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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0장
1 주께서 그곳에서 일어나시어 요단 건너편 유대 지경으로 가시니라. 무리가 다시 주께 나아오니 전에 하셨던 대로 그들을 다시 가르치시더라.
2 그때 바리새인들이 와서 주께 묻기를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타당하니이까?”라고 하며 주를 시험하더라.
3 그러자 주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모세가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명령하였느냐?”라고 하시니
4 그들이 말하기를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 주고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나이다.”라고 하더라.
5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마음의 완고함 때문에 너희에게 이런 명령을 기록하였으나
6 창조의 시작부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느니라.
7 이런 까닭에 남자는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서 그의 아내와 합하여
8 그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니, 따라서 그들은 더 이상 둘이 아니요 한 몸이라.
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결합시켜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느니라.”고 하시니라.
10 그후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그 일에 관하여 주께 물으니
11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그 아내에 대하여 간음하는 것이요
12 여자가 자기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면 그 여자도 간음하는 것이라.”고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갈릴리 카퍼나움을 떠나시어(9:33 참고. 마 19:1) 자신이 침례받으셨던 유대와 인접한 요단강 동편으로 가신다(1절. 참고. 마 19:1; 요 1:28). 여호수아가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넌 지점이 그곳이었다(수 2:7 참고. 판 7:24).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진압한 후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때 요단강을 건넜던 지점도 그곳이었다(삼하 19:15, 40). 또한 엘리야와 엘리사가 여호수아처럼 요단강을 마른 땅처럼 건넜던 지점도 그곳이었다(왕하 2:1-14). 이 모든 사건들이 무엇의 상징인지 아는가? 그것들은 재림의 예표이다.
내가 The Path of the Second Advent(또한 합 3장과 판 5장 주석을 통해 말했듯이)라는 책에서 다뤘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언약궤가 시내산에서 떠나 카나안땅으로 들어간 경로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오실 것이다. 주께서는 먼저 시내산에 착지하신 후 에돔땅에 있는 왕의 대로를 따라 올라오시다가 초림 때 침례받으신 요단강변에서 강을 건너실 것인데, 그리고 나서 주께서는 예루살렘 동편 올리브산(슼 14:4; 행 1:11-12)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것이다. 주께서는 근본주의자들의 가르침처럼 올리브산에 곧바로 오시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어떤 조건 하에서도 이혼과 재혼이 불허되어 있다고 믿는 카톨릭, 성결교, 근본주의자들은 이 본문을 선호한다. 이는 마가가 질문의 일부를 빼고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2절의 질문을 잘 보라: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타당하니이까?" 막 10:2만 떼어놓고 보면 그 바리새인들이 이것을 묻는 취지가 모세 율법 하에서 이혼이 허용된 것인가 하는 질문 같이 보인다.
그러나 막 10:2은 질문의 전체를 담고 있지 않다. 마태는 전체 문장을 기술하고 있다: "사람이 무슨 사유로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는 것이 타당하니이까?"(마 19:3).
이 질문은 이런 뜻이다: "남편이 어떤 이유로든 아내와 이혼할 수 있습니까?" 성경 해석학상의 원칙 중 하나가 완전한 문장으로 불완전한 문장을 해석하라는 것이다. 마가의 2절, 11절 진술은 부로안전한 것이기에 마 19:1-12을 근거로 그것들을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질문의(3-4절) 주제가 되는 구약 본문은 신 24:1-4이다. 거기에 보면 만일 남편이 "그녀에게서 어떤(SOME) 불결함"(신 24:1)을 발견하는 경우를 언급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이혼이 허용되는 경우는 하나 이상의(some) 사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 24:1에는 어떤 이혼 사유에 해당되는 특정 죄를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사실 "죄"라는 단어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 내용상 아내가 어떤 도덕적 잘못을 저지른 사유로 인해 "버려지는" 경우를 말씀한 게 아니다.
유의할 것은 문맥상 재혼이 허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 24:2은 이렇게 되어 있다. "그녀가 그 사람의 집에서 나간 후에는 그녀가 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수 있느니라." 근본주의자들은 즉각 막 10:11-12로 달려가서 이렇게 말한다. "오, 그러면 안돼, 그렇게 하면 그녀는 두 남편을 갖게 되는 것인데 그것은 간음이야."
여러분은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아내를 "버리셨다"는 것을 아는가? - 사 50:1; 렘 3:8.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내인 이스라엘을 버리실 때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아는가? "그녀가 내 아내가 아니고 나도 그녀의 남편이 아님이라"(호 2:2). 다른 말로 하면 법적으로 이혼이 성립되면 남편과 아내는 더이상 서로에게 배우자로 묶여 있지 않다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몸소 그 사례를 보여주셨다.
나의 첫번째 아내가 나를 유기하고 이혼 소송을 제기했을 때(당시 아내는 나를 일년간 유기한 상태였기에 앨라배마주 당국은 내게 자동적으로 이혼 청구 권리가 발생한 것으로 판단했다) 펜사콜라 크리스찬 대학은 내가 목회하던 브렌트 침례교회의 자산을 가져가려고 노력했다. 그당시 홀튼은 밥 존스 대학과 경쟁 관계에 있지 않았기에 그들은 밥 존스 주니어를 통해 내게 사임 요구 서신을 보냈다. (내가 목회하는 기간 동안 그 교회는 재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었기에 그들의 의도는 나를 교회에서 몰아내고 교회를 홀튼의 재정적 관할 아래 두고 그에게 팔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밥 존스 주니어는 내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성경에서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딤전 3:2)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이혼한 상태이니 목회자 자격이 없습니다." 나는 그에게 답신하면서 이렇게 썼다. "좋습니다, 저는 곧 재혼할 생각이고 그러면 자격 문제가 없겠군요." 그는 다시 내게 편지를 보내서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안되는 일입니다, 당신이 재혼한다면 두 명의 아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그에게 썼다. "당신은 내가 아는 대학 총장 중에서 0+1=2라고 주장하는 유일한 분이군요."
