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의 귀신이 한참동안 저를 따라다녀 힘들었습니다. 이제 정신을 차려 지나온 필름들을 정리해 봅니다. 사실 이집트는 신비한 나라입니다.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만 해도 구약 시대의 모세 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고 전 세계적으로 빵과 맥주를 처음 개발한 나라가 이집트입니다.
<이집트 인들의 주식인 빵. 에이쉬>
이번에 무바라크가 물러난 이유도 밀, 즉 빵 때문이었습니다. 나일강 삼각주는 전 세계적으로 밀의 생산량이 최대였다 할 정도로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러시아에서 밀을 수입하고 있는 처지이고 이상기온으로 밀 값이 폭등하면서 한 달 월급으로 그들의 주식인 빵을 배불리 먹을 수 없는 처지가 되자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에이쉬(빵)”을 외치게 된 것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민주화 열풍으로 독재 정권이 물러난 것이 아니라 빵 값 폭등으로, 단순히 먹는 문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 피난 교회> 베들레헴의 예수가 애굽으로 피신했을때 머무른 장소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합니다.
세계사에서 초기 기독교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나라가 이집트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뻗어있는 지금의 기독교 형태의 고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을 콥틱 크리스찬 혹은 이집트 정교회라고 부릅니다. 사도바울과 이방전도에 동역했던 마가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순교하였는데 이 마가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집단이 생기게 되었고 이들이 콥틱크리스찬들이고 이집트 정교회의 시초입니다. 이들 콥틱 크리스찬들은 자기들의 초대 교황을 마가라고 부릅니다.
<신발수리공>
어느 날 마가는 이집트 전도를 위해 흙먼지 길을 걷고 있는데 그만 신발 끈이 떨어졌습니다. 마가는 신발 수리공을 발견하고는 그에게 신발 수리를 맡깁니다. 이 신발수리공은 마가의 신발을 바늘로 깁던 중에 자기 손을 찌르고 맙니다. 그때 이 수리공 입에서 “오 하나님” 이란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자 마가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당신은 하느님을 아는군요.” 그러자 순식간에 손이 낫게 되고 마가를 따랐다고 하고 성자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콥틱이란 말은 함족과 셈족의 혼합언어인데 "콥트(COPT)" 란 말 자체가 "쿠브트(QUBT)"에서 왔고 희랍어 애굽부트(Aigyptios)에서 와전된 말이라고 합니다. 서로마 시대의 통치가 종료된 395년부터 이슬람이 정복한 641년까지를 공식적으로 콥틱 시대라고 부릅니다.
지금의 성서를 확립한 아타나시우스, 유일 “신”을 강조했던 아리우스, 초기 수도원을 만들었던 파코미우스, 홀로 수도자 안토니 등 초기 기독교 역사에 큰 획을 그었던 인물들 모두가 이 콥틱 크리스챤 들이고 보면 이 콥틱 기독교인들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고 지금 우리가 일요일 마다 교회, 성당을 다니는 이 형태의 뿌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는 로마의 통치 시대로 많은 유대인들이 뿔뿔이 흩어져 다른 곳에 이주하며 살게 됩니다. 이들 교민의 집단을 “다이에스포라”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등 지금의 이스라엘 지역에는 그리스, 시리아 등 많은 이방인들이 들어와 살던 시대로 그들만의 정신적 문화가 유입되던 시대입니다. 극장, 목욕탕 등이 있었고 많은 신들의 이야기가 범람했고 자유로운 희랍의 문화가 들어와 정착하던 시기입니다.
이집트 북부 알렉산드리아는 마케도니아의 젊은 청년 알렉산더 대왕이 점령한 곳으로 희랍의 모든 도시, 철학, 종교, 예술, 과학 등이 전파되었고 300년 후 예수님 시대에는 모든 문화,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돈 많고 똑똑한 사람들은 모두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살았다 할 정도로 지금으로 보면 미국이나 서울의 강남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아타나시우스가 367년 지금의 성경을 알렉산드리아에서 발표하게 됩니다.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이집트, 그리고 이집트의 북부 알렉산드리아는 기독교 역사에서 반드시 거론되는 중요한 지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복음서가 등장하던 시기는 이스라엘, 유대 민족에게는 절박한 시기였습니다. AD70년 로마의 디투스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전을 처참히 파괴하며 60만 명의 사상자가 났습니다. 유대 민족은 야훼 하나님이 이들 군대를 쓸어버릴 것으로 믿었지만 티투스의 군홧발은 예루살렘 성전 은밀한 곳까지 들어가 금 촛대 7개를 약탈해 버립니다. 야훼 하나님의 진노는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가복음이 쓰여 졌습니다. 유대민족의 프라이드와 아이덴티티가 좌절되어 가던 시기에 정신적 구심점이 필요했을 겁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를 진정한 민족의 메시아로 그렸습니다. 당시에만 해도 유대교와 기독교가 분리되었던 것이 아니라 유대교 속에 새로운 바람 정도로 기독교를 이해했습니다.
<콥틱 박물관에 보관된 나그함다미 문서 "도마복음">
1945년 이집트 엘카스르 지역에서 발견된 나그함마디 문서와 이집트 1947년 발견된 쿰란커뮤니티의 사해 문서를 보면 초기 기독교에서 얼마나 많은 경전들이 존재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의 성서라고 하는 문서가 신, 구약 66권 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불교 경전에 버금가는 방대한 자료들이 있었다는 것이 발굴을 통해 드러났던 것입니다. 거꾸로 보면 지금의 성서 66권은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아타나시우스가 정경이라고 발표했던 367년 이전에는 외경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경전들이 초기 수도자들에게 읽히고 검소한 금욕주의적 삶에 교과서들로 존재했던 것입니다.
신약으로 보면 당시 AD50년과 200년 사이에 많은 복음서, 행전들이 저술되었는데 제일 빠른 것이 바울의 서한 갈라디아서(50년 추정)이고 늦게 나온 것이 사도행전(200년 추정) 이 학자들의 의견입니다. 그러니까 누가복음의 저자와 사도행전의 저자가 사도바울의 동역자 의사 “누가”가 아니고 각각 당대의 헬라, 유대 문명에 정통한 지식인의 저술이라는 것이 지금의 흐름입니다.
<성화 도마의 의심.>
그러니까 심오한 공부를 했던 당대의 지식인들이 구전으로 전승되어 왔던 예수의 이야기와 사도들의 증언 그리고 먼저 나온 복음서를 참조하면서 너도나도 어려운 유대민족을 구원해 준다는 메시아의 이야기를 저술하게 되었고 제목에 사도들의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죠. 이 방대한 자료들이 367년에서야 아타나시우스의 선택 혹은 버림을 받게 되어 정경과 외경으로 구분되어 진 것입니다.
<바위 동굴 콥틱 성당>
인류사에서 “크리스찬”란 단어가 처음 생기게 된 지역이 시리아의 안티옥 교회 공동체였습니다. 사도바울의 이방전도의 거점이었죠. 초기 기독교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했던 베드로, 야고보에서 안티옥의 바울에게로 서서히 넘어가게 됩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복음서는 누가복음입니다.
이집트 나일강 지역으로 많은 기독교 공동체들이 존재했었는데 그들은 독신이었고 공동생활을 했습니다. 매우 검소하고 금욕적이고 매일 반복되는 생활을 하면서 신과 소통했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의 모습은 아니었을 겁니다. “믿으면 만사가 해결” 된다는 주술적인 개념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했고 실천했던 고독한 수도자들이었습니다.
첫댓글 샬롬~~귀한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