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1독서
<지혜서의 말씀 9,13-18>
13 어떠한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14 죽어야 할 인간의 생각은 보잘것없고, 저희의 속마음은 변덕스럽습니다.
15 썩어 없어질 육신이 영혼을 무겁게 하고 흙으로 된 이 천막이 시름겨운 정신을 짓누릅니다.
16 저희는 세상 것도 거의 짐작하지 못하고 손에 닿는 것조차 거의 찾아내지 못하는데 하늘의 것을 밝혀낸 자 어디 있겠습니까?
17 당신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고 그 높은 곳에서 당신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누가 당신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18 그러나 그렇게 해 주셨기에 세상 사람들의 길이 올바르게 되고 사람들이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으며 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 제2독서
<사도 바오로의 필레몬서 말씀 9ㄴ-10.12-17>
사랑하는 그대여,
9 나 바오로는 늙은이인 데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수인까지 된 몸입니다.
10 이러한 내가 옥중에서 얻은 내 아들 오네시모스의 일로 그대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12 나는 내 심장과 같은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13 그를 내 곁에 두어, 복음 때문에 내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그대 대신에 나를 시중들게 할 생각도 있었지만,
14 그대의 승낙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대의 선행이 강요가 아니라 자의로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15 그가 잠시 그대에게서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를 영원히 돌려받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16 이제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나에게 특별히 사랑받는 형제라면, 그대에게는 인간적으로 보나 주님 안에서 보나 더욱 그렇지 않습니까?
17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아들이듯이 그를 맞아들여 주십시오.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4,25-33>
그때에
25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26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7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8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29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30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32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33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순교자 성월의 첫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지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지혜를 구하는 솔로몬의 기도의 마지막 부분을 들려줍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지혜로 “세상 사람들의 길이 올바르게 되고, 사람들이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으며, 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지혜 9,18)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2독서의 필레몬서에서는 노예였던 오네시모스를 종으로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들여지도록 하는 바오로 사도의 신자로서의 삶의 지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하느님의 지혜가 오늘 복음에서는 구체적으로 십자가의 지혜로 드러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 그 길을 함께 가는 이들에게 당신의 제자가 되는 지혜를 세 가지 조건으로 제시하십니다.
첫째는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는 것이요, 둘째는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는 것이요, 셋째는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조건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3개의 동사입니다.
동사는 행동하는 것을 표현해줍니다.
따라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3 가지의 행동실천이 따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동사는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미워하다’는 동사입니다.
너무도 매정하게 들리는 ‘미워하다’는 이 동사의 뜻은 제대로 알아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히브리어의 방언인 아람어에는 비교급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누구는 미워하고 누구는 사랑한다.’는 표현이 나오는 경우에, ‘미워하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미워하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누구보다 뒤에 사랑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사랑하다’는 말은 ‘앞세워 사랑하다 혹은 선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로마서 9장 13절의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오를 미워했다’라고 기록된 성경말씀대로이다.”라는 표현이 그렇고, 루카복음 16장 13절의 “어느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라는 표현이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는 결코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무시하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신 분께서 부모 자식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금지하거나 적대시 하실 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것과 가족들과의 사랑의 관계에서 어느 것을 더 우위에 두고 앞세워 흠숭할 것인가의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동사는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지다’라는 동사입니다.
여기서 ‘지다’라는 동사는 억지로 마지못해 어깨에 지는 짐처럼 압박감에 눌려있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무거운 짊진 자 다 나에게로 오라’고 하신 분께서 짊을 덜어주시기는 커녕 더 무겁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다’라는 말의 원래의 뜻은 ‘어머니가 아기를 가슴에 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끌어안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어머니가 아기를 품듯, 소중하게 자의로 스스로 품는 것을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그분을 따르기 위한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두 개의 비유를 들어 설명해주십니다.
곧 탑을 세우는 건축가가 소요 경비를 미리 계산하는 것과 같으며, 또 자기보다 더 강한 임금과 전쟁을 할 것인지 평화협정을 맺을 것인지 미리 따져보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곧 자신의 처지와 실상을 알고 자의로 소중히 책임을 지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셋째 동사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버리다’라는 동사입니다.