이제 성결교 그룹은 가르치기를 여러분이 이혼하고 재혼하면 그것이 간음이라고 하면서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전 배우자와 재결합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구약 율법에서 명백히 금지된 것이다. 신 24:3-4에서, "만일 그 나중 남편도 그녀를 미워하여 그녀에게 이혼증서를 써서...그 나중 남편이 죽었으면 그녀를 내보냈던 전 남편은 그녀가 더럽혀진 후에는 그녀를 자기 아내로 다시 취할 수 없나니, 이는 그것이 주 앞에 가증한 것이기 때문이라"
예수께서는 자신은 이혼을 찬성하지 않는다고 밝히시면서도(5절) 하나님께서 구약에 이혼을 허용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구약에는 중생, 그리스도께서 성도 안에 내주하심, 구원의 영원한 보장 등이 없었다. 여러분에게는 구약 성도들이 갖지 못했던 확실한 이점들이 있다. 구약 유대인들의 마음이 완고했기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유로든 그들이 이혼할 수 있게 하셨고, 또 신약 크리스찬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일부다처제도 허용하셨던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과 반대인 "허락하신" 뜻이라 부른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의도하지 않으셨으나 허용해 놓으신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행 21장에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간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고,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가지 말라고 여러번 경고하셨다. 그럼에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결국 갔고 하나님께서는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그를 돌봐주셨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허락하신" 뜻 아래 움직였고 그 결과 그는 감옥에 갇혀서 2년의 시간을 사역하지 못하고 허비해야 했다. 그후 바울은 주께서 애초에 의도하신 대로 로마로 가게 되었지만(행 23:11), 1등 객실에 앉아서 갈 수 있었을 여정을 난파선 나무토막을 붙든 죄수 신분으로 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네명의 아내를 갖는 것을 허용하셨지만 야곱은 한 번의 결혼만 했다면 피할 수 있었을 문제들을 겪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어떤 이유로든 이혼할 수 있게 허락하셨지만 그 결과로 유대인들에게는 문제가 생겼다(말 2:14-16). 여러분이 하나님의 길과 자신의 길 가운데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하나님의 허용하신 뜻이 아닌 직접적인 뜻에 따르기로 결정하는 편이 인생의 많은 슬픔들을 피할 수 있는 현명한 선택이다.
이제 예수께서는 그 바리새인들에게 이혼에 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을 밝히셨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혼을 반대하신다는 것이었다. 여러분 가운데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을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여러분은 어떤 독설가들이 럭크만의 이혼에 대해 떠들어대는 말들을 들었을 것이다. 나는 이혼 찬성자가 아니며 이혼을 추천하지도 않는다. 또한 나는 아내를 "버린 적"도 없다.
여러분은 "럭크만, 당신은 두 번이나 이혼했지 않나요?"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 하지만 나는 그 두 번을 내가 먼저 이혼을 주장하여 이혼한 것이 아니다. 나는 결혼 서약을 지키는 것을 중시한다: "좋은 날이나 궂은 날이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하리라." 그런데 여러분은 현재 미국의 50개주에서 "유책사유 없는" 이혼을 합법화했음을 아는가? 즉, 배우자 중 한 사람이 결혼을 깨기 원하면 그 상대편은 혼인 유지를 원한다 해도 이혼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첫번째 결혼에서 배운 교훈은 만일 여러분의 배우자가 무조건적으로 결혼을 깨고 싶어할 경우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에 개입하시지 않는 이상 여러분에게 이혼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속담이 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어떤 결혼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부부가 둘다 같이 살기를 원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 결혼은 파탄나게 되어 있다. 따라서 결혼 생활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부부에게 내가 하는 충고는 그들이 이혼을 생각하기 전에 그 결혼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시도해 보라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결혼에 대해 규정하신 바, 합법적인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하는 것이다. 미국 연방 대법원이 이것과 다른 판단을 내릴지라도 그들이 틀렸고 성경이 맞다! 하나님께서 결혼 제도를 제정하셨고(6절) 대통령, 의회, 대법원이 한 게 아니다. 정부는 흑인과 백인, 여자와 남자, 아이와 어른, 멕시코인과 미국 시민들이 차이가 없다고 말하고 모슬렘은 평화의 종교이며 호모와 레즈비언들의 결혼을 인정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그런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느니라"(6절)이지 두 호모, 두 레즈비언을 부부로 만들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아들(여러분이 하는 생각과 "감정"을 아시는 그분)이 하신 말씀에 따르면 "남자는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서 그의 아내와 합하여"(7절)야 한다. 그렇다면 첫번째로 생기는 문제는 "남자"와 "그의 아내"가 아닌 두 호모와 두 레즈비언이 어떻게 "혼인"을 할 수 있는가이다. 두 호모가 결혼하면 그 둘 중 어느쪽이 "아내"인가? 누구도 아니다! 두 레즈비언이 결혼하면 그들 중 누가 "남자"이자 "남편"인가? 누구도 아니다. 나는 그들 중 남자 역할을 하는 쪽이 있다 해도 개의치 않는다.
여러분이 남자가 아닌데 남자인 척 하는 것은(여자가 아닌데 여자인 척 하는 것) 여러분을 위선자로 만들 뿐이다. 위선자는 자기가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런 척 가장하는 사람이다. 여자는 남편이 될 수 없고 남자는 아내가 될 수 없다. 여러분은 "그것을 누가 정하지요?"라고 할지 모르나 그것은 사전적 정의이다. 여러분의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의 의미와 상이하다면 그 믿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한 사회가 "성 해방"을 시도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태워 재로 만들어 버리셨고(벧후 2:6) 그 성도착자들은 지금도 계속 불타고 있다(유 7절 - "영원한 불"). 하나님께서는 그런 더러운 짓에 대해 땅을 오염시키는 "가증함"(레 18:22)이라 하시면서 그로 인해 땅이 "스스로 그 거주자들을 토해 내느니라"(레 18:25)고 말씀하셨다. 신약에서도 이 원칙은 달라지지 않았다(롬 1:26-27). 여러분은 그와 동일한 죄를 짓고 있는 미국의 미래가 정확히 소돔과 고모라처럼, 카나안인들처럼, 그리고 하나님의 택하신 민족처럼(예레미야 애가를 읽어보라) 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8절에서 우리는 결혼의 핵심 요소가 무엇인지 보게 된다: "그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니, 따라서 그들은 더 이상 둘이 아니요 한 몸이라." 따라서 결혼 제도와 관련한 법적, 사회적 측면은 논외로 하고 결혼이란 기본적으로 한 남자와 여자가 육체적으로 결합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 점에 대해 엡 5:31에서 본문과 똑같이 반복해서 말한다. 그렇기에 아내와 결합하는 것과 동일하게 창녀와 결합하는 호색가들은 잘못 가고 있는 것이다(고전 6:16). 어떤 형제들은 그들이 결혼 증서를 한 장 가졌고, 결혼식을 한 번 했고, 결혼 반지가 하나이기에 그들이 딤전3:2의 조건을 지켰다고 생각하는데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들은 그 결혼을 하기 전 대여섯 명의 여자들과 한 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자들이 "목회자는 한 번만 결혼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고 생각해 보라!
