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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國志 제113회
晉軍은 齊侯를 추격하여 450리를 진격하여 원루(袁婁) 땅에 하채하고, 원루성을 공격하였다. 제경공(齊頃公)은 당황하여 신하들을 소집해 계책을 물었다. 국좌(國佐)가 아뢰었다.
“우리가 기(紀)나라를 멸하고 얻은 시루와 옥경(玉磬)을 晉나라에 뇌물로 바치고 화평을 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魯나라와 衛나라에게서 빼앗은 땅도 돌려주면 될 것입니다.”
[‘옥경(玉磬)’은 옥으로 만든 경쇠이다.]
경공이 말했다.
“경의 말대로 된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저들이 응하지 않으면 다시 싸울 수밖에 없소.”
국좌는 시루와 옥경을 가지고 晉軍에게 가서, 먼저 한궐(韓厥)을 만나 齊侯의 뜻을 전했다. 한궐이 말했다.
“魯나라와 衛나라가 齊나라의 침략을 호소하므로, 과군께서는 그들을 동정하여 돕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과군이 齊나라에 무슨 원한이 있겠습니까?”
국좌가 말했다.
“제가 과군께 말씀드려 魯와 衛의 땅을 돌려주면 안 되겠습니까?”
“중군에 원수가 계시니, 제가 감히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한궐은 국좌를 인도하여 극극(郤克)을 만나러 갔다.
극극은 굉장히 화를 내며 기다리고 있었다. 국좌가 아주 공손한 태도로 화평을 청하자, 극극이 말했다.
“너희 나라는 조만간에 망할 텐데, 그런 간교한 말로 우리의 공격을 늦추려 하느냐! 너희들이 진심으로 화평을 청한다면, 두 가지 조건이 있다.”
국좌가 물었다.
“무엇입니까?”
“첫째 소태후(蕭太后)를 우리 晉나라에 인질로 보낼 것이며, 둘째 齊나라 안의 모든 밭두둑을 동서 방향으로 고쳐 놓아라. 그래서 만일 齊나라가 훗날 맹약을 어길 시에는, 우리는 인질을 죽이고 서에서 동으로 곧장 병거를 몰아 쳐들어갈 것이다.”
국좌는 크게 노하여 말했다.
“원수의 요구는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소태후는 과군의 모친이십니다. 齊와 晉이 필적(匹敵)하니, 말하자면 晉侯의 모친과 같습니다. 晉에는 국모를 인질로 보내는 법도 있습니까? 그리고 밭두둑이 종횡으로 되어 있는 것은 모두 자연스런 지세(地勢)에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晉나라가 침공하기 쉽게 바꾸어 놓는다는 것은, 곧 멸망을 자초하는 일이 아닙니까? 원수께서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세우는 것은, 화평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필적(匹敵)’은 능력이나 세력이 서로 어슷비슷함을 말한다.]
“그래, 화평을 하지 않으면, 너희들이 우리를 어쩌겠다는 것이냐?”
“원수께서는 齊나라를 너무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齊나라가 비록 작은 나라라 하나, 과군은 천승을 거느리고 여러 신하들도 수백 승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이제 우연히 한 번 패하기는 했지만, 아직 완전히 패망한 것은 아닙니다. 원수께서 화평을 거절하신다면, 잔병(殘兵)을 모아 성 아래에서 한 번 결전을 해보십시다. 한 번 싸워 이기지 못하면 두 번 싸우고, 두 번 싸워 이기지 못하면 세 번 싸울 것입니다. 만약 세 번 다 패한다면 齊나라는 몽땅 晉나라의 소유가 될 것이니, 구태여 국모를 인질로 보내고 밭두둑을 동서로 만들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국좌는 시루와 옥경을 내버려 둔 채, 한 번 읍하더니 총총히 떠나갔다.
계손행보(季孫行父)와 손량부(孫良夫)는 장막 뒤에서 듣고 있다가, 극극에게 가서 말했다.
