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5월 31일(월) 오후 2시 10분, 서울 태능의 육군사관학교 교수부
건물에서 마지막 6교시 수업이 시작된 직후, 1학년 생도인 나는 혼자
조용히 건물 옥상에 올라가 푸른 태능의 숲을 바라보며 몇번 심호흡을
했다. 아득한 혼돈의 늪에서 진정한 내 삶의 길을 찾아 나서는 험난한
오딧세이(Odyssey)의 첫 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내 손엔 4개월 남짓한 생도생활 중 가장 친했던 C생도가 차비 하라고 꼭
쥐어준 2,500원이 들려 있었다. 바로 얼마 전, 교수부 312 교실 복도에서
나는 손가락으로 굳게 V자를 그리며 그에게 작별을 고했다. 시계 바늘처럼
분초 단위로 돌아가는 숨막히는 생도 생활 속에서 그래도 그와 나는 삶에
대해, 세상에 대해 의기투합하여 밤 늦도록 대화를 나누기도 했지만, 결국
그는 거기 남아 진정한 군인의 길을 걷기로 했고, 나는 그곳을 완전히
떠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건물 옥상에서 20분 정도 마음을 가라 앉히는 동안, 내 머리
속에 온갖 생각들이 오가는 건 당연한 일! 누구보다도 부모님께 죄송했다.
어제 5월 마지막 일요일, 이곳으로 면회를 오셔서 나를 간곡히 타이르시던
아버지! 말리다 말리다 지쳐서 머리가 아프시다면서 훤한 대낮에 교정
잔디밭에 누우시기까지 하셨던 어머니!
현재의 이 크나큰 불효!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을 이해하시겠지!
하며, 내 생애의 50%는 나의 부모와 형제를 위해 헌신하는 삶이 되리라
굳게 다짐했다.
당시 내가 처한 객관적 상황만을 보자면 나는 절대로 그곳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 경제적으로 너무도 열악한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나가
봐야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미아리 고개 밑의 5만원 짜리 전세 단칸방
하나! 부엌도 없고 세면대도 없고 화장실도 없는 그 작은 방! 식사 한번
하려 해도 어머니께서 주인집 부엌에서 밥을 지어 상을 들고 그집 대문을
나와 빙돌아서 길가에 면한 단칸방 작은 문으로 다시 들어 오셔야 하는,
두세 평 남짓한 외딴방 하나가 소위 우리 집이란 곳이었으니.... 대학
진학은 커녕, 재수할 돈도 없고 공부할 곳조차 없는 그런 황폐한 현실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누가 감히 나더러 장래가 보장된 '청백
대열'을 떠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상황과 형편이 어떻든 나는 그곳을 반드시 떠나야 한다고
결심했다. 나의 길, 마이웨이가 아니라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물론 가정
형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곳에 가긴 했지만......
혁명(revolution)과 혁신(renovation)의 차이는 무엇인가? 혁신이
기존의 시스템을 인정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현실을 보다 나은 상태로
개선해 나가는 것이라면, 혁명은 그 시스템 자체를 아예 부정하고 완전히
새로운 틀을 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그 날 나의 발걸음은
내 주위 사람 모두의 객관적 판단을 완전히 뒤집는 하나의 삶의 혁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531혁명' 말이다. 516이 국가적 차원의
정치·군사적 혁명이라면 531은 바로 내 개인적 차원의 삶의 혁명이 아닐
수 없으리라!
육사 생도는 준(準) 군인 신분이기 때문에 군형법의 적용을 받는다.
따라서, 일반대학처럼 그만 두고 싶어도 마음대로 그만 둘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그곳을 떠나는 방법은 몇 가지 있었다. 육사 생도는
고귀한 명예심을 생명보다 더 중히 여기기 때문에, 거짓말 한번, 시험 때
부정행위 한번만 해도, 아니 심지어 길 가다 동전 하나만 주워도
생도만으로 구성되는 명예위원회의 자체적 결정에 따라 바로 퇴교조치
되었기 때문이다.
넉 달 동안의 피땀 어린 육사 교육이 남긴 가장 귀한 열매라 할 수 있는
그런 드높은 명예심은 당연히, 막 20대에 들어선 나의 내면 깊숙한 곳에도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내게 비열한 행동으로 퇴교 조치 당하는 불명예는
결코 용납될 수 없었으니, 내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로지
정공법(正攻法), 그러니까 철조망을 넘는 수 밖에 없다고 나는 판단한
것이다.
오후 2:30, 나는 교수부 건물을 혼자 빠져 나와 생도대(기숙사)로 갔다.
1학년 생도는 교내를 혼자 이동할 수 없는 규칙 때문에, 나는 큰 길 대신
평소 눈 여겨 보아둔, 인적이 뜸한 오솔길을 택해야 했다.
그렇게 생도대 잠입(?)에 성공한 나는 학과출장 가방 속에 일기장 등
중요한 것을 챙겨 넣고, 하얀 색의 정복 상의와 푸른 색의 근무복 하의를
입고(물론 계급장과 명찰은 다 떼고서) 운동화를 신은 채 생도대 위에
있는 식당을 지나 산기슭으로 올라갔다.