8-9절의 문맥에서 "나누지"(putting asunder)라는 표현은 신 24:1의 "이혼증서"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배우자 외의 상대와 육체 관계를 갖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와 쌍을 이루는 11-12절에서 이혼이 허용되는 케이스로 언급한 것이 "음행"이다. "음행"은 근본주의자들이 잘못 가르치는 것처럼 단지 "혼전 성관계"만을 뜻하지 않으며 간음을 포함한 어떤 종류의 성적 범죄도 가리킬 수 있는 말이다(고전 5:1, 10:8; 유 7절). 따라서 음행이나 간음은 이혼의 사유가 된다. 배우자가 죽었을 때에도 "이혼"이 발생하므로 과부나 홀아비는 죽은 배우자에게 "법으로 매여 있"지 않다(롬 7:1-2). 상대편 배우자에게 유기당한 경우에도 이혼이 허용되는데(고전 7:15) 이는 버리고 떠난 측이 유기당한 측에게 "합당한 애정"을 주기를 거부한 것이기 때문이며(고전 7:3) 그렇다면 그 결혼의 구속력이 파기된 것이다. 또한 적법한 과정으로 이혼이 되었다면(간음, 유기, 혹은 죽음) 피해를 입은 측 배우자는 재혼할지라도 죄를 짓는 게 아니다(고전 7:27-28).
따라서 적법하게(즉, 성경적 이유로) 이혼한 남자는 딤전 3:2의 제약 조건에 들지 않는다. 아내가 남편을 배반하거나 유기하고 떠났다면 남편은 합법적으로 이혼 상태가 된 것이며 그는 더 이상 그 아내에게 묶여있지 않고 그가 재혼할지라도 "두 아내"를 가진 것이 아니다. 그가 현재 결혼한 아내만 있는 것이다. 그는 그 아내에게 신실하면 된다. 딤전 3:2은 일부다처제를 금한 것이지 성경적 이유에 따른 이혼과 재혼을 막는 말씀이 아니다.
본문을 넘어가기 전에 두 가지 더 보충해야 할 사실이 있다. 첫째는 3절에 있다: "그러자 주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모세가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명령하였느냐?”라고 하시니" 여기서 아스트룩, 그라프, 벨하우젠, 그 외 고등비평가들의 주장은 무너진다. 여러분의 구주의 말씀에 따르면 모세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그리고 신명기를 기록한 것이 맞으며, 바빌론 포로기나 신구약 중간기에 살았던 그 어떤 익명의 J, E, P, D, H, 그리고 R 기자가 그 책들을 쓴 것이 아니다. 이 바보들은 자기들이 저자로서 모세의 권위를 박탈하려 하는 그 성경을 쓰신 분이 우주에서 가장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이다. 또 그들은 자기들이 비평하는 주의 책이 자기들을 비평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히 4:12). 그들이 자격을 박탈하려 하는 그 저자가 심판석에서 그들을 고소할 것이다(요 5:45-47).
두번째로 6절에 중요한 사실이 있다: "창조의 시작부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느니라. 이 대목에서 다윈, 헉슬리, 라이엘, 호킹, 그리고 도킨스는 나가 떨어진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행하실 때(요 1:1-3) 거기에 누가 있었는지 묻고 계신 것이다. 물질의 영원성, "빅뱅", 우연의 일치, 자연발생설, "진흙에서 낙원으로", 고생대, 중생대, 트라이아스기, 쥬라기, 미싱링크,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루시", 네안데르탈인, 베이징원인, 자바원인, 네브라스카인 등은 다 허튼 소리에 불과하다. B.C. 1500년에 모세가 기록한 대로 하나님께서 6일 동안 현 세상을 창조하셨고 하나님께서는 6일째 되는 날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교황이 여러분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태고의 곤죽으로부터 진화된 "원숭이 인간" 한 쌍을 골라내신 후 그들을 "아담과 이브"라 부르신 게 아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창세기는 신화다"라고 말했을 때(Omni magazine, 1984년 12월, pg. 68), 또 그가 1996년 10월 23일 교황청립 과학원 앞에서 그 가르침이 맞다고 재확인했을 때 그 자는 자기가 지상에서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적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고 모세가 창 1장에 기록한대로 그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확증하셨다.
13 그때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주께 데려오니, 이는 그들을 어루만져 주시기를 바람이라. 그러나 제자들이 아이들을 데려온 사람들을 꾸짖더라.
14 예수께서 그것을 보시고 몹시 언짢아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들의 것이니라.
15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처럼 영접하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시고
16 그들을 양팔로 안으시며 그들에게 안수하여 축복해 주시더라.
우리는 이 구절들을 어떻게 영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9:36-37, 42 주석에서 다룬 바 있다.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사랑하시네"라는 노래의 가사는 진실을 담고 있지만 여러분 자신이 성인이라면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함에 있어 신중해야 할 것이다. "선악 간에" 분별할 줄 모르는 아이는(신 1:39) 죄의 책임을 지지 않는데 이는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롬 5:13). 그러나 양심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이 효력을 발하는 시점에 오면 그 아이는 죄의 책임을 지게 되며(롬 2:15) 아이가 성장할수록 양심이 그를 고소하는 죄목들은 더 늘어난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죄인이자 하나님의 원수로 간주된다(롬 5:8-10). 어떤 거듭나지 않은 성인 남녀가 아무리 양심적으로 살고 있다 해도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없다. "예수 나를 사랑하시네! 성경에서 말씀하시니 나 그것을 아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정죄를 받지 아니하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정죄를 받은 것이라. 이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요 3:18).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그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하더라"(요 3:36).
