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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列國志 제114회
그때 양산(梁山)이 아무런 까닭이 없이 갑자기 무너져, 강의 흐름을 막아 사흘 동안 강물이 흐르지 못했다. 진경공(晉景公)은 태사(太史)에게 점을 쳐보게 하였다. 도안가(屠岸賈)는 태사에게 뇌물을 주고, ‘형벌이 공정하기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게 하였다.
진경공이 말했다.
“과인은 지금까지 형벌을 잘못 내린 적이 없는데, 어찌하여 공정하지 않다는 말인가?”
도안가가 아뢰었다.
“형벌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은, 잘못에 비해 무거운 형벌을 내리거나 혹은 가벼운 형벌을 내린 것을 말합니다. 조돈(趙盾)이 도원(桃園)에서 영공(靈公)을 시해한 것은 사서(史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인데도, 성공(成公)께서는 그를 벌하지 않고 도리어 국정을 맡겼습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역신(逆臣)의 자손들이 조정에 가득 차 있으니, 이러고서야 어떻게 후인을 경계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조삭(趙朔)·조동(趙同)·조괄(趙括) 등은 종족의 번성함을 믿고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고 합니다. 조영제(趙嬰齊)는 이를 저지하려다가 저들에게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난씨(欒氏)와 극씨(郤氏)도 조씨(趙氏)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있습니다. 양산이 무너진 것은, 하늘이 주군께 영공의 원한을 풀어주라 하심이니, 조씨의 죄를 다스리셔야 합니다.”
[제101회에, 태사(太史) 동호(董狐)가 사간(史簡)에 ‘조돈이 도원에서 군주 이고(夷皋)를 시해했다.’고 기록하였다. 실제로 영공을 시해한 자는 조천이었지만, 조돈이 상국으로서 그 당시 국경을 넘어가지는 않았으며, 또 돌아와서도 살인자를 벌하지 않았기 때문에 책임이 조돈에게 있다고 하였다. 조삭은 조돈의 아들이고, 조동·조괄·조영제는 조돈의 이복아우들이다.]
경공은 필성(邲城)에서의 전쟁 때, 조동과 조괄이 전횡(專橫)한 것을 미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에 미혹되었다.
[제107회에, 晉軍이 楚軍과 싸울 때 중군원수였던 순림보는 회군하라고 명을 내렸는데, 중군부장이었던 선곡이 혼자 황하를 건너 싸우러 갔고 조동과 조괄이 동조하였다.]
진경공이 한궐(韓厥)에게 묻자, 한궐이 대답했다.
“도원에서 일에 조돈이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게다가 조씨는 성계(成季; 조쇠) 이래 대대로 晉나라에 큰 공훈을 세웠습니다. 주군께서는 어찌하여 소인의 말을 듣고 공신(功臣)의 자손을 의심하십니까?”
[조돈은 조쇠(趙衰)의 아들이다. 제96회에, 晉軍이 秦軍과 하곡(河曲)에서 전쟁할 때 조돈은 한궐을 중군사마로 임명했는데, 조돈의 어자가 물통을 가지러 병거를 몰고 중군 대열을 뚫고 들어온 것을 가차 없이 처형했었다. 그때 조돈은 군법을 공평하게 집행했다고 한궐을 칭찬하며 훗날 晉나라의 정권을 잡을 자는 한궐일 것이라고 말했었다. 한궐은 한간(韓簡)의 손자이며 한자여(韓子輿)의 아들이다.]
경공은 한궐의 말이 석연치 않아, 다시 난서(欒書)와 극기(郤錡)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미리 도안가에게 부탁을 받았기 때문에, 말을 모호하게 얼버무리면서 조씨를 위하여 변명하지 않았다.
[제113회에, 도안가는 날마다 조씨 가문의 잘못을 찾아내 경공에게 참소했으며, 난씨·극씨 가문과 친교를 맺어 자신을 위한 외원(外援)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마침내 경공은 도안가의 말이 옳다고 믿고, 판자에 조돈의 죄를 기록하여 도안가에게 내주며 말했다.
“그대가 알아서 처리하되, 백성들이 놀라지 않게 하시오.”
[제101회에, 조천이 영공을 시해한 후 조돈에게 도안가를 죽이자고 했는데, 조돈은 “남이 너를 해치지 않았는데, 네가 도리어 남을 해치면 되겠느냐?”고 하면서 말렸었다. 악한 자에게는 이런 도리가 통하지 않는다.]
한궐은 도안가의 음모를 알고, 밤중에 하궁(下宮)으로 가서 조삭에게 알려 피신하라고 하였다. 조삭이 말했다.
