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2일 연중 제17주간 수요일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44-46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4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45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46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보물의 가치는 하느님께서 정하십니다.
흔히 보물을 우리는 값이 무척 비싸거나 많은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하고 지금은 돈으로 바꿀 수 없지만 대단히 값이 커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는 것을 보물로 인정합니다. 또한 아주 귀해서 희귀성 때문에 귀하게 여기고 보물을 하늘과 같이 떠받들고 사람들은 보물을 소중하게 보관하고 값이 치솟기를 기대합니다. 우리도 공동체에서 가장 일을 잘하는 사람을 ‘보물 같은 사람’이라고도 말합니다.
옥석혼효(玉石混淆)라는 말은 '보물은 아주 흔한 돌과 같이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옳음과 그름이 같이 섞여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 주님은 하늘나라를 밭에 있는 보물을 발견한 사람을 비유로 들어주십니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그냥 자신의 호주머니에 보물을 슬그머니 넣는다면 그 사람은 절도죄에 해당하고 감옥에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적은 돈을 투자하여 엄청난 이익을 올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과연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보물이 있는 곳에 투자할 줄 알면 그것은 경영의 원칙입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현실만 보고 비아냥거립니다. 하늘나라가 바로 '옥석혼효' 속에서 보물을 찾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충청도에 유명한 '자린고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얼마나 구두쇠였는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는 집에서도 돈에 대하여 아주 엄격하여서 밥 한 술 먹고 천정에 굴비 그림을 한번 올려다보라고 하였지요. 하지만 큰 아들이 밥을 뜬 다음에 두 번 쳐다봤더니 “물 켤라!” 했다는 말은 유명합니다. 어느 날 그에게 사람이 찾아와서 돈 버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자린고비는 “맨입으로?” 안된다고 해서 거금 50냥을 받고 돈 버는 법을 가르쳤답니다.
자린고비는 그 사람을 데리고 산위로 올라가 절벽 쪽으로 뻗어진 소나무 가지에 올라가 두 손으로 철봉을 잡은 것처럼 잡고 있으라고 하더니 나머지 한 손마저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가 살려고 버둥거리자 그 손마저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더욱 화가 나서 욕을 하면서 소리를 질렀지요. “야! 이 미친놈아 내가 돈까지 내고 돈 버는 방법을 배우러 왔지, 죽으려고 온줄 아느냐?” 그러자 자린고비는 “그래, 네게 돈이 들어오면 그렇게 꼭 잡고 놓지 말라, 그 것이 내가 가르쳐 주는 돈 버는 법이다.” 자린고비는 그렇게 부자가 되었고, 구두쇠라고 욕을 많이 먹었지만 그 고을에 큰 흉년이 들자 자신의 창고를 열어 모두를 먹여 살렸다고 합니다. 우리도 하늘나라를 그렇게 찾아야하고 찾았으면 절대로 놓치지 말고 모든 재화와 생명을 다하여 투자해야 하는 것입니다.
'보화 용지유진 충효 향지무궁'(寶貨 用之有盡 忠孝 享之無窮)이란 말이 명심보감이 있지요. 이는 ‘보물과 재화를 쓰면 다 닳아 없어지지만 충성과 효도는 아무리 누려도 다함이 없다.’라는 말로 충효는 곧 하느님나라에 대한 희망과 동경이며, 효성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합니다. 정말로 우리가 투자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 나라에 모든 것을 투자하고 있습니까? 주일학교에 아이들을 정성껏 보내고 자신의 은총을 지키기 위해서 살고 있나요? 그러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며 살고 있습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투자인지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참된 보물을 모르고 보물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기 때문은 아닌가요?
우리가 하는 농담 중에 바티칸에 있는 보물은 값이 얼마나 될 것인지는 하느님도 모르실 것이고 합니다. 농담이지만 보물을 금액으로 계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다만 사람들이 보물을 감정하지만 그것은 추정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 보물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감정되고 가격이 결정되기 때문이죠. 우리는 봉급이나 직책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사람들의 가격을 결정합니다만 합리적인 평가 방법이 아닐 것입니다. 사람을 감정하고 결정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 밖에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보물을 하느님의 기준으로 보고 판단해야 하는데 우리의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우리가 잘못 투자하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세상에서도 투자할 때 신중하게 따져보고, 경중(輕重)과 선후(先後)를 따져보고, 모든 정보를 총 동원하고도 의심이 가면, 회의를 하고, 자문도 받아서 결정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느님 나라의 투자에 우리의 전 재산과 능력과 생명까지도 전부 투자할 가치가 있음을 절실하게 느끼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좋은 투자를 하고 우리는 전심(全心)으로 사랑과 진심(眞心)을 적극 투자하여야 할 것입니다.
<모세의 빛나는 얼굴을 보고 그들은 그에게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34,29-35
29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내려왔다. 산에서 내려올 때 모세의 손에는 증언판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모세는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어 자기 얼굴의 살갗이 빛나게 되었으나,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30 아론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모세를 보니, 그 얼굴의 살갗이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31 모세가 그들을 불렀다. 아론과 공동체의 모든 수장들이 그에게 나아오자, 모세가 그들에게 이야기하였다.
32 그런 다음에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그에게 가까이 왔다. 모세는 주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였다.
33 모세는 그들과 이야기를 다 하고 자기 얼굴을 너울로 가렸다.
34 모세는 주님과 함께 이야기하러 그분 앞으로 들어갈 때는 너울을 벗고, 나올 때까지 쓰지 않았다.
