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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12일 주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주일)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이며 홍보 주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심을 기뻐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립시다. 주님의 부활과 승천으로 우리 인간의 품위를 들어 높이신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온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기로 다짐합시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의 끝입니다. 16,15-20ㄴ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15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19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20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58차 홍보 주일 담화
(2024년 5월 12일)
인공 지능과 마음의 지혜 : 온전한 인간 커뮤니케이션을 향하여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인공 지능 체계의 발전은, 제가 올해 세계 평화의 날 담화에서도 성찰한 주제로서, 정보와 커뮤니케이션 세계에 그리고 이를 통하여 사회생활의 일정 부분의 토대에 근본적인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해당 분야 전문가들만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영향을 줍니다. 우리 대부분의 이해와 인식 능력을 넘어서는 활동과 잠재력을 갖춘 이 놀라운 혁신의 빠른 전파는 열광과 동시에 혼란을 가져오는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인간 존재의 본성과 특수성, 그리고 인공 지능 시대에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종(種)의 미래에 관한 더욱 심오한 질문들로 이어집니다. 어떻게 우리는 온전한 인간으로 남을 수 있고 또 이 문화적 변화가 선에 봉사하도록 이끌 수 있겠습니까?
마음에서 출발하기
무엇보다 먼저, 재앙에 대한 예측과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 그 영향력에 관한 생각은 제쳐 둘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노 과르디니는 한 세기 전에 이미 기술과 인류에 관하여 성찰했습니다. 과르디니는 우리에게, “사라져 버릴 운명인 아름다운 세상을 보존”하고자 “새로운 것”을 거부하지 말라고 촉구했습니다. 아울러 그는 예언자적으로 경고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되어 감의 과정 안에 있습니다. 저마다의 길에서 우리는 …… 열린 마음으로 그러나 또한 그 안에 있는 파괴적이고 비인간적인 모든 것을 민감하게 느끼면서 이 과정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이는 기술적, 과학적, 정치적 문제들입니다. 그러나 인간성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더욱 깊이 있는 영성과 새로운 자유와 내면을 선사받은 새로운 인간 유형의 모습을 갖추어야 합니다.” 1)
오늘날 기술은 풍요로워져도 인간성은 빈약해질 위험이 있는 이때에 우리의 성찰은 인간의 마음에서 출발하여야 합니다. 2) 현실을 바라보는 영적 관점을 갖추어야만, 마음의 지혜를 회복해야만, 우리는 우리 시대의 새로움을 읽고 해석할 수 있으며 온전한 인간 커뮤니케이션으로 가는 길을 재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마음을 자유의 자리이며 삶의 가장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지는 자리로 봅니다. 마음은 온전함과 일치의 상징이지만, 우리의 다양한 감정과 열망과 꿈도 불러일으킵니다. 무엇보다도 마음은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내적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지혜는, 우리가 전체와 부분, 우리의 결정과 그 결과, 우리의 고결함과 취약함, 우리의 과거와 미래, 우리의 개성과 더 큰 공동체 안의 소속감을 한데 통합할 수 있게 하는 덕(德)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지혜는 그를 찾는 이들이 쉽게 발견하고 그를 사랑하는 이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냅니다. 마음의 지혜는 자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미리 다가가며, 자기에게 맞갖은 이들을 스스로 찾아 돌아다닙니다(지혜 6,12-16 참조). 마음의 지혜는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이들(잠언 13,10 참조), 유순하고 듣는 마음을 받은 이들(1열왕 3,9 참조)과 함께합니다. 성령의 선물인 마음의 지혜는, 우리가 하느님의 눈으로 사물을 보고 관계와 상황과 사건을 이해하며 그 참된 의미를 발견하게 합니다. 이러한 지혜가 없다면 삶은 따분해집니다. 지혜의 라틴말 어원 ‘사페레’(sapere)가 명사 ‘사포르’(sapor)와 상통하듯, 삶에 ‘맛’(savour)을 더하는 것은 바로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기회와 위험
이러한 지혜는 기계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과학 문헌에서 쓰는 좀 더 적확한 용어인 ‘머신 러닝’(machine learning)을 ‘인공 지능’이라는 용어가 이제 대신하게 되었지만, ‘지능’이라는 말의 사용 자체는 오해를 부를 수 있습니다. 기계가 데이터의 저장과 연결에서 인간에 비하면 한없이 큰 능력을 지닌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인간만이 그러한 데이터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저 기계를 좀 더 인간적으로 보이게 하는 문제가 아니라, 전능(全能)이라는 환상이 불러온 최면에서 인류를 깨우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환상은, 우리 인간이 모든 사회적 유대 관계에서 분리되고 피조물인 자기 처지를 잊은 채 완전히 자율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주체라는 믿음에 기반합니다.