“나의 선친께서는 선군이 죽이려고 해서 거기에 항거하다가 마침내 악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도안가가 군명을 받들어 나를 죽이고자 하니, 내 어찌 피신하겠습니까? 다만 내 아내가 지금 임신을 해서 산달이 되었습니다. 딸을 낳으면 할 수 없지만, 천행으로 아들을 낳게 되거든, 조씨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이 일점혈육(一點血肉)을 장군께서 보전해 주신다면, 나는 죽어도 살아난 것이나 다름없겠습니다.”
한궐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지난날 선맹(宣孟)께서 알아주셨기에, 오늘날의 내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은혜는 父子와 다를 바 없습니다. 내 지금 힘이 부족하여 역적의 머리를 자르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대가 부탁하는 일을 내가 어찌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저 역적이 오랫동안 원한을 쌓아 왔는데, 그것이 일시에 터지는 날에는 옥석(玉石)이 모두 불탈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비록 힘을 쓴다 하더라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공주(公主)를 공궁(公宮)으로 몰래 들여보내 이 난을 피하게 하십시오. 훗날 공자가 장성하면 원수를 갚을 날이 있을 것입니다.”
[‘선맹(宣孟)’은 조돈의 시호(諡號)이다. 조삭의 아내는 진경공의 누이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눈물을 뿌리며 헤어졌다.
조삭은 아내 장희(莊姬)에게 은밀히 말했다.
“딸을 낳으면 이름을 ‘문(文)’이라 하고,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무(武)’라 하시오. 딸이면 소용없지만, 아들이라면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이오.”
조삭은 문객(門客) 정영(程嬰)에게 부탁하여 장희를 수레에 태워 후문으로 나가서 공궁으로 모셔가게 하였다. 장희는 공궁으로 들어가 그 어머니인 성부인(成夫人)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성부인’은 진경공의 부친인 진성공(晉成公)의 부인이다.]
날이 밝자, 도안가는 군사를 이끌고 와서 하궁을 포위하였다. 도안가는 경공이 조돈의 죄를 써 준 판자를 대문에 걸어놓고 소리쳤다.
“군명을 받들어 역적을 토벌하라!”
마침내 조삭·조동·조괄·조전(趙旃) 등 조씨 일족은 남녀노유(男女老幼)를 막론하고 모두 살육을 당하였다. 다만 조전의 아들 조승(趙勝)만은 이때 한단(邯鄲)에 가 있었기 때문에 화를 면했는데, 그는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宋나라로 달아났다.
당시 살해된 시신들이 집안 가득 늘렸는데, 흐르는 피가 정원과 계단을 붉게 물들였다. 도안가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시신들을 샅샅이 뒤졌으나, 장희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도안가가 말했다.
“공주를 반드시 죽여야 할 필요는 없으나, 지금 임신 중이라 하니 만일 아들을 낳는다면 반드시 후환이 있으리라.”
누군가가 도안가에게 보고하였다.
“밤중에 수레 한 대가 내궁으로 들어갔습니다.”
도안가가 말했다.
“그건 필시 장희일 것이다.”
도안가는 즉시 경공에게 가서 말했다.
“역신(逆臣) 일문(一門)을 모두 주살했으나, 공주가 내궁으로 들어갔으니, 주군께서 처결하십시오.”
경공이 말했다.
“나의 누이는 모부인께서 사랑하는 딸이니, 그 죄를 물을 수 없소.”
“공주는 지금 임신 중인데, 만일 아들을 낳게 되면 바로 역적의 씨를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훗날 장성하면 반드시 원수를 갚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면 도원에서의 일이 다시 일어날 수 있으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들을 낳게 되면, 그때 죽여 버리면 되오.”
도안가는 사람을 시켜 밤낮으로 장희의 생산 소식을 탐지하도록 하였다. 며칠 후, 장희는 과연 아들을 낳았다. 성부인은 궁중에 분부하여 거짓으로 딸을 낳았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나 도안가는 믿지 않고 자기 집 유모를 내궁으로 들여보내 사실을 알아보게 하였다.
장희는 당황하여 성부인과 상의한 끝에, 갓난아이가 죽었다는 말을 퍼뜨렸다. 이때 경공은 주색에만 탐닉하여 국사는 전적으로 도안가가 마음대로 처리하고 있었다. 도안가는 갓난아이가 죽었다는 말도 믿지 않았다. 그는 직접 여종을 거느리고 내궁으로 들어가 수색하였다. 장희는 아들을 속바지 안에 숨기고 하늘에 기도하였다.