“齊나라가 우리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되면 죽을 각오로 덤벼들 것입니다. ‘병무상승(兵無常勝)’이라 했습니다. 차라리 저들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병무상승(兵無常勝)’은 전쟁은 항상 승리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극극이 말했다.
“齊나라 사신이 이미 가 버렸으니 어떡하겠소?”
계손행보가 말했다.
“뒤쫓아 가면 다시 불러올 수 있습니다.”
극극은 빠른 병거를 보내 국좌를 뒤쫓게 하였다. 晉나라 군사가 10리를 뒤쫓아 가서 국좌를 강제로 다시 晉軍 영채로 데려왔다. 극극은 계손행보와 손량부를 국좌와 상견하게 하고, 국좌에게 말했다.
“내가 이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과군께 죄를 짓게 되기 때문에, 감히 경솔하게 승낙할 수 없었소. 그런데 지금 魯·衛의 대부들께서 함께 청하니, 내가 어기지 못하겠소. 그대의 제의를 수락하겠소.”
국좌가 말했다.
“원수께서 폐읍의 청을 들어주시겠다면, 신의로서 동맹을 맺어야 합니다. 齊는 晉에 조공을 바칠 것이며, 魯와 衛에서 빼앗은 땅을 반환하겠습니다. 晉은 회군하여 齊나라 땅을 추호도 침범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십시오. 각자 맹세문을 쓰도록 하십시다.”
극극은 삽혈하고 맹세한 다음, 봉축보(逢丑父)를 석방하여 齊나라로 돌려보냈다. 제경공은 봉축보를 상경으로 임명하였다. 晉·魯·衛·曹 4국 군대는 모두 본국으로 돌아갔다.
훗날 송(宋)나라 유자(儒者)들이 이 맹약을 이렇게 논했다.
“극극은 승전을 믿고 교만하여 공손하지 못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국좌의 분노를 촉발하였다. 비록 화평을 이루고 돌아갔지만, 齊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에는 부족하였다.”
晉軍이 귀국하여 승전을 보고하자, 진경공(晉景公)은 공을 표창하여 극극을 비롯한 장수들에게 봉지를 하사하고 신삼군(新三軍)을 편성하였다. 한궐을 신중군 원수, 조괄(趙括)을 신중군 부장, 공삭(鞏朔)을 신상군 원수, 한천(韓穿)을 신상군 부장, 순추(荀騅)를 신하군 원수, 조전(趙旃)을 신하군 부장으로 임명하고, 그들의 작위를 모두 경(卿)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晉은 다시 6군(六軍)을 두어 패업을 부흥하고자 하였다.
[제83회에, 진문공(晉文公)이 3군에 3행을 더해 6군을 편성했다가, 제87회에 3행을 2군으로 개편하여 5군이 되었으며, 제93회에 진문공이 훙거하고 진양공(晉襄公)이 즉위하자 다시 3군 체제로 돌아갔었다. 제112회에, 제나라와 싸우러 갔을 때의 기존 3군은 극극이 중군 원수, 사섭이 상군 원수, 난서가 하군 원수였다. 제107회에,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초군과 싸우러 갔을 때, 한궐은 중군 사마, 조괄은 중군 대부, 공삭과 한천은 상군 대부, 조전은 부장(部將)이었다. 순추는 처음 등장한다.]
사구(司寇) 도안가(屠岸賈)는 조씨(趙氏)가 다시 강성해지자, 더욱 시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날마다 조씨 가문의 잘못을 찾아내 경공에게 참소했으며, 난씨(欒氏)·극씨(郤氏) 가문과 친교를 맺어 자신을 위한 외원(外援)으로 삼았다.
