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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fUNUbfRE7NY?si=3OnQKBRBJcz5suzg
(Classical Music, Vespro della Beata Vergine by Claudio Monteverdi 성모 마리아의 저녁 기도)
이탈리아 작곡가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1567-1643)의 성악에 대한 의견
Monteverdi on singing
by Richard Wistreich
EARLY MUSIC, FEBRUARY 1994, pp. 7-19
*Richard Wistreich는 성악가(Bass)이며 Red Byrd 성악 앙상블의 공동설립자이며
독일(Trossingen) Staatliche 음대 고음악과의 성악교수를 거쳐 현재 영국 웨일즈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베니스의 성 마가 성당의 한 가수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반의 성악 연주의 문제점들을 해결하려는 가수들은 자연스럽게 이용가능한 문서 증거를 찾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자료들은 성악 연주의 실제에 대한 여러 어리둥절한 일화들을 들려준다. 따라서 우리는 그 자료들의 상대적인 가치와 그것들이 해석되어지는 방법론에 관하여 어려운 문제점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기보된 음악 자체를 포함하여 노래책의 서문들, 교수법에 관한 문헌(소고들), 특히나 당시대 서신에 포함된 가창에 관한 여러 다양한 언급들이 바로 증거들이다. 이 마지막 카테고리에서 특히 가치있는 것은 오디션과 채용보고서들이다. :이 자료들 중 많은 것들이 오늘날의 가수들에게 꾸준히 활용되어진다. (내 참고문헌들의 대부분들은 근대의 음악학적인 연구에서 뽑은 것들이다.) 그러나 연주의 실제로서 그 자료의 사용은 종종 간과되어진다.
이 소고는 대단히 권위있는 자료들-몬테베르디의 편지물들-에서 발견되어지는 1620년대 베니스에서의 베이스 가창에 관한 증거들을 검토해보려한다. 현시대의 가수들에게 유용한 생생한(raw) 자료들을 뽑아내기위해 편지들을 읽는 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만은 아니다.( 특히나 명백한 잡다한 말들을 가지고서 몬테베르디가 의도한 바를 이해하기란...): 가수들과 가창에 대한 다른 종류 담화들을 넌지시 언급하는 것이 우리가 필요한 사항을 얻을 한 방법이 될 것이다.
1627년에 알레싼드로 스트리쬬에게 보낸 그의 유명한 편지의 추신을 보면, 거기서 몬테베르디는 스트리쬬의 La Finta Pazza Licori(오페라 이름. 역자 주) 의 정황에 대해 썼다. 몬테베르디는 그 오페라의 연주를 위해 베이스 가수와 몇 명의 소프라노들을 추천해 주라고 스트리쬬가 일전에 부탁했던 것을 언급한다. 그는 밀라노의 어떤 사람의 소문에 대해 모호하게 암시하면서 또한 '만투아 가'의 돈 쟈꼬모 라팔리노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이 라팔리노는 당시 성마르꼬 성당의 성가대원이었다. 이리하여 일련된 편지들이 시작되는데 라팔리노가 먼저 논의되고 그리고 두 번째로 협상중에 베니스에서 시선을 끌었던 볼로냐출신의 보다 젊은 가수가 논의된다. 처음에는 몬테베르디가 이 젊은 남자에 대해 긍정적이지만 이후 그가 명백히 지나친 몸값을 요구하는 것을 알고서 단점들을 열거하기 시작한다. 이 서신에서 우리는 제시된 바 없는 사안인 오디션의 통고를 접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에게 또한 베이스 가수에게 기대되는 기술적인 자질과 몬테베르디의 평가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해준다. 이와 더불어 1620년대에 베니스에서 가수들이 어떻게 생계를 유지했는가에 대한 중요한 정보 역시 얻게되는 것이다.
돈 쟈꼬모 라팔리노는 성 마르꼬 성당의 성가대원들이 그러했듯이 사제의 신분이었다. 그의 성가대급료가 80두캇이고 행정관 죠반니 바띠스타 포스까리니의 (명목상의) 소속사제로서 40두캇을 더 받는다고 몬테베르디가 설명해 놓은 것으로 우리는 성가대원의 고용의 조건이 50년 혹은 그 이전의 시기 -기부금이 가수들의 급료에 더해졌기 때문에 아주 보직이 되었던 때- 와 별 다를바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라팔리노는 프리랜서 가수로 일해서 100듀캇의 수입을 더 올렸는데, 추정하건데, 여러 학교들의 주요한 행사일이라던가 혼인식등에서 노래했을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성 마르꼬 성당의 성가대원들에게 조심스레 예약되었고 바로 이번에는 몬테베르디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이다. 몬테베르디는 따라서 라팔리노의 '특별' 수입을 산정하는 좋은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가수를 평가하는 몬테베르디의 오랜기간 숙련된 노하우에 대한 평가이자 분명하게 그는 La finta pazza Licori의 한 역할에서 라팔리노의 목소리의 적합성을 짧은 한문장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하는 스트리쬬 자신의 확신의 측정이었다. 그 한 문장이 바로 16세기와 17세기의 여러 자료들에서 발견되어지는 훌륭한 가수의 테스트의 정수같은 것이었다.