“하늘이 조씨를 절멸하시려면 이 아이를 울게 하시고, 만약 조씨의 일맥을 잇게 하시려면 울음소리를 내지 않게 해주십시오.”
여종들이 들어와 장희를 끌고 나가고 내궁을 수색했으나 갓난아이는 발견되지 않았다. 장희의 속바지 안에서도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도안가는 혹시 이미 갓난아이를 궁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도안가는 상금을 걸고 방을 붙였다.
역적 조삭의 아들이 있는 곳을 알리는 자에게는 천금의 상을 내리겠노라. 그러나 만일 알면서도 말을 하지 않거나 숨겨주는 자는 그 일족을 멸할 것이다.
그리고 궁문을 지키는 군사들에게 출입하는 사람을 철저히 검색하라고 분부하였다.
한편, 조돈에게는 두 사람의 심복 문객이 있었는데, 공손 저구(杵臼)와 정영이었다. 도안가가 하궁을 포위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저구가 정영에게 말했다.
“우리도 하궁으로 가서 난을 함께 당합시다.”
정영이 말했다.
“도안가는 지금 군명을 가탁(假託)하여 역적을 토벌한다고 선포하고 있소. 우리가 함께 죽는다고 해서 조씨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소?”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으나, 은인의 집안이 난을 당하는데 어찌 우리가 죽음을 피할 수 있겠소?”
“공주가 지금 임신 중인데, 만약 아들을 낳는다면 우리가 함께 받듭시다. 불행히도 딸이라면 그때 가서 죽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오.”
얼마 후, 장희가 딸을 낳았다는 소문을 듣고 저구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하늘이 과연 조씨를 절멸하려는가!”
정영이 말했다.
“아직 믿을 수 없소, 내가 자세히 알아보겠소.”
정영은 궁인에게 많은 뇌물을 주고 장희에게 연락했다. 장희는 정영의 충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武’ 字 한 字를 밀서에 써서 보냈다. 정영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공주는 과연 아들을 낳았구나!”
도안가가 궁중을 수색하고서도 끝내 아기를 찾지 못했음을 알고, 정영이 저구에게 말했다.
“조씨의 유일한 아들이 궁중에 있는데, 저들이 찾지 못하였으니, 이는 천행이오. 하지만 속이는 것도 일시적일 뿐, 언젠가는 도안가 놈이 찾아내고 말 것이오. 계책을 써서 궁문 밖으로 몰래 빼내 먼 곳으로 데려다가 키우도록 합시다.”
저구는 한동안 생각한 끝에 정영에게 말했다.
“아기를 기르는 것과 죽는 것, 그 둘 중에 어느 쪽이 어렵겠소?”
“죽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아기를 기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오.”
“그대는 어려운 일을 맡고, 나는 쉬운 일을 맡는 것이 어떻겠소?”
“대체 그게 무슨 말이오?”
“남의 집 아기를 하나 얻어서 조삭의 아들이라 거짓 칭하여, 내가 안고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겠소. 그대는 도안가 놈에게 가서 아기가 있는 곳을 밀고하시오. 그리하여 도안가가 가짜 아기를 죽이면, 진짜 아기는 살아날 수 있지 않겠소?”
“가짜 아기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으나, 진짜 아기를 내궁에서 데리고 나올 일이 걱정이오.”
“여러 장수들 중에서 오직 한궐만은 조씨의 은혜를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오. 아기를 몰래 데리고 나오는 일을 그에게 부탁하면 될 것이오.”
“마침 내 아들이 조씨의 아들과 비슷한 날에 태어났으니, 대신하면 될 것이오. 하지만 그대는 아기를 감추었다는 죄목으로 반드시 아기와 함께 죽게 될 것이오. 그대가 나보다 먼저 죽으면 나 혼자 어찌 살아남겠소?”
정영은 눈물을 거두지 못했다. 저구가 화를 내며 말했다.
“이는 큰일인 동시에 또한 아름다운 일이요. 울기는 왜 운단 말이오!”
정영은 눈물을 거두고 돌아갔다.
밤중에 정영은 자기 아들을 안고 와서 저구의 손에 넘겨주었다. 그리고 한궐을 찾아가 ‘武’ 字를 내보인 다음, 저구의 계책을 일러주었다. 한궐이 말했다.
“공주가 병이 나서, 내게 의원을 구해 달라 하였소. 그대가 도안가를 속여서 수양산으로 데리고 가면, 그 사이에 내가 아기를 궁 밖으로 데리고 나오겠소.”
정영은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 가서 큰소리로 떠들어댔다.
“도사구(屠司寇)는 조씨의 아들을 찾는다면서, 어째서 궁중만 수색하는지 모르겠다.”