[제100회에, 도안가는 서예를 시켜 조돈을 암살하려고 하다가 실패하였고, 제101회에 조천이 도원에서 진영공을 시해한 다음 도안가를 죽이려 하자 조돈이 만류하여 살아남았다. 제111회에, 도안가는 진경공에게 아첨하여 총애를 얻어 사구가 되었으며, 조씨 가문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난씨·극씨 가문과 친교를 맺고 긴밀히 왕래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한편, 제경공(齊頃公)은 晉軍에 패전한 것을 치욕으로 여기고, 전사한 장병들을 조문하고 백성을 구휼하면서 정사에 힘써 晉나라에 복수하고자 하였다.
晉나라 君臣은 齊나라가 쳐들어옴으로써 다시 패업을 잃을까 염려하여, 齊나라가 晉나라를 공손하게 잘 섬기고 있다는 핑계를 대면서 각국에게 齊나라로부터 돌려받은 땅을 다시 齊나라에 돌려주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제후들은 晉나라가 신의가 없다고 생각하여 점점 이탈하게 되었다.
[제111회에, 晉나라 극극, 노나라 계손행보, 위나라 손량부, 조나라 공자 수가 제나라에서 모욕을 당한 뒤, 계손행보가 초나라에 병력을 빌리고자 했을 때, 초장왕이 병으로 훙거하고 그 아들 초공왕이 즉위했었다. 다음에 나오는 하희 얘기는 초장왕이 살아있을 때의 일이다.]
한편, 陳나라 하희(夏姬)은 초나라 연윤(連尹) 양로(襄老)에게 개가했는데, 1년이 채 못 되어 양로가 필성(邲城)으로 출전하였다. 양로의 아들 흑요(黑要)는 하희와 증음(烝淫)했으며, 양로가 전사했을 때 흑요는 하희의 미색에 빠져 부친의 시신을 찾으러 가지도 않았다. 楚나라 사람들의 의논이 분분하자, 하희는 부끄러움을 느껴 시신을 찾으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친정인 鄭나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제103회에, 하희는 陳나라 하어숙의 부인인데, 정목공(鄭穆公)의 딸이라고 하였다. 제104회에, 진영공(陳靈公)은 대부 공녕·의행보와 함께 하희와 놀아났다. 제105회에, 하희의 아들 하징서는 진영공을 시해하였으며, 초장왕이 陳나라를 침공하여 하징서를 죽였다. 초장왕과 공자 영제가 하희를 취하려다가 굴무의 반대로 양로에게 개가시켰는데, 굴무는 오래전부터 하희를 탐하고 있었다. 제108회에, 양로는 晉軍과 싸우다가 순수가 쏜 화살에 맞고 전사하였다. ‘증음(烝淫)’은 남자가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여자와 간음하거나, 자식이 어머니뻘 되는 여자와 간음하는 것을 말한다.]
신공(申公) 굴무(屈巫)가 하녀에게 뇌물을 주고 하희에게 말을 전하게 하였다.
“신공께서 마님을 간절히 사모하여, 만약 마님께서 鄭나라로 가신다면 신공께서도 따라가서 마님을 맞이하겠다고 하십니다.”
굴무는 또 사람을 보내 정양공(鄭襄公)에게 말했다.
[정양공은 정목공의 아들이므로, 하희는 정양공의 누이이다.]
“하희가 친정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데, 왜 데려가지 않습니까?”
정양공은 楚나라로 사신을 보내, 하희를 데려가려고 하였다.
초장왕(楚莊王)이 여러 대부들에게 물었다.
“鄭나라에서 하희를 데려가려는 의도가 무엇일까?”
굴무(屈巫)가 대답했다.
“하희는 양로의 시신을 거두고 싶어 하는데, 鄭나라에서 그 일을 맡았기 때문에 하희를 데려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장왕이 말했다.
“양로의 시신은 晉나라에 있는데, 鄭나라에서 어떻게 찾는단 말이오?”