생도대를 떠나기 앞서 나는 당시 육사 교장인 정승화 장군 앞으로 한
통의 편지를 남겼다.
"우리의 얼굴과 생김새가 모두 다르듯, 사람마다 나아갈 길과 애국하는
방법은 제각기 다를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제가 여기를 떠나는 것은
결코 이곳을 개인적으로 증오하거나 미워해서가 아닙니다. 저는 단지 제게
맞는 방식으로 나라 위하는 길을 걷고자 하니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후 4시경, 아무도 없는 산 속에 홀로 앉아 날이 어둡기만을 기다리던
나는 오랜만에 마음의 여유를 갖고 잠시 쉬면서 일기도 한 편 썼다. 그
날, 그 역사적인(?) 순간을 기록한 '이 한편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지금 나는 생도대 식당 뒷쪽 산의 어느 지점에 와 있다. 어디선가 나를
포위하는 듯한 호루라기 소리 같은 것이 내 가슴을 압박하고 있다. 5시
정각이 되니 그리도 끔찍스런 월요일의 국기 강하식 구령 소리가 마치
나와는 별천지인양 아득하게 들려 오고.... 멀리서 들려오는 군악대의
연주는 나를 마구 힘솟게 하고 있다.
"너와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침략의 무리들이 노리는 조국 ♬"
아, 나는 이곳을 떠나더라도 항상 이 사회와 나라를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하지만 이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나는 이미 이 청백 대열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이 사회는 무척 험난하다. 그러나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나는 지금 이
순간의 고아한 명예심과 굳은 결심을 잃어 버리지 않을 것이며, 결코
현실의 어려움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아아, 정녕 가슴이 두근거리면서도 설레는구나! 어느덧 이 숲 속에도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이제 내가 이 숲을 떠나 저 철조망을 넘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항상 흐르고 있는 것! 그러기에 나는 지금 드디어 이 숲
속에 와 있지 않은가! 멀리 보초 서는 병사의 휘파람 소리가 조용히 내
귓전을 스친다.
일기를 다 쓰고 일어나 철조망이 있는 산 정상을 향해 조금씩 움직일
무렵, 갑자기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나의 탈출,
정확히 표현하자면 탈영으로 육사 전역에 비상이 걸린 것이다. 날이
어두워지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잠시 후 산 아랫 쪽에서 사람들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동료 생도들이
나를 찾으려 수색을 나온 것이다.
나는 그 순간 눈 앞이 캄캄했다. 불명예스럽게 붙잡히는 것보단 차라리
죽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옴에
따라 나도 비상 수단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섣부른 이동보다는 먼저
몸을 숨기는 것이 급선무라 판단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내 키의 반 만한
크기의 작은 관목 몇 그루가 둥그렇게 둘러 서 있는 곳을 발견했다. 바로
이곳이다, 싶어 얼른 그 안에 들어가 손으로 흙을 파 내고 그 속에 몸을
누이고 나서 나무 가지를 꺾어 내 몸을 덮었다. 군사 교육 시간에 배운
은폐와 위장을 직접 실천해 본 셈이다.
그러는 사이 사람들 목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 왔다. "어이, 이리 와,
모두 10미터 간격으로 벌려!" 하는 말까지 선명히 들려 왔으니........
나는 "아, 하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하며 눈을 감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 목소리들은 점차 작아지더니 마침내 완전히
사라졌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소름이 끼치는 침묵의 순간들이 다 지난
후, 나는 그 비좁은 나무 틈새에서 빠져 나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
생애에서 가장 긴박한 순간이었으리라!
그들이 모두 사라진 후, 숲 속에도 이제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게 왠일인가, 이번에는 갑자기 소낙비가 내리 퍼붓는 게 아닌가!
쏟아지는 비를 온 몸으로 맞으며 나는 드디어 산 꼭대기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리는 비는 그칠 줄 몰랐고, 나는 다음 날을 위해 윗옷을 모두 벗어
가방 속에 넣어 두었다. 윗옷은 흰 색이라 불빛에 잘 반사될 거라는
판단도 가세했으리라!
숲 속엔 이미 짙어오는 어둠! 그 어둠 속에서 뜻하지 않은 소나기와
사정없이 달려드는 모기떼와 싸우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 가는데,
이번에는 갑자기 사람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혼비백산하여
얼른 뒷걸음쳐 몸을 숨기고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내 앞에 오솔길 하나가
가로 놓여 있었고, 그 발자국 소리는 그 길을 따라 인근 초소로 보초 교대
나가는 병사들의 것이었다. 내가 먼저 그들을 발견했길래 망정이지 그
반대였다면? 그걸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짜릿한 전율을 느낀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는 마침내 방향 감각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저녁도 굶고 잠도 못 자고, 쏟아지는 소낙비를 온
몸으로 맞으며 짙은 어둠 속을 몇 시간 헤매었으니....
그런데 한참 걷다 가만히 살펴보니 내가 처음 출발했던 바로 그 자리가
아닌가! 세 시간이나 흐른 뒤였으니..... 마음은 정말 허탈했고, 몸은
완전히 탈진 상태였다.
