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의 시대상을 이야기하는 내용이 첫 번 째 수필집보다 아주 많아졌다. 그 중에서도 ’性(섹스)‘를 소재로 한 글이 여러 편이라는 것도 특이하다. 이것도 1990년 대를 상징하는 시대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성을 어둑컴컴한 골방에 가두어 두지 않고, 개방이라는 풍조가 퍼져나가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때는 내가 이규태 박사의 민속 이야기에 푹 빠져 있을 때여서, 우리 민속을 소재로 다룬 글도 보인다. 고적 답사기와 함께 이때 내가 흥미를 가졌던 일들이 지금까지도 내 취미 생활을 이루고 있다. 마지막 한 장(章)은 소제목을 아예 ’우리 시대의 이야기‘로 하였다. 영화 이야기도 하였다. 모험 영화나, 선과 악의 대결 영화에서 죽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물론 테러리스트 등 의롭지 못한 인간이더라면서, 아무리 시대가 변하더라도 단단하여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는 얘기다. 컴퓨터를 예를 들면서, 멀쩡한 기계이더라도 새로운 기계가 나타나니 용도폐기 되더라고 했다. 이것은 시대상을 말하면서 바뀌어 진 삶의 방법을 놀람으로 바라보면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만 선뜻 수긍하지 못하면서도, ’이 세상에 적응하고 살려면 받아들여야지‘하는 식이었다.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살았던 우리 세대들의 공통적인 심리상태 였으리라. 성공한 연극 이야기도 하면서, 세상에서는 성공하였다고 하더라도, 나는 동의하기 힘들어 하는 이야기도 있다. 내가 이런 글도 썼든가 싶었다.
나의 네 번 째 수필집은 2003년에 출간한 ’감각의 젝국, 그 벽 안에서‘이다.
이 수필집을 발간하면서 작가(이동민)가 한 말을 들어보자. 지금까지 낸 세 권의 수필집을 다시 읽어보니 부끄럽다. 이번에는 아무런 생각 없이 써 두었던 글을 모아서 낸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이 어쩌면 수필의 본 뜻을 가장 잘 나타낸 말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후에 내 글을 내가 읽어보니 아무런 생각 없이 쓴 글이 아니다. 앞의 수필집에 비하여 작가의 사유세계를 많이 담아냈다. 생각하고, 계획하여 쓴 글이라고 믿는다.
나는 구미에서 구미 공단의 여성 근로자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여성운동을 펼친 일이 있다. 여성운동은 당시의 여성주의자들이 들고나온 운동의 방향은 페미니즘이었고, 페미니즘 이론이었다. 페니니스트들이 내세우는 구호는 ’여성해방‘이다. 그 중에 여성의 성해방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그때 ’김부남 사건‘이 세상의 이목을 끌면서 시끌벅적하던 때이기도 하였다. 내가 즐겨 읽은 이규태 박사의 글도, 이조 여인의 억압된 성을 많이 다루었다. 그래서 내 수필에 여성의 성 해방을 다룬 내용이 많다. 적어도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이 붙이면 내 수필은 절대로 붓가는대로 쓴 글이 아니다. 머리로 생각하고 짜내서 쓴 글이다. 그렇다면 나의 사유를 많이 담아 낸 수필집이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바람직한 여성상은 성적인 욕망을 절대로 표현해서는 안 되고, 성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서도 안 된다. 당시는 얌전하고 정숙한 여인을 기렸다. 말하자면 어머니 상의 여인을 기렸다. 내가 진주의 논개 사당에 갔을 때, 우리 답사팀에게서 영정이 너무 어머니같다는 말이 나왔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 김은호는 골수 친일화가라서 영정을 새로 그린다는 말을 하였다. 어떤 모습의 여인으로 그릴까. 이런저런 시대 분위기 때문에 내가 여성의 성을 다룬 수필을 많이 썼으리라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여인상에는 어머니 상과 여자 상이 있다. 우리는 어머니상의 여인에게서는 절대로 성적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논개는 전해 오는 이야기에서 그림까지 온통 어머니 상으로 도배되어 있다. 왜장은 그런 논개에게 목숨을 뻬앗길 만큼 혹했을까. 나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왜장이 논개에게 반하여 목숨까지 잃었다면 논개는 남자의 간을 쏙 뻬내 먹는 팜므파탈적인 여인이다. 우리말로 표현하여 여우같은 여인이라고 해야 맞다. 이것이 여인에 대하여 펼친 나의 사유이었다. 이러한 나의 사유들이 네 번 째 수필집에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그때의 내 생각으로는 예술이고 문학 장르라는 수필에서 좀 더 직설적인 표현을 할 수 없을까라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마광수가 곤욕을 치루는 사회 분위기에서, 그냥 읽고,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감각의 제국‘은 일본의 유명한 감독이 찍은 예술영화이다. 그러나 표현은 프로노에 가깝다. 성 문제를 어둑컴컴한 골방에서 햇볕 아래로 가져온 셈이다. ’숙명의 여인‘ ’강간죄라고요.‘ ’딸들이 죽어가는 도시‘ ’음란한 여인을 위한 변명‘ 등등이 그런 수필이다.
