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에서 1년
초록빛 칠월입니다. 장마철이라지만 남쪽 하늘은 햇살 인심이 넉넉하네요. 날씨 변덕이 심한 섬 지역에서 일기예보는 허풍쟁이의 거짓말이 되기 일쑤. 잠시 빗물이 듯다가도 안개만 나른한 날이 며칠 이어지기도 합니다.
여름 섬의 안개에서는 풀똥 냄새가 납니다. 퀴퀴함이 아닌 이슬방울이 발효된 느낌이랄까요? 들길을 거닐며 한숨 깊이 들이마시기라도 하면 창자 속 어딘가에서 개망초, 별꽃, 쇠비름 같은 들꽃들이 톡톡 불거져 나올 것만 같습니다. 그럴 때면 나는 울컥 꽃무더기를 토해내고 싶습니다.
들꽃? 그래요, 나는 지금 당신에게 홀려 있습니다. 쉴 새 없이 옥돌을 쓰다듬는 파도와 깨달은 자의 목소리처럼 나지막한 산, 들, 호수 그리고 새를 닮은 부지런한 사람, 사람들……아, 자연의 눈동자인 아이들……이곳의 모든 생명들이 나의 생활, 나의 사상, 나의 언어에 소름이 되어 돋아나고 있답니다.
금기이기에 오히려 구미가 당기는 대마초 연기나 다이메(아마존 숲의 인디오들이 영적 각성을 위해 마시는 환각 물질)를 들이키면 흡사 이런 기분에 빠져드는 것일까요? 진도라는 몸섬에 나를 섞은 지 1년, 나는 인생에서 가장 혹독한 사랑에 빠져 있습니다.
이맘때였습니다. 그러니까 작년 7월, 나는 식구들과 함께 진도에 내려왔습니다. 3개월 전에 벌써 이삿짐을 옮겨놓았기에 짧은 여름휴가를 떠나온 것처럼 짐은 가벼웠지요. 진도공용터미널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나는 속이 탁 트이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겁먹은(?) 표정이었던 아내는 나와는 다른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그날은 유난히 후텁지근한 날씨였고, 아내에게 진도는 낯설고 물 설은 곳이었기에.
내가 아내를 설득해 진도에 온 이유는 솔직히 스스로도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도시 생활에서 도태되었다거나 패배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내가 직업적으로 선택한 일들이 나와 아내의 신혼기를 지리멸렬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승부구가 없는 투수처럼 절망스러웠던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처음부터 도피성 귀향이었다면 나는 소로우의 <월든>에 나오는 조용한 호숫가 숲 속의 조그만 오두막집을 꿈꿨을 것입니다. 그러다 그가 ‘1847년 9월 6일 나는 드디어 월든을 떠났다’고 기록하며 문명으로부터의 도피를 마감한 것처럼 나도 어느 날 ‘드디어 진도를 떠났다’고 기록할 위인도 아니니까요.
그렇다고 요즘 도시인들에게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유행을 타고 있는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피에르 상소는 ‘느림은 삶의 매 순간을 구석구석 느끼기 위해 속도를 늦추는 적극적 선택’이라고 말했습니다. ‘시골=느림’은 결코 필연적인 게 아니라는 점에서도 나의 선택은 그다지 구도적이지도 않았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10여 년 전부터 나는 마음속으로나마 자연으로의 귀향을 준비해 왔다는 것입니다. 도시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과 관계의 그물을 엮고, 전문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생활의 방편들을 만드는 동안에도 나의 마음은 늘 고향에서 알몸이 되어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작년 여름 진도라는 자연적이며 영성적인 공간에 새터를 잡은 것입니다.
나와 아내, 그리고 사랑하는 파랑 이랑이에게 진도에서 1년은 시골의 질감을 몸소 체험한 시간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 만남만큼이나 많은 일들을 해치워야 했지요. 무엇보다 중간 정착지로 생각했던 읍내에서 보낸 시간들은 진도에 대한 나의 인식을 통째로 바꿔놓았습니다.
‘아, 이곳도 사람 사는 동네구나!’
진사련, 민협, 대책위, 청소년위원회와 같은 시민운동을 하면서 나는 진도 사회의 생리에 머리를 흔들거나 끄떡이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나와 식구들이 1년 동안 만난 사람들은 모두 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존재들입니다. 특히 다문화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이웃들은 커다란 고마움이며 따뜻한 행운입니다. 더구나 이네들과 더불어 ‘작은 변혁’을 꿈꿀 수 있다는 사실이 밤마다 내게서 잠을 내쫓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러한 활동이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거라 예감하고 있습니다. 나와 식구들은 아직 귀농한 것도 아니고, 이주를 마치고 정착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잠시 머물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나무 한 그루 심을 텃밭이 있는 집을 찾아낼 거라 믿습니다. 그 시기는 내가 진도라는 자연으로 돌아온 이유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때일 것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무심코 나 자신의 숨소리가 무한대로 증폭되는 순간을 경험하곤 합니다. 그때마다 내 의식은 늘 한 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나와 식구들이 귀향을 마감하고 새로운 여행을 시작할 마지막 정착지입니다.
진도에서 1년……자연에게 말걸기가 조금은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첫댓글 ^^ 삶이 점점 자연스러워지는 이야기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 창문님...!
자연의 냄새가 이곳 까지 전달되는 느낌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감사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