"주께 속한 어린아이들"에 대한 가사는 맞을 수 있지만 그것은 자기 의에 차서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다 자란 죄인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말이다. 여러분이 "어린아이들"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다면 먼저 그리스도를 믿고(요 3:15-16) 중생을 받음으로써(요 3:3-7)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처럼 영접"(15절)해야 한다.
수많은 의사들, 변호사들, 은행가들, 사업가들, 정치인들, 그 외 "거물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들은 어린아이처럼 믿으려 하지 않는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형제들아, 너희는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육신을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자도 많지 않으며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자도 많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선택하심은 지혜로운 자들로 부끄럽게 하시려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세상의 약한 것들을 선택하심은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는 것이라"(고전 1:26-27).
성경에 예수께서 "기뻐하시며"라고 말씀한 유일한 대목은 성부 하나님께서 어떤 것들을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에게 감추시고 "어린 아기들에게는 나타내신 것"(눅 10:21)을 주께서 보셨을 때이다. 따라서 여러분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계시의 조명을 받고 싶으면 먼저 겸손하게 자신을 어린아이의 수준으로 낮춰야 한다.
17 그후 주께서 길에 나가시니 어떤 사람이 달려와서 주께 무릎을 꿇고 묻기를 “선한 선생님, 내가 영생을 상속받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리이까?”라고 하니
1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네가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 네가 계명들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이지 말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하시니
20 그가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선생님, 이 모든 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지켜 왔나이다.”라고 하더라.
21 그러자 예수께서 그를 쳐다보시고 사랑하시며,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가 가진 것은 무엇이든지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 있는 보물을 가지게 되리니 그런 후에 와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더라.
22 그러나 그는 그 말씀에 슬퍼하고 근심하며 가니 이는 그가 많은 재산을 가졌기 때문이라.
이 질문의 내용에 유의하라: "내가 영생을 상속받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리이까?"(17절). 신약의 독자는 이 질문을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먼저 이것을 천년왕국에서 받게 될 유업과 관련된 내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고전 6:9-10; 갈 5:19-21). 바울은 성도들에게 죄로 인해 그 유업을 상실할 수 있다고 경고했기에(엡 5:5-6) 영원한 생명을 얻고 지키는 것과 성도의 행위는 관련이 없다. 바울은 또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너희가 그로 인해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크리스찬의 육신은 죄로 인해 멸망할 수 있지만 그의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받게" 될 것이다(고전 5:5).
그런데 영생 자체가 유업이 될 수도 있다(벧전 1:4). 17절의 본연의 의미가 그것이다(참고. 마 19:16). 그렇다면 신약 성경 전체를 알고 있는 여러분은 이 사람의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하겠는가?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요 3:15, 36).
"내 양들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또 아무도 나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할 것이니라"(요 10:27-28).
"이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라"(롬 6:23).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이라. 그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씀은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며, 또한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도록 하려 함이라"(요일 5:11-13).
여러분이 약간의 지각이라도 있다면 위와 같이 대답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에게 이런 바보같은 대답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회개하고, 믿고, 고백하고 침례받으라" 혹은 "성령 침례의 초기 증거인 방언을 받아야 한다" 혹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를 찾아서 거기에 등록하고 성사들을 받으라, 그리고 은혜의 상태에서 죽으라" 같은 식으로 말이다. 이런 방식들을 통해 얻는 결론이란: "어쩌면 너는 구원받을 것이다"에 불과하다. 이런 식으로는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얻지 못한다. 내 말이 의심스럽다면 이와 같은 신조들을 고백하는 자에게 가서 그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갈 확신이 있는지 물어보라. 그들은 전혀 확신을 갖고 있지 않다. 나는 그것을 아는데, 그런 질문을 많이 해 보았다. 캠벨주의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는 하늘에 가기를 소망합니다." 은사주의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는 하늘에 있기를 소망합니다"(즉 그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 3:28-30 주석을 보라). 카톨릭 교도들은 누구나 죽기 전까지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성경은 여러분이 그것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한다(요일 5:13). 이제 여러분은 그것을 아는가, 모르는가? 모른다면 왜 모르는 것인가? 혹시 여러분의 신앙의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구속 사역이 아닌 다른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이 당연지사다.
이제 예수께서는 그 친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안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믿음, 은혜 혹은 복음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시종 행위에 대해서만 말씀하셨다.
이것이 구약적 구원과 신약적 구원의 차이점인데 그 두 방식은 절대 같지 않다. 예수께서는 이 사람에게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주께서는 "이것을 하지 말라"(19절), "이것을 행하라"(21절)는 말씀을 하셨다. 여러분이 오늘날 이와 같이 설교한다면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된다(갈 1:6-9). 성경을 올바로 나눠서 해석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딤후 2:15).
이 사람은 율법 하에 있는 유대인이었다. 예수께서는 아직 인류를 위해 죽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행 20:24)은 그 당시 누구에게도 계시되지 않은 상태였다. 바울도 아직 구원받지 않은 때였고 그는 바리새인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빌 3:5; 행 23:6, 26:4-5). 그리스도의 죽으심, 장사되심, 부활 이전까지 율법은 계속 유효했었고 여러분이 구약을 살펴보면 구원과 행위가 항상 결부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한 가지 사례를 제시하겠다.
겔 18:4-9을 보라. 근본주의자들은 4절의 끄트머리 단락만 떼어 인용하면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를 입증하려 한다: "범죄하는 혼은 죽으리라." 그리고 나서 그 근본주의자들은 본문의 나머지를 무시한다. 겔 18:5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의로워서 합법적이고 옳은 것을 행하고." 그리고 나서 6, 7, 8절, 그리고 9절에서 각종 행위들이 나온다. 그 본문에는 믿음이나 은혜에 대해 한 단어도 나오지 않는다. 겔 18장 9절은 이렇게 끝난다. "그는 의인이니 그가 반드시 살리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무엇에 근거해서 산다는 말씀인가? 행위에 근거해서이다.
이제 겔 18:21을 보라. 악한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는데 어떻게 구원받는가?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영접해서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러나 만일 악인이 자기가 범한 모든 죄들로부터 돌이켜서 나의 모든 규례들을 지키고 합법적이고 옳은 것을 행하면 그는 반드시 살 것이며 죽지 아니하리라."