도안가의 문객이 그 말을 듣고, 정영에게 물었다.
“그대는 조씨의 아들이 있는 곳을 아시오?”
정영이 말했다.
“나에게 천금을 준다면 알려 주겠소.”
문객이 정영을 도안가에게로 데려가니, 도안가가 물었다.
“그대는 누구요?”
정영이 대답했다.
“저는 정영이란 사람으로, 공손 저구와 함께 조씨를 섬겨 왔습니다. 공주가 아들을 낳아 몰래 궁문 밖으로 내보내 우리 두 사람에게 맡겼는데, 저는 일이 탄로 날까 두려웠습니다. 혹 누군가가 천금의 상을 탐내어 밀고하는 날엔 일족이 멸망할 것이라, 이렇게 고하는 것입니다.”
“아기는 지금 어디 있소?”
“좌우를 물리쳐 주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도안가가 좌우를 물리치자, 정영이 말했다.
“수양산 깊은 곳에 있는데, 급히 가면 잡을 수 있습니다. 머잖아 秦나라로 달아날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대부께서 직접 가셔야 합니다. 아직도 조씨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마십시오.”
“그대도 나와 함께 가야 하오. 만약 사실이라면 후한 상을 줄 것이나, 사실이 아니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제가 지금 산중에서 오는 길이라 배가 몹시 고프니, 밥 한 그릇만 주십시오.”
도안가가 술과 음식을 내려주자 정영은 식사를 마친 뒤, 도안가를 재촉하였다. 도안가는 가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정영을 앞세워 수양산으로 달려 갔다. 산길을 꼬불꼬불 돌아서 몇 리를 가니, 길도 끊어지고 궁벽한 곳 시냇가에 여러 채의 초가가 보였다. 정영이 한 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가 저구와 아기가 있는 곳입니다.”
정영이 먼저 가서 문을 두드리자, 저구가 나왔다. 저구는 많은 군사를 보더니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정영이 소리쳤다.
“너는 달아날 생각마라. 사구께서 이미 아기가 이곳에 있는 줄 알고 친히 오셨으니, 빨리 아기를 내놓아라!”
정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병사들이 달려들어 저구를 포박하여 도안가 앞에 끌고 갔다. 도안가가 저구에게 물었다.
“아기는 어디 있느냐?
저구가 말했다.
“없습니다.”
도안가는 병사들에게 집을 수색하게 하였다. 그런데 벽장이 하나 있는데, 아주 튼튼한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 보니 아주 캄캄한데 문득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병사들이 아기를 안고 밖으로 데리고 나와 보니, 비단옷을 입고 수놓은 강보에 싸인 것이 엄연한 귀한 집 아들이었다.
저구는 아기를 보는 순간 빼앗으려고 하였지만, 묶여 있어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저구는 큰소리로 정영을 꾸짖었다.
“이 소인배 정영 놈아! 지난날 하궁에서 난이 있었을 때, 나는 너하고 함께 죽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네놈이 공주가 임신 중이니, 우리가 죽으면 누가 아들을 보호하겠느냐고 하지 않았느냐! 이제 공주께서 우리 두 사람에게 부탁하여 이 산에 숨어들었는데, 네놈은 천금의 상을 탐내어 몰래 나가 밀고했더란 말이냐! 내가 죽는 것은 애석하지 않으나, 조선맹(趙宣孟; 조돈)의 은혜를 어찌 갚는단 말이냐!”
저구는 욕을 그치지 않았다. 정영은 부끄러운 기색이 얼굴에 가득하여 도안가에게 말했다.
“왜 빨리 죽이지 않습니까?”
도안가는 영을 내려 저구를 참수하게 하였다. 그리고 아기를 들어 땅바닥에 내던졌다. 아기는 한 번 비명을 지르더니 이내 고깃덩이가 되어 버렸다. 오호애재(嗚呼哀哉)라!
염옹(髯翁)이 시를 읊었다.
一線宮中趙氏危 조씨의 일점혈육이 궁중 안에서 위기에 처하자
寧將血胤代孤兒 자신의 혈육을 고아(孤兒)를 대신해 죽게 하였다.
屠奸縱有彌天網 간신 도안가가 그물을 펼쳐 두었는데
誰料公孫已售欺 누가 알았으랴, 공손저구가 이미 속였음을.
도안가가 수양산으로 가서 조씨의 아기를 잡아서 죽인 일이 성중에 소문이 퍼졌다. 도씨 집안을 위해서 일하고 있던 사람들은 기뻐하였고, 조씨 집안을 위해서 일했던 사람들은 탄식했다. 궁문 출입을 검색하던 일은 자연히 해이해졌다.
