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묘를 하거나 마을을 다른 곳으로 옮긴 이유,
“풍수로 인해 하나의 마을이나 고을을 옮긴 경우도 있다. 전남 영암군 학산면 독천리犢川里의 독천시장은 1899년 용산리에 있던 것을 옮겼다고 하는데 그렇게 된 연유가 재미있다. 이 시장의 북쪽에 있는 묘는 영암면 망호리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이 땅의 기운이 왕성한 명당터라고 하여 정한 묘이다. 묘를 쓴 후 그 염원이 헛되지 않아 자손들은 번성했지만 그 친족들 속에서 자주 간통사건이 발생했다. 그래서 묘지를 살펴보자, 묘 앞을 흘러나오는 음수陰水가 마르지 않고 왕성하게 흐르고 있었다. 풍수사에게 묻자 그러한 일이 없도록 하려면 묘를 다른 곳으로 옮기든지 아니면 왕성한 음기를 풀어줘야만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자손이 번성하고 발복이 현저한 명당 터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옮기기가 난처했던 그 집안에서는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음기는 여자의 기氣이므로 남자의 기운이 감돌게 하기로 결정한 뒤 묘 앞에 한 달에 여섯 번씩 남자들이 모이는 시장을 용산리에서 이곳으로 옮겨 개설하였는데 그로부터 불순한 일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예가 나라 안에 몇 군데가 있다. 괴산군 청천면에 있는 청천장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묘를 경기도 수원에서 이장 할 때 새로 개설한 것이다. 송시열의 묘는 시장 뒷산에 위치해 있으며, 장군대좌형將軍對坐形의 명당터라고 한다. 그런데 장군은 수많은 병사가 거느리는 법이므로 풍수에서도 이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병사가 없으면 장군의 위엄도 없고 따라서 발복發福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묘를 쓰는 산에 많은 병사들이 있을 리 없으므로 어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송시열의 후손인 송종수宋宗洙는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시골장을 묘 앞에 개설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섰다. 그는 청천동민과 의논하여 시장신설비市場新說費를 주선한 뒤 엽전葉錢 삼백냥을 기부했다. 그에 따라 묘지 앞에 5일장이 들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마치 병사들처럼 모여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한곳이 조선시대 암행어사의 상징적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박문수朴文秀의 묘 아랫자락, 천안시 북면 은지리에 있는 병천並川장이다. 오늘날 병천순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아우내는 임진왜란 때의 명장 김시민과 유석 조병옥이 태어난 이곳은 삼일운동 당시 그 유명한 유관순 누나가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바로 그 장터이다. 그런데 이곳에 시장이 개설된 이유가 재미있다.
박문수가 이곳 병천 지방에 체류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그의 마부 노릇을 했던 김모씨는 지관으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그런 연고로 해서 박문수는 그에게 자신의 묏자리를 미리 잡아달라고 부탁하였고 그래서 지금의 은석산銀石山 정상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곳의 형세 역시 장군대좌형이기 때문에 박문수의 후손들도 병천시장을 개설함으로써 지세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박문수는 분묘로부터 바라볼 수 있는 동안은 자손이 번창하지만 만약에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옮기면 자손은 그 즉시 자손들이 몰락한다고 해 옮길 수도 없는 묘가 되고 말았다.“
가끔씩 병천시장에서 순대를 먹을 때에는 ’내가 오늘은 박문수의 쫄병이구나.‘ 하면서 순대를 먹는다.
예나 지금이나 좋은 곳에 터를 잡고자 하는 마음이나 좋은 곳에 조상의 묘를 써서 발복을 하고자 나는 풍수에 대한 생각은 변함이 없다. 어떤 곳이 좋은 곳인가? 그곳에 있을 때 내 마음이 편한 곳이 좋은 곳이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명당과 길지> 중에서 쌤앤 파커스
2024년 2월 28일
파묘를 하거나 마을을 다른 곳으로 옮긴 이유,
“풍수로 인해 하나의 마을이나 고을을 옮긴 경우도 있다. 전남 영암군 학산면 독천리犢川里의 독천시장은 1899년 용산리에 있던 것을 옮겼다고 하는데 그렇게 된 연유가 재미있다. 이 시장의 북쪽에 있는 묘는 영암면 망호리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이 땅의 기운이 왕성한 명당터라고 하여 정한 묘이다. 묘를 쓴 후 그 염원이 헛되지 않아 자손들은 번성했지만 그 친족들 속에서 자주 간통사건이 발생했다. 그래서 묘지를 살펴보자, 묘 앞을 흘러나오는 음수陰水가 마르지 않고 왕성하게 흐르고 있었다. 풍수사에게 묻자 그러한 일이 없도록 하려면 묘를 다른 곳으로 옮기든지 아니면 왕성한 음기를 풀어줘야만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자손이 번성하고 발복이 현저한 명당 터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옮기기가 난처했던 그 집안에서는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음기는 여자의 기氣이므로 남자의 기운이 감돌게 하기로 결정한 뒤 묘 앞에 한 달에 여섯 번씩 남자들이 모이는 시장을 용산리에서 이곳으로 옮겨 개설하였는데 그로부터 불순한 일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예가 나라 안에 몇 군데가 있다. 괴산군 청천면에 있는 청천장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묘를 경기도 수원에서 이장 할 때 새로 개설한 것이다. 송시열의 묘는 시장 뒷산에 위치해 있으며, 장군대좌형將軍對坐形의 명당터라고 한다. 그런데 장군은 수많은 병사가 거느리는 법이므로 풍수에서도 이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병사가 없으면 장군의 위엄도 없고 따라서 발복發福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묘를 쓰는 산에 많은 병사들이 있을 리 없으므로 어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송시열의 후손인 송종수宋宗洙는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시골장을 묘 앞에 개설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섰다. 그는 청천동민과 의논하여 시장신설비市場新說費를 주선한 뒤 엽전葉錢 삼백냥을 기부했다. 그에 따라 묘지 앞에 5일장이 들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마치 병사들처럼 모여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한곳이 조선시대 암행어사의 상징적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박문수朴文秀의 묘 아랫자락, 천안시 북면 은지리에 있는 병천並川장이다. 오늘날 병천순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아우내는 임진왜란 때의 명장 김시민과 유석 조병옥이 태어난 이곳은 삼일운동 당시 그 유명한 유관순 누나가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바로 그 장터이다. 그런데 이곳에 시장이 개설된 이유가 재미있다.
박문수가 이곳 병천 지방에 체류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그의 마부 노릇을 했던 김모씨는 지관으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그런 연고로 해서 박문수는 그에게 자신의 묏자리를 미리 잡아달라고 부탁하였고 그래서 지금의 은석산銀石山 정상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곳의 형세 역시 장군대좌형이기 때문에 박문수의 후손들도 병천시장을 개설함으로써 지세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박문수는 분묘로부터 바라볼 수 있는 동안은 자손이 번창하지만 만약에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옮기면 자손은 그 즉시 자손들이 몰락한다고 해 옮길 수도 없는 묘가 되고 말았다.“
가끔씩 병천시장에서 순대를 먹을 때에는 ’내가 오늘은 박문수의 쫄병이구나.‘ 하면서 순대를 먹는다.
예나 지금이나 좋은 곳에 터를 잡고자 하는 마음이나 좋은 곳에 조상의 묘를 써서 발복을 하고자 나는 풍수에 대한 생각은 변함이 없다. 어떤 곳이 좋은 곳인가? 그곳에 있을 때 내 마음이 편한 곳이 좋은 곳이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명당과 길지> 중에서 쌤앤 파커스
2024년 2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