행위! 시종일관 행위를 말씀하고 있다. 게다가 의인도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데 그가 "돌이켜 자기 의에서 떠나 죄악을 범하"(겔 18:24)면 그렇게 된다. 이것이 신약의 구원과 같아 보이는가? 당연히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바보같은 말을 하지 말라: "신구약 전체에서 구원받는 방식은 오직 하나 뿐이다" 혹은 "구약시대 사람들은 앞에 있는 십자가를 보고 구원받았고 신약시대 사람들은 뒤에 있는 십자가를 보고 구원받는다" 같은 어리석은 말들 말이다.
이제 예수께 나아와 "영생을 상속"받을 방법에 대해 질문하는 그 사람은 "젊고 부유한 관원"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눅 18:23에서 그를 "큰 부자"라 말씀하고 마 19:20에서는 그를 "청년"이라 부르는데, 또한 눅 18:18에서는 그를 "관원"이라고 일컫고 있다. 그는 존경의 염을 담은 정중한 표현으로 예수를 "선한 선생님"이라 부른다(17절).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그 청년의 칭찬하는 말을 곧바로 튕겨내시면서 말씀한다: "어찌하여 네가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18절). 여기서 예수께서는 "선한"이라는 단어의 뜻을 바울 서신서 맥락대로 사용하셨다(롬 3:12). 즉 선하다라는 말을 무죄한 상태라는 의미로 적용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보실 때 아담으로부터 주님 당시까지 살았던 어떤 인간도 "선하지" 않다. 사람들이 성경을 싫어하는 이유는 이 책이 인간 본성에 대해 한 가지도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어떤 의미에서 하신 것인지는 명백히 알 수 있다. 만일 주께서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분은 선한 분이 될 수 없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단지 "선한 선생님" 중 하나일 뿐이라면 그는 모세, 조로아스터, 마호메트, 부처, 공자, 달라이 라마, 교황, 스피노자, 칸트, 마르크스, 니체, 혹은 주립 대학 교수들이나 "아이비리그" 대학 교수들만도 못한 존재, 즉 보통 인간들과 같은 죄인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는 "선한 선생님"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는 신성모독을 일삼는 거짓말쟁이이거나 자기 기만에 빠진 정신착란자이지 "선한 선생님"일 수 없다. 그러나 주께서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 그런 분이라면 그는 단순히 "선한 선생님"이 아니라 "육신으로 나타나신"(딤전 3:16; 요 1:14)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주께 관한 모든 증거가 이 사실에 모아지고 있다(4:41, 8:31 주석을 보라).
19절에서 그리스도께서 그 부자 청년에게 하시는 말씀 중에 무엇이 빠져 있는지 보라. "네가 계명들을 아나니"(19절). 주께서는 십계명을 말씀하시는데 그 계명들 중에 빠져 있는 것들이 있다. 십계명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번째 그룹의 계명들은 여러분이 하나님께 바쳐야 되는 사랑을 다루고 있고 두번째 그룹은 여러분이 동료 인간들에게 보여야 할 사랑을 다룬다(12:30-31). 그리스도께서는 첫번째 그룹의 하나님과 관련된 네 계명들을 아예 거론하지 않으셨다. 이 구절을 솔직한 자세로 받아들여보자. 우리가 온 마음과 혼, 힘과 생각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여러분이 자신에게 솔직하다면 하나님보다 자신을 앞세운 적이 많이 있었음을 인정할 것이다. 그것은 우상숭배인데 여러분은 십계명을 여러번 어겨 왔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청년에게 중요한 뭔가를 가르치시기 위해 하나님과 관련된 계명들을 빼고 말씀하신다. 이는 그 청년이 온 마음과 혼, 힘과 생각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곧 보겠지만 이 청년은 마음에 우상을 품고 있는 "물질숭배자"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배제하신 두번째 계명이 떠오르는데 그것은 탐심을 경계하는 계명이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탐심은 우상 숭배"(골 3:5)이다. 따라서 이 청년은 그가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지 않았고 이웃 사랑도 실천하고 있지 않았는데 이는 그에게 탐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 예수께서는 율법을 적용하시어 그 청년이 자기 죄를 발견하게 하신다: "이는 계명에 의한 죄가 심히 죄 많게 되게 하려는 것이라"(롬 7:13). 이것이 율법의 용도 중 하나인데 율법은 죄를 드러나게 하고 죄인에게 죄책을 느끼게 한다. 다른 두 가지 용도를 말하자면 하나는 죄악 세상에서 율법이 심판의 기준으로 작용한다는 것이고(딤전 1:9-10) 또 하나는 하나님의 의 가운데로 죄인을 인도하는 원천이 율법을 완전하게 준수하신 단 한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라는 것이다(갈 3:24).
19절에 제시된 계명들을 다루면서 두 가지 언급할 사항이 있다. 첫째는: "살인하지 말라". 자유주의자들과 불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너는 살인하지 말지니라"(출 20:13)고 말씀하신 다음에도 이방인들을 살육할 것을 명령하셨다는 이유로 성경에 대한 비방을 늘어놓는다. "지나치게 동정심 넘치는 사람들"은 사형 제도가 살인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며, 평화주의자들은 그와 동일한 이유로 전쟁을 반대한다. 그와 동일한 이유로 그들은 "아홉 명의 신사들"(오늘날은 여자도 가능하게 되었지만)이 미 연방대법원 판사의 자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정의내리고 해석할 수 있게 권한을 주었으며, 전능하신 하나님께로부터는 그 권한을 빼앗았다.
주께서 "너는 살인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의미는 분명하다. 그 계명은 주께서 제정하신, 특히 살인자에 대한 처벌로(창 9:6) 제정하신 사형 제도의 적법성 여부와는 무관하다. 그 계명에는 전쟁이 빠져 있다. "주는 전사시요"(출 15:3) 주께서는 전쟁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다(출 17:14-16; 삼상 15:2-3). 주께서는 구약에서 "살인"이 무엇인지(출 21:12-14; 신 19:11), 신약에서 어떤 의미인지(마 19:18- "살인하지 말라") 정의내려 놓으셨다.