인간 존재는 자기 자신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언제나 인식하고, 최대한 모든 수단을 이용하여 그 취약성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 왔습니다. 팔의 연장 수단으로 사용한 선사 시대의 유물부터, 소통하는 말의 연장 수단으로 사용한 미디어를 거쳐, 이제 우리는 인간 사고를 보조하는 고도의 복잡한 기계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없이 하느님처럼 되고자 했던 원초적 유혹(창세 3장 참조), 곧 하느님의 선물로 거저 받은 것을 다른 이들과 함께 누리기보다 혼자만의 힘으로 움켜쥐고자 하는 유혹은 이 모든 도구를 남용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기우는 데에 따라 손 닿는 모든 것이 기회가 되기도 위협이 되기도 합니다. 소통과 친교를 위하여 창조된 우리의 몸 자체가 공격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류의 모든 기술적 확장은 사랑 가득한 봉사의 수단이 될 수도 있지만 적대적인 지배의 수단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인공 지능 체계는 무지를 극복하고 서로 다른 민족과 세대 사이의 정보 교류를 증진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공 지능은 대대로 이어온 방대한 지식 기록 유산에 접근할 수 있게 하고 이를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또는 공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개인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인공 지능 체계는, 부분 또는 전부 거짓인 이야기를 마치 참인 것처럼 믿고 공유하게 만들면서 현실을 왜곡시키는 ‘인지적 오염’의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오래 전부터 있어 온 가짜 뉴스3)의 형태를 띤 허위 정보 문제를 생각해 보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딥페이크’(deepfakes)를 활용한 허위 정보의 문제, 곧 완벽하게 진짜 같아 보이지만 거짓인 영상의 제작과 유포(저 또한 그 대상이 된 적이 있습니다.) 또는 어떤 이의 목소리를 이용하여 그 사람이 결코 발언한 적이 없는 것을 말하는 음성 메시지의 제작과 유포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프로그램의 기저에 있는 시뮬레이션 기술은 어떤 특수 분야에서는 유용할 수 있지만, 우리가 타인과 그리고 현실과 맺는 관계를 왜곡하는 곳에서는 타락하게 됩니다.
인공 지능의 첫 물결인 소셜 미디어의 물결이 일기 시작한 때부터 우리는 그 양면성을 경험해 왔습니다. 인공 지능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그 위험성과 이에 따른 병폐도 경험해 온 것입니다. 생성형 인공 지능의 두 번째 단계가 어떤 질적 도약을 보여 준다는 데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 그러하기에 잘못된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는 수단들을 이해하고 평가하며 규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의 지능과 기술로 생겨난 다른 모든 산물과 마찬가지로 알고리즘은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윤리적 규제의 모델들을 제시함으로써 예방 조치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인공 지능 체계의 사용에 따른 해롭고 차별적이며 사회적으로 부조리한 영향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다원성 감소나 여론 양극화, 획일적 사고 형성을 목적으로 하는 인공 지능 체계의 오용에 맞서기 위한 것입니다. 저는 “다양한 유형의 인공 지능의 개발과 사용을 규제하는 구속력 있는 국제 조약을 채택하고자 …… 국제 공동체가 함께 힘써 주기를”4) 다시 한번 호소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상황에서 그러하듯이 규제 그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인류 안에서 성장하기
우리는 모두 인류 안에서 그리고 인류로서 함께 성장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 과제는 다민족, 다원주의, 다종교, 다문화의 복합적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질적 도약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커뮤니케이션과 지식의 이 새로운 수단들의 이론적 발전과 실제 사용에 대하여 신중하게 성찰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수단들이 지니는 선을 위한 큰 가능성에는, 모든 것을 추상적인 셈법으로 변환시켜 개개인을 데이터로, 사고를 기계적인 과정으로, 경험을 별개의 사례들로, 선을 이윤으로 환산시켜 버릴 위험이 따릅니다. 무엇보다 각 개인의 고유성과 역사를 부정해 버릴 위험도 있습니다. 현실의 구체성은 넘쳐나는 통계 데이터 안에 흡수되어 버립니다.
