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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23일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제1독서 : 2열왕 19,9ㄴ-11.14-21.31-35ㄱ.36
복 음 : 마태 7,6.12-1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6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12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13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14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좁은 문들의 통과 여정
-생명의 곡선길-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10일전, “신부님, 저 오늘 휴가 떠납니다!” 인사를 마치고
꽃처럼 환한 모습으로 휴가를 떠났던 수사님이 어김없이 건강하고 밝은 모습으로 어제 귀원했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 역시 모두가 인생 휴가가 끝나면 아버지의 집으로 귀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 휴가가 끝나고 죽음이 임박했어도,
돌아갈 집이, 귀가할 집이 마땅치 않다면 얼마나 난감하겠는지요.
어제 참 좋은 분이 4월 강론집을 교정하여 제본해다 줬습니다.
무려 수십 년 동안 매월 작업 해다 주는 한 결 같이 성실한 분이십니다.
강론집 ‘구원의 여정’이란 제목도, 밝고 환한 표지의 그림도 참 좋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은 무의미한 여정이 아니라 ‘구원의 여정’입니다.
인생 휴가 후회 없이 잘 끝내고 아버지의 집으로 귀가하는 구원의 여정, 귀가 여정입니다.
또 어제 참 좋은 시를 발견하고 여러분과 나눴습니다.
좋은 시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그대로 구원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이 시 덕분에 복음을 중심으로 한 강론의 뼈대가 떠올랐습니다.
주저 없이 ‘좁은 문들의 통과 여정-분별의 지혜와 사랑, 기도와 시와 유머-’로 정했습니다.
‘구부러진 길(이준관)’이란 시입니다.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볕도 많이 드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사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따뜻한 애정이 가득 담긴 고향집 같은 시입니다.
말 그대로 힘들고 험한 좁은 문들의 여정을
잘 통과한 분들의 모습이 바로 구부러진 길 같은 모습입니다.
제 어렸을 때만 해도 온통 구부러진 곡선의 자연 환경 속에서 살았습니다.
산도 곡선이고 초가지붕도 곡선이고 길도 곡선이고 논뚝도 밭뚝도 곡선이고 내천도 곡선이었습니다.
나무의 나이테도 곡선입니다. 특히 수령 따라 다른 눈에 보이지 않는 구불구불
오묘한 나이테의 무니는 우리의 내적여정을 상징하는 영혼의 나이테 무늬처럼 생각됩니다.
또 사람들의 얼굴도 말도 대부분 부드럽고 인정 많은 곡선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제 이런 곡선은 사라지고 직선들 가득한 참 단조롭고 삭막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자연은 곡선을 만들었지만 사람은 직선을 만들었습니다.
좀 불편하고 느리더라도 참으로 깊고 아름다운 생명의 길이 곡선길입니다.
똑바로 난 직선길보다 굽이굽이 오솔길은 얼마나 깊고 아늑한 지요.
크고 작은, 이런저런 좁은 문들을 잘 통과했을 때
바로 아버지의 집에 닿는 구부러진 곡선길, 구원의 인생길입니다.
좁은 문들의 구부러진 곡선길 말고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과연 좁은 문들 잘 통과해온 굽이굽이 구부러진 구원의 곡선길인지
때로 멈춰 숨을 고르며 내 삶의 뒤안길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굳이 좁은 문을 찾아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내 몸담고 있는 삶의 자리가 좁은 문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좁은 문은 없습니다.
사람 숫자만큼의 좁은 문입니다. 각자 통과해 나가야 할 고유의 좁은 문들의 연속입니다.
그렇지만 함께 하는 도반들의 위로와 격려, 도움은 필수입니다.
좁은 문 하나를 통과하면 또 하나의 좁은 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좁은 문들의 통과 여정이 흡사 인생 장애물경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흡사 날마다 첩첩산중의 산을 넘는 느낌입니다. 며칠 전 써놓은 글도 생각납니다.
“하루하루가 넘어야 할 첩첩산중疊疊山中의 삶이다
하루하루가 통과해 나가야할 좁은 문이다
하루하루가 영적전투 치열한 최전방最前方의 삶이다
어찌하랴 주님은 내 사랑이자 운명이니”
누구나에게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된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좁은 문들의 여정입니다.