‘버리다’의 의미는 단지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 비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버리고 욕심을 비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어의 뜻은 ‘거부하다’, ‘거절하다’, ‘부인하다’ 입니다.
곧 자신의 뜻을 부인하는 것이요, 자신에게 신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신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요, 하느님의 권능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곧 사랑으로 ‘바친다.’, ‘가납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쓸 데 없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무익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값지고 소중한 것을 본래의 주님께 봉헌하는 것이요, 돌려드리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소유자가 아니라, 속해 있는 자임을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속해 있는 자임을 깨달을 때라야 바쳐지고 비워지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1코린 1,24)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지혜가 인간들의 지혜와는 사뭇 다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가 하느님께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1코린 3,18-19)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하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7)
주님!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제가 당신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 자신을 따르기보다 당신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이 바라는 것보다 당신이 바라는 것과 당신을 바라게 하시고,
제가 믿는 것보다 저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더 이상은 당신의 사랑을 배신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양다리 걸치기 신앙은 없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참된 사랑은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습니다.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한결 같습니다.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 안에 머물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길 기원하며, 나 자신을 버림으로써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굳건하게 걸어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접하면서 위로와 평화, 희망과 구원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기대와는 다른 말씀을 접하면서 긴장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누구든지 나에게 오려면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하시며 자기 소유를 송두리째 버릴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에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 아드님은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하였는데 이렇게 엉뚱한 말씀을 하시면 마음이 흔들리고 맙니다.
성당에 나가면 좋은 일이 생길 줄 알았는데 영 딴판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영생을 보장받는다고 했는데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크신 분이시고 약속에 충실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에 대한 신의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사실 집안 식구가 원수인 까닭은 ‘사랑’의 이름으로 ‘집착’에 빠질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출가’ 라는 말을 씁니다.
속세의 가정을 떠나 승려가 되기 위해 불문에 드는 일을 말합니다.
뜻을 품고 수도원으로 들어가 덕을 닦는 일을 들어 말하기도 하고, 결혼을 하여 부모님 품을 떠나갈 때도 ‘출가’라는 말을 합니다.
‘출가’는 소위 가족과의 불화나 갈등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 집에서 나가는 ‘가출’하고는 다릅니다.
출가는 단순히 집을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집착을 떠나는 것입니다.
더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 소중한 하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것을 선택하였으면 거기에 투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결혼을 예로 들면, 배우자가 있고 자녀가 따르기 때문에 그만한 책임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한 가정의 주체가 되었다면 이제 부모에게 기대거나 무엇을 바라지 말고 홀로 서야 합니다.
지금까지 모든 것을 뒷받침해 준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수고와 땀을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속칭 마마보이나 마마걸이 되어 성숙한 인격체로 설 수가 없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없게 됩니다.
부모님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식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가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자식은 내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켜보면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남모르게 돕는 것이지, 사사건건 이래라저래라하거나 기대하면 실망이 커집니다.
내가 신경을 안 써주면 혹시 잘못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온갖 일에 ‘간섭과 참견’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때가 되면 서로에게서 자유로워야 하고 또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또한 집착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출가의 의미를 새롭게 해줍니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의 길이 좋은 것임을 안다면 하느님의 사랑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는 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흠숭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다른 사람들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우선순위를 확실히 선택하면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큰 축복이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다시 목숨을 얻는다.”(요한 10,17)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우리도 어렵고 힘들더라도 지금 하느님을 선택하면 바로 그 선택을 통해서 다시 더 큰 것을 차지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삶의 첫째 자리에 놓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위에 두어야 합니다.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예수님이 앞세워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올려놓는 것입니다.
뜻을 품었으면 그에 걸맞은 투신을 해야 합니다.