여기 까메라에서는 만투아의 라팔리노만한 가수가 없다. 그의 사제 이름은 돈 쨔꼬모인데 사실 그는 바리톤이지 베이스는 아니다. 한편 텍스트는 선명하게 전달하며 약간의 트릴이 있고 고르지에(목구멍에서 표현되는 장식음)를 약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신있게 노래한다.
텍스트(가사)의 선명한 전달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 시대의 모든 가창에서 Sine qua non(필수요소) 이다. 그의 테크닉 능력의 가장 중요한 척도로서 장식음(dispositione)에서 라팔리노의 아티큐레이션 기술의 수준에 대한 언급이 마찬가지로 기대된다. 6월 13일에 새로운 젊은 볼로냐출신의 가수(24세, '청년'으로 언급됨)를 스트리쬬에게 우선 언급하고서 일주일 후에 몬테베르디는 열광적으로 라팔리노와 비교한다. 새로운 젊은이는 황제의 추천서를 가지고 있고 같은 단어들로 그를 비교하면서 써내려 간다.
그는 인물이 출중하고...... 라팔리노보다도 더욱 매력적으로 노래한다. 더욱이 그는 작곡도 조금 하니까 더욱 믿음직하다. 그는 가사전달이 분명하고 고르지에도 충분하게 쓰며, 트릴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몬테베르디의 라파엘로에 대한 평가의 첫 부분은 어떠했었는가? 16세기와 17세기에서 교회와 사적인 까메라사이의 가창의 특징은 어느 한쪽에 자질이 출중한 사람이 다른쪽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짜를리노는 1558년에 이렇게 기록했다.:
교회와 대중예배당식으로 노래하기도 하고 어떤이는 사적인 까메라방식으로 노래한다. 앞의 장소에서 가수는 꽉 찬소리로 노래한다 - 하지만 분명하게 노래한다...... 사적인 까메라에서는 가수는 더 낮고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하며, 소리를 질러댐이 없다.
17세기의 전환점에서 교회가창을 위해 가장 추구되었던 베이스의 자질은 '풍성하고 깊은' 것이었다. 이른 1597년에 성 마르코성당의 행정관은 베니스 대사에게 유럽을 돌며 소질있는 성가대 후보들을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겨우 한명을 찾았다고 파리에서 대사로부터 소식을 듣게된다. 그가 발견한 사람은..
이 도시의 성당에 있는 18살의 젊은앤데 아주 끝내주는 베이스입니다.; 그는 당신이 원하는 만큼 깊게 낼 수 있으며, 교회 전체를 채울만큼 충분한 성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 교회는 성마르코보다 네배는 더 클 겁니다.
의문의 그 남자는 삐에로 뻬렝이었고 곧바로 성마르코성당에 채용되었다.
때때로 음역의 정확한 증거가 비평이 되었고 따라서 오디션이 먼 도시에서 대리인에 의해 행해질 때는 과학적인 측정만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유명한 나폴리출신의 베이스 멜코르 파란트로띠를 페라라 궁에 채용하기 위한 협상에서는 에르꼴레 타씨니의 백작의 조카가 가수들의 테스트일람표를 작성하기 위해 보내어졌다. 그가 보고할 내용은 아래와 같다.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가, 어조가 달콤한가, 구별성있게 노래하는가, 빠른 아티큐레이션을 할줄 아는가, 고음은 어떻게 처리하는가, 최저음은 어느 음표인가 풀룻으로 측정할 것. 그 최저음 목소리에 해당하는 풀릇의 톤과 음표의 숫자가 편지에는 기록되어져야 한다.
몬테베르디는 라팔리노가 실제로 깊은 저음이 없다고 명시했다. 그는 '바리톤이지 베이스가 아니다' 라고 썼다. 비록 뛰어난 가수였던 뻬렝(그는 100두캇의 급료로 시작했는데 17세기에 아주 많이 받는 것은 아니었다.) 만큼의 높은 급료은 아니었지만 그는 성 마르코성당의 좋은 봉급을 받는 성가대원이었다. 베이스보다 더 높은 목소리를 지시하기 위해 바리톤 이라는 용어가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바리톤과 베이스(콘트라바쏘)간의 구분은 1595년 성 마르코 성당의 한 성가대원을 언급할 때도 분명히 쓰인다. '브레쉬아 출신의 사제는 바리톤으로 쓸 수도 있는데 말하자면 그는 세 개의 성부를 노래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두 개의 성부 이상을 부를 수 있는 가수라는 점에 의문이 생긴다.; 한편으로는 라팔리노가 성 마르코성당의 성가대에서 정확히 무슨 파트를 노래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관심꺼리가 된다.
볼로냐출신의 젊은이도 역시 깊은 베이스는 분명 아니였다.
그는 까메라에서는 바쎄또파트를 전문적으로 부른다.... 그는 특별하게 깊은 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까메라와 극장에서는 그리 불만족스러운 소리는 아니다.
