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하느님,
타락한 세상을 성자의 수난으로 다시 일으키셨으니
저희에게 파스카의 기쁨을 주시어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제1독서
<내가 너의 얼굴을 보았으니, 기꺼이 죽을 수 있겠구나.>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46,1-7.28-30
그 무렵 1 이스라엘은 자기에게 딸린 모든 것을 거느리고 길을 떠났다.
그는 브에르 세바에 이르러 자기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께 제사를 드렸다.
2 하느님께서 밤의 환시 중에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께서 “야곱아, 야곱아!” 하고 부르시자,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그가 대답하였다.
3 그러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그곳에서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4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겠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서 너를 다시 데리고 올라오겠다.
요셉의 손이 네 눈을 감겨 줄 것이다.”
5 그리하여 야곱은 브에르 세바를 떠났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태워 오라고
파라오가 보낸 수레들에 아버지 야곱과 아이들과 아내들을 태웠다.
6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얻은 가축과 재산을 가지고 이집트로 들어갔다.
야곱과 그의 모든 자손이 함께 들어갔다.
7 야곱은 아들과 손자, 딸과 손녀,
곧 그의 모든 자손을 거느리고 이집트로 들어갔다.
28 이스라엘은 자기보다 앞서 유다를 요셉에게 보내어, 고센으로 오게 하였다.
그런 다음 그들은 고센 지방에 이르렀다.
29 요셉은 자기 병거를 준비시켜, 아버지 이스라엘을 만나러 고센으로 올라갔다.
요셉은 그를 보자 목을 껴안았다.
목을 껴안은 채 한참 울었다.
30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렇게 너의 얼굴을 보고 네가 살아 있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는 기꺼이 죽을 수 있겠구나.”
복음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16-2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16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23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이렇게 말하면 사람이 무섭지 않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라고 하시며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신앙인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길은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는 방법으로 무엇을 말할까, 어떻게 말할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라고 하십니다. 사실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을 이겨내려면 나의 것을 말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 전해야 합니다.
누구나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연기를 하거나 연설하거나 글을 쓸 때 두려움을 느낍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지 몰라서입니다.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곧 자신의 정체성을 알리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복음을 전할 때 거부당하는 두려움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사제가 강론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경우는 강론의 준비가 너무 힘들어서 미사 울렁증까지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자들의 반응이 좋지 않을까 봐 걱정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불안과 걱정, 두려움은 ‘나’ 때문에 생깁니다. 내가 한 말 때문에 좋지 않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이미 내가 죽을 위험에 놓이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이유 없는 불안증을 조사한 결과 그 사람들이 ‘나’라는 말을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쓴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불안하지 않으려면 나를 없애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 방법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 ‘로켓맨’(2019)은 팝 록 뮤지션 엘튼 존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입니다. 그는 단호한 어머니와 자신에게 전혀 관심 없는 아버지 사이에서 사랑을 목말라하며 성장합니다. 그의 유일한 탈출구는 음악이었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갈망해서인지 동성애자가 됩니다.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마음은 사랑받지 못한 자신이 드러나게 될까 봐 무대공포증을 일으킵니다.
그가 어떻게 무대공포증을 극복하게 되었을까요? 그는 우선 사랑 받지 못해 사랑을 갈망하는 존재임을 받아들이고 무대 위의 과장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듭니다. 무대 위에서는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화려한 의상과 안경을 착용하고 예명을 사용함으로써 그는 연약한 자신과 대중이 보는 자기 페르소나와 거리를 두고 수줍은 레지 드와이트에서 화려한 엘튼 존으로 변신하면서 자신감을 얻습니다.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이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려다가는 거부당하는 두려움 때문에 복음 전파를 오래 지속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정체성으로 한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제가 신학생 때 어리석은 생각으로 동료 신학생과 논쟁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동해를 보고 있었는데 파도가 매우 높게 일고 있었습니다. 그 신학생은 파도가 저렇게 치는 이유는 바람의 영향이라고 했고 저는 달의 인력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어디에선가 본 것 같았습니다. 사실 달의 인력 때문에는 밀물과 썰물이 생기는 것이고 파도는 바람의 영향이 더 큽니다. 그러나 저는 그 생각을 계속 주장하였습니다. 어차피 틀려도 내가 틀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잘못된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저의 실수입니다. 이런 경우 좌절에 빠지지 않고 쉽게 자신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받아 전하면 그 말씀이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말씀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에 대해서도 크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생각일 때에는 사정이 달라집니다. 화가 나고 분통이 터질 것입니다. 강론 준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해서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이라고 믿는 것을 하면 부담이 없습니다. “주님, 이번에는 신자들에게 어떤 말씀을 해주고 싶으세요?”라고 묻고 묵상을 해 봅시다. 그러면 그 묵상에서 나온 것을 강의할 때는 부담이 사라집니다.
나의 생각을 말하면 신자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평가당한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응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고 나중에는 미사가 무서워집니다. 기도로 받은 말만 전합시다. 그러면 강론의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고 미사가 편하고 즐거워집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복음을 전할 때도 이것은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의 삶도 하나의 공연입니다. 나를 보여주지 말고 내 안의 그리스도를 들려주고 보여줍시다. 그러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과 비교합니다. 옆집 남편과 자기 남편을, 옆집 아내와 자기 아내를, 옆집 아이와 자기 아이를…. 이런 식으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특히 어느 자매는 이 비교가 더 심한 것 같습니다. 남편이 밖에서는 능력 있고 인정받는 사람이지만, 아내의 비교로 인해 세상에서 가장 무능한 남편이 되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아내는 이렇게 말합니다.
“옆집 남편은 퇴근하면 아이들과 놀아주는데, 우리 남편은 항상 늦게 들어와서 아이가 아빠 얼굴을 잊어버릴 정도입니다. 휴일에는 쉬어야 한다면서 하루 종일 잠만 자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습니다. 이러니 옆집 남편과 비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남편을 믿고 앞으로 남은 시간을 함께할 것을 생각하니 끔찍합니다.”
만약 사이코패스 흉악범이 옆집 남편이라면 이때도 비교할까요? 즉, 내 남편이 저런 흉악범이 아니라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실 이런 식의 비교는 하지 않습니다. 비교 대상을 넘어설 수 없는 존재처럼 만들면서, 가까운 나의 사람이 볼품없어지고 결국 자기 마음도 우울해집니다.
비교 대상과 나의 행복은 연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나를 불행하게 해줄 뿐입니다. 행복의 주체는 ‘나’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행복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아닌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으려 합니다. 남편, 아내, 자녀, 부모, 상황…. 그러다 보니 행복은 신기루처럼 집힐 듯 잡힐 듯하면서 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언제나 내 마음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항상 주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조심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들은 제자들을 박해할 사람이지요. 지금은 그런 사람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여전히 있습니다. 아픔과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바로 조심해야 할 사람입니다. 조심한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그보다는 나의 마음을 똑바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걱정한다고 나의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을 굳게 믿고 함께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군대 갈 때가 생각납니다. 낯선 곳, 낯선 장소에 가는 것 자체가 얼마나 겁이 나고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커다란 장벽이 느껴졌고, 정말로 죽으러 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군대에서의 시간이 저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성장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주님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들, 내게 아픔과 상처를 주는 사람들에 대해 무조건 거부하고 피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을 만나야 할 때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어려움 속에 있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