탑을 세우려면 공사를 잘 마칠 수 있을지 계산해 보고, 임금이 싸움을 해도 먼저 지금 군대의 수로 이길 수 있을지 헤아려 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고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그만한 준비가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세상에는 약삭빠르게 계산하면서 왜 그 좋은 머리를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것에는 쓰지 않느냐는 말씀이 들리는 듯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만한 투신과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어린 아기가 어머니 뱃속으로부터 세상에 나왔으면 탯줄을 끊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끊어버리는 것은 마땅합니다.
따라서 천상을 위해서 유익하다면 나의 집착과 소유의 마음을 과감히 버리십시오.
죄악의 고리를 단호하게 끊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남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생각과 시선을 거두어야 합니다.
자기의 못된 습성을 알면서도 바꾸지 않는 사람을 소신 있고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은 고집이 있는 사람입니다.
고집, 그것도 그냥 고집이 아니라 똥고집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하느님 앞에 그리고 우리의 이웃 앞에 쓸데없는 고집불통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앞에 소신 있는 여러분의 믿음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께서 요구하는 것에 반대되는 것이면, 또 이쪽도 저쪽도 아닌 미지근한 것이면, 단호한 결단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제자인 여러분,
하느님 앞에 적당한 타협이나 양다리 걸치기, 어중간은 없습니다.
하느님을 선택하면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차지하면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언제나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대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이렇게만 하면 정한 목표에 100% 도달한다>
켈리 최는 2022년 연 매출 6,000억을 기록한 켈리델리라는 대형마트에서 초밥 도시락을 파는 기업의 CEO입니다.
켈리델리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11개국 1,200개 프랜차이즈 매장을 지니고 있고,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도 이렇게 급속도로 성장한 회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과 10년 전만 해도 최 회장은 첫 사업 실패로 10억 원의 빚더미에 눌려 하루하루 비참하게 살고 있던 노처녀였습니다.
그녀는 전북 정읍 출신으로 6남매 중 셋째 딸이었고, 가난했던 집을 일으키겠다고 서울로 상경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녔습니다.
의류공장에 다니며 ‘세계적 패션 디자이너가 되겠다’라는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목표를 위해 유서까지 써 놓고 일본으로 건너가 돈을 벌면서 대학에 다녔습니다.
다시 패션의 중심인 프랑스로 무작정 건너갔습니다.
학교 졸업 후 친구와 함께 동업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40세가 넘었음에도 자신은 빚만 지고 있었고 거울을 보았을 때 흉측한 괴물이 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꿈을 좇아 그렇게 열심히 사는데 무엇이 잘못된 것이었을까요?
마흔이 넘은 최 회장은 인생을 포기하려다 고생하고 계신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라 다시 뛰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문제점을 발견하였습니다.
바로 자신이 목표만 정했지, 그것을 위한 에너지를 다른 곳에 너무 많이 소비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최 회장은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세 가지 습관을 포기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세 가지는 부자들이 하지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부자들은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첫 번째로 정한 것은 그 좋아하던 ‘술을 끊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사실 저는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술을 끊었어요.
제가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술을 마시고 실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술을 마시는데 빼앗기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의 직업은 민박집 주인이자 가이드였어요.
게다가 동시에 켈리델리 사업도 준비 중이어서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래도 따져보았습니다.
한 번 술을 마시면 최소 두 시간 이상이 소요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세 번이면 여섯 시간이었어요.
이 시간이 저는 정말로 아까웠습니다.
그 뒤로 저는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어요.
제가 잘 따르던 선배 언니는 저를 놀렸습니다.
‘켈리야, 보통 사업을 시작하면 거래처 사람들하고 술 마시고 친분을 쌓기 시작하는데, 너는 반대로 술을 끊네? 그 배짱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거야?’
저는 인맥에 연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오직 실력으로 승부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런 생각을 지킨다는 것은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사업을 진행하면서 아무리 노력해도 빚만 늘어가고 직원들 월급날이 다가오는 게 두려웠어요.
그때 딱 소주 한 잔만 마시면 살 것 같았죠.
어떤 때는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너무 괴로울 때가 있었습니다.
정말 그럴 때는 술 한 잔이 간절했어요.
