가 없었으므로 나는 매번 깊은 반성을 하고 있다. 그러나 백성들의 고통을 어찌 환히 다 알겠는가. 그대들이 가서 내 말을 잊지 말고 잘하도록 하라."
하였다.
○ 상이 대언(代言) 등에게 이르기를,
"《대학연의》는, 서산 진씨(西山眞氏 진덕수(眞德秀))가 고금의 격언을 모아서 만든 책이다. 내가 매번 읽어보니, 덕형(德刑)에 관한 선후의 구분과 전리(田里)에 대한 휴척의 실상이 더욱 요긴한 것이었다."
하고, 우부대언 한상덕(韓尙德)에게 명하여 전벽(殿壁)에다 크게 써 두게 하고 신하들로 하여금 보도록 하였다.
○ 상이,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 이후로 외척이 용사한 폐단을 논하기를,
"외척으로 하여금 궁중에 적(籍)을 두게 하고 그 출입을 막지 않는 것은, 임금으로서 장구하게 이어갈 수 있는 계책이 아니다. 마땅히 싹트기 전에 단속을 하여야 한다."
하고, 또 좌우에게 이르기를,
"의식(衣食)은 백성들이 중하게 여기는 것이므로 어느 하나도 폐지해서는 안 된다. 옛날에도 후부인(后夫人)이 친잠(親蠶)하는 예가 있었으니 지금부터 궁중으로 삼[麻?]을 들여오게 해서 길쌈을 대비하게 하라."
하였다.
○ 예조가 원회악장(元會樂章)의 차례를 올리면서 몽금척(夢金尺)과 수보록
(受寶?)을 첫머리를 삼았다. 상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몽금척과 수보록은 꿈얘기와 도참설인데 어찌 악장의 첫머리가 되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우부대언 조말생이 아뢰기를,
"기린(麒麟)이 태어나는 것도 개나 양과 다르며, 신인(神人)이 태어나는 것도 보통 사람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후직(后稷)이 태어난 것을 찬미하는 자는, '상제의 발자국을 밟고 느낌을 받았다.' 하고, 설(契)이 태어난 것을 찬미하는 자는, '하늘이 현조(玄鳥)에게 명하여 내려와서 상(商)을 낳게 하셨다.' 하였습니다. 수보록과 몽금척은 사실 태조가 천명을 받은 명부(命符)인 것이니 악장(樂章)의 첫머리로 삼아도 불가한 일이 아닙니다."
하고, 영의정부사 하륜도 아뢰기를,
"보록에 관한 말은 신도 들은 적이 있는데, 개국하기 이전에 승려가 얻은 것이라고 하니, 허망한 말이라고만 할 수 없습니다. 공자가 비록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는 않았으나, 촉인(蜀人) 동오경(董五經)의 말을 선유가 역시 말을 하였고, 청청천리초(靑靑千里草)는 동탁(董卓)을 지칭한 것인데 주자(朱子)가 감흥시(感興詩)에 붙였으니, 참설(讖說)을 옛사람이 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로부터 제왕이 흥기하는 문제는 천명과 인심에 달려 있었다. 어찌 부명(符命) 도참(圖讖)을 논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 근천정(覲天庭)과 수명명(受明命)의 곡을 악장의 첫머리로 삼았다. 상이 또 대언(代言) 등에게 이르기
"도참설(圖讖說)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지금 보록(寶?)에 관한 말도 나는 믿지 않는다. 첫째. '삼전삼읍(三奠三邑)이 응당 삼한(三韓)을 멸할 것이다.' 하였는데, 사람들이 삼전(三奠)을 정도전(鄭道傳), 정총(鄭摠), 정희계(鄭熙啓)라고 하였다. 그러나 정희계는 재주나 덕망도 없고 공로도 없다. 이런 자가 과연 시기에 맞추어 나온 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둘째. '목자장군검(木子將軍劒), 주초대부필(走肖大夫筆), 비의군자지(非衣君子智), 부정삼한격(復正三韓格)'이라고 하였는데, 사람들이 비의(非衣)를 배극렴(裵克廉)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배극렴이 정승이 된 지도 오래되지 않았고 정치를 보좌한 이렇다할 공도 없었다. 이 역시 시기에 맞추어 나온 자라 할 수 있겠는가. 지금부터는 악부(樂府)에서 이 곡(曲)을 삭제하라."
하였다. 하륜이 굳이 청하여 수보록을 제3곡으로 하였다. 하륜이 또 태조(太祖)를 위하여 가사(歌詞)를 지어 수보록을 대신하도록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하륜이 보동방(保東方)과 수정부(受貞符) 2편을 지어 올렸다. 상이 이르기를,
"수정부도 부참(符讖)에 속하는 말이니, 아무래도 불가한 듯하다. 정부와 육조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라."
하였다. 김여지가 하륜의 말로 아뢰기를,
"어떤 비기(?記)에 이르기를, '고려(高麗)가 송악(松嶽)에 도읍을 하면 480년을 가고, 조선(朝鮮)이 한양(漢陽)에 도읍을 하면 8천 년을 간다.'고 하였는데, 고려씨의 역년(歷年)을 따져보면 과연 그렇습니다. 이것으로 비추어 보면 비기의 말을 거짓이라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하고, 인하여 태조가 개국할 당시에 금척(金尺)을 받는 꿈과 보록(寶?)을 받는 특이함이 있었다고 말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날 강충(江充)이 무제(武帝)의 괴이한 꿈으로 인하여 죄 없는 사람을 죽였고, 왕망(王莽)과 공손술(公孫述)의 무리는 부참(符讖)을 지나치게 믿어서 백성도 자신도 앙화(殃禍)를 입었으니, 이것으로 비추어 보면 참설과 꿈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우리 태조가 대업을 개창한 것이 천명과 인심을 기초로 하였으니, 비록 금척과 보록의 특이한 징조가 없었더라도 창업을 하지 못했겠는가. 경들은 모두 유신(儒臣)인데, 어째서 논설하는 것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하니, 신하들이 머리를 숙이고 예예하고 대답만 할 뿐이었다. 뒤에 하륜이 또 아뢰기를,
"신이 전일에 올린 수정부(受貞符) 1편을 상께서 불가하다고 하셨는데, 신이 생각하기에 수보록이 비록 참기(讖記)에서 나온 것이지만, 사실 천명이 먼저 정해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니 여항(閭巷)에서 부르는 것을 금지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년(임진, 1412)
○ 고려(高麗) 장령 서견(徐甄)이 금천(衿川)에 거처하면서 시를 짓기를,
천년 신도는 한강에 닿아 있고/千載神都隔漢江
훌륭한 신하들 명왕을 보좌했네/忠良濟濟佐明王
삼한을 통일했던 그 공은 어디에 있나/統三爲一功安在
전조 왕업이 장구하지 못함을 한하노라/却恨前朝業不長
하였는데, 대신과 대간이 국문하여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고려의 신하가 자신이 섬기던 임금을 잊지 못하는 것은 인정상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우리 이씨(李氏)가 어찌 천지와 함께 영원할 수가 있겠는가. 혹시라도 이씨의 신하 중에 이런 자가 있다면 가상한 일이다. 그대로 두고 국문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뒤에 다시 굳이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였다.
○ 큰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상이 대신에게 이르기를,
"지금 큰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고문(古文)을 상고해 보니, 신하에게 문제가 있었다. 일전에 큰 돌이 무너졌을 때도 역시 신하에게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어찌 재변의 원인을 신하들에게 돌리고 스스로 반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미 실덕이 있는데 어찌 잘못을 인정하고 자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밤낮으로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이목을 가진 자라면 다 같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경들도 재변을 해소시킬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서 각자 최선을 다하라."
하였다.
○ 성석린(成石璘), 조영무(趙英茂), 이조 판서 이직(李稷), 병조 판서 황희(黃喜), 대사헌 유정현(柳庭顯), 사간 이륙(李?) 등을 편전으로 불러들여서 이르기를,
"근일에 큰바람이 부는 재변이 발생하였는데, 이 재변이 발생하게 된 원인을 알 수가 없다. 정사가 잘못되어서인가? 과인에게 황음(荒淫)으로 인한 허물이 있는 것인가? 옛사람이 황 자(荒字)를 해석하기를 '안으로는 여색에 빠지고 밖으로는 사냥에 빠진다.' 하였는데, 내가 안으로 빠졌는지는 경들이 알 수 없지만 밖으로 빠진 것이라면 다 함께 알 수 있다. 재변을 만난 후로 사적으로 생각하기에, 하늘의 뜻에 부합하지 못하여 이런 상황에 이른 것이라면 물러나서 깊이 반성하는 것만한 일이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정사를 보지 않은 지가 지금 며칠이 되었다.
정부와 대간은 재변이 발생하게 된 원인에 대하여 한마디라도 언급하여 과인을 질책하는 일이 없다. 경들이 감히 면전에서 말을 못 하겠거든 봉서(封書)로 올려도 좋다."
하였다. 성석린과 유정현이 아뢰기를,
"신들이 전하의 성덕에 흠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등용하는 문제를 가지고 말씀드리면, 신과 같은 자들이 인재가 부족하다 하여 중대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백관들 사이에 외람되게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자가 없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하고, 성석린과 이직이 또 아뢰기를,
"원컨대, 앞으로는 전주(銓注)할 즈음에 신들을 어전에 불러 모아 놓고 9품 이상부터 모두 친히 현부(賢否)를 물어서 제수하신다면 외람되게 자리를 차지하는 자가 그 사이에 용납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경들에게 전형(銓衡)을 맡겼는데, 어찌 꼭 경들과 함께 친히 반부(班簿)를 잡아야 하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부덕한 내가 대업을 이어받았기에 오직 상제에게 노여움을 살까 염려하였다. 일전에 세자에게 왕위(王位)를 물려주고 별궁으로 물러나 거처하면서 여생을 마칠까 했는데, 대소 신료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했다. 내가 비록 왕위를 사양하였으나 호령과 정사를 전부 어린 세자에게 맡기지 못하고 혹 참여하여 결정을 하였으니, 이는 전적으로 중책을 벗어버리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내가 일찍이 하늘에 고하기를, '내가 이 자리를 차지한 것은 내가 요구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상제께서 명하신 것이니 만약 나에게 죄가 있다면 어찌 나에게만 죄를 내리지 않습니까?' 한 적이 있다. 경들 역시 어찌 과인의 마음을 다 알 수 있겠는가."
하였다.
○ 성석린이 상께 아뢰기를,
"예로부터 재상이 되면 참소하는 말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지금은 참소하는 말이 들어오지 않으니 신들에게는 다행입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너무 늙어서 직책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하고, 이응(李膺)이 아뢰기를,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참소하는 말은 판단하기가 어렵다. 만약 직언을 참소하는 말로 여긴다면 그 잘못은 클 것이다. 진서산(眞西山)이 《대학연의》에서 여희(驪姬)를 참소의 으뜸으로 삼았는데, 나는 이 말이 매우 적절하다고 여긴다."
하였다.
13년(계사, 1413)
○ 해주(海州)에서 강무(講武)를 하고 평주(平州)에서 묵었다. 전날 밤에 계림군(鷄林君) 이승상(李升商)의 부고가 왔었는데, 조영무와 김여지가 짐승몰이에 대한 명이 이미 내려졌다는 이유로 알리지 않았다. 상이 이 소식을 듣고 김여지를 꾸짖기를,
"그대들이 일찍이 《춘추》를 읽었으면서 대신이 졸한 것을 어찌 바로 알리지 않았는가?"
하였다. 이윽고 예조의 장문(狀聞)이 이르자, 3일 동안 조회를 철회하고 육선을 금하도록 명하였다. 다음날 해주에 묵었다. 김여지가 아뢰기를,
"서릿바람이 차가운 들녘에서 여러 날 동안 소선(素膳)만 드시는 것은 아무래도 바람직하지 않은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식은 아비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고 아비도 자식을 위하여 복을 입는다. 신하도 임금을 위하여 삼년복을 입는데, 임금이 신하를 위하여 어찌 유독 은정이 없겠는가."
하였다.
○ 상이 대언 한상덕(韓尙德)에게 이르기를,
"형방(刑房)의 책임이 막중하니 경은 신중을 기하라."
하니,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하늘을 대신하여 사물을 다스리고 계시니 상주는 것과 벌주는 것에 조금이라도 착오가 없어야 합니다. 신 역시 밤낮으로 공경하고 삼가 한 사람이라도 죄가 없는데 벌을 받게 해서, 전하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에 누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만일 잘못 처단하면 경은 숨김없이 직언하도록 하라."
하였다.
○ 상이 예빈시가 묵은쌀로 못 속에 고기를 기른다는 말을 듣고 불러서 물으니, 대답하기를, "매월 10말이 소비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쌀이 비록 썩었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채소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데도 구제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찌 고기를 기른단 말인가. 그 일을 그만두도록 하라."
하였다.
○ 상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예로부터 수재나 한재는 다 임금이 부덕해서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중과 무당을 불러모아 비를 비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내 생각에는 기도를 그만두고 인사(人事)를 닦는 것이 옳을 듯하다. 내가 성인의 글을 대강 읽어서 중과 무당이 망녕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 도리어 좌도(左道)를 빙자하여 하늘이 은택을 내려주기를 바라는 것이 가한 일인가."
하니, 김여지가 아뢰기를,
"비록 옛날 성왕(聖王)의 정도(正道)는 아닙니다만 신명이 흠향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는 것도 고사(古事)입니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가뭄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비가 오는 법이다. 그런데 만일 비가 오면 사람들은 필시 부처의 위력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음부터는 경들이 부처를 꾸짖을 수 없을 것이다."
하니, 김여지가 아뢰기를,
"상께서 정도에 입각하여 물으시니 신도 마땅히 정도에 입각하여 대답하겠습니다. 인사를 닦고 기도를 그만두라는 논의는 옛날 임금들보다 월등한 면이 있습니다."
하였다.
○ 고려의 종실 왕휴(王?)에게 얼자(孼子) 한 사람이 있는데, 현재 민간에 있다고 하였다. 지신사 김여지가 보고하여 정부, 형조, 대간으로 하여금 순금사와 함께 조사하게 하였더니, 과연 사실이었다. 상이 이르기를,
"태조가 개국하던 초기에 고려의 종성(宗姓)은 목숨을 보전할 수 없었다. 이는 태조의 본뜻이 아니고 한두 대신의 정책이었다. 내가 그 후손들을 보전해 주고자 하는 뜻을 이미 결정하였다."
하였다. 옥천군(玉川君) 유창(劉敞)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오늘 하신 말씀은 실로 우리 종묘 사직의 만세에 미칠 복입니다."
하고, 이조 판서 한상경이 아뢰기를,
"개국 초기에 신이 지신사가 되어 이 일에 대해 들었습니다만 사실 태조의 본뜻이 아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사편(史編)을 상고해 보았지만 예로부터 역성(易姓)하여 천명을 부여받은 자들이 혹 그 후손을 봉(封)하여 새로운 국가와 함께 공존하게 하였고, 혹은 작명(爵命)을 더하여 훌륭한 자의 정려를 세워 주었지 그 자손들을 남김없이 제거해버린 적은 없었다. 이 옥사는 이미 오래되었다. 정부의 대신들은 어찌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가?"
하였다. 형조와 대간이 왕휴의 자식을 주벌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로부터 제왕은 한 가지 성(姓)만이 아니었다. 천지와 더불어 시종을 함께하면서 모두 조부가 덕을 쌓아놓음으로 말미암아 흥기하였다가 그 자손들에 이르러 덕을 멸함으로써 망하였다. 만약 이씨가 도가 있다면 비록 100명의 왕씨가 있더라도 무슨 걱정이 있겠으며, 그렇지 않다면 왕씨가 아니라도 천명을 받아 대신 흥기할 자가 없겠는가."
하고, 드디어 정부에 명하기를,
"앞으로는 왕씨의 후예가 스스로 나타나거나 남의 고발을 받은 자의 경우 편한 곳에서 거주하게 하여 그 생업에 안정을 찾게 하라."
하였다.
○ 겨울철의 날씨가 봄날처럼 따뜻하였다. 상이 정부와 육조를 불러 이르기를,
"하늘의 변고가 여기에 이른 것은 실로 나의 잘못이다. 그 원인을 조용히 생각해 보니, 임금의 허물은 음악과 여색을 가까이하고 재물의 이익을 증식시키며, 술과 음악을 좋아하고 집을 크게 짓거나 담장을 꾸미는 것에 불과하다. 명성이 있으면 반드시 밖으로 들리기 마련인데 나는 실지로 그런 일이 없다. 지금 대신을 보아도 모두 성실하여 오만스러운 자가 없다. 그런데 나는 실지로 우매하여 재변이 발생하게 된 원인을 알 수가 없다. 하늘이 경계를 보인 것이 비록 내가 과덕한 데에서 비롯되었지만 모든 관서들도 천공(天工)을 대신하여야 하니, 경들은 각자 맡은 직분에 신중을 기하도록 하라."
하였다. 유정현이 아뢰기를,
"하늘의 경계에 신중을 기하는 태도는 최선을 다하는 데에 있습니다. 원컨대, 날마다 신중을 기하셔서 친히 정무를 재결하소서."
하니, 상이 드디어 조관(朝官)을 제도(諸道)에 나누어 보내어 백성들의 고통을 묻게 하였다.
14년(갑오, 1414)
○ 처음으로 돈녕부(敦寧府)를 설치하여, 종친 중에 태조의 후손이 아니어서 군(君)에 봉해지지 못한 자 및 외척의 여러 성씨를 처리하게 하였다. 의논하는 자가 "직무에 관계된 일이 없이 사람을 위하여 벼슬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고례(古禮)가 아니다."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친척이 정말로 다 훌륭한가. 이는 재능에 따라 임용하는 것이 가하다. 정말로 훌륭하지 않은데 임용하였다가 혹시라도 죄에 빠지게 되었을 경우 사면을 하면 법을 폐하게 되고 논죄를 하면 은혜를 상하게 된다. 내가 이 벼슬을 설치하는 것은 친한 이를 친히 하면서 법을 폐하거나 은혜를 상하게 하는 상황에 이르지 않게 하고자 해서이다."
하였다.
○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상이 그의 집으로 가서 증세를 살펴보고자 해서 의장대까지 채비하게 하였다가 졸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 두었다. 심히 애도하는 뜻에서 소선(素膳)을 들었으며 3일 동안 철조(輟朝)토록 하고서, 하륜에게 묻기를,
"대신이 졸하였는데, 3일 동안 철조하는 것이 아무래도 박하지 않은가? 내가 생각하기에 곽광(藿光)과 위징(魏徵)이 졸하였을 당시에 모두 5일 동안 철조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경은 이 일에 대하여 아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대신을 중시하시는 뜻이 비록 지극하다 하겠습니다만, 만약 5일까지 간다면 군국(軍國)에 관한 막중한 일들이 반드시 적체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대언 한상덕에게 명하여 치제(致祭)하게 하고, 또 친히 그 빈소에 임하여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내렸다.
○ 감로(甘露)가 영길도(永吉道) 함주(咸州)와 정주(定州)에 내렸다. 영의정부사 하륜 등이 장차 백관을 거느리고 가서 전문(箋文)을 올려 하례를 올리려고 하자, 상이 듣고 예관을 불러 전지(傳旨)를 내리기를,
"여름철의 가뭄을 당하여 분주히 기도하기에 겨를이 없으니, 비록 감로가 내렸다고 하더라도 상서라고 하기에는 만족스럽지 않다. 그리고 근년의 일로 말하자면, 건문(建文)의 말엽에 추우(騶虞)가 출현하였고, 이번에는 황제가 100만의 대중을 이끌고 불모지에 깊이 들어가자, 기린이 나타났다. 지금 감로가 함주와 정주 사이에 내렸으니 마땅히 한 지방의 안정을 이룰 수 있을 것이지만 현재 야인의 경보가 있으니 속히 중외로 하여금 하례하지 말게 하라."
하니, 하륜이 다시 아뢰기를,
"이는 실로 세상에 드문 상서입니다. 예를 폐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굳이 허락하지 않고서 이르기를,
"기후가 알맞아서 백곡이 모두 풍년이 들면 이것이 바로 상서인 것이다. 감로가 내린 적은 옛날에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다 정치가 잘된 세상은 아니었다."
하니, 다음날 하륜 등이 3품 이상 문무의 관원을 데리고 전정(殿庭)에 들어가서 청하기를,
"하늘이 아름다운 상서를 주셨는데 전하께서 겸양하시고 받지 않으시니 그 덕이 지극히 성대합니다. 그러나 신들이 하례하고자 하는 심정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끝내 받지 않았다.
○ 하교하기를,
"농사는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근본이 되기 때문에 정치를 할 때에 마땅히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은 군국(軍國)의 수요와 백성의 생활이 실로 여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주례(周禮)》에 '도인(稻人)이 제방을 쌓아서 물을 막고 도랑을 내어서 물을 흘려보낸다.'라고 한 것은, 물의 이로움을 가지고 백성들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밤낮으로 염려하고 있는데도 매번 수재와 한재를 당하니, 두려운 마음이 더욱 가중된다. 일찍이 제방에 관한 일을 영갑(令甲)에 실어서 중외에 반포한 적이 있다. 그런데 유사는 문구(文具)로만 보고 효
지금 전 인녕부윤(仁寧府尹) 이은(李殷), 전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 우희열(禹希烈), 전 도관찰사 한옹(韓雍) 등을 파견하여 군현을 순회하면서 그 지형을 보아 물을 가두어 두거나 물을 끌어가는 방법을 다하여서 가뭄과 장마에 대한 대비를 하게 하고, 이어서 농작물을 심고 가꾸는 시기의 이르고 늦는 절차에 대하여 유시하라. 반드시 일은 간략하면서도 공은 배가 되도록 하되, 폐단을 제거하고 이로운 것은 장려하여 길이 백성의 생업을 도움으로써 더욱 국가의 기반을 융성하게 하라. 그리하여 내가 백성을 소중하게 여기는 뜻에 부응토록 하라."
하였다.
15년(을미, 1415)
○ 감로가 또 함주(咸州)에 내렸다. 신하들이 하례를 올리려고 하자, 상이 받지 않고서 이르기를,
"최근에 바닷물이 넘치고 큰 돌이 옮겨간 변고 역시 큰 것이다. 어찌 하례를 받을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 평안도와 풍해도의 백성으로서 봄부터 가을까지 경기(京畿)에 머무르면서 새사냥을 하여 어선(御膳)을 제공하는 자를 세속에서 이언(伊彦)이라고 한다. 이때에 이르러 상이 이르기를,
"임금이 되어 가지고 자신 한 사람을 봉양하자고 백성을 부려 스스로를 받들게 하는 것은 매우 터무니없는 일이다."
하고, 속히 혁파해서 군역(軍役)에 종사케 하라고 명하였다.
○ 상이 이르기를,
"전일에 내가 삼십세일법(三十稅一法)을 실시하고자 했더니 예조 판서 정역(鄭易)이 불가하다고 했다. 이것은 옛날 성왕(聖王)이 남기신 법이며 중국의 좋은 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역이 달갑지 않게 여기니, 이 일로 인하여 재상은 모름지기 글을 읽은 사람을 등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였다.
○ 상이, 해주(海州) 강무장(講武場)의 토지가 비옥하여 경작할 만하다는 이유로 백성들에게 농사를 짓도록 허락하고서 이르기를,
"짐승이나 살게 하는 것보다는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경작하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 이조 판서 박은(朴?)이 상언하여, 옛법을 변경하지 말기를 청하니, 상이 근신에게 이르기를,
"박은의 말이 참으로 옳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백성을 다스리되 마치 엉킨 실을 풀듯이 해야 한다.' 하였으니, 마땅히 나의 뜻을 체득하여 새법을 제정하지 말고 다만 조용히 지키도록 하라."
하였다.
○ 상이 편전에서 정사를 보았다. 말이 재이에 미치자, 탄식하기를,
"최근에 재이가 거듭 발생하는 것을 보고 정사를 잘해 보고자 했다. 그러나 어떤 일을 시행해야 하고 어떤 일을 중지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매번 진지한 논의를 널리 구하여 마음을 단단히 먹고 시행하고 싶어도 창언(昌言)과 당론(?論)이 들리지 않는다. 어선을 줄이고 풍악을 거두는 것은 말단적인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마음이 졸이어 하지 않을 수도 없다."
하고, 다시 탄식하기를,
"한 해 동안 가뭄이 들어서 벼는 이미 말라버렸고, 어제는 큰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곡식이 피해를 입었다.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적체되어 이와 같은 여러 재이가 발생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일찍이 문을 닫고 조용히 생각해 보고 심한 자책을 하였던 것은, 즉위한 이후에 공덕으로 백성들에게 복을 주지 못한 점 때문이다. 정사를 도모하는 대신들이 서로 갈리고 있고, 나도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으므로 세자에게 전위하고자 하
하면서,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니, 이숙번과 박은 등이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우러러보지 못하고 아뢰기를,
"전하께서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우려하시니 그 정성이 하늘과 땅에 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방이 안정을 되찾고 백성들은 생업에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한재(旱災)는 성탕(成湯)도 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에 상이 가뭄을 걱정하여 하루에 한끼씩 수라를 들었고 한낮에 노천에 나가 앉았던 적이 있었던 관계로 병환을 얻었다가 오랜 시일이 지난 다음에야 정상을 되찾았다.
○ 상이 호조 판서 윤향(尹向)에게 이르기를,
"금년에는 경기 지역의 가뭄이 심하니 경원창(慶原倉)의 쌀 5천 석을 운반해다가 구제하도록 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듣건대, 상의원에서 한 달에 다리미숯으로 으레 8석이 든다고 한다. 이것 역시 백성들에게서 나온 것이니 어찌 함부로 낭비할 수 있겠는가. 반으로 줄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경기 지역의 백성들이 겨울이면 신탄(薪炭) 때문에 시달리고 여름이면 마추(馬芻) 때문에 시달리고 있다. 내구마는 단지 40필만 보유하게 하라. 궁중의 비용을 이미 적당량을 줄이도록 하였으니 외지에서 제공하는 궁중의 일반적인 비용들도 적당량을 절감해서 그 혜택이 백성들에게 미치게 하라."
하였다.
○ 상이 백관을 거느리고 문소전(文昭殿)에 나아가 추석제(秋夕祭)를 행하였다. 보신(輔臣)에게 이르기를,
"근자에 예관이 원묘(原廟)에서 실시할 친향의(親享儀)를 종묘에서 실시하던 대로 할 것을 청하였기 때문에 오늘 새벽에 이미 이 예에 의거하여 실시하였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종묘의 경우는 신도(神道)를 가지고 섬기기 때문에 예가 극히 엄숙하고 매번 행사할 때를 당하면 전전긍긍한다. 그와 반대로 문소전(文昭殿)의 경우는 전적으로 살아 생전을 연상해서 완연한 모습과 흐뭇한 정회를 가지고 마치 슬하에서 직접 뵙던 때와 같은 분위기이다. 그런데 문을 드나들 때에 배읍(拜揖)하는 절차가 없는 것은 온당치 않다. 이것이 어찌 죽은 이 섬기기를 산 사람을 섬기듯이 하는 도리이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전조의 임금은 즉위한 이후에 종묘에 친히 제사를 지낸 것이 한두 번에 불과했기 때문에 반드시 성대한 예를 갖추었지만, 나는 상사(常事)로 보고서 제삿날이 되면 측근에 있는 신하들을 데리고 사잇길을 따라 가고 싶다. 그리고 백관(百官)들의 배제(陪祭)는 보통 때의 의식과 같이 하라."
하였다.
○ 상이 대신에게 이르기를,
"딸 하나가 있는데 나이가 아직 어리다. 그러나 국가에 별일이 없을 때에 시집보내고 싶어 4, 5품 이하의 사족(士族) 집안에서 이미 의랑(議郞) 남경문(南景文)의 아들을 택하였다. 대체로 부마로 삼는 자는 가난하고 천한 것을 문제 삼을 것이 없다. 문벌이 좋은 집안의 자손은 교만하고 사치하는 습성이 있을 경우 실패하지 않는 자가 드물다. 그래서 내가 관직이 낮은 자의 자손을 취하려 한 것이다.
이 아이가 비록 의정(議政)의 손자이기는 하나, 의정이 이미 늙었고 그의 아비도 일찍 세상을 뜬데다 홀어미 아래에서 자랐으니, 단정하고 교만하지 않았다. 내가 여러 사위들을 보건대, 처음 사위를 들여올 때에 평양백(平壤伯) 조준(趙浚)이 개국 원훈으로 국가의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처지라 하여 그의 아들 대림(大臨)을 사위로 삼았더니, 과연 목적(睦賊 목인해(睦仁海))의 꼬임으로 하마터면 제명에 죽지도 못할 뻔하였다. 이것은 경들도 함께 목격한 일이다. 그 당시에 이무(李茂)가 정승이 되어 기어이 신속하게 처리하려 한 바람에 하마터면 뒷날의 웃음거리가 될 뻔하였다.
청평군의 아비 이거이(李居易)도 대죄(大罪)에 연좌되었으나 자식 덕분에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었다. 아비에게 죄가 있는데 자식이 부마가 되어 있으면 일을 처리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지금 사족의 자손에
하였다.
○ 충녕대군(忠寧大君)에게 굶주림을 말하는 걸인이 있었다. 충녕이 이 일을 알리니, 상이 이르기를,
"중외의 굶주린 백성에 대하여 이미 유사로 하여금 구제하게 해서 굶주림에 이르는 일이 없도록 하였는데, 어찌 신중하게 봉행하지 못한 것이 이러한가. 충녕은 단지 내가 굶주림과 추위를 불쌍하게 여기는 것을 알고, 보고 들은 것이 있어서 언뜻 와서 고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알게 되었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미 주인이 있는 자로서 죽기 직전의 백성이 왕자(王子)를 만난 뒤에 먹을 것을 얻는다는 것은 계승할 방법이 아니다."
하고, 드디어 그 주인의 죄를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16년(병신, 1416)
○ 경기에 기근이 들자, 창고를 열어 구제하도록 명하고, 또 호조 참의 이명덕(李明德)에게 순찰하도록 명하였다. 달을 넘겨서 이명덕을 동부대언(同副代言)에 제수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는 근신이면서 이미 진제사(賑濟使)가 되었으니, 다른 사람으로 대신할 수도 없다. 그대는 마음을 다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길도(永吉道)에 기근이 들자, 도순문사 조흡(曺洽)이 창고를 열어 구제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구제해 준다는 것은 백성들의 다급함을 구제해 주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계문(啓聞)하여 명을 기다려 하게 되면 늦어서 일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는 그때그때 구제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그 뒤에 경기 지역의 기로(耆老) 수십 인이 궁문에 나와 진정(陳情)하기를,
"근년에 수재와 한재로 농부들이 생업을 잃고 말았는데 성상께서 창고를 열어 구제해 주셔서 기근을 면하였습니다."
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는데, 눈물이 말을 따라 흘렀다. 상이 그들을 위로하여 보냈다.
○ 가뭄 때문에 구언을 하였다. 편전(便殿)에 거둥하여 지신사 조말생(趙末生), 우대언 이백지(李伯持)를 인견하고 이르기를,
"내가 부덕한 탓으로 하늘의 노여움을 샀다. 가뭄에 의한 재이를 누차 보여서 경고하는데 밤낮으로 걱정을 해봐도 구제할 방안을 알 수가 없다. 하루도 편한 날이 없고 하룻밤도 편한 잠자리가 없다. 내가 임금이 되어 어찌 좋은 옷과 기름진 음식이나 요구하겠는가. 옷은 춥지 않을 정도가 되고 음식은 굶지 않을 정도가 되며 편한 잠자리에다 뜻을 펼 수 있는 정도가 되어 한평생을 지내는 자는 얼마나 복이 많으면 그럴까. 내가 한 이 말은 반드시 직접 경험해본 자라야 알 수가 있다."
하고, 또 좌우에게 이르기를,
"매번 수재나 한재를 당할 때마다 상하가 모두 억지로 수성(修省)을 하니,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죄가 가벼운 죄수를 염려하여 석방하는 것이 어찌 재이를 해소시키는 방법이겠는가. 진실로 한마음으로 계신공구해서 화기(和氣)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하였다.
○ 태안(泰安) 강무장(講武場)을 혁파해서 백성들에게 개간하여 경작하도록 명하고, 인하여 근신들과 함께 먼 곳에 가서 사냥하는 폐단에 대하여 극력 논의하고서 이르기를,
"현재 아래에 간사하거나 교활한 자가 없지만 만약 무식한 미치광이가 기회를 노려 도둑질을 하게 되면 예측할 수 없는 화가 발생할 것이다. 경기 이내에다 상설 강무소(講武所)를 다시 정해야 하겠다."
하고, 드디어 병조에 명하기를,
"강무를 폐지해서는 안 된다. 나라에 원유(苑?)가 없기 때문에 근래에는 부득이 먼 곳으로 갔었지만, 고전(古典)을 상고해 보니 역대로 강무하는 곳이 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경기 이내에다 세 곳을 정하도록 하라."
○ 상이,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하륜(河崙)을 함길도(咸吉道)에 보내 능침을 살피게 하면서, 동교(東郊)에 거둥하여 전송하였는데, 하륜이 돌아오다가 정평(定平)에 이르러 졸하였다. 부음(訃音)이 이르자, 상이 매우 슬퍼하여 눈물을 흘렸고 3일 동안 철조(輟朝)하였으며 7일 동안 소선(素膳)을 들었다. 서울 집으로 운구하여 빈소를 정하도록 명하고, 친림하여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하륜은 성품이 중후하여 평생 동안 서두르는 말과 갑작스런 얼굴빛을 보이지 않았으며, 재상이 되어서는 대체(大體)를 보존하도록 힘썼다. 상이 이르기를,
"진산(晉山)은 충직한 신하였다. 나는 그의 덕망과 의리를 존중하여 항상 빈사(賓師)로 대우해 왔다."
하였다.
○ 상이, 면성군(沔城君) 한규(韓珪)가 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조말생에게 이르기를,
"내가 진산의 부음을 듣고 눈물이 아직 마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면성이 또 졸하다니, 나의 지금 심정을 누가 알겠는가."
하고, 인하여 목이 메이도록 통곡하였다. 박은(朴?), 한상경(韓尙敬), 김승주(金承?), 연사종(延嗣宗) 등을 불러 이르기를,
"지난번 진산부원군의 부음이 이르렀을 때에 경제(經濟)의 대신을 잃었다는 이유로 슬픔을 가누지 못하였는데, 지금 또 충직한 신하를 잃었으니, 어찌해야 하겠는가. 세 공신(功臣)과 회맹할 당시에는 모두 60여 인 정도 되었는데, 지금 10여 년 만에 생존자가 30여 인에 불과하니, 삶과 죽음을 생각할 때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중월(仲月)에 갖는 공신의 모임은 이미 성문화된 법이 있다. 그런데 지금 공신 중에 생존한 자가 적으니 이미 죽은 공신의 적장자에게 관작을 초배해서 그들로 하여금 아비를 대신하여 모임에 참석하게 하고, 공신 중에 사정이 있어서 연회에 참석할 수 없는 자의 경우도 적장자를 대신 참석하게 하라. 이는 세자로 하여금 서로 보고 얼굴을 익히게 하려는 것이니 세경(世卿)에 비할 것이 아니다."
하였다.
17년(정유, 1417)
○ 상이 대언 이명덕(李明德)과 목진공(睦進恭)에게 각각 감귤 한 그릇씩을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경들에게 모두 노모(老母)가 계신 줄을 알고 있으므로 하사하는 것이다. 나는 매번 제릉(齊陵)에 영화롭게 봉양하는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고 있다."
하였다.
○ 5월. 서리가 내렸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왕위에 오른 이후로 매번 여름철에 서리가 내리고 수재와 한재가 고르지 못한 현상이 나타났다. 경사(經史)를 상고해 보니, '여름철에 서리가 내리는 것은 형벌을 실정에 맞지 않게 적용했기 때문이다.'고 한다. 앞으로는 마땅히 신중을 기할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전에 진산(晉山)이 수상(首相)이 되었을 때에 사람들이 재변은 모두 진산이 불러들인 것이라고 여겼다. 지금 진산이 이미 죽고 재상이 여러 번 바뀌었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은 것을 보면, 재상의 잘못이 아니라 모두 내가 부덕한 소치였다. 저사(儲嗣)가 재목감이 아니라서 전위(傳位)할 수도 없으니 이래서 마음이 아프다."
하였다.
○ 훈련관(訓鍊觀)이 청하기를,
"전토(田土)를 본관에 소속시켜 무사를 양성하기를 한결같이 성균관과 같이 하고, 아침저녁으로 병서(兵書)를 읽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 예조 판서 변계량(卞季良)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제도가 진상하는 어선을 그만두도록 명하시니, 그 겸손하고 삼가는 뜻이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임금의 한 몸에는 종묘 사직과 백성들의 운명이 달려 있으니, 봉양(奉養)과 조호(調護)에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윽고 경기도 관찰사 이관(李灌)이 노루를 진헌하니, 상이 받지 아니하고 책망하였다.
○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는 천자(天子)는 7개월, 제후(諸侯)는 5개월, 대부(大夫)는 3개월, 사(士)는 달을 넘겨서 장사를 지냈는데, 지금은 간혹 해를 넘기고도 장사를 지내지 않는 자가 있으니 이는 고제(古制)와 매우 어긋난다. 그리고 혹은 들에다 시신을 두고서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은 아무 아들과 아무 손자의 생일을 범한다고 하면서 자손들의 이해를 따지곤 하는데, 만일 자손들이 많은 자인 경우에는 2,3년이 되도록 장사를 지내지 못하는 자도 많다. 이러한 이속(俚俗)의 무지함을 변화시키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이조 판서 박신(朴信)이 아뢰기를,
"음양가(陰陽家)에 의해 제가(諸家)의 장서(葬書)가 모아진 것을 보고 이론(異論)이 벌떼처럼 일어나 백성들을 속이고 유혹합니다. 청컨대, 서운관으로 하여금 장서를 다 모아다가 그 대요(大要)만 간추리게 하고 기타 괴이한 글들은 모두 제거하게 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참위설(讖緯說)은 논의하는 자들이 모두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광무(漢光武)의 명석함으로도 오히려 도참설(圖讖說)에 현혹되었으니, 이것은 광무가 도에 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조(我朝)의 참서(讖書)에 언급된 '목자(木子)'니 '주초(走肖)'니 하는 말에 대하여, 정도전이 '이것은 일을 벌이기를 좋아한 자가 지어낸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이 글을 따라서 드디어 수보록(受寶?)이란 곡을 지어 올렸고 대신도 믿지 않은 자가 없었다. 내가 정안군(靖安君)으로 있을 당시에도 오히려 믿지 않았었는데 서울을 옮기던 날에 하륜이 이 글을 깊이 믿고서 모악(母岳)으로 도읍을 정하고자 하였지만 나만이 믿지 아니하고 한양(漢陽)에다 도읍을 정하였다. 만약 참서를 불태우지 않고 후세에 전하게 되면 사리를 밝게 보지 못하는 자가 반드시 깊이 현혹될 것이다. 종묘 사직의 화복과 장단을 어찌 이것을 가지고 알 수 있겠는가. 속히 불태워버려야만 종묘 사직에 반드시 훼손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하고, 좌의정 박은과 지신사 조말생에게 명하여 서운관에 가서 음양서(陰陽書) 중에 허탄하여 법으로 삼을 수 없는 것을 모두 불태우게 하였다.
