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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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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찰 스크랩 용암사와 파주 광탄면 용미리 마애이불입상(坡州龍尾里磨崖二佛立像)
현림 추천 0 조회 311 18.04.08 12:14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용암사와 파주 광탄면 용미리 마애이불입상(坡州龍尾里磨崖二佛立像)


파주 장지산 용암사(龍巖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이 절의 창건은 절 뒤에 서쪽을 향하고 있는 보물 제93호인

파주 광탄면 용미리 석불입상(일명: 雙石佛)과 관계가 깊은 절이다.

포천에 인접한 화천의 용화산 산록에 용암사(龍巖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파주의 이 절과는 다른 것으로 사료된다.

(용암사 일주문)  

파주 용암사의 창건 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마애불 조성 배경과 절의 창건에 얽힌 설화가 전하고 있어

 마애불이 조성된 11세기(고려시대)를 창건 연대로 보고 있다.

창건 이후의 절에 관한 역사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조선시대의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전란에 의해 한동안 절이 소실되었고, 근대에 들어 1930년대 절이 중창되었다.

 

1935년 장단군에 있던 장선환 대사가 주지로 부임하여 절을 수호했는데,

한때 혜음사, 대승사로 불리던 사명을 현재의 사명인 용암사로 바꾸었다.

중창 이후에도 화재로 인해 대웅전 등 도량이 소실되어 1946년 대중에 의해 삼창이 이뤄진다.

 1984년에 대웅전과 범종각을 중수했으나 1997년 대웅전이 다시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다.

 2001년 복원 불사를 시작하여 2004년 대웅전 불사를 마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로 여기에 언급된 혜음사에 관한 기록은 있지만,

대승사의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 <동문선><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김부식의 <혜음사신창기(惠陰寺新創記)>에는 고려 예종 15(1120)17(1122)

개경과 남경 사이를 왕래하는 행인을 보호하고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사찰과 숙박 시설을 겸했던 혜음사를 창건했고,

국왕의 행차에 대비해 별원(別院)인 행궁을 세웠다고 기록돼 있다고 했다.

 

(아래에서 본 범종각)

현존 당우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웅전과 미륵전, 요사채 등이 있으며,

 쌍석불 옆에 있는 동자불상과 칠층석탑은 이승만 대통령이

1953년에 쌍석불을 참배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건립한 것으로

1987년 철거하여 대웅전 옆에 두었다가 지금은 미륵전과 삼성각 옆에 안치 두었다.


(범종각)


(대웅전 전경)

@대웅전은 1935년 장단군에 있던 장선환 대사가 주지로 있을 때,

한때 혜음사, 대승사로 불리던 것을 용암사로 개칭. 중창 이후 화재로 소실.

1946년 삼창. 1984년 대웅전과 범종각을 중수.

1997년 다시 화재로 소실. 2001년 복원 불사를 하여 2004년 완공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 앞에는 2기의 석등이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참배기념으로 보시한 2기의 석등은 광명등으로 불린다.


왼쪽은 국토민안 위하여 천일기도 광명등,

오른쪽은 구국통일 위하여 천일기도 광명 등이라 새겨져 있다.



 

@석가여래 삼존불(중앙에 석가모니, 왼쪽에 문수보살, 우측에 보현보살)을 봉안한

대웅전에 양 기둥에 수달 상 2마리가 조성되어 있다.

화재가 잦았던 서산 상왕산 문수사의 극락보전에 보면 오리 한 마리가 매달려 있는데

용암사 역시 화재가 잦아 화마(火魔)의 액땜으로

수달 2마리를 대웅전 양 기둥에 조성해 놓았다.

수달은 한자어로는 수유(水鼬)라고 한다.




(미륵전과 삼성각이 한 전각에 있다)



하나의 전각에 좌측에는 미륵전, 우측에는 삼성각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미륵전 안에는 미륵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쌍불(雙佛)들만 조성되어 있고

삼성각 안에는 산신, 독성, 칠성탱이 조성되어 있다.







전각 우측은 삼성각. 산신, 독성각, 칠성탱이 조성되어 있다.


전각 좌측은 미륵전이다. 쌍미륵불이 가득히 진열되어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3년에 쌍석불을 참배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건립했다는

 동자 불상과 칠층석탑은 원래 쌍석불 옆에 있었으나

1987년 철거하여 대웅전 옆에 두었다가 지금은 미륵전과 삼성각 옆에 안치 두었다.

 

(철거전 동자상 모습) 




마애불 가는 길은 돌계단으로 이어져 있다.




<파주용미리마애이불입상(坡州龍尾里磨崖二佛立像)>

1)보물제 93호로 지정된 용미리마애이불입상은 두 구의 불상이 나란히 서 있는 마애불로

천연 암벽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선각(線刻)을 추가해

불신(佛身)을 표현하였고, 불두(佛頭)는 따로 만들어 얹었다.