여러분이 막 10:19에서 주의해야 할 것 두 번째는 "속이지 말라"이다. 이것은 엄밀히 말해 십계명 중 하나가 아니지만 8계명과 9계명의 내용에 포함된 요소이며 ("너는 도둑질하지 말지니라"; "너는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그것에 대해 레 19:11-13이 말씀하고 있다. 예수께서 "속이지 말라"는 계명을 던지신 이유는 그 청년의 신분이 관원이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관원들 중 하나로서 그는 사람들을 속일 수 있었다(삼상 2:29-30 참고. 삼상 12:3-4).
이제 20절에서 그 청년이 그리스도께 대답하는 말과 2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라. 20절: "선생님, 이 모든 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지켜 왔나이다" 21절: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청년은 예수께 말씀드렸다. "예수님, 저는 말씀하신 그것들을 항상 지켜왔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청년이 거짓말한다고 책망하지 않으신다. 그 청년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마 5:28) 것을 하지 않았기에 그는 간음죄도 짓지 않았다. 그는 "까닭없이 자기 형제에게 노하는"(마 5:22) 경우나 "자기 형제"를 미워한(요일 3:15) 적이 없었다. 그는 자기 부모를 존중하고 그들의 말에 복종해 왔었기에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참으로 선한 사람이었다. 그는 마 23장의 바리새인들처럼 위선자가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그 청년의 의와 신실함을 보시고 그를 사랑하셨지만 그 부자 청년에게 한 가지 시험을 부과하셨는데 그것은 주께서 생략하신 한 계명에 관련된 시험이었다: "너는 탐내지 말지니라." "네가 가진 것은 무엇이든지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 있는 보물을 가지게 되리니"(21절). 다시 말해서 자기 재물을 아끼는 마음을 내려놓고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그런 후에 와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하나님이니(18절) 너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과 네 탐심을 버리고 나를 사랑하라."
물론 그 젊은 관원에게 있어 "십자가를 지고"라는 말씀의 의미는 8:34에서 제자들이 들었던 말씀과 같은 의미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 청년의 죄들을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게 된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의 골자를 이해했는데 그것은 그가 자아와 탐심에 대해 죽어야 된다는 의미였다("자기를 부인하고" - 8:34). 그것은 여전히 행위를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그 청년이 그리스도 바깥에 있는 채로(구약적 상태) 주를 따르는 제자가 된다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17절)이나 천년왕국의 통치권("하늘에 있는 보물" - 21절 참고. 마 6:19-21)을 가지려면 여전히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따라야 했다.
따라서 여러분이 보고 있는 장면은 완전한 구약적 상황 하에서 신약의 구원을 모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사실이 모든 보수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그들은 모형을 실제로 만들어놓는데 그것은 틀린 해석이다. 본문에서는 구약적 구원의 방식인 행위가 여전히 강조되지만 그와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예표적으로 나타난다. 성경이라는 책은 양날이 있는 면도날과 같아서 가죽 장갑을 끼지 않고 만지면 손을 베여서 피를 흘릴 수 있다. 여러분은 성경의 모든 내용을 맹목적으로 바울 서신서들에 끼워 맞추면 안된다. 어떤 본문은 영적, 교훈적으로 적용할 수 있지만 교리적으로는 여러분과 이 시대에 적용할 수 없다.
이 장면 이전까지 부자 청년 관원이 구약적 의미에서 "구원을 받은 상태"였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리스도와 만난 후 그는 잃어버린 죄인의 상태로 떠나간다. 왜 그런가? 그리스도께 "영생의 말씀들"(요 6:68)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그리스도께 나아왔었던 것이다(요 5:40). 그 부자 청년 관원이 깨달았건 아니건 예수께서 그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은("나를 따르라") 그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시금석이었다. 그 이전까지 어떤 계시를 따라서 살았던간에 "슬퍼하고 근심하며 가니 이는 그가 많은 재산을 가졌기 때문"(22절)이라 나와 있는 장면에서 그가 그리스도를 등지고 가는 순간 그의 구원은 날아간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재물"(마 6:24; 눅 16:13) 사이에서 선택을 했고 그가 붙잡은 것은 재물이었다.
여러분이 영적인 적용을 하고자 하면 이렇게 하라. 여러분은 자신을 "선한" 사람이라 여기는가? 자, "선한" 신사나 "선한" 숙녀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그들에게 내려놓으신 평가를 수용할 것이다(롬 3:10-23). "선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그에게 거저 주실 때(롬 10:3-4) 그분의 호의를 고의적으로 모른 체 하고넘기지 않을 것이다. "선한" 사람은 그의 죄들을 대신해서 죽으실 만큼 그를 사랑하신 정말 좋으신 분 앞에서 고개를 높이 쳐들지 않을 것이다. 진짜 "선한" 사람은 그런 좋은 분을 보았을 때 자신의 의를 "배설물"로 간주하고 버릴 것이다(빌 3:8-9). 달리 말하자면 여러분이 "정직하고 선한 마음"을 가졌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 대해 하신 말씀, 곧 자기 의와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말씀에 귀를 기울일 것이며 그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처럼 받을 것이다(눅 8:15 참고. 살전 2:13).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있다면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말라.
23 그때 예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재물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라고 하시니,
24 제자들이 그의 말씀에 놀라더라. 그러자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자녀들아, 재물을 신뢰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
25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쉬우니라.”고 하시니
26 그들이 몹시 놀라며 서로 말하기를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라고 하더라.
27 또 예수께서 그들을 주시하며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하나 하나님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이는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함이라.”고 하시니라.
그 청년 관원은 그가 사랑하는 "많은 재산"(22절)을 포기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해 슬픔에 빠졌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돌이켜 이렇게 말씀하신다. "재물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23절). 본문에서 예수께서 다루시는 왕국이 영적인 왕국이기에 우리는 이것을 신약적 구원에 적용할 수 있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막는 요소들이 있다. 바울은 그것을 이 세상의 지혜(고전 1:21)라 말했다. 막 4:19을 다루면서 우리는 "재물의 속임수"로 인해 믿는 자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배웠다(해당 구절의 주석을 보라). 어떤 사람에게는 재물이 그의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데(눅 16:13) 여기 막 10:24에서 보듯이 여러분은 주님 대신 재물을 신뢰하게 될 수 있다.