피하면 더 작은 좁은 문이 기다립니다.
우리나라의 처지를 봐도 얼마나 좁은 문들의 연속인지요.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 작금의 상황은
말 그대로 인내와 지혜를 다해 통과해 가야할 좁은 문입니다.
어떻게 좁은 문들을 지혜롭게 잘 통과할 수 있을까요.
바로 오늘 말씀이 답을 줍니다. 바로 분별의 지혜와 사랑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 지도 모른다.”
다 이해심 많은 좋은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라 배은망덕의 사람도 있고,
적반하장의 사람도 있는 법입니다. 선의를 곡해하여 듣는 편견과 선입견의 무지의 사람도 있습니다.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며 고도의 분별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좋은 것이라 하여 아무에게나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려 다칠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조심성스럽게 분별의 지혜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 차별이 아니라 분별입니다.
차별은 죄이지만 분별은 지혜입니다. 이런 분별의 지혜는 겸손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이래야 좁은 문들의 통과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황금률입니다. 황금률만 잘 지켜도 좁은 문들이 통과에 역시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황금률은 긍정적인 것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너무나 평범 자명한 진리이지만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기에 너무 잘 잊고 지내는 진리입니다.
참으로 이대로만 하면 좁은 문들의 통과는 훨씬 수월해 질 것입니다.
말 그대로 분별의 지혜이자 사랑입니다.
예수님보다 10살 더 많았던 랍비 힐렐의 일화도 재미있습니다.
-한 냉소자가 그에게 한발로 서있는 동안 온 율법을 가르쳐 줄 것을 청했습니다.
힐렐의 즉각적인 대답입니다.
“네가 싫어하는 것을 네 이웃에게 하지 마라. 이것이 율법 전부이다. 가서 그것을 공부하라.”-
얼마나 단순명쾌한 답변인지요. 예수님과는 똑같은 황금률의 진리를 부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또한 분별의 지혜이자 사랑입니다. 이대로만 산다면 좁은 문들의 통과는 훨씬 수월해질 것입니다.
다음에 기도 특히 성서의 시편과 시, 그리고 유머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열왕기 하권을 보세요.
아시리아의 산헤립의 침공으로 풍전등화의 위기는 말 그대로 절망적 좁은 문의 상황입니다.
바로 여기서 히즈키야는 간절한 기도로 좁은 문을 통과합니다.
“주님,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십시오.
주님 눈을 뜨고 보아 주십시오.
이제 주 저희 하느님, 부디 저희를 저자의 손에서 구원하여 주십시오.”
마침내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알려주는 이사야 예언자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이 일과표에 따라 평생, 끊임없이, 매일, 한 결 같이 규칙적으로 바치는
시편성무일도는 물론 매일미사가 좁은 문들의 통과에 결정적 영향을 줍니다.
아니 믿는 이들 역시 이런 규칙적 항구한 수행은 좁은 문들의 통과를 위해 꼭 권하고 싶습니다.
하여 제가 자주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기분 따라, 감정 따라. 마음 따라 살지 말고, 일과표의 궤도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시와 유머도 큰 도움이 됩니다.
시중의 시는 성서의 시편이지만 좋은 시나 노래도 좁은 문들의 통과에 큰 도움이 됩니다.
다음 유머러스한 제 자작시를 들어 보십시오.
무와 배추가 한창 왕성하게 자라나는 채소밭을 보며 쓴 시입니다.
좁은 문들 통과의 고달픈 삶중에도 미소 짓게 하는 유머 같은 시입니다.
“웬 아침부터 육체미 대회가
잘 가꿔진 무밭 나란히 도열한 무들
옆으로 늘어진 무잎들 다 벗어버리고
저마다 육체미를 자랑하는 무 사나이들
근육질 알통의 팔뚝같기도 하고 쭉벋은 종아리같기도 하다
옆에서 넋놓고 바라보는 배추 처자들
얼마동안은 계속될 육체미대회 아침 산책 때 마다 봐야겠다”-2007년
예수님 계시기에 살만한 세상입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은 생명의 문, 생명의 길입니다. 바로 거기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여 예수님의 산상설교 말씀을 실천해갈 때
예수님을 닮아 좁은 문들의 통과도 수월해질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은 물론 도반들과 함께 하는 굽이굽이 좁은 문들의 통과여정의 구원의 곡선길입니다.