 

2)이 마애불의 머리 위의 갓 모양을 한 것을 천개(天蓋), 산개(傘蓋), 화개(華蓋), 현개(縣蓋)라고도 한다.

이러한 조형물의 시원은 인도에서 비롯되며 그 목적은 햇빛이나 비를 막기 위한

실용적인 도구인 일산(日傘)에서 출발한 것인데 점차 신분의 직위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변화했다.

불교가 발전하면서 부처나 보살의 머리 위에 장식물로 이용되면서

 광배와 함께 불상을 장엄하는 데 활용되었다.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보개가 닫집으로 발전하여 불상 위의 장엄 요소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도 중국이나 일본의 사찰에서는 건물 안에서도 보개가 많이 사용하고 있다.



@챙이 두꺼운 모자 모양의 원형 보개는 원정모(圓頂帽)라 일컬어지기도 하는데

 대체로 여말 선초, 특히 조선 전기에 경기 일대에서 유행한 양식이다.

 원정모(圓頂帽)는 원나라 황제나 귀족이 쓰던 모자를 말하며.

원의 지배를 받았던 잔재가 남아 고려 후기 귀족이나 승려들이 착용하였고,

고려말 조선 초기까지 유행했다고 한다.

 

3) 중국에서도 예부터 귀인에게 양산을 씌워주는 풍습이 있어

 둔황석굴(敦煌石窟) 272굴이나

윈강 석굴(雲崗石窟) 6동 남벽 상층의 불입상 등에서 천개형식을 볼 수 있다.

형태는 4·6·8·원형 등이 있으며 좌구에 딸린 장막 형태의 개()가 가장 많이 남아있다.

 특히 장막형 천개는 종래의 자루가 달린 양산형과는 달리 지붕이 있는 사각형으로

각 모서리에는 커튼 모양의 번과 영락을 늘어뜨려 화려하게 장식했으며,

대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에 완성되어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주로 천으로 만들어졌으나 시대가 흐르면서 금속·나무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하게 되었다.

 

4) 대체로 큰 석불은 외부에 세우게 되므로 보개가

비를 막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과 불상 장엄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이룩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사각형, 원형, 팔각형, 육각형, 석등의 지붕돌 모양 등

 다양한 형태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암석에 조각된 용미리의 이 2기의 불상은 사각형과 원형을 하고 있다.

 

5)전면에 있는 향 좌측의 마애불은 향우측 불상보다 키가 더 크고 둥근 갓을 썼다.

 왼손을 어깨높이로, 오른손은 가슴 높이로 들어 연꽃 줄기를 붙잡고 있다.

여래로서 연꽃 줄기를 들고 있는 경우는 석가모니,

혹은 미륵불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은데,

해당 불상의 명문에 미륵불을 언급하고 있어 미륵으로 추정된다.

불상은 넓은 어깨를 당당하게 벌리고 있어 웅장한 느낌을 준다.



통견(通肩)의 착의를 하고 있다. 연꽃 줄기 아래의 가슴 부분에는

 속의 가사를 입을 때 묶은 리본 모양의 띠 매듭이 보인다.

그 아래로 왼쪽 어깨로 쏠려 올라가는 듯한 ‘U’자형 옷 주름이

 반복적으로 표현되며 흘러내리고 있는데 바위 맨 아래까지 흐릿하게 이어지고 있다.

좌우로는 양팔에서 흘러내린 소맷자락이

 은행잎 모양의 옷 주름을 만들며 허리 아래에까지 늘어져 있다.

 

6)향우측의 불상은 향좌측의 마애불보다 키가 조금 작지만,

얼굴이 더 크며 네모난 갓을 쓰고 합장하고 있는 모습이다.

바위의 자연적 상태 때문에 몸은 약간 옆으로 튼 모습이지만,

얼굴은 둥근 갓을 쓴 마애불과 마찬가지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마치 두 불상이 어깨를 맞대고 있는 듯한 인상이 흥미롭다.

 착의법이나 옷자락의 흐름은 옆의 마애불과 같지만,

바위 면의 폭이 좁으므로 바위 측면에도 옷자락을 새겼다.

전하는 바로는 연꽃을 든 상은 남성, 합장한 상은 여성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한다.

 

7)이 마애불에는 고려 때의 조성 연기가 전하는데 다음과 같다.

고려 선종(재위 1083~1094)이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元信宮主)를 맞이했는데, 역시 후사가 없었다.

그러던 중 궁주의 꿈에 두 도승(道僧)이 나타나 말하기를,

 ‘우리는 장지산(長芝山)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틈에 사는데 지금 매우 시장하다.’ 하였다.