“순앵(荀罃)은 순수(荀首)의 사랑하는 아들인데, 순앵은 우리 楚나라의 포로가 되어, 순수는 그 아들을 간절히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순수는 새로 晉나라 중군 부장이 되었는데, 鄭나라 대부 황수(皇戍)와 교분이 두텁습니다. 순수는 필시 황수를 거간(居間)으로 삼아 우리 楚나라에 화해를 청하고 공자 곡신(穀臣)과 양로의 시신을 순앵과 교환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리고 鄭君은 필성(邲城)에서의 전쟁으로 인해 晉나라가 토벌하러 오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기회로 晉나라에 잘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제107회에, 정양공은 晉軍에 황수를 보내 楚軍과 싸우라고 부추기고, 다른 한편 사신을 楚軍에게 보내 晉軍과 싸우라고 부추겼다. 순앵은 楚나라 장수 웅부기와 교전하다 화살을 맞고 웅부기에게 사로잡혔다. 제108회에, 순수는 순앵을 구하러 갔다가 양로를 활로 쏘아 죽이고 楚나라 공자 곡신를 사로잡아, 양로의 시신과 함께 병거에 태워 돌아갔다. 곡신은 초장왕의 서자(庶子)이다. ‘거간(居間)’은 중간에서 흥정하는 사람이다.]
굴무의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하희가 입조하여 장왕에게 인사하고, 鄭나라로 돌아가려는 까닭을 아뢰었다. 그리고 구슬 같은 눈물을 비 오듯 흘리며 말했다.
“만약 시신을 찾지 못한다면, 첩은 맹세코 楚나라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장왕은 가련히 여겨 허락하였다.
하희가 楚나라를 떠날 때, 굴무는 정양공에게 서신을 보내 하희를 아내를 삼겠다는 뜻을 전했다. 정양공은 초장왕과 공자 영제(嬰齊)도 하희를 취하려다 말았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楚나라에서 중용되고 있는 굴무와 인척을 맺고자 청혼을 받아들였다. 楚나라에는 그 일에 대해 아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굴무는 또 사람을 晉나라에 보내 순수에게 소식을 전하고, 곡신과 양로의 시신을 초나라에 잡혀 있는 순앵과 교환하라고 하였다. 순수는 황수에게 서신을 보내, 거간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초장왕은 아들 곡신의 시신을 찾고 싶었기 때문에 순앵을 晉나라로 돌려보냈다. 晉나라에서도 두 시신을 초나라로 보냈다. 굴무의 말이 사실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楚나라 사람들은 그가 다른 의도를 가졌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제108회에는 곡신이 사로잡혔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 착오가 있다.]
晉軍이 齊나라를 정벌했을 때 제경공은 楚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는데, 마침 초장왕이 훙거하여 군대를 보내지 못했다. 후에 齊軍이 대패하고 국좌가 晉나라와 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초공왕(楚共王)이 말했다.
“齊나라가 晉나라를 따르게 된 것은, 우리 楚나라가 齊나라를 구원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齊나라의 본래 뜻이 아닐 것이오. 과인이 齊나라를 위해 衛나라와 魯나라를 정벌하여 안(鞍) 땅에서의 패전의 치욕을 씻어 주고자 하오. 누가 과인의 이런 뜻을 齊侯에게 전하겠소?”
신공 굴무가 대답했다.
“신이 가겠습니다.”
초공왕이 말했다.
“경은 이번에 가면서 鄭나라를 경유하여, 鄭伯에게 겨울 10월 보름 衛나라 국경에서 만나는 것으로 약속하시오. 그리고 그것을 齊侯에게 알리시오.”
굴무는 명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식읍(食邑)인 신읍(新邑)으로 세금을 거두러 간다고 핑계대고 재물을 수레 10여 대에 실어 먼저 성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자신은 작은 수레를 타고 그 뒤를 따라 나가 鄭나라로 갔다. 굴무는 정양공에게 楚王의 명을 전하고, 관사에서 하희와 혼례를 치렀다.
