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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누가 높으냐?
(마태복음 20:17-28)
서 론 :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기 스승의 심정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장차 받으실 고난을 생각하시며 마음으로 고민하시고 계셨는데 반면에 재자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 영광을 안겨 주는 길 인줄 알고 그곳에 가면 누가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이냐는 문제를 가지고 마음으로 시기하며 다투기까지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답답하기 그지없는 제자들에게 자기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할 것임을 거듭 거듭 세 번씩이나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이와 같은 고난의 예언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 아들을 위해 구한 세배대의 아들의 어미
제자들은 19:20절에서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잘못 들었음이 분명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쫓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 하신 말씀에 대하여 그들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현세에서 이루어 질 메시야 왕국으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남다른 주님의 사랑을 받아온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들은 형제지간으로 주님을 가까이 모셔온 제자들입니다. 어느 날 그들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찾아와 절을 하며 두 아들을 위하여 무엇인가 구했습니다. 그의 구함은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하는 요구였습니다. 이것은 메시야 왕국에서 왕 다음가는 자리를 자기의 아들들에게 달라고 하는 간청입니다. 예수님은 답답한 심정으로 이 여인에게 “너희가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할 때 우리는 잘못된 것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무엇을 구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알아야 합니다.
2. 하늘의 상급은 아버지께서 예비하신 자들이 받는다.
(1) 주님은 그들에게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잔이란 말은 ‘포테리온’으로 주님이 젊어지실 십자가의 고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신다고 하신 말은 십자가를 지는 일로써 이것은 순교를 뜻합니다. 예수님의 좌 우편에 앉는 영광은 그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은 “내 좌 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3:21)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이기는 자) 반드시 하늘의 상급이 있습니다. 이 상급은 영광스러운 상급입니다. 그러나 그 상급의 배정은 아버지께서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만 충성하는 일입니다.
3. 섬기는 자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 대하여 심히 분히 여겼습니다. 그들이 분히 여겼다는 말은 그들도 역시 야고보나 요한과 같은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에서 높아지는 비결을 가르치실 필요성을 느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람이 높아지는 일이 세상의 권세자나 명예를 소유한 사람들의 기준에서 생각하고 있었음으로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1)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나라에서 크게 되는 방법과 하나님 나라에서 크게 되는 방법은 정 반대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를 낮추고 형제를 섬기는 자가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가 되는 상급을 받게 됩니다.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라는 말씀은 가난한 형제를 도와주는 생활을 말합니다(요일3:17). 그리고 형제들을 사랑으로 돌보아 주고 형제가 당하는 일을 내가 당하는 일처럼 여기는 생활을 말합니다.
(2)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종이 되는 생활은 나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높이는 일입니다. 자기에 게 맡겨진 모든 일을 오직 종의 입장에서 충실히 감당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결 론 :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으뜸이 되고 높이 되는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고는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드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려 하심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위대한 섬기심의 본보기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신 일입니다. 대속물이란 말은 ‘루트론’으로 속전 또는 석방 금이란 말로 인류의 죄 값을 지불하시는 지불금을 의미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 모든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그의 피로써 속전을 갚으실 분, 곧 섬기실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생활, 서로가 서로의 종이 되는 생활올 해야 합니다(요 13:16).
(161)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마태복음 20:29-34)
서 론 : 유월절이 가까워지자 유대인의 많은 무리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여리고에서 떠나실 때에는 큰 무리가 예수를 쫓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시는 길목에 두 명의 소경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사람의 행렬 틈에서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귀가 번쩍했습니다. 이때 이들은 지체치 않고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면서 외쳐댔습니다. 그들의 간구는 드디어 예수님의 발걸음을 머물러 서게 하고 예수님으로부터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는 물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주여 우리 눈뜨기를 원하나이다”고 말했습니다.
1. 길가에 앉아 있었던 두 소경
우리는 여기서 길가에 앉아 있었던 두 소경이 어떤 경로로 예수님을 만났으며 그들이 받은 이 놀라운 축복은 어떻게 그들에게 주어졌는가에 대하여 몇 가지로 알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이들은 이미 예수의 소문을 듣고 있었던 소경들입니다. 예수의 소문은 온 유대 땅에 퍼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문은 두 가지로 퍼져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는 무리들을 미혹하는 자요 율법을 무시하는 자로 하나님께로서 온 사람이 아니라 마땅히 정죄를 받아야 할 자라고하는 견해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견해는 예수를 가리켜 선지자 중 하나다, 다윗의 자손이다, 그리스도다 하는 견해입니다. 이들 두 소경은 예수의 바른 소문을 듣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입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른 것이 이 사실을 말해 줍니다. 예수에 대한 바른 소문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온 한 여자도 이 예수의 바른 소문을 듣고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만나 병고침을 받았습니다(마5:25-29).