디지털 혁명은 우리에게 더 큰 자유를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디지털 혁명이 오늘날 ‘반향실’(echo chambers)이라고 일컫는 틀에 우리를 가두어 놓을 때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경우, 정보의 다원성이 증대되기 보다 우리 스스로 혼란의 수렁에 빠져 시장이나 권력의 이익을 위한 먹잇감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인공 지능의 활용이 집단 사고로, 검증되지 않은 데이터 수집으로, 집단 편집을 통한 책임 회피로 이어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기계 운영에 아무리 유용하더라도 ‘빅 데이터’(big data) 안에서 현실을 묘사하는 것은 대인 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하고 우리 인류 자체를 위협하여 결국 사물의 진리를 근본적으로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정보는 살아 있는 관계들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현실 세계에 자리하고 있는 몸을 포함하는 이러한 관계들은 데이터뿐만 아니라 인간 경험의 상관관계도 아우르며, 얼굴과 그 표정을 알아차리는 감수성과 연민과 나눔을 필요로 합니다.
여기에서 저는 전쟁에 대한 보도와, 허위 정보의 대량 유포를 통하여 벌어지는 ‘병행전’(parallel war)을 떠올려 봅니다. 또한 자신이 직접 목격한 것을 우리도 볼 수 있게 취재하다가 다치거나 목숨을 잃은 모든 기자를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비롯하여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직접 접할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전쟁의 부조리함을 인식하게 됩니다.
인공 지능의 활용은 커뮤니케이션 분야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습니다. 인공 지능의 활용이 현장에서 언론이 하는 역할을 없애지 않고 이를 뒷받침한다면, 커뮤니케이션의 전문성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모든 전달자가 각자의 책임을 더 잘 인식하게 한다면, 그리고 모든 사람이 본분에 맞게 분별력을 가지고 커뮤니케이션 활동에 참여하게 한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현재와 미래를 위한 질문들
이와 관련하여 자연스럽게 많은 질문이 제기됩니다. 정보와 커뮤니케이션 분야에 몸담고 있는 종사자들의 전문성과 존엄성 그리고 전 세계 사용자들의 존엄성을 보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플랫폼의 상호 운용성을 보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디지털 플랫폼을 개발하는 기업이 전통 커뮤니케이션 매체의 편집자들과 마찬가지로 콘텐츠와 광고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색인의 생성과 해제를 위한, 그리고 인물이나 의견, 역사, 문화를 제시하거나 지워버릴 수 있는 검색 엔진을 위한 알고리즘 작동 기준을 어떻게 해야 더욱 투명하게 만들 수 있습니까? 정보 처리의 투명성을 어떻게 보장합니까? 글의 친저성(親著性)과, 익명성의 방패 뒤에 숨은 출처의 추적 가능성을 어떻게 확인합니까? 이미지나 동영상이 사건을 묘사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가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어떻게 분명히 알 수 있습니까? 출처들이 단 하나로 축소되어,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개발되는 단일 접근 방식을 조장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원성을 보존하고 복합적인 현실을 드러내는 데에 적합한 환경을 조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처럼 매우 강력하지만 엄청난 비용이 들고 에너지 소모적인 기술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이 기술에 개발도상국도 접근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를 비롯한 여러 질문에 우리가 어떤 답을 제시하느냐에 따라 앞날이 결정될 것입니다. 인공 지능이 정보 접근성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 계급들을 만들어 낸다면 새로운 형태의 착취와 불평등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이와 정반대로, 매우 체계적이고 다원적인 정보 네트워크 안에서 개인들과 민족들의 많은 요구를 인지할 수 있게 되면서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시대 변화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키고 올바른 정보를 증진한다면, 인공 지능은 더 큰 평등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우리가 새로운 종살이 형태의 망령을 엿볼 수 있다면,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더 큰 자유의 수단을 그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선택받은 소수가 다른 이들의 생각을 좌우할 가능성, 아니면 모든 사람이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는 데에 참여할 가능성, 이 둘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은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리즘의 먹잇감이 될 것인지, 아니면 지혜를 기르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자유로 우리 마음에 자양분을 줄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린 것입니다. 시간을 현명하게 사용하고 우리의 취약한 부분들을 포용할 때 지혜가 무르익습니다. 지혜는 세대 간에, 곧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 사이에 이루는 연대 안에서 자랍니다. 함께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식별하고 깨어 살피는 역량, 그리고 사물을 그 본연의 충만함에 비추어 바라보는 역량을 키울 수 있습니다. 우리 인류가 방향을 잃지 않도록 지혜를 구합시다. 지혜는 모든 것에 앞서 존재하였고(집회 1,4 참조), 깨끗한 마음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듭니다(지혜 7,27 참조). 지혜는 우리가 인공 지능 체계를 온전한 인간 커뮤니케이션에 봉사하도록 이끄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2024년 1월 24일
프란치스코
1) Romano Guardini, Lettere dal lago di Como, Brescia 2022 5, 95-97.