○ 사헌부가 아뢰기를,
"하륜(河崙)이 졸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의 첩이 복중(服中)에 있는데, 도총제 이백온(李伯溫)이 억지로 첩(妾)을 삼고자 합니다. 청컨대, 그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잠자코 있었다. 정부와 육조가 일을 아뢰고 물러가니, 상이 근신에게 이르기를,
"백온은 나의 종곤제(從昆弟)인데 그의 소행이 나를 부끄럽게 해서 내가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이다. 진산(晉山)은 사직(社稷)의 원훈(元勳)인데 백온이 종실의 지친으로 감히 이런 짓을 하다니, 나는 기필고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 편전에서 정사를 보았다. 인하여 술자리를 마련하니, 보신(輔臣)이 일어나 하례하기를,
"전하께서 지성으로 사대(事大)를 하셔서 국가가 무사하고 변경도 편안하니 실로 신민의 복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정성을 다해 상국(上國)을 섬겨왔다. 여태까지는 이렇게 해왔지만 앞으로는 알 수 없다. 만약 조금이라
하였다.
○ 해룡산(海龍山)에서 강무(講武)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집안이 대대로 무(武)를 업으로 삼아왔는데, 다행스럽게도 태조의 권학(勸學)하는 노력에 힘입어 활쏘기와 말타기 등을 익히지 아니하고 글을 읽어 과거에 올랐다. 사냥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지만 춘추로 강무하는 것은 국가의 큰일이니 또한 폐지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백성을 뽑아다가 짐승몰이를 시키는 것은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앞으로는 경기 외의 강무는 절대로 실시하지 말게 하라. 임실(任實), 태안(泰安), 해주(海州)에서 강무를 행했던 일은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비록 경기 안에서 강무를 행하더라도 군현(郡縣)의 군사는 조발하고 싶지 않다. 단지 방패(防牌) 1, 2천 인만 조발하면 충분할 것이다."
하였다.
○ 상이 이르기를,
"내가 경사(經史)를 보건대, 환관이 비록 임금에게 충성하는 자가 간혹 있기는 하지만 임금에게 아첨하여 국가를 망치는 자가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궁궐에는 이들이 없어서도 안 된다. 지금 환관들이 매번 조그만 일로 나를 속이곤 하는데 내가 법으로 다스릴 줄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무지한 소인배들에게 사사건건 견책을 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젯밤에 몸이 좀 불편해서 어선을 담당하는 자를 물었더니 자리에 없었다. 이에 환관이 마음대로 내보낸 것을 알았으니 용서할 수가 없다. 앞으로는 승정원이 매일 밤 입직한 환관 및 어선을 담당한 자를 점검하게 하라."
하였다.
○ 상이 이르기를,
"상림원(上林園)의 화기(花器)는 무거워서 운반하기가 어렵다. 나는 화훼(花卉)를 좋아하지 않으니 앞으로는 진공(進貢)하지 말아서 백성들의 힘을 느긋하게 하라."
하였다.
18년(무술, 1418)
○ 3월. 상이 지신사 조말생, 대언 이명덕촹김효손 등을 불러 이르기를,
"대체로 사람의 수명은 다 하늘에서 정해진다. 지금 내가 성녕(誠寧)의 장례를 3개월의 제도를 따르려 하는데, 서운관이 음양(陰陽)의 금기 조항에 구애되어 4월에는 초5일만 조금 길한데 단지 태세(太歲)가 나의 본명(本命)을 억압하기 때문에 다시 점쳐보니 명년 1월 4일이 좋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믿지 않는다. 이미 지난 일을 가지고 말하면, 신미년에 선비(先?)가 병환을 얻으셔서 내가 병구완을 하였고 마침내 상을 당하여 길일을 택하여 장사지냈는데 이 해는 나를 태세가 누르는 해였다. 무자년에는 우리 태조를 능히 안치하는 날이 상왕의 본명을 억압하는 날이었다.
그리고 내가 즉위한 이후로 냇물이 마르기도 하고 바닷물이 적조 현상을 보이기도 하고 돌이 옮겨가기도 하는 등 괴이한 일이 많았다. 점서(占書)에서는 이런 현상을 임금이 바뀔 징조라고 하였다. 그러나 내가 왕위에 있는 지가 지금 18년이나 되었는데도 아직도 흉하거나 해로운 일이 없었다. 이는 믿을 것이 못 된다는 명확한 증거인 셈이다.
옛날에는 경(卿), 사(士), 서인(庶人)의 장례가 각각 달수가 있었는데 세속이 음양의 금기에 구애되어 옛 제도를 따르지 않고 있다. 후세에 법을 전하려면 당연히 종실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지금 성녕의 장례를 선왕이 제정하신 제도를 따르도록 하되, 이것을 정부와 육조에 유시하도록 하고, 서운관으로 하여금 다시는 언급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5권 세종조 1
세종 영문예무 인성명효 대왕(世宗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휘는 도(?), 자는 원정(元正)이다. 홍무(洪武) 정축년(태조 6, 1397) 4월 10일(임진)에 한양의 잠저(潛邸)에서 탄강하였다. 32년 동안 왕위에 있다가 경태(景泰) 경오년(세종 32, 1450) 2월 17일(임진)에 승하하였다. 향년은 54세이다. 영릉(英陵)ㅡ여주에 있다.ㅡ에 장사지냈다.
즉위년(무술, 1418)
○ 상은 태종의 셋째 아들이다. 처음에 충녕대군(忠寧大君)에 봉하였었는데 무술년 6월에 문무 백관이 세자 제(?)가 덕을 잃었다는 이유로 합사하여 폐하기를 청하였으나, 태종이 제의 장자를 후사로 삼으려 하였다. 신하들이 모두 아뢰기를,
"전하께서 세자를 교육시키면서 갖은 노력을 하셨는데도 오히려 이러한데, 지금 어린 손자를 세우신다면 어찌 다른 날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아비를 폐하고 자식을 세운다는 것이 의리상 맞는 일입니까. 청컨대, 훌륭한 사람을 가려서 세우소서."
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경들이 훌륭한 자를 가려서 알려주는 것이 좋겠다."
하니, 신하들이 모두 아뢰기를,
"자식과 신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아비와 임금만큼 아는 이가 없으니 간택하는 문제는 성상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충녕은 천성이 총민한데다 학문을 좋아하고 게을리 하지 않아 아무리 추운 겨울이나 무더운 여름이라 하더라도 밤새도록 글을 읽느라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며 정치의 대체를 통달하였으니, 나는 충녕으로 세자를 삼고자 한다."
하니, 신하들이 하례하기를,
"신들이 이른바 훌륭한 사람을 가려서 세우자고 한 말도 충녕을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의론이 이미 정해지자, 곧바로 책립하여 세자로 삼았다. 8월 을유(8일)에 태종이 지신사 이명덕(李明德)을 불러 이르기를,
"내가 왕위에 있은 지도 지금 이미 19년이 되었다. 밤낮으로 두려운 마음을 갖고서 감히 방탕하거나 편안하려고 하지 않았으나 위로 하늘의 뜻에 답하지 못하여 누차 재변이 이르게 하였다. 그리고 오랜 병이 근래에는 더욱 심해졌다. 이에 세자에게 왕위를 전하고자 한다."
하였다. 이명덕 등이 애써 불가함을 아뢰었으나, 태종이 듣지 아니하고 보평전(報平殿)에 거둥하여 내신(內臣)으로 하여금 서둘러 상(上)을 불러들이게 한 다음, 즉시 대보(大寶)를 주고는 별궁으로 옮겨 갔다. 상이 뒤따라 이르러서 대보를 받들고 내정(內庭)으로 나아가 고사하였으나, 밤이 되어도 태종이 윤허하지 않자, 드디어 경복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태종을 높여 성덕신공 상왕(聖德神功上王)으로 모셨다.
○ 상왕이 건원릉에 참배하고 돌아오다 야차(野次)에 이르렀다. 상이 장천군(長川君) 이종무(李從茂), 우대언 김효손(金孝孫)을 보내 술과 음식을 올리니, 상왕이 매우 기뻐하면서 이르기를,
"오늘 눈물을 흘린 것은 세 가지 한스러운 일 때문이다. 나의 아들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다 함께 눈앞에 있게 할 수 없는 것이 첫 번째 한이오, 전날에는 효녕(孝寧)과 충녕(忠寧)이 아침저녁으로 출입하면서 정성(定省)을 다하였는데 지금은 충녕이 국왕이 되어 자주 볼 수 없는 것이 두 번째 한이오, 왕위에 19년을 있는 동안 수재와 한재가 없는 해가 없었던 것이 세 번째 한이다."
○ 상이 상왕께 상수(上壽)하였다. 효녕대군 이보(李補), 영돈녕 유정현(柳廷顯), 영의정 한상경(韓尙敬), 우의정 이원(李原), 종친, 부마, 육대언(六代言)이 시연(侍宴)하였다. 상이 무릎을 꿇고 음식 한 상(床)을 올리고 헌수(獻壽)하니, 상왕이 이르기를,
"내가 왕위를 피한 것은 복을 쌓고자 해서인데, 지금 도리어 더욱 존대를 받는다."
하였다. 술이 얼큰해지자, 신하들이 춤을 추었다. 상왕도 춤을 추고서 이르기를,
"만일 적합한 사람에게 왕위를 맡기지 못했다면 아무리 시름을 잊고자 해도 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주상은 참으로 선왕의 법도를 좇아 나라를 잘 다스려 태평한 세상을 이룩할 수 있는 임금이다."
하니, 한상경 등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자식을 알고 신하를 아는 현명함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온나라 신민들이 만년토록 오래오래 사시기를 축원하오니 영원히 태평을 누리소서."
하였다. 즐거움을 만끽하고 나서 파하였다.
○ 공정왕(恭靖王)이 더위를 피하여 광진(廣津)에 가서 있었다. 상왕이 상과 함께 동교(東郊)의 대산(臺山)에 행행하여 공정왕을 맞이하여 술자리를 열었다. 상왕이 매우 깍듯이 모셨고 상도 더욱 극진하게 모셨다. 즐거움을 만끽하고 날이 저물자 자리를 파하였다. 상왕이 백마(白馬)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중도에 말에서 내리더니, 지신사 하연(河演)을 불러 이르기를,
"내가 평소에 이 말이 길이 잘 들어 아끼어 왔지만 지금 주상에게 물려주기로 하겠다."
하고, 이어서 상승(尙乘)에게 명하여 안장을 바꾸어 올리게 하였다. 또 하연을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우리 부자의 일은 역대로 없던 바이지만 다만 완산군(完山君)으로 하여금 보게 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럽다."
하고, 한숨을 쉬었다.
○ 상이 창덕궁(昌德宮)으로 거처를 옮기고, 상왕은 수강궁(壽康宮)에 있었다. 상이 매일 궁중으로 난 길을 따라 가서 상왕을 뵙고 기거의 안부를 묻는 등 조용히 하루를 보내고 돌아오곤 하였다. 그리고 일체의 사무를 다 여쭈었다.
○ 처음으로 경연(經筵)을 열었다. 영경연사 박은(朴?)촹이원(李原), 지경연사 유관(柳觀)촹변계량(卞季良), 동지경연사 이지강(李之剛), 참찬관 하연(河演)촹김익정(金益精)촹이수(李隨)촹윤회(尹淮), 시강관 정초(鄭招)촹유영(柳穎), 시독관 성개(成槪), 검토관 김자(金?), 부검토관 권도(權蹈) 등이 《대학연의》를 강하였다. 이지강이 아뢰기를,
"임금의 학문은 마음을 바로잡는 것으로 근본을 삼습니다. 마음을 바로잡은 뒤에 백관을 바로잡을 수 있고, 백관을 바로잡은 뒤에 백성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마음을 바로잡는 요령은 전적으로 이 책에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경서(經書)의 구두나 따지는 것은 학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반드시 마음에 관한 공부를 해야 유익함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인하여 송(宋) 나라 명신(名臣)의 사적에 대하여 논의하자, 변계량이 대답하기를,
"온화하고 어질고 조심스럽고 온후한 자로는 사마온공이 가장 으뜸입니다. 선유(先儒)가 왕안석(王安石)을 소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문장(文章)과 정견(政見) 그리고 마음 씀씀이를 보면 모두 남들이 미칠 정도가 아니니 아무래도 전적으로 소인으로 지목할 일은 아닌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왕안석은 소인(小人) 중에서 재주를 가진 자이다."
하였다. 상이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고 매일처럼 편전에서 정사를 보시고 나와서는 경연에 거둥하였다. 상왕을 모시고 잔치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이 일을 잠시도 그만둔 적이 없었다.
○ 상이 상왕께 상수(上壽)하였는데, 영돈녕 유정현(柳廷顯) 등이 시연(侍宴)하였다. 상왕이 유정현 등에게 가죽 한 장을 주면서 이르기를,
하고, 술자리를 마련하니, 효녕대군 이보를 비롯하여 공신, 종실 및 재집(宰執)이 모두 시연하였다. 상왕이 원숙(元肅)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해서 유시하기를,
"오늘 주상이 나를 위하여 헌수(獻壽)를 올리고자 하기에 나는 흉년이 들었다는 이유로 그만두게 하였다. 그러나 주상이 백관을 거느리고 와서 늙은이를 위로하니, 내가 예로 대우하지 않을 수 없다. 간략하게 궁주(宮廚)에 비축해 둔 음식으로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하였지만 날씨는 춥고 길은 빙판이다보니 밤길이 수고로울까 염려된다."
하니, 신하들이 모두 절하여 사례하였다. 상왕이 옥배(玉杯)에다 술을 따라 정현에게 주니, 정현이 굳이 사양하였다. 상왕이 이르기를,
"내가 경과 함께 술잔 하나로 같이 마시고자 하는데 경은 내 뜻을 아는가?"
하니, 유정현이 아뢰기를,
"신이 알기로는 한몸이 되고 한마음을 갖자는 뜻인 듯합니다. 그러나 임금과 신하가 어찌 감히 술잔 하나로 같이 마실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왕이 이르기를,
"나는 같이 마시고 싶으니 경은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상왕이 풍악을 멈추게 하고 섭이중(?夷中)이 지은 상전가시(傷田家詩)를 외우게 하였다. 또 이르기를,
"주상은 성법(成法)을 지켜갈 만한 임금이 되기에 충분하니, 경들은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보좌하라."
하니,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렸다. 상왕이 상의 어깨에 의지하고 일어나 춤을 추었다. 밤이 되자, 술자리를 파하였다.
○ 상이 문묘(文廟)에 알현하려고 하니, 예조 판서 허조(許稠)가 아뢰기를,
"신이 삼가 옛 제도를 상고해 보니, 당(唐) 나라에서는 위포(?袍)를 사용하여 선성(先聖)을 알현하였습니다. 위포에 대해서는 비록 그 제도를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오늘날의 강사포(絳紗袍)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사포는 신하들을 만날 때 입는 옷인데, 어찌 이것을 입고 선성을 알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곤면(袞冕)을 입고서 알현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1년(기해, 1419)
○ 강원도 행대(行臺) 감찰 김종서(金宗瑞)가 아뢰기를,
"원주(原州) 등 12고을의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조세를 견감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변계량이 불가하게 여기자, 상이 이르기를,
"임금이 되어가지고 백성이 굶어 죽는다는 소식을 듣고도 오히려 조세를 징수한다는 것은 정말 차마 못할 일이다. 더구나 지금은 묵은 곡식이 이미 바닥이 난 시기이므로 창고를 열어 할 수 있는 데까지 구제를 해야 할 때인데, 도리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조세를 거두어 들인다는 말인가. 이미 감찰을 파견하여 백성의 기근을 살펴보고서도 조세를 견감해 주지 않는다면 다시 무슨 일이 실질적인 혜택이 될 수 있겠는가."
하였다.
○ 편전에 거둥하여 정사를 보았다. 참찬 김점(金漸)이 나아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정사를 하실 때에 마땅히 금상 황제(今上皇帝)의 법도를 따르도록 하소서."
하니, 예조 판서 허조(許稠)가 나아가 아뢰기를,
하였다. 김점이 아뢰기를,
"신은, 황제가 친히 죄수를 끌어다가 자세히 심문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도 이것을 본받도록 하소서."
하니, 허조가 아뢰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관직을 설치하고 직책을 분담하는 데에 있어서 각각 유사가 있기 마련인데, 만약 임금이 죄수를 친히 처결하고 대소를 따지지 않는다면 장차 법사(法司)를 무엇에 쓰겠습니까."
하였다. 김점이 아뢰기를,
"모든 정사를 전하께서 총괄하도록 하소서. 신하들에게 맡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니, 허조가 아뢰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어진이를 구하기까지는 노고를 아끼지 말아야 하고, 사람에게 맡기고 나면 느긋해야 합니다.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아야 하고, 의심스러우면 맡기지 말아야 합니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신중을 기하여 대신을 선발하셔서 그로 하여금 육조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여 일을 책임지고 이룰 수 있도록 위임하셔야 하고, 몸소 세세한 일까지 간여하여 신하가 할 일까지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김점이 아뢰기를,
"신이 보건대, 황제의 위엄은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육부(六部)의 장관이 어떤 일을 아뢰다가 실책을 범하자, 즉시 금의위(錦衣衛) 관원에게 명하여 모자를 벗긴 다음 끌어내게 하였습니다."
하니, 허조가 아뢰기를,
"대신의 체면을 세워주고 약간의 잘못을 감싸주는 것이 임금의 넓은 아량입니다. 지금 말 한마디 잘못하였다 하여 대신을 주륙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불가한 일입니다."
하였다. 김점이 아뢰기를,
"시왕(時王)의 제도는 싫든 좋든 따라야만 합니다. 황제가 불교를 믿기 때문에 중국의 신하들이 가곡(歌曲)이라고 하는 것을 외우고 읽고 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 중에는 이단(異端)을 좋아하지 않는 선비들이 어찌 없었겠습니까마는 황제의 뜻을 받들기 위하여 부득불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니, 허조가 아뢰기를,
"불교(佛敎)를 신봉하는 것은 제왕의 성덕이 아니니, 신은 삼가 취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김점은 매번 말을 할 때마다 지리하고 번잡한데다 노여움을 얼굴에 보이곤 하는데 반해, 허조는 천천히 절제를 하면서 얼굴빛은 온화하고 말은 간략하니, 상이 허조를 옳게 여기고 김점은 그르게 여겼다.
○ 상왕이 편전에 거둥하였는데, 상이 모시고 있었고 양녕(讓寧)도 곁에 있었다. 상왕이 병조 판서 조말생(趙末生), 참판 이명덕(李明德), 지신사 원숙(元肅), 좌대언 김익정(金益精), 우대언 윤회(尹淮) 등을 불러 놓고 이르기를,
"내가 며칠 동안 깊이 생각하여 양녕을 조처할 방안을 이제서야 터득하였다. 경들은 다 고금을 통달한 선비들이니 내 말을 분명히 듣도록 하라. 양녕이 하는 짓이 광기가 어려 있어 가르쳐도 소용이 없더니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 가까운 곳에다 두고서 목숨이나 보전하게 하려 했는데 오히려 뉘우칠 줄을 모르고 있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젊은 나이에 세 아들을 잇따라 잃었다. 정축년에 주상을 낳았는데 그 당시에 나는 정도전의 무리들에게 시기를 받아 용납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실지로 남은 날이 얼마 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 항상 답답한 마음을 갖고서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대비(大妃)와 함께 번갈아 가면서 안아 주기도 하고 업어 주기도 하여 무릎 위를 떠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다른 자식과는 달리 가장 예뻐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세자를 봉하는 날에는 단지 적장자이기 때문에 양녕을 명하였던 것이지 내가 어찌 조금이라도 그 사이에 사정을 두었겠는가. 양녕이 이미 동궁에 있으면서 행동이 좋지 못하고 부모에게 불효한 것은 차마 말로 할 수 없다. 앞으로는 양녕을 의정부나 육조에 회부해도 나는 참견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법을 어겼을 경우 의정부가 잡
나는 양녕과 부자간이다. 그러므로 정리상 차마 못 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임금과 신하의 경우는 이것과 다르다 신하가 임금에게 진실로 명분을 범하거나 분수를 어기면 사약을 내리는 법이 있다. 양녕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다고 하나 어찌 모를 리가 있겠는가. 옛날에 당 명황(唐明皇)이 하루에 세 아들을 죽이니 사씨(史氏)가 불인(不仁)함이 심하다고 기롱하였다. 이 경우는 세 아들이 죄가 없는데 명황이 참소하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지만, 만일 참으로 죄가 있다면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내가 왕위를 전한 것은 본래 세상일을 떨쳐버리고 구애받는 일 없이 자유롭게 지내고자 해서였지만 유독 군사 문제에 대해서 아직도 직접 총괄하고 있는 것은, 주상이 나이가 어려서 군사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이 30세가 될 때까지 기다려 일에 대한 경험을 많이 쌓거든 모두 전수하도록 할 것이다.
전에 만일 여러 자식들로 하여금 원수(元帥)가 되게 해서 제도의 병마(兵馬)를 나누어 맡아 장사(將士)를 접견하게 했더라면, 주상이 어찌 지금까지 군사에 관한 일을 몰랐겠는가. 그러나 내가 감히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은 저 험악한 위인이 동궁에 있는데 여러 아우들이 제각기 병권을 잡게 되면 어찌 서로 용납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고, 양녕에게 눈길을 주면서 이르기를,
"네가 도망갔을 때 나와 대비는 너의 생사를 몰라서 항상 눈물을 흘렸고 주상도 곁에서 눈물을 흘렸다. 가령 너는 안전하고 여러 아우가 사고가 생겼다면 네가 주상이 오늘날 한 것처럼 할 수 있겠느냐. 주상의 효도와 우애는 천성적이다. 너의 형제들이 함께 다 보전될 수 있을 것이기에 나는 걱정이 없다. 지금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은 너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를 위한 부끄러움 때문이다."
하였다.
○ 하교하기를,
"백성은 국가의 기반이며, 먹는 것은 백성들에게 하늘처럼 소중한 것이다. 근래에 수재, 한재, 바람, 우박 등과 같은 재해로 인하여 해마다 흉년이 들고 있다. 심지어 항산(恒産)이 있는 자도 굶주림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에 호조에 명하여 창고를 열어서 구제하게 하였는데, 백성의 고통을 보살피지 않은 수령이 간혹 있어서 이미 유사로 하여금 그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
아, 수많은 백성들의 굶어 죽는 현상을 내가 두루 다 알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감사나 수령처럼 백성들과 가까이에 있는 관리는 나의 간절한 생각을 체득해서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말고 궁핍함을 구제하여 그들을 굶주리게 하지 말라. 내가 조관(朝官)을 보내서 제대로 수행하는지의 여부를 살피게 할 것이다. 만일 백성 한 사람이라도 굶어 죽는 자가 있을 경우 그에 상응하는 벌을 줘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 상이 경연에 거둥하였다. 탁신(卓愼)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전하께서는 책에서 손을 떼지 않고 깊은 밤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드신다고 합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이 마음을 잘 간직해서 나태하고 방탕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사람의 마음은 무상한 것이어서 잡아 두면 그대로 있지만 놓아 버리면 없어져 버립니다. 정사를 보고 학문을 하시는 일 이외에 다른 생각이 그 사이에 끼여들지 못하게 한다면 임금의 총명은 날마다 확장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한층 더 공경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 판한성부사 권홍(權弘)이 상언하기를,
"기자(箕子)의 훌륭한 점에 대해서는 천하만세가 함께 경모하는 바입니다. 우리 부자께서도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은 나라에 세 사람의 어진이가 있다.' 하셨고, 우리 동방의 예악과 문물이 중국과 견줄 수 있는 것은 기자가 이곳에 봉(封)함을 받아 팔조(八條)의 가르침을 시행한 때문이니, 그가 동방에 공을 세운 것이 매우 크
태조가 개국을 하고 나서 가장 먼저 사전(祀典)에 실었으니 선성(先聖)을 존모하는 뜻이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묘소에 비기(碑記)가 없으니 그의 공덕을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문신(文臣)으로 하여금 비문을 지어 묘소 아래에다 세워서 후세에 알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에 참찬 변계량에게 명하여 비문을 지어서 사당의 아래에다 세우게 하였다.
○ 상이, 무릉도(武陵島) 백성 남녀 모두 17인이 경기 평구역(平丘驛)에 도착하였는데 굶주려 쓰러질 지경이라는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 구제하도록 하고, 이어서 전지를 내리기를,
"무릉도의 사람들이 지금 평구에 도착하여 양식이 떨어졌는데 아무도 구제하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서울이 가까운 곳에서도 오히려 이러한데 더구나 멀리 떨어진 곳이야 오죽하겠는가. 이 일로 인하여 생각건대,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들이 필시 많을 듯하다. 호조로 하여금 각도에 이문(移文)을 내어 한층 더 엄격하게 살펴서 백성들로 하여금 기근을 면하게 하라. 그리하여 나의 지극한 염려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 호조 판서 이지강(李之剛)이, 수십 칸의 창고를 지어서 풍저창(?儲倉)의 미곡(米穀)을 저장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토목 공사를 나는 하고 싶지 않다. 창고를 짓지 않을 수 없지만 지금 흉년이 들었고 또 농사철을 당하였으니, 공사를 시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고, 드디어 윤허하지 않았다.
○ 상이 가뭄 때문에 나이 젊은 궁인(宮人)을 내보내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 대마도의 왜인이 변방을 침범하였다. 상왕이 삼군도체찰사 이종무(李從茂)를 파견하여 삼군을 거느리고 가서 정벌하게 하였다. 또 영의정부사 유정현(柳廷顯)을 도통사(都統使)로 삼고, 참찬 최윤덕(崔潤德)을 도절제사로 삼아 제군(諸軍)을 통솔하게 하였다.
유정현이 사신을 보내 승전첩을 고하니, 상왕이 훈련 판관 최기(崔?)를 파견하여 이종무에게 사서(賜書)하기를,
"예로부터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는 것은, 그 뜻이 죄를 묻는 데에 있었지 많이 죽이는 데에 있지는 않았다. 배도(裵度)가 채(蔡) 나라를 정벌한 것과 조빈(曹彬)이 촉(蜀) 나라를 항복받은 것이 사책(史冊)에 실려 있는 것을 보아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오직 경은 나의 간절한 뜻을 체득해서 저들을 투항시키도록 노력해서 모두 나에게로 오게 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봄에는 생장시키고 가을에는 숙살시키는 것이 하늘의 도이다. 국가를 통치하는 자는 하늘의 도를 체득하여 모든 백성을 사랑으로 육성한다. 천리를 어기고 인륜을 어지럽히는 도적과 간사한 자에게 주벌을 가하는 것이 부득이해서 하는 일이지만 불쌍하게 여기는 뜻이 언제나 그 사이에 행해진다.
근자에 대마도 왜노 중에 은혜와 의리를 저버리고 몰래 우리 국경으로 들어와 군민(軍民)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아 가는 자가 있으니, 이들을 잡는 대로 참수하여 국법을 바로잡도록 하되, 그전부터 의리를 흠모하여 우리 국경에 살던 자는 여러 고을에 나누어 배치해서 의복과 식량을 지급해 주어 살아가게 하라.
대마도는 토지가 척박하여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서 생활하기가 실로 어려우니 나는 이 점을 심히 민망하게 여긴다. 진실로 이들이 모두 와서 항복한다면 거처와 의복을 원하는 대로 줄 것이니, 경은 나의 간절한 뜻을 그 곳을 수호하는 도도웅와(都都熊瓦)에게 유시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병조 판서 조말생에게 명하여 도도웅와에게 글을 보내서 유시하게 하였다.
"본조가 선지(宣旨)를 받드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의 제왕이 하늘의 도리를 받들어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오곡을 심어서 그들의 신체를 양육하게 하고 고유한 의리를 깨우쳐 인도해서 그들의 마음을 착하게 하였다. 만약 강경하여 따르지 않고 재물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있
대마도(對馬島)는 경상도 계림(鷄林)에 예속되어 있던 섬으로, 본래 우리나라 땅이란 것이 문적(文籍)에 실려 있어 분명하게 상고할 수 있다. 다만 그 땅이 매우 협소하고 또 바다 가운데 있어서 왕래할 길이 막힌 관계로 백성들이 살지 않았다. 이에 왜노 중에 본국으로부터 쫓겨나 오갈데 없는 자가 죄다 이곳으로 모여들어 소굴을 만들어 놓고 수시로 약탈을 자행하면서 평민이나 의지할 곳 없는 사람의 처자식을 잡아가거나 백성의 살림을 분탕하기도 하여 그들의 흉악한 만행은 다년간 계속되어 왔다.
우리 태조대왕께서 지인(至仁)과 신무(神武)를 가지고 하늘에 순응하여 혁명을 일으킨 다음 비로소 나라를 창건하시니, 국세도 크게 확장되고 병력도 막강해져서 바다와 산을 장악할 만하고 하늘과 땅을 휘두를 만하였다. 따라서 혈기가 있는 자 치고 이 당시에 굴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태조가 한 사람의 편장(?將)에게 명하여 대마도의 소추(小酋)를 무찌르게 하니, 마치 태산으로 새알을 누르는 듯하고 분육(賁育)이 어린아이를 움켜쥐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우리 태조는 문덕(文德)을 베풀고 위무(威武)를 거두어 은혜와 신의를 보여 주었다.
내가 대통을 이어받고 나서, 선왕의 뜻을 받들어 더욱 보살펴 주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간혹 좀도둑들이 불공스러운 일을 저질러도 오히려 도도웅와의 아비 종정무(宗貞茂)가 의리를 사모하여 정성을 다하던 것을 생각하여 범법 행위를 봐주었다. 매번 신사(信使)를 접할 때도 관사에 머물게 하고 예조에 명하여 잘 위로해 주게 하였다.
또 생활하기가 어려운 것을 염려하여 상선(商船)의 왕래를 허락해 주고 경상도의 곡식을 대마도로 운반해 간 것도 해마다 수만여 석이었다. 이 정도면 아마 신체를 보양하여 굶주림을 면할 수 있고 양심(良心)을 충만히 하여 좀도둑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리라 믿었다. 이것은 순전히 심심한 나의 배려였던 것이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은혜와 의리를 저버리고 스스로 재앙의 불씨를 빚어냈다. 이에 변장에게 명하여 병선(兵船)을 거느리고 가서 그 섬을 포위하고 항복해 오기를 기다리게 하였지만, 지금 그 섬사람들이 아직까지도 깜깜하여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나는 매우 안타까울 뿐이다.
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마 수천 명을 밑돌지 않을 것인데, 그들의 생활을 생각하면 참으로 측은하다. 섬의 지형이 대부분 석산(石山)인데다 비옥한 토지가 아예 없다 보니, 농사를 짓거나 나무를 심을 수가 없었다. 단지 틈을 노려 도둑으로 둔갑하여 남의 재물과 곡식을 훔쳐먹을 뿐이었다. 이제 그들의 죄악이 극에 달하여 어두운 곳에서는 천지 신명이 잠자코 재앙을 내리고 있으며 밝은 곳에서는 좋은 말과 큰 배로 바다와 육지에서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는데, 어디로 간들 주륙(誅戮)의 형벌을 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단지 고기를 잡아 팔아서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데 지금 은혜와 의리를 저버렸으니 이는 스스로 우리와의 관계를 끊어버린 것이지 내가 먼저 관계를 끊을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생업마저 잃게 되면 굶주림을 면치 못하고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계획을 세워본들 역시 어려움만 있을 것이다.
만약 선뜻 뉘우치고 모두가 와서 항복한다면, 도도웅와에게는 좋은 벼슬을 줄 것이고 후한 녹도 줄 것이며 대관(代官)들도 보살펴 줄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군소(群小)들도 우리 백성들과 함께 살게 하면서 차별 없는 사랑을 베풀어서 도적이 되는 것은 부끄럽고 의리를 추구하는 것은 기쁜 일이란 것을 알게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지난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워지는 길이고 생활을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길인 것이다. 그래도 만약 좀도둑의 근성을 버리지 못한 채 섬에 그대로 남아 있겠다고 한다면, 대대적으로 병선을 준비하여 군량을 잔뜩 싣고 가서 섬을 포위하고 공격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랜 시일이 지나서 반드시 스스로 죽고 말 것이다.
이때 만약 용감한 군사 10만여 명을 선발하여 각 방면에서 공격하게 되면, 주머니 속의 물건과 같은 꼴이 되어 오도가도 못하고 씨도 없이 잡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육지에서는 새들의 먹이가 되고 물에서는 고기들의 배에 채워질 것이 뻔한 일이다. 아, 어찌 애처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는 화(禍)와 복(福)의 소재가 매우 분명한 것이다. 옛사람의 말에, 「화를 당하거나 복을 받거나 그 모두가 자기가 불러들인 것이다.」하였고, 또 「조그만 고을에도 반드시 충성스럽고 미더운 사람은 있다.」하였다. 지금 대마도에 사는 사람도 다 하늘이 내린 착한 성품을 타고났을 터이니, 어찌 시세를 잘 알고 의리를 깨달은
하였다.
○ 황제가 흥천사(興天寺)에 소장되어 있는 사리(舍利)를 요구하였다. 김점이 아뢰기를,
"축구(竺丘)라는 승려가 신에게 말하기를, '석탑(石塔)에 보관되어 있는 사리 네 개는 신라(新羅) 때부터 대대로 보물로 간직해오던 것이고 또 영험도 있습니다. 원컨대, 그대로 절에다 두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려들이야 그런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의 체면상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천자가 사리를 요구하니, 마땅히 본국에 보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을 진헌해서 성의를 표시해야만 한다. 더구나 석탑의 사리에 대해서는 천자가 알고 있는데, 어찌 이것이 영험하고 오랜 물건이라 하여 감추어두고 위로 천자를 기만할 수 있겠는가. 비록 이 물건이 없더라도 우리나라에 절대로 재앙은 없을 것이니 경은 의심하지 말라."
하니, 김점이 부끄러워서 대답하지 못하였다.
○ 상이 쓸데없는 관원을 도태시키라고 명하여 도태된 자가 매우 많았다. 박은(朴?)이 간대부(諫大夫) 한 사람을 도태시킬 것을 의논하여 이미 아뢰었다. 윤회가 원숙에게 말하기를,
"쓸데없는 관원은 진실로 도태시켜야 한다. 그러나 도태시켜야 하는데도 도태시키지 않은 자가 아직도 많다. 간관이 어찌 쓸데없는 관원이겠는가. 옛날 송 인종(宋仁宗)이 경력(慶歷) 연간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정치를 잘해 보려고 하여 간관 4원(員)을 더 증원시켰는데 훌륭한 덕이 있다고 사관이 기록하였다. 그리고 전조의 관제는 간관이 모두 13원이었는데, 지금은 단지 7인뿐이니, 이미 감원된 것을 다시 한 사람 줄이고자 한다면 불가한 일이 아닌가. 더구나 상이 새로 즉위하자마자 가장 먼저 간관을 감원시킨다면 후세에 뭐라고들 하겠는가."
하였다. 원숙이 아뢰니, 상이 매우 그럴듯하게 여기고 따랐다.
2년(경자, 1420)
○ 상이 새로 즉위하여, 우선적으로 절의가 있는 자를 장려하려는 뜻으로 중외에 하교하여 효자(孝子)촹절부(節婦)촹의부(義夫)촹순손(順孫)을 찾아서 실제 행적을 아뢰게 하였는데, 주군(州郡)이 올려보낸 것이 모두 수백 건이었다. 상이 정초(鄭招)에게 유시하기를,
"행실이 특출한 자를 가리도록 하라."
하여, 41인을 뽑아 아뢰니, 정려와 상을 차등 있게 주었다.
○ 여름. 가뭄이 들었다. 상왕이 풍양(?壤)으로 가는 길에 야차(野次)에서 근신에게 이르기를,
"하늘이 어찌하여 이토록 오랫동안 비를 내리지 않는가?"
하고,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지으며 이르기를,
"내가 비록 밥을 먹고는 있지만 어찌 마음이 편하겠는가."
하였다.
○ 상이 낙천정(樂天亭)에서 상왕을 뵙고 헌수(獻壽)하고 돌아왔다. 상이 가뭄을 걱정하여 어인(?人)에게 명하여 풀뿌리를 뽑아오게 해서 가뭄의 정도를 친히 살펴보고 드디어 중외에 명하여 술을 금하게 하였다. 상왕이 원숙에게 유시하기를,
"어선을 줄이고 풍악을 중지하며 원옥(?獄)을 심리하는 등의 일은 가뭄을 걱정하는 일 중에서 하찮은 일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정사를 바르게 하기를 바랄 뿐이다."
하였다.
○ 상이 낙천정에서 상왕을 뵈었다. 사신 조량(趙亮)과 역절(易節)이 잇따라 왔다. 두 분 상이 맞이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백관의 의위가 매우 성대하니, 사신이 두루 보고서 감탄하기를,
"하늘이 마련해 준 선경(仙境)이니, 전하께서 한가한 틈을 타서 수양하기에 가장 좋은 곳입니다."
하였다. 상이 상왕께 헌수하였는데, 진퇴할 때에 공경하고 삼가는 것을 예에 맞게 하니, 조량이 감탄하기를,
"새 전하는 조정(朝廷)도 공경하고 노왕(老王)도 공경하여 충성과 효도를 겸하고 있습니다. 내가 제후 나라에 사신으로 많이 갔었지만, 새 전하와 같이 훌륭한 이는 없었습니다. 노전하께서는 이미 세상일에 미련을 버리고 믿을 만한 사람에게 부탁하고서 세상 밖에서 자유롭게 지내시면서 정신을 가다듬고 계시니 매우 즐거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새 전하가 위로는 황제의 사랑을 받고 다음으로는 어버이의 사랑을 받으면서 충성을 다하고 효도를 다하는 것이 과연 소문에 듣던 대로이니 고금에 보기 드문 일입니다."
하고, 드디어 '돈으로는 훌륭한 자손을 살 수 없느니[有錢難買子孫賢]'라는 고어(古語)를 읊조리자, 상왕이 사신 앞으로 나아가 사례하기를,
"지금 사신의 말을 듣고 나니 절로 눈물이 흐릅니다. 행여 괴이하게 여기지 마시오."
하면서,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잔치에 참석했던 신하들도 감격하여 울먹였다.
○ 당시에 송골매[海靑]를 진헌하여 금과 은의 공물(貢物)을 면제해 달라고 요청하기를 건의(建議)하는 자가 있었다. 상왕이 이르기를,
"송골매는 구하기가 가장 힘들고 또 하루에 꿩을 한 마리씩 먹기 때문에 기르기도 어렵다. 또 길들이기도 순조롭지 않아서 혹시 도망을 가게 되면 응사(鷹師)가 찾는다고 하면서 마을을 함부로 드나들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적잖은 해가 되고 있다. 내가 그래서 다 놓아보냈다."
하니, 변계량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하신 이 말씀을 역사에 기록해서 만세의 법이 되게 하소서."
하였다.
○ 상왕의 탄신에 상이 신하들을 데리고 가서 헌수하였다. 상왕이 변계량에게 이르기를,
"자식이 국왕이 되어 지성으로 봉양하는 것을 그의 아비가 되어 받고 있다. 이와 같은 경우는 고금에 드문 일이다."
하고, 즐거움을 만끽하고 나서 파하였다. 또 일찍이 상이 정사를 살피는 것이나 재결하는 것을 모두 이치에 맞게 한다는 말을 듣고 이르기를,
"내가 진실로 주상이 본래부터 현명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노련한 줄은 몰랐다."
하였다. 또 일찍이 포천(抱川)에 행행하여, 지병조사(知兵曹事) 곽존중(郭存中)에게 이르기를,
"나는 믿을 만한 사람을 얻어 나라를 맡겼으니, 산수를 찾아 자유롭게 노닐어도 아무 걱정이 없을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나 한 사람뿐이다. 중국의 역대 제왕들의 부자 사이도 오늘날 나의 경우만은 못하였다."
