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F. 케네디:
미국을 변화시킨 대통령의 삶과 유산
존 F. 케네디:
미국을 변화시킨 대통령의 삶과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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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F. 케네디(JFK)는 미국의 제35대 대통령이었다.
그의 정치 경력이 널리 알려진 것은 사실이지만,
정치인을 넘어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것이
미국인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게 한 요인이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케네디는 기자가 되기를 꿈꿨으나,
학업을 마친 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진로가 중단됐다.
전쟁 영웅으로 돌아온 그는 정치에 입문했다.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이었으며,
최초의 로마 가톨릭 신자 대통령이었다.
그의 삶은 예측할 수 없는 전개로 가득했고,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전 세계가 충격에 빠졌다.
사진을 통해 존 F.케네디의 놀라운 삶과 그가 남긴
잊을 수 없는 유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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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피츠제럴드 케네디는 1917년 5월 29일
매사추세츠 브루클라인에서 태어났다.
아홉 남매 중 둘째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사교계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사업가이자 정치인이었다.
지속적인 질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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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존은 가족과 친구들에게
애칭으로 '잭'이라 불렸다.
그는 지속적인 질병에 시달렸으며,
홍역과 백일해, 소화 장애, 그리고
성홍열까지 앓으며 자주 아팠다.
계속된 건강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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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건강 문제는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됐다.
케네디는 대학 시절 미식축구를 하다 입은
부상으로 척추 디스크 파열을 겪었으며,
이후 지속적인 허리 통증에 시달렸다.
허리 수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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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척추 문제는 심각했다. 그는 생애 동안
네 차례의 허리 수술을 받았으며, 그 과정에서
뼈 감염, 농양 등 여러 고통스러운 합병증을 겪었다.
허리 보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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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항상 허리 보호대를 착용해야 했다.
실제로 일부에서는 그의 허리 보호대가
암살 시도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치명적인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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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총탄이 케네디를 맞았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허리 보호대 때문에
몸을 숙이거나 넘어져
두 번째 총탄을 피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그대로 서 있었고,
저격범의 조준선 안에 머물렀다.
결국 케네디는 머리에 총을 맞았고,
이는 그의 최후를 결정짓는 순간이었다.
만성적인 소화 장애와 애디슨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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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는 허리 문제뿐만 아니라
만성적인 소화 장애와 애디슨병을 앓았다.
애디슨병은 부신 기능 부전으로 인해
발생하는 질환이다. 이 병을 앓는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임종 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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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소화 장애부터 저혈압까지,
이 질환은 철저한 관리가 필요하다.
케네디는 한때 상태가 악화되어
가톨릭 신부가 그의 임종 예식을
집전할 정도였다.
미국 대통령이 되고 싶었던 그의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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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는 1936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학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가톨릭 신자로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
되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은 그의 형 조였다.
케네디는 특별히 우수한 학생은 아니었지만,
역사에 큰 관심을 보였다.
대사로 임명된 케네디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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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케네디의 아버지가 미국의 주영국 대사로 임명됐다.
그는 여름 동안 영국을 방문하며 정치와 정부 업무에
특히 관심을 갖게 됐다.
미국 해군에 입대한 조와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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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한 후 조와 존은 모두 미국 해군에 입대했다.
존은 중위로 임관되어 남태평양으로 파견됐으며,
어뢰 순찰정을 지휘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12명의 승무원과 함께 일본군의
보급 작전을 방해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일본 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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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8월 2일, 일본 군함이 그들의 보트를 들이받았다.
배는 두 동강 났고, 케네디의 승무원 두 명이 즉사했다.
나머지 승무원들은 목숨을 지키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었다.
전쟁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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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는 살아남은 승무원들을 이끌고 작은 섬으로 향했다.
여섯 날 뒤, 섬 주민 두 명이 그들을 발견했다. 다음 날,
구조대가 도착해 그들을 구출했다. 케네디는 전쟁 영웅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지도력과 용기를 기려
해군 및 해병대 훈장이 수여됐다.
조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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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형 조는 1년 후 비행기가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
조의 죽음은 존의 삶의 방향을 바꿨다.
기자가 되려던 꿈은 정치에 헌신하는 길로 이어졌다.
하원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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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존은 매사추세츠주 제11선거구에서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그는 당선되어
하원의원으로 세 차례 임기를 수행했다.
1952년에는 상원의원이 됐다.
상원의원과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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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의원이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케네디는
작가 재클린 부비에와 결혼했다. 결혼 후
그는 극심한 허리 통증을 겪기 시작했고,
결국 앞서 언급한 여러 차례의 수술을 받게 됐다.
전기 부문 퓰리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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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는 허리 수술 회복 중에 '용기 있는 인물들'을 집필했다.
1957년, 이 책으로 그는 전기 부문 퓰리처상을 받았다.
대통령으로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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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는 1960년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그는 공화당 후보 리처드 M. 닉슨을 근소한 차이로 이겼다.
1960년 11월 8일, 케네디는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됐으며,
미국 역사상 최연소 선출 대통령이었다.
단결 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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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 연설에서 케네디는 국민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는 "인류의 공통된 적"에 맞서
싸우기 위해 단결할 것을 촉구했다.
폭정, 빈곤, 질병, 그리고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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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가 언급한 공통된 적은 "폭정, 빈곤, 질병,
그리고 전쟁 그 자체"였다. 이는 그가
자유 세계의 최연소 지도자로서뿐만 아니라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문화의 중심지가 된 백악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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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 부부는 백악관을 문화 중심지로 만들었다.
작가, 예술가, 운동선수, 배우, 과학자 등
미국 사회의 다양한 인사들이 초청되어
집무실에서 국가의 다양성을 반영했다.
냉전과 불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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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싸움은
케네디가 물려받은 과제였다.
이로 인해 핵전쟁에 대한 불안이
대통령에게 엄습했다. 케네디가
국가 지도자로서 처음 시행한 조치 중
하나는 평화봉사단 창설이었다.
평화 봉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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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로그램의 지속적인 유산은 젊은 미국인들이
도움이 필요한 곳에서 자원봉사를 통해
세계에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가는 길이다.
아폴로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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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는 우주 경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아폴로 계획을 시작했으며,
미국인을 달에 착륙시키기 위해
의회에 220억 달러의 예산을 요청했다.
인종 분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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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법원이 1954년 학교에서의 인종 분리를
금지하는 판결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지역구는 이를 따르기를 거부했다.
공공장소에서도 여전히 인종 분리가 만연했다
민권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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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권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케네디는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해야 했다
1963년, 그는 의회에 민권 법안을 제출했으며,
백인 미국인들에게 인종차별을 종식시킬 것을
공개적으로 호소했다.
텍사스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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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11월 21일, 케네디는
정치 연설을 하기 위해 남부 텍사스를 방문했다.
다음 날, 그는 차에서 환호하는 군중에게
손을 흔들었다. 갑자기 총성이 울렸다.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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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하비 오스왈드는 1973년 11월 22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했다.
그의 충격적인 죽음은 미국을 마비시켰다.
케네디의 사망 이후 많은 미국인들은
"JFK가 총에 맞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디에 있었나?"라는 질문을 주고받았다.
사진은 케네디 암살 사건에서 사용된 총탄 중 하나이다.
놀라운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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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의 짧은 생애는 총기 폭력으로 끝났지만,
여전히 시민들과 정치인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그의 헌신은
그의 유산과 기억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
출처
(PBS) (JFK Library)
(Constitution Center)
(GQ) (Swam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