나와서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였다.
35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얼굴의 살갗이 빛나는 것을 보게 되므로,
모세는 주님과 함께 이야기하러 들어갈 때까지는, 자기 얼굴을 다시 너울로 가리곤 하였다.
축일8월 2일 성 에우세비오 (Eusebius)
신분 : 주교, 순교자
활동 지역 : 베르첼리(Vercelli)
활동 연도 : +371년
같은 이름 :에우세비오스, 에우세비우스
성 에우세비우스(또는 에우세비오)는 3세기 말엽 이탈리아의 사르데냐(Sardegna)섬에서 신앙심 깊은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체포되어 재판을 위해 로마로 호송되던 중 사망했다고 한다. 그 후 성 에우세비우스는 어머니와 함께 로마로 이사 가서 살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당시 교황인 성 에우세비우스(8월 17일)에게 세례성사를 받으며, 어머니의 뜻대로 교황과 같은 세례명을 선택했다. 그리고 로마에서 교육받게 된 덕분에 훗날 교황이 된 리베리우스(Liberius, 352-366년)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주교인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5월 2일)를 알게 되었다. 로마에서 사제품을 받은 그는 340년 또는 345년에 교황 성 율리우스 1세(Julius I, 4월 12일)에게 주교품을 받고 베르첼리의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강론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널리 전파했고, 교구 내의 성직자 개혁 운동을 전개하며 모든 성직자가 기도 · 노동 · 연구 · 고행 등의 공동 규칙을 지키며 성직 생활과 수도 생활의 일치를 시도하길 원했다. 그래서 그 역시 일단의 성직자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12월 7일)는 그에 대해 주교 직분을 수행하면서도 수도 생활을 실천한 서방 교회의 첫 번째 주교였다고 기록했다.
그는 정통 교회와 교리를 철저히 지켜온 주교였다. 그는 아리우스 이단(Arianism)에 대한 강력한 반대 입장을 고수해 많은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352년 아를(Arles) 교회회의에서 정통 교리를 옹호하는 성 아타나시우스를 단죄하는 결의를 하자, 그는 리베리우스 교황의 명으로 아를에 있던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를 방문해 아리우스 이단과 가톨릭 정통 신앙 사이의 논쟁을 해결할 새로운 교회회의의 소집을 요구했다. 아리우스 이단의 지지자였던 황제는 그 기회에 서방에 아리우스주의를 확산시킬 목적으로 355년 밀라노(Milano) 교회회의의 소집을 받아들였고, 주교들에게 성 아타나시우스를 단죄하는 결의안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성 에우세비우스는 이에 강력히 반대했고, 그로 인해 황제에 의해 유배형을 받고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로 떠나야 했다. 너무도 심한 모욕과 고통을 당한 그는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나흘 동안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360년에 그는 스키토폴리스에서 다시 카파도키아(Cappadocia)로, 그다음에 이집트의 테베(Thebae, 나일강 중류에 있는 고대 이집트 신왕국시대의 수도로 오늘날의 룩소르 Luxor)로 유배지를 옮겨야 했다.
361년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가 죽고 배교자 율리아누스가 황제가 등극하면서, 유배된 모든 주교는 자신의 주교좌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이 내려졌다. 자유를 찾은 그는 362년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성 아타나시우스와 함께 새 교회회의를 소집했다. 그 회의에서는 니케아 신경을 복원하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육화의 신비를 부정하는 이단에 맞서며, 분열의 고통을 겪고 있는 안티오키아(Antiochia) 교회 문제 등에 대해 논의했다. 여기서 안티오키아 교회로 파견될 사절로 뽑힌 그는 331년 아리우스파에 의해 안티오키아의 주교로 선출된 멜레티우스(Meletius) 추종자들 사이의 불화를 조정하고자 했으나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하고 세월만 허비했다. 그래서 그는 안티오키아를 떠나 자신의 교구로 돌아오는 길에 일리리쿰(Illiricum) 지방의 여러 교회를 방문해 정통 교회를 옹호하고 아리우스 이단을 배격하는 운동을 꾸준히 전개했다. 363년, 비로소 베르첼리 주교좌로 돌아온 그는 여생을 성 힐라리우스(Hilarius, 1월 13일)와 함께 아리우스 이단에 물든 밀라노의 주교들에 반대해 정통 신앙을 옹호하는데 헌신하다가 371년 8월 1일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베르첼리 주교좌성당 도서관에 있는 고대 라틴어 복음서 사본은 보물처럼 간주되고 있는데, 이 사본은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의 불가타 사본보다 시기적으로 더 앞선 것이라 한다. 학자들은 성 에우세비우스의 손에 의하여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고, 이 사본을 “베르첼리의 사본”(Codex Vercellensis)이라 부른다. 그는 또한 “아타나시우스 신경”(Symbolum Athanasianum)의 저자 중 한 사람이다.
1969년까지 그의 축일은 주교품을 받은 날에서 비롯해 12월 15일 또는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의 뜻에 따라 12월 16일에 기념하면서 동시에 하늘나라로 떠난 8월 1일에도 경축해왔다. 로마 순교록은 8월 1일에 그에 대해 기록하며 주교이자 순교자로 명시하고 있다. 그가 비록 순교하지는 않았지만, 교회 전승 안에서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는 이유는 가톨릭의 정통 신앙을 지키다가 많은 수난을 겪었기 때문이다. 1969년 전례 개혁 이후 그의 축일은 현재 8월 2일에 기념하고 있다.
오늘 축일을 맞은 에우세비오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