하니, 곽존중 등이 머리를 조아리며 하례하였다.
○ 대비가 학질을 앓았다. 상이 하교하기를,
"대비의 학질이 오래되어도 낫지 않고 있다. 병을 치료하는 자가 있으면 후한 상을 주도록 하겠다. 수소문해서 역말을 주어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당시에 대비의 증세가 악화되어 상이 밤낮으로 시봉하면서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탕약과 음식을 친히 맛본 것이 아니면 올리지 않았다.
○ 대비가 훙(薨)하니, 모든 상례를 한결같이 고례(古禮)대로 따랐다. 상이 옷을 바꾸어 입고 머리를 푼 채로 맨발로 통곡을 하면서 수일 동안 어선을 들지 않으니, 상왕이 점차(?次)에 행행하여 울면서 권하였다. 이전부터 빈전(殯殿)에다 법석(法席)을 설치하는 일이 전해오고 있었는데, 상왕이 이르기를,
"대비의 병에 부처에게 빌어 살기를 바라는 등 갖은 방법을 다 썼지만 결국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그리고 성격상 부처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불사(佛事)를 하고 싶지 않다."
하고, 상사(喪事)를 되도록 순수하게 하고 사치스럽게 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 정부와 육조가 합사하여 아뢰기를,
"전하께서 대비의 병시중을 드신 지가 50일 가까이 되었습니다. 걱정과 근심으로 마음 졸여 오던 차에 이 큰 변고를 당하셨기에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어선을 거두고 머리를 푼 채로 풀자리에 거처하고 계십니다만, 어찌 상왕이 우려하시는 것은 생각지 않으시고 그저 정에만 끌려 이렇게 하십니까. 삼가 바라건대, 애써 신들의 청을 따르시어 슬픈 감정을 조금 억제하소서."
하였다. 당시에 여름 더위와 습기가 한창이었으나, 상은 침상을 치우고 풀자리에 엎드려 밤낮으로 통곡을 하였다. 좌우의 신하들이 은밀히 유지(油紙)를 그 아래에다가 깔아 놓았는데, 상이 이 사실을 알고 다시 거두게 하였다.
○ 상왕이 병조 참의 윤회(尹淮)를 보내 상에게 유시하기를,
"능침 곁에다 절을 세우는 것은 고려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개경사(開慶寺)와 연경사(衍慶寺)를 세웠었다. 지금 대비의 능침에 절을 지을 것인지의 여부를 정부와 예조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라."
하였다. 상이 윤회에게 이르기를,
"부처가 위선적인 것에 대해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단지 능을 모신 뒤에 텅빈 골짜기가 한적할 터인데 이 점이 내가 차마 못하는 바이다. 경은 다시 가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허조(許稠)가 청하기를,
"거창하게 짓지 말고 조그만 절을 짓도록 하소서."
하고, 박은과 이원(李原)이 청하기를,
"개경사와 연경사의 예에 의거하여 짓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유정현만 유독 아뢰기를,
"절을 지어서 명복을 비는 자료로 삼고자 한 것은 본래 신하들의 아첨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현재 두 분 상이 모든 일에 옛 성인을 법으로 삼고 계시니 천년이 가도 만나기 어려운 기회입니다. 원컨대, 절을 세우지 말게 해서 만세의 법이 되게 하소서."
하니, 윤회가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갖추어 아뢰었다. 상왕이 아뢰기를,
"산릉은 내가 백세 후에 돌아갈 곳이다. 중들로 하여금 내 곁에 가까이 있게 한다면 내 마음이 편하겠는가. 내가 건원릉(健元陵)과 제릉(齊陵)에 절을 짓게 한 것은 태조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지금 산릉에 대해서는 내가 마땅히 법을 제정해서 후손들에게 제시하도록 하겠다. 만세 뒤에 자손들이 따를지의 여부는 그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유정현의 말이 매우 타당하니, 절을 세우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 상왕이 조말생을 보내, 날로써 달을 바꾸자는 의논을 가지고 상에게 유시하니, 상이 조말생에게 이르기를,
"날로써 달을 바꾸는 제도에 대하여, 내가 사서(史書)를 읽다가 이 부분에 이르러 매번 얼굴을 붉히곤 하였다. 그런데 지금 도리어 차마 이 제도를 행하라는 말인가. 삼년상을 감히 다시 청할 수는 없지만 13일 만에 상복을 벗는 것은 진실로 차마 할 수 없으니, 경은 잘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조말생이 돌아와 아뢰자, 상왕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허락하였다.
○ 큰비가 와서 여차(廬次)에 물이 넘쳐들었으나, 상이 오히려 거처를 옮기지 않았다. 여러 대언이 청하기를,
"비바람이 몰아쳐서 여차로 넘쳐드는데도 축축한 습기를 피하지 않고서 밤을 지새려 하시니, 하늘에 계시는 대비의 혼령이 어찌 가슴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상왕도 이 소식을 들으시면 필시 걱정하실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위로는 사랑하는 정을 생각하시고 아래로는 신민의 소망을 따르셔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모후(母后)가 병환중에 계실 때에 밤낮으로 걱정하면서 차도가 있기를 바랐지만 결국 효험을 보지 못하고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으니, 내 한 몸 죽고 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듣지 않으니, 대언 등도 역시 울면서 청하였다. 그리하여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단지 짚자리만을 깔았다. 동틀 무렵에 다시 여차로 돌아갔다.
○ 대비 능침의 석실(石室)에 덮개로 쓸 돌이 넓고 두꺼워서 운반하기가 어려웠다. 상왕이 상에게 유시하여, 둘로 쪼개어 운반하기 쉽도록 하라고 하니, 상이 '온전한 돌을 쓰는 것이 더 견고하다.'고 하고, 원숙에게 명하여 상왕에게 청하였으나, 원숙이 이르기 전에 상왕이 이미 돌이 있는 곳으로 가서 석공에게 명하여 둘로 나누게 하였다. 원숙에게 이르기를,
"이 돌이 넓고 커서 운반하기가 어려워 이미 깨뜨리게 하였다."
하였다. 뒤에 상이 낙천정(樂天亭)에 나아가니, 상왕이 상에게 이르기를,
"능침의 덮개로 쓸 돌을 만약 온전한 돌을 사용했다면 운반하기가 심히 어려워서 죽은 자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고 백성에게 피해만 주었을 것이오. 오늘의 일을 길이 성문법으로 삼아서 부적(簿籍)에 상세히 기록하여 후세의 자손들에게 제시하도록 하오."
하였다.
○ 예조가 아뢰기를,
"세상의 모든 나라에 인륜(人倫)이 있는 한, 임금과 신하, 위와 아래의 구분이 있기 마련이고, 또 그 구분을 조금이라도 침범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엿보고 있다가 조그만 틈이라도 하나 얻게 되면 죄로 얽어서 고소하는 자가 적지 않습니다. 이런 자들을 방치해 두고 금지시키지 않으면 여기에서 발생하게 될 폐단이 임금이 신하를 기르지 못하고 아비가 자식을 기르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를 금지시키는 법을 엄하게 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날 당 태종(唐太宗)이 이르기를, '근래에 종이 주인의 반란을 고발한 자가 있다. 대체로 모반이란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인데, 어찌 발각되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하필 종이 고한다는 말인가. 앞으로는 종이 주인을 고발하는 자는 받아들이지 말고 그대로 참수하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원컨대, 앞으로 종이 주인을 고발하는 자에게는 이 법을 적용하도록 하소서.
주문공(朱文公)이 효종(孝宗)에게 말씀드리기를, '원컨대, 폐하께서는 사정관(司正官)이나 전옥관(典獄官)에게 준엄하게 분부해서 옥사(獄事)나 송사(訟事)가 있을 경우에 반드시 먼저 그들의 존비(尊卑)와 상하(上下)와 장유(長幼)와 친소(親疎) 관계를 따져본 뒤에 그 곡직에 관한 말을 듣게 하소서. 대체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하였거나 신분이 낮은 사람이 신분이 높은 사람을 능멸하였다면 비록 옳다 하더라도 그것을 인정하지 말고 옳지 않으면 보통 사람의 경우보다도 더 엄중한 벌을 내리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고려 시대에도 이 뜻에 의거하여 수령을 능멸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축출하고 심지어 그가 살던 집자리를 파서 못으로 만들고야 말았습니다. 원컨대, 앞으로 만일 부(府)촹사(史)촹서(胥)촹도(徒)로 관리나 품관을 고발하거나 아전이나 백성들이 수령이나 감사를 고발하는 자가 있을 경우, 비록 사실이라 하더라도 종묘 사직의 안위에 관계되거나 불법으로 살인을 한 경우가 아니면 그대로 놔두고 논죄하지 말고, 만일 사실이 아니면 보통 사람보다 더 심한 죄를 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가상하게 여기고 받아들였다.
3년(신축, 1421)
○ 상이 근신에게 이르기를,
"요즘 흉년으로 인하여 백성들의 식량이 떨어지기도 하는데, 민간에 빌려 준 의창(義倉)의 곡식을 너무 서둘러 받아들이고 있다. 갚을 능력이 없는 자에게는 억지로 징수하지 말게 하라. 나는 깊이 대궐 안에 있으므로 민간의 이해 관계를 다 알지 못한다. 너희들은 마땅히 알고 있는 대로 다 말하도록 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불씨(佛氏)의 도는 화복(禍福)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왕(父王)도 이미 신봉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만일 신봉했었다면 모후(母后)를 여의고 애모하던 때에 어찌 불사(佛事)를 대대적으로 베풀어서 명복을 빌지 않았겠는가. 백성들에게 내 뜻을 충분히 알게 하라."
○ 상이 정사를 보았다. 집의 심도원(沈道源)이, 난신 임군례(任君禮)의 아들 맹손(孟孫)을 법으로 처단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심도원이 아뢰기를,
"임맹손은 다른 연좌인과 비교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의 아비가 난언(亂言)을 할 때에 옷을 잡고 만류하였으니, 이는 그 일에 관여한 것입니다. 따라서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네가 한 말은 옳지 않다.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의리도 중요하지만, 아비와 자식 사이의 은의도 큰 것이다. 어찌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의리 때문에 아비와 자식 사이의 은의를 폐할 수 있겠는가. 맹손이 아비의 옷을 잡고 그 난언을 만류하였으니 이는 군례에게는 효성스런 아들인 것이다. 어찌 관여했다고 해서 벌을 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도원이 나가자, 상이 이르기를,
"심도원은 법리(法吏)이다. 임맹손이 죄가 있다는 것만 알고 아비를 사랑하는 효심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니, 법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 상이 경회루 동쪽에다 쓸모 없는 재목을 가지고 별실(別室)을 짓게 하였다. 주춧돌도 사용하지 않고, 띠풀로 지붕만 덮어서 검소하게 만들도록 하고 항상 이 집에 거둥하곤 하였는데, 집 밖에 짚자리가 있는 것을 보고 묻기를,
"누가 이런 짓을 하였는가? 앞으로는 나의 명령이 아니면 아무리 작은 물건이라도 안으로 들이지 말라."
하였다.
○ 호조가, 선공감(繕工監)에 비축해 둔 숯이 다 떨어지게 되자, 주군(州郡)으로 하여금 명년에 공납할 숯을 미리 바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은 한창 농사철이니, 백성을 부릴 수가 없다. 우선 줄여서 가을까지 기다리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숯의 사용량을 조목별로 기록해 오게 하여 궐내에서 사용하는 수십 석의 숯을 친히 감축시켰다. 그리고 승정원으로 하여금 1년 동안 사용량을 계산하여 감축시키게 하였는데, 감축된 땔나무와 숯이 매우 많아서 백성들이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 많은 비가 내려서 인정전(仁政殿)의 망새가 모두 무너졌다. 상이 염려한 나머지 정사 보는 것을 중단하니, 대신과 대간이, 날마다 정사를 듣고 덕을 닦아서 천재(天災)를 그치게 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옳다. 내가 정사를 듣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비가 많이 내려서 잠시 중단한 것뿐이다. 지금 벼가 다 결딴나서 이미 추수할 가망이 없어졌으니, 지금 날이 갠다고 하더라도 백성들이 무엇을 기반으로 살아갈 것인가. 경들은 마땅히 최선을 다하여 백성을 구호하도록 하라."
하였다.
○ 우의정 이원(李原) 등이, 태상(太上)에 봉숭할 뜻으로 상왕께 아뢰니, 상왕이 이르기를,
"내가 태상을 사양하는 것은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우리 태조(太祖)가 태상왕(太上王)이기 때문이며, 둘째는 인덕전(仁德殿)이 태상에 봉해지지 못했기 때문이며, 셋째는 나의 덕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였는데, 굳이 청하니 허락하였다. 상이 백관을 거느리고 옥책과 금보로 상왕을 높여 성덕신공 태상왕(聖德神功太上王)으로 삼았다.
○ 태상왕이 임진현(臨津縣)에 행행하였다가 야차에서 술자리를 열었다. 종친 및 대신이 태상을 모셨는데, 도성이 무너진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면서 우의정 이원 등에게 이르기를,
"도성을 수축(修築)하지 않을 수 없다. 대대적인 역사를 시작하게 되면 사람들이 필시 원망을 할 것이다. 그러나 잠깐동안 수고하지 않으면 오랫동안 편할 수 없다. 내가 그 수고를 담당하여 주상에게 편안함을 물려줄 수 있다면 할 만한 일이 아닌가."
하니, 이원이 대답하기를,
"도성은 집으로 말하면 울타리와 같습니다. 지금 곡식이 조금 익었으니, 수축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도성수축도감을 설치하고 제도의 정부(丁夫) 30여만 명을 징발하여 성을 수축하게 하였다.
○ 상이 좌우 신하에게 이르기를,
"세자가 지금 교육을 받아야 할 시기를 당하였으니, 단정한 선비를 선발하여 요속(寮屬)으로 삼고, 호위하는 관원까지도 신중을 기하여 간택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상왕이 지신사 김익정(金益精)을 불러 이르기를,
"내가 함께 소일할 사람이 없던 차에 주상이 매일 알현하러 오니 함께 이야기할 수 있어서 매우 좋다. 그러나 정사를 폐할까 염려된다. 너는 가서 하루 건너 오도록 하라고 아뢰도록 하라."
하니, 익정이 대답하기를,
"주상께서는 매일 정사를 보시고 나서 알현합니다. 그리고 일이 생기는 대로 아뢰고 정체시키지를 않습니다. 주상께서는 언제나 문왕(文王)이 하루에 세 번 조회했던 것을 본받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기고 계십니다. 어찌 하루 건너 와서 알현하는 것으로 안심하시겠습니까."
하였다. 태상왕이 이르기를,
"오가는 사이에 호위하는 군사들이 고달프지 않겠는가?"
하니, 익정이 아뢰기를,
"단지 숙직하는 금군만 거느리고 오는데 누가 감히 싫어하겠습니까."
하였다. 태상왕이 아뢰기를,
"과연 너의 말과 같다면 나도 안심이다."
하였다. 김익정이 돌아와서 모두 아뢰니, 상이 매우 기뻐하였다.
○ 태상왕이 유정현(柳廷顯)촹이원(李原)촹변계량(卞季良) 등에게 이르기를,
"고려 태조에게 배향된 공신은 여섯 사람이나 되는데, 우리 태조에게 배향된 공신은 네 사람뿐이다. 개국할 당시에 세운 공의 크고 작은 것을 내가 알고 있다. 남은(南誾)은 밖에서 주창하였고, 이제(李濟)는 안에서 호응하였으니, 성조(聖祖)를 도와서 대업을 창건하게 한 공훈이 매우 크다. 뒤에 비록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큰 공을 폐기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 두 사람을 승배(升配)하고자 한다."
하니, 모두가 아뢰기를,
"남은과 이제가 비록 공로가 있기는 하나, 오늘날의 신하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함께 살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지극히 공정하신 전하께서 공을 생각하여 죄를 용서하고 태실(太室)에다 배향하고자 하시니, 신들이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태상왕이 이르기를,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공이 크기 때문이다."
하고, 당 태종(唐太宗)이 위징(魏徵)을 등용한 사실을 인용하여 유시하기를,
"내가 어찌 사사로운 원망 때문에 큰 공로를 저버릴 수 있겠는가."
하고, 남은, 이제 등에게 시호를 내리고, 태조에게 승배하도록 하였다.
○ 매년 연말에 불우(佛宇)와 산천(山川)에 사람을 보내 복을 빌게 하였는데, 이를 연종환원(年終還願)이라고 하였다. 이때에 예조가 그 일을 장계(狀啓)하니, 상이 참찬 변계량에게 눈짓하며 이르기를,
"연종환원은 복을 비는 일이므로 부처를 숭상하는 단서가 된다. 최근에는 대체로 불사(佛事)에 관계되는 것은 거의 폐지하였다. 오직 선왕(先王)과 선후(先后)의 기재(忌齋)만큼은 차마 혁파하지 못했다. 이는 과인을 위하여 복을 비는 것으로서 비록 복을 얻을 이치가 있다 하더라도 오히려 비루한 일인데, 더구나 결단코 그런 이치가 없는 경우이겠는가. 혁파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변계량은 잠자코 대답하지 않고, 원숙(元肅)이 대답하기를,
"신들도 진실로 그럴 이치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상을 위하여 복을 비는 것이므로 감히 말씀드리지
하였다. 상이 드디어 불우(佛宇)에서 기도하는 것을 혁파하도록 명하였다.
○ 하교하기를,
"대체로 사죄(死罪)에 대해서는 반드시 삼복(三覆)하여 아뢰게 하는 것은 사람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지금 형조가 이복(二覆)을 한 뒤에 다시 원권(元券)을 상고하지 않으니 법을 만든 취지에 위배되는 점이 있다. 앞으로는 매번 아뢸 때 원권에 의거하여 자세히 논의해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 처음에 상이 세자를 봉하고 대언(代言) 등에게 이르기를,
"사람이 태어나 여덟 살이 되면 입학(入學)시키는 것은 옛 제도이다. 지금 세자가 여덟살이 되었으니, 올해 안으로 날을 받아서 입학시키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때에 세자가 의위(儀衛)를 갖추고서 요속(寮屬)을 거느리고 성균관에 이르렀다. 유복(儒服)을 입고 대성전(大成殿)에 들어가 작헌례를 올리고 나서 박사(博士)에게 속수례(束修禮)를 행하였다. 그런 다음 당에 올라가 《소학(小學)》을 배우고 돌아왔다.
4년(임인, 1422)
○ 태상왕이 병조에 묻기를,
"지금 날씨가 매우 찬데, 성 쌓을 군사가 길에서 추위를 만나면 얼어 죽는 자가 혹시라도 없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제도가 다 수령에게 맡겨 그의 책임하에 데려오는데, 어찌 추위에 얼어 죽게 하는 지경에 이르게까지 하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선차(宣差)를 나누어 보내 군사를 데려오는 수령(守令)에게 유시하기를,
"바람이 차면 중지하고 날이 따뜻하면 길을 나서되 한 명의 백성이라도 얼어 죽는 일이 없게 하라. 만약 죽은 자가 있을 경우에는 빠짐없이 기록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 2월. 인정전에 거둥하여 신하들의 조회를 받았다. 태후가 승하한 후로 상이 상기(喪期)가 이미 지났는데도 일찍이 정전에 거둥하여 조회를 받지 않다가 이때에 조회를 받았다. 그러나 정월 초하루와 동지, 탄일(誕日)이 돌아와도 오히려 조회를 받지 않았다. 또 태상왕이 사냥을 갈 때도 수행만 할 뿐이었고 활을 잡지는 않았다.
○ 경행(經行)을 혁파하였다. 고려 때부터 매년 봄가을 중월(仲月)이 되면 승려를 모아 반야경(般若經)을 외우면서 나발도 불고 깃대와 일산도 들게 하며 향불을 들고 앞에서 인도하여 거리를 순행하면서 질병과 재액을 퇴치하게 하였다. 이때 2품 이상이 명을 받아 행향(行香)하였는데, 이를 경행(經行)이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혁파하도록 명한 것이다.
○ 상이 신궁(新宮)에 문안가서 성을 쌓던 군사가 많이 죽은 사실을 아뢰니, 태상이 노여워하면서 조말생(趙末生)과 이명덕(李明德) 등을 책망하기를,
"성을 쌓던 군사가 매우 많이 죽었는데도 경들이 숨기고 아뢰지 않았으니 '사슴을 가리켜 말이다.'라고 한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니, 조말생 등이 부끄럽고 두려워서 대답하지 못하였다. 당시 서울에 쌀이 귀하여 굶주리는 자가 매우 많았는데, 두 분 상이 최선을 다하여 구제한 덕분에 굶어 죽는 상황에 이르지는 않았다.
○ 태상의 병이 악화되어 거처를 신궁으로 옮기니, 상이 도보로 수행하였다. 상이 병구완을 하면서부터 약과 음식을 다 친히 봉진(奉進)하였다. 증세가 악화되자 밤세워 곁에서 모시면서 옷을 벗거나 눈을 붙이지 아니하니, 신하들이 모두 우려하였다.
○ 5월. 10일(병인)에 태상왕이 신궁(新宮)에서 세상을 하직하였다. 예조가 역월제(易月制)로 행하기를 청하
"역월제는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 이후로 보통 임금이 행하던 제도이지 선왕(先王)의 법은 아니다. 대비의 초상에 예관이 부왕(父王)의 명을받아 역월제를 쓰기로 정하자, 내가 부왕에게 재차 청하여 산릉(山陵)을 모신 뒤에야 최복(衰服)을 벗었다. 지금 25일 만에 최복을 벗으라고 한다면 도리어 전에 치른 상보다도 못한 것이다.
나는 최복으로 삼년상을 치르고 싶다. 그러나 최복을 입고 정사를 볼 수는 없는 일이니 졸곡(卒哭)이 지난 후에 임시로 상복을 벗어 두고 흰옷을 입고 정사를 보겠다. 만약 상사와 관련된 일을 당하면 다 상복을 입을 것이며 대상(大祥)과 담제(?祭)의 제도는 한결같이 고례(古禮)를 따를 것이다. 백관들은 역월제를 따르는 것이 가하다."
하니, 의정부와 육조가 아뢰기를,
"태조(太祖)의 초상에 태상(太上)이 역월제를 따라 궁중에서는 상복을 입지 않았지만 실지로는 삼년상을 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감히 이 점을 아뢰었던 것입니다. 다만 신하와 자식은 같은데 전하만 상복을 입고 신하들은 상복을 벗는다는 것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인 듯합니다. 신하들도 함께 졸곡이 지난 후에 상복을 벗게 하소서."
하니, 허락하였다.
○ 대신이, 흙비[?雨]가 너무 심하다 하여 술을 올리기를 청하니, 허락하지 않고 승정원을 책망하기를,
"거상 중에 술을 마시는 것은 예가 아닌데, 너희들은 어찌 감히 예가 아닌 말을 가지고 아뢰는가?"
하니, 김익정(金益精)이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태상왕의 병환이 악화된 뒤로 어선(御膳)을 들지 않으신 지가 지금 이미 20여 일이 되었기에, 신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서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도 따져보지 않고 감히 성상을 번거롭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 경기촹충정도 해도 찰방(海道察訪) 윤득민(尹得民) 등이 풍랑을 만나 배가 파손되었다. 정부가 국문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금년에 이미 큰일이 있었고 재변도 누차 발생한 것을 보면 시운(時運)이 좋지 않은 해이다. 처음에 파견할 때 일이 꼭 성공하리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지금 큰바람을 만나 살아 온 것만도 매우 기쁜 일이다. 국문할 것까지는 없다."
하였다.
○ 병조에 분부하기를,
"조정에 있던 관리가 죽어서 고향으로 귀장(歸葬)할 경우에 지나가는 고을의 관역(館驛)으로 하여금 소달구지를 주어서 그들의 집에까지 실어 가게 하라."
하였다.
○ 의천군(宜川郡)에 사는 백성 임성부(林成富)가 본궁의 노비 원장(元莊)이 고을의 아전에게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권세를 믿는 자도 모욕을 당하는가?"
하였는데, 원장이 이 말을 듣고 미워하여 그의 말을 거짓으로 꾸며가지고 관아에다 고발하기를,
"태상왕이 승하하였을 때 그가 말하기를, '근본이 이미 흔들리고 있으니 네가 설쳐대는 것도 이제 끝장이다.' 하였습니다."
하니, 지군사 이진(李震)이 불충(不忠)에 관계된다는 이유로 엄한 형벌로 공초를 받아 보고하였다. 상이 사헌부에 명하여 복핵(覆?)하도록 하였는데, 헌부는 옥사(獄辭)가 이미 이루어졌다 하여 임성부와 원장을 대질심문도 하지 않고 또 성부가 허위로 자백한 것을 가지고 옥사(獄事)를 완결하여 아뢰었다. 상이 이르기를,
"옥사(獄事)에 틀린 것이 있다. 그리고 고발한 자와 대질 심문을 하지 않아서 그 실정을 캐내지 못한 것이 아닌가."
"옥사(獄事)를 처리하는 법은 진실로 마음을 비우고 정확하게 물어야 한다. 사죄(死罪)를 심리할 때는 살릴 방도를 찾아보고 중죄(重罪)를 심리할 때는 가볍게 처리할 방법을 찾되, 실정을 캐내어 죄를 처단하더라도 오히려 실수가 있게 된다. 더구나 지금 헌부는 말이 상에게 누를 끼쳤다 하여 죽이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다 보니, 진위 여부도 따지지 않고 위엄으로 을러대서 죄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극형을 받게 하였다. 만일 이것을 믿고 단죄(斷罪)하였더라면 어찌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았겠는가."
하고, 드디어 이진 및 헌부의 관리를 죄주도록 하였다.
○ 상이 근신에게 이르기를,
"내가 상중에 있으면서 오랫동안 경연에 거둥하지 않았다. 만약 후세의 왕들이 이것을 법으로 삼아서 어린 임금이 즉위하여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글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어찌 작은 문제만 되겠는가. 지금 군국(軍國)에 관한 중대한 일도 부득이 청단(聽斷)하고 있다. 더구나 글공부를 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고, 드디어 경연을 열도록 하였다.
○ 정사를 보았다.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최근 몇 해 동안 계속해서 흉년이 들었으니 구황 정책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곡식을 옮겨다가 구제하고 싶지만 농사가 한창인데다 백성들마저 심히 굶주리고 있어서 옮길 여력이 없다. 매일 계사(啓事)에서 황정(荒政)에 관한 일을 최우선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5년(계묘, 1423)
○ 황제가, 내관 유경(劉景)과 예부 낭중 양선(楊善) 등을 보내 부제(賻祭)와 시호(諡號)를 하사하니, 상이 태평관(太平館)에 행행하여 예를 행하였다. 상이 우니 사신들도 울었다. 사신이 말하기를,
"오늘 신하들이 모두 우는 것을 보니, 부왕이 인자하고 덕이 있었다는 것을 더욱 알겠습니다."
하고, 세자를 보고 말하기를,
"덕성스런 모습이 전하와 같으니 온 나라의 복입니다."
하였다. 잔치에서 효녕(孝寧)이 술을 돌리자, 상이 일어섰다. 사신이 관반(館伴)에게 물으니, 황희(黃喜)가 대답하기를,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진실로 엄하지만, 전하가 일어선 것은 천륜(天倫) 때문입니다."
하였다. 사신이 감탄하기를,
"옛날 촉부(蜀府) 전하가 들어와 알현할 때 황제가 동궁더러 가서 맞이하게 하면 동궁은 길을 양보하곤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효녕을 대우하시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 상이 가뭄을 걱정하여 하교하기를,
"임금이 부덕한데다 정사를 고르게 하지 못하면 하늘이 재앙을 내려서 잘못된 정치를 경계한다고 한다. 내가 변변찮은 몸으로 백성의 위에 있으면서 밝게 살피지도 못하고 편히 살게 하지도 못한 결과 수재와 한재로 흉년이 계속되고 있다. 백성들은 고통을 견디다 못해 집집이 떠돌이 생활을 하는데도 창고가 비어서 구제해 줄 수도 없다.
지금 정양(正陽)의 달을 맞이하여 또 가뭄이 들었다. 천벌(天罰)의 징조를 곰곰이 살펴보니 죄가 진실로 나에게 있었다. 안타깝고 부끄러운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지만, 충직한 말을 귀담아 들어 몸을 닦음으로써 화창한 일기를 불러들일까 한다. 대소 신료들은 각자 하늘의 경계를 애써 생각하여 위로는 과인의 잘못과 정사의 결점을 지적하고 아래로는 민간의 애환과 백성들의 이해를 지적하여 숨김없이 모두 말함으로써, 하늘을 경외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나의 간절한 마음에 부응하도록 하라."
○ 상이 가뭄을 걱정하여 어선(御膳)을 거두게 하고 소금물로 약을 복용할 때 쓰는 술을 대신하게 하니, 영의정 유정현(柳廷顯) 등이 청하기를,
"전하께서 부왕의 초상에 너무 슬퍼하고 정성을 다하다가 걱정이 쌓여 병환이 나셨는데, 지금 약을 조제할 때 드는 술마저 거두게 하시면 종묘 사직과 백성들을 어찌하시렵니까."
하면서 눈물을 흘리니, 상이 이르기를,
"다시 말하지 말라. 부덕한 내가 백성들의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가뭄으로 인한 재앙은 바로 나를 꾸짖고 있는 것이다. 어찌 내 한 몸을 위하여 술을 마실 수 있겠는가."
하였다.
○ 승정원에 전지를 내리기를,
"환관(宦官)의 직책은 등불을 밝히는 것과 청소하는 것에 있으므로 출납에 관한 임무를 부여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내가 날마다 정사를 보아 정체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그러나 근자에 김수상(金壽尙)이 제수하는 사이에 연줄을 따라 거짓으로 전하였다. 그 조짐을 길러서는 안 되겠기에 이미 그의 죄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앞으로는 크고 작은 일 할 것 없이 모두 대언(代言)이 직접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 상이 경연에 거둥하여 이르기를,
"내가 역대 사서(史書)를 보니, 옛날의 기사들은 그렇게도 자세하고 완벽하였는데, 《고려사(高麗史)》를 보니 너무 소략하였다. 지금 사관 한 사람만이 조계(朝啓)에 돌려가며 참석하여 일을 기록하니, 어찌 국가의 일을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집현전(集賢殿)은 항상 금중(禁中)에 있으니 사실을 기록할 만하다. 신장(申檣), 김상직(金尙直), 어변갑(魚變甲), 정인지(鄭麟趾), 유상지(兪尙智)에게 명하여 다 사직(史職)을 겸임하게 해서 광범위하게 일을 기록하게 하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므로 근본이 견고해야 나라가 안정될 수 있다. 나는 덕이 적은 사람으로 외람되게 백성의 주인이 되었기에 오로지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보살펴 줄 방도만이 마음속에 간절하여 지방 관리들을 신중히 선발하고 상주고 벌주는 법을 엄격하게 해 왔다. 그러나 오히려 보고 듣지 못한 것이 있을까 염려하였다. 이에 헌부에 명하여 풍문을 듣는 대로 사실을 규명토록 하였으니, 훌륭한 인재를 얻게 되면 백성을 함께 다스리도록 할 것이다.
거듭 생각건대, 백성들이 고소(告訴)하는 것은 존비(尊卑)의 명분을 무너뜨리는 요인이 된다. 전에 조정의 논의로 인하여 금법(禁法)을 제정한 것은 수재(守宰)를 소중하게 여기고 풍속을 후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사방은 넓고 고을은 많은데, 탐심 많고 잔혹한 관리들이 법을 핑계로 권위를 세워 기탄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면서 백성을 괴롭히고 나라를 병들게 하는 자가 발생할지 또 어찌 알겠는가.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의 법을 살펴보면 이미 감사(監司)를 두어 군국(郡國)을 감독하게 하고 또 수시로 조신(朝臣)을 파견하여 온 천하를 순회하면서 관리의 치적과 백성들의 고통을 두루 알아보게 하였다.
지금 옛법에 따라 조정의 관리에게 명하여 고을을 다녀보고 마을을 드나들면서 수령들이 탐심을 부리거나 형벌을 가혹하게 적용하는 등의 일을 모두 적발하도록 하고 민간의 헐벗고 굶주리는 자와 원통한 일을 당하였거나 억울한 일을 당한 자들로 하여금 모두 실정을 말하게 하라. 그리고 소문을 들은 대로 아뢰도록 하라. 내가 자세히 따져보고 나서 만일 그것이 사실이면 법에 따라 엄하게 징계해서 종신토록 서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관리는 경계하는 마음이 생겨서 관직을 망치는 데까지 이르지 않을 것이며, 백성들은 남의 허물을 들추어 고발하는 풍습이 없어도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민간에는 탄식하는 소리가 영원히 근절되어서 모두가 생활의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갈 것이다."
하였다.
○ 하교하기를,
"정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적합한 사람을 얻는 데에 달려 있으니, 관리가 그 직무에 맞는 자라야 모든 정사가 다 잘되는 법이다. 관직에 있는 문무 관원들로 하여금 용맹과 지혜가 남보다 월등해서 변방을 충분히 지킬 만한 자와, 공정하고 총명하여 수령을 맡길 만한 자와, 사무에 능숙해서 복잡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자를 각각 천거하도록 하라.
만약 사정에 따라 잘못 천거해서 탐학한 행위를 하거나 정사를 어지럽혀 그 피해가 백성에게 미치게 하는 자는 율문대로 죄를 주어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 경연에 거둥하여 《통감강목(通鑑綱目)》을 강하였다. 책을 치우고 나서 윤회(尹淮)에게 이르기를,
"진서산(眞西山)의 말에, '《통감강목》은 분량이 많아서 임금이 다 읽어보기가 쉽지 않다.'고 하였는데, 나도 이 책을 읽어 온 지가 지금 이미 3년이 되었다."
하였다.
상은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경미한 병으로 앓을 때에도 오히려 독서를 그만두지 않았다. 태종(太宗)이 젊은 환관을 시켜 책을 모두 가져가게 하고 《구소수간(歐蘇手簡)》만 곁에 두게 하였는데 그것마저 다 읽었다.
즉위하고 나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수라를 들 때에도 반드시 책을 좌우에다 펴 놓았다. 간혹 늦은 밤까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책을 보곤 하였다. 일찍이 근신에게 이르기를,
"내가 궁중에 있으면서 손을 놀리고 한가롭게 앉아 있을 때가 없었다."
하고, 또 이르기를,
"나는 어떤 책이든 보고 나면 잊어버리지 않는다."
하였으니, 그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한 것은 천성이 그러하였던 것이다.
상은 매일 사경(四更)이 되면 옷을 차려 입고 있다가 아침이 되면 조회를 받고, 다음은 정사를 보고, 다음은 윤대(輪對)를 하고, 다음은 경연에 거둥하였다. 찌는 듯한 더위나 극심한 추위에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정치를 잘해 보려고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을 가다듬었으며, 친족간에 화목하고 두 형에게 우애하니, 사람들이 여기에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동쪽의 왜인(倭人)과 북쪽의 야인(野人)이 귀순하며 경내가 편안하니, 당시에 해동요순(海東堯舜)이라고 일컬어졌다.
○ 상이 유관(柳觀)과 윤회(尹淮)에게 명하여 《고려사(高麗史)》를 개수(改修)하게 하였다. 처음에 정도전(鄭道傳)과 정총(鄭摠) 등이 《고려사》를 편수하면서 이색(李穡)과 이인복(李仁復)이 지은 《금경록(金鏡錄)》에 의거하여 찬술하였다. 정도전은 원왕(元王) 이하의 일에 참람한 부분이 많다는 이유로 종(宗)이라고 칭한 것을 왕(王)이라고 쓰고, 절일(節日)이라고 칭한 것은 생일(生日)이라고 썼으며, 짐(朕) 자는 여(予) 자로 쓰고 조(詔) 자는 교(敎) 자로 쓰는 등 많은 부분을 바꾸어 써서 사실을 인멸시켰으니, 옳고 그른 것은 정도전의 감정에서 나왔고 제시된 선과 악은 구사(舊史)의 내용과 달랐다. 하륜(河崙)이 조정에 헌의하여 구사를 상고해서 첨삭을 가하려고 했으나 착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 상이 유관과 변계량에게 명하여 바로잡도록 하였는데, 유관은 주자(朱子)의 《강목(綱目)》을 모방하여 엮으려 하고 변계량은 정도전 등이 고친 것을 그대로 두려 하여 당시의 사실과 아주 다르게 되었다. 사관 이선제(李先齊) 등이 아뢰기를,
"관호(官號)가 아무리 참람하더라도 모두 당시의 제도입니다. 제(制)라고 칭했거나 칙(勅)이라고 칭했거나 사실을 인멸해서는 안 됩니다. 명분을 바로 세우기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춘추》의 교체(郊?), 대우(大雩)와 같이 후세에 전하여 감계(鑑戒)가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어찌 다시 고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변계량은 그렇지 않다고 여겼다. 윤회가 이 사실을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공자의 《춘추》는 제왕의 권위를 의탁하여 왕법을 이룩한 것이므로 오(吳) 나라와 초(楚) 나라가 참람하게 왕(王)이라 하였기 때문에 깎아내려서 자(子)로 썼으며 성풍(成風)의 장사에 부의(賻儀)를 예의에 어긋나게 하
오늘날 사필(史筆)을 잡은 자가 이미 성인(聖人)이 쓸 것은 쓰고 삭제할 것은 삭제한 취지를 파악하지 못할 바엔 다만 사실대로 정직하게 써서 잘잘못이 그대로 드러나게 한다면 미더움이 후세에 전해지게 될 것이다. 반드시 전대의 임금을 위하여 잘못을 엄폐하려 하거나 경솔하게 고쳐서 사실을 인멸시켜서는 안 된다. 종(宗)을 고쳐 왕이라고 칭한 것은 사실대로 기록하도록 하고, 묘호(廟號)와 시호도 사실을 인멸시키지 말도록 하라. 범례(凡例)를 고친 것도 이것을 기준으로 하라."
하고, 유관과 윤회에게 명하여 다 구사(舊史)를 따르도록 하였다.
6년(갑진, 1424)
○ 강원도 의창(義倉)의 곡식 중 태반(太半)을 백성으로부터 징수하지 못하고 허위로 기록하여 회계한 자가 있자, 관찰사 황희(黃喜)가 수령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최근에 이 도의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노인과 어린이를 이끌고 사방으로 흩어져 가는데 어느 겨를에 환곡을 납부하겠는가. 만약 이것 때문에 죄를 준다면 이는 우리 백성을 거듭 괴롭히는 일이다. 논죄하지 말라."
하였다.
○ 강음현(江陰縣)의 백성 조원(曺元)이 전토(田土) 문제로 관아에 송사를 하였다가 현관(縣官)이 송사를 지체시킨 것을 분하게 여겨 하는 말이, '지금 상이 사리에 밝지 못하여 이런 사람을 수령으로 삼은 것이다.' 하였다. 의금부와 삼성(三省)이 함께 다스려서 죄주기를 청하니, 상이 국문하지 말라고 분부하였다. 정부와 육조가 또 법으로 다스리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최근에 수재와 한재가 계속되어 백성들이 매우 고달파하고 있는데, 조원이 살고 있는 고을의 수령이 이 점을 염려하지 않고 손님을 맞이하여 술을 마시면서 송사를 지체하여 처결하지 않았으니, 조원이 한 말은 다만 이것을 미워한 것뿐이다."
하고, 마침내 윤허하지 않았다.