밖으로야 좁은 문들의 연속 같지만 내적으로는 날로 깊어지고 넓어지는,
감미롭고 향기로운 생명의 곡선길이 될 것입니다.
좁은 문들의 통과 여정을 통해 날로 둥글게 익어 원숙해지는 '둥근 삶, 둥근 마음'(제 졸저명)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각자 주어진 좁은 문들을
잘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자신이 사는 자리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보입니다.
당연히 누려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남들과 비교를 통해
자신의 어렵고 힘듦을 하소연하기에 급급합니다.
더군다나 세상의 삶이 바쁘게 돌아가기 때문에
자신의 자리에 대한 만족을 생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가 멋지고 아름답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지금을 바라볼 때입니다.
언젠가 외국에 나갔다가 비행기를 타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제 자리가 창가라서 창밖을 볼 수가 있었지요. 구름 위를 비행할 때에는 너무나 멋졌습니다.
매일 볼 수 있는 구름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싶었지요.
그리고 착륙할 때에 보이는 도시의 모습 역시 너무나 멋져 보였습니다.
이 새로운 시점은 풍경에 질서와 논리를 부여했습니다.
잘 짜인 도로도 하나의 선으로 또 하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새로운 시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내가 사는 자리에서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주님께서는 새로운 시점으로 볼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세상의 시점과 매우 다릅니다.
나의 이익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생각하고
이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 머무를 수 있는 참 행복의 길로 안내해줍니다.
이 새로운 시각을 위해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모든 것을 이렇게 요약하셨습니다.
이는 다르게 표현하면 “하느님께서 너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바란다면”이라는 전제가 들어있습니다.
남에게 먼저 해 줄 때, 우리 역시 원하는 것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함을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는 표현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 길은 물론 좁고 어려운 길입니다. 그만큼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아직 몸은 이 세상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들처럼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멸망으로 이끄는 넓은 문으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아주 비좁습니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을 통한 실천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키울 수 있도록 철저히 노력해야 합니다.
좁은 문이라고 해서, 내게 가장 좋은 것을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어렵고 힘든 길이지만, 가장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이 길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사랑이라는 새로운 시각에 항상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너희가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짧은 말씀이지만, 중요한 세 가지의 가르침을 줍니다.
<첫째>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는 가르침이요,
<둘째>는 “너희가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는 가르침이요,
<셋째>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가르침입니다.
<첫째> 말씀은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두 가지 원리 중 하나입니다.
앞 장면에서 우리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마태 7,1)는 이웃과의 화합의 원리를 들었습니다.
이제 이와는 대조되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태 7,6)는
이웃과의 단절의 원리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는 결코 남에게 폐쇄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가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분별 있고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르기”(마태 7,6) 때문입니다.
세속적이고 악한 생활로부터 영적인 분별력과 신중함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균형 있고 조화 있게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세속정신과 이방종교들과 함께 있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별 있는 행동을 이렇게 권고한 바 있습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
이러한 분별의 귀중함에 대해서 요한 카시아누스는 그의 <담화집>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분별의 은총 없이는 완전한 덕이 없다.”(담화 2,3)
사부 성 베네딕도께서도 <수도규칙>에서 ‘분별을 모든 덕의 어머니’(64,19)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둘째> 말씀은 흔히 황금률이라 불리는 사랑의 원리입니다.
이는 6장 33절의 말씀과 더불어 산상설교의 2대 강령이기도 합니다.
곧 6장 33절의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는 말씀이
수직적인 관계의 황금률이라면,
여기 7장 12절의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는 말씀은
수평적인 관계의 황금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결코 ‘정직은 그 대가를 지불한다.’는 공리주의적 금언이 아닙니다.
또한 ‘주는 양만큼 똑같이 받을 것’을 기대하는 이해타산의 합리주의적 금언도 아닙니다.
오히려 철두철미한 ‘이타적인 사랑’으로 남에게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아니 더 나아가서는 겸손하게 ‘먼저’ 남에게 베풀라는 적극적인 사랑에 대한 요청입니다.
