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때 국사선생님께서 “역사에 If가 개입될 여지가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역사가 아니다.”란 말씀을 한 적이 있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듣기에 그럴듯한 이말에 고개를 끄덕였었는데요... 프로야구 탄생비화에 이 “If"를 대입해 본다면 재미있을 거 같아서 몇 자 적어봅니다.
주지하다시피 프로야구 탄생에는 다소 불순한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지역연고제를 채택하게 되었죠. 당시 폭발적이었던 고교야구의 인기를 프로야구로 이어 받기 위해서도 지역연고제는 필연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그래서 참여후보기업도 기업총수나 오너의 연고지를 기준으로 선정했습니다. 호남지역의 대상기업은 기업총수 선대의 고향이 전북 부안인 삼양사가 제1후보, 그룹회장의 고향이 광주인 금호그룹이 제2후보였습니다. (해태그룹은 애초에는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 두 기업은 재정난 등을 이유로 프로야구단 창단을 고사했었는데요, 만약에 원안대로 추진되었더라면 지금 광주/호남연고의 야구팀은 뭐... “삼양 누들스”나 “금호 타이어스”쯤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요? 9회 우승에 빛나는 명문구단 해태 타이거즈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겠죠.
부산/경남지역의 후보로는 회장의 연고가 경남 양산인 롯데그룹과 경남 진양인 럭키금성그룹이 선정되었습니다. 당시 럭키금성 그룹의 구자경 회장이 해외출장중이어서 그룹 기조실에서는 적극적인 의사 표명을 보류했었고, 청와대 고위인사와 야구계 원로 등으로 구성된 프로야구 창립 실무진(이하 “창립 실무진”이라 칭하겠습니다. 제가 편의상 붙인 명칭이지 공식적으로 발족되었던 것은 아닙니다.)은 롯데그룹과 먼저 접촉했습니다. 그리고 긍정적인 답변을 얻었죠. ‘과연 대기업들이 프로야구단을 만들려고 할까?’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창립실무진은 너무도 반가웠고 부산/경남지역은 해결했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후일담으로, 프로야구판이 다 짜여진 후에야 귀국했던 구자경 회장은 “무조건 참여 한다고 하지 왜 미뤘느냐?”고 질책했다고 합니다.
자이언츠 팬인 저로서는 정말 아쉬운 대목입니다. 그 때 만약 구자경 회장이 국내에 있었더라면, 그래서 럭키금성 그룹이 부산/경남의 연고팀으로 결정되었더라면 지금 수많은 자이언츠팬들의 한숨은 없었을테니까요. LG의 야구단은 사직구장을 홈으로 쓰면서 그룹의 적극적인 투자와 구단 프런트의 전폭적인 지원속에 구도 부산시민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고 있지 않겠습니까? 롯데 자이언츠팀이 달성한 것보다 더 많은 횟수의 우승을 할 수도 있었을테고...... 적어도 지금처럼 “롯데야! 제발 부산을 떠나다오.”란 팬들의 원망은 없었을 겁니다.
대구/경북지역 연고팀은 삼성그룹이 제1후보, 코오롱그룹이 제2후보였습니다. 코오롱그룹은 회장의 연고가 경북 영일이었지만, 경남 의령 태생인 이병철 회장의 삼성그룹이 후보로 선정된 것은 그룹의 창업지가 대구였기 때문입니다. 부산/경남지역은 롯데, 럭키금성 두 후보가 있어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지역연고주의의 예외를 인정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대그룹 삼성의 총수답게 이병철 회장은 그다지 망설임 없이 프로야구단 창단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만약에, 지역연고주의를 철저하게 지켰더라면, 부산/경남지역의 야구팀은 삼성구단이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랬다면, 삼성구단이 여태 “무관의 제왕”으로 남아 있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고.......
경기/강원 지역의 후보는 이북이긴 하지만 강원도가 고향인 정주영회장의 현대그룹이었습니다. 대기업들이 프로야구단 창단에 과연 적극적일까 하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던 터였지만, 당시 부동의 재계 서열 1위인 현대는 당연히 참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기대대로 일이 진행되었다면, 프로야구 원년부터 현대가 인천에 자리잡고 있었을테고, 그랬더라면 후에 인천을 떠나지도 않았겠죠. 뒤늦게 야구단을 창단한 SK는 기업창업지나 다름없는 수원에 자리잡았을지도 모르겠고... 아님, 쌍방울이 떠난 전주로 갔거나...... 지금 유니폼 행사 때문에 현대와 SK가 옥신각신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테죠.