바세또는 원래 바쏘의 축소형이고 '베이스'파트보다 더 높은 음역, 혹은 더 가벼운 목소리, 혹은 양쪽 모두를 내포하기도 한다. 첫 번째의 의미는 몬테베르디가 '특별히 깊은 소리는 아니나' 라는 언급에서 강조되어지고 두 번째의 의미는 '까메라 에서는'이라고 하는 추가된 단어에 의해서 강조되어진다. 신따그마 무지꿈에서 프레토리우스는 바세트라는 단어를 높게 소리내는 합창(성악에서건 기악에서건)에서 가장 낮은 파트를 나타낼 때 사용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는 음악자체의의 라인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지 연주자에 대한 언급은 아니며, 교회음악에 대해 언급된 것이다. 그는 바세또 라인은 테너보표로 기보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볼로냐출신의 청년과 라팔리노는 낮게 놓여있는 테너 라인을 불렀다고 볼 수 있겠다. 비록 몬테베르디가 그 젊은이를 가리켜 '베이스총각'이라고 언급하지만. 아마도 '브레샤출신의 그 사제'는 테너와 베이스 그리고 바세또 파트를 요구대로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몬테베르디가 이 두 명의 '가벼운 베이스들' 을 La finta pazza 오페라 에서 '더 깊거나' '더 무거운' 베이스들보다도 코믹한 역할에 더 선호하여 발탁했다고 하는점은 명백하다. 죠반니 바띠스타 도니는 소리배정에 대해 토론하면서 항상 노인의 형상으로 제시되는 하나님아버지의 역할과 '젊은 목동들의 삼중창'에서 가장 낮은 소리에도 '바리톤'음성이 적합하다고 간주한다. 이에 더하여 내제된 혼란을 보여줄 때, 도니는 새턴, 죠베, 넵튠, 불칸, 야누스, 헤라클레스 그와 같은 우화된 신들은 깊은 목소리가 어울리는데 즉 베이스나 바리톤들을 옛날 사람들이 그랬듯이 가능하다면 조율음보다도 낮은 톤으로 해야 한다고 쓴다.
불행이도 1627년 이전부터 몬테베르디에 의한 '희극적인' 베이스나 바리톤의 역할에 대한 기록은 없다. 따라서 그가 직접 작곡한 작품에서 아래음표를 쓰지 않은 것이 까메라출신 가수의 자질부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그의 주장을 테스트하기는 힘들다.
비록 마드리갈의 첫 번째 여섯권의 베이스 라인이 F 아래로 아주 가끔 내려가긴 하지만 더 낮은 음표들도 발견되어질 수 있다. Ballo delle ingrate 와 Orfeo에서 베이스 음역은 위 아래 양방향으로 상당히 확대된다. 음역의 용어를 빌자면 교회음악의 베이스라인과 유사하다. 따라서 바리또노나 바쎄또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몬테베르디는 단지 음역만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관련된 음성 특색이라던가 여러 다른 가창형태(까메라에서와 그 반대로 교회에서)에 적합한 발성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 가능해진다. 분명히 라팔리노는 적어도 한 오페라에서 만큼은 극장의 가수로 출현했다.
디스포지치오네(빠른 패씨지나 고르지에를 연주하는 능력)를 가지고 있는 것은 이 시대에 베니스에서 까메라나 극장의 독점적인 요구사항은 아니었다. 1631년쯤에 몬테베르디가 쓴 실로 굉장한 솔로 베이스 모텟 Ab aeterno 까지 우리는 넓게 살피어 볼 필요가 있다. 이 작품은 (low C)의 매우 낮은 음을 요구할 뿐 아니라 (1번그림)에 '트릴리' 라고 표기된 아주 빠른 스피드의 여러 패씨지를 갖고 있다. 이런 작품은 특별히 비범한 재능을 가진 가수를 위해 작곡되었다고 첫눈에 속아 넘어갈 수 있다. 베이스와 알토까지도 놀라운 기교로 부를 수 있었던 시스틴 예배당의 테너 죠반니 도메니꼬 풀리아스키같은 사람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아니면 저 대가 쥴리오 체사레 브란까씨오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성악 대가가 최소한 1581년이라는 이른시기의 성 마르꼬성당에서는 이례적인 것이었음이 브란까치오의 증언에서 보여진다. 그 유명한 가수와 조신은 그가 베니스에서 들었던 가수에 대해 알폰소 데스떼 공작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그의 편지는 성 마르코 성당에서의 베이스 가창이라는 문제 뿐만이 아니라 어떤 한 가수가 교회음악에는 좋으나 까메라음악에는 적합치 않았다는 방식도 조명해주었다. 아주 뛰어난 한 가수에 대한 보고가 있는데 특별한 문서이고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다.
나폴리의 수도사이자 성마르꼬성당의 콘트라바쏘에 대한 언급. 나는그가 노래하는 것을 여러차례 들었다. 저녁기도라던가.... 미사에서나, 반주에 맞춰 노래하거나, 솔로를 하거나, 트리오나 듀오를 하거나, 모든 것에서 만족스럽다. 왜냐하면 그는 저음역에서나 고음역에서나 또한 중음역에서 둥글고 울림이 풍부한 소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브란까치오는 자신이 개인적인 방에서 오디션을 열었으며 클라우디오 메룰로의 하프시코드 반주에 맞춰 가수가 노래하게 하여 예배당에서처럼 까메라에서 소질을 잘 발휘하는지를 보았다고 말한다. 2주후에 브란까쵸는 그의 목소리가 일반주거환경에서는 별로라는 오디션결과가 나왔다고 보고했다.