○ 상이 이르기를,
"공신들이 태조와 태종의 제삿날이 돌아오면 사찰에 가서 수륙재(水陸齋)를 올리곤 하는데, 이것이 충효(忠孝)에 의한 생각이기는 하나 아무래도 예경(禮經)에 위배되는 듯하다."
하니, 이조 판서 허조(許稠)가 아뢰기를,
"수륙재는 본래 정상적인 예가 아닙니다. 더구나 신위(神位)를 단(壇) 아래에다 설치하는 것은 더욱 거만하고 무례한 행위입니다. 제사에 관한 예는 각각 명분이 정해져 있어서 절대로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고례(古禮)에, '지손(支孫)이나 서손(庶孫)은 선조(先祖)의 제사를 지낼 수가 없으며, 대부(大夫)는 제후(諸侯)에게 조제(祖祭)를 지낼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어찌 한때의 사심을 갖고 예에 어긋나고 분수를 범하는 짓을 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 상이 유정현(柳廷顯)에게 이르기를,
"봄가을로 강무(講武)할 때, 의정부와 육조가 호종(扈從)하는 것은 아무래도 일에 폐가 될까 염려된다. 정부와 병조만 호종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다 감축시켰으면 한다."
하니, 유정현이 아뢰기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이 말은 의미가 있는 말이다. 비록 대신으로 하여금 호종하게 하더라도 만약 광패(狂悖)한 임금이 대신의 말을 듣지 않고 절도없이 각처를 돌아다니며 논다면 어떻게 만류하겠는가?"
하니, 유정현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대신과 함께 가지 않으셨다가 혹시라도 의외의 변고라도 발생하게 되면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하니, 상이 매우 그럴듯하게 여겼다.
○ 상이,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가 세상을 하직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신에게 이르기를,
"태조황제의 유조(遺詔)에, '천하의 신민들은 상복을 3일 동안 입고 나서 벗으라.' 하였는데, 이는 주현(州縣)의 관리와 백성들을 대상으로 한 말이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 시종(始終)의 의리가 지극히 중대하므로 대행황제의 초상에 나는 차마 3일 만에 상복을 벗을 수 없다. 그리고 고례(古禮)에, '외정(外廷)에서는 역월제(易月制)를 행하였지만 궁중에서는 실지로 삼년상을 행하였다.' 하였으니, 지금 신하들은 3일 만에 상복을 벗도록 하라. 나는 3일 후에 임시로 흰옷을 입고 정사를 보다가 27일이 되면 길복(吉服)으로 갈아입을 것이다."
하니, 유정현 등이, '유조(遺詔)가 이와 같으므로 3일제를 어겨서는 안 됩니다.' 하였으나, 상은 결국 27일제를 행하였다.
○ 예조가, 동지(冬至)에 회례연(會禮宴)을 베풀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사람의 말에, '예(禮)가 지나치면 정리가 성기게 되고 악(樂)이 지나치면 절제를 잃게 된다.' 하였다. 지금 신하들이 한 해 동안 수고하였으니, 내가 어찌 한 차례 모여서 즐겁게 지내고 싶지 않겠는가마는, 근래에 수재와 한재가 계속되고 있고 하늘이 경고를 하고 있는데다 백성들이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으니, 우선 중지하라."
하였다.
○ 상이 변계량을 불러 이르기를,
"《시경》 빈풍(?風)과 《서경》 무일(無逸)에 농사짓는 어려움이 모두 실려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풍습은 중국과 다르다. 민간의 생업(生業)의 어려움과 요역(?役)의 고초를 경들이 달마다 그림으로 그리고 거기에다 경계하는 말까지 곁들여서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6권 7년(을사, 1425)
○ 형조에 전지를 내리기를,
"옥(獄)이란 죄가 있는 자를 징계하는 곳이지 본래 사람을 죽게 하는 곳은 아니다. 그런데 옥을 담당한 관원이 옥에 갇힌 죄수를 보살피는 데 태만히 하여서 극심한 추위와 찌는 듯한 더위에 혹은 병에 걸리고 혹은 굶주려서 간간이 비명에 죽게 하는 경우가 있다.
중외의 관리들은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감옥 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질병을 치료해 주되, 돌보아 줄 사람이 없는 죄수들에게는 관아에서 옷과 먹을 것을 주게 하라. 만약 게으름을 피우고 잘 봉행하지 않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엄하게 규찰하여 다스리도록 하겠다."
하였다.
○ 상이 서교(西郊)에 행행하여 농작물을 보았다. 말고삐를 잡고 천천히 가면서 밀과 보리가 무성한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효령대군(孝寧大君) 별장의 새로 지은 정자에 올랐는데 마침 단비가 줄기차게 내려서 잠깐 사이에 온 들이 흠뻑 젖으니, 상이 매우 기뻐하고 그 정자를 희우정(喜雨亭)이라고 이름을 지어
○ 집현전(集賢殿)이 상서하여, "수령의 임기를 6년으로 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처음에 오랫동안 맡겨야 한다는 의논을 하륜(河崙)이 제기하였다. 그러나 미처 건의하여 시행하지는 못하였다. 그가 일찍이 말하기를, "명(明) 나라는 전적으로 관직을 오랫동안 맡김으로써 천하를 유지하였다."고 하였으며, 영의정부사 유정현(柳廷顯), 예조 판서 허조(許稠)도 일찍이 태종에게 중외의 관직을 오랫동안 맡기는 법을 만들 것을 권하니, 태종도 그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바로 시행하지는 않았다.
상이 즉위하자, 유정현과 허조가 매번 상에게 이 제도를 시행하도록 권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허조가 이조 판서가 되자, 상이 드디어 뜻을 결정하고 법을 만들었는데 중외에서는 떠들어대면서 모두 불편하다고 하였다. 혹은 조종이 이루어 놓은 법을 바꿀 수 없다고 말하고, 혹은 백성들에게 해가 된다고 말하고, 혹은 관제(官制)가 문란해진다고 말하고, 혹은 어버이 봉양을 오랫동안 못하게 된다고 말하고, 혹은 자녀들의 혼인에 시기를 놓치게 된다고 말하였으나, 상이 모두 듣지 않았다. 이때에 중외가 조용하고 백성들이 생업에 안정을 찾았으며 법을 정밀하게 만드니 관리들이 더욱 성실하게 법을 집행하였다. 상이 육경(六經)을 깊이 연구하고 많은 책을 널리 보아서 생각이 매우 깊으셨기 때문에 여러 논의가 뒤숭숭하고 때마침 가뭄이 들어 이론이 들끓었지만 굳게 지켜 바꾸지 않았던 것이다.
○ 하교하기를,
"형법(刑法)으로 정치를 보좌하고 율문(律文)으로 형벌을 결정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상용되는 법이다. 그러나 율문에 수록된 법 조항은 한계가 있고 사람이 죄를 범하는 것은 한정이 없다. 그래서 형서(刑書)에 '해당되는 법 조항이 없으면 인접 조항을 가져다 적용한다.'는 조문이 있다. 무릇 형벌이란 진실로 성현(聖賢)들도 신중을 기하였던 바이니, 법을 적용할 때에 작은 것일지라도 더욱 정상을 살펴야 한다.
그런데 지금 법을 맡은 관리들은 인접 조항을 가져다가 적용할 때에 대부분 무거운 법 조항을 따르고 있으니, 나는 이 점을 심히 민망하게 여긴다. 죄가 가벼운 것도 같고 무거운 것도 같은데 정리(情理)가 서로 비슷한 경우에는 가벼운 법 조항을 따르도록 하고, 만약 정리가 무거운 쪽에 가까운 경우에는 되도록 법에 맞도록 하라. 《서경(書經)》에 '조심하라. 조심하라. 형벌 쓰는 것을 조심하라.' 한 말을 나는 가슴에 새기고 있다. 또 '네가 맡은 옥사를 조심히 처리해서 우리 왕국을 장구하게 하라.' 한 말을 유사들은 유념하도록 하라."
하였다.
○ 당시에 한재 때문에 제도에서 올리는 찬선(饌膳)을 중지시켰다. 대신이 그전대로 찬선을 진어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가뭄과 홍수로 농사가 말이 아니다. 하늘이 이미 나를 재변으로 견책을 하고 있는데, 어찌 백성들을 수고롭게 해서 찬선을 진어하게 하겠는가."
하였다.
○ 상이 이르기를
"겨울이 춥고 눈이 많이 내리면 이는 명년에 풍년이 들 징조이다. 송(宋) 나라 사람이 눈 오기를 빌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하니, 유정현이 아뢰기를,
"대체로 정치란 정상적인 도리에 순응할 뿐입니다. 사람의 일이 순조로우면 하늘의 도리도 순조로워집니다. 이미 순응하는 도리를 다했는데도 불행하게 재변이 발생할 경우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덕을 닦고 잘못을 뉘우치면서 새로운 마음으로 임한다면 하늘의 뜻도 돌릴 수가 있습니다만 만약 평소에 하늘을 섬기는 도리를 다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재변을 면하려고 한다면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가상하게 여기고 받아들였다.
○ 헌부가, 기일이 지났는데도 아내를 장사지내지 않는 자를 논핵하니, 상이 좌우의 신하에게 이르기를,
"존비와 귀천에 따라 장사 기일에 대한 제도가 각각 정해져 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음양(陰陽)이 화(禍)와 복(福)에 구애된다는 말에 현혹되어 오랫동안 장사를 지내지 않고 있다. 일찍이 《장일통요(葬日通要)》라
하였다.
○ 상이 좌필선 정인지(鄭麟趾)와 우문학 최만리(崔萬理)에게 명하여 번갈아가며 세자의 강론에 입시하게 하니, 고금의 아름다운 말과 훌륭한 정치를 진달하기도 하고 민간의 일을 말하기도 하여 저녁이 되어서야 파하기를 매일처럼 하였다. 일찍이 서연관을 불러 이르기를,
"세자가 항상 궁중에만 있고 밖에 나간 적이 없어 건강이 염려된다. 그래서 요즘은 조아(朝衙)에 수행하도록 하였다. 내가 교외에 행행할 때 함께 데리고 가지 않은 것도 놀이에 빠져들까 염려해서 그런 것이다."
하였다.
○ 상이 일찍이 윤회에게 묻기를,
"나는 유사(儒士)들에게 여러 사서(史書)를 나누어 주어서 읽게 하고 싶다."
하였는데, 윤회가 경학(經學)을 위주로 해야 하고 전적으로 사학(史學)만을 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대답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경연에서 《좌전(左傳)》,《사기(史記)》,《한서(漢書)》에 기록된 고사를 물으면 간혹 대답을 하지 못하곤 하는데, 고사를 두루 보아서 고문(顧問)에 대비하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하고, 드디어 정인지 등에게 명하여 여러 사서를 나누어 읽게 하였다.
○ 상이 정부와 육조에 이르기를,
"금년 날씨가 여름은 가물고 겨울은 따뜻하다. 12월은 얼음을 저장하는 달인데 기온이 봄처럼 따뜻하다. 또 어제는 많은 안개가 끼었다. 조용히 그 원인을 생각해보니 잘못이 실지로 나에게 있었다. 간하는 말을 들어서 하늘의 견책에 보답하고자 한다.
지난달을 두루 살펴보면 비록 태평스런 때일지라도 대신이 오히려 옷소매를 잡고 간절하게 간하는 자도 있었고, 또 그들이 말한 것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면이 있었다. 오늘날로 비추어 보면 비록 조금은 안정된 시기라고는 하지만 틀림없이 옛날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거리낌없이 말을 하거나 면전에서 간쟁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 또 그 말도 매우 적절하지 못하다. 어째서 요즘 사람은 옛날만 못한가?"
하니, 좌의정 이원(李原)이 대답하기를,
"몰라서 말씀드리지 못한 경우는 더러 있겠지만 어찌 감히 알고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옛날만 못하다고 말한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슨 일을 논의할 때에 한 사람이 옳다고 말하면 모두가 따라서 옳다고 하고, 한 사람이 그르다고 말하면 모두가 따라서 그르다고 말할 뿐이고, 누구 하나 여러 사람의 논의에 맞서서 논란을 벌이는 자가 없었다. 이런 것을 가지고 내가 요즘 사람이 옛날만 못하다고 한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한 나라 선제(宣帝)를 세상 사람들이 명분과 실상을 종합한 임금이라고 칭한다. 안으로는 관리들이 맡은 바 직무에 적합하였고 백성들도 생업에 안주하였으며, 밖으로는 흉노가 정성을 다하여 번국(藩國)이라고 칭하면서 하급 관리로 임명해 주기를 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후세에 의논하는 자들은 그를 두고 화(禍)를 기초한 임금이라고 하였다.
송 나라 왕안석(王安石)이 재상이 되자, 자신이 나라를 보좌하고 백성을 안정시킬 것이라고 하였고, 신종(神宗)도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를 잘한다고 했다. 그러나 후세의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두려운 일이 아닌가. 세상이 태평스럽다 하더라도 이 태평스러운 것만 믿는 것은 난리의 조짐을 일으키는 결과가 된다."
하니, 한상덕(韓尙德)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오늘 하신 말씀은 실로 종묘 사직과 백성들의 복이라 하겠습니다."
하고, 허조(許稠)가 아뢰기를,
하였다.
8년(병오, 1426)
○ 상이, 화재가 계속 발생하고 도둑이 근절되지 않는 것을 염려하다 보니 걱정스러움이 표정에 나타났다. 지사간(知司諫) 고약해(高若海)가 아뢰기를,
"화재가 발생하는 것은 민심이 바르지 못한 때문이며, 민심이 바르지 못한 것은 대신이 바르지 못한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지금 위에 성명이 계시는데, 대신이 제대로 음양의 기후를 조섭하지 못해서 이와 같은 재변이 발생한 것입니다. 옛사람의 말에, '대인(大人)은 단지 마음 하나를 바로잡을 뿐이다.' 하였으니, 대인의 마음이 바로잡히면 민심도 순조로워지고 천기도 순조로워질 것입니다. 천기(天氣)가 순조로운데 어찌 재변이 발생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너의 말이 맞다. 음양이 고르지 못한 것은 내가 부덕한 소치이다. 내가 비록 부덕하지만 대신이 잘 도와서 부족한 점을 고쳐 나간다면 하늘의 변고에 보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 황해도 관찰사 이명덕(李明德)이 감로(甘露)를 진헌하였다. 상이 대언(代言) 허성(許誠)에게 이르기를,
"대체로 상서(祥瑞)의 반응은 간혹 나타나야 할 때 나타나기도 하고, 나타나지 않아야 할 때 나타나기도 하여 그 반응이 항상성이 없다. 역대로 혼란했던 시기를 보면 간혹 감로(甘露)가 내리기도 하고 영지(靈芝)가 나기도 했는데, 이는 반응을 나타내지 않아야 할 때 반응을 나타낸 것이었다. 지금 천재가 거듭 이르고 비도 내리지 않고 있으니 이는 마땅히 반응을 보이지 않아야 할 때 감로가 내린 것이다. 만약 마땅히 반응을 보이지 않아야 할 때 반응을 보인 것이라면 이것을 옛사람은 재변으로 논의를 한 자가 있으니, 두렵지 아니한가."
하였다.
○ 상림원(上林園)의 화훼(花卉)와 비둘기를 다 민간에 나누어 주도록 명하였다. 상이 대체로 진귀한 물건들을 좋아하는 것이 없었다.
○ 함길도 도절제사 하경복(河敬復)이 변경을 진무하니, 야인(野人)들이 위엄을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상이 이 말을 듣고 그를 소중하게 여겨 그에게 임무를 오랫동안 맡기고 그의 어미를 잘 위로하였다. 호군 홍사석(洪師錫)에게 편지를 보내어 포상하기를,
"한지에서 노숙하며 지내니 고생이 많을 줄 안다. 경에게는 노모가 있어 멀리 진양(晉陽)에 살고 있는데, 지난 임인년에 경은 변방의 상황이 급박해서 가서 뵈올 겨를도 없이 명을 받고 즉시 떠났다. 진(鎭)에 도착해서는 인자함으로 군졸을 보살피고 위엄으로 적들을 제어하니 간악한 적들은 전쟁을 그만두고 변방의 백성들은 편히 살아가게 되었다. 나는 경을 마치 장성(長城)처럼 의지하고 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식을 기다리고 자식은 어머니를 생각해온 지가 이미 5년이 되었다. 내가 어찌 잠시인들 잊었겠는가. 그래서 경을 대신할 장수를 보내려고 조정의 신하들에게 상의해 보았으나 실지로 적임자가 없었다. 옛사람의 말에, '전쟁에서 용맹이 없는 것은 효도가 아니다.' 하였으니, 경이 변방에서 마음을 다하는 것이 어찌 큰 효도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나는 경의 뜻을 헤아려서 특별히 경의 어미를 돌보아 주고 있으니 경은 마음을 너그럽게 갖고 나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라.
지금 홍사석을 보내 경에게 잔치를 내리고 의관과 마필을 함께 하사하니 도착하거든 받도록 하라. 여름철에는 억지로라도 먹어서 몸을 아끼도록 하라."
하였다.
○ 의금부가 아뢰기를,
"궁인(宮人)이 어고(御庫)의 재물을 훔쳤으니 율문에는 참수에 해당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지사간 고약해가 아뢰기를,
"신은 사람을 사형시키는 문제를 가볍게 처리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옛날 성인은 비록 좌우의 여러 대부와 나라의 사람들이 다 죽여야 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죽여야 할 것인지를 직접 살펴본 뒤에 처형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사형수는 반드시 삼복법(三覆法)을 씁니다. 지금 궁인이 재물을 훔쳤다 하여 의금부에 내려 참수하고 복주(覆奏)하게 하지 않는다면, 후세의 중주(中主)가 한때의 사사로운 노여움으로 이것을 구실삼아 문득 조옥(詔獄)에 가두어 가볍게 주륙을 행하게 될 것이니, 법으로 제시할 일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의금부에 삼복법을 제정하도록 하였다.
○ 상이 《대학연의》를 강하였는데 운한장(雲漢章)에 이르러서 한숨을 쉬며 탄식하기를,
"내가 한재를 겪어왔지만 금년같이 심한 때는 없었다. 다행히 종묘 사직의 도움을 받아 백성들이 기근을 면하였다. 운한장의 내용은 바로 내가 가뭄을 걱정하는 뜻과 같다."
하였다.
○ 이때에 근정전(勤政殿)을 중수하였다. 참찬 허조가 아뢰기를,
"처음 지을 때에는 전의 규모나 단청을 태조가 검소하게 하였으니, 원컨대 전하께서도 사치스럽게 하지 마소서. 위에서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아래에서는 반드시 더 심한 자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단청에 금을 쓰는 것에 대해서 나도 너무 사치스럽다고 여겼다. 즉시 동역관(董役官)에게 명하여 금을 사용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 상이 이르기를,
"전에 대신이 호패법(號牌法)을 다시 실시하기를 청하였는데, 태종도 이미 시행하였다가 백성이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혁파하였다. 지금 만일 다시 시행하게 되면 아무래도 백성들이 원망할 것이다."
하였다. 변계량(卞季良)이 아뢰기를,
"한 읍의 주인이 되면 당연히 한 읍의 호구를 알아야 하고, 한 나라의 주인이 되면 당연히 한 나라의 호구를 알아야 하며, 천하의 주인이 되면 마땅히 천하의 호구를 알아야 합니다. 대체로 백성들의 원하고 싫어하는 것을 구차스럽게 따라서는 안 됩니다. 지금 백성들이 호패를 싫어하는 것은 호적에서 빠져 부역을 피하고자 해서 그런 것입니다. 호패법을 마땅히 거행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9년(정미, 1427)
○ 상이 강을 건너 금천(衿川)에 행행하였다가 매를 관람하고 돌아오는 길에 강가에 이르렀는데, 눈바람이 갑자기 몰아치고 파도가 거세어서 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 금천현의 쌀과 콩을 가져다가 호종한 군사들에게 지급하도록 하였다. 한밤이 되었는데도 바람은 오히려 멈추지 않았고 새벽이 되어서야 건널 수가 있었다. 좌의정 이직(李稷)이 길에서 알현하니, 상이 이르기를,
"태종께서 매를 관람하실 때 강을 건너지 않으셨던 것은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남의 말을 지나치게 믿어 강을 건너갔으니 눈바람의 변은 하늘이 나를 꾸짖는 것이었다."
하였다. 헌부가, 백관이 상의 기거(起居)에 대해 봉문(奉問)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예관을 논핵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 일은 나의 잘못이다. 논핵하지 말라."
하였다. 이후로는 다시는 강 밖으로 행행하지 않았다.
○ 11월. 천둥 번개가 치면서 비가 내렸다. 상이 이르기를,
하니, 허조가 아뢰기를,
"겨울에 천둥 번개가 치는 일은 옛날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과 같이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너무 지나치게 염려하시니 신들은 도리어 걱정이 병환이 되실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 경연에 거둥하여 《통감》을 강하였다. "당환(唐環)이 졸하자 그의 아들이 거상 중에 있었는데, 황제가 근신에게 명하여 그의 집으로 가서 기복(起復)하라는 명을 전하게 하였더니, 근신이 돌아와서 주달하기를 '그가 너무 상심하고 있어서 신이 감히 분부를 전하지 못하였습니다.'" 한 부분에 이르러서, 참찬관 허성(許誠)이 아뢰기를,
"최근에 기복하라는 분부가 한 번만이 아니니 신이 보기에는 아마도 이 명이 자주 내려지다보면 상기(喪期)를 줄이는 조사(朝士)가 많아질 것이고 아랫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본받아서 바람에 쏠리듯 따라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앞으로는 꼭 필요한 대신이 아니면 기복하게 하지 말라."
하였다.
○ 호조가, 사재감(司宰監)의 묵은 건어(乾魚)를 값을 받고 팔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백성들과 이끗을 다투는 것이다."
하고, 성균관과 오부(五部) 학생에게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10년(무신, 1428)
○ 《통감》을 강하였다. "이직신(李直臣)이 장오죄에 연좌되어 죽게 되었는데, 환관이 뇌물을 받고 용서해 주기를 청하였다. 어사중승 우승유(牛僧孺)가 굳이 주벌을 가하기를 청하였다." 한 부분에 이르러서, 상이 이르기를,
"옛날의 제왕은 환관이 용사를 하게 되면 그 해가 얼마나 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터인데 어찌 그렇게 믿고 깨닫지 못했단 말인가. 어쩌면 후사가 없어 원대한 계획이 없을 것이라고 여겨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니, 검토관 설순(?循)이 아뢰기를,
"한 나라와 당 나라 때에는 환관이 심지어 임금을 폐치한 경우도 있었는데 어찌 원대한 계획이 없었겠습니까. 음양의 나쁜 기운이 쌓여서 내외가 맞지 않으니 국가의 일을 함께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환관은 다만 사령(使令)을 주는 일을 맡길 뿐이다."
하였다.
○ 상이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예람하고 집현전 응교 김돈(金墩)에게 이르기를,
"내가 시험삼아 읽어보니 의리(義理)가 정미(精微)하여 쉽사리 탐구하여 볼 수가 없다. 너는 유념하고 보아서 고문(顧問)에 대비하도록 하라."
하였다.
○ 어떤 사람이 광화문(光化門)의 종(鐘)을 쳐서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문고(申聞鼓)를 관장하고 있는 자가 금지하였기 때문에 종을 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신문고를 설치한 것은 아랫사람들의 실정이 상달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만일 신고한 내용이 사실이 아니면 죄는 그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어찌 신문고를 맡고 있는 관리와 관계가 있겠는가. 이와 같이 억제시켜서 억울함을 신고하지 못하게 한 것이 필시 많을 것이다."
하고, 신문고를 관장하고 있는 자를 파직시켰다.
○ 상이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군현(郡縣)이 의창(義倉)의 조곡(?穀)을 재촉하여 징수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심히 고통스러워하고 있다고 한다. 올해에 겨우 기근을 면하였으므로 나는 염출을 중지해서 백성들의 식생활을 여유있게 하고 싶다."
하니, 찬성 권진(權軫) 등이 대답하기를,
"지난해에 예전에 꾸어준 세곡을 견감시켜 주었는데 금년에 또 염출을 중지하신다면 비록 부자라 하더라도 필시 세금을 내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의창을 설치한 것은 백성을 위한 것이다. 시절이 고르지 못하여 백성들이 다 식생활이 어려운 마당에 만약 억지로 환곡을 징수하게 되면 가난한 백성들은 곡식을 모두 관아로 실어보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식생활의 어렵기가 흉년과 차이가 없게 된다. 수령에게 유시하여 백성들의 빈부의 형편을 보아서 징수하게 하라. 만약 한 해 동안 풍년든 것을 가지고 전일의 환곡까지 다 받아낸다면, 어렵게 살아가는 백성들이 반드시 곤궁에 처하게 될 것이다. 나는 차마 그렇게 못 하겠다."
하였다.
○ 상이, 진주(晉州)에 사는 백성이 아비를 죽였다는 말을 듣고, 놀라서 이르기를,
"이는 내가 부덕한 소치이다. 전에 허조가 매번 상하(上下)의 구분을 엄격히 할 것으로 나에게 권하였을 때 나는 그 말을 듣고 가상하게 여겼었는데, 지금 보니 과연 그렇다."
하고, 드디어 신하들을 불러서 효제(孝悌)를 돈독히 하고 풍속(風俗)을 후하게 하는 방안을 논의하게 하니, 변계량이 《효행록(孝行錄)》등의 책을 널리 퍼뜨려서 시골의 백성들까지 항상 읽게 해서 자연스럽게 효제와 예의의 풍습에 젖어들게 하도록 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설순(?循)에게 명하여 《효행록》을 다시 찬술하여 올리게 하였다.
○ 흰 꿩이 나타났다. 예조가 아뢰기를,
"전(傳)에 이르기를, '임금이 종묘를 공경하면 흰 까마귀가 나타난다.' 하였는데, 지금 흰 꿩이 상서를 드리니, 신들은 하례를 청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겸양하여 윤허하지 않았다.
11년(기유, 1429)
○ 하교하기를,
"자식이 부모에 대해서 생전에는 효도를 다하고 죽으면 슬픔을 다하는 것은 타고난 천성으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고려 말기에 무지한 백성들이 사악한 마음을 가지고 부모가 죽고 나면 즉시 그 집을 헐어버리기도 하고 혹은 죽게 되어 숨이 떨어지기도 전에 외사(外舍)에다 내다가 두기 때문에 비록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경우에도 끝내 죽게 한 일이 있었다. 장사를 지낼 때에도 향도(香徒)를 많이 모아다가 술과 음악을 벌여놓고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하였는데, 지금 그 풍습이 아직도 남아서 없어지지 않고 있으니 나는 몹시 염려된다.
아, 사람은 모두가 각각 타고난 본성이 있는데 어느 누가 자기 부모를 사랑하지 않겠는가. 풍습에 젖어서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앞으로는 유사가 법규(法規)를 분명하게 제시해서 구습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스스로 새로워지게 해서 인효(仁孝)한 풍습을 이루게 하라."
하였다.
○ 상이 《좌전》을 강하였다. "관중(管仲)이 제후(齊侯)에게 말하기를, '떨어져 있는 사람은 예를 가지고 부르고 먼 곳에 있는 사람은 덕을 가지고 회유하소서. 덕과 예를 바꾸지 않으면 회유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한 부분에 이르러, 탄식하며 이르기를,
"공자가 일찍이 '진 문공(晉文公)은 속임수를 쓰고 정도(正道)를 지키지 않았으며, 제 환공(齊桓公)은 정도를
하고, 또 "행한 일을 기록하지 않는 것은 성덕이 아니다." 한 부분에 이르러서, 상이 이르기를,
"사관(史官)은 마땅히 한때 행사의 자취를 모두 기록하여 후세에 제시해야 한다. 임금이 되어 어찌 사관으로 하여금 좋은 일만 기록하고 좋지 않은 일은 기록하지 말게 한다는 말인가. 이 말을 한 사람은 실언(失言)을 한 것이다."
하였다.
○ 상이, 오방(五方)의 풍토(風土)가 같지 않고 심는 것도 각각 적합한 것이 있어서 다 고서(古書)대로 할 수가 없다 하여, 이에 제도의 관찰사에게 명하여 경험 많은 농부들에게 이미 경험한 것을 물어서 보고하게 하고, 총제(摠制) 정초(鄭招)에게 명하여 편차하도록 하였다. 책이 완성되자, 《농사직설(農事直說)》로 이름을 정하고 중외에 반포하였다.
○ 처음에 종학(宗學)을 건립하고, 문행(文行)이 있는 자를 박사로 삼아 종친(宗親)을 가르치게 하였는데, 이후로 종실이 모두 예의와 규칙을 따랐다.
○ 상이 《시경》을 강하였다. 영대편(靈臺篇)에 이르러서 이르기를,
"영대를 지은 것은 비록 분침(??)을 살피고 재상(災祥)을 살피기 위한 것이지만, 날짐승을 기르는 것은 놀이를 위한 기구와 같다. 문왕과 무왕이 다스리던 성대한 시기에 마땅히 이런 일이 없을 것인데 엄연히 있었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한(漢) 나라 때에는 원유(苑?)를 숭상하여 심지어 싸우는 짐승을 두어 놀이를 삼는 자도 있었으니 말류(末流)의 폐단이 이런 정도에까지 이른 것이다."
하였다.
12년(경술, 1430)
○ 상이 이르기를,
"임금은 하늘을 대신해서 만물을 다스린다. 천도에 순응해야 하므로 옛날에는 주로 봄과 여름에 상을 주고 가을과 겨울에 형벌을 주었다. 고인이 역시 말하기를, '계추(季秋)가 지난 후에 사죄(死罪)를 청한다.' 하였는데, 지금은 추분(秋分) 전에 주복(奏覆)하였다가 시기를 기다려 형벌을 가하는 것은 진실로 옥사(獄事)를 지연시킬까 염려해서 그런 것이다. 그러나 초복(初覆)을 이미 아뢰고 선뜻 옥사를 완결하는 것은 옛법에 위배된다. 앞으로는 사죄에 해당하는 경우는 가을이 되거든 아뢰게 하라."
하였다.
○ 상이 지신사 허성(許誠)에게 이르기를,
"고려 임금 중에 백성에게 공덕이 있는 임금은 이미 봉사(奉祀)를 하도록 명하였다. 옛 도읍지에 있는 능묘가 무너졌는데 보수하지 않고 차마 그대로 둘 수 없다. 그곳에 있는 관원으로 하여금 나무꾼을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수시로 수호(修護)하게 하라."
하였다.
○ 상이 좌우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옛날의 제왕은 안전할 때에도 위험을 잊지 않았으며 잘 다스려질 때에도 난리를 잊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천지와 조종의 보우를 받아 변방이 조용하니 백성들이 전쟁을 모르고 있다. 대체로 인정이 안일과 오락에 젖어 있으면 점점 느슨해져서, 갑자기 변란이 발생하면 어찌할 줄을 모르게 되니, 기율(紀律)을 엄격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근래에 농사철이나 추운 겨울에는 간혹 군사가 번(番)에 오르는 것을 중지하곤 했는데 앞으로는 군사들에게 계절을 따지지 말고 번에 오르도록 하라."
○ 상이 경연에 거둥하여 옛날의 절의 있는 선비에 대하여 논하였다. 인해서 이르기를,
"고려의 명문 세족(名門世族)이 다 우리나라를 신하의 예로 섬기고 있다. 길재(吉再)는 한미한 선비로 절의를 지켜 벼슬하지 않았으니 이는 사람이 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내가 이미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중직하였고 또 그의 자식에게 관작을 준 것은 그의 절의를 포상하기 위한 것이다."
하였다.
○ 함길도 도절제사 하경복(河敬復)이 길들인 사슴을 진상하려 하였다. 상이 듣고 이르기를,
"진귀한 새와 기이한 짐승에 대해서는 옛사람도 경계한 바이니, 진상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사람은 오장(五臟)이 다 등 가까이에 매달려 있다. 그러므로 등을 치는 형을 금하도록 이미 법으로 정해 놓았다. 그러나 관리가 고문을 할 때에 대부분 등을 치기 때문에 자못 인명(人命)을 상하게 된다. 앞으로는 경외의 관리로 하여금 사람의 등을 매로 치지 말게 하라. 이를 어기는 자는 죄를 줄 것이다."
하였다.
○ 하교하기를,
"감옥에 갇히는 것과 매맞는 것을 사람들이 다 고통으로 여기고 있는데 그중에 노약자와 어린이가 더욱 불쌍하다. 앞으로 15세 이하와 70세 이상인 자는 살인 강도를 제외하고 감금하지 말게 하고, 80세 이상과 10세 이하는 비록 죽을 죄를 범하였더라도 감금하거나 고문을 하지 말고 여러 사람의 증언을 근거로 하여 죄를 결정하게 하라."
하였다.
13년(신해, 1431)
○ 상이 이르기를,
"《태종실록(太宗實錄)》이 거의 완성되었으니 내가 보고 싶다."
하니, 우의정 맹사성(孟思誠)이 아뢰기를,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은 다 당시의 일을 후세에 전하기 위한 것으로 모두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 보시더라도 태종을 위하여 고칠 수 없습니다. 지금 한 번 보시고 나면 후세의 임금들이 본을 받을 것이고 사관은 의구심을 갖고 필시 직분을 잃게 될 것이니, 어떻게 장래에 미더움을 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 상이 일찍이 소갈병을 앓았다. 대언(代言) 등이 아뢰기를,
"의원의 말에, '우선 음식으로 다스려야 하는데, 흰 수탉, 누런 암꿩, 양고기가 모두 소갈병을 지식시킵니다.' 하였습니다. 유사로 하여금 날마다 올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어찌 스스로를 봉양하고자 동물을 죽이라고 명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양(羊)은 우리나라에서 나는 짐승이 아닌데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대언 등이 아뢰기를,
"관아에서 기르는 양은 번식을 잘하니 우선 시험해 보소서."
하였는데, 상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 상이 김종서(金宗瑞)에게 이르기를,
"경은 일찍이 언관이 되어 양녕(讓寧)의 일에 대하여 자주 말하곤 하였는데, 이는 나의 본심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양녕의 잘못은 여색을 탐하고 소인배들과 친하였으며 소행이 엉망인데다 가르침을 따르지 않은 것이
하였다.
○ 하교하기를,
"형(刑)이란, 치안을 보조하기 위한 도구이다. 그래서 옛날 태평스런 시대에도 폐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순(舜) 임금이 천자가 되어 형벌 쓰는 것을 애처롭게 여기니, 고요(皐陶)가 법사가 되어 오형(五刑)을 밝혀서 오교(五敎)를 도와 태평스런 정치를 이루었다. 정말 성대한 시대였다. 그후 진시황(秦始皇)에 이르러 잔인하고 포악한 것을 숭상하고 조고(趙高)의 무리가 혹독한 것만 힘쓰고 은혜가 없는 정치를 주도하니, 이세(二世)에 이르러 망하고 말았다. 경계로 삼을 일이 아닌가.
옥(獄)이란, 사람의 생사가 달려 있다. 진실로 그 실정을 캐내지 않고 매만 때려서 해결하려고 하여 죄가 있는 자는 요행으로 면하게 하고 죄가 없는 자를 죄에 걸려들게 한다면, 형벌은 그 죄에 맞지 않고 원한만 쌓여서 끝내 풀 수가 없게 될 터이니 이는 천지의 화기를 손상시키고 수해와 한해와 같은 재해를 불러들이는 결과가 된다. 이것이 예나 이제나 공통된 걱정거리이다.
내가 중외의 옥을 담당한 관원들을 보니, 최초에 국문한 것으로 문안(文案)을 만들어 놓고 뒤에 복안(覆案)하는 것은 대부분 머뭇거리다가 형식적으로 말만 꾸밀 뿐이고 직접 참여해서 상세히 궁구하여 실정을 캐내는 자는 있지 않았다. 아, 죽은 자는 다시 살려낼 수 없고, 형을 받은 자는 다시 물릴 수가 없는 것이다. 혹시 한 번이라도 실수를 하게 되면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밤낮으로 애처로운 생각을 갖고 잠시도 마음속에서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를 위하여 법을 집행하는 자는 정밀하고 깨끗한 상태에서 마음을 비운 다음, 자기의 사견에 구애되지 말 것이며, 선입견에 의한 말을 주장하지도 말 것이며, 주관 없이 남의 말에 따르지도 말 것이며, 구차하게 머뭇거리지도 말 것이며, 죄수가 쉽사리 자복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말 것이며, 옥사가 빨리 이루어지는 것을 요구하지도 말라. 그리하여 여러 방법으로 물어보고 반복해서 찾아가지고 죽는 자로 하여금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하고 살아난 자로 하여금 원한을 사는 일이 없게 하라. 그러면 사람들은 서로 기뻐하고 감옥이 텅 비게 될 것이고 온화한 기운이 감돌아서 기후가 계절에 잘 맞게 될 것이다."
하였다.
○ 사간원이, 영의정 황희(黃喜)가 교하 수(交河守)에게 전토(田土)를 요청한 것을 논핵하기를,
"농장(農莊)이 백관의 위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는데, 윤허하지 않고 안숭선(安崇善)에게 이르기를,
"황희는 정사를 계획하는 대신이다. 그리고 태종이 신임하던 신하인데 내가 어찌 차마 가볍게 파직할 수 있겠는가. 태종이 일찍이 나에게 이르기를, '양녕이 세자가 되었을 때 구종수(具宗秀)의 무리가 아부하며 의롭지 못한 일을 많이 해서 양녕으로 하여금 도의(道義)를 잃게 하였다. 황희에게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물으니 황희가 대답하기를, 「세자는 나이가 어린데다 잘못도 응견(鷹犬)에 관한 일에 불과합니다.」'라고 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황희가 중간에 서서 변란을 관망하였다고 하였으나, 지금 생각하면 황희는 실지로 죄가 없다. 태종이 또 사책(史冊)의 일을 가지고 해명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 말씀이 귀에 쟁쟁한데 내가 어찌 신출내기 간신(諫臣)의 말에 따라 선뜻 파직시킬 수 있겠는가."
하였다.
15년(계축, 1433)
○ 조제(朝祭)에 처음으로 아악(雅樂)을 사용하였다. 처음에 고려 예종(睿宗) 때 송 나라 휘종(徽宗)이 제악(祭樂)의 종(鐘)촹경(磬) 각각 1가(架)와 금(琴)촹슬(瑟)촹생(笙)촹우(?)촹소(簫)촹관(管) 등의 악기를 각각 2부씩 하사하였는데, 홍건적의 난리에 거의 다 없어지고 늙은 악공이 종과 경 두 악기를 연못 속에 던져 놓은 것만 보존되었다.