佳人原是老妖精 아름다운 여인은 원래 늙은 요정(妖精)이었으니
到處偷情舊有名 이르는 곳마다 사통하여 그 이름을 떨쳤다.
採戰一雙今作配 방중술(房中術)에 통달한 한 쌍이 이제 짝을 이루었으니
這迴鏖戰定輸贏 이번 전투에서 승부가 나겠구나!
[제103회에 하희는 꿈속에서 만난 위장부에게서 방중술을 배웠다고 했고, 제105회에 굴무는 팽조의 방중술을 익혔다고 하였다.]
하희가 베갯머리에서 굴무에게 말했다.
“우리 일을 楚王께 아뢰었습니까?”
굴무는 예전에 장왕과 공자 영제가 하희를 취하려고 했던 일을 자세히 얘기하고서 말했다.
“내가 부인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마음을 많이 썼는지 아시오? 오늘 마침내 부인을 얻어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으니, 내 평생의 소원이 이루어졌소! 나는 이제 楚나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 내일 부인과 함께 우리가 편안히 살 수 있는 곳으로 가서 백년해로(百年偕老)할 것이오. 그러면 좋지 않겠소?”
하희가 말했다.
“원래 그랬었군요. 그런데 부군(夫君)께서 초나라로 돌아가지 않겠다면, 齊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일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나는 齊나라로 가지 않을 것이오. 지금 楚나라에 대적할 수 있는 나라는 晉나라밖에 없으니, 나는 당신과 함께 晉나라로 갈 것이오.”
다음 날 아침, 굴무는 표장 한 통을 써서 종자를 시켜 楚王에게 보내고 자신은 하희와 함께 晉나라로 갔다.
진경공(晉景公)은 楚나라에 패전한 것을 치욕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굴무가 왔다는 보고를 받자 기뻐하며 말했다.
“이는 하늘이 나에게 이 사람을 하사한 것이다!”
진경공은 그날로 굴무를 대부로 임명하고, 형(邢) 땅을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굴무는 ‘굴(屈)’이라는 성을 버리고 성을 ‘무(巫)’, 이름을 ‘신(臣)’으로 고쳐, 사람들은 그를 신공(申公) 무신(巫臣)이라 불렀다. 무신은 그때부터 晉나라에서 편안하게 살았다.
한편, 초공왕이 무신의 표장을 받아 읽어 보니,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鄭伯이 하희를 아내로 삼게 했는데, 신은 감히 사양할 수 없었습니다. 군왕께 지은 죄가 두려워 신은 잠시 晉나라에 머물고자 합니다. 齊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일은, 군왕께서 다른 신하를 보내십시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초공왕은 표장을 보고서 크게 노하여, 공자 영제와 공자 측(側)을 불러 표장을 보여 주었다. 공자 측이 말했다.
“楚와 晉은 대대로 원수이니, 지금 무신이 晉으로 간 것은 반역입니다. 토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공자 영제가 말했다.
“양로의 아들 흑요는 서모(庶母)와 증음(烝淫)했으니, 역시 죄가 있습니다. 마땅히 함께 토벌해야 합니다.”
공왕은 그 말에 따라, 공자 영제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무신의 일족을 몰살하게 하고, 공자 측으로 하여금 흑요를 붙잡아 참수하게 하였다. 두 집안의 가산은 두 공자가 나누어 가졌다.
무신은 자신의 일족이 몰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두 공자에게 서신을 보냈다.
너희들은 탐욕과 참소로 주군을 섬겨,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다. 내 반드시 너희들을 길거리에 쓰러져 죽게 할 것이다!
영제와 측은 그 서신을 비밀로 하여 楚王이 알지 못하게 하였다.