2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그의 말씀에 놀라더라". 그들은 왜 놀랐는가?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정직한 자에게 재물을 보상으로 주신다고 나오기 때문이다. 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피하는 사람"(욥 1:1-3)이었기에 부자가 되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였기에 부자가 되었다(창 13:2-4). "재물"은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에 포함되어 있었다(창 27:28, 39 참고. 창 36:7). 하나님께서는 주를 신실하게 섬긴 다윗에게 재물을 허락하셨다(대상 29:12, 28). 하나님께서는 주의 지혜를 구한 솔로몬에게 "재물"도 주셨다(왕상 3:11-13; 대하 1:11-12). 하나님께서는 여호사밧을 부자가 되게 하셨고(대하 17:5) 히스키야도 마찬가지였다(대하 32:27). 다윗은 시편 112:1, 3에 이렇게 썼다. "주를 두려워하고 그의 계명들을 크게 기뻐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부와 재산이 그의 집에 있을 것이며 그의 의가 영원히 지속되는도다."
그러니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에 제자들이 크게 놀란 것은 당연했다. 그 청년 관원은 부자일 뿐 아니라 그 부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는 의로운 삶의 증거도 갖고 있었다. 제자들은 그 청년이 영생을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재물이나 돈 자체가 사람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다. 돈이 "모든 악의 뿌리"가 아니며 "돈을 사랑하는 것"(딤전 6:10)이 그렇다. 본문에서도 재물 자체가 부자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신뢰하는 것이 그렇게 한다(24절).
부패하고 배교한 RSV, NRSV, "보수적인" ESV, NIV, 그리고 NASV은 본문에서 "재물을 신뢰하는 자들"이라는 단어들을 제거함으로써 구원받는 것 자체가 "어렵고" "힘든" 일인 것처럼 만들어 놓았다. 절대 그렇지 않다! 구원받는 것은 자기 앞의 물컵을 들어서 물을 마시는 것만큼 쉽다(계 22:17; 거기서 "값없이"라는 단어를 잘 보라). 구원은 선물을 받는 것과 같으며(롬 6:23; 거기서 "값없는"이라는 단어를 잘 보라) 구원은 누군가 여러분에게 준 수표를 은행에서 찾는 것과 같이 쉽다(롬 3:24; 거기서 또 "값없이"라는 단어를 보라). 구원은 초청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간단하다(창 24:58; 마 11:28-30; 눅 14:16-24). 구원은 목욕이나 샤워를 하는 것처럼 단순하다(막 1:40-44). 구원은 문을 열고 누군가를 집 안에 들이는 것과 같다(계 3:20). 그런데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다, 구원은 어떤 것을 보고 사는 것처럶 쉽고 간단하다(요 3:14 참고. 민 21:8-9).
"재물을 신뢰하는 자들이"라는 표현을 없앤 것에 대한 필사본 증거는 네 개의 헬라어 사본에 근거한다: 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델타, 그리고 프시. NIV와 ESV의 각주에는 "어떤 사본들은 본문에 재물을 신뢰하는 자들이라는 구문을 첨가하였음"이라고 되어 있다. 자, 오직 네 개 사본만이 해당 구문을 생략했다면 킹제임스 본문을 지지하는 다수 사본들을 "어떤 사본들"이라 부르는 것은 합당치 않은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당연히 이 "뛰어나고 경건하며 헌신된" 번역자들과 성경 개정자들은 필사본 증거에 관해 거짓말하지 않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들의 동기는 매우 순수할 것이다, 그런가? 그들이 여러분에게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을 주는 것을 원하겠는가?
그들을 절대로 신뢰하지 말라. 여기에 KJV 본문을 지지하는 "어떤 사본들"의 목록이 있다: 나머지 모든 헬라어 필사본 증거들, 네 가지 계통의 모든 헬라어 사본들, 모든 판본들, 구라틴과 벌게이트, 그리고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이 기록된 시점보다 100년은 족히 앞선 2세기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그는 카톨릭도 지지하는 교부이다)가 그것을 인용했다. 그 학자들은 정치인들만큼이나 솔직하지 못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경고는 "재물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경고는 성경 전체에 걸쳐 나온다. 욥은 자신의 재물을 신뢰하지 않았다(욥 31:24-25). 다윗은 여러분이 재물을 신뢰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구속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시 49:6-7). 하나님께서는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신뢰하는 사람을 멸망시키겠다고 말씀하셨다(시 52:5-7). 세상에서 가장 부유했던 한 사람(솔로몬)은 재물을 신뢰하는 것은 자만심이라 말했고(잠 18:11) 그 자만심으로 인해 멸망이 찾아온다고 말했다(잠 11:28). 사도 바울은 부자들에게 "불확실한 재물을 신뢰하지 말며"(딤전 6:17)라고 말했다. 또한 라오디케아인들의 교회가 자신의 부와 상품들을 자랑할 때 주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비참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고, 헐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 여러분의 구원을 "어렵고" "힘들게" 만드는 유일한 장애물은 하나님께서 믿으라고 하신 것 외에 다른 무언가를 신뢰하는 생각이다.
막 10장으로 돌아와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쉬우니라.”고 하시니"(25절). 24절에서 주께서 하신 재물을 신뢰하는 것에 대한 경고를 축소시킨 그 학자들은 25절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 이면에 있는 과장법과 풍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고 힘들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들도 그 학자들의 말을 듣다 보면 그것이 꽤 할만 하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25절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완전히 왜곡해서 여러분에게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가르친다! 그들은 "바늘귀"라는 단어가 그런 이름의 성문을 뜻한다고 설명하면서 성읍의 주요 성문들이 닫힌 밤중에 낙타들이 그 "바늘귀" 문을 통해 들어왔다고 말한다. 그 문을 통과하는 것은 낙타들에게 "어렵고 힘든" 일이었으나 낙타가 무릎을 꿇고 기어가면 어쨌건 그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런 성문은 이스라엘 전역 어디에서도 발견된 바 없지만 자신의 선행을 통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에게 이 사실이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그들이 몹시 놀라며 서로 말하기를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라고 하더라"(26절). 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 마태, 도마 등이여, 당신들은 왜 그리도 놀란 것인가? 구원을 받는 것이 무릎을 꿇고 성문을 통과하도록 훈련받은 낙타만큼의 노력만 있으면 될 일인데 말이다. 만일 "바늘귀" 문이라는 게 정말 실존했다면 낙타들이 그곳을 통과하는 것이 뭐가 그리 진기한 일이었겠는가 말이다. 그렇다면 자기 의에 가득찬 유대인들, 카톨릭, 희랍정교회, 성공회, 루터교, 감리교, 침례교, 장로교, 하나님의 성회, 그리스도의 교회 등은 모두 자기들의 노력으로 그 문을 통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말이 맞다면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이유가 없다.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하나"(27절). 25절의 낙타는 바늘귀를 통과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려면 기적이 필요했다 -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함이라." 예수께서는 과장법과 냉소적 표현을 사용하고 계시다. 낙타가 문자적인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낙타의 크기를 바늘귀보다 줄이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가 구원받으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거듭남의 기적을 일으키셔서 그가 자신의 재물 대신 그리스도를 신뢰하게 만드시는 방법밖에 없다.