태조 고황제와 태종 문황제도 다 악기를 하사하였으나 소리가 율격에 맞지 않았다. 제악(祭樂)은 팔음(八音)을 구비하지 못하여 제사를 지낼 때에는 경(磬)은 와경(瓦磬)을 쓰고 종(鐘)도 잡다하게 매달아 쓴데다 그 숫자도 구비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을사년 가을에 검은 기장이 해주(海州)에서 나오고 병오년 봄에 경(磬)을 만들 수 있는 돌이 남양(南陽)에서 생산되니, 상이 옛것을 바꾸어 새로 만들 뜻을 갖게 되었다. 이에 박연(朴堧)에게 명하여 편경(編磬)을 만들게 하니, 박연이 해주의 검은 기장을 가져다가 그 푼과 치수를 쌓아가지고 고설(古說)대로 황종(黃鐘) 1관(管)을 만들어 불어보니 중국의 황종보다도 조금 높은 소리가 났다. 이에 전현(前賢)의 의논을 참고해 보니, "토질에는 비옥하고 척박한 차이가 있고 기장에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어서 소리의 높낮이가 시대마다 같지 않다." 하고, 진양(陳暘)도 "대를 많이 잘라서 기운을 살피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지역이 동쪽에 치우쳐 있어서 중국의 풍토와는 아주 다르기 때문에 기운을 살피는 것으로도 해결하기 어려웠다. 이에 해주의 검은 기장알 모양으로 밀랍을 녹여 조금 크게 만들어서 푼을 쌓아 관(管)을 만들었다. 한 알을 1푼으로 삼고 열 알을 쌓아 1치[寸]로 하는 법을 삼았다. 9치를 황종(黃鐘)의 길이로 삼은 다음, 3푼을 더하기도 하고 빼기도 하여 12율(律)을 완성하였다. 한 달이 지나서 신경(新磬) 2가(架)를 제작하여 올리면서 아뢰기를,
"지금 만든 경(磬)은, 모양은 한결같이 중국 것과 같게 하였습니다만 소리의 경우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중국의 경(磬)이 유빈(?賓)은 그 소리가 도리어 임종(林鐘)보다 높고, 이칙(夷則)은 남려(南呂)와 같으며, 응종(應鐘)은 무역(無射)보다 낮아서, 당연히 높아야 할 것은 도리어 낮고 당연히 낮아야 할 것은 도리어 높으니, 아마도 한 시대에 제작된 것이 아닌 듯합니다. 만약 이것대로 제작을 하게 되면 결코 음률에 맞을 이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삼가 중국의 황종(黃鐘)의 소리에 의거하여 황종의 관을 만든 다음, 그것을 기준으로 더하기도 하고 빼기도 하여 12율관(律管)을 만들어 불어서 율을 맞춘 다음 이것으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신경(新磬) 2가와 명 나라에서 하사한 경(磬) 1가, 소(簫)촹관(管)촹방향(方響) 등의 악기를 새로 제작한 율관과 협주해 보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의 경은 과연 음이 맞지 않고 지금 새로 만든 경이 제대로 되어서 소리가 맑고 아름답다. 율을 제정하고 음을 바로잡은 것이 뜻밖에 잘되어서 나는 매우 기쁘다. 단지 이칙만이 음이 맞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니, 박연이 즉시 살펴보고 아뢰기를,
"한계를 나타내는 먹줄이 아직 있는 것으로 보아 다 갈아내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하고, 즉시 갈아서 먹줄을 다 없애고 나니, 소리가 제대로 났다. 경(磬)이 완성되고 나자, 박연에게 명하여 악기 제작하는 일을 전적으로 담당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조제(朝祭)의 음악이 처음으로 완비되었다.
○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의 위판(位版)을 문소전(文昭殿)에 봉안하고 친히 제사를 지냈다. 하교하기를,
"조상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예경(禮經)의 보편적인 것이고, 죽은 부모 섬기기를 생전과 같이 하는 것은 효성의 지극한 것이다. 그러므로 역대의 제왕들이 이미 종묘(宗廟)를 건립하고 태고(太古)의 예를 숭상하는 것은 신성시하기 위한 것이며, 또 원묘(原廟)를 설립하여 평소처럼 섬기는 것은 친근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조종이 물려주신 법을 이어받아 끝없는 복을 누리고 있으므로 선대의 사업을 계승 발전하기에 게을리하지 않고 있으며 추모하는 생각도 그지없다. 매번 사시(四時)의 일로 향천(饗薦)하는 예를 엄숙하게 잘 거행해서 효성을 펼치도록 하겠다. 돌이켜보건대, 원묘를 설치하는 것은 역대마다 같지 않았다. 송 나라가 제관(諸觀)의 신어(神御)를 모두 경령궁(景靈宮)에 봉안한 것이 정리(情理)와 예의(禮儀)에 합당하다.
지금 우리 태조와 태종은 원묘(原廟)가 각기 다르니, 옛 제도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염려되는 것은 후세
이러한 취지에서 예관에게 명하여 고금의 궁성(宮城) 안을 참작한 다음, 침전(寢殿)을 개량해서 문소전(文昭殿)이라고 이름을 하고, 후대의 봉사(奉祀)는 오실(五室)을 지나지 않게 하였다. 대체로 신어(神御)에 관한 물품과 예악(禮樂)에 관한 도구를 일체 새 것으로 마련하여 한 왕대의 규정을 창설하여 만세의 법전을 제정하였다. 때마침 대례가 이미 이루어졌으니 마땅히 백성들도 함께 경축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 파저강(婆?江) 야인 이만주(李滿住) 등이 변방에 침입하여 군민(軍民)을 살해하고 재물을 빼앗아 갔다. 상이 최윤덕(崔潤德)을 파견하여 제장(諸將)을 거느리고 가서 정벌을 하게 하였다. 최윤덕이 토벌하고 나서 첩서(捷書)를 올리니, 신하들이 하례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우리 태조는 천운을 받아 개국하면서부터 국내를 정돈하고 외적을 물리치니 당시의 야인들이 위엄을 두려워하고 덕을 사모하였다. 태종의 위엄과 덕은 섬오랑캐들에게 널리 입혀졌고 산융(山戎)도 모두 신하가 되어 복종하였다. 나는 부덕하지만 조종의 모훈(謨訓)을 받들어서 야인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잘 돌보아 주었다. 그런데 근자에 이만주 등이 우리 강계(江界)와 여연(閭延)에 침입하여 군민을 살해하고 축산을 빼앗아 갔다. 은혜를 저버리고 나쁜 짓을 한 행위를 용서할 수가 없어서 장수에게 명하여 죄를 토벌하게 하였더니 길을 나누어 함께 가서 적의 소굴을 소탕하여 모두 평정하였다.
생각건대, 군사는 비록 난리를 구제하고 포악한 적을 토벌하는 도구라 하더라도 봄 여름은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대중을 충돌시키는 때가 아니다. 그러나 한 번 출동하면 오랫동안 안정을 얻을 수 있는 일이기에 나는 부득이 포고하는 것이니, 신하들은 나의 뜻을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듣건대, 술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실컷 마시자는 것이 아니라 신명을 받들고, 손님을 접대하고, 나이 많은 사람을 봉양하기 위한 것이라 했다. 그러므로 제사로 인하여 마실 때에는 헌수(獻酬)하는 것으로 절목을 삼고, 활쏘기로 인하여 마실 때에는 읍양(揖讓)하는 것으로 예를 삼는다. 따라서 향음례(鄕飮禮)는 친목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며, 양로례(養老禮)는 나이 많고 덕망이 높은 사람을 존경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손님과 주인이 절을 100번 하는 동안 술은 세 번 돌린다.' 하였고, 또 '온종일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선왕이 술에 대한 예절을 제정하여 술로 인한 화란을 대비한 것이 완벽하다 하겠다.
후세로 오면서부터 풍습이 그전 같지 않고, 마구 술을 마시는 것만 힘쓰기 때문에 금주(禁酒)하는 법을 아무리 엄격하게 하여도 결국 그로 인하여 발생하는 화란을 방지하지 못하였으니 매우 한탄스럽다. 대체로 술로 인한 화란은 매우 크다. 어찌 다만 곡식과 재물을 허비할 뿐이겠는가. 안으로는 심지(心志)를 어지럽히고 밖으로는 위의(威儀)를 잃게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부모의 봉양을 폐기하게 되고 또 남녀의 관계도 문란하게 한다. 크게는 나라와 가정을 망치고, 작게는 자기 본성과 인생을 망치고 만다.
윤리를 더럽히고 풍습을 어지럽게 하는 것을 낱낱이 거론할 수는 없고 우선 한두 가지 법으로 삼고 경계로 삼을 만한 것을 말하기로 하겠다.
상 나라 주왕(紂王)과 주 나라 여왕(?王)은 이것 때문에 나라를 망쳤고, 동진(東晉)의 풍습은 이것으로 남의 나라를 망쳤다. 정(鄭) 나라 대부 백유(伯有)는 집에다 굴을 파놓고 밤이면 술을 마시다가 결국 자석(子晳)이 놓은 불에 타서 죽었으며, 전한(前漢)의 교위(校尉) 진준(陳遵)은 매번 손님과 크게 술자리를 벌여 놓고 마시면서 문을 걸어 놓고 손님을 붙들더니 흉노(凶奴)에게 사신으로 가서 술에 취하여 살해당하였으며, 후한(後漢) 사예교위(司隷校尉) 정충(丁沖)은 자주 장수들을 찾아다니면서 술을 마시다가 창자가 녹아서 죽었으며, 진(晉) 상서 우복야(尙書右僕射) 주의(周?)는 한 섬의 술을 마시는데 우연히 친구를 만나자 기뻐서 함께 잔뜩 마시고 취했다가 깨어보니 손님은 이미 늑골이 썩어서 죽었다. 이는 진실로 경계해야 할 일이다.
주 무왕(周武王)은 주고(酒誥)라는 글을 지어서 상(商) 나라 백성을 훈계하였고, 위 무공(衛武公)은 빈지초연(賓之初筵)이라는 시(詩)를 지어서 스스로 경책을 하였으며, 진 원제(晉元帝)는 술 때문에 일을 폐기하고 있었는데 왕도(王導)가 심각하게 말을 하자, 원제가 술잔에 부은 술을 쏟게 하고 드디어 술을 끊었으며, 원 태종(元太宗)은 날마다 대신들과 술을 마셨는데 야율초재(耶律楚材)가 술통의 쇠로 만든 주둥이를 가져다가 올리면서 말하기를, '이런 쇠도 술에 닿으면 이렇게 녹아나는데 더구나 사람의 오장(五臟)이야 손상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태종이 깨닫고 좌우 신하들에게 하루에 술을 석 잔만 올리라고 칙령을 내렸다.
진(晉) 나라 도간(陶侃)은 매번 술을 마실 때면 양을 정해 놓고 마셨다. 누가 조금 더 마시기를 권하면 도간은 한동안 슬픈 표정을 짓고 있다가 말하기를, '젊어서 술을 마시고 실수를 하여 돌아가신 어버이와 약속을 하였기 때문에 감히 정량을 넘길 수가 없다.' 하였고, 유곤(庾袞)의 아비가 생전에 항상 술을 조심하라고 유곤을 경계하였다. 그 뒤에 매번 취하면 문득 자책을 하기를, '내가 선친의 훈계를 폐기하고서 어찌 남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어버이 묘 앞에서 스스로 20대의 매를 맞았다. 이는 참으로 법으로 삼을 만한 일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일을 가지고 말하면, 옛날 신라(新羅)가 포석정(鮑石亭)에서 패배한 것과 백제(百濟)가 낙화암(落花巖)에서 멸망한 것도 모두 술 때문이었으며, 고려 말기에는 상하가 서로 본받아가며 술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결국 패망에 이르고 말았다. 이 역시 오래지 않은 거울로 삼아야 할 일인데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생각건대, 우리 태조께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태종은 이를 계승하여 정치와 교화를 잘 펴서 그 법을 만세에 전하는 한편, 많은 사람이 모여 술 마시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어 해묵은 구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교화를 펼쳤다. 내가 부덕하지만 외람하게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리고 밤낮없이 염려한 것은 정치를 잘해 보기 위한 것으로, 옛날의 잘못된 일을 거울로 삼고 조종이 제정해 놓은 법을 본보기로 삼아서 예(禮)를 가지고 제시하고 법으로 규제를 가하였다. 그렇다면 나의 마음 씀씀이가 지극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너희 신민들은 술 때문에 자신을 망치는 자가 더러더러 있으니 이는 고려 말기의 몹쓸 기풍이 아직도 근절되지 않은 것이다. 이 점을 나는 매우 민망하게 여긴다.
아, 술이 재앙을 빚어내는 것이 이렇게 참혹한데 오히려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도대체 무슨 마음을 먹고 있는 것인가. 비록 국가를 위한 염려는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유독 자신의 생명마저 돌아보지 않는다는 말인가. 식견이 있는 조정의 신하들이 오히려 이 모양인데 시골의 하찮은 백성들이야 무슨 짓을 못 하겠는가. 따지고 보면 옥송(獄訟)이 발생하는 것도 대부분 여기에서 기인된 것으로 처음에 삼가지 않으면 결국에 가서 그 폐단은 정말 두려운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옛 일을 상고하여 오늘에 증명을 하면서 반복하여 훈계를 하는 이유인 것이다.
아, 너희 중외의 대소 신민들아! 나의 간절한 마음을 체득하여 옛사람의 잘잘못을 보아서 오늘날의 경계로 삼고, 술마시기를 좋아하여 일을 그르치지 말도록 할 것이며, 술을 지나치게 마셔서 병에 걸리지 말도록 하라. 그리고 각각 너의 행동을 주의하여 술을 대놓고 마시지 말라는 교훈에 따라서 술마시는 것을 억제한다면 아마도 새로운 기풍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 황희(黃喜), 맹사성(孟思誠), 권진(權軫)을 불러 영북(寧北)과 경원(慶源) 두 진(鎭)을 옮기는 문제를 논의하게 하고, 병조에 하교하기를,
"예로부터 제왕이 자기 왕조가 처음으로 일어난 지역을 소중하게 여겨서 근본으로 삼지 않는 경우가 없다. 우리나라 북쪽의 경계인 두만강(豆滿江)은 하늘과 땅이 마련해 준 것으로 태조가 처음으로 경원부를 공주(孔州)에 설치한 것과 태종이 경원부를 소다로(蘇多老)로 옮긴 것이 모두 왕조의 기반을 다진 땅을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인년에 이르러 조무라기 도적들이 들어오자, 수신(守臣)이 막아내지 못하고 부거(富居)로 물러나고 말았다.
태종이 일찍이 명하기를, '만약 호인(胡人)이 와서 살거든 쫓아버리고 행여 적들의 소굴이 되게 하지 말라.'고
그리고 알목하(斡木河)는 바로 두만강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토지가 비옥하여 경작이나 목축도 적당하며 요충지인 만큼 거진(巨鎭)을 설치하여 북문을 방어하기에 적합하다.
태조 당시에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가 귀순해 와서 변방의 울타리가 되겠다고 하자, 태조가 허락해 주었다. 지금 그들이 멸망하고 나니, 변방이 텅 비고 말았다. 그러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이에 선왕의 뜻을 계승하여 다시 경원부를 소다로로 환원시키고 영북진을 알목하로 옮긴 다음, 백성들을 모집하여 그 곳에 살게 함으로써 삼가 조종이 지켜온 천연적으로 험한 국경을 잘 지키고 변방 백성들이 번갈아 가면서 지키는 노고를 덜어주고자 하니, 큰 일을 좋아하고 공 세우기를 좋아하여 변방의 토지를 개척하는 것과는 비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16년(갑인, 1434)
○ 하교하기를,
"혼례(婚禮)는 삼강(三綱)의 근본이며 시초를 바르게 하는 도리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이 혼인하는 예를 중요하게 여겨 친영(親迎)하는 절차를 마련해 놓은 것이다. 그러나 본국의 풍습은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가서 사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어서 갑자기 바꿀 수는 없으니, 앞으로 왕자(王子)나 왕녀(王女)의 혼인만큼은 한결같이 옛 제도를 따라서 백성들의 향도가 되게 하라."
○ 하교하기를,
"타고난 착한 마음을 잘 지켜가는 것은 모든 백성들이 다같이 해야 할 일이고, 윤리를 후하게 하고 풍습을 바로잡는 것은 임금이 먼저 힘써야 할 일이다. 그러나 세상의 도리가 쇠퇴하여 순후한 풍습이 옛스럽지 않고 법칙과 기강이 점점 진실을 잃게 됨에 따라 신하는 신하다운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자식은 자식다운 직분을 다하지 못하며, 아내는 아내다운 덕성을 온전히 하지 못하는 자가 간혹 있게 되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생각건대, 옛날의 훌륭한 임금들은 몸소 신교(身敎)를 실천하여 따르도록 인도함으로써 모든 사람을 다 훌륭한 인격자로 만들었다. 나는 박덕하여 비록 만에 하나도 그것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뜻만은 지녀왔다. 그래서 법을 도타이 하고 교화를 펴나가는 도리를 두고 밤낮으로 마음을 쏟은 결과, 비로소 어리석은 백성들이 나아갈 방향을 모르고 있는 것은 본받을 것이 없어서 그렇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예로부터 지금까지 법으로 삼을 만한 충신, 효자, 열녀들의 걸출한 사적을 일에 따라 기록하고 아울러 시(詩)와 찬(贊)도 지어서 싣게 하였다. 그러고도 어리석은 백성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도형(圖形)을 그려서 붙이고 《삼강행실(三綱行實)》이란 이름으로 널리 중외에 반포하였다. 다만 백성들이 문자를 알지 못하는데 책을 반포하여 내려 준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뜻을 알아서 홍기할 수 있겠는가.
내가 《주례(周禮)》를 보니, '외사(外史)가 책 이름을 사방에다 알리는 일을 담당하는데 사방 사람들로 하여금 책의 문자를 알게 하여 글을 읽을 줄을 알게 한다.' 하였다. 지금 이것을 본받아서 중외의 유사는 백성들 중에서 학식이 있는 자를 찾아내어 모두 가르치도록 하라."
하였다.
○ 상이 이르기를,
"나의 생일을 당하여 종척(宗戚)과 훈구(勳舊)가 재(齋)를 설치하고 장수를 비는 것은 비록 신자(臣子)의 지극한 정이기는 하나 예로 비추어 보면 옳지 못하니, 실시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17년(을묘, 1435)
○ 상이 윤회(尹淮), 권도(權蹈), 설순(?循)에게 명하여 문신(文臣) 40여 인을 집현전에 모이게 하고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를 찬술하게 하였다. 상이 친히 교정을 보기도 하였는데, 간혹 깊은 밤까지 이른 적도 있었다. 윤회에게 이르기를,
"요즘 이 책을 읽노라면 자못 유익하다는 것을 알겠다. 총명은 날로 더해지고 수면도 훨씬 줄었다."
하였다. 책이 완성되자, 《사정전훈의(思政殿訓義)》라는 이름을 내렸다.
○ 하교하기를,
"노인을 우대하는 예(禮)는 오래되었다. 옛날의 제왕은 잔치 자리에 친히 임하기도 하고 그들의 자손을 복호(復戶)해 주기도 하였는데 이는 모두 존경하는 뜻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지금 내가 왕위에 있으면서 나이 많은 사람을 우대하는 예는 다 옛날의 제도를 준수하였지만 유독 작명(爵命)을 내려주는 것을 거행하지 못하여 내 마음에 만족스럽지가 않다. 옛날 당 현종은 나이 많은 남녀 모두에게 봉작(封爵)을 주게 한 일이 있으니, 지금 나이 90세 이상인 자에게 작명을 주도록 해서 노인을 우대하는 인정(仁政)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7권 18년(병진, 1436)
○ 하교하기를,
"당우(唐虞) 시대에는 백규(百揆)가 9관(官) 12목(牧)을 통괄하였고, 성주(成周) 시대에는 총재(?宰)가 6경(卿) 60속(屬)을 통괄하였다. 혹자는 진평(陳平)이 전곡(錢穀)의 숫자를 몰랐던 것으로 대신의 체모를 획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漢) 나라의 재상으로서 권세를 잃은 것이 진평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나라는 의정부(議政府)가 온 나라의 정사를 총괄하였는데, 뒤에는 대신이 세세한 일까지 직접 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하여 육조(六曹)로 하여금 독자적으로 일을 주달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큰 일 작은 일 할 것 없이 모두 육조에 귀속되고 정부는 참여하지 않게 되니, 옛날 재상에게 맡겼던 의의에 위배되는 면이 있었다.
이제는 태조(太祖)가 이루어 놓은 법에 따라 육조는 각각 서무를 먼저 의정부에 보고하게 하고 의정부는 그것을 잘 헤아려서 아뢰게 하되, 다만 이조촹병조의 제수에 관한 문제와 병조의 군사에 관한 문제와 형조의 사형수를 제외한 형옥(刑獄) 문제는 해조로 하여금 계문하여 시행하도록 하고 정부는 여기에 따라서 잘 살펴서 논박을 하게 하라."
하였다.
○ 새서(璽書)로 회령절제사(會寧節制使) 이징옥(李澄玉)에게 유시하기를,
"예로부터 장수는 위무(威武)만을 숭상하지 않고 반드시 문덕(文德)을 닦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다. 문(文)이 아니면 대중을 따르게 할 수가 없고 무(武)가 아니면 적을 제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기(吳起)는 모든 일에 통달한 지혜와 삼군(三軍)에 으뜸가는 용맹을 가지고 위(魏) 나라를 위하여 서하(西河)를 지키니 진(秦) 나라 군사가 감히 동쪽으로 오지를 못했으며, 제후와 전쟁을 하여 64회나 승리를 함으로써 사방으로 1천 리나 되는 토지를 개척하였으니, 재사(才士)라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그는 전적으로 위무만을 숭상하고 은혜와 인자함을 적게 베풀었던 탓으로 가는 곳마다 원망과 비방이 따랐다. 그리하여 노(魯) 나라와 위(衛) 나라를 섬겼으나 모두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였다.
등훈(鄧訓)은 호강교위(護羌校尉)가 되어 은혜와 신의로 먼 지방의 사람들을 회유하기에 힘쓰니, 황중(湟中)의 호인(胡人)들이 모두 감복하고 좋아하면서 종족과 마을이 진심으로 귀화해오니 변방이 편안하였다. 그가 죽자, 이사(吏士)와 강호(羌胡)는 울부짖지 않는 자가 없었고 심지어 집집마다 사당을 세우기까지 하였다.
반초(班超)는 서역(西域)에 31년 동안 있으면서 5천여 호나 항복을 시켰으니, 동한(東漢)의 변장(邊將)으로 그보다 나은 사람이 없었다. 그가 교대하여 돌아올 때에 임상(任尙)에게 이르기를, '변방의 이사(吏士)는 본래
대체로 사람의 성품은 완급이 있고 도량은 대소가 있어서 반드시 같아지기는 어렵다. 관용을 베푸는 자는 항상 대중의 환심을 사게 되고 위엄을 부리는 자는 항상 대중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그리하여 대중의 환심을 산 자는 항상 안전이 보장되고 대중의 노여움을 산 자는 항상 화패(禍敗)가 따른다. 이는 보편적인 이치인 것이다.
경의 위무로 말하면 비록 옛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보다 낫지는 못할 것이다. 북쪽 변방에서 위엄을 떨쳐 오랑캐들이 다 복종을 하니, 나는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그러나 대중을 제어하는 문제는 은혜와 위엄을 편협하게 쓰지 않는 데에 달려 있다. 은혜와 위엄을 편협하게 쓰지 않으면 사람들이 사랑할 바를 알게 되고 이미 사랑할 바를 알고 나면 또 경외해야 할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만 되면 공을 세우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진(晉) 나라의 양호(羊祜)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경은 옛날 장수의 잘잘못을 귀감으로 삼고 과인의 지극한 생각을 체득하여 위무만 전적으로 추구하지 말고 반드시 인애(仁愛)를 더하여서 사람을 감복시켜 오랜 세월 동안 북쪽 변방의 훌륭한 장수가 됨으로써 나의 마음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19년(정사, 1437)
○ 상이 이르기를,
"부덕한 내가 왕위를 계승하여 훌륭한 정치를 해내지 못하다 보니 재변이 자꾸만 발생하고 백성들은 굶주림에 떨고 있다. 그런데다 나의 수많은 자손들이 천록(天祿)만을 허비하고 있으니 나는 실로 부끄러울 뿐이다. 나의 친자손들에게 지급되는 과전(科田)을 줄여서 하늘의 견책에 보답하게 하라."
하였다.
○ 경기 관찰사 김맹성(金孟誠)이 보리 이삭이 네 갈래 난 것을 올리고 전문(箋文)을 올려 하례를 하니, 상이 받지 않고 이르기를,
"이같이 과장하는 것을 나는 심히 부끄럽게 여긴다. 제도(諸道)에 두루 유시하여 하례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 새서(璽書)로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金宗瑞)에게 밀유(密諭)하기를,
"처음에 부거(富居)와 경원(慶源)의 백성들이 조정에 보고하기를, '옛 경원의 땅은 목축도 할 만하고 농사도 지을 만하며, 또 강이 있어서 지키기도 쉬우니 다시 가서 살기를 청합니다.'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옛날에 국가를 다스리던 사람은 그 영토를 넓히는 일에 힘썼으니 공험진(公?鎭) 이남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으며, 계축년 겨울에 마침 올적합(兀狄哈)이 관독(管禿) 부자를 살해하자, 알목하(斡木河)에는 추장이 없게 되었다. 당시에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강토를 버려서도 안 되며 기회를 놓쳐서도 안 되니, 강을 따라 진(鎭)을 설치하여 성곽을 높이 쌓고 군민(軍民)을 증가시켜 경작도 하게 하고 방어도 하게 하소서. 만약 명 나라가 혹시라도 별도로 처치를 하게 되면 그때 가서는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전에 공주(孔州)의 성 높이가 사람의 키보다 높지 않았고 백성들이 사는 것도 4백 호를 넘지 않았지만 오히려 수십 년을 지켜왔으니, 오늘의 계획은 필시 염려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후세에 기강이 느슨해져서 변장(邊將)이 적임자가 못 될까 그것이 염려입니다. 그러나 치란(治亂)은 서로 엇갈리기 마련이어서 백세토록 행운만 있을 수 없는 것은 보편적인 진리입니다. 말세에 이르러 패망하고 마는 일이 어찌 변방의 일뿐이겠습니까. 이것 역시 논의
또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용성(龍城)은 요충지이므로 변방의 요새로 삼는다면 우리는 편히 지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역시 그렇지가 않다. 용성을 요새로 삼게 되면 야인(野人)의 거주지도 용성으로 한계를 삼을 것이고, 길주(吉州)를 요새로 삼으면 야인(野人)의 거주지도 길주로 한계를 삼을 것이어서, 그 끝이 없을 것이다. 더구나 용성의 남쪽은 적들이 침입해 올 길이 한두 곳이 아니다. 내가 취사 문제를 놓고 말하는 전후의 상황이 이렇다는 것을 경은 잘 알 것이다.
뜻하지 않게 초년에는 큰 눈이 내리고 다음해에는 전염병이 돌아 사람과 가축이 많이 죽었으며, 거년의 적변에는 사로잡히거나 피살된 자가 적지 않았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내 생각에는 큰 일을 이루려면 소소한 이해는 따지지 않아야 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지금 적을 대비하는 문제가 옛날의 상황에 비할 바가 아니다. 적이 오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적이 온다면 필시 1천 명이나 1만 명이 무리를 지어 함부로 날뛸 터인데 만약 단지 성만 지키고 그들과 겨루지 않으려 한다면 후일에 발생하게 될 화가 한이 없을 것이다.
근래에 적변에 대하여 말을 하는 자가 분분하여 없는 해가 없는데, 듣는 사람이 그 말을 빈말로 여기는 것도 불가한 일이며, 그렇다고 그 말을 사실로 여기고 사철을 따지지 않은 채 남도 지방의 군사를 출동시키면 그 숫자는 1천 명 이상이 되어야 하니 10년이 채 못 가서 재력은 고갈될 것이고 백성들의 생활도 고달파져서 원망을 안은 채 뿔뿔이 흩어질 것은 필연적인 이치이다.
함길도(咸吉道)는 지역이 협소하고 인구가 적어서 부역이 평소에 가벼웠었는데 내가 임금이 된 뒤에는 백성들에게 유익한 정치를 한다는 소문은 들리지 않고 번거롭고 시끄러운 일만 많으니, 나는 심히 부끄럽고 송구하다. 원위(元魏)의 효문제(孝文帝)는 비록 오랑캐라 하더라도 인효(仁孝)하고 자상(慈祥)한데다 재주는 문무를 갖추었고 덕화는 국내에 흡족하였으니, 진실로 얻기 어려운 훌륭한 임금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선조가 전적으로 무력만 일삼고 교화(敎化)는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교화에 관한 책임이 짐(朕)에게 있다.' 하고는 오랑캐 말과 오랑캐 옷을 금지시키고 낙양(洛陽)으로 서울을 옮겨서 오랜 풍습을 점차로 개혁하여서 주(周) 나라의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의 정치에 비기고자 하였는데, 전사(前史)에서는 이를 아름답게 여겼다. 그러나 태자와 훈신은 모두 그렇게 하지 않았고 신민도 그 거처에 안착하지 않았다. 그 후부터 날로 쇠미해지고 말았다. 황제가 매번 말하기를, '짐은 낙양에서 성공하지 못하였다.' 하였는데, 황제가 세상을 뜨고 나자 결국 진작되지 못하고 말았다. 대체로 그의 뜻은 기필코 자신이 한 일이 가장 잘한 일이라고 여긴 듯한데, 그 결과는 이러했다. 나는 매번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그저 두려움만 가중될 뿐이다.
나는 궁궐 속에 깊이 거처하고 있어서 북쪽 변방의 일을 멀리서 헤아릴 뿐이고 그 실상은 자세히 알지 못한다. 경은 이 일에 대해서 익히 생각하고 있을 것이니, 이해 관계를 잘 따져보도록 하라."
하니, 김종서가 비밀리에 글을 써서 계문(啓聞)하기를,
"신은 삼가 듣건대, 위엄과 덕망이 널리 미쳐서 날마다 100리씩 국토를 개척한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주 나라 문왕(文王)보다 성대한 임금은 없었고, 병력을 다하여 끊임없이 싸워서 1천 리나 되는 땅을 개척한 자도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한(漢) 나라 무제(武帝)보다 심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또 어리석고 나약하여 날마다 그 국토를 축소시키는 자는 진실로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덕을 가지고 나라를 개척한 자는 얻기는 쉬워도 잃기는 어려우며, 힘으로 국토를 개척한 자는 얻기는 어렵고 잃기는 쉬운 법이어서, 그 일은 같지만 방법은 같지 않습니다. 고려의 시조가 힘으로 삼한(三韓)을 통합할 수는 있었지만 그 위엄이 북방에까지 미치지는 못하고 단지 철령(鐵嶺)으로 경계를 삼았으며, 예종(睿宗) 때에 모신(謀臣)이 지략을 써서 오랑캐를 유인하여 소탕하고 드디어 9성(城)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얻자마자 잃고 말았습니다.
태조(太祖)는 하늘이 내신 성무(聖武)로 북방에서 일어나시어 대동(大東)을 소유한 다음, 남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북으로는 압록강에 이르고 동북으로는 두만강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공주(孔州)촹경성(鏡城)촹길주(吉州)촹단천(端川)촹북청(北靑)촹홍원(洪原)촹함주(咸州) 의 일곱 고을을 두었으니, 실로 동방이 개국한 이후로 일찍이 없었던 성대한 왕업이었습니다.
태종이 대를 이은 다음, 도리에 부합되는 정치를 실시하여 오랫동안 백성들을 인의(仁義)로 감화시키니, 오랑
전에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헌의하기를, '경원을 용성으로 물린다면 북방의 조치가 제대로 되고 백성들의 폐해도 완전히 해소될 것입니다.'고 하자, 성상은 조종이 지키던 땅은 비록 한 자 한 치라도 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고 그것이 불가함을 고집하면서 사람들의 의론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이 의론이 다시 제기되어 시끄러움이 계속되자, 이에 신으로 하여금 가서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석막(石幕)에다 영북진(寧北鎭)을 더 설치하여 국경을 정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지금 북방에 있으면서 가보지 않은 곳이 없고 들어보지 않은 말이 없습니다만 부거와 석막은 모두 국경으로 정할 곳이 아니며, 용성도 요새지로는 적합하지가 않습니다. 의론하는 자들의 말은 '용성은 마치 진(秦) 나라의 함곡관(函谷關)과 같아서 비좁고 험하기가 비할 데 없으므로 만약 여기를 지킨다면 호인(胡人)이 감히 우리를 향하여 간악한 행동을 못 할 것이고, 우리 백성들도 편하게 마음놓고 지낼 수 있을 것이다.' 하는데, 이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막을 만한 물이 없는데 어떻게 험한 요새를 설치할 수 있겠으며, 의지할 만한 산이 없는데 어떻게 견고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곳이야말로 사방으로 흩어져서 싸움을 벌여야 할 곳입니다. 만약 네 읍의 요충지에다 큰 진(鎭)을 설치하여 주장(主將)이 있는 곳으로 삼아 네 읍을 지원하게 된다면 그것은 가능합니다.
혹시라도 의논하는 자의 말대로 용성(龍城)으로 경계를 삼았다가 오히려 적의 침입을 면치 못하게 되면 뒤에는 의논하는 자들이 필시 마천령(磨天嶺)으로 경계를 삼자고 할 것이고, 그래도 면치 못하면 그때는 철령(鐵嶺)으로 경계를 삼자고 하고 말 것입니다. 이는 전조(前朝)의 일을 보면 가히 알 수가 있습니다.
신은 또 듣건대, 역대 제왕은 왕업(王業)의 기초를 다진 곳을 중요시한다고 하였습니다. 한(漢) 나라의 풍패(?沛)와 당(唐) 나라의 진양(晉陽)을 보아도 알 만합니다. 선조가 지키던 곳을 버리고 지키지 않으며 왕업의 기초를 다진 곳을 잊고 복구하지 않는다면 선조의 사업을 잘 계승해가는 후손이 있다고 하겠으며, 선조의 공렬을 잘 받들어 간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용성으로 경계를 삼게 되면 한 가지 정의롭지 못한 점과 두 가지 이롭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조가 지키던 땅을 축소시키는 것이 한 가지 정의롭지 못한 점이고, 지형적인 험준함이 없는 것이 첫 번째 이롭지 못한 점이며 방어하기가 불편하다는 것이 두 번째 이롭지 못한 점입니다. 그에 반하여 두만강(豆滿江)으로 한계를 삼으면 한 가지 대의(大義)와 두 가지 이로운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왕업을 일으켰던 곳을 회복하는 것이 한 가지 대의이고, 긴 강의 험준함을 의거할 수 있는 것이 첫 번째 이로운 점이며 방어하기가 편리한 것이 두 번째 이로운 점입니다. 그렇다면 용성으로 경계를 정하고자 하는 사람은 생각을 잘못한 것입니다.
하늘은 도가 있는 자를 돕습니다. 오랑캐가 스스로 도망하자, 성상이 기회를 틈타 한 명의 군사도 수고롭게 하지 않고 한 사람의 백성도 다치게 하지 않은 채 옛 강토를 회복하여 네 읍을 설치하였으니, 선조의 사업을 잘 계승하여 선대의 공렬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고 하겠습니다.
신은 또 듣건대, 큰 일을 이룰 사람은 작은 폐단을 고려하지 않고, 큰 사업을 건설할 사람은 작은 손해를 따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일이 방대하다 보면 폐단이 반드시 생기기 마련이고, 사업의 범위가 넓다 보면 손해도 따르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이전에도 그러했습니다. 지금 네 읍을 설치한 것은 큰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라, 선조의 강토를 회복하려고 한 것이었으니 일로 말하면 이보다 더 큰일이 없으며, 선왕의 사업을 계승한 것이었으니 의리로 말하면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어찌 작은 폐단을 염려하겠으며, 작은 손해를 걱정하겠습니까.
더구나 첫해는 눈이 비록 많이 내렸다고는 하나 가축들이 그다지 많이 죽지는 않았으며, 다음해의 역질이 비록 대단했다고는 하나 백성들이 그다지 많이 사망하지는 않았습니다. 만일 의론하는 자의 말대로라면 농우(農
그리고 지난해의 일을 놓고 말하더라도, 그 화가 비록 크기는 하였지만 흥부(興富) 자신의 죽음과 곽승우(郭承祐)의 군사가 함몰된 것과 용성(龍城)에서 크게 패배한 것에 비하면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9년 동안의 홍수와 7년 동안의 가뭄이 요(堯) 임금과 탕(湯) 임금의 성덕에 손상을 준 일이 없고, 50만의 흉노(凶奴)와 40만의 돌궐(突厥)이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의 큰 공에 무슨 해를 주었습니까. 더구나 재해는 1년에 불과하고 적들은 수천 명을 넘지 않는데 걱정할 것이 뭐가 있으며, 두려워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신은 또 듣건대, 옛날의 호걸들은 1만 리나 되는 장성(長城)을 쌓아서 오랑캐를 막았고, 1천 리나 되는 긴 뚝을 수리하여 황하(黃河)의 범람을 막으면서 백성들을 10여 년 동안이나 역사를 시켰으니, 이는 지나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세에까지 그 혜택을 입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북쪽으로 말갈(靺鞨)과 인접해 있어서 누차 침입을 받았고 전조(前朝)로부터 오늘날까지 그 화가 계속 남아 있습니다. 성곽을 수리하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것을 마땅히 다른 도에 비하여 1백 배나 강화해야 할 것이니 비록 금년에 성(城) 하나를 쌓고 명년에 또 하나를 쌓아서 해마다 쌓는다 하더라도 의리에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전에 부거(富居)를 경계로 하고부터 아직 두어 자의 성도 쌓지 못했습니다. 변방의 읍이 이러한데 더구나 용성 이남의 주군(州郡)은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변방의 대비책이 매우 잘못되었으니, 중국 사람들이 비웃는 것도 당연합니다.
성상께서 이 점을 염려하시자, 모신(謀臣)은 좋은 의견을 올리고 백성들은 아비 일처럼 달려와서 회령(會寧)의 성은 벌써 다 쌓았고 경원(慶源)에도 성을 쌓기 시작해서 역사는 때를 넘기지 아니하고 공사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갑산(甲山)과 경흥(慶興)은 자체적으로 성(城)을 수축하여 모두 견고한 성을 갖고 있으니 북방에 대한 염려가 10에 7, 8은 해소된 셈입니다.
신은 또 듣건대, 은(殷) 나라가 귀방(鬼方)을 정벌하는 데 3년이 걸렸다고 하며, 주(周) 나라의 수자리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나는 식구들을 못 본 지가 지금 3년이나 되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언제쯤 나는 고향으로 돌아갈까?' 하였다고 하니, 이것으로 보면 은 나라와 주 나라의 백성들도 오히려 오랫동안 수자리하는 것을 면치 못했던 것입니다. 그 후로부터 오랑캐는 더욱 극성을 부렸고 그에 따라 변방에 가서 수자리하는 것도 더욱 고달팠습니다. '흰머리 되어 돌아왔다 변방 수자리에 다시 가노라.'라고 하는 시(詩)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유독 중국만 그런 것이 아니고 전조(前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에는 철령(鐵嶺)으로 관문을 삼고 뒤에는 쌍성(雙城)으로 경계를 삼아서 하도(下道)의 군사를 차출하여 이곳으로 보내 수자리를 살게 하였습니다. 수졸(戍卒)들이 늙도록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니, 아비와 자식은 서로 얼굴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것 역시 길은 멀고 수자리는 오래 지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으로 오늘날의 일을 가지고 말하면 너무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신은 또 듣건대, 읍을 옮기는 문제는 중대한 일이라 했습니다. 원망을 일으키고 화기를 손상시킬 수 있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이 점을 염려했습니다. 더구나 안정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 백성을 옮겨다가 험악한 오랑캐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일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원망하고 싫어하지 않을 자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묘(神妙)한 성상의 계책으로 인하여 한 명의 관리도 매질하지 않았고 한 명의 백성도 벌주지 않았는데 수만 명의 백성이 겨우 한 달 남짓 만에 새 지역으로 모이게 되어 큰일이 쉽게 이루어졌고 새 고을이 영구적으로 세워졌으니 이는 잠시 얻었다가 바로 잃게 되는 경우와는 비교하여 말할 수가 없습니다.