대체 이 가수는 누구였을까? 1597년 말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성가대 명부를 보니 거기엔 네명의 베이스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파브리또 디 프라리 ; 목소리 좋음
쟈꼬모 안또니오 디 꼬르세니에리 ; 목소리 좋음
지기스몬도 다 산 짜네폴로; 목소리 좋음
아우구스틴 디 포스까리; 목소리는 좋으나 소심하게 노래함.
가장 유력한 후보는 처음에 나오는 이름인데 명백히 프라리의 '수도사'이다. 그가 브란까쵸오와 마찬가지로 나폴리 출신인지를 살피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비록 우리가 가수의 이름을 알 수는 없다고는 하지만, 이 보고서에서 많은 흥미로운 것들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브란까쵸는 대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성 마르코 성당에서 노래하는 가수가 까메라 음악에서는 적합지 않다는 것을 듣고 구분해 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험해 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 가수가 일반 주거환경에서는 제소리를 못냈다거나 혹은 다른 종류의 음악에는 힘들었다는 두가지 면을 내포한다. 두 번째로 브란까쵸는 그 가수 혼자서 노래하는 것과 앙상블 속에서 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을 명백히 언급한다. 이 사실은 페라라궁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데, 왜냐하면 까메라 가수는 Musica secreta 에서 앙상블을 부를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2년후에 홧김에 때려친 브란까치오 자신을 대신할 사람을 알폰소 공작이 찾고 있었는데 로마에 있는 페라라궁 거주자인 쥴리오 마세띠는 로마출신 베이스 삐띠오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다. 마세띠는 그의 독창하는 것만 보고할 수 있었고 앙상블가수로서는 확증을 얻지 못했다.
전문적으로 그는 류트에 맞추어 베이스를 부른다. 그리고 매우 달콤한 목소리를 지녔다. 하지만 앙상블에선 어떨지 모르겠다. 실험을 못해봤으니....
쏠로와 앙상블 가창 사이의 구분점은 특히나 교회에서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1606년 성 마르꼬 성당의 행정관들은 테너 스테파노 리니에리를 평가하는 내용에서 그가 성가대에서 노래하는 것과 오르간에 맞추어 혼자 부르는 것 모두를 수차례 들었다고 평한다.('udito piu volte, cosi nella capella cosi nelli organo solo') 주가높은 시스티네 예배당 성가대원들은 앙상블 오디션을 거쳤으며 성가대원들 스스로에의해 결과는 판정되었다.
Custode 가 지원자들을 부른다. 한명한명 베이스음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그들을 합창석으로 올려보내는데 거기엔 이미 다른 가수들이 있다. 나머지 가수들은 추기경석의 의자에 앉는다. 세명이 그 베이스 가수와 함께 노래하고 결국 콘체르토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브란까쵸의 모든 언급들 중에서도 오늘날의 베이스 가수에게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나폴리사람들의 목소리의 여러 다른 음역에 대한 언급이다. 이것은 다른 문서들에서 나오는 음역에 대한 언급에 대한 신빙성을 더해줄 뿐 아니라 1627년에 몬테베르디가 볼로냐 출신의 젊은 바세또를 평가할 때도 담겨져 있다.
1562년이라는 이른 시기에 까밀로 마페이가 알타 빌라 백작에게 자주 보낸 편지에서 그는 매우 넓은 음역을 노래할 수 있는 최고의 가수들에 대해서 얘기한다. 마페이는 말하기를 이런 특별한 능력은 목을 '부드럽고 아주 유연하게' 사용할 때 생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만약 목이 부드럽다면 순백하고 아주 다양한 유연한 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목을 거칠게 쓴다면 필요에 따른 유연성을 줄 수가 없고 경직되고 딱딱한 소리를 낼 것이다. 목이 부드럽다면 듣기좋게 유순한 소리가 나며 여러 음성(혹은 음)들을 채워주고 친밀하게 해 줄 것이다. 베이스밖에 부를 수 없는 사람들이 많고 또한 소리가 잘 맞지 않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런사람들은 합창에서 한 파트를 부른다면 귀에 상당한 괴로움을 주게된다. 따라서 그들은 결국 노래하기 힘들어 지는 것이다. 반면 아주 편안하게 베이스와 테너 그리고 다른 음역들도 부른 사람들도 있는데 확 피워나게 부르기도 하고 살짝 부를 수도 있는데 이들은 저음, 중음, 고음역에서 패씨지를 잘 하며 듣기에 아주 아름답다.