한궐이 그 문객 중 심복 한 사람을 의원으로 변장시켜 공주를 간병한다는 핑계를 대고 내궁으로 들여보냈다. 가짜 의원은 정영이 전해준 ‘武’ 字를 약주머니 위에 붙여서 내밀었다. 장희는 그것을 보고 뜻을 짐작하였다.
진맥이 끝나고 산후 조리에 관한 상투적인 얘기가 오고간 다음, 장희는 아들을 약주머니 안에 숨겼다. 아기가 울어대기 시작하자, 장희는 약주머니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조무(趙武)야! 조무야! 우리 문중의 원수를 갚는 일은 유일한 혈육인 너에게 달려있다. 궁문을 나갈 때 제발 울지 마라.”
장희의 분부가 끝나자, 아기는 울음을 멈추었다. 궁문을 나갈 때도 아무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궐은 마치 귀한 보물처럼 깊숙한 방에 아기를 감추어 두고, 유모에게 기르게 하였다. 집안사람들은 아무도 그 일을 알지 못하였다.
도안가는 돌아와 정영에게 천금의 상을 내렸으나, 정영은 사양하였다. 도안가가 정영에게 물었다.
“그대는 상금을 받기 위해 밀고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사양하는가?”
정영이 말했다.
“소인은 조씨의 문객이 된 지 이미 오랩니다. 이제 스스로 화를 면하기 위해 밀고하기는 했으나, 어찌 의로운 일이라 하겠습니까? 게다가 어찌 상금까지 바랄 수 있겠습니까? 소인의 작은 공을 진정 생각해 주신다면, 이 돈으로 조씨 일문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나 지내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소인이 그 문하에서 받은 은혜를 만분지일이나마 갚게 해주십시오.”
도안가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그대는 참으로 신의가 있는 사람이오! 조씨 일문의 시신을 거두는 것을 막지 않을 테니, 이 돈으로 장례를 지내시오.”
[신의를 모르는 놈이 어찌 신의를 운운하는가!]
정영은 절하고 돈을 받았다. 정영은 시신을 모두 거두어 조돈의 묘 옆에 안장하였다. 장례가 끝나자, 정영은 도안가에게 가서 사례하였다. 도안가는 정영을 자기 밑에 두어 쓰고자 하였으나, 정영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소인은 일시적으로 생을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여 의롭지 못한 일을 저질렀으니, 晉나라 사람들을 다시 볼 면목이 없습니다. 멀리 떠나 입에 풀칠이나 하며 살고자 합니다.”
정영은 도안가에게 사례하고 나와, 한궐을 찾아갔다. 한궐이 정영에게 아기를 내주자, 정영은 아기를 자기 아들로 삼아 우산(盂山)으로 들어가 아기를 키웠다. 후세 사람들은 그 산 이름을 장산(藏山)이라 불렀으니, 정영이 그곳에 고아를 감추었기 때문이었다.
[훗날 조무는 과연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인가?]
3년 후, 진경공은 신전(新田)으로 놀러갔는데, 그곳의 땅이 비옥하고 물맛이 단 것을 보고 도읍을 옮겼다. 새 도읍을 신강(新絳)이라 부르고, 옛 도읍을 고강(故絳)이라 불렀다. 백관이 경하하자, 경공은 내궁에서 연회를 열어 백관을 대접하였다.
날이 저물어가자 좌우에서 촛불을 밝히려고 했는데, 홀연 한 줄기 괴이한 바람이 궁 안으로 불어 들어왔다. 차가운 기운이 사람들을 엄습하여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잠시 후 바람이 지나간 뒤, 경공의 눈에만 산발한 귀신이 보였다. 귀신은 키가 10척이 넘었고 풀어헤친 머리칼이 땅에 끌렸는데, 문 밖에서부터 안으로 들어와 팔을 휘두르며 큰소리로 꾸짖었다.
“하늘이시여! 내 자손이 무슨 죄가 있다고, 네놈이 모두 죽였느냐? 내가 이미 상제(上帝)께 호소하여 네놈의 목숨을 가지러 왔다!”
말을 마치자, 귀신은 쇠망치를 꺼내 경공을 내리쳤다. 경공은 비명을 질렀다.
“여봐라! 나를 구하라!”
경공은 패검을 뽑아 귀신을 베었는데, 잘못하여 자신의 손가락을 잘랐다. 신하들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황급히 경공의 칼을 빼앗았다. 경공은 입에서 선혈을 토하면서 바닥에 쓰러져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