뜻하지 않게 경박한 무리들이 첫해의 큰 눈이 내린 것과 다음해의 역질이 발생한 것을 가탁하여 뜬소문을 퍼뜨려 인심을 선동하니 안정된 자가 동요하려 하고 머물러 살던 자가 떠나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거의 큰일을 그르치고 전날의 공로를 잃을 뻔하였는데 다행히도 성상의 명확한 용단에 힘입어 뜬소문은 저절로 진정되고 민심은 저절로 안정되었습니다. 게다가 지극히 인자한 마음으로 보살펴주셔서 추위에 떠는 자에게는 옷을 주고 기아에 허덕이는 자에게는 먹을 것을 주니, 백성들은 부역에 시달렸지만 고달픔을 잊었으며 군사들은 수
오늘날 네 읍을 건립하는 것은 전적으로 북방에 보호막을 두려는 것이며, 오늘날 성곽을 쌓는 것은 전적으로 그 보호막을 견고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변방에 수자리하는 것도 역시 적을 방어하여 백성을 안전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의 일은 그만두어도 될 일을 그만두지 않고 경솔하게 백성들을 부리려는 것이 아니며, 큰일을 좋아하고 공 세우기를 좋아해서 병력을 함부로 쓰려는 것이 아닙니다.
대체로 백성들은 지극히 어리석지만 신기가 있는데 어찌 이런 뜻을 모르겠습니까. 어떤 백성이 신에게 말하기를, '회령(會寧)과 경원(慶源)에는 지금 이미 성을 다 쌓았으니, 앞으로 마땅히 쌓아야 할 성은 종성(鐘城)과 용성(龍城)뿐입니다. 이 두 성만 다 쌓게 되면 우리들은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이 말대로라면 다른 백성들의 마음도 따라서 알 수가 있습니다.
거년에 경원에서 발생한 화변은 참혹하다고 할 수 있는데 백성들은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습니다. 흩어졌던 자는 모이고 도망갔던 사람은 돌아와서 농사에 힘쓰고 생업에 안주하기를 평소와 다름이 없이 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일을 가지고 비추어 보면 후일에 목숨을 걸고 떠나지 않을 것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간혹 솟구치는 의기를 가누지 못하고 적진으로 달려가서 적의 머리를 베어 오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지난날의 사세로 상고해 보면 다른 날에 윗사람을 사랑하고 어른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이라는 것도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원 한 고을의 일로 미루어보면 세 읍의 군민들의 마음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오랫동안 북방에 있으면서 야인(野人)들의 정서를 익히 보았는데, 비록 부자와 형제 사이라 해도 욕심이 나면 서로 죽이기도 하고 서로 해치기도 하기를 원수와 다를 바 없이 합니다. 설사 날마다 천금을 허비한다 해도 그들의 마음을 묶어두기가 어려우며, 혹시 이로움을 가지고 묶어두었다 해도 이로움이 다하면 또 멋대로 독기를 부립니다. 그러니 겉으로는 회유하는 은혜를 보여주고 안으로는 방비할 대책을 세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세력은 자연히 강해지고 저들의 세력은 자연히 약해질 것이니 강해진 힘으로 약해진 틈을 이용한다면 뜻을 이룰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신이 서둘러 성곽을 쌓고 무기를 수선하고 군사를 훈련시키고 군량을 비축해 두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만약 성곽이 견고하고 무기가 예리하며 군사가 훈련이 잘되어 있다면 네 진(鎭)의 백성들만 가지고도 스스로 지키고 스스로 싸울 수 있을 것이니, 어찌 다른 군사들의 도움을 받겠습니까. 그러나 적변이 영원히 종식되고 적의 마음이 영원히 복종할지는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신은 또 생각건대, 새로 이주해 온 초기에 겨우 두어 자의 목책(木柵)으로도 오히려 견고하게 지켰는데 더구나 지금은 석성(石城)을 이미 쌓아 놓았으니 어찌 스스로 지키는 것을 걱정하겠으며, 백성들은 저축해 둔 것이 없고 관청에는 비축해 둔 것이 없는데다 기근까지 들었지만 역시 굶어죽는 일은 없었는데 더구나 지금은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에게는 곡식이 넉넉하고 관청에는 비축이 남아도니 어찌 먹을 것이 바닥이 날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관청에서는 조금이라도 요구하는 것이 없고 백성들은 아무 것도 내는 것이 없는데 무슨 이유로 재물이 바닥이 나겠으며, 백성들이 이미 안정을 되찾아 도망가는 숫자가 날마다 줄어들고 있는데 무슨 이유로 다 도망가겠습니까. 종성만 다 성을 쌓게 되면 백성들은 쉬게 될 것인데 어찌 민력이 다할까를 걱정할 것이 있겠으며, 용성의 경우는 다급한 상황이 아닌데 하필 서두를 것이 있겠습니까. 재력(財力)이 여유가 있거든 그때 가서 성을 쌓더라도 늦지 않습니다.
신은 또 듣건대, 선인(善人)이 나라를 다스려도 100년이 되어야 포악한 자를 제거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비록 선인이라 하더라도 100년이 되지 않으면 다스림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더구나 새로운 읍을 설치한 지가 10년도 채 못 된 경우이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어찌 한 가지 잘된 것과 한 가지 잘못된 것을 가지고 갑자기 우려하거나 기뻐할 것이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속히 이루는 것을 추구하지 마시고, 작은 이익을 귀하게 여기지 마시고, 작은 폐단을 따지지 마시고, 작은 걱정거리를 염려하지 마소서. 세월을 약으로 삼고 오래오래 유지한다면 뜬소문도
그러나 신이 말한 것을 아무래도 다 믿을 것 같지가 않습니다. 첫해에 내린 눈을 두고 말하는 자들은 가축들이 모두 죽었다고 하였지만 신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으며, 다음해의 역질에 대해서도 말하는 자들은 백성들이 거의 다 죽게 되었다고 하였지만 신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덩달아서 조정의 논의는 대부분 저들을 정직하다고 하고 신을 정직하지 않다고 하며, 저들을 충직하다고 하고 신을 간사하다고 하니, 신은 이때에 가슴이 아플 뿐입니다. 오늘에 와서 비추어보면 일에는 각기 흔적이 있어서 마침내 엄폐할 수가 없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누가 충직하고 누가 간사하며, 누가 공적이고 누가 사적입니까? 공사(公私)의 구분과 충사(忠邪)의 분변은 오직 밝으신 성상의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예로부터 외방에 나가 사업을 건설하는 신하는 반드시 참소하는 말과 비방하는 말로 인하여 화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조(前朝)의 윤관(尹瓘)이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윤관은 권세도 있고 큰 공도 세웠지만 결국 거의 면하지 못하였는데, 더구나 신은 조그만 공도 없고 또 사업을 건설할 만한 재주도 없는데다 하는 일마다 잘못된 점이 많은데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즉시 중관(中官) 엄자치(嚴自治)를 파견하여 그를 위유(慰諭)하기를,
"지금 경의 글을 보니, 북방의 일에 대해 나는 걱정이 없다."
하고, 어의(御衣) 한 벌을 하사하였다.
20년(무오, 1438)
○ 상이 일찍이 여러 의상(儀象)을 제작하도록 명하였다. 대소 간의(大小簡儀), 혼의(渾儀), 혼상(渾象), 앙부일구(仰釜日晷), 일성정시(日星定時), 규표(圭表), 금루(禁漏) 등의 기구가 모두 매우 정교하였는데, 그 규모와 제도는 모두 성상이 구상한 것이었다.
또 천추전(千秋殿) 서쪽 뜰에다가 한 칸의 작은 누각을 지어놓고, 종이를 발라서 높이가 7척쯤 되는 산을 만들어 누각 안에다 설치한 다음, 그 속에다 옥루기륜(玉漏機輪)을 두어 물로 움직이게 하였다. 또 사신(四神), 십이신(十二神), 고인(鼓人), 종인(鐘人), 사신(司辰), 옥녀(玉女)와 같은 모든 기관(機關)들이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동적으로 치고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마치 신이 그렇게 시키는 것처럼 만들었는데, 하늘의 해를 표시한 각도와 구루(晷漏)의 눈금이 천체가 운행하는 것과 조금도 차이가 나지 않았다. 또 옥루에서 남는 물을 이용하여 의기(?器)를 만들었다. 의기는 비어 있으면 기울어지고 적당히 차면 똑바로 되며 가득 차면 엎어지도록 만든 것인데, 이것은 모두 고훈(古訓)과 같이 하여 천도(天道)의 차고 비고 하는 이치를 보여준 것이다. 산의 사방에는 빈풍(?風)의 칠월시(七月詩)에 의거하여 사계절의 풍경을 만들고 나무를 깎아서 인물, 짐승, 초목의 형상을 만들어 그 계절에 맞게 배열하여 백성들의 농사 짓는 어려움을 보여주었다. 이 누각의 이름을 흠경각(欽敬閣)이라고 하였다.
○ 하교하기를,
"옛날 주(周) 나라의 경대부(卿大夫)들은 덕행(德行)과 도예(道藝)를 상고하여 천거하였고, 한(漢) 나라의 주군(州郡)은 효행과 염치와 재주를 살펴서 천거하여 과거에 급제한 선비와 함께 탁용하였다. 그래서 훌륭한 사람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과거(科擧)로만 선비를 가려 뽑고 덕행을 보아 선발하는 법이 없다 보니 경쟁하는 풍조만 점점 이루어지고, 염치 있고 겸양하는 도리는 거의 없어졌다. 이 점이 한탄스럽다. 만일 몸가짐이 바르고 절의를 지닌 자가 있거나, 강개(慷慨)하는 마음을 갖고 충직한 말을 하는 자가 있거나, 선비로서 행실이 뛰어나 평소부터 고을에 소문이 난 자가 있거나, 재주가 특이하여 남에게 신임을 받는 자가 있거든 제도의 관찰사는 수소문하여 보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 경연에 거둥하여 좌우에 이르기를,
"나는 경사(經史)를 두루 열람해 보았지만 지금은 늙어서 다 기억할 수가 없으니 글을 읽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글 읽기를 그만두지 않는 것은 단지 살펴보는 사이에 얻는 것이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보면 글 읽는 것이 어찌 유익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가 병이 들어 의성군(誼成君) 이채(李寀)의 집에 있었다. 병이 차도가 있자, 상이 친림하여 잔치를 열어서 위로하고 안마(鞍馬)를 하사하였다. 병구완을 한 의원에게도 옷 한 벌과 은대(銀帶)와 입화(笠靴)를 하사하였다. 상이 이보를 처음 보고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자, 이보도 눈물을 흘렸다. 술이 얼큰해지자, 잔치에 배석한 종친들이 모두 일어나 춤을 추었고 상도 춤을 추었다. 환궁했을 때는 밤이 이미 깊었다. 상이 평소에 신하들과 연회(宴會)를 가질 때는 4, 5잔 이상의 술은 마시지 않았다.
21년(기미, 1439)
○ 상이 이르기를,
"종실의 하인들이 민간에서 횡포를 부리는데, 이것은 다른 데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금지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종정시(宗正寺)가 친속(親屬)들을 관장하여 잘못을 규찰하였으나 앞으로는 종친의 과실을 종부시(宗簿寺)로 하여금 규찰하여 다스리게 하라."
하였다.
○ 중외의 사형수가 190인이었다. 상이 대신에게 이르기를,
"근래에 기근이 거듭 발생하여 도둑이 설쳐대고 분쟁하는 자도 더욱 많아져서 사옥(死獄)이 옛날에 비하여 배나 된다. 나는 이 점을 부끄럽게 여기면서 깊이 반성하는 한편, 매번 판결을 내릴 때마다 측은한 생각을 갖고 있다. 만일 싸움을 하였거나 장난을 하다가 사람을 죽였을 경우는 비록 율문에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되어 있으나 본래 살인할 마음이 없었고, 도둑질을 세 번이나 한 자 및 관아의 돈과 양식을 훔친 자들은 모두 가난한 사람들의 범죄이므로 정리가 가련하니, 나는 이들의 사형을 감면해주고자 한다."
하니, 황희(黃喜), 신개(申?), 이맹균(李孟畇), 하연(河演)이 아뢰기를,
"선왕이 의리에 입각하여 형벌을 가하고 사형을 내렸던 것은, 한 사람을 처형함으로써 만백성을 두렵게 하여 감히 함부로 나쁜 짓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형벌을 가볍게 하면 간악한 자들에게는 혜택이 되고 선량한 사람들에게는 해가 됨에 따라 정치하는 도리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 성상께서 천성적으로 살리기를 좋아하는 지극히 인자한 마음을 가지셔서 매번 형벌을 판결할 때마다 정상과 형벌의 경중을 반복 궁구하여 살려낼 방도를 찾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혹시 조금이라도 미진한 점이 있기만 하면 가벼운 법을 적용하시기 때문에 사형을 받아야 할 죄수가 사형을 면하는 자가 매우 많습니다. 옛날 정자산(鄭子産)은 '불은 뜨겁기 때문에 백성들이 경외하고 물은 약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우습게 여긴다.'고 경계를 하였는데도, 대숙(大叔)이 따르지 않다가 마침내 군사를 출동하여 도적을 공격한 일이 있었습니다. 형벌을 가볍게 함으로써 발생하게 되는 피해는 선량한 사람들에게 미치게 됩니다. 원하건대, 한결같이 율문(律文)대로 하소서."
하니, 따랐다.
23년(신유, 1441)
○ 상이 이르기를,
"옛사람이 당(唐) 나라의 명황(明皇)과 양비(楊妃)의 일을 그림으로 그려둔 것이 매우 많았다. 그러나 이는 놀이를 하기 위한 자료로 삼은 것에 불과하다. 나는 개원(開元)과 천보(天寶) 시대의 성공하고 실패한 사적을 채
옛날 한(漢) 나라 때는 승여(乘輿), 악좌(幄坐), 병풍(屛風) 등에다 주왕(紂王)이 술에 취하여 달기(?己)에게 걸터앉아 밤새도록 술마시는 그림을 그려 놓았으니, 어찌 후세의 임금들로 하여금 옛일을 거울로 삼아 스스로 경계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명황(明皇)을 영명한 임금으로 호칭하였는데 만년에 여색에 빠져서 패망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종말과 시작이 서로 다르기로는 이 같은 경우가 없었다. 심지어 월궁(月宮)에서 놀았다느니 용녀(龍女)를 보았다느니 양통유(楊通幽) 등의 일은 매우 허황되어 쓸 만한 가치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주자가 《강목》에다 '황제가 공중에서 나는 신명의 말을 들었다.'고 쓴 것은 명황이 괴이한 것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말을 국가를 소유한 자는 마땅히 깊이 경계를 해야 할 것이다."
하고, 이에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이것을 편집하도록 하였다. 그림을 그리고 사실을 기록한 다음, 간간이 선유(先儒)들의 시(詩)로 된 논평을 붙이게 하고 책명을 《명황계감(明皇誡鑑)》이라고 하였다.
24년(임술, 1442)
○ 평안도 관찰사 정분(鄭?)에게 유시하기를,
"근래에 들으니, 변방 군현의 백성들이 기근에 시달려서 살아가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경은 이 사실을 보고하지 않으니 무슨 의도인가? 이는 내가 경에게 위임한 뜻이 전혀 아니다. 이 말을 듣고부터 밤낮으로 염려하고 있으니 경은 최선을 다하여 구제하도록 하고, 만일 굶주림에 시달려 생업을 잃고 있는 자가 있거든 관아에서 옷과 식량을 주어 잘 보살펴 주도록 하라."
하였다.
26년(갑자, 1444)
○ 함길도 도절제사 김효성(金孝誠)에게 하교하기를,
"대체로 백성에게는 삼강(三綱)이 있는데, 그 윤리 중에서 부자(父子)의 관계만큼 중대한 것이 없다. 형벌에는 오형(五刑)이 있는데, 윗사람을 시해한 역적은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 처형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천하의 대원칙이며 만세의 보편적인 법규인 것이다.
동량북(東良北)의 야인(野人) 보야두(甫也豆)가 일찍이 그의 아비를 시해하였다고 한다. 그들의 족류들이 어느 누가 들어서 알고 있지 않겠는가마는 이들의 풍습은 원래 통섭(統攝)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부모를 시해한 자로 하여금 목숨을 보전하고 10여 년 동안이나 살게 한 것이다. 이번에 종형인 도만호(都萬戶) 낭복아한(浪卜兒罕)을 따라왔을 때 처음으로 그 사실을 들었는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이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안험(按驗)해서 갖추어 자복하게 하였다. 대체로 천도(天道)는 재앙을 내릴 때 착오가 없으므로 이 죄인이 스스로 국법에 걸려든 것이다.
나는 생각건대, 역적의 무리는 천지가 용납해주지 않으며 신명이 용서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몸이 죽었거나 살았거나 시기가 옛날이거나 지금이거나 관계없이 법관에게만 맡기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이 주벌할 수 있는 대상으로, 그 사람은 사형에 처하고 그가 살던 집은 못을 파며, 나라의 임금도 교화가 밝지 못한 것을 가슴 아파하면서 한 달이 지난 후에 술잔을 들었던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도리에서 하나의 큰 변고이기 때문이다.
야인들이 비록 무지하다고는 하지만 부자간의 인정이야 제각기 있을 터인데, 어찌 패역스러움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를 줄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동량북은 우리나라와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큰 악인(惡人)을 용서하여 몹쓸 풍습을 장려시킬 수는 없다. 살리기를 좋아하는 것이 비록 내 마음에 간절하지만 부도한 자는 천벌을 피할 수 없는 법이다. 속히 그를 국경에서 처단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본보기로 제시하게 하라.
경은 도내의 대소 군민 및 국경 가까이에 사는 여러 종족의 야인을 모아놓고 이 자의 죄악을 율문에 따라 처결한 것을 알려주고 천륜을 문란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왕법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는 한편, 저들의 사나운 풍습을 개혁하고 우리의 큰 법을 따르게 하라.
아,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아비 없이 태어난 자가 있겠는가. 한 사람을 처단하여 많은 사람을 깨우칠 수 있는 것은 장래에 교훈으로 삼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하였다.
○ 처음에 왜적(倭賊)이 중국의 연해 지역을 침범하였다. 또 제주(濟州)에서 노략질하다가 변장(邊將)에게 사로잡히고 나머지 도적은 대마도(對馬島)로 도망쳤다. 상이 이예(李藝)를 파견하여 대마도주에게 도망쳐 간 나머지 도적들을 잡아보내라고 유시하니, 대마도주도 감히 숨기지 못하고 이예에게 붙여 보냈다. 상이 병조 참판 신인손(辛引孫)을 파견하여 경사(京師)에 바쳤는데, 이때에 이르러 칙서(勅書)를 내리기를,
"왕은 동쪽 번방(藩邦)에서 나라를 이어받아 변경을 잘 보전하고 선왕이 하늘을 공경하고 대국을 섬기던 마음을 잘 체득하여 공손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오래될수록 더욱 돈독히 하였소. 그렇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변함없이 더욱 은혜를 베풀고 대우하였으니, 임금과 신하 간에 한마음으로 변함없이 지내왔다고 이를 만하오. 이번에 또 배신 신인손을 보내 변방을 침범했던 왜적 57명을 잡아서 보내오니, 왕이 조정의 명을 준수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안정시키려는 뜻을 충분히 알 수 있겠으며, 또 적합한 사람을 얻어 변방을 지킴으로써 포악한 자들을 방어한 공로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소. 이 점을 짐은 가상하게 여기고 특별히 왕에게 비단과 표리(表裏)를 내려주어서 왕의 충성에 보답하고자 하는 바이오."
하였다.
○ 연생전(延生殿)에 벼락이 쳤다. 상이 우의정 신개(申?) 등을 불러 이르기를,
"오늘 발생한 재변은 매우 크다. 옛날 홍무(洪武) 연간에는 근신전(謹身殿)에 벼락이 쳤고 영락(永樂) 연간에는 봉천전(奉天殿), 화개전(華盖殿), 근신전에 화재가 발생하자, 두 황제가 모두 조심스럽게 몸을 닦고 자신을 반성하였으며 온 천하에 대사령을 내려 하늘의 견책에 답한 일이 있다. 지금 하늘이 견책을 보이고 있으니 나는 매우 두렵다. 관용을 베풀어 주는 은혜를 펴서 재변을 해소하고자 한다."
하였다. 이에 경내(境內)에 대사령을 내리고 출궁(出宮)한 사람으로 나이가 많은 자들에게 노인작(老人爵)을 차등 있게 주었다.
○ 하교하기를,
"왕자(王者)의 정치는 백성을 편케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데, 그 요체는 부역을 가볍게 하고 조세를 박하게 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변변찮은 내가 한 나라의 임금이 되고 보니 사방의 백성들을 혼자서는 다스릴 수가 없었다. 여러 관리들을 신중히 선발해서 지방 수령의 책임을 맡기고 사회를 안정되게 하도록 도모해 온 지가 벌써 몇 해 되었다. 그러나 나의 덕성에는 미덥지 못한 점이 있고 은택에는 흡족하지 못한 점이 있어서 해마다 가뭄으로 인한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살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 내 마음은 그래서 두렵다.
근래에 들으니, 수령들 중에 국가의 대체를 모르고 백성들의 고통을 염려하지 않는 자가 더러더러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조세를 거두거나 부역을 시킬 때에 이끗을 좇아 의리를 잊고 연줄을 타고 농간을 부리는 통에 한 말의 조세가 불어나서 몇 섬에 이르기도 하고 하루의 부역이 늘어나서 수십 일에 이르기도 한다. 심지어 정상적인 과세 이외의 온갖 방법으로 속여대다가 한 가지 일이라도 뜻에 거슬리면 매질을 해대어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편히 쉬지 못하게 함으로써 원망과 탄식을 일으켜 화기(和氣)의 손상을 부르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내가 책임지고 이루도록 위임한 뜻이라 할 수 있겠는가.
《서경》에, '어린아이를 보호하듯이 다스리면 백성들이 편하게 여기고 따른다.' 하였고, 《시경》에, '부유한 사람들이야 좋겠지만 이 고독한 사람들이 애처롭다.' 하였다. 지금 너희 수령들은 《시경》과 《서경》의 훈계를 체득하고 조종의 법을 준수하여 되는 대로 적당히 하는 것이 습관화되지 않도록 하고, 구례(舊例)에 얽매이지 말도록 하라. 그리하여 모든 불법적인 징수와 급하지 않은 역사를 일제히 혁파해서 백성들의 힘을 여유 있게 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을 애처롭게 여기는 나의 지극한 뜻에 부응하도록 하
하였다.
○ 하교하기를,
"우리나라의 풍습은 상하(上下)의 구분이 엄격하다. 죄지은 노비를 그 주인이 죽였을 경우에 대부분 주인을 두둔하고 노비를 억제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뜻이라 하겠다. 그러나 상을 주고 벌을 주는 문제는 임금의 큰 권한이다. 임금의 신분으로 한 사람의 무고한 자를 죽여도 오히려 안 될 일인데, 더구나 노비가 아무리 천하기로소니 이들 역시 하늘이 내린 우리 백성인데 어찌 무고한 자를 함부로 죽일 수가 있겠는가. 임금의 덕은 살리기를 좋아하는 것일 뿐이다. 무고한 자가 피살되는 것을 앉아서 보고만 있는다면 어찌 가슴 아프지 않겠는가. 앞으로는 노비가 죄를 지었을 경우 관아에 고발하지 않고 매를 때려 죽게 하는 자는 구례에 따라 단죄하고, 만일 포락(?烙), 의형(?刑), 이형(?刑), 경면(?面), 고족(?足) 및 칼이나 나무와 돌을 사용하여 한결같이 참혹하게 함부로 죽인 자가 있을 경우에는 그 집의 식구는 율문에 따라 속공(屬公)하게 하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국가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처럼 여긴다. 그러므로 농사는 의식(衣食)의 원천이며 왕정(王政)의 최우선인 것이다. 오로지 백성들의 목숨과 관계가 되기 때문에 세상에서 지극히 수고로운 일을 하는 것이다. 위에서 다스리는 사람이 성실한 마음을 가지고 이끌어주지 않고서 어찌 백성들로 하여금 농사일에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는 즐거움을 이루게 할 수 있겠는가.
옛날 신농씨(神農氏)는 처음으로 쟁기를 만들어 세상을 이롭게 하였고, 소호씨(少昊氏)는 구호(九扈)에게 명하여 농사를 담당하게 하였으니, 이는 성신(聖神)이 하늘을 계승하여 법을 세워서 만백성을 위하여 천명을 수행한 것이다. 요(堯) 임금은 희씨(羲氏)와 화씨(和氏)에게 명하여 신중을 기해서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시기를 알려주게 하였고, 순(舜) 임금은 12목에게 이르기를, '먹는 것이란 오로지 시기에 알맞게 농사를 짓는 데 달려 있다.'고 하였으며, 하후씨(夏后氏)는 구혁(溝?)을 정리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였으며, 상(商) 나라 고종(高宗)은 백성들이 농사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을 알았다. 주(周) 나라에 이르러서는 농사를 가지고 국가를 건설하였는데, 빈풍(?風)의 시(詩)와 무일(無逸)의 글에서 보듯이 농사짓는 어려움을 가슴에 새기지 않은 것이 없었기에, 장구한 정치로 안정된 왕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니 성대한 일이라 하겠다.
한(漢) 나라 문제(文帝)는 자주 조서(詔書)를 내려서 해마다 씨앗 뿌리고 뽕나무 심는 것을 권면하고 조세를 감면하여 농민에게 은택을 베푸니 해내(海內)가 풍요로웠으며, 당(唐) 나라의 고조(高祖)는 목재(牧宰)에게 조칙을 내려 일을 간편하게 하도록 해서 시기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였고, 태종(太宗)은 매번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의식을 마련하려면 제때를 놓치지 않는 것을 근본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으니, 쌀 한 말의 값을 3전(錢)에 이르게 한 공효가 어찌 이유가 없는 것이겠는가. 송(宋) 나라의 제도에 권농사(勸農司)를 두어 연말에 상을 주거나 벌을 주게 하였고, 또 주현(州縣)으로 하여금 매년 술을 싣고 들에 나가 부로(父老)들을 맞이하여 힘을 다하여 농사를 짓도록 권유한 것도 역시 여기에서 배운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널리 생각건대, 우리 태조께서는 천운에 순응하여 국가의 터전을 잡으시고 맨 처음 토지 제도를 바로잡음으로써 백성을 도탄에서 구제하여 자급자족하는 이로움을 누리게 하였으니, 농사를 장려한 사항이 모두 법령에 실려 있다. 태종은 이를 계승하여 농사짓는 일에 더욱 힘쓰셨다. 특히 어리석은 백성들이 심고 가꾸는 방법에 어두운 것을 염려하여 유신(儒臣)더러 농서(農書)를 방언(方言)으로 번역하게 해서 중외에 널리 배포하여 후세에까지 전하게 하였다.
덕이 적은 내가 왕위를 계승하여 밤낮없이 염려하면서, 전 시대에 잘한 정치를 본받고자 하여 오로지 조종(祖宗)을 법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농사 문제만큼은 백성들과 가까이에 있는 관리에게 맡겨야 하겠기에 신중을 기하여 선발해서 친히 힘쓰도록 유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주현(州縣)을 방문하여 토지에 따라 시험한 것을 가지고 《농사직설(農事直說)》을 엮어서 농사짓는 백성들로 하여금 분명히 쉽게 알 수 있도록 하였으며 혹시라도 농사에 유익한 것이면 마음을 다하여 연구하는 한편, 사람은 힘을 다하고 토지는 다 개간되도록 하
옛날 훌륭한 관리들이 한 지방에서 유익한 일을 일으켜 백성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입는 것을 보면 근로한 결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가 없다. 공수(?遂)는 발해 태수(渤海太守)가 되어 농사짓고 누에 치는 것을 권장하였는데, 백성 중에서 칼을 차고 다니는 자가 있으면 송아지를 사도록 권장하였다. 봄에는 들에 나가 일하기를 권하고 겨울에는 거두어들이기를 권하니 백성들이 다 풍요롭게 살았다. 소신신(召信臣)은 남양(南陽) 태수가 되어 백성을 위하여 유익한 일을 일으키기를 좋아하였고 직접 농사짓는 일을 권장하느라 들녘을 나다니다 보니 편하게 지낼 때가 드물었다. 길을 가다가 샘을 보면 도랑을 만들어 관개(灌漑)를 넓히니 백성들이 그 이익됨을 얻어 농사짓는 일에 힘을 쏟았다. 임연(任延)이 구진(九眞) 태수가 되었는데, 그곳 풍습은 사냥을 생업으로 삼고 소로 밭을 갈아 농사짓는 방법을 몰라서 늘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에 농기구를 주조하여 개간(開墾)을 하도록 가르쳐서 해마다 넓혀가니 백성들이 풍족하게 되었다. 신찬(辛纂)이 하내(河內) 태수가 되어 농사짓고 누에 치는 것을 장려하고, 직접 살펴보고 부지런한 자는 비단을 주었고 게으른 자는 죄를 주었다. 주문공(朱文公 주자(朱子))은 남강(南康)의 원이 되었을 때 방문(榜文)을 인출하여 백성을 권장하였는데, 밭갈이하고, 거름 주고, 풀베기하는 절차에서부터 삼과 콩을 심는 일과 제방을 쌓는 등의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제시하여 자상하게 타일렀다. 수시로 직접 들녘을 순시하면서 가르친 대로 따르지 않는 자는 벌을 주었다. 이 모든 것들이 어찌 까닭없이 번거로운 것을 좋아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대체로 사람들의 정서는 통솔을 하면 스스로 힘을 내고 놓아두면 게을러지기 마련이다. 선철(先哲)의 말에 '일명(一命)의 선비가 진실로 사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사람들을 위하여 반드시 구제해주는 바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더구나 지금 감사와 수령의 책임을 맡고 있는 자는 모두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어서 한 지방의 기쁨과 슬픔이 그의 한 몸에 달려 있으니 만일 성심으로 돌보아 준다면 어찌 옛사람만큼 못 하겠는가.
대체로 농사일은 철을 따라 일찍 한 것은 수확도 일찍 하게 되고 많은 노력을 들인 것은 수확도 많은 법이다. 그래서 농사 정책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 시기를 어기지 않은 데 있고 백성들의 힘을 빼앗지 않는 데에 있다. 모든 곡식을 심고 옮기는 데는 거기에 알맞는 시기가 있다. 시기를 한 번 어기고 나면 1년 내내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백성은 몸이 하나라서 힘을 나누지 못하는데 관아에서 빼앗아가고서 어찌 농사에 전념하라고 책망할 수 있겠는가. 진실로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한다면 비록 고르지 못한 천운(天運)일지라도 막아낼 수 있는 것이니, 이윤(伊尹)이 실시한 구전(區田)과 조과(趙過)가 실시한 대전(代田)이 바로 그러했다.
최근에 경험한 것으로 말하면, 정사년에 후원에다가 시험삼아 밭을 일구고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다하였더니 과연 가뭄을 만나고도 한재가 들지 않고 벼가 잘 익었다. 이것은 우연이기는 하지만 천재(天災)도 사람의 힘으로 구제할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한 것이다. 전(傳)에 이르기를, '백성의 생활은 부지런한 데에 달려 있으니 부지런하면 궁핍하지 않다.' 하였고, 《서경》에 '게으른 농부가 안일에 젖어 힘써 수고로운 일을 하지 않아 농사를 짓지 않으면 피와 기장도 거둘 것이 없게 된다.' 하였으니, 여기에서 차라리 과도하게 수고로운 일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게을러서 실책을 범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다만 백성은 부지런히 하려고 하더라도 성실하게 권장해주지 않는다면 그들의 능력을 활용할 수가 없다.
그리고 망종(芒種)을 언급한 것은 인력이 넉넉하지 못하여 비록 다 일찍이 하지는 못했더라도 만약 이 시기까지만이라도 마친다면 오히려 수확할 가망이 있어서이다. 때문에 특별히 절후를 한정해 놓은 것은 늦게 서둘러 농사를 망치는 것보다는 이 시기까지는 심는 것이 낫다는 것을 제시하자는 것이지 반드시 이 시기를 기다려 파종할 시기로 삼으라는 것은 아니다. 농서(農書)에도 '대체로 일찍 심어야 한다.' 하였다. 요즘 수령은 구습에 젖어서 파종 시기가 되었는데도 '망종이 아직 멀었다.'고 하면서 토지에 관계되는 소송 사건을 즉시 처결하지 않고 곡식 종자와 식량을 빌려주는 등의 일을 항상 서두르지 않아서 매번 시기를 놓쳐버리곤 한다. 설사
나와 함께 정치를 하는 자는 내가 위임한 뜻을 체득해서 조종이 백성들에게 후하게 하던 법을 준수하고 앞서간 현인들이 농사를 장려하던 규정을 참고로 하라. 풍토의 적합성을 널리 묻고 농서(農書)에 언급된 내용을 참고해서 미리 조치를 취하여 너무 이르게도 하지 말고 너무 늦게도 하지 말라. 더욱이 일을 벌여서 농사지을 시기를 빼앗지 않아야 한다. 각자 최선을 다하여 백성을 인도하여 근본을 힘쓰게 하고 힘껏 농사를 지어서 위로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 자식을 양육하게 하여서 우리 백성들의 생명을 장수하게 하고 우리나라의 기반을 굳게 다진다면, 아마도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해서 예절을 알고 겸손을 아는 기풍이 성행하게 되고 시절은 화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 태평시대의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하였다.
○ 당시의 풍수(風水)하는 자가 궁성(宮城)의 북쪽 길을 막고 성내(城內)에다 가산(假山)을 만들어 지맥(地脈)을 보충하게 하기를 청하고, 집현전 수찬 이현로(李賢老)도 풍수설(風水說)을 가지고 도성 내에 흐르는 개울물에 오물을 집어넣지 못하게 하여 명당수(明堂水)를 맑게 하기를 청하였다. 집현전 교리 어효첨(魚孝瞻)이 상소하기를,
"신은 지리서(地理書)에 대하여 두루두루 알지 못합니다. 겨우 읽었던 것도 책만 덮고 나면 잊어버려 요점을 알 수가 없습니다. 또 학문도 천박하여 본래 식견이라곤 없습니다. 다만 어리석고 고집스러운 뜻에서 망령되게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지리(地理)에 관한 말은 삼대(三代) 이전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의례(儀禮)》는 주공(周公)이 지은 것인데 묏자리나 잡고 날이나 점치는 정도일 뿐이었으며, 공자(孔子)도 '묏자리를 점쳐서 안장시킨다.'라고 한 정도였습니다. 양한(兩漢) 이후에 처음으로 그 학술이 나타나게 되어 각각 길흉과 화복에 관한 설을 주장하여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였던 것입니다.
당(唐) 나라 태종은 음양(陰陽)에 관한 잡서(雜書)가 잘못된 것도 심하고 꺼리는 것도 많다는 이유로 태상박사(太常博士) 여재(呂才)에게 명하여 바로잡아서 정리하게 하자, 여재는 이것들을 모두 경사(經史)를 바탕으로 새로 서술하였습니다.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확실한 논의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가 제시한 장사(葬事)에 관한 서설을 보면 '옛날에 장사를 지내는 자들은 모두 도성의 북쪽에다 일정한 묘지를 두었으니, 이는 묏자리를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요사스런 무당들이 망령스런 말을 가지고 드디어 초상이 나서 경황이 없는 중에서도 묏자리를 가리고 날을 받아서 부귀(富貴)를 꿈꾸고 있다.' 하였습니다. 여재의 말이 이미 이러한 것을 보면, 비록 당 나라 때에 이르러서도 실지로 이것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무당이 있었으며 비속하고 무식한 자들은 이것을 신봉하였지만 식견이 있는 선비들은 이것을 취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송(宋) 나라 때에 이르러 사마온공(司馬溫公 사마광(司馬光))의 장론(葬論)에, '세상 풍습이 장사(葬師)의 말을 신봉하여 이미 연월일시(年月日時)를 가리고 또 산과 물의 형세를 가린다. 설사 그렇게 하면 실지로 사람이 화와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차마 그 어버이를 한데다 드러내놓고 자신만 이익을 추구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효자의 마음은 깊고 멀기 때문에 반드시 흙이 두껍고 물길이 깊은 데를 찾아서 장사를 지낸다.' 하였고, 정자(程子)의 장설(葬說)에는, '묏자리를 가린다는 것은 그곳의 지형이 좋고 나쁜 것을 가리는 것이므로 음양가(陰陽家)가 말하는 화복(禍福)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꺼려하는 자들은 묏자리의 방향을 잡기도 하고 날짜의 길흉을 결정하기도 하니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였습니다. 호영(胡泳)이 주자(朱子)에게 묻기를, '장사 준비가 다 되었을 때에 다시 복서(卜筮)에게 결정을 물으면, 아무 산은 불길하고 아무 물도 불길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산과 물이 잘 어우러진 곳을 얻고 나면 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이 길하고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지리에 따라 화복이 좌우된다는 말은 송 나라의 이름난 선비들도 모두 취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모두 경적(經籍)에 실려 있어서 확실하게 상고할 수가 있는 것으로 전하께서도 환히 알고 계시는 일인데, 신이 감히 속일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화복에 관한 말을 묏자리에 적용해도 오히려 옳다고 할 수 없는데 더구나 도읍지(都邑地)에 적용한다는 것은 더욱 옳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대체로 국운(國運)이 길고 짧은 것과 국가가 화를 받고 복을 받는 것이 모두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떠나고 떠나지 않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지 사실 지리설(地理說)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훌륭한 신하들은 임금에게 경계하는 말을 올릴 때에, '상제(上帝)는 거취가 일정하지가 않아서 선(善)한 일을 하면 온갖 상서를 내려주고 불선(不善)한 일을 하면 온갖 재앙을 내려줍니다.'라고 하였고, '오직 하늘은 더 친한 이가 없고 공경하는 자를 친히 하며, 백성들은 항상 한 임금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진 임금을 생각한다.' 고 하였으며, '우리는 하(夏) 나라를 귀감으로 삼지 않아서는 안 되며, 은(殷) 나라를 귀감으로 삼지 않아서도 안 됩니다. 덕(德)을 공경하지 않으면 천명은 일찍 떨어져 버릴 것입니다.' 하였으니, 이는 바뀌지 않을 정론(定論)입니다.