또 하나는 취미 생활을 하면서 고대 미술에 푹 빠져서 국내 뿐아니라 국외에도 전문 교수님을 따라서 답사를 많이 다녔다. 답사를 가서 만나는 고 미술들은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러다보니 수필로도 많이 쓰여졌다. 이런 수필들을 모아서 아예 하나의 장(章)을 만들었다. 돈황의 달 이다. 여기서도 미술로서의 의의나, 나의 감상 등을 담았으므로 ’붓 가는대로‘가 아니고 나의 사유를 담아낸 글이다. ’하회를 다녀와서‘ ’사라진 천년의 미소‘ ’문화상품‘ ’장승의 얼굴‘ ’백중에 달을 희롱하다.‘ ’단속사지 빈 터에 비가 나리고‘ ’정도사지 석탑‘ ’무영탑‘ ’돈황의 달‘ 등이다.
또 하나는 12편의 글로 담아 낸 마야 문명 답사기’이다. 멕시코 지역을 거의 3주 간 답사한 여행은 내게 가장 큰 감동을 주었고, 오래오래 기억으로 남을 여행이었다. 여기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이 수필집에도 서정적인 내용의 글도 한 장(章)을 이룬다. 어머니를 기리는 글도 두 편 실려있다. 그러나 유년이나 고향 이야기가 줄어들고 많은 내용이 그림이나 자연을 만나서 느낀 내용이다.
그 다음은, 수필로 등단하고 10여 년이 되어가면서 수필문단에 대한 회의도 깊어 갔다. 내가 수필을 쓰면서 몸으로 경험한 사회라야 수필문단이고 대구 문단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문단이라는 사회 속에서 이방인처럼 보인다고 생각한 나를 수필에서 어떻게 표현하였을까.
그때 나는 수필가로 주목받고 싶어하는 나의 욕망과, 주목받지 못하는 나 자신을 서글프게 바라보는 내용의 글을 썼나 보다. 지금은 그냥 쓰고 싶어서 썼을 뿐이다. 라고 나를 위로하고, 위로하는 내 말에 내가 또 위로받고 있다. 먼 훗날 내 후손들이 선대 중에 수필을 쓴 사람도 있었구나 라고만 알아주기만을 바란다고 말한다. 그러나 네 번째 수필집을 지금 읽어보니 그때는 이름이 알려졌으면 하는 욕망도 강하였나 보다.
내가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것도 문학 단체에서 느낀 것이 많다. 속 좁은 연감탱이가 아집에 사로잡혀 내뱉는 넉두리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노년을 보내면서 인간사회와 인연을 끈을 잇고 있는 곳이 문학단체이다 보니 이런 글을 썼나 보다. 어쨌거나 그런 글이 나의 수필세계를 만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내가 다른 단체에도 많이 관여하였더라면 그 단체들을 또 이런 시선으로 바라보았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