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를 꿈꾸며 / 마종기
그랬지. 나는 늘 떠나고 싶었다. 가난도 무질서도 싫었고
무리지어 고함치는 획일성도 싫었다. 떠나고 또 떠나다 보니
여기 서 있다. 낡고 빈 바닷가, 잡음의 파도 소리를 보내고
산티아고 노인을 기다리고 싶다. 남은 생명을 한 판에 다 걸고
집채만 한 고기를 잡았던 헤밍웨이의 어부를 만나고 싶다.
그 쿠바 나라 노인은 나를 기다리며 감추어둔 회심의 미소를
그때 보여줄 것이다. 해변에 눕는다. 해변이 천천히 그림자를
옮기면서 나를 치며 가라고 할 때까지 계획없이 떠다니던
내 생을 후회하지 않겠다. 내가 무리를 떠나온 것은 비열해서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노을이 키웨스트 해변에 피를
흘리고 흘려 모든 바다가 다시 무서워질 때까지, 그리고
그 바다의 자식들이 몰려나와 신나는 한 판 춤을 즐길 때까지.
마흔두 개의 섬을 연결한 마흔두 개의 다리를 건너며 차를
달려 네 시간 만에 도착한 섬. 어느 다리는 길이가 30리 정도까지
되어 가늘게 흔들리며 망망 바다에 떠 있어 어지러웠지만,
헤밍웨이는 야자수밖에 없는 그 마지막 섬에 프랑스 미녀를
데려와 넷째 부인으로 살림을 차리고 말술을 마셨다. 그 중간에는
사람 열 배 크기의 상어를 잡고 거대 다랑어를 잡고 아프리카에
가서는 사자와 표범과 코뿔소를 피투성이로 죽이고 종국에는
그 총으로 더 늙기 전에 미리 죽어버린 남자. 그가 쓴 통 크고
시야 넓은 은유의 글을 읽다가 나도 통 큰 시를 꿈꾸며 모든
의심과 열등감을 밟고 방을 뛰쳐나온다. 갈 곳은 없지만
눈을 크게 뜨고 아직은 갈기 사나운 수사자를 꿈꾸며, 가슴을 펴고
바다같이 넓은 시를 꿈꾸며, 다시 한 번 키웨스트의 헤밍웨이를
꿈꾸며.
- 마종기 시집 <마흔두 개의 초록> 2015
[출처] 마종기 시인 1|작성자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