28 그때 베드로가 주께 말씀드리기 시작하기를 “보소서, 우리는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주님을 따랐나이다.”라고 하더라.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는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자식이나, 토지를 일백 배로 받되 박해와 더불어 받겠으며, 또 오는 세상에서는 영생을 얻으리라.
31 그러나 먼저 된 많은 사람이 나중 되고 나중 된 사람들이 먼저 되리라.”고 하시니라.
언제나처럼 베드로가 먼저 나서서 말한다. 주께서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상황에서 보면 베드로가 먼저 나서서 입을 여는 경우가 많고 그러다가 실언하기도 한다. 베드로는 8:32-33에서처럼 큰 말실수를 하기도 하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정직하다.
베드로는 다른 모든 제자들이 했을 생각을 대변해서 말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주님을 따랐나이다"(28절). 그는 자신을 포함한 열두 제자들이 그 부자 청년이 순종하지 못한 주님의 요구 사항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문장 뒤에 한 가지 질문이 더 붙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갖게 되겠나이까?"(마 19:27). 달리 말하자면 "주께서 그 부자 청년 관원에게 하신 요구, 곧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라는 그 말씀을 우리는 순종하고 있으니 우리가 주를 따른 대가로 무엇을 얻게 되겠나이까?"였다.
29절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대답을 통해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헌신의 수준을 알게 된다. 그 헌신의 원칙은 눅 14:26에 나온다.
"누구든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나, 정녕,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은 채 내게로 오면 그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
예수께서는 마 10:37에서 그 "미움"이 어떤 것인지를 정의내리셨다. 여러분은 자신의 부모, 배우자, 자녀들, 형제 자매들, 심지어 자기 자신도 하나님보다 사랑해서는 안 된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과 여러분의 부모, 남편, 아내가 여러분에게 시키는 것이 서로 모순된다면, 또는 여러분의 자녀나 손주, 여러분의 형제, 자매들이 말하는 것, 여러분 자신이 말하는 것과 성경 사이에 괴리가 있다면 여러분은 성경대로 가야 한다. "이것이 첫째며, 큰 계명이니라"(마 22:38)는 말씀은 여러분에게 최우선이어야 한다. 여러분은 먼저 온 마음과 혼, 힘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그 후에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면 된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29절). 우리는 믿는 자의 동기에 대해 8:35에서 설명했으니 그 주석을 참고하라.
30절: "현세에서는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자식이나, 토지를 일백 배로 받되." "번영 신학"을 가르치는 자들은 본문의 이 부분을 인용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섬기면 자동적으로 건강하고 부유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구절의 나머지를 아직 다 읽지 않았다: "박해와 더불어 받겠으며."
성경의 약속은 이렇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영광 가운데서 그의 풍요함을 따라 너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이라"(빌 4:19). 또한 이런 약속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실 수 있나니 모든 것을 언제나 너희가 필요한 대로 가질 수 있게 하심으로 모든 선한 일에 넘치게 하시려는 것이라"(고후 9:8). 주께서는 여러분에게 시키신 일을 이루는 과정에 필요한 모든 물질들을 공급하실 터이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분은 "경을 치를 수도" 있다. "실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박해를 받을 것이라"(딤후 3:12).
"오는 세상에서는 영생을 얻으리라." 우리는 여기서도 신약 구원에 관한 영적인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으나 본문에서 명확한 사실 한 가지는 그리스도의 죽으심, 장사됨, 부활 사건 이전까지 "영생"은 행위 요소와 관련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자가 유의해야 하는 사실은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분명한 의도 하에 기록된 요한복음과는(요 20:31) 다르게 마태, 마가,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영생" 또는 "영원한 생명"(마 19:29)이라는 단어가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때 받는 유업과 동격처럼 언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본문과 같은 사건을 다루는 마 19:27-30을 읽어보면서 특히 28절을 잘 살펴보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를 따르는 너희들은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새 세대에,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따라서 여러분이 지상 왕국과 관련된 본문을 읽을 때는 신경을 써야 한다. 교리적으로 말해서 갈보리 이편에 있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대속과 그의 부활로 인해 영생을 상속받는 것과 가시적인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통치 중에 구원을 상속받는 것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양자의 그런 구분은 그리스도의 죽으심, 장사됨, 부활 이전에 살았던 구약 유대인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았고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는 교리도 마찬가지였다(9:9-10 주석을 보라). 당시 유대인들이 알고 있던 지식은 사람이 바른 마음 자세로 하나님께서 부과하신 율법에 따라 살면(삼상 15:22; 사 1:11-17; 미 6:8; 마 9:13, 12:7) 그 사람이 마지막 날 살아나서 영원한 생명을 받고 주께서 그를 주의 지상 왕국에 넣어주신다는 것이었다. 그 유대인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된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 알지 못했고, "야곱의 고난의 때"(렘 30:7)가 오기 전에 발생할 환란전 휴거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속 사역을 근거로, 죄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는 이치도 알지 못했다.
31절: "그러나 먼저 된 많은 사람이 나중 되고 나중 된 사람들이 먼저 되리라.”고 하시니라." 이 본문과 평행 본문인 마 19:30에도 이 표현이 나오지만 마 20:16의 일꾼 비유에도 이런 표현이 나온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인 지금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받을 수 있는 보상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문과 순교를 통과해야 했던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이 받는 보상과 차이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약 1:12 참고. 계 2:10). 물론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몸에 영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교리적으로 교회에 적용하려 하면 억지가 되지만 "예수에 대한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목베임을"(계 20:4) 당하는 것을 감수할 그 환란 성도들에게는 이것이 교리로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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