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진리를 반대하는 이유
주님의 주권적인 안배로 소위 진리 변증 봉사를 해 온 지가 30여 년이 다 되어 갑니다. 그동안 여러 배경의 분들과 온오프 라인에서 진리 토론도 많이 하고, 상대방의 배경을 알려고 해당 교단을 대표하는 조직신학 책들과 관련 신학 석박사 논문들도 많이 읽어보았습니다. 솔직히 이런 과정을 통해 시야가 많이 넓어졌고, 저와 다른 주장을 하는 이들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토론들을 거치면서 두 가지 질문이 제 안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참된 진리는 반대가 전혀 없이 모든 이들에게 환영받을까?’라는 것과 ‘다수가 믿는 진리가 더 참될 가능성이 많을까?’라는 것입니다. 최근에 이 땅에 계셨을 때의 주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예를 되돌아보고 제가 내린 결론은 둘 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먼저 가장 성경과 일치하는 분들인 주 예수님과 사도 바울조차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유대인들의 극심한 반대를 받았습니다. 또한 그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유대인들은 바울이 전한 신약의 참된 가르침을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물론 그 이후로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 인격과 하나 되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이들과 이들을 반대하고 비판하는 이들은 서로 대척점에 서서 팽팽한 긴장을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을 온유하게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혹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하는 마음을 주시어
진리를 온전히 알게 하신다면,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던 그들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맑은 생각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딤후 2:25- 26).
사도 바울은 자신의 제자이자 영적 아들과도 같은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서 위와 같이 권면했습니다. 저는 아침에 위 본문을 통해 반대자들이 하나님의 신약 경륜에 따른 건강한 가르침을 반대하는 이유를 조금 더 깊이 묵상하고 추구해 보았습니다. 아래 내용은 그 결과입니다.
1) 마귀에게 사로잡힌 결과임: 바울은 위 본문에서 반대하는 이들은 그들의 생각이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반대한고 말합니다. 그는 이 시대의 신이 사람들의 “생각을 눈멀게” 한다고도 했습니다(고후 4:4). 한 예로, 주 예수님께서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제삼 일에 살아나게 될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이 일이 결코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라고 강하게 반대했습니다(마 16:22). 그러자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거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반대의 근원이 사탄임을 폭로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악의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아마도 주님을 아끼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그분의 죽음을 만류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그의 그러한 천연적으로 선한 생각을 이용하여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저지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예에서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의 성취보다는 자기 자신 혹은 자신이 속한 단체(교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마귀에게 사로잡혀 참 진리를 반대할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2) 진리를 부분적으로 알기 때문임: 위 본문의 ‘(진리를) 알다’의 원문은 ‘에피기노스코’(1922)로서 일반적인 ‘앎’에 ‘에피’라는 접두어가 붙어 ‘온전히 알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따라서 원문에 충실한 번역으로 유명한 <Weymouth New Testament>나 <국제표준역>(ISV) 등은 이것을 ‘a full knowledge’로 번역했습니다. 즉 위 본문은 반대자들이 진리를 부분적으로 알았던 탓에 반대했지만, 누군가에게서 온전한 진리를 듣게 될 때 회개하고 진리를 온전히 알게 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예가 ‘주 예수님은 부활 후 지금 어디 계시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참고로 바울이 쓴 동일한 로마서 8장에서, 그분이 중보자로서 “하나님 오른편에” 계신다고 하고(34절),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라고도 말합니다(10절). 그런데 많은 분들이 후자에 대해 ‘보혜사 성령에 의해 대리되어 우리 안에 계신다’라고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 어디에도 없는 사상입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구절들은 보혜사 성령의 대리가 아니라 주님의 직접적인 내주하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비밀은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인데”(골 1:27), “여러분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고후 13:5),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행 9:4)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골 3:4)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한 영입니다”(고전 6:17).
저는 어느 날 주님께서 저 하늘 어디에 계시는 것과 그분이 우리 영 안에 계시는 것이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지를 놓고 주님께 나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주님은 제게 한 새사람의 이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즉 주님은 그 몸의 머리로서는 하늘 보좌에, 몸의 생명으로는 지체들 안에 살고 계심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우주 안에 현존하는 이 놀라운 한 새사람을 보게 된 것입니다(골 3:11).
돌이켜보면, 진리 토론 때에 내가 믿는 진리가 더 성경적임을 주장하다가 위 본문처럼 상대방을 “온유하게” 바로잡아 주는 방면에서는 실패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런 묵상과 추구를 통해 진리를 온전하게 알고 대변하는 일은 진리에 관한 충분한 지식만이 아니라 영적 생명의 성숙 또한 필요함을 절감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