곧 사랑을 타인에게 기대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사랑을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마태 7,12) 입니다.
<셋째>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성을 규명하는 네 가지 비유 중
첫 번째로, 좁은 문과 넓은 문의 비유입니다.
곧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7,13-14 참조)는 요청입니다.
이 문은 좁은 문이기에 통과하기 위해서는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버려야할 것들은 버리고 오라는 말씀입니다.
생명의 길이지만 자신을 비우고 들어가는 문이기에 많은 이들이 선뜻 들어서지 않는 문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는 생명의 문이신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분의 이끄심에 의탁하는 자라야만이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들은 이 세 가지 말씀이
우리의 삶 안에서 실현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13)
주님!
제 자신이 부서지고 가벼워지게 하소서.
제 뜻이 꺾이고 사라지게 하소서.
좁지만 열린 문이기에, 붙들어 주는 당신을 꼭 붙들고 들어가게 하소서. 아멘.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태 7, 13)
한상우 바오로 신부
모두를 살리는
좁은 문입니다.
좁은 문의 여정은
작아지는 여정입니다.
작아지고 작아져서
주님과 하나 되는 여정입니다.
시련과 역경의
좁은 문이 있기에
간절히
하느님을 찾게 됩니다.
좁은 문은
하느님을 향한
결단의 문이며
깨어있음의 문(門)입니다.
좁아지면 낮아지고
작아지면 자유롭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 귀결되는
은총의 여정입니다.
우리의 자아가
우리의 욕심이
작아지면 질수록
모든 관계 안에서
하느님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좁은 문은
하느님을 만나는
참된 회개의 문입니다
나의 뜻을 내려놓는
좁은 문으로
오늘도
우리를 초대합니다.
모두를 살리는
좁은 문입니다.
지금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전삼용 요셉 신부
코로나가 언젠가는 끝날 것입니다.
저도 영성관을 운영하는 어쩌면 소상공인으로서
얼마나 많으신 분들이 힘들어하실지 아주 조금은 공감이 됩니다.
그런데 더 걱정되는 것은 코로나 이후의 시대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질병으로 주시는 ‘시대적 징표’를 우리가 읽어내지 못하고
삶으로 실천하지 못한다면 코로나는 어쩌면 더 큰 재앙의 작은 징조일 뿐일 것입니다.
저는 어쨌거나 코로나바이러스의 원인은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고 자연을 사랑하지 못한 것 때문에 발생했다고 봅니다.
내가 누군가를 아프게 한다면 그 누군가도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상 누군가를 아프게 하며 산 이들이 끝까지 평안을 누린 예는 없습니다.
축구를 하다가 공을 손으로 들고 뛰면 퇴장을 당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경기나 ‘규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규칙은 ‘사랑’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우리 교육은 이 사랑의 법과는 반대되는
‘경쟁’을 가르쳤고 우리는 그런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돈이면 남의 마음을 당연히 아프게 해도 된다는 의식이 우리들 안에 참으로 많이 들어있습니다.
제가 유학 가서 공부할 때 맥줏집에서 쫓겨난 적이 있습니다.
워낙 우리가 서빙하는 분들을 예의 없게 대해서입니다.
“어이, 아저씨. 맥주 한 잔 더!”
이런 식으로 몇 번 시켰더니 주인이 나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술을 팔지 않겠습니다.
저희 식구를 그런 식으로 대하는 여러분은 이 집에서 술을 마실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럽은 좀 다릅니다.
돈이 좀 있다고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해도 된다고 믿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저는 가끔 어떤 신자분들과 함께 식당에 가면 창피함을 느낍니다.
서빙하는 분들을 너무 막 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분들도 누구의 부모님이고 자녀일 수 있는데 반말로 소리 지르고 나무랍니다.
어떤 분들은 아이들이 가게에서 떠들고 사람들이 식사하는 데 방해가 되는데도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제지하는 사람들에게 큰소리를 칩니다.
제가 냉면 배달을 한 적이 있었는데 남자들의 대부분은 저를 “어이, 철가방!”이라고 불렀습니다.
