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kyilbo.com/sub_read.html?uid=324172§ion=sc30§ion2=
늦가을이다. 겨울로 가는 길목이다. 세모(歲暮)가 가까워질수록 시간의 발걸음은 빨라진다. 이렇게 계절의 모퉁이를 지날 땐 잊고 지냈던 사람들이 더 생각나기도 한다. 그들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그래서 펜을 들어 엽서나 편지를 쓰거나 카드를 보내 안부를 묻기도 한다. 예전에 그랬다.
요즘엔 문자나 카톡으로 간단한 인사 정도는 전하지만 따뜻한 마음을 담기엔 역시 편지글만한 것이 없다. 7, 8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 중 상당수는 펜팔이라는 낭만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당시 ‘학원’이나 ‘독서신문’ 등의 펜팔 코너에서 주소를 따 편지를 주고받던 기억 말이다. 연말이면 연례행사처럼 군 장병들에게 학생들이 단체로 위문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다 오래 전의 일이다.
우리 역사에서 편지글을 많이 남긴 인물은 누구일까. 단연 다산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가까이 지냈던 지인들과 편지로 자주 소통을 했다는 기록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유배지 흑산도의 형 약전에게, 마재의 두 아들에게, 강진의 제자들에게 띄운 편지글들 모두 지금은 소중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학연, 학유 두 아들에게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글 중의 일부는 하피첩(霞帔帖)이 되었고, 해배 후 강진의 제자들에게 “초당과 동암, 서재의 지붕은 이엉을 새로 얹었느냐”고 묻는 편지글을 통해서는 다산이 기거했던 곳이 초당이었음을 사료(史料)로 알려주고 있다. 심지어 유배 시절 키웠던 초당 연못의 잉어 안부까지 묻고 있다. 다산의 따뜻한 성품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산이 머문 초당 주변에는 지금도 그의 흔적들이 여럿 남아있다. 다산이 초당 왼쪽 병풍바위에 직접 새겼다는 정석, 찻물을 끓이는 부뚜막으로 사용했다는 다조, 초당 뒤편의 작은 샘 약천, 다산초당과 동암 사이 연못 한가운데에 서있는 연지석가산 등 다산 4경이 바로 그것이다. 정석(丁石), 약천(藥泉), 다조(茶竈),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앞에서 여행객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200년 전 그날의 다산을 만난다. 다산의 숨결을 느낀다.
다산은 혹독한 귀양지에서도 여유와 멋을 잃지 않았던 것 같다. 강진만 갯가의 괴석들을 모아 초당마당 연못에 석가산을 쌓고 연지석가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곳에 잉어를 키우며 외로움을 달랬고, 자라는 잉어를 보고 날씨를 예측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연(蓮)이 자라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고요로 마음을 다스리고, 연지에 어리는 푸른 산빛을 읽으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초당의 글소리를 듣고 자란 잉어가, 백일홍 그늘에서 잠시 쉬는 여름 한낮, 흰구름 금세 내려와 기별주고 사라진다. 산골의 밤은 깊어 호롱불 스러지고, 천일각 처마 끝에 설핏 걸린 푸른 달빛, 잠이 든 잉어 두 마리 등을 쓸며 지나간다 -유헌「연지석가산」전문
다산의 시선은 따듯했다. 늘 세상을 향해 열려 있었다. 200년 전 다산의 그 마음을 ‘흰구름’과 ‘푸른 달빛’이라는 자연물을 통해 소환한 시조 「연지석가산」이다. 다산이 연지석가산의 잉어에게 안부를 전하는 내용이다. 그 초당 옆 연지석가산에 지금도 잉어가 크고 있는지 궁금하다. 몇 차례 잉어를 방류했지만 산짐승 등의 피해로 키우기 어렵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후 재래종 잉어를 다시 방류했다니 잉어가 무탈하게 잘 컸으면 좋겠다. 귀한 역사의 현장이니 말이다.
한해가 가고 있다. 참 쓸쓸한 계절이다. 다산은 해배 후에도 유배시절 길렀던 다산초당 잉어의 안부를 자주 물었다는데, 가까이 혹은 멀리 있는 지인들에게 어떻게 지내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따듯한 안부 몇 마디 물을 일이다. 안부, 참 따뜻한 말이다.
전남 장흥 출생. 2011년 《月刊文學》 신인상, 《한국수필》 신인상, 2012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제1회 고산문학대상 신인상, 제8회 올해의시조집상, 제3회 현구문학상 등 수상. 시조집 『온금동의 달』 『노을치마』 『받침 없는 편지』, 수필집 『문득 새떼가 되어』(2020 아르코 문학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