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 나오기 전 내가 세번째 섬겼던 교회는 이름도 예쁜 김제 가나안 복지교회였다. 교인들은 집도 없고 토지도 없는 가난한 분들이었지만 가나안 복지 동산을 이루어 보자는 꿈을 심어준 고 이종안목사님을 따라 나선 분들이었다. 숙소는 흙벽돌로 지은 베틀집 방 두칸에 부억하나. 토지는 개간하는 조건으로 모여든 40 여 세대로 구성된 교회였다.
옆 동네에서는 '가나안' 이란 말을 '가난한'으로 바꿔 가난한 복지교회 사람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개골 개골 우는 '개구리 동네 사람'이란 별명도 있었다고 한다. 교인들은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교회에 나가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을 개구리들이 우는 것처럼 들려서 붙여진 것이란다.
그런데 나는 그 복지교회가 좋았다. 이웃 동네 사람이 뭐라든 믿음으로 이룬 공동체 교회, 사람이 모여살면 어찌 잡음이 없을까 만은 목사도 아닌 전도사인 내게 장로님들과 전 교인들이 깍듯이 대접했다. 그래서 나도 사례금 받은 것을 절반쯤 교회에 내 놓았더니 교인들이 신들이 났나 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주님께서 그 전 교회에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개척교회를 하기 전에 잠간 휴식을 취하라고 보낸 교회였다고 생각된다.
나는 복지교회를 시무하던 중 84년 1월에 목사 안수를 받았는데 나는 교육전도사도 해 보질 않아서 부목사 생활을 해 봐야겠단 생각이 들어서 제주 성안교회에 이력서를 냈더니 OK 가 되어 제주도로 이사 준비를 하던 중에 약속한 날 바로 하루 전에 청빙 취소라는 전화를 받았다. 난감했다.
그래서 나를 그 교회에 소개했던 친구에게 물어보니 ' 임 아무개 전도사 알지, 그 친구가 그 교회출신인데 니가 온다고 하는 말을 듣고 수석장로에게 걔는 나하고 신학동긴데 그 친구 술도 잘하고 뭐도 하고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사 하루전에 툇짜를 맞았던 것이다.
그때 드는 생각, 아 꼬리표란게 무섭구나. 그때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방황하던 신학교 시절은 방황의 시절이었다. 신학교에 갔지만 성경의 기적과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확신이 없었다. 모세 5경 강의시간 교수님이 성경은 짜집기 한 책이며 J, P 문서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다는 말에 그 것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때 가끔 한잔 씩 했던 때였는데 그 친구가 봤구나 하고 생각하며 그 친구가 원망이 되는 대신 '앞으로 조심해야 겠구나' 란 생각을 했다.
그러다 보니 부목으로 간다고 교회에다 광고했던 터라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차 입학동기였던 최모 목사가 너 전주에 개척해 볼 생각 있냐? 그러면서 자기 교회에서 처음으로 3년동안 개적지원금을 예산 세웠다는 거였다. 난 두말 할 것없이 OK.
복지교회 떠나는 날, 교인들이 나와서 두 다릴 뻣고 눈물로 전송하는데 난 꼭 도앙가는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야 이놈아 너 시골이 싫어 떠나는 것 아니냐? 난 그런 죄책감을 가지고 전주로 나왔지만 개척 준비가 전혀 되지 않는 상태에서 개척을 시작하게 됐다. |
첫댓글 할렐루야~주님은 살아계십니다 아멘
담것 기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