마페이는 다성음악 콘소트에 대해 말하는 것이고 따라서 '최악의'연주에 대한 서술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표현은 다른 여러 자료들에서도 나타나는데 특히 어떤 베이스 가수들에 의한 성악스타일에 대한 언급으로 보여진다. 특히 빈첸쪼 쥬스티니아니에 의해 발탁된 가수들에서 그러하다. 그는 그가 젊은시절(대략 1575년경)에 마주쳤던 엄청난 음역(22음)을 가로지르며 노래하는 세명의 솔로 베이스들을 기술한다. 그들 중에는 앞에서 언급한 브란까쵸도 포함되어 있다. 비록 오늘날에 그런 음역을 가진 쏠로곡들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17세기의 초반까지 쥬스티니아니의 설명에 부합하게 보이는 출판의 예들이 있다.
예를 든다면, 귀족이었던 '오따비오 발레라'라는 가수에 관련되어 인쇄된 너댓개의 노래들 중 두 개가 로뇨니의 잘 알려진 디미누션에 관한 소고인 Selva di varii passaggi(1620)에 서문에 '오따비오 발레라와 엄청난 패씨지를 가진 그의 노래들' 이라고 언급되어있다. 이들 중에 Sfogava con le stelle 라는 한 곡은 베이스에서 테너 그리고 6번째 선에 소프라노 클렙이 붙어있는 음역까지의 특별한 패씨지가 들어있는데 마페이와 쥬스티니아니의 주장에 확신을 더해주는 것 같다.(그림2)
이와 비슷하게 쥴리오 캇치니의 저서 [신음악과 신작법 (1614년)]에 의해 출판된 두 개의 노래들은 '베이스음까지도 이동하는 테너'에 목적을 둔 것들이다. 또한 죠만니 도메니꼬 풀리아스키의 노래들도 있다. 쥬스티니아니에 의해 다시 한번 언급되는 이 가수는 피렌체에서 1620년에 다시 '세음역 즉 콘트랄토, 테너, 베이스'를 분명히 노래하였다. 그는 시스티네 예배당성가대의 테너로 고용되었다. 하지만 그는 또한 베이스 음역을 노래할 수도 있었다. 죠반니 프란체스코 아네리오가 풀리아스키의 노래들과 그 가수를 위한 자신의 작곡의 첫 판에서 그를 '음악의 보석'이라고 평했다. 여기서 아네리도는 '그의 우아한 음성을 위해 베이스와 테너스타일로 내가 작곡한 여러 모테트들'을 독자들은 보게될 것이라고 말한다. 흥미롭게도 쥬스티니아니는 다른 두명의 '테너들'-즉 쥴리오 캇치니와 프란체스코 라지-과 동시에 풀리아스키를 언급한다. 이 테너들은 모두 '넓은 음역의 베이스와 테너를 불렀다.
이 증거를 간략히 요약하자면 이전시대와 비교해서 경이롭게도 엄청난 음역 특히 '베이스 테너 그리고 알토' 라던가 '저음, 중음, 고음' 을 건너지르며 부를 수 있었던 대가의 남성가수 소그룹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근대에는 '기적같은 존재'로서 그 가치가 언급된다. 우리가 쥬스티니아니와 그와 비슷한 가창의 여러 출판된 음악의 예들을 이러한 맥락에서 정확하게 해석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최근에 개리 톰린슨이 경고했듯이 우리는 그 일화들 후면에 놓여있는 개념들로부터 우리의 거리를 인지하지 못한 채, 너무나 문자적으로만 16세기의 문서들을 읽는 경향이 있지 않나 의문을 던져봐야 한다. 쥬스티니아니의 '강연록'은 인문주의적 원칙에 음악의 프랙티스를 연관시키는 문서이다. 따라서 작가들이나 음악가들이 '저음, 중음, 고음' 음역들에서의 가창을 긍정적으로 이야기할 때 그것들은 플라톤의 [공화국] 에서 유래하는 사상을 반영하고 있으며 적절한 성악 표현은 세 음역 모두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 죠반니 바르디와 같은 작가에 의해서 근본적인 수사학적인 해안에 직접적인 비유로 집성되게 된다. 몬테베르디 자신이 Madrigali guerrieri, et amorosi(1638)의 서문에서 한 진술은 아마도 가장 깔끔한 예이다.
최고의 철학가들이 주창했듯이, 우리의 목소리의 본질은 고음과 저음 그리고 중음역을 갖는 것이다.
비록 마페이의 편지가 성악테크닉에 관한 '과학적' 토론으로 명백히 채워져 있다고는 하나 고전적인 선례들에관한 무수한 언급들을 꿰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종종 아리스토텔레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따라서 '단지 베이스만을 부르는 가수'들에 대해 전 성역을 연습하는 가수들을 높이 평가할 때, 그것은 '표현력있는' 가창과 엄격한 대위법 사이의 변증법적인 정황에서 이루어진다. 이와 유사하게 쥬스티니아니는 당시대 연주프랙티스의 '증거'를 '새로운' 음악문화의 이상과 연관시켜서 취급한다.(직접적이진 않지만) 그가 '22음' 의 음역을 노래하는 가수들을 언급할 때 이것은 과학적인 증거의 일환(마치 팔란트띠가 오디션에서 플룻을 사용했듯이)이 되거나 혹은 전음계에는 22음이 있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들은 모든 음악을 부를 수 있으며 성악 능력의 근대적 완전함을 입증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톰린슨은 우리에게 히브리어 알파벳 또한 22자가 있음을 명심하라고 곧바로 지적했을 것이다.