(2)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기를 소원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즉시 그를 향하여 소리를 지른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눈 먼 소경들이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 나설 입장이 못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을 만날 수 있기를 마음으로 간절히 소원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사모하여 만나기를 원하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시19:10)고 하셨습니다.
(3) 이 두 소경은 기회를 잘 포착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주님을 만날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사람들이 이 시기를 잘 포착하여 자기 생애에 적용시키면 놀라운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관심 없이 그냥 지나쳐 버린다면 일생에 다시없는 후회가 될 수 있습니다.
2. 두 소경의 간구한 태도
길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들 두 소경들이 예수님 앞에서 행한 일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는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메시야에 대한 구약적인 신앙 고백입니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자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들이 기다렸던 메시야임이 틀림없었지만 그러나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영광의 메시야로 왕위에 당장에 앉으실 분이 아니시라 그런 일이 있기 전에 먼저 고난의 십자가를 지셔야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에게 다윗의 자손이란 이름을 붙여서 메시야로 받아 드리는 일은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실인 즉 베드로의 신앙고백도 메시야에 대한 고백이었으며 그들이 십자가를 지시는 고난의 주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는 부활의 주님을 고백한 것은 아닙니다. (2)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을 원했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한 그들의 간구는 주님만 불쌍히 여겨 주시면 자기들의 눈은 능히 뜰 수 있다고 하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103:13)라고 하셨습니다.
(3) 그들의 간구는 응답 받을 때까지 계속된 기도였습니다. 이들에게는 많은 무리들이 그 앞에 가로 놓여 있었습니다. 무리들은 이 소경들이 소리지르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잠잠하라고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더욱 소리 질렀다고 했습니다. 기도에는 방해물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낙심하지 말고 기도할 것에 대하여 불의한 재판관의 경우를 비유로 교훈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눅18:1-8).
결 론 : 이처럼 간구하는 소경들의 간절한 간구에 예수님의 발이 머무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주여 우리 눈뜨기를 원하나이다”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간구하는 목적이 분명한 기도를 원하십니다.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때 중언부언하는 대답을 한다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소경들처럼 “주여 우리 눈뜨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자기의 가장 간절하고 응답 받아야 할 소원을 아뢰어야 하는 것입니다.
(162) 주님이 쓰시는 그릇
(마태복음 21:1-11)
서 론 : 주님께는 쓰시는 그릇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름 없는 나귀로 그의 하시는 일에 그릇으로 쓰셨습니다. 발람의 나귀도 그의 주인이 하나님의 명을 거스려 어그러진 길로 갈 때 그의 당나귀를 통하여 책망케 하심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그릇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나귀 새끼를 타셔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스가랴서에 예언되었기 때문입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슥9:9)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예수님이 지상에서 하시는 모든 일은 오직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께서 그에 게 하라고 하신 모든 일을 이루시는 일이었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잡으려고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왔을 때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마26:55, 56)고 하셨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일은 스가랴의 예언처럼 왕으로 입성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선지자의 예언처럼 나귀를 타고 입성하셔야만 했습니다.
(1) 예수님은 분명히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이 같은 일은 그의 태어나심에서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에 의하여 증명되었습니다(마2:1-3).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도 스스로 인정하셨습니다. 빌라도 총독이 주님께 묻기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했을 때 주님은 빌라도에게 “네 말이 옳도다”(마27:11)고 대답하셨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그들의 메시야로 이 메시야는 그들이 맞이해야 할 그들의 왕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유월절을 앞두고 가장 겸손한 왕으로서의 그의 사명을 이루시기 위하여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셔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같은 예수님의 왕으로서의 위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만 스가랴서에 기록된 대로 그들의 메시야로서의 왕으로 영접하려고 시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그들의 의도도 그가 잡히시어 재판을 받게 되자 그들은 그에게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안 후에는 오히려 예수님을 정죄하는 편에 가세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자리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장차 예루살렘성에서 통치하시는 왕이 되실 것입니다. 장차 이 땅위에 세워질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예수님은 친히 왕이 되시며 그는 예루살렘성에서 그의 백성들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계19:6,7). 여기서 전능하신 이의 통치는 예수님의 천년 왕국에서의 다스리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주가 쓰시겠다 하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뱃바게에 이르렀습니다. 주님은 그의 두 제자를 맞은편 마을로 보내시면서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면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일은 선지자 스가랴의 예언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자기가 예언에 의하여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나귀 새끼를 타셔야 할 일을 아셨고 자기가 탈 나귀가 이미 준비되어 있음을 아셨으며 그 주인이 주께서 쓰시겠다고 말씀하시면 즉시 보내실 것도 아셨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에 의하여 끌려 온 이 나귀 새끼는 주님이 쓰시는 그릇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쓰시는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쓰시는 그릇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선한 목적에 사용하시는 그릇이며 다른 한 가지는 진노의 그릇으로 쓰시는 경우입니다. 선한 목적이란 하나님의 구원을 말하는데 이 그릇은 선한 일에 마련된 아름다운 그릇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깨끗하게 단장한 그릇을 선한 일에 쓰십니다(딤후2:20-21). 그리고 주님은 항상 그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을 쓰십니다. 주님께 가까이 있다는 말은 주님이 하시는 계획에 합당한 사람을 말합니다. 이사야 선지는 하나님이 “내가 누구를 보낼꼬” 하실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즉시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주님께 인정을 받는 사람을 당신의 그릇으로 쓰십니다. 인정의 표준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순종이 없는 사람을 절대로 쓰지 아니하십니다.