다음날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장지산 아래에 두 개의 큰 바위가 나란히 서 있다고 하였다.

이상하게 여긴 왕은 이 바위에 꿈속의 두 도승을 새기게 하고는 절을 지었는데,

마침 그 해에 왕자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기존에는 이 설화를 고려해 이들 마애불의 제작 시기를 고려 전기인 11세기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암벽 면에서 성화(成化) 7의 명문이 발견됨에 따라

 조선 초기의 작품일 가능성이 새롭게 제시되었다.

성화 71471(성종 2)에 해당하는데,

이전에는 이 명문을 마애불을 제작할 때 새겨 넣은 것이 아니라

후대인 조선 초기에 기록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명문에 등장하는 추모 대상인 세조 및 그와 연관된 인물들의 능묘가

 파주에 많이 분포하고 있어서 마애불을 새롭게 조성할만한 의미가 충분하다는 점이 지적되었고,

 아울러 연꽃을 든 마애불이 쓴 둥근 갓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관모로 사용된 것이기에

이들 마애불은 조선 초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8)고려 석불은 본래의 신령스러움과 최대한 자연스럽게 조화을 위해

재래 신앙에서 성스럽게 여기던 암석에 조성된 경우가 많은 게 특징인데,

용미리의 이 불상들도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까닭에

거대한 느낌은 주고 있지만 정교함이나 신령스러운 느낌은 없다.

 

9)고려시대에 조성된 석불들은 신라의 석불과 달리 신령스러움보다는

 세속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는 지방화된 불상이다.

왼쪽의 둥근 갓을 쓴 원립불(圓笠佛)은 목이 원통형이고

두 손은 가슴 앞에서 연꽃을 쥐고 있다. 오른쪽의 4각형 갓을 쓴 방립불(方笠佛)

합장한 손모양이 다를 뿐 신체 조각은 왼쪽 불상과 같다.

 

10)지방민의 구전에 의하면, 둥근 갓의 불상은 남상(男像), 모난 갓의 불상은 여상(女像)이라 한다.

이 불상들은 고려 시대의 조각으로 우수한 편은 아니지만,

 탄생설화가 있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고려 시대 지방화된 불상 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예로 높이 평가된다.

 

11)고려의 불교와 신라의 불교와 비교하자면 고려불교는 도교적(道敎的)인 요소가 섞여서

참위지리(讖緯地理)의 풍수설(風水說)이 가미되어 크게 인심을 지배하였다는 것이다.

 예배 대상으로서의 불상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경시하는 선종(禪宗) 불교의 유행과

사경(寫經)이 성행하여 승려들은 좌선(座禪)과 염불에 몰두하고

대장경(大藏經)을 간행한다든지 대법회(大法會)를 여는 일이 잦았다.

 

12)이 때문에 불상의 수요(需要)가 줄어들게 되고 불교 정신이 저조하여

 그에 따라 조형(造形)정신의 해이를 초래하게 된다.

즉 원숙한 인체의 사실과 고조된 불교 이상이 조화되어 숭고한 신격미(神格美)를 이루었던

신라 조각의 경우와는 달리 그 높은 정신을 저버린 채 사실 기법만을 추종하고 종래에는

그 사실 능력마저 단순한 되풀이 됨으로써 불상은 인형적(人形的)인 속()된 것으로 되어 버린다.

 

전반적으로 조각 기술이 떨어지는 동시에 특히 대형 조각에서 퇴화의 모습이 현저하다.

 재료상으로 보면 초기에는 신라 말의 경향을 계승하여 철불(鐵佛)이 많이 만들어지고

자연암을 이용한 대형의 마애불(磨崖佛)들이 제작되었으나

섬세함과 장엄함이 신라의 불상과는 많이 차이가 난다.

 

13)현재 남아있는 고려 시대 문화유산 중 석불, 철불, 마애불 등은

지방 문화의 유산으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역사적 중요성이나 가치는 크다.

 대부분의 지방 문화유산들은 국가 문화재로 지정돼 있지 않지만,

용미리의 이 마애이불입상은 보물 제93호로 지정되어 있다.

거대하기는 하지만 조형미, 예술미가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고려 중앙집권세력의 유산에 가려 알려지지 않는

지방 문화도 역사적 중요성으로 볼 때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거대한 불상들은 예술미가 떨어진다 하더라고 그 자체가

고려의 지방 호족 세력들의 권위와 세력의 상징이기 때문에 가치가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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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8.04.08 14:36

    첫댓글 설명과 더불어 수고로움의 출사 덕분에
    감사히 보았습니다.
    성불 하세요 _()_

  • 18.04.08 17:05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 18.04.09 04:24

    잠시 들려 즐감하고 갑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즐거우날 되세요.
    감사합니다

  • 18.04.09 10:20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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