그러한 모호성들은 윤곽이 뚜렷한 텍스트 즉 기보된 음악 자체에서도 발생한다. 최근에 팀 카터가 지적했듯이 17세기의 출판된 모노디들은 정확한 사본의 청사진이라기보다는 실제 연주의 이상을 대변하는 아이콘들로 해석되질 수 있다. 다른말로 하자면 인쇄된 성악은 정확한 기록이라기보다는 성악연주의 '묘사' 라던가 '표현'으로써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창에 관한 17세기 초반의 텍스트 해석의 이러한 접근은 이 몬테베르디의 편지들에 나오는 것보다 더 넓은 패씨지를 줄 수 있다. 그가 두 바리톤의 성악능력을 스트리쬬에게 기술하기 위해 특정 단어나 구들을 사용할 때, 몬테베르디는 그자신과 스트리쬬가 공유한 수많은 시간동안의 친밀함을 통하여 갖게된 '가창'의 이상에 그 바리톤들이 엄마나 비교되는지를 평가하는 어떤 의미의 채용공식을 의도한 것인 셈이다. 볼로냐출신의 가수의 음역에 대해 몬테베르디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이러한 정황에서 읽어나가야 한다고 나는 제안한다.
나는 그가 교회에서 좋은 미묘한 스피드와 장식, 그리고 상당한 트릴을 가지고서 모텟을 부르는 것을 들었다. 목소리는 매우 훌륭했으나 특별히 깊지는 않았다. ; 그는 가사 아티큘레이션을 아주 잘하며 그 목소리는 편안하게 테너성부까지 이르며 매우 안정감있게 노래한다.
여기서 몬테베르디는 테너와 베이스 모두를 부를 수 있었던 또다른 재원을 쥬스티니아니의 판테온의 후보로서 설명하고 있는 것인가? 단지 천재만이 겨우 지원할 수 있을만큼 1627년까지의 요구되는 가창능역의 수준이 그리도 높았던 이야기인가? 아니면 내 생각대로 그 젊은이의 목소리가 잘 갖주어져있고 잘 훈련받았다는 것을 단지 언급하는 것인가?
몬테베르디는 여기에서 소위 '흉성'과 '두성'사이의 연결구가 잘 해결되었다는 것을 단지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쓰인 '테너'라는 것은 100년 후에 또스띠가 부른 '두성'의 의미와 같다. 이 시기(실제로 19세기의 초반까지만해도)의 남성 가수들은 요즈음의 '가창기술' 처럼의 위아래 소리를 가로지르려 노력하기 보다는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두 개의 분리된 성구를 사용했다. 따라서 훈련에서 정말 중요한 점은 그 두 음역들 사이를 최대한 부드럽게 빠싸찌오하는 것이었다. 볼로냐 출신의 그 베이스는 이것을 아주 수월하게 했을 것이다.
이것은 현시대의 성악 테크닉에 분명한 암시를 내포하고 있다. 최근 수년동안 17세기 오페라들의 많은 연주가 드라마틱하게 성장해왔고 몬테베르디의 것도 그러하다. 동시에 사실주의 성악발성에 계속하여 매달린 경향이 명백하다. 특히나 남성가수들에게서 그러한데 흉성구를 두성구에 자연히 놓여있는 음표의 부분까지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이다. 완전 다른 두 개의 음역에 기반을 두었던 테크닉에 비해서 이런 밀어부치는 방식이 더욱 '흥분되고' '압도적인' 것이라는 문제성있는 미학적 배경에 근거한 것이다.
당시의 용어들이 약간의 혼동의 여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가수들이나 교사들이 바로크창법에 대해 이용할 만한 정보를 적용하기가 난해하다는 것은 당연하다. 예를 들면 몬테베르디가 가슴의 소리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음성구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상식적으로 볼 때 성악라인을 지지하는 힘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젊은 베이스의 명백히 터무니없는 금전적 요구를 한다는 것과 더욱이 그런 요구가 만투아에서는 먹혀들어갔음을 알았을 때 몬테베르디는 그 가수의 그술적인 결함을 스트리쬬에게 열거하기 시작한다. 다시 그는 옛 이론가들의 언어를 상기시키는 단어들을 사용하며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유용한 기술적 정보를 뽑아내려한다면 그 구절은 이런 관점으로 읽혀져야 한다.