무신은 晉을 위해 계책을 꾸몄다. 晉나라로 하여금 오(吳)나라와 우호를 맺게 하고, 병거로 싸우는 법을 吳나라에 가르쳐 주었다. 자신의 아들 호용(狐庸)으로 하여금 吳나라에서 벼슬을 하게 하여, 晉과 吳 사이에 왕래가 끊이지 않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吳나라는 세력이 날로 강해지고 병력도 날로 늘어나, 楚나라 동쪽의 속국들을 모두 탈취하였다. 吳나라 군장(君長) 수몽(壽夢)은 마침내 왕을 참칭하였으며, 楚나라의 변방은 吳나라의 침공으로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훗날 무신이 죽은 후, 호용은 다시 굴씨 성으로 돌아가 吳나라에서 벼슬을 했는데, 吳나라는 그를 상국(相國)으로 삼아 국정을 맡겼다.
[드디어 吳나라가 등장한다.]
겨울 10월, 초공왕은 공자 영제를 대장으로 삼아 鄭軍과 함께 衛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영제는 衛軍을 격파하고, 군대를 이동하여 魯나라를 침공하여 양교(楊橋) 땅에 주둔하였다.
중손멸(仲孫蔑)은 楚軍에 뇌물을 바치고 화평을 청하자고 노성공(魯成公)에게 아뢰었다. 그리하여 중손멸은 양장(良匠)·직녀(織女)·침녀(針女) 각각 백 명을 선발하여 楚軍에 바치고 화평을 청했다. 楚軍은 화평을 허락하고 회군하였다.
[魯나라는 삼가(三家) 즉 계손씨·숙손씨·맹손씨(중손씨)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당시에는 계손행보·숙손교여·중손멸이 권력이 쥐고 있었다. ‘양장(良匠)’은 솜씨 좋은 장인, ‘직녀(織女)’는 길쌈하는 여자, ‘침녀(針女)’는 바느질하는 여자이다.]
晉나라는 魯나라에 사신을 보내 鄭나라를 함께 정벌하자고 하였고, 노성공은 또 그에 따랐다.
주정왕(周定王) 20년, 정양공(鄭襄公) 견(堅)이 훙거하고, 세자 비(費)가 즉위하였으니 그가 정도공(鄭悼公)이다. 鄭나라는 허(許)나라와 국경 분쟁을 일으켰는데, 許君은 楚나라에 호소하였다. 초공왕은 許君의 이치가 맞는다고 생각하여, 사신을 보내 鄭나라를 질책하였다. 정도공은 노하여 楚나라를 버리고 晉나라를 따랐다.
그해에 극극이 화살에 맞은 상처가 악화되어 왼쪽 팔을 잘랐다. 극극은 늙었음을 이유로 사직했는데,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 난서(欒書)가 극극을 대신하여 중군원수가 되었다. 다음 해에 楚나라 공자 영제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鄭나라를 정벌했는데, 난서가 가서 구원하였다.
[제112회에, 극극은 안(鞍) 땅에서 齊軍과 싸우다가 왼쪽 옆구리에 화살을 맞았다. 지금 왼쪽 팔을 잘랐다고 했는데, 착오가 있다.]
진경공(晉景公)은 齊나라와 鄭나라가 복종하자, 자만하게 되었다. 도안가를 총애하여 사냥을 다니고 함께 술을 마셨다. 마치 진영공(晉靈公) 때로 돌아간 듯하였다.
[제100회에, 진영공은 도안가와 함께 음탕하게 놀면서 포학한 짓을 일삼았다. 도안가는 조돈을 살해하려다 실패했고, 제101회에 조천이 도원에서 진영공을 시해하였다.]
조동(趙同)과 조괄(趙括)은 그 아우 조영제(趙嬰齊)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조영제가 음란한 일을 저지르고 있다고 무고(誣告)하여 쫓아냈다. 조영제는 齊나라로 달아났는데, 진경공은 막지 못하였다.
[조동·조괄·조영제는 조돈의 이복아우들이다. 제108회에, 晉軍이 楚軍과 싸울 때 조영제가 자신에게 알리지도 않고 먼저 황하를 건너갔다고 조괄이 순림보에게 호소하였고, 그때부터 둘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