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送男兒塞北城 하늘 저 북쪽 변방으로 남아를 보냄이여 大東元氣一雷聲 대동의 원기를 큰 벼락 소리로 울렸다네 沙中狙伏張良銕 모래 속에 엎드려 엿보던 장량(張良)의 도끼요 殿上鷹飛聶政兵 대궐 위에 매 날려 보낸 섭정(聶政)의 병사로세 熱血無窮遼海湯 뜨거운 피는 끝없는 요해(遼海)를 들끓게 했고 悲歌不返浿江鳴 돌아오지 못한 슬픈 노래 패강(浿江)에서 불렀지 斜陽坐說當時事 저녁 무렵 앉아서 그 당시의 일을 말하다니 慚愧書生苟欲生 이 서생의 구차한 삶이 부끄럽기만 한 것을.
안중근 의사의 의거와 이어진 피체와 투옥 그리고 재판을 통한 사형 집 행의 전 과정을 누구보다 피 끓는 심정으로 지켜보았던 이가 인암이었을 것이다. 이는 그 자신이 일제의 폭거에 항거해 만세운동을 전개했고 이어 진 구금과 고문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보다 더 안중근 의사가 결행했던 일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인암은 기쁨 보다는 분하다는 감정을 표출했다. 시 제목 역시 그러했다. 이는 안 의사 의 이등박문에 대한 저격이 억울함을 당한 백성의 한사람으로서 당연히 했어야 하는 일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어진 고문과 재판, 그리고 이어진
사형 집행이 불합리하고 억울한 일이었다는 주장이다. 인암의 시구 가운데, ʻ大東元氣一雷聲ʼ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등박문이 기차에서 내려 환영군중 쪽으로 갈 때 권총 3발을 쏘아 사살 했고, ʻ대한만세ʼ를 외친 뒤 현장에서 체포된 정황을 단지 7글자의 한자로 서 생생하게 그려낸 ʻ경책(驚策)ʼ이었다. 안중근은 이후 불공평한 재판을 통해 사형을 언도받고 1910년 여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그 소식을 듣고 뒷날 인암은 "저녁 무렵 앉아서 그 당시의 일을 말하다니/이 서생의 구차 한 삶이 부끄럽기만 한 것을�♣繭箚� 공명(共鳴)했다. 인암은 유가의 학문을 철저히 학습한 이였다. 이는 이 시를 통해서도 짐 작할 수 있다. 장량의 고사나 자객의 고사를 적재적소에다 적절하게 사용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인암의 시를 읽는 데 있어서 장벽으로도 작용 하지만, 그 내용을 숙지해 오래도록 읊조리다보면 자연 맛을 느낄 수 있 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인암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세거하던 고향 땅 청기를 떠나 첩첩산중으로 숨어들어 은거했다. 그 때의 정황과 심경은 다음 두 수의 작품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壬子春余挈家向報恩俗離山中荷亭翠澗二叔贈惜別詩各一律因步其韻 而和之荷亭文瑞叔號
임자년(壬子年, 1912) 봄 내가 가족을 이끌고 보은(報恩) 속리산(俗離山)을 향할 때 하정(荷亭)과 취간(翠澗, 從叔) 두 숙부께서 석별하면서 율시를 주심에 떠나면서 화답하였다. 하정은 문서 숙부의 호이다.
愁殺今朝謝舊園 몹시 근심스러운 오늘 아침 옛 동산을 떠나니 彌天雨雪正紛紛 하늘 가득히 비와 눈이 펑펑 내리고 있네 思深蜀峽多明月 깊이 생각하니 좁은 산골엔 밝은 달도 비췄고 望極行山起白雲 아득히 바라보니 이어진 산엔 흰 구름이 이네 素患無違行患道 본래 근심은 어김없고 갈 길도 걱정인데
固窮焉屬送窮文 이 가난을 어디에다 하소연 할 수 있으리 臨分語及歸鄕日 헤어질 때 고향에 돌아오는 날을 물으셨는데 會待槿花更播芬 만날 날엔 무궁화 향기 다시 가득할 테지요.