그리고 사실 그 돈을 준다는 것은 그의 재능을 너무 높게 쳐주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 가수가 비록 안정되게 부른다고는 하지만 어딘가 멜랑콜리하게 노래하며 흉성을 제대로 쓰지 못하기 때문에 고르쟈가 좋지 않고 거칠고 딱딱하며 공격적인 것이된다. 흉성이 제대로 되지 않을때, 고르쟈는 어눌하게 되며 계속 질질끄는 모음처럼된다. 하지만 그 두가지 작업이 적절히 이루어진다면 고르쟈를 부드럽고 표현력있게 해주며 또한 이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빠른 장식음을 위한 '목구멍의 아티큘레이션'의 사용은 16세기와 17세기의 성악테크닉의 근본적인 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 그런 장식을 위한 고르쟈(때로는 복수형태로 고르지에)라는 단어는 고르가나 혹은 골라(gola. 목)로부터 자연적으로 발전된 말이며 '목구멍'을 의미한다. 나는 이 '골라의 소리' 라는 것이 고음역(혹은 스티븐이 번역한 바에 따르면 '중음역')을 의미한다는 보지 않는다. 오히려 '고르지에가 아티큘레이트되는 장소'라고 본다. 따라서 이 경우에 '가슴의 소리' 라는 것은 저음역(토시가 사용했듯이)을 명시한다고도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음성이 생겨나고 지지되는 곳' 이라고 본다. 엘렌 해리스가 지적했듯이 우리는 아티큘레이션을 해주는 기관으로서 목구멍과 가슴(혹은 횡경막)의 차이, 흉성구와 두성구간의 구분을 명확히 해야만한다.
따라서 음성이 목에서만 아티큘레이션되고 가슴의 지지가 없다거나, 다른 표현을 빌자면 호흡의 이어지는 흐름이 없이 목의 아티큘레이션된 음들이 너무 동 떨어졌다든지 거칠다던지 호흡과 연결이 잘 안됐다는 것을 몬테베르디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만약 목소리의 흐름이 너무 부드럽기만하고 목에서 충분히 (혹은 전혀) 아티큘레이션되지 않는다면 구분된 음표들간에 구분이 없게 되어 버린다. 음의 올바른 발성은 목에서 아티큘레이트되어지면서 가슴으로부터의 호흡에 의해 계속적인 톤을 유지하는 것이다. (혹은 오늘날의 표현을 빌자면 횡경막으로 지지해주는 것이다.)
그러한 균형잡인 발성이 짜꼬니에 의해서 이미 분명하게 설명되어져왔고 몬테베르디도 이미 이 자료를 알았을 것이다.
이 기술-가슴과 목구멍-을 연습코자 하는 자에게는 두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적절히 끝까지 이루어질 수 있는 충분한 양과 많은 음표를 할 수 있는 가슴. 둘째는 그것들을 쉽게 콘트롤하기위한 목구멍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슴이나 옆구리의 지지가 없기 때문에 넷이나 여섯음표밖에 가지 못하여 음악을 망치거나 호흡이 중간밖에 못가서 끝나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끝까지 호흡이 안되면 계속 숨을 쉬게 되며 적절한 음에서 제 박에 나오지를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이들은 목구멍의 결점으로 인하여 음표를 힘있게 구분해 내지 못하고 말하자면 고르지에로 인지될만큼 충분하게 음표를 내어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짜꼬니는 여기서 '가슴' 이라는 말을 음역이라던가 ' 횡경막의 아티큘레이션-목의 아티큘레이션에 반대되는 의미로서 오늘날 성악테크닉 토론에서 인용되는-' 의 의미보다는 호흡의 지탱으로 의도하고 있다. 어떠한 토론이나 혹은 더욱 중요한 의미에서 성악아티큘레이션의 프랙티스도 고르지에가 목구멍안에서의 신속한 성문의 개폐에 의해서 아티큘레이트 된다는 것의 인식에서 출발해야한다. '횡경막의 아티큘이션'을 가지고서 진정한 고르지에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소리는 아티큘레이트되어야 할 뿐 아니라 만들어지고 구성되어져야한다. 가수들의 주된 문제는(내가 학생들을 계속 거듭하여 마주친 바) 목에서 아티큘레이트된 음성을 다른 분리된 아티큘레이션과 어떻게 콘트롤하고 합하게하고 그것을 통하여 보칼라인을 어떻게 유지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바로 이 문제점에 몬테베르디와 짜꼬니가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짜꼬니와 동시대의 저작(몬테베르디의 편지들과도 동시대)에서 로뇨니라는 사람은 무어인들이나 에디오피아인들의 발성에서 호흡의 지지없는 아티큘레이션을 종종 비교하면서 그 점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 무어인들의 스타일로 고르지에를 하는 어떤 가수들이 있는데 모두를 불쾌하게 작게 음을 치는 식으로 아 -아 -아 하고 노래하여 마치 그들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사람들은 내가 베니스에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했을 때 마주친 에디오피아사람이나 무어인들의 발성을 닮았다. 거기선 사람들이 종교의식때 이렇게 노래한다고들 한다. 그래서 마치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입안에 이빨이 얼마나 있는지를 보여주려하는 식이다. 여기서 볼 때 고르지에는 가슴으로부터 나와야하며 목에서부터 생겨나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웠다.
이것은 얼핏보기엔 나의 주장에 모순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고르지에가 목에서 아티큘레이트되는 장식임을 인정한다면 로뇨니가 소리라는 것이 '가슴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고 말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소리는 가슴으로부터 힘을 받고 유지되어야함을 뜻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호흡의 지탱없는 목구멍의 아티큘레이션은 정말 염소가 매애거리는 것처럼 '아-아-아-아'하고 소리난다.