하지만, 현대의 정주영 회장은 이제 막 유치한 올림픽 때문에 프로야구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미 농구단과 배구단을 거느리고 있던 현대는 전혀 프로야구단에 관심이 없었고, 경기/강원지역의 주인찾기는 난항을 거듭했습니다. 대한항공, 한국화장품 등이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성사되지 않았고, 럭키금성그룹에게도 러브콜을 보냈습니다만 역시 구자경 회장이 외유중이란 이유로 일이 진척되지 않았습니다. 구자경 회장의 귀국시점이 만약 이쯤이었다면, 어쩌면 인천지역의 주인은 럭키금성이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프로야구 창립총회 불과 하루 전에 삼미가 구세주처럼 나타나서 삼미 슈퍼스타즈가 탄생할 수 있었죠.
서울지역은 진작부터 프로야구단을 창단하려고 준비하고 있던 MBC가 계속 기득권을 주장해왔습니다. 초창기 홍보를 위해서는 방송사가 참여를 해야 했기에 MBC는 더욱 큰소리를 칠 수 있었습니다. 두산그룹도 서울 연고를 고집했지만, MBC의 반발이 거셌습니다. 창립 실무진은 두산그룹이 충청지역을 맡아 줄 것을 바랬지만, 두산그룹은 서울이 안된다면 경기/강원 지역을 연고로 하겠다고 요구했습니다. 경기/강원 연고의 야구팀이 두산(OB)이 될 수도 있었군요. 창립실무진이 경기/강원지역은 삼미가 맡기로 했다고 하자 두산은 서울지역을 MBC와 양분하겠다고 맞섰고 MBC와 두산 양측은 서울을 놓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대립양상을 전개했습니다. 여기에 갑자기 롯데가 뛰어듭니다.
호남지역의 주인을 물색하던 차에 해태그룹이 창단의사를 밝혔습니다. 이곳을 맡겠다는 기업이 없어 골머리를 앓던 창립 실무진에겐 가뭄에 단비같은 희소식이었고, 쌍수를 들고 환영했죠. 당시 프로야구 창립 원칙중에는 경쟁기업은 같이 창단하지 않는다는 것이 있었는데 롯데가 이걸 물고 늘어졌습니다. 제과업계 라이벌인 해태의 진입을 결사반대한다는 것이었죠. 처음에는 해태가 들어온다면 자기네들은 빠지겠다고 깡짜를 부리더니, 나중에는 해태문제를 눈감아 줄테니 연고지를 서울로 바꿔달라고 생떼를 부렸습니다. (하여간 처음부터 롯데는 말썽입니다. 그려......)
만약에 롯데의 고집대로 되었더라면...... 하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질 서울팬들이 있으실 겁니다. 지금 서울팬들이 아끼는 선수들이 롯데구단이 저지르는 만행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면... 투자라고는 눈꼽만큼 하는 구단에 몸담고 있으면서 패배의식에 젖어 있을 선수들을 생각한다면... 김재현, 이병규, 김동주 같은 서울출신의 프랜차이즈 스타들을 마구 트레이드 해대는 꼴을 속절없이 지켜봐야 한다는 상상을 하는 것은 그리 유쾌하지 못하겠죠?
롯데의 다된밥에 코풀기에 심경이 불편해진 창립실무진은 구자경 회장이 귀국하면 럭키금성그룹에게 부산/경남지역을 맡아보라고 설득할 요량으로 롯데에게 초강수를 두었습니다. 부산/경남지역을 맡기 싫다면 빠지라고 반협박을 했습니다. 만약에 이대로 되었더라면...... 하는 생각에 "야구팬"으로서 아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롯데가 계속 고집을 부려서 애초에 축출되었더라면, 지금 야구판 전체를 죽이는 롯데의 우매함을 보지 않았을테죠. 하지만, 일본 롯데구단의 구단주인 신격호 회장은 프로야구단을 보유하는 것이 소비재 판매에 얼마나 큰 순기능을 하는 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롯데가 승복해서 원래대로 부산/경남지역의 연고팀이 되었고,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럭키금성의 구자경 회장은 뒤늦게 아쉬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서울의 주인 자리를 놓고 MBC와 다투던 두산은 일단 충청지역을 맡고 3년뒤에 서울을 반분한다는 절충안을 내 놓았습니다. MBC가 길길이 뛰며 반대했지만, 롯데에게 배짱을 부려서 한번 재미를 본 창립실무진은 이번에도 싫으면 관두라고 큰소리를 쳐서 MBC의 양보를 얻어 냈습니다. 창립 6개 팀의 연고가 모두 결정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글을 쓰다보니 너무 길어졌네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흘러온 시간속의 수많은 갈림길에서 프로야구의 역사가 만약에 다른 길로 접어들었더라면 지금 내가 응원하고 있는 팀이 생기지 않았을 수도 있고 다른 지역 팀이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내가 지금 죽도록 미워하는 팀이 내가 응원하는 팀으로 바뀌었을 수도 있고....... 팬들끼리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보면, “만약에” 어쩌구 저쩌구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다보면 절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더군요. 그냥 좋아하는 야구를 보고 즐기기만 하면 될 것을, 왜 그리 서로 미워들 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