그리고 삼대(三代) 이전에는 이미 지리에 관한 법이 없었는데도 나라를 길이 유지하였고 훌륭한 정치를 한 것이 역사에 길이 빛나고 있어서 후세로서는 미치지를 못하고 있는데, 그 도읍지가 어찌 다 오늘날 말하는 지리설에 부합되어서 그렇겠습니까. 삼대 이후에 장안(長安)에 도읍을 정했던 나라로는 서한(西漢)은 역년(歷年)이 214년이었고, 서위(西魏)와 후주(後周) 그리고 수(隋) 나라의 고조(高祖)가 20여 년이었으며, 당(唐) 나라는 290년이나 되었습니다. 낙양(洛陽)에 도읍을 정했던 나라로는 동한(東漢)은 역년이 196년이었으며, 조(曹) 나라와 위(魏) 나라 그리고 서진(西晉)은 40년, 50년이었고, 수(隋) 나라 양제(煬帝)는 겨우 13년이었습니다. 건강(建康)에 도읍을 정한 나라로는 동진(東晉)은 역년이 105년이었고, 송(宋)촹제(齊)촹양(梁)촹진(陳)의 경우는 혹은 50년, 60년이었고, 혹은 20년, 30년이었습니다. 변경(?京)에 도읍을 정한 나라로는 오계(五季)는 더욱 짧아서 혹은 10여 년 가기도 하고, 혹은 4년에 그친 나라도 있으며, 조송(趙宋)의 경우는 167년 동안이나 지속되었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로 비추어 보면, 도읍으로 정한 지역은 한 곳인데 그 나라 운명의 길이가 일정하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이겠습니까. 신이 이른바 지리설과는 무관하다고 말씀드린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도성 북쪽의 길을 막으면 복을 받고 통하게 하면 화를 받으며, 성 안의 산기슭에 보토(補土)를 하면 길하고 보토를 하지 않으면 흉하다고 하는데 경전(經傳)의 고사(故事) 중에 어느 글을 근거로 한 것입니까. 신은 진실로 우매하여 그 이치를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옛날 제왕이 도읍을 정한 제도를 보면 반드시 정면에는 관청이 있고 뒤쪽에는 저자[市]가 있었는데 이 당시에 궁성의 북쪽을 과연 모두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시켰었습니까. 더구나 술가(術家)들은 성이 끊기거나 길이 잘리는 것을 모두 해롭다고 하는데, 지금 궁성(宮城)의 터를 보면 땅 속으로 들어간 깊이가 거의 1장(丈) 남짓 됩니다. 가령 술사(術士)의 말대로라면 이미 성이 주맥(主脈)을 끊어 1장 남짓 깊이 파고든 것이니 길 위로 다니는 사람의 통행을 막는 것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잘린 맥을 보토하는 것은 마치 생살을 베어내어 종기에 채우는 것과 같은 상황인데 어찌 혈맥이 통할 리가 있겠습니까. 만약 기맥(氣脈)을 통하게 하려 한다면 도성 북쪽의 길을 막는 것으로도 안 되며 성 안의 언덕을 보토하는 것으로도 안 됩니다. 필시 궁성을 먼저 헐어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 궁성을 헐어낼 수 있겠습니까. 이는 절대로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신이 또 안찰하건대, 《동림조담(洞林照膽)》은 범월봉(范越鳳)이 지은 것인데, 월봉은 오계(五季) 시대의 일개 술사(術士)입니다. 그가 이른바 '명당(明堂)에 냄새가 나고 불결한 물이 있으면 이는 반역할 흉악한 무리가 생길 징조이다.' 한 것은 장지(葬地)의 길흉에 대하여 논의한 것이었고 도읍(都邑)의 형세에 대해서는 언급하
예로부터 간사한 말이 제기되어 사람을 쉽게 유혹하는 경우는 화복(禍福)을 가지고 충동질을 하기 때문입니다. 시험삼아 대중에게 말하기를, '아무 산, 아무 물이 국가에 이롭지 않다.'고 하면 듣는 자는 필시 '신하가 차마 할 수 없는 바인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할 것이니, 이는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화복을 가지고 충동질을 하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주공(周公)과 공자(孔子)는 천하의 대성인(大聖人)이며, 사마온공(司馬溫公)과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는 천하의 대현인(大賢人)이라고 봅니다. 화복(禍福)에 관한 말을 앞 시대에 주공과 공자가 언급하지 않았고 뒤에는 온공과 정자와 주자가 취하지 않았으니, 몰라서 언급하지 않은 것이라면 주공과 공자는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며, 알면서도 언급하지 않은 것이라면 주공과 공자는 충직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알면서도 취하지 않았다면 온공과 정자와 주자도 충직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저 두 성인과 세 현인만이 유독 신하다운 신하가 아니어서 언급하지 않았고 취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는 성인과 현인이 도리어 술사(術士)보다도 지혜롭지 못하고 충직하지 못하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이치가 매우 밝아서 다시 의심할 것이 없다는 것을 진실로 성상의 학식으로 환하게 알고 계시는 일인데 신이 감히 속일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산을 만들고 길을 막는 등의 일이 설사 오늘날에는 해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성현의 도리에 어긋날 뿐만이 아니니 끝에 가서 생기게 될 폐단을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바야흐로 지금은 위에 현명하신 임금이 계시고 아래에 대를 이을 훌륭한 세자가 계시며 또 훌륭한 재상들이 있어서 서로 정치하는 방법을 강론하여 법을 만들고 제도를 마련하여 만세에 모범이 되게 합니다. 이때야말로 참으로 공자보다 앞서간 성인은 공자가 아니면 밝혀낼 수가 없고 공자보다 뒤에 태어난 성인도 공자가 아니면 법으로 삼을 수가 없다고 하겠는데, 지금 시험삼아 풍수설을 적용하신다면 후세의 왕들이 필시 '아무 임금은 성인(聖人)이신데 이것을 믿고 채택하셨으니, 이 임금보다 훌륭하지 못한 내가 감히 이것을 어길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사람의 빈부(貧富), 귀천(貴賤), 현우(賢愚), 수요(壽夭)가 모두 여기에 달렸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시의 임금이 신봉하게 되고 당시의 재상들이 빠져들게 되면 아첨하는 무리들이 그 틈을 타서 나와 속이기를, '아무 산과 아무 곳에는 민가를 헐어야 하고 아무 방향의 아무 문은 막아야 하며 아무 위치의 아무 산은 낮추거나 높여야 한다.'고 말하면서 길흉을 뒤엎어 가며 인심을 유혹할 것이 뻔합니다. 특히 이뿐만이 아니라 전조(前朝)를 두둔하는 말이 혹시라도 계속해서 제기된다면 필시 '아무 마을 아무 방(坊)에는 절을 지어야 하고 아무 고을 아무 산에는 탑(塔)을 쌓고 사당을 지어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대체로 마음이 쏠리게 되면 반드시 판단이 흐려지는 법입니다. 그리하여 임금과 신하가 모두 풍수설에 빠져서 이 풍수설대로 해야만 장구한 세월을 유지할 수 있다고 여기고서, 덕을 쌓아 하늘의 영원한 보살핌을 비는 실상을 힘쓰지 않는다면 오늘의 이 거조는 아무래도 후손들
옛날 우리 태종대왕께서 내리신 전지(傳旨)에, '선왕이 예(禮)를 제정하면서 천자(天子)로부터 대부(大夫)와 선비에 이르기까지 장기(葬期)에 대해 각각 달수를 정해 놓았으나, 후세에 음양가(陰陽家)가 많은 금기사항에 구애되어 시기를 넘겨가면서 장사를 지내지 않으니 나는 매우 민망하게 여긴다. 이를테면 태세(太歲)가 본명(本命)을 제압하는 것을 장사(葬師)가 가장 꺼리었는데, 내가 일찍 두 번이나 시험해 보았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고 드디어 대신 정이오(鄭以吾) 등에게 명하여 여러 책을 두루 읽어본 다음, 정론(正論)은 취하고 사설(邪說)은 삭제하되, 성현의 요지에 질정하고 세속 무당들의 고질적인 병을 타파하는 것으로 한 권의 책을 만들게 하고 책명을 《장일통요(葬日通要)》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것을 중외에 반포하고 나니 인심은 안정되고 선왕의 제도가 다시 밝아짐에 따라 우리 동방에서 사람의 아비가 된 자는 죽어서 한데 버려지지 않게 되었으며, 어버이의 초상을 치르는 도리에 유감이 없게 되었습니다. 후손을 위하여 좋은 계책을 물려주는 방법으로는 반드시 우리 태종처럼 해야만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연월일시(年月日時)에 따른 금기 사항을 이전에 우리 태종께서 근절시키셨으니, 산과 물의 형상에 따른 화복에 관한 말을 우리 전하께서 마땅히 지금 바로잡으셔야 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 멀리는 앞서간 성현의 정당한 도리를 준수하시고 가까이는 우리 태종의 아름다운 뜻을 체득하시어 이름 있는 선비로 하여금 지리서(地理書)를 두루 열람한 다음, 전적으로 정자, 주자, 사마온공이 논의한 것을 조종으로 삼고 괴이하고 허황된 말을 모조리 제거하기를 태종이 하신 것처럼 하소서. 전하께서는 또 중화(中和)의 극점을 세우시고 도의(道義)의 근원을 맑게 하시는 한편, 덕성만을 공경하시고 근거 없는 말을 듣지 마소서. 그리하여 천명(天命)을 주맥(主脈)으로 삼으시고 민심(民心)을 안대(案對)로 삼으셔서 하늘의 밝은 명을 돌아보시고 민심이 사나운 것을 염두에 두도록 하소서. 정사와 교화에 더욱 노력하시어 인심을 착하게 만들고 세상의 도의도 돌이키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 도(道)를 중천에 떠 있는 태양처럼 빛나게 만들고 태평한 세상을 이루어서 후세에 교훈을 주는 한편, 천명을 응집시킴으로써 인심을 결집시켜 국운이 반석처럼 견고하고 태산처럼 안전하게 할 수만 있다면, 이는 바로 억만 년토록 끝이 없는 복이 될 것입니다. 이런 따위의 지리(地理)니 화복(禍福)이니 하는 사특한 말을 놓고 어찌 따질 것이 있겠습니까.
신은 삼가 생각건대, 세상에서는 흔히 유자(儒者)의 말을 예스러움에 빠져 융통성이 없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 예스러움에 빠져 있는 것이 사실은 오늘날과 서로 통하게 하려고 그런 것입니다. 지금 진달한 것이 세속의 입장에서 말하면 비록 예스러움에 빠져 있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성현의 도에 맞추어 보면 사특한 말을 물리쳐서 정도를 밝히고 법을 만들어 후세에 전함으로써 천명(天命)을 영원히 보전하려는 뜻에는 반드시 조그만 보탬이 없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상이 근신에게 이르기를,
"어효첨(魚孝瞻)의 논의가 정직하다. 나는 그 글을 보고 감동하였다."
하고, 마침내 술자(術者)의 말을 채택하지 않았다.
27년(을축, 1445)
○ 상이 이르기를,
"감사와 수령들이 내 뜻을 체득하지 못하고 옥사(獄事)와 송사(訟事)를 한결같이 준엄하게 하기에만 힘쓴다고 한다. 심지어 죄가 있는 자를 풀어 주고 죄가 없는 자를 가두어서 화기(和氣)를 손상되게 한다고 하니, 나는 매우 염려된다."
하고, 드디어 제도의 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대체로 형옥(刑獄)이란, 실정을 캐내기는 어렵고 공정성을 잃기는 쉽다. 일찍이 교서(敎書)를 내려서 분명하게 유시하였지만 수많은 주현(州縣)과 수많은 수령(守令)들 중에서 형벌을 적용한 것이 지나쳤거나 옥사를 심리한 것이 분명하지 못하여 죄 없는 백성을 오랫동안 감옥에 가두어 둠으로써 화기(和氣)가 손상되게 한 자가
하였다.
○ 상이 정인지(鄭麟趾)에게 이르기를,
"대체로 정치를 잘하려면 반드시 앞 시대의 치란(治亂)의 발자취를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 주(周) 나라 이후로 각 시대마다 역사 기록이 있다. 그러나 분량이 너무 많아서 두루 살펴보기가 쉽지 않다. 대체로 사람이 학문에 대하여 박람(博覽)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임금이 정사를 보는 여가에 박람을 할 수가 있겠는가. 경은 역사 서적을 열람하여,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자료가 될 만한 것을 편찬, 책으로 만들어서 후세 자손들의 영원한 귀감이 되게 하되, 우리 동방의 흥하고 망했던 사적까지 아울러 편찬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문학(文學)에 능한 선비 수십 인을 집현전(集賢殿)에 모아놓고 과목을 나누어 책을 만들게 하는 한편, 금상(今上) -세조대왕- 에게 명하여 감독하게 하였다. 책이 완성되자, 《치평요람(治平要覽)》이란 책명을 하사하였다.
○ 상이, 조종이 오랜 공덕을 쌓아서 국가의 기반을 어렵게 마련한 내력을 후왕(後王)이 몰라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권제(權?)와 정인지 등에게 명하여 목조(穆祖) 이후의 조상이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자취를 찬술하게 하고, 책명을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라고 하였는데 모두 125장이었다. 궁중(宮中)에서 인출하여 신하들에게 하사하고 조제(朝祭)와 연향(宴享)의 악사(樂辭)로 삼게 하였다.
○ 경상도 도절제사 최숙손(崔淑孫)이 흰 까치를 진상하였다. 대신이 하례하기를,
"전번에는 감로(甘露)가 광주(廣州)에 내리더니 이번에는 흰 까치가 경상도에 나타났습니다. 상서(祥瑞)가 자주 나타나니 신들은 하례하는 마음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이 말을 들으니 매우 부끄럽다. 경들은 다시 이런 말을 하지 말라."
하였다.
28년(병인, 1446)
○ 의정부에서 하서(下書)하기를,
"옛날에는 백성들을 한 해에 3일 이상 부리지 않았다고 하며, 또 '순라군(巡邏軍)이 순찰을 도는데도 제 값을 주었다.' 하고 또 '전지가 있으면 조세를 물고 몸이 있으면 용역(庸役)을 진다. 호(戶)가 있으면 조(調)를 부담하는 것도 역시 그렇다.' 하였으니, 이것으로 비추어 보면 임금이 백성을 취하는 것도 법이 있어서 마음대로 증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마구 거두어들이기도 하고 쓰는 것도 절도가 없다. 그래서 혹은 일로 인해 더 징수하기도 하고, 수년의 공물을 미리 징수하기도 하였다. 박은(朴誾)이 일찍이 당(唐) 나라의 조용조법(租庸調法)을 적용하여 제도를 대략 정하기를 청하였는데, 미처 시행하지 못하였다.
나는 생각하기에, 백성에게서 거두어들이는 것이 절도가 없으면 임금이 소비하는 것도 한량이 없게 된다. 진(秦) 나라의 기렴(箕斂)과 당(唐) 나라의 진봉(進奉)이 이것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것이다. 마땅히 조용조법을 적용하여 시의에 알맞게 그 수를 더하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되, 정해 놓은 수 이외에는 조금도 더 징수하지 못하게 한다면 백성들도 안정되고 쓰는 것도 절도가 있게 되어 탐욕스런 관리들이 간악한 잔꾀를 부리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 어제(御製)인 언문(諺文) 28자를 완성하였다. 글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하고 초성(初聲)과 중성(中聲)과 종성(終聲)으로 나누었는데, 글자는 비록 간편하고 쉬웠지만 한없이 전환할 수 있었다. 예조 판서 정인지(鄭麟趾)의 서문(序文)에,
우리나라의 예악과 문물은 중국을 모방하고 있지만 방언(方言)과 이어(俚語)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래서 글을 배우는 자는 그 글의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염려하였고 옥사(獄事)를 심리하는 자는 그 곡절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것을 문제로 삼았다. 이 때문에 옛날 신라(新羅) 때 설총(薛聰)이 처음으로 이두(吏讀)를 만들었는데, 관부(官府)와 민간에서는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글자를 빌려와서 쓴 것이므로 매끄럽게 표현도 되지 않고 정확하게 전달도 되지 않았다. 비단 비루해서 상고할 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말을 하는 사이에도 만에 하나도 표현해 낼 수가 없었다.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正音) 28자를 창제하여 대략적으로 예의(例義)를 게재하여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그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하였다. 형태를 본떠서 글자를 만들되 고전(古篆)을 모방하였으며, 소리를 인하여 7가지 음을 맞추었다. 삼극(三極)의 의의와 이기(二氣)의 오묘함을 모두 포괄하므로 28자만으로 전환이 무궁무진하였다. 간단하면서도 긴요하고 정밀하면서도 막히는 데가 없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하루아침에 터득할 수 있고 어리석은 자일지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는 글이었다. 이 글자를 가지고 옛 글을 해석하면 그 뜻을 알 수가 있고 이 글자를 가지고 송사를 심리하면 그 실정을 캐낼 수가 있다. 자운(字韻)의 경우에도 청탁(淸濁)을 구분할 수가 있고 악가(樂歌)의 경우에도 음률을 맞출 수가 있다. 따라서 쓰고 싶은 말을 표현하지 못할 것이 없고 어디를 가든지 통하지 못할 것이 없다. 비록 바람 소리, 학의 울음 소리,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일지라도 모두 글로 적을 수가 있다. 드디어 신들에게 명하여 자세하게 해석을 가해서 사람들에게 깨우쳐 주도록 하였으니, 거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승을 모시지 않고도 스스로 깨닫게 하였다. 그러나 그 글의 연원과 오묘한 뜻에 대하여서는 신들이 언급할 일이 아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신 성인으로 제도를 마련하여 정사로 시행한 것이 백대의 제왕보다 뛰어나시고 정음(正音)의 제작은 이어받은 것도 없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졌으니, 이는 지극한 이치가 있지 않은 데가 없어서 사람이 사적으로 할 수 없는 것이라 하겠다. 대체로 동방(東方)에 나라가 생긴 지가 오래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문화를 창조하여 큰일을 이룩할 큰 지혜는 바로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하였다.
31년(기사, 1449)
○ 당시 중국에 북방의 소식이 있었다. 상이 좌우에게 이르기를,
"내가 알고 있는 고사(古事)만 해도 적지 않다. 옛날의 훌륭한 신하들은 아무리 연소하더라도 큰일을 해냈으니, 이를테면 등우(鄧禹)는 광무(光武)의 사람됨을 알고 그에게 의탁해서 대업을 이루었으며, 우리나라 이숙번(李叔蕃)도 역시 우리 태종을 도와 큰 공을 세웠으니 이는 모두 지략이 남보다 뛰어난 자라고 하겠다. 나는 나이도 적지 않고 본 것도 적지 않다. 그런데 일을 처리하는 것은 옛사람만큼 하지 못하니, 이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옛날에 동진(東晉)의 노순(盧循)이 남쪽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사람은 일개 조무라기에 불과했다. 맹창(孟昶)은 그들을 막아내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임금을 모시고 피난을 가려 하였다. 유유(劉裕)가 말하기를, '피난 가지 말고 굳게 지키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맹창이 믿지 않고 죽으려 하자, 유유가 말하기를, '전쟁에서 패배하거든 그때 가서 죽더라도 늦지 않다.' 하였다. 맹창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죽었는데, 그 뒤에 유유가 결국 승리하였다. 사안(謝安)은 부견(?堅)이 대군을 거느리고 공격해 올 당시에 손님을 마주 대하고 바둑을 두
8권 문종조
문종 흠명인숙 광문성효 대왕(文宗欽明仁肅光文聖孝大王)
휘는 향(珦), 자는 휘지(輝之)이다. 영락(永樂) 갑오년(태종 14, 1414) 10월 3일(계유)에 한양의 사저(私邸)에서 탄강하였으며, 2년 동안 왕위에 있다가 경태(景泰) 임신년(문종 2, 1452) 5월 14일(병오)에 승하하였다. 향년은 39세이다. 현릉(顯陵) -양주(楊州)에 있다.- 에 장사지냈다.
즉위년(경오, 1450)
○ 상(上)은 세종의 큰아들인데, 영락 임인년(세종 4, 1422)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성품이 너그럽고 입이 무거웠으며, 효성과 우애가 있고, 공손하고 검소하였다. 성색(聲色)과 놀이를 좋아하지 않고 성리(性理)에 관한 학문에 전심하였다. 정통(正統) 을축년(세종 27, 1445)에 세종이 병으로 정사를 보지 못하게 되자, 여러 가지 정무를 처결하도록 명하였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정무가 매우 복잡하고 바쁜 중에도 약을 올리는 것과 수라를 살피는 것을 반드시 몸소 하였다. 밤이 깊을 때까지 곁에서 모시다가 물러가라고 명하지 않으면 물러가지 않았다.
항상 후원에다가 앵도(櫻桃)를 손수 가꾸어 계절이 되어 올리면, 세종이 반드시 맛을 보고서 말하기를,
"외방에서 올리는 것이 어찌 세자가 직접 심은 것만 하겠는가."
하였다. 신하들이 일을 아뢰면, 이에 대하여 모두 이르기를,
"마땅히 지존(至尊)께 여쭈어야지 내 마음대로 가부를 정할 수 없다."
하였다. 경태 원년(景泰元年) 경오년(세종 32, 1450) 2월에 세종이 세상을 뜨자, 영구(靈柩) 앞에서 즉위하였는데, 슬픔을 가누지 못하여 옷소매가 다 젖었으며 상중에는 수장(水漿)을 들지 않아 몸이 많이 야위었다. 당시에 종기가 다시 도져서 상처가 아물지 않았으므로 대신이 온실(溫室)로 물러나서 몸조리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휘덕전(輝德殿)에서 궤연(?筵)을 받드는 일을 추운 겨울이나 무더운 여름일지라도 잠시도 폐하지 않았으며, 매번 초하루 보름에 올리는 절제(節祭)에 한없이 흐느껴 우니, 좌우에서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였고 모두가 그 효성에 감복하였다.
○ 사헌부가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한창 빈궁(殯宮)을 모시느라 비통에 젖어 계시므로 조처할 일을 차마 제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만 지금은 산릉(山陵)을 이미 다 완성하였고 국가의 정무도 친히 보고 계시니,
대체로 철명(哲命)을 끼쳐주는 것은 처음부터 잘하는 데에 달려 있으니, 국가의 정치가 잘되고 못되는 것과 흥하고 망하는 것,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의 가고 오고 흩어지고 합하는 모든 계기가 오늘날 생각을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 있고 호령을 어떻게 내리는가에 달려 있으며, 종묘사직의 억만년토록 이어갈 가이없는 사업도 실로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이는 진실로 지극히 신중을 기하여 절대로 잃어서는 안 될 좋은 기회입니다.
산들이 모두 어리석은 자질로 언관의 자리에 있기는 합니다만 전하께서 새롭게 정사를 시작하는 시기를 당하였고 백성들이 훌륭한 정치를 기대하고 있으니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서 감히 성상께 진달합니다.
첫째, 처음은 누구나 그런대로 잘하지만 끝까지 잘하는 자가 드문 법인데, 처음부터 삼가지 않는다면 끝에 가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일반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할 때 처음에 고려하지 않았다가 마지막에 후회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하물며 임금이 정사를 시작하는 처음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무왕(武王)이 왕위에 오른 지 3일 만에 스승인 상보(尙父 여상(呂尙))를 불러 묻기를, '황제(皇帝)와 전욱(?頊)의 도가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있습니다. 단서(丹書)에 「공경이 태만을 이기면 길하고 태만이 공경을 이기면 멸망한다. 의리가 욕심을 이기면 모든 것이 따르고 욕심이 의리를 이기면 흉하다.」 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왕이 단서의 말을 듣고 한껏 두려워하면서 경계로 삼아 궤석(?席), 호유(戶?), 궁검(弓劒) 등의 물건에 새기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무왕이 왕위에 오른 초기에 춘추가 이미 90이 넘었으니 나이도 많고 덕도 높았는데도 오히려 다급하게 도를 구하여 마치 들어보지 못한 것처럼 하였는데, 후세의 임금은 도에 대하여 들은 것도 극진하지 못하고 도를 행하는 것도 익숙하지 못한 상황에서 정사에 임하여 잘 다스려지기를 바란다면 강구하여야 할 것을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무왕이 처음 천하를 평정하고 상보(尙父)를 방문하였는데 이때 상보가 고해준 말은 경(敬)과 의(義)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천하의 지극한 이치가 어찌 이 두 가지보다 더 절실한 것이 있겠습니까. 대체로 공경을 위주로 하면 마음이 항상 보존되어 모든 선이 바로 서게 되고 태만함을 위주로 하면 마음이 항상 보존되어 모든 선이 바로 서게 되고 태만함을 위주로 하면 마음이 방만해져서 모든 선이 없어지게 됩니다. 의(義)를 추구하면 이성(理性)이 주가 되어 사물이 각각 자기 본분을 얻게 되고, 욕심을 부리면 사물이 주가 되어 천리(天理)는 자동적으로 소멸됩니다. 이 둘은 매번 서로 상반되고 서로 공격합니다. 임금이 경(敬)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태만한 마음이 이를 해치고 의(義)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욕심이 이를 해칩니다. 이렇듯 잠시라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면 바로 태만하게 되고 잠시라도 상대와 나에 대한 마음을 갖게 되면 바로 그것이 욕심인 것입니다. 생각 하나에 경외하는 뜻이 담기지 않으면 결국에 가서는 경(敬)은 실천할 것이 못 된다고 여기는 상황에 이르게 될 것이며, 생각 하나에 나라고 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결국에 가서는 온 천하를 가지고 자기 한 몸을 받들게 하는 데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생각이 싹틀 때는 아주 작은 것이지만 길하고 흉하고 존재하고 망하는 계기는 심히 엄격한 것이어서 저것이 이기면 이것이 사라지고 이것이 이기면 이것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렇듯 한번 이기고 한번 잃는 것이 가슴속에서 교전을 할 때 스스로 버티어내지 못하면 결국은 멸망하고 말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왕이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고 스스로 그만두지 못한 경우가 아닐까 합니다.
예로부터 제왕이 즉위하던 초기에 신하들이 경계를 올린 말이 참으로 많았지만 이것처럼 간절하고 요긴한 것은 없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것을 진부한 말로 치부하지 마시고 다시 더 경계를 하셔서 언제나 가슴에 새겨 잊지 않도록 하소서. 그리고 항상 조복 차림으로 단서(丹書)를 받들고 있는 태공(太公)을 당폐(堂陛) 사이에서 접견하고 있는 것처럼 여기신다면 자연히 경(敬)과 의(義)가 이기게 되고 사욕은 말끔히 사라져서 짐독(?毒)과 같은 안일한 생각이 파고들 틈이 없게 될 것입니다. 처음을 삼가는 도리가 이것보다 시급한 것이 없으니 이것을 가지고 이치를 궁구한다면 이치는 더욱 정밀해질 것이며 이것을 가지고 마음을 다스린다면 마음이 더욱 바루어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군자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하며 자신으로부터 가정과 국가에 이르러서 선조의 공렬을 더욱 빛나게 하고 후손들에게 복을 주게 될 것이며 삼황 오제(三皇五帝)의 정치와
둘째, 천하의 도(道)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사(邪)와 정(正)일 뿐입니다. 처음에 정으로 시작하더라도 막판에는 사로 흐르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처음부터 정으로 하지 않는다면 막판에 가서 어찌할 수가 있겠습니까. 심지어 한 가지 작은 일이라도 시작이 바르지 못하면 사위(邪僞)로 끝나서 성공하지 못하게 되는데, 더구나 많은 백성을 다스리고 모든 신명을 주관하면서 그 시작을 바르게 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천하에는 정직한 자가 적고 간사한 자가 많기 때문에 정직한 자는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을 할 수 없지만 간사한 자는 매번 이기고 맙니다. 그러므로 일찍부터 구분해 두지 않으면 사(邪)를 정(正)이라고 하고 정(正)을 사(邪)라고 해도 자신도 모르게 되는 경우가 없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을 놓고 말하면 노기(盧杞)는 충신을 모함하고 역적을 비호하여 종묘 사직을 망쳐놓았는데도 덕종(德宗)은 그의 간사함을 깨닫지 못하였으며, 이임보(李林甫)는 19년 동안 정승이 되어 훌륭한 인재와 재능있는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천하의 난리를 양성하여 놓았는데도 현종(玄宗)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심한 경우는 상대가 정직한 줄을 알면서도 등용하지 못하고 억지로 간사하다고 몰아세우기도 하며, 상대가 간사한 줄을 알면서도 능히 제거하지 못하고 억지로 정직하다고 이름지우기도 하였으니, 원우당적(元祐黨籍)의 여러 군자들을 당시 사람들이 어느 누가 그들이 정직하다는 것을 몰랐겠습니까만 그들을 지목하여 간당(姦黨)이라고 하였으니, 아, 이처럼 정도(正道)가 이겨내기는 어렵고 간사한 말이 실현되기는 쉽습니다. 여기에는 천리(天理)가 존재하느냐 마느냐와 세도(世道)가 잘되는가 안 되는가의 계기가 달려 있으니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임금이 좋아하고 숭상하는 것을 삼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일단 숭상하는 것이 있게 되면 간사한 자들이 떼거지로 따릅니다. 그리하여 임금이 한가롭고 편안한 것을 좋아하면 말만 잘하는 신하가 진출하게 되고 비위를 잘 맞추어 주는 것을 좋아하면 아첨하는 신하가 진출하게 되고 기교와 재주를 좋아하면 기묘한 짓을 잘하는 신하들이 진출하고 금기(禁忌)하는 것을 좋아하면 술수를 부리는 신하들이 진출하고 문장과 글귀를 좋아하면 겉치장만 잘하는 신하가 진출하고 재물과 이끗을 좋아하면 백성에게서 긁어내어 원망을 사는 신하가 진출하게 되고 토목 공사를 좋아하면 공사하고 일 벌이기를 좋아하는 신하가 진출하고 토지를 개척하고 먼 곳을 복종시키기를 좋아하면 공 세우기를 좋아하고 말썽을 일으키는 신하가 진출하고 괴이한 물건을 좋아하면 진귀한 새와 기이한 짐승과 별스러운 꽃과 괴상한 돌들을 올리면서 상서롭다고 하는 말이 일어나게 되고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면 무당과 박수가 덩달아 생겨나서 괴이하고 요망한 말이 제기되고 인연설과 허황된 말을 좋아하면 석가와 노자의 말이 다시 제기되어 사람을 속이는 근거 없는 말들이 설치게 됩니다.
대체로 임금의 판단을 흐리게 하여 나라를 망치는 간사한 자들이 천하에 일찍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임금이 정당한 것을 지키고 엄격하게 막기 때문에 일찍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인데 조금만 기회를 보이면 그 사이를 틈타 다투어 들어와서 점점 물들게 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마냥 즐거워하고 취하도록 마셔서 마음이 흐트러져 그들의 술책에 빠져도 모르게 합니다. 이러한 자들은 한번 진출하면 물리칠 수가 없고 한번 들어오면 내쫓을 수가 없으므로 무슨 짓이든지 하여 일을 벌이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않게 됩니다. 그 까닭을 궁구해보면 임금이 좋아하고 숭상하는 것을 조금 소홀히 한 데서 비롯된 것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긴 해도 정직한 사람과는 부합되기가 어려우며 간사한 무리들은 친압하기가 쉽습니다. 예모가 장엄하면 보기를 꺼려하고 논의가 진지하면 귀에 거슬립니다. 한번 찡그리고 한번 웃고 한번 주고 한번 빼앗는 것을 나로 하여금 모두 마음대로 할 수 없게 하는 것과는 달리 저 소인들은 오직 나의 뜻만을 추종하면서 제대로 순종하지 못할까 염려합니다. 그러므로 경덕(經德)을 변함없이 유지하면서 큰일을 해낼 임금이 아니면 그들에게 매료되지 않을 자가 적습니다.
옛날 당(唐) 나라 태종(太宗)이 일찍이 금중(禁中)의 나무를 감상하고 있었는데, 우문사급(宇文士及)이 곁에서 찬미하여 마지않으니, 태종이 정색을 하고 이르기를, '위징(魏徵)이 항상 나에게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 하라고 권고하였지만 누가 아첨하는 사람인지 몰랐더니 오늘에서야 알았다.' 하였는데, 사급이 사과하여 아뢰기를, '남아(南衙)의 여러 신하들이 면전에서 반박하고 뜰에서 간쟁하기 때문에 폐하께서는 손 한번 제대로 들지 못하십니다. 지금 신이 다행스럽게도 곁에 있으면서 조금도 뜻을 받들어 순종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귀하신 천자
전하께서 새로 왕위에 오르셨으니 실로 많은 신하들이 바라보고 있는 때입니다. 그러니 좋아하고 숭상하는 것을 삼간다는 것을 더욱 보여주셔야만 합니다.
셋째, 나라를 다스리는 도(道)는 언로(言路) 문제가 가장 시급합니다. 언로가 열려 있으면 백성들의 실정이 위에 알려지고 임금의 혜택이 아래에 전해져서 위와 아래가 교류되어 그 뜻이 같아지게 되니 《주역》에 이른바 통한다[泰]는 것이며, 언로가 닫혀 있으면 백성들의 실정이 억눌려 펼 수가 없고 임금의 혜택이 막혀서 시행되지 않음에 따라 위와 아래가 교류되지 않으니 그 뜻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주역》에 이른바 막혔다[否]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통함과 막힘의 계기가 어찌 먼 데 있는 것이겠습니까. 역시 임금이 사람들의 말을 듣기를 좋아하는지 좋아하지 않는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옛사람의 말에, '당하(堂下)는 천리보다 멀고 군문(君門)은 만리보다 멀다.' 하였는데, 이는 백성들의 실정이 상달되기 어렵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므로 말이 너무 지나친 감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심한 경우가 있습니다. 천리 만리나 되는 먼 거리는 달이 가고 해가 가면 혹시 전해들을 수도 있겠지만 당하와 군문이 멀게 되면 죽을 때까지 전해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 않고 얻어들을 수 있었다면 예로부터 어찌 집안을 망치고 국가를 망친 임금이 있었겠습니까. 언로가 막히느냐 통하느냐 하는 문제는 그 관계되는 것이 이와 같이 중대한데 경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그렇다면 언로가 통하면 국가가 다스려져서 안정되고 언로가 막히면 국가가 혼란스러워 멸망하게 된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어떤 임금이거나 장구한 세월을 안정되게 다스리려 하지 않는 경우가 없으면서도 언로를 열어주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이겠습니까. 혹은 자신이 남의 말을 듣기를 좋아한다고 여기면서 신하들에게 진언하도록 책망하는데도 그 신하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을 항상 걱정하는 것은 무슨 이유이겠습니까. 안정되게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같지만 언로를 개통시키지 못했거나 언로를 마땅히 개통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신하로 하여금 감히 말을 하게 하지 못하는 것은 필시 병에 걸리게 된 원인이 있기 마련입니다.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임금은 이 시점에서 자신을 돌이켜보고 깊이 반성하여 깨달은 바가 있게 되면 국가를 다스리는 데에 있어서 알맞은 방법을 얻게 될 것입니다. 지금 새로운 정국을 맞이하여, 언로를 활짝 열어놓고 널리 받아들임으로써 감히 말할 수 있는 기풍을 마련해 주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면서까지 과감하게 말씀드리려 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하들이 진달하기 어려워하는 형편을 살피시고 언로가 어떻게 하면 열리고 어떻게 하면 막히는가를 생각하시며 세상일이 막히고 통하는 기미를 연구함으로써 국가의 영원한 계획을 삼도록 하소서.
넷째, 임금의 덕은 강건(剛健)을 위주로 하면서 너그러움을 갖고 행하셔야 합니다. 대체로 강건이 아니면 하늘의 운행에 발맞출 수가 없고, 너그러움이 아니면 만물을 생육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체(體)와 용(用)이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있으므로 어느 한 쪽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임금 중에 총명하고 과단성 있는 임금은 간혹 지나치게 살피는 실책을 범하기도 하고 반대로 자상한 임금은 우유부단한 실책을 범하기도 하는데, 이런 임금들은 모두 편중된 경우입니다. 앞시대를 두루 살펴보면 태평스런 날이 오래 지속된 시기에는 정령이 느슨하고 법도가 무너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임금이 이 폐단을 바로잡고자 하면서 넓은 도량을 갖고 모든 것을 포용하면서도 과단성 있게 할 줄을 모르고 단지 엄하게만 독촉하여 자질구레한 것까지 따지게 되면 거문고줄을 알맞게 조이지 않아 끊어지게 하고 마는 탄식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측근에 두고 부리는 자들은 아침저녁으로 함께 지내므로 정이 들었다고 하여 법대로 다스리려 하지 않으면서 반대로 임금의 도량은 너그럽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리하여 너그럽고 온화한 분부는 측근의 신하들에게 시행되고 억세고 과단한 분부는 외정의 신하들에게 내리게 됩니다. 가까이하다 보면 잘못
지금 전하께서는 이룩된 왕업을 지켜나가는 초기를 당하셨으니 실로 생각을 가다듬어 훌륭한 정치를 도모할 그런 때인 것입니다. 강(剛)과 유(柔)를 잘 조화시켜서 내정을 엄격하게 하고 신하들을 내 몸처럼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 마땅히 유의해야 할 사항입니다.
다섯째, 작위(爵位)는 국가의 공기(公器)이므로 아무리 임금이라고 하더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천하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공정하게 해서 마땅히 온 천하와 더불어 그것을 함께 누리고, 한 나라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공정하게 하여 마땅히 온 나라와 그것을 함께 누리도록 해야 합니다. 어찌 나에게 그 권한이 있다고 하여 자신 한 사람만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가지고 가볍게 사람을 진퇴시킬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작록(爵祿)은 사람들이 이롭게 여기는 대상입니다.
이끗이 있는 데는 사람들이 몰려들게 마련이니, 얻기 전에는 얻기 위하여 걱정하고 얻고 나면 잃을까 걱정하는 소인배들이야 오직 이익만을 추구하는데 어찌 다른 것을 따지겠습니까. 이로움이 권신(權臣)에게 있으면 권신에게 아부하고, 이로움이 종실(宗室)에게 있으면 종실에게 아부하고, 이로움이 척리(戚里)에게 있으면 척리에게 아부하고, 이로움이 환시(宦寺)에게 있으면 환시에게 아부하고, 이로움이 폐행(嬖幸)에게 있으면 폐행에게 아부하는 한편, 혹은 여알(女謁)을, 혹은 재물을, 혹은 토목 공사를, 혹은 특이한 물품을, 혹은 별난 술책을, 혹은 복을 비는 일을 가지고 틈을 노리고 있다가 기회가 오면 교묘하게 파고듭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것이면 설사 종기를 빨고 치질을 핥는 일일지라도 서슴지 않고 해냅니다.
이때 불행하게도 임금이 깨닫지 못하고 그들의 잔꾀에 빠져 잠시라도 그들의 진퇴 문제를 소홀히 하게 되면 기회를 노리는 자는 더욱 많아집니다. 그리하여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비로소 사람들이 공감하는 정서에서 나오지 않게 되고 맙니다. 사정에 의한 문이 일단 열리게 되면 다시는 막을 수 없게 되고 그리하여 좌우의 신하들은 일을 꾸며대고 권세 있는 신하들은 국정을 마음대로 하게 됩니다. 이쯤 되면 상(賞)과 형벌은 날로 문란해지고 국가의 기강은 날로 무너지고 맙니다. 따라서 천직(天職)의 자리가 비어도 걱정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원망을 해도 보살펴 주지 않게 됩니다. 충직한 말과 타당한 논의는 귀에 거슬린다 하여 기뻐하지 않으며 법도(法度) 있는 집안과 보필하는 어진 선비들은 미워하여 용납하지 않게 됩니다.
이때 임금 자신은 독단(獨斷)을 하고 있다고 여기지만 간사한 무리들에게 조종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며, 임금 자신은 영합하는 자들이 많다고 기뻐하지만 실지로는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게 됩니다.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위급한 상황에 놓이게 되면 그때는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없게 됩니다.
지난날의 교훈은 전하께서 환히 아시는 일이니, 삼가 바라건대, 다시 더 생각하시어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진출시키는 것, 퇴각시키는 것 등의 문제를 한결같이 공정하게 하여 아첨하여 진출을 꾀하는 무리들로 하여금 간사한 짓을 전혀 하지 못하게 하신다면 자연히 조정은 깨끗해지고 멀고 가까운 곳이 모두 한결같이 바르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가상하게 여기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한 통을 써서 올리도록 분부하며 이르기를,
"내가 마땅히 항상 보면서 잊지 않도록 하겠다."
하였다.