로뇨니는 코넷악기 주자들은 텅깅을 할 때 성악의 고르쟈 아티큐레이션을 모방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한다. 그의 이러한 주창은 다시 한번 지나치게 칼날처럼 분리된 것과 아티큘레션이 잘 되지 않은 발성들 사이의 균형을 내포하고 있다.
코넷은 어느것보다도 사람의 음성과 공통점을 많이 가지고 있는 악기인다.... 코넷은 사람의 목소리를 모방하여 [맛갈나게] 그리고 우아하게 세련된 스타일로 연주되어져야하며 그 악기혀는 지나치게 늘어터진다거나 지나치게 박자를 쳐서도 안되며 고르쟈와 유사하게 해야하며 이것이 악기를 잘 활용하는 것이다.
두 개의 극단적인 것들간의 균형에 대한 이 강조는 분명히 몬테베르디가 주장하는 스타일을 상기시킨다. 그의 아티큘레시션의 테크닉의 토론에서 몬테베르디는 교훈적인 담화형태를 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때는 몬테베르디는 토론중인 가수와의 담화를 뛰어넘어 일반적인 것으로 대화 범위를 넓히기도 한다. 이 어조의 체인지는 그가 추천약속을 취소한 뒤로 가창에 대한 그의 권위를 다시 세우기위해 사용되었던 것 같다. 따라서 그 자신의 경험있는 판단의 문제에 간략하게 끌어들이는 것이다.
특정 테크닉의 정보는 아니지만, 다른 가창에 관한 글은 훌륭한 노래를 듣고 황홀경에 빠진 경험을 묘사하는 여러 다양한 수준의 문예의 청자들에 의한 시도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문학장르는 따소와 과리니의 시詩들로부터 부상된 형태로, 편지들이라던가 여행저널같은 것들도 있는데 노렌쪼 비안꼬니에 의해 '신성한 컬트(cult of ineffability)'라는 칭호을 받아왔다. 전체를 공부하는 것도 가치가 있으나 목구멍의 아티큘레이션의 가슴으로부터의 지지에 대한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작은 한 짜투리만을 다루어보기로 하자.
베니스에서 치로 안셀모(Ciro Anselmo)에 의해 작성되고 1657년에 그의 서간문집에 출판된 한 편지는 두명의 여가수들의 비교로 구성되어져 있다. 그들은 마리에떼 레도이와 마리테떼 떼르짜이다. 레도이를 위한 서문에서 안셀모는 당대의 가창테크닉 용어의 해박한 지식을 진술하는데 그런 진술들에선 드문 현상이다. 그는 한오라기의 성악적 소양을 열거하면서 더 나은 연주의 가능성을 묻는다.
나는 보편적인 감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누군가 더욱 매력적으로 노래할 수 있다면, 누군가 더 명확하게 단어를 발음해줄 수 있다면, 누군가 고르지에에 더욱 많은 가슴을 쓸 수 있다면, 디미뉴션을 더 유연하게 하고, 트릴에서 더욱 달콤하게 하고, 빠른진행을 더 할 수 있고, 상행스케일을 더욱 확실히 할 수 있고 까덴짜를 더욱 정확히 할 수 있다면......
그 젊은 볼로냐출신의 베이스가 만투아에서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선 더 찾기 힘들다. 또한 데니스 스티븐스가 그에게 주창한 정체성을 확증할 길도 없다. 하지만 그의 가창에 대한 몬테베르디의 불쾌한 모욕에도 불구하고 황제(결국 엘레오노라 곤짜가와 결혼한 황제)로부터의 추천서를 받은 것을 본다면 그 베이스의 경력이 괜찮은 편이었을 것이다. 하여간 그가 몬테베르디로 하여금 가창 테크닉에 관한 그런 상세한 토론을 하게 만들었고 결국 그 자신의 작품에서 뿐 아니라 그 당시의 모든 성악의 연주프랙티스를 조영해 준 것은 신의 도움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로 하여금 잊혀진 음성에 대한 의문의 해결로서 그동안 지나치게 단순하게 믿어왔던 요소들에서 방향을 돌리게 해주었다. 또한 이러한 텍스트들을 해석하여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음성으로 불러볼 수 있게 하는데 언제나 일조하여준다. 비록 그 텍스트들이 단지 문자이거나 혹은 인쇄된 기보의 형태이건 .. '노래한다는 것' 은 16세기와 17세기 개념에서는 기술적인 차원 이상의 것이었다. 따라서 글이라던가 음표들만으로 결코 충분히 설명되어질 수 없다. 결국 마르꼬 다 갈리아노가 야코포 페리(바로크 초기의 작곡가, 가수-역자 보충)의 노래하는 것을 설명하면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그를 칭찬하는데 있어 결코 인색할 수 없다. 그에게 끝없는 칭송을 하지 않을 자 없고, 어느 음악 애호가건 그의 오르페오의 노래를 갖고 있지 않은자 없다.(바꿔 말하면 모두 페리의 노래책을 갖고 있었다는 뜻). 페리 자신에 의해서 불려지는 아리아의 달콤함이나 그 능력은 어느 누구도 완전히 표현할 수 없다. 그는 엄청난 우아함과 세련됨을 가사의 감정에 부여하기 때문에 우리는 가수가 바라는 데로 울고 웃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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