잠시 걸음을 멎고 헤쳐 나갈 방도를 궁리한 결과, 작전(?)을 완전히
바꾸기로 했다. 여명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라, 어쩔 수 없이 다소
위험이 따르더라도 내가 아는 큰 길을 택하기로 한 것!
그 때가 이미 새벽 3시! 무작정 어둠 속을 헤쳐 나가는 방식 대신,
이제는 빛과 어둠이 마주치는 가장자리를, 그러니까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이 교차하는 윤곽선을 따라 이동하기로 작정하고 나는 몸을 다시
일으켰다. 적(?)이 나를 보기 전에 내가 먼저 그를 볼 수만 있다면 다
이긴 전투(?)가 아니겠는가, 하는 판단에서였다. 나는 그렇게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명(明)과 암(暗)의 틈새를 최대한 활용하여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한참을 걷다 보니 많이 보던 큰 건물 하나가 나타났다. 육사 내의
교회였다. 여명까지 남은 시간을 점검한 후 나는 그곳에 들어가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그 육중한 출입문을 열었다. 삐거덕!
하며 고요한 새벽의 적막을 깨뜨리던 그 문소리는 왜 또 그리 큰지.....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내 귓전에 쟁쟁하다.
다행히 교회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 사실을 확인한 나는 다소의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지만, 만일 그때 그곳에 누군가가 있었다면 얼마나
황당한 사태가 벌어졌겠는가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내 행색을 살펴보니 정말 말이 아니었다. 상의를
모두 벗은 상태라 등어리고 팔이고 간에 그 지독한 산 모기가 엄청나게
물어 뜯은 뒤였다. 군대 용어로는 이른바 '모기 회식'이 되겠지만......
긴장이 풀리니 비로소 가려워 지기 시작하는 건 당연한 일!
바지와 신발도 완전히 비에 젖어 있었다. 아무래도 물을 짜내고 다시
입어야 할 것 같아 할 수 없이 바지와 팬티를 모두 벗었다. 그 신성한
곳에서 말이다. 물론 예수님도 용서해 주시리라 기대는 했었지만.....
그런 상태로 한 20분 휴식을 취한 후 물기가 많이 빠진 옷을 다시 입고
그곳을 나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목표로 한 지점의 철조망에 닿으니 새벽
5시 30분! 어느새 온 누리가 환해 지고 있었고, 나는 내 키보다 훨씬 높은
철조망을 넘어 건너편 쪽으로 뛰어 내렸다. 태능의 어느 과수원이었다.
"쿵" 하는 소리에 놀라 달려드는 개떼의 집중 공격(?)을 받으며 간신히
그곳을 빠져 나와 한참을 걸어 마침내 청량리행 시내버스(45번)에 몸을
실었다. 무박(無泊) 2일에 걸친 길고 험난했던 엑소더스(exodus)가 일단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아침 7시경 청량리역 시계탑
광장에서 수유리에 사는 중학 동창 집으로 전화를 거니 깜짝 놀란 그가
이내 택시를 타고 청량리역으로 달려 나왔고, 자기 집에 이미 무장한
헌병들이 대기 중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나는 며칠 전, 중학 동창이자 외대 영어과에 재학 중인 그 친구에게만
나의 '거사'를 알려놓은 상태였다. 그렇게 한 것은 내가 그곳을 나가면
돈이 없어 재수학원에는 가지 못하고, 도리어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혼자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예상하고, 그에게 미리 과외 자리를 좀 부탁해
놓기 위해서였다.
그의 인도를 받아 찾아간 그의 수유리집에서 생도대 훈육관 및 헌병들과
마주친 나는 다시 한번 나의 완강한 뜻을 밝혔고, 그들에게 붙잡힌(?)
나는 짚차를 타고 다시 태능으로 돌아갔다. 밤 새워 제 발로 나간 그곳을
짚차로 호송되어(?) 다시 들어가던 때의 심경은 말로는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여하튼 그곳에서 1박을 한 다음 날, 그러니까 76년 6월 2일 오전,
드디어 내 손엔 얼룩무늬의 제대복 한 벌과 퇴교 명령서 한 장이 쥐어져
있었고, 그걸로 험난했던 태능 탈출이라는 오딧세이의 막은 일단
내렸지만, 그 이후 내가 헤쳐 나가야 할 숱한 삶의 오딧세이의 막은
본격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물론 이미 사반 세기나 지난 일이지만, 나는 그 일로 인해 본의 아니게
나의 동료들과 다른 관계자 여러분께 폐를 끼친 데 대해선 늘 죄송스럽게
생각해 오고 있었다.
여하튼, 비록 적성이 맞지 않아 나는 그곳을 일찍 떠났지만, 넉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내가 그곳에서 받은 교육과 경험은 참으로
인상적인 것이었고, 그 이후 나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니, 바로 남이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드높은 명예심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 글은 당시 20세 밖에 안된 한 젊은이가 아득한 혼돈의 늪에서 자신의
삶의 길, 마이웨이를 힘겹게, 그러나 용기있게 헤쳐 나간 소중한 기록이라
생각하기에 죄송함을 무릅쓰고 여기에 싣는다. (2002. 8.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