○ 사헌부가 상서하기를,
"신들이 삼가 송 나라 사마광(司馬光)이 논의한 내용을 보니, '환관이 국가의 우환이 되어온 지가 오래되었다. 궁중에 출입하면서 임금이 어릴 때부터 성장하는 동안 친근하게 지내다 보면 엄격하고 껄끄러운 분위기 속에 어쩌다 뵈러 오는 삼공(三公), 육경(六卿)과는 전혀 다르다. 그 중에 식견이 있고 영리하여 말을 잘 둘러대고 눈치를 보아가면서 비위를 잘 맞추어주는 자가 있을 경우에 명을 받으면 제대로 시행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없고 명을 내리면 어김없이 효과를 보게 된다. 그리하여 솔깃한 말과 겸손한 말로 요청을 하면 들어주
그러므로 우리 세종(世宗)께서 일찍이 하교하시기를, '환관(宦官)의 직책은 오직 등불을 밝히고 청소를 담당하는 데에 있으니 왕명을 출납하는 임무를 주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최근에 김수(金壽)가 제수하는 사이에 연줄을 따라 거짓으로 전하였다. 그 조짐을 길러주어서는 안 될 것이니 앞으로는 크고 작은 일을 따지지 말고 모두 대언(代言)이 직접 아뢰도록 하라.' 하셨는데, 물정을 환히 알고 깊고 먼 데까지 염려하셨으니 지극한 처사라고 하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새로 왕위에 오르셨으니 지금이야말로 정신을 가다듬고 훌륭한 정치를 도모할 때입니다. 그런데 크고 작은 일의 출납 문제를 환관에게 맡겨서 문이나 지켜야 할 자들에게 승지의 직임을 맡기고 계시므로 그들의 세력이 점점 커지면서 제법 국가 중대사에까지 관여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진언(進言)하고자 하는 자는 저들을 통하지 않고는 진달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어느 누가 숨기지 않고 직언하여 임금의 좌우에 있는 자들에게 원망을 사려 들겠습니까. 대체로 환관은 항상 임금 가까이서 모시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미워하는 대상이 있으면 사실무근한 말로 은근슬쩍 임금에게 전달하되 마치 무심코 말하듯이 하면서 그를 겨냥합니다. 이때 임금이 어찌 외부의 사람이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고서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옳고 그른 한계를 논의하고 득과 실의 계기를 판별하는 것은 대부분 표현되는 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간이 진언하는 것을 승지에게 말하고 승지는 그것을 환관으로 하여금 전달하게 하고 있어, 말이 세 번이나 건너가게 되니 어찌 그 말의 속뜻이 제대로 전달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폐단을 제거하지 않으면 상하의 관계는 벽이 생기고 말 것인데 이것이 어찌 작은 문제이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한결같이 세종(世宗)의 고사를 준수하시어, 대간 및 대소 신료들 중에 진언하는 자들을 직접 접견하기도 하고 승지로 하여금 친히 아뢰도록 하기도 하여 안목을 넓히시고 새로운 정사를 바로 잡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가상하게 여기고 받아들였다.
○ 상이 친히 책문(策問)을 지어 거자(擧子)들에게 이르기를,
"듣건대, 나라를 잘 다스리는 자는 훌륭한 사람을 찾아서 간언을 따르고 욕심을 줄여서 정사에 근면할 뿐이니, 잘 다스리지 못하는 자는 이와 반대라고 하였다. 나는 부덕한 몸으로 왕업을 계승하여 지키려다 보니 밤낮없이 두려운 마음이 마치 깊은 못에 임한 듯, 살얼음을 밟는 듯하다. 과실에 대한 간언을 들어서 나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고자 한다. 오직 그대들은 성학(聖學)을 공부해온 지가 오래되었으니, 만약 오늘날에 시급한 사무에 관한 사항이 있거나 내가 알지 못하는 과실이 있을 경우에 마땅히 숨기지 말고 마음을 다하여 진달하도록 하라. 비록 문사가 화려하고 체재가 광범위할지라도 뜻이 도리어 부족하면 나는 그를 도리어 배우(俳優)와 같다고 여길 것이며, 임금의 덕을 칭찬하면서 걸핏하면 요순(堯舜)에 비유하지만 행동이 뒷받침을 해주지 못하는 자를 나는 아첨하는 자로 간주할 것이니 오늘의 대책(對策)은 성실히 작성하도록 힘쓰라."
하였다.
○ 수찰(手札)로 하교하기를,
"옛사람의 말에, '현인을 찾는 데에 수고로움을 아끼지 아니하고 사람을 임명하는 데에 느긋하게 한다.' 하였는데, 진실로 현인을 얻어 임용하였다면 비록 하는 일 없이 누워 있더라도 가하지만 만약 현인은 미관말직에서 전전하고 불초한 자가 요행으로 등용되었다면 비록 나라와 가정을 망쳤다고 하더라도 가할 것이다. 이러한데도 현인을 구하는 일에 늑장을 부려서야 되겠는가. 옛날의 훌륭한 임금은 천하의 이목을 총명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대중을 따르기를 도모하여 스스로 천심에 부합되었고, 어리석은 임금은 바른 말을 꺼려하여 몸이 죽는 것을 꺼려하고 나라가 망하는 것을 꺼려하면서 스스로 총명하다고 믿고 대중에게 자문하지 않으므로 화가 소홀히 한 데서 발생하는데 후회해도 어쩔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구언(求言)하는 것을 서두르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지기(志氣)가 우뚝하여 국사(國士)의 기풍이 있는 자와 절조가 확고하여 감히 바른 말을 하는 자와 용
하였는데, 이때에 봉사(封事)를 올리는 자가 매우 많았는데, 상이 그것을 채용하였다.
○ 도승지 이계전(李季甸)이 아뢰기를,
"절의가 있는 자를 포장하는 것은 정치를 하는 데에 있어서 마땅히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고려조 500년간에 정몽주(鄭夢周)와 길재(吉再)의 충절이 탁월하였기에, 태종은 정몽주를 추시(追諡)하고 길재를 복호(復戶)한 다음 그 자식들에게 모두 벼슬을 주었으며, 세종은 또 길재에게 좌사간대부를 증직하였습니다. 명절(名節)이 있는 자를 장려하는 것은 후세를 위한 계획이니, 길재에게 작호(爵號)와 시호(諡號)를 더 내려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작호와 시호를 추가하는 것은 형식적인 의례일 뿐이다."
하고 드디어 그 자손들에게 벼슬을 주도록 명하였다.
○ 하교하기를,
"형옥(刑獄)이란 부득이하여 설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인을 구속하는 과정에서 원망을 사기가 쉬운 법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정치를 소망하던 역대 임금들은 옥사나 송사가 지체되는 것을 경계로 삼았던 것이다. 우리 조종(祖宗)께서 모두 덕을 밝히고 형벌을 신중히 처리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으셨고, 나의 황고(皇考)이신 세종(世宗)께서도 천성적으로 타고나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덕성으로 누차 형벌을 신중히 처리하라는 전교를 내리시어 중외에 고유한 것이 분명하고 간절하였으며, 또 고전(古典)을 참고하여 삼한법(三限法)을 제정하였다. 그런데 최근에는 법을 맡고 있는 관리가 이와 같이 지극한 뜻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오히려 시일을 끌면서 즉시 처결하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무지한 백성들로 하여금 일단 잡히고 나면 1년은 보통이고 심한 경우는 10년이 되도록 추위와 굶주림에 허덕이다가 병이 들어 죽게 되는 경우가 많다.
대체로 감옥살이의 고통이란 하루를 넘기기가 1년만큼이나 지루한데다 한 사람이 옥에 갇히고 나면 그 집은 생업을 폐기하게 되는데, 화기(和氣)를 손상하고 재앙(災殃)을 불러들이는 것이 이보다 심한 경우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 황고께서 이 점을 민망하게 여기시고 항상 경계하는 글을 지어서 중외에 반포하고자 하셨는데 그만 세상을 뜨셨으니, 통탄스러운 일이다. 덕이 부족한 내가 왕업을 계승하여 지키다보니 선왕의 뜻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하여 우리 백성을 상하게 하지나 않을까 하고 밤낮으로 두려워하는 마음이 마치 깊은 골짜기에 떨어진 것만 같다.
일찍이 듣건대, 한 사람이 근심이 있으면 함께 있는 사람들이 모두 즐겁지 않다고 하였다. 사방이 모두 나의 영토인데 한 사람이라도 제 살 곳을 얻지 못한다면 그 죄는 실로 나에게 있는 것이다. 대체로 너희 법을 맡고 있는 관리들은 모두 선왕의 옛 신하들인데 선왕의 뜻을 체득하지 못하여서 지금 하소연할 데 없는 백성들을 그르치려 한단 말인가. 앞으로는 맡은 바 직무에 신중을 기하여 성헌(成憲)을 따르도록 힘쓰고 추국할 일이 있거든 혹시라도 지체시키지 말라. 그리하여 옥에 갇힌 자로 하여금 억울한 일이 없게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생성(生成)의 혜택을 입게 함으로써 백성들을 잘 보살펴 주신 선왕을 계승하고자 하는 과인의 뜻을 저버리는
하였다.
1년(신미, 1451)
○ 당시에 황해도와 경기 지역에서 여기(?氣)가 치성하여 갈수록 전염됨에 따라 백성들이 많이 요절하니, 상이 스스로 제문(祭文)을 지어 이르기를,
"이치에는 순전한 양(陽)만 있을 수 없어서 음(陰)이 있는 것이며, 사물은 영원히 살 수만 없어서 죽음이 있는 것이다. 오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가는 것이 있으며 신(神)이 있으면 반드시 귀(鬼)가 있는 법이다. 진실로 사물의 본체가 되어 빠뜨리지 않는데 어찌 여기(?氣)라고 주인이 없겠는가. 정이 없는 것을 음양이라고 하고 정이 있는 것을 귀신이라고 하니, 정이 없으면 더불어 말할 수가 없고 정이 있으면 깨닫게 할 수가 있다.
나는 생각건대, 물과 불은 사람을 양육시키는 것이지만 때로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며, 귀와 신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지만 때로는 사람을 해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는 것은 물과 불이 아니라 사람이며, 사람을 해치는 것도 귀와 신이 아니라 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서(寒暑)와 우양(雨暘)과 오미(五味)의 음식은 천지가 사람을 양육하는 본능적인 수단인데 사람이 스스로 그 조화를 잃어서 병의 원인을 만들어낸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귀신의 덕이 성대하여 천지와 이치가 하나인 것을 알 수 있겠다.
그렇다면 오늘의 여기는 실로 귀신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마침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인하여 널리 전염되어 해가 쌓이도록 멈추지 않고 있으니 무고한 백성들이 병에 걸려서 마구 죽어가는데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이것이 어찌 천명을 받들어 행하는 자의 실덕(失德)으로 인하여 선한 자와 악한 자가 다같이 벌을 받는 경우가 아니겠는가. 덕이 부족한 내가 한 나라의 신과 백성의 주인이 되었으므로 항상 한 물건이라도 제 소임을 얻지 못할까 두려워하는데, 더구나 우리 백성들이 횡액에 걸려 요사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있겠는가.
이에 유사에게 명하여 여역이 나도는 곳에 깨끗한 자리를 가려서 제단을 쌓게 하고 조신을 나누어 보내서 제물을 갖추어 제사를 지내고 정녕한 분부를 내려서 너희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노니, 너희 귀신들은 선(善)으로써 선(善)을 계승하여 몹쓸 기운을 거두어 가고 생생(生生)의 본덕(本德)을 펴도록 하라."
하였다.
상은 이미 성리학(性理學)을 통달하였으므로 문장에 표현할 때면 종이에다 곧바로 쓰고 골똘히 생각한 적이 없었다. 또 조자앙(趙子昻 조맹부(趙孟?))의 서법을 좋아하여 간혹 등불 아래에서 글을 써도 그 정밀함이 신의 경지에 들었으므로 편지 조각 하나만 얻어도 사람들은 천금처럼 소중하게 여겼다. 천문(天文)을 잘 보았고 기후도 잘 맞추어 어느 때 어느 지역에서 천둥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면 뒤에 반드시 그대로 맞았다. 그러나 잡스러운 기예(技藝)에는 마음을 쓰지 않았다. 일찍이 경연관(經筵官)에게 이르기를,
"근래에 《근사록》을 보고 얻은 것이 꽤 많아서 어릴 때에 독서하던 것과는 같지 않다."
하고 또 이르기를,
"대체로 학문이란 강론을 하면 할수록 분명해진다. 오늘날 학자는 다른 점이 많으니 경들은 나를 위하여 두 가지 모두 말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일찍이 이르기를,
"남녀와 음식에 대한 욕심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절실한 것이다. 고량진미로 자제들이 대부분 몸을 망치기 때문에 내가 매번 아우들을 볼 때마다 친절하게 경계하였지만 내 말을 따르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하였다.
○ 하교하기를,
"선대의 후손을 현 왕가에서 빈례(賓禮)로 대우하는 것은 고금의 공통된 의의이다. 아조(我朝)가 혁명하던 초기에 왕씨(王氏)를 그전처럼 대우하지 않았던 것은 당시 모신(謀臣)의 소행이었지 태조(太祖)의 본뜻은 아니었
덕이 부족한 내가 외람하게 왕업을 계승하였으니, 선대의 뜻을 이어받아 그 후손들을 찾아서 옛날에 빈례로 대우했던 것처럼 그들의 작위(爵位)를 높여주고 제사도 받들도록 함으로써 국가에 빛나는 일이 되도록 하고 싶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왕씨의 후손으로 민간에 숨어 있는 자들이 오히려 조종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의구심을 갖고 나타나지 않고 있는지 염려가 되니, 중외의 관리들로 하여금 나의 마음을 분명하게 전달하게 하고 찾을 수 있는 데까지 찾아서 예우하여 보낸 다음, 왕씨의 제사를 영원히 이어가게 함으로써 우리 열성조의 거룩한 뜻을 이룰 수 있게 한다면 어찌 위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에 고려 현종(顯宗)의 먼 후손을 공주(公州)에서 찾아 순례(循禮)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고려 역대 사우를 숭의전(崇義殿)이라고 이름을 하고 순례를 부사(副使)로 삼아 제사를 받들게 하였으며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였다. 마전현(麻田縣)을 군(郡)으로 승격하고 교관을 두어 왕씨의 자제들을 가르치게 하였으며, 고려의 이름난 신하 중에 백성들에게 공로가 있는 자를 가려서 사당에 배향하게 하였다.
○ 상이 승정원에 명하기를,
"임영(臨瀛)이 병이 나서 내가 몹시 걱정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 나았다고 하니 정말 기쁘다. 이구(李?)는 평소에 생활 수단을 세우지 않았는데 지금 병으로 인하여 다른 집에서 살고 있으니, 그에게 면포(綿布) 300필을 하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은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영응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을 세종이 사랑했다는 이유로 한층 더 돌보아주면서 사계절의 의복을 상의원으로 하여금 지어서 주도록 하였고 남달리 은총을 베풀었다. 세종이 일찍이 내탕고(內帑庫)의 진귀한 보물을 모두 이염에게 주려고 했었는데 시행하지 못하고 세상을 뜨자, 상이 즉위하여 내탕고의 보물을 모두 그의 집으로 실어보냈다. 그리하여 어부(御府)에 선대로부터 전해오는 진귀한 보물이 모두 이염에게 돌아갔다. 광평군(廣平君) 이여(李璵)가 일찍 죽은 것을 애석하게 여겨 그의 아들을 데려다가 궁중에서 양육하면서 의복(衣服)과 예질(禮秩)을 왕자와 같이 하였고 한층 더 보살펴 주었다. -이하 원문 빠짐-
9권 단종조
단종 공의온문 순정안장 경순돈효 대왕(端宗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郭孝大王)
휘는 홍위(弘暐)이다. 정통(正統) 신유년(세종 23, 1441) 7월 23일(정사)에 동궁의 자선당(資善堂)에서 탄강하였으며, 3년 동안 왕위에 있었고, 상왕위에는 2년 동안 있었다. 정축년(세조 3, 1457) 10월 24일에 승하하였다. 향년은 17세이다. 장릉(莊陵) -영월(寧越)에 있다.- 에 장사지냈다.
즉위년(임신, 1452)
○ 문종대왕 2년 임신년 5월 병오(14일)에 문종대왕이 경복궁 천추전(千秋殿)에서 승하하니, 상이 근정문(勤政門)에서 즉위하고 중외에 교서를 반포하였다.
○ 상(上)은 문종의 원자(元子)로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가 낳았다. 세종 무진년에 왕세손으로 책봉되
○ 6월. 사헌부가 아뢰기를,
"금년에 든 흉년이 병진년보다 심합니다. 여러 도에 조신(朝臣)을 파견하여 편의에 따라 창고를 열어 구제해 주고 올 가을에 도로 거두어 들여 의창(義倉)을 충당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경연관에게 명하여 《가례(家禮)》 상제편(喪制篇)을 진강하게 하였다.
○ 7월, 비가 흡족하게 내리지 않은 것 때문에 도랑을 수리하고, 원옥(?獄)을 심리하고, 궁핍한 자를 보살펴주고, 백골(白骨)을 묻어주게 하였다. 이는 의정부의 말을 따른 것이다.
○ 평안도에 가뭄이 크게 들었다. 향축(香祝)을 내려주면서 관찰사와 수령에게 명하여 악독(嶽瀆)과 산천(山川)에 기우제를 지내게 하였는데, 이는 예조의 계사를 따른 것이다.
○ 9월, 문종대왕을 현릉(顯陵)에 장사지냈다.
○ 좌찬성 정분(鄭?)이 해서(海西) 지역에 흉년이 들었다는 이유로 극성(棘城)의 부역과 인정(人丁)을 감해주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올 가을에 사행(使行)이 서로에 줄을 잇게 되어 접대가 만만찮으니 그 역사를 정지하도록 하고, 충청도 지방의 백성들도 능역(陵役)으로 고초를 겪고 있으니, 서산(瑞山)에 성 쌓는 문제를 모두 중지하라."
하였다.
○ 횡성현(橫城縣)의 강무장(講武場)을 혁파한 것은, 짐승들이 곡식을 망치기 때문이었다.
○ 10월. 박팽년을 발탁하여 부제학으로 삼았다. 상이, 박팽년의 학문이 정밀하고 심오하여 매번 경연에서 진강을 할 때에 발명한 부분이 많았다는 이유로 특별히 통정(通政)의 품계를 가자하고, 이어서 이 명을 내린 것이다.
○ 중추원사 박연(朴堧)에게 자헌(資憲)의 품계를 가자하였다. 박연은 음률(音律)에 정통하여 세종의 인정을 받아 종률(鐘律)을 제작하였다. 한 시대의 음악을 분명히 보고 알 수 있게 한 것은 다 그의 노력 덕분이었기에, 이때에 와서 특명으로 품계를 더해준 것이다.
○ 김반(金泮)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성균 생원 곽기(郭琦) 등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전 대사성 김반은 유생의 스승이 되어 20여 년 동안 교육에 전념하였습니다. 지금 비록 늙기는 하였으나 다시 함장(函丈)의 자리에 있게 하여 선비들의 소망을 들어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다시 명하여 문묘조(文廟朝) 윤상(尹祥)의 예에 의거하여 쌀 20곡(斛)을 하사하게 하였다. 당시에 김반이 가난해서 끼니를 이어가지 못하자, 문인(門人) 신숙주(申叔舟)와 이석형(李石亨) 등이 항상 양식과 술을 보내 드렸다.
○ 전조의 사절신(死節臣)인 정몽주(鄭夢周)를 왕씨(王氏)의 사당에 배식(配食)하였다.
1년(계유, 1453)
○ 4월. 경회루에서 유생을 직접 시험보였다. 사서(四書)는 추첨으로 하고, 오경(五經)은 자원에 따라 각각 한 책씩을 강하게 하되, 약(略)과 통(通) 이상을 맞은 자는 책시(策試)에 응시하게 하였다.
○ 형조에 하교하기를,
"지금은 농사철인데 비가 충분히 내리지 않고 있으니, 옥사를 지체하여 화기를 손상시키고 재앙을 불러들인 것이 아닌가 염려된다. 유배에 해당하는 죄 이하의 죄수 및 중죄인의 증인에 연루된 자들을 아울러 모두 보방(保放)하도록 하고, 또 파발을 보내 제도(諸道)에 이문(移文)하게 하라."
○ 유구국(琉球國)의 왕이 사신을 보내와 토산물을 진헌하였다.
○ 온성(穩城)과 함흥(咸興)의 두 고을에 성을 쌓고, 나난(羅暖)과 무산(茂山) 두 곳에 보(堡)를 설치하였다.
○ 좌의정 김종서에게 궤장(?杖)을 하사하였다.
○악학제조(樂學提調) 박연(朴堧)이 《세종어제악보(世宗御製樂譜)》를 인쇄 반포하여 널리 전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가하다고 하였다.
○ 상이 경연에 거둥하였다. 지사(知事) 허후(許?)가 상주하기를,
"옛날 주공(周公)이 백금(伯禽)에게 이르기를, '대신으로 하여금 써주지 않는 것 때문에 원망하는 일이 없게 하라.' 하였는데, 이는 아마 연소하여 대신의 말을 듣지 않을까 염려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 대신의 말이 비록 성상의 마음에 부합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삼대신(三大臣)과 가부를 논의한 다음에 결정하소서."
하니, 상이 가상하게 여기고 받아들였다.
○ 7월. 상이 주강(晝講)에 임어하여 《논어》를 강하였다. "한마디 말이 나라를 흥기시키고 한마디 말이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대문에 이르자, 상이 묻기를,
"한마디 말로 어떻게 국가를 흥기시키거나 망하게 하는 지경에 이를 수 있는가?"
하니, 강관 박팽년이 대답하기를,
"한마디 말이 비록 갑자기 흥기시키거나 망하게 하지는 않지만, 흥기시키는 계기와 망하게 하는 계기는 실지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마디 말로 나라를 흥기시키는 것은 그 효과가 더디지만, 한마디 말로 나라를 망치는 것은 그 효과가 빠릅니다. 예로부터 임금이 바른말 듣기를 좋아하면, 과실이 있을 경우 반드시 고치고 언동과 정사도 모두 사리에 부합되게 할 수 있어서 국가를 흥기시키는 데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말한 대로 따르고 조금도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한다면 아첨하는 자들이 날로 진출합니다. 그렇게 되면 정사의 잘못된 점과 인재 등용의 실책에 대해 알 길이 없게 되고 결국 나라를 망치는 데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에서 국가가 흥하고 망하는 갈림길이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훌륭하다고 하였다.
○ 삼도 체찰사가 아뢰기를,
"강진현(康津縣) 계참곶(界站串), 동래현(東萊縣) 석을포(石乙浦), 남해현(南海縣) 금산곶(錦山串)은 모두 둘레가 90리나 되는데, 토지가 비옥하고 풀이 무성하여 말을 기르기에 마땅합니다. 목장을 개설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따랐다.
○ 상이, 대신 황보인과 김종서와 정분 등을 불러 묻기를,
"누가 대사헌에 적합한가?"
하니, 김종서 등이 대답하기를,
"사려가 깊고 소란스럽지 않은 자를 등용해야 하니, 박중림(朴仲林)이 적합합니다."
하였다. 상이 그렇다고 하고, 박중림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박중림은 박팽년의 아비이다.
○ 집현전 직제학 원호(元昊)가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 10월. 정난공신(靖難功臣)을 책훈하였다. 당시에 권람(權擥)과 한명회(韓明澮) 등이,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과 한편이 되어 종묘 사직을 위태롭게 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말하면서, 수양대군(首陽大君) - 세조대왕 - 에게 아뢰어 이들을 제거하도록 입고(入告)하게 하였다. 이때 이용, 황보인, 김종서 및 우의정 정분(鄭?), 병조 판서 조극관(趙克寬), 이조 판서 민신(閔伸), 우찬성 이양(李穰) 등이 모두 죽었다. 드디어 책훈(策勳)을 명하였는데, 그 글의 대략에,
"숙부는 주공과 같은 훌륭한 재주를 가진데다 또 주공이 세운 큰 공을 세웠고, 과인은 성왕(成王)처럼 나이가 어린데다 또 성왕 때처럼 많은 어려움을 당하였소. 과인이, 성왕이 주공에게 책임지웠던 것으로 숙부에게 책임지우는 바이니, 숙부도 주공이 성왕을 보좌했던 것처럼 과인을 보좌하기 바라오."
○ 좌참찬 허후(許?)를 찬출하였다. 허후는 고 영의정 허조(許稠)의 아들이다. 정난공신(靖難功臣)의 잔치에서, 허후가 홀로 소찬(素饌)을 먹으면서 말하기를, "조정의 원로(元老)가 다 죽었다. 나는 살아 있는 것만 해도 족한데 차마 고기를 먹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에 사람들의 논핵을 받고 찬출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 하위지(河緯地)를 좌사간으로, 성삼문(成三問)을 우사간으로, 이개(李塏)를 집의로, 유응부(兪應孚)를 평안도 도절제사로 삼았다.
○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李澄玉)이 군사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종성 절제사(鐘城節制使) 정종(鄭種)과 판관 정포(鄭圃)가 이징옥을 참소하여 올리니, 나머지 무리들은 문죄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 11월. 상이 경연에 거둥하였다. 검토관 양성지(梁誠之)가 주달하기를,
"평안도 장성(長城)의 역사를 비록 파하기는 하였지만 여연(閭延)촹무창(茂昌)촹우예(虞芮) 등의 군(郡)이 강변에 닿아 있기 때문에 남도의 군사들이 큰 재를 넘어와서 수역(戍役)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인마(人馬)가 모두 고역을 견디지 못하여 대부분 전토와 재산을 팔고 요동과 심양 등지로 도망해 간다고 합니다. 지금 이 세 고을을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큰 강이 한계로 되어 있으므로 국토는 여전히 그대로 있게 됩니다. 세 고을의 수군(戍軍)을 철수하여 자성(慈城)을 경계로 함으로써 백성들을 쉬게 하여 국가의 기반을 견고하게 하소서."
하였다. 상이 운성부원군(雲城府院君) 박종우(朴從愚)를 파견하여 형편 여부를 살피게 하였는데, 박종우 역시 양성지의 말과 같았다. 드디어 세 읍을 철수하라고 명하였다.
○ 전 집의 하위지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요즘에 발생한 변고는 역사에도 보기 드문 일입니다. 유언을 받들어 보좌하는 자나 숙부와 같은 의친(懿親)이라 하더라도 모두 국가와 고락을 함께해야 할 것인데 이런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지나간 일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인데 논의해 본들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천하의 걱정거리로는 사람이 알면서도 기탄없이 말해주지 않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알고 있는 자로 하여금 모두 말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주고 나서 그것을 임금이 직접 처리하신다면 사전에 미리 방지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어찌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새로운 정치를 시작하는 초기에 여러모로 계획을 잘 세워서 조금도 머뭇거리거나 구차하게 하는 일이 없이 하되, 안 될 것이 없다고 하거나 해로울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마소서. 또 지나치게 느슨하여 기회를 잃거나 너무 서둘러서 대체를 손상하거나, 너무 지나치게 관대하여 조정의 기강을 잃거나, 지나치게 엄격하여 국맥을 손상되게 하거나, 지난날의 공로에 빠져서 후회를 남기거나 주세(主勢)가 구속을 받아서 기를 펴지 못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항상 미리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는 경계를 거듭 생각하시어 국력을 더욱 강화하고 궁실을 더욱 엄격하게 하며 권문 세가(權門勢家)를 더욱 막고 편당을 결성하는 조짐을 더욱 근절시키소서. 실시하는 모든 일을 사람들의 마음에도 부합하고 법에도 부합하게 하여 장구한 세월이 흘러도 폐단이 발생하지 않게 함으로써 거리나 시골에서 논의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강호(江湖)에서 병들어 있는 신은 저 멀리 성상을 우러러볼 뿐, 단 한 가지 계획이라도 세워서 정치에 도움을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지 밤낮으로 흐느껴 울면서 천지의 귀신을 불러 잠자코 기도하기를, '원하건대, 오늘날 정사를 도울 책임을 갖고 있는 자가 보전할 도리를 다하여, 성상의 체후로 하여금 날마다 강녕하게 하고 성상의 학문으로 하여금 날마다 발전하게 하여 하루속히 정무에 익숙해져서 우리나라의 수많은 백성들이 밤낮으로 우러러 기대하고 있는 소망에 부응할 수 있게 하소서. 안으로는 궁중에서부터 밖으로는 사방의 국경에 이르기까지 다 타당하게 여기면서 조금도 동요하는 일이 없게 하고, 태조촹태종촹세종촹문종이 전해오는 대통을 영원히 반석처럼 안정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도 총명을 개발하여 당론을 받아들이고 뜻있는 선비들의 기백을 살려서 싹트지 않은 욕심을 엄격히 막도록 하소서. 한 마음을 밝혀서 간악함을 들추어 내고 한 마음을 바르게 하여 간사함을 제어하소서. 정직한
하였다 상이 정원에 명하여, 하위지에게 글을 보내서 병이 낫거든 올라오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 경상도 관찰사에게 하유하기를,
"상호군 하위지가 지금 선산(善山)에서 병이 났다고 하니, 경은 의원에게 약을 가지고 가서 구완토록 하고, 또 수시로 주육(酒肉)을 보내서 몸조리를 잘하게 하라."
하였다.
○ 12월. 앞으로는 재계하는 날에 조계(朝啓)와 조참(朝參)을 중지하도록 하였다.
○ 호조에 명하여, 공신에게 전지를 하사하되 부족한 경우에는 군자전(軍資田)을 지급하게 하였다.
2년(갑술, 1454)
○ 1월. 대사헌 권준(權?)이 상소하기를,
"전 예문 제학 윤상(尹祥)은 전하께서 입학하였을 당시에 박사(博士)였으니, 전하께서 집지를 하고서 스승의 예로 대우하던 사람입니다. 전에 늙었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물러갔으니, 특별히 은수를 더하고 관질(官秩)를 주도록 하소서. 윤상은 기력이 오히려 강건하고 총명이 그다지 감소하지 않았으니, 소재지의 관원으로 하여금 돈유(敦諭)하여 올려 보내게 한 다음, 다시 국학(國學)에 초치하여 유생을 교육하게 해서, 성조(聖朝)가 사유(師儒)를 소중하게 여기는 아름다운 뜻을 빛내도록 하소서."
하였다. 상소문을 정부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는데, 너무 늙어서 오게 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백지화시켰다. 윤상은 예천(醴泉) 사람이다. 문종(文宗) 초기에 벼슬에서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소재지의 관원으로 하여금 매월 음식물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은퇴한 재상에게 음식물을 제공하는 관습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 집현전에 숙직한 양성지(梁誠之)가 황극치평도(皇極治平圖)를 작성하여 올리면서 아뢰기를,
"신이, 훌륭한 정치의 향방과, 옛 성현이 훈계한 말과, 경전과 역사에 나타난 흥망의 자취와, 조종이 실시했던 국가 운영 방법을 두루 고찰한 다음, 황극(皇極)의 방위에 따라 치평소도(治平小圖)를 작성하여 올립니다. 그 대체적인 강령은 19개이고, 구체적인 조목은 91개입니다. 자리 곁에다 걸어두고 조석으로 부담없이 보시도록 하소서."
하였다.
○ 관찰사의 요청에 따라 함길도에다 《화제방(和劑方)》, 《증급유방(拯急遺方)》,《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 3월. 《세종실록(世宗實錄)》이 완성되었다.
○ 전 대사성 김반(金泮)이 상소하기를,
"우리나라는 해외(海外)에 치우쳐 있어서 중국의 책을 접할 기회가 드뭅니다. 선사(先師)인 권근(權近)이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을 저술하여 성경(聖經)을 연구하는 데에 많은 보조를 하였습니다. 태종 당시에 신이 명을 받고 이것을 베껴서 올렸더니, 즉시 주자소(鑄字所)에 명하여 인출해서 반포하도록 한 바 있습니다. 권근이 또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저술하여 성리학의 연원을 제시한 바 있어서, 신 김반은 이에 《성리대전(性理大全)》,《이학제강(理學提綱)》,《역상도설(易象圖說)》,《사서장도(四書章圖)》의 말을 채록하여 보설(補說)로 만들어 올립니다. 신의 보설이 비록 보잘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학자가 자신을 수련하고 남을 다스리기 위한 방법으로 쓴다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간행하여 경연에서 진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4월, 현덕왕후(顯德王后)에게 인효순혜(仁孝順惠)라는 존호(尊號)를 올렸다.
○ 《역대병요(歷代兵要)》가 완성되었다. 처음에 세종이 정인지(鄭麟趾), 유효통(兪孝通), 이석형(李石亨) 등에게 명하여 황제(黃帝)로부터 우리나라에 이르기까지 역대로 전공을 세운 사적을 수집하고 거기에다가 선유(先儒)의 논평을 덧붙이게 하였다. 수양대군이 그 일을 총괄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책이 완성되었다. 상이 무거(武擧)에 《병요(兵要)》도 함께 시험하게 하였다.
○ 경기(京畿), 관동(關東) 및 삼남(三南) 지역에 기근이 들었다. 군자창(軍資倉)의 묵은 23만 곡(斛)을 내어 구제하도록 명하였다.
○ 5월. 각사(各司)에도 얼음을 보관하도록 하였다. 이때 헌부가 아뢰기를,
"옛날에 대부(大夫) 이상의 가정에서는 얼음을 보관하지 않은 집이 없었습니다. 지금 국가의 빙고(氷庫)에 내장할 양은 한계가 있어서 나누어 주기에 충분치가 못합니다. 그러다보니 특히 초상이나 제사에서 얼음을 사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치성하는 양기(陽氣)를 조절할 수 없어서 기후 변화를 가져오게 할 우려가 있습니다. 앞으로는 고례(古例)에 따라 대부 이상 및 각사에 얼음을 보관할 만한 곳이 있으면 금지하지 말게 하소서."
하여 따른 것이다.
○ 7월. 문종대왕과 현덕왕후를 종묘(宗廟)에 부묘(?廟)하였다.
○ 고인이 된 공신(功臣)의 처로 나이가 많은 이에게, 치사(致仕)한 당상관(堂上官)의 규례에 따라 매월 술과 고기를 지급하게 하였다.
○ 전라도에서 공물(貢物)로 바치는 동백유(冬柏油)를 견감하라고 명하였다.
○ 경상도 관찰사 이숭지(李崇之)가 비파(琵琶)를 진상하였다. 좌승지 박팽년이 아뢰기를,
"방물(方物) 외에 사적인 물건을 진상할 수 없는 것은 예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전하는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셨습니다. 이숭지가 감히 놀이하는 물건을 진상하였으니, 이것이 비록 하찮은 일이기는 하지만 전하의 덕에 누가 될까 염려됩니다. 퇴각시키소서."
하니, 상이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이고 앞으로는 제도에서 놀이하는 물건을 진상하지 말게 하였다.
○ 8월. 제도(諸道) 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몸을 실천하는 자는 효도와 우애, 절개와 의리를 소중하게 여기며, 벼슬살이를 하는 자는 깨끗하고 솔직한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법이다. 우리나라는 조종조 때부터 교화가 잘 이루어져서 풍속이 후하였으므로, 관리들도 직책에 맞았으니 찾아서 채용하기만 했다면 적합한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다만 위에 있는 관리가 구분하여 따로 대우하지 않았을 뿐이다.
경들은 이미 한 지방을 통치하는 권한을 전담하고 있으니, 효자(孝子), 순손(順孫), 의부(義夫), 절부(節婦) 중에 특이한 자와, 수령 중에 공정하고 정직하여 현저한 공적이 있는 자를 모두 기록해서 아뢰도록 하라. 내가 그들을 채용하여 장려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 양사가 안평대군 이용의 잔당을 제거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은 간당(奸黨)이 근절되었다. 그전 일에 대해 다시 말하는 자가 있을 경우 나는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중외에 효유하여, 나이가 16세 미만자이거나 시집가지 않은 누이는 연좌시키지 말게 하였다.
○ 상이 서교(西郊)에서 농작물을 살펴보았다.
○ 처음에 우리나라의 서적 중에 《송사(宋史)》가 빠져 있었다. 세종이 매번 연경에 가는 자에게 사오도록 하였으나 구해오지 못하였었는데, 이때에 황조(皇朝)가 칙명으로 《송사》를 하사하였다. 상이 문소전(文昭殿)에 고하고 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 보루각(報漏閣)을 중수한 것은 세종(世宗)의 유지(遺志)를 따른 것이다.
○ 9월. 호조가 청하기를,
"각 읍의 도회관(都會官)으로 하여금 잠종(蠶種)을 가져다가 여러 읍에 나누어 주어서 누에를 기르도록 하고
하니, 따랐다.
○ 함길도 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종성(鐘城)과 회령(會寧) 등지의 여러 읍에 사는 야인(野人)들이 가뭄으로 인하여 농사를 실패하였다고 한다. 만약 식량을 요청하는 자가 있거든 쌀과 콩을 내려 주어서 마음을 다하여 보살펴 주고, 그 추장의 자제 중에 만약 재주도 있고 품행도 단정하여 숙위(宿衛)로 삼을 만한 자가 있거든 그들의 자원에 따라 보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 《고려전사(高麗全史)》를 간행하여 중외에 널리 반포하게 하였다.
○ 성지(聖旨)를 거역한 간관(諫官)이 있어서 상이 죄를 주려 하다가 바로 하교하기를,
"지금 간관에게 죄를 주는 것은 아무래도 언로(言路)를 막는 처사인 듯하다. 언관을 우대했다는 조종조의 고사(故事)도 있으니, 그를 사면하도록 하라."
하였다.
○ 11월. 상이 문묘(文廟)에 작헌례(酌獻禮)를 올리고, 친히 족식 족병(足食足兵)의 도리를 가지고 선비들을 책문(策問)하였다.
○ 상이 자미당(紫薇堂)에 임어하여 창문 난간을 바라보고 한숨지으며 이르기를,
"여기는 세종께서 계시던 곳이다. 만약 세종이 살아계셨다면 내가 받은 사랑인들 어찌 적었겠는가."
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니, 좌우의 신하들이 다 감격하여 울었다.
○ 문무백관의 단령(團領)에 흉배(胸背)를 쓰는 제도를 황조(皇朝)의 의장(儀章)에 따라 품계에 비추어 달도록 하고, 종재(宗宰) 72인에게 비단을 각각 한 필씩 하사하게 하였다.
○ 제도 관찰사에게 하교하기를,
"창고에 곡식이 가득해야 병력이 강해지고 병력이 강해져야 국가가 태평해진다. 태평해지면 국가가 안정을 되찾게 되고 안정을 되찾고 나면 백성들이 예의(禮義)에 흥기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국가에 있어서 가장 큰 정책인 것이다.
지금 묵은 폐단을 경신하고 한결같이 조종이 이루어 놓은 법을 준수하여 만세토록 영원한 이익을 도모하고자 한다. 선왕이 둔전(屯田)에 뜻을 두었지만 결국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내가 둔전을 널리 두어서 예기치 않은 사고에 대비하려 한다. 여러 읍(邑)이나 진(鎭)이나 포구(浦口) 등지에 필시 묵혀둔 비옥한 토지가 있을 것이다. 만약 수령이 근검절약하여 둔전에 심혈을 기울인다면 오래 지난 다음 효과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이해 관계에 대하여 분명히 알 수가 없다. 경이 현재 계획을 어떻게 세워 놓았는지 듣고 싶으니, 경은 잘 알아보고 따져본 다음 보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3년(을해, 1455)
○ 5월. 별도로 진헌하는 것을 중지하라고 제도(諸道)에 명하였다.
○ 윤6월. 을묘(11일)에 상이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선위(禪位)하였다.
○ 7월. 상을 높여 태상왕(太上王)으로 삼고, 공의온문(恭懿溫文)이란 존호를 올렸다. 왕비 송씨(宋氏)를 높여 왕대비로 삼고 의덕(懿德)이라는 존호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