결 론 :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은 많은 무리들의 환영을 받으시며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셨습니다. 무리의 대부분은 호산나를 부르며 그를 환영했습니다. ‘호산나’란 지금 구원하소서, 원컨대 구원하소서란 뜻이며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친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인줄로 알고 그를 높인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호소대로 “호산나”로 입성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들이 바라는 호산나는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는 지금 고난의 메시야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163) 내 아버지의 집
(마태복음 21:12-13)
서 론 : 성경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 안에 들어가셔서 장사꾼들의 상을 뒤엎으신 일이 두 번 나옵니다. 이것은 동일한 사건의 반복이 아니고 제각기 다른 시기에 별도의 사건으로 있었던 일입니다. 처음 나오는 성전 청결 사건은 요한복음 2장에 있습니다. 이 시기는 주님의 전도 초기였습니다. 이 때에도 유월절에 성전에 들어가셔서 돈을 바꾸고 짐승을 파는 무리들을 채찍으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상을 뒤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를 거의 마무리 지으시게 되는 시기에 다시 한번 성전에 들어가셔서 동일한 방법으로 성전을 청결하시게 됩니다. 이 때에도 유월절이었지만 이 유월절은 그가 하나님께 어린양으로 바쳐지는 마지막 유월절이 되는 시기였습니다. 예수님은 분격하시는 어조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 도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가리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성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가리켜 ‘아버지의 집’ 또는 ‘내 집’이란 말로 표현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있었던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세 번째 세워진 성전으로 이방인의 주관자인 헤롯에 의하여 세워진 것입니다.
(1) 솔로몬의 성전 : 솔로몬이 세운 성전으로 솔로몬에 의하여 건축된 제일 성전입니다. 성전 건축은 다윗이 그 마음에 원했던 일이었는데 하나님은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그 사역을 맡기셨습니다. 이 성전은 기원전 967년경에 착공하여 7년 6개월만에 준공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건축한지 400여 년만에 바벨론 군대에 의하여 불사름을 당하였습니다.
(2) 스룹바벨 성전 : 스룹바벨 성전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사 왕 고레스에 의하여 성전 건축을 허락 받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바사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스1:2-3). 이 성전은 제2성전으로 솔로몬의 성전에 비하여 빈약한 성전이었고 법궤도 없었습니다.
(3) 헤롯 성전 :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 자기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예루살렘의 성전 건축을 시도했습니다. 이 성전은 예수님이 그의 공생애의 사역에 들어가신 첫 해(기원 27년경) 에도 아직 건축중이였는데 그때는 이미 이 성전을 건축한지 46년이나 지난 후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성전에 대한 예언에서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녹21:6)고 하셨습니다. 그 후 로마의 디도에 의해 기원 70년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었고 결국 주님의 예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이 참 성전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는 이처럼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되었고 그들은 성전 파괴와 함께 2천 년간이나 성전이 없는 이방 땅에서 칼을 피하며 살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2.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다.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비록 헤롯에 의해 세워졌지만 그 목적이 여호와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곳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그곳은 헤롯의 궁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거하고 있을 때에는 그를 섬기는 성전을 허락하셨습니다. 고레스의 명에 의하여 스룹바벨의 성전이 건축된 것이나 헤롯의 손을 통하여 성전을 건축한 것이나 그렇게 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성전을 어렸을 때부터 사랑하시고 자주 출입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성전을 더럽히는 무리들을 정죄하시고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고 책망하시면서 그들을 성전에서 내어 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한다는 말과 경배한다는 말과는 같은 뜻입니다. 기도해야 할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기도 소리는 들리지 않고 장사하는 무리들의 고함소리와 짐승소리가 요란하게 들렸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해야 활 성전은 장사꾼으로 변신한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세인들, 서기관들로 말미암아 외식으로 더럽혀졌습니다. 성전의 개념이 신약에 와서 달라졌습니다. 주님이 친히 성전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그 머리가 되시고 우리로 몸의 각 지체를 이루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심으로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경배해야할 것입니다(롬12:1, 요4:23). 우리는 모여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열심을 내야합니다. 우리는 모여서 기도해야 합니다(마18:19,30).
결 론 : 성경은 우리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고 경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심령의 변화를 받고 거룩함으로 옷 입어 우리의 성전을 깨끗하게 하여 늘 주님이 거하실만한 처소로 만들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