내 돈 내고 내가 냉면을 먹으면 다른 사람을 무시해도 된다는 생각이 강한 것 같습니다.
저도 우리나라에서 살기에 왜 이렇게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분위기가 되었는지 잘 압니다.
그 이유는 ‘교육’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교육은 ‘나라가 잘되고 내가 잘 되기 위해서는 경쟁해서 이겨야 한다.’라는 목표가 뚜렷합니다.
그러나 경쟁 속에는 타인을 이겨 아프게 해야 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녹아 있습니다.
이런 교육을 받은 이들은 자연이 자신 때문에 얼마나 아파하는지 느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평생을 남의 머리를 밟고 올라서는 것만을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제가 도둑질은 처음 한 것은 초등학교 입학해서입니다.
다른 아이들의 지우개가 그렇게 부러웠습니다. 처음 훔친 것은 지우개 하나였습니다.
그때 심장이 터져나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서로 협동을 해서 과자도 훔치고 과일 서리도 많이 하였습니다.
점점 안 걸리면 된다는 의식이 자리 잡았고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얼마나 아파할지는
조금씩 무감각해져 갔습니다. 그렇게 사회인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아직 그 물이 많이 빠지지는 않았습니다.
우리 민족의 이념은 고조선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을 따르고 있습니다.
홍익인간은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이념입니다.
그리고 어떤 나라의 법과 종교도 이 이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황금률’도 그것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그러나 이것을 따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이 아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전에는 경쟁주의 교육이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좋은 역할을 했다면,
이젠 함께 공존하는 교육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EBS 어떤 다큐에서 보니,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 유치원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나눠 타라고 놓아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각자가 한 바퀴 돌면 다른 아이들에게 그것을 양보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아이들은 먼저 차지한 아이가 지칠 때까지 타며 다른 아이들의 부러움을 즐겼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셨고, 그 세상에서 재밌게 살려면 그 세상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 법이란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내 마음도 아플 것이라는 ‘황금률’입니다.
지금 우리 교육도 경쟁이 조금씩은 줄어드는 추세이나, 아직은 경쟁주의가 지배적입니다.
전면적인 개혁이 일어나지 않으면 크게 나아질 수는 없어 보입니다.
이런 시대에서도 남을 사랑하는 마음을 실천하는 것을 배우는 교육으로의 전환이 안 이루어진다면,
그 이후의 세상을 보는 것이 지금보다 더 두렵게 될 것입니다.
함께 사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황금률’을 체득하게 만드는 것이 교육의 최종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처음 카메라를 가진 것은 중학생 때였습니다. 당시에는 모두 필름을 사용하였습니다.
필름 중에 유명한 것은 코닥 필름이었습니다.
필름이 다 감기면 사진기에서 꺼내 사진관에 갖다 주었습니다.
소풍가서 찍기도 했고, 성당 예술제에서 찍기도 했고, 여름 신앙학교에서 찍기도 했습니다.
통이 넓은 나팔바지를 입고 찍은 사진도 있습니다.
그 뒤로 1998년 처음으로 디지털 카메라를 구했습니다.
메모리카드가 있었고, 그것을 컴퓨터에 연결해서 저장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파일을 보내면 인화된 사진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디지털 카메라를 처음 발명한 회사는 필름회사인 코닥이었다고 합니다.
코닥이 인화는 필름으로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렸다면
지금도 유명한 회사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코닥은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했고,
결국 자신들이 발명한 디지털 카메라의 힘에 밀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눈이 먼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은 빛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귀가 먼 사람이 듣지 못하는 것은 소리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본인이 눈이 멀었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본인이 듣지 못한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바꾸는 것은 세상이 아닙니다. 나 자신을 바꾸어야 합니다.
나의 생각과 나의 고정관념을 바꾸면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의 엄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가장 큰 어려움은 환자들의 고통과 의료진의 헌신과 희생입니다. 또 다른 어려움은 경제상황입니다.
경제는 생산, 유통, 소비가 순환되어야 합니다.
이동이 제한되고, 국경이 폐쇄되는 상황에서 유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사회적인 거리두기로 인해 소비가 급감하였습니다.
특히 여행, 식당, 항공, 공연과 같은 분야는 소비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감염병의 확산 우려 때문입니다.