2) 이 담화는 “사람들을 있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만나 소통하기”(2021년), “마음의 귀로 경청하기”(2022년), “마음으로 말하기”(2023년)를 주제로 한 이전의 홍보 주일 교황 담화들과 연속선상에 있다.
3) 프란치스코, 2018년 홍보 주일 담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가짜 뉴스 그리고 평화를 위한 언론”, 2018.1.24.,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58호(2018),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89면 참조.
4) 프란치스코, 제57차 세계 평화의 날(2024.1.1.) 담화, 2023.12.8., 8항.
[내용출처 - https://cbck.or.kr/Notice/20241096?page=3&gb=K1200 ]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1,17-23
형제 여러분,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18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빕니다.
19 또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되기를 빕니다.
20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펼치시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21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 위에, 그리고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22 또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
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
축일5월 12일 성 요한 스톤 (John Stone)
신분 : 수도원장, 순교자
활동 지역 : 영국(UK)
활동 연도 : +1539년?
같은 이름 :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성 요한 스톤(Joannes Stone)은 성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수도자로서 신학박사였고, 영국 잉글랜드의 캔터베리(Canterbury)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순교했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는 서원 후에 드로이트위치(Droitwich)에서 교수와 수도원장으로서 봉사하다가 캔터베리로 돌아왔다. 당시 헨리 8세(Henry VIII) 왕은 그의 첫 번째 부인인 캐서린(Catherine of Aragon) 여왕과의 이혼을 완료하기 위해 지지자를 찾고 있었다. 왕의 대리인은 신학박사이자 지역사회에서 큰 영향력이 있는 그에게 접근해 캔터베리 의회에서 그의 긍정적 의견을 듣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단호히 왕의 이혼은 도덕성이나 정의의 교리에 어긋난다고 비난했다. 개혁의회의 시대에도 그는 수도원 강론 중에 공개적으로 헨리 8세 왕이 영적으로 영국 교회에 대해 최고의 수위권을 갖는다는 주장을 비판했다.
의회는 1534년 11월 3일 헨리 8세의 수장령(Act of Supremacy)을 통과시켰다. 이 칙령은 영국 왕과 그 후계자들이 영국 교회(Anglican Church)의 최고 수장이라는 선언이었다. 왕은 칙령에서 자신을 “영국 교회에 대해 유일무이한 지상 최고의 수장”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이에 반대하는 사람은 반역죄로 다루어졌고, 모든 주교와 사제 · 수도자들은 이를 인정하는 문서에 명백히 서명하도록 강요받았다. 이어서 영국 내의 모든 수도원을 해산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1538년 12월 캔터베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회에도 이를 집행할 군인들이 찾아왔다. 모든 수도자는 왕이 영국 교회의 최고 수장이라는 문서와 자발적으로 수도회를 떠난다는 두 문서에 강제로 서명해야 했다. 성 요한 스톤은 이같은 서명을 거부하고 교회에 대한 왕의 주장에 대해 분명한 반대 의견을 밝혔다.
그는 즉시 다른 수도자들과 분리되었고, 군인들은 그를 체포해 당시 왕의 신임 하에 모든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던 런던의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에게 보냈다. 여기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성 요한 스톤은 런던탑에 갇혔다. 그는 1539년 10월 재판을 받기 위해 캔터베리로 돌아왔고, 12월 6일 최종적으로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웨스트게이트(Westgate) 탑에서 처형을 기다리던 그는 여러 가지 이유로 집행이 지연되다가 아마도 12월 27일에 처형장으로 끌려가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잔혹하게 처형된 후 그는 곧 사람들로부터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았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Gregorius VIII, 1572-1585년 재 재위)는 로마의 영국 대학에서 그를 순교자로서 표현하는 그림과 조각상에 대해 승인했다.
성 요한 스톤은 1886년 12월 29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개인적으로는 5월 12일(성 아우구스티누스회에서는 10월 25일)에 기념하고, 시성 후에는 40위 순교자의 일원으로서 시성일인 10월 25일에 기념해 왔었다.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4일로 옮겨져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오늘 축일을 맞은 요한 스톤 (John Stone)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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