1912년 가족을 이끌고 고향을 떠날 때의 심경을 노래한 대표작이다. 두 숙부의 전별시를 받아들고 즉석에서 화답한 작품이다. 때는 이른 봄이었던 것 같다. ʻ비와 눈이 분분(紛紛)하게 내린다ʼ는 표현으로 짐작할 수 있다. 고 향을 떠나자니 모든 것이 근심스럽기만 했다. 근심을 풀 방도도 없고 또 갈 길도 태산이다. 거기다 더해 가난이라는 굴레까지 벗어버릴 수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두 숙부들께서는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해 왔다. 인암의 대 답은 결연하고도 희망적이었다. "만날 날엔 무궁화 향기 다시 가득할 테지 요.��ʻ槿花更播芬ʼ이 그 답이었다. 그런데 인암은 그 시구 앞에 ʻ會待ʼ 라는 단어를 더했다. 이는 ʻ기다리겠다ʼ는 의미이지만 ʻ苦待ʼ 즉 ʻ애타게 기다리겠 다ʼ는 의사를 담고 있다고 본다. 조국의 광복을 애타게 기다려 즐겁게 환향 하겠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이제 식솔을 거느린 채 그 걱정스럽고 고단한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서 안착한 산중에서 남긴 작품을 보자. 산은 속리산 줄기인 구병산이다.
九屛山新居韻 구병산(九屛山) 새 거처 운
抱書深入九屛峨 책을 안고 깊이 들어오니 구병산(九屛山)인데 戶掩烟霞衣薜蘿 집은 안개로 가리웠고 벽라(薜蘿)옷 입었네 世降堪怜三淺海 세상이 날로 못해져 상전벽해가 이어지니 時平那待一淸河 시절이 평안해져 언제 쯤 태평시대 맞으랴 鹿門高士同栽葯 녹문(鹿門)의 높은 선비가 같이 약초를 재배하고 石室樵人共爛柯 석실(石室)엔 나무꾼이 함께 바둑을 두고 있도다 桑鄕安在川原闊 고향 땅은 어느 곳인가 산과 내로 아득하기만 한데 陟岵看雲遠思多 산에 올라가서 구름을 바라보니 사념만 많아지네.
이토가 오전 9시 15분 하얼빈 역에 도착해 차내에서 약 20분 정도 코콥초프와 대화한 후, 그의 권유에 따라 명예 사령관으로서 러시아 수비병을 사열하기 위해 열차에서 내렸다.[2] 그가 수행원의 안내를 받으며 러시아 군대 앞을 막 지나가는 순간, 안중근이 총알을 발사하여 이토를 명중시켰다. 그 중 두발은 복부에 맞았다. 안중근은 혹시 이토 히로부미가 아닐 것을 대비해 다시 3발로 주위의 수행비서관 모리 다이지로, 하얼빈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川上俊彦), 만주 철도의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를 쏘았다. 블라디미르 코콥초프 러시아 재무장관은 눈앞에서 일어난 사고에 당황하지 않고 쓰러진 이토를 부축했으며 이토는 그의 품에 쓰러졌다.[3] 수행원인 무로다(室田義文), 나카무라(中村是公) 등도 다급하게 이토를 껴안아 보호했다.[2] 이때 안중근은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되었다.[4]
안중근은 그 다음 에스페란토어로 '코레아 후라(한국 만세)!' 를 두어 차례 외친 뒤 러시아 헌병에게 잡혔다. 이토는 "당했다"라고 한마디 하였다.[2] 수행원들은 우선 이토를 차내로 옮기고 이토가 좋아하는 브랜디를 한잔 따라 건네주었다.[2] 이토는 이때 지팡이를 꼭 잡고 있어서 무로다가 이것을 빼내고 그의 손을 꼭 잡았다.[2] 이토 히로부미는 잠시 신음하다가 피격 30분 뒤인 오전 10시경에 사망했다.[2]
안중근 의사의 사형.
안중근 의사는 만주 뤼순 감옥에 갇혀 재판을 받아 사형을, 함께 거사했던 우덕순은 3년 형, 조도선과 유동하는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거사를 배후에서 도운 재 러시아 갑부인 교포 최재형이 러시아인 변호사를 준비시켰으나 일본은 러시아인 변호사의 접견을 금지했다. 안중근은 1910년3월 26일 오전 10시에 교수형을 당했다.
이후.
하얼빈 역 1번 플랫폼에는 거사 현장에 두 개의 도형이 그려져 있다.바닥에 안중근의 저격 지점과 이토의 피격 지점을 표시했다. 저격 지점엔 가로·세로 각각 50cm 크기의 정사각형 안에 세모를 그려 놓았다. 세모의 한 꼭짓점이 이토가 섰던 자리를 가리켰다. 이토의 피격 지점엔 정사각형 속에 또 다른 네모를 각도를 50도 정도 틀어 그려 놓았다.[5]
첫댓글 용기.기백.결단심.
어느 누구가 지금 현시대에 따라갈 있을까? 라고 생각해봅니다.
안의사님 우리나라의
영웅뿐 아니라 세계에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