소비와 유통이 원활하지 않으니 생산 또한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기업은 구조조정을 해야 합니다.
일거리는 줄어들고, 실업은 늘어나기 마련입니다.
정부는 새로운 길은 가고 있습니다. 전 국민에게 ‘재난 지원금’을 지급하였습니다.
3개월 안에 소비하는 조건이며, 재래시장과 소상공인에게 사용할 수 있도록
지역화폐와 선불카드로 지급하였습니다.
이를 통해서 소비가 촉진되면 유통이 활발해지고, 유통이 활발해지면 생산도 늘어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구조조정을 늦출 수 있고, 실업자도 줄일 수 있고, 경제상황도 개선 될 수 있습니다.
어려울수록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이기에 전 국민에게 소득지원을 해 주는 것입니다.
생각과 고정관념을 바꾸면 진흙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율법과 예언서는 나와 타인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종교의 전통을 유지하고, 역사를 보존하고, 신앙을 이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규정입니다.
이런 율법과 예언서는 관계의 단절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율법과 예언서는 코로나19로 인한 거리두기처럼 이웃과 벽을 쌓기도 합니다.
율법과 예언서는 다른 종교와 다른 문화를 단죄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습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고, 종교라는 이름으로 사상과 자유를 침해하기도 했습니다.
기득권을 지키는 도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에 대해서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지하에서 물을 퍼 올리는 펌프가 있습니다. 펌프에는 언제나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있습니다.
지하의 물을 얻기 위해서는 마중물을 부어야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펌프질을 하면 엄청난 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규정과 단절이 아닙니다. 소통과 관계의 개선입니다.
내가 존경받고 싶으면 먼저 존경하는 것입니다. 내가 존중받고 싶으면 먼저 존중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해받고 싶으면 먼저 이해하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받고 싶으면 먼저 용서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받고 싶으면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넓은 문을 좋아했습니다.
자본주의라는 바벨탑에서 풍요로운 세상을 만날 것 같았습니다.
그 넓은 문을 통해서 환경오염, 생태계의 파괴, 지구온난화, 기상이변, 새로운 전염병이 들어왔습니다.
공전의 그늘에는 난민이 있었고, 가난한 이들의 굶주림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희생, 나눔, 양보의 문입니다. 연대와 협력의 문입니다.
우리는 좁은 문을 통해서 생명의 빛을 얻을 수 있으며,
아름다운 푸른 별 지구를 후손들에게 물려 줄 수 있습니다.
“나는 이 도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니
이는 나 자신 때문이며 나의 종 다윗 때문이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 하느님의 정원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제노 수녀
여기에 문이 둘 있습니다.
한쪽은 문이 넓고, 길도 널찍해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다른 문은 아주 좁고, 길도 비좁아서 찾아오는 사람이 적습니다.
당신은 어느 문으로 들어가고 싶습니까?
일반적으로 넓고,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문은
일단 안전해 보이고 실수하지 않을 것 같은 길입니다.
반면 비좁고,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는 길이라면
왠지 걱정스럽고 불안한 느낌이 들어 그다지 선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핵심은 문이 얼마나 넓고 좁은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는지의 여부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다녀야 하는 길이란 그 길이 주님의 길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 우리가 가야하는 길입니다.
그러기에 문이 넓고, 길이 널찍하고,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다니더라도
혹은 문이 좁고 길도 비좁아 사람들이 찾지 않는 길이라도
그 길이 우리를 주님께로 이끄는 길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인의 길이 아닙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요한 10.9).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가 들어가야 하는 문입니다.
그 문을 통하여 우리는 아버지께로 가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삶에서 수많은 선택을 하게 되고
그 선택은 우리의 삶을 결정짓습니다.
생명으로 이끄는 길,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찾으신다면
그 길이 주님이 가시는 길인지?
그 길에 주님이 계신지? 를 먼저 살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가시는 길이라면 좀 좁고, 힘들고, 사람들이 적게 다닌들 어떻습니까!
그 길의 곳곳이 나와 이웃을 생명으로, 참된 진리로, 온전한 자유로 이끌어 주고
무엇보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두려울 것도 걱정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가 들어가야 할 문이고,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