하지만 이럴 때도 저는 술은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한 잔을 마시면 두 잔이 되고 두 잔을 마시면 세 잔이 되고 제 의지는 사라져 갈 것만 같았죠.
지치고 힘들 때는 다짐했습니다.
나와의 약속을 절대로 번복하지 않겠다고 말이죠.
이렇게 술을 마시지 않자 언니들은 저를 부르지 않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저는 많은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고 사업에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다 명료한 정신으로 해야 할 일에 집중할 수 있었어요.
술은 끊은 것은 저에게 신의 한 수였습니다.”
포기했던 습관 두 번째는 ‘드라마와 게임을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자기 관리의 기본은 불필요한 시간을 줄이고 스스로 발전시키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 당시 저는 시간이 조금만 여유가 있어도 드라마를 보거나 게임을 하곤 했습니다.
이 두 개의 문제는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었다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제가 아는 성공한 사람들은 철저하게 자기 시간을 확보했고, 그 시간에 책을 읽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 시간의 활용법은 저와는 완전히 달랐던 것이었죠.
요즘 사람들에게는 특히 SNS는 너무나도 많은 시간을 소모하게 하는 것 중 하나예요.
이런 것들의 특징은 맺고 끊는 게 어렵다는 것입니다.
한 번 빠져들면 한 두 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죠.
자신의 사업이나 개인의 발전과 직결되어 있다면 괜찮아요.
하지만 오락적인 요소가 크다면 분명 좋은 시간 활용법은 아닐 거예요.
많은 시간을 소모하게 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 확보를 위해서라도 SNS 사용 시간을 줄이고 그 시간이 자기 계발을 하는 게 좋아요.”
세 번째 끊은 것은 ‘불필요한 모임’입니다.
“한국이나 유럽이나 모임은 매한가지입니다.
모임의 핵심은 인맥 관리예요.
사람이 모이면 새로운 에너지가 창출되고 기회의 장이 열립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저는 모임에 참석하는 게 성공을 방해하는 요인이라고 생각했어요.
일반적인 생각과는 반대로 생각했던 것이었죠.
사업가인 제가 모임을 포기했다고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물어봅니다.
‘그럼 인맥 관리는 어떻게 하세요?’
그때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인맥 관리를 하지 않아요. 인맥은 관리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나는 켈리랑 친구가 될 거야,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라고 얘기한다면 당연히 저는 그렇게 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새로운 친구 사귀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누군가가 저를 인맥 관리 대상으로 생각한다면, 저는 그 사람에게 관리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어요.
저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 반대로 인맥으로 이용하려는 사람, 이것을 저는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에요.
누구나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맥을 관리하지 않아요.
저는 성공을 위해서 이렇게 세 가지를 끊어냈습니다.”
[출처: ‘바닥에서 6,000억 부자가 되기까지 ‘가장 먼저 갖다버린 습관 3가지’, 유튜브 채널 ‘동기부여학과’]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투자개발 회사의 대표이자 전미 130만 부 이상이 팔린 베스트셀러의 저자 게리 캘러가 쓴 자기계발서인 『원씽』(The One Thing)의 주제는 이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가치, 단 한 명의 사람, 단 하나의 아이디어가 당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
지금 당장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원씽 The One Thing’을 찾아라.
그것이 당신의 커리어가 됐든, 비즈니스가 됐든 가정생활이든, 인간관계이든 삶의 각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찾아 몰두할 때, 일에서의 성공과 삶에서의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켈리 최 회장도 이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위 세 가지를 끊고 에너지를 모으기 전까지는 실패한 인생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6-27)
공사를 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돈은 에너지입니다.
하지만 흥청망청 살아서 돈도 없으면서 건물을 지으려고 한다면 결국 있는 돈도 날려버리게 될 것입니다.
혹은 전쟁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질 것 같으면 싸움을 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하나의 목표입니다.
이 목표에 도달하려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요소를 끊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가 소유한 재물이나 애정 등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데 장애가 된다는 뜻입니다.
물론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나는 자주 죽고 싶었고, 가끔 정말 살고 싶었다』의 저자 아른힐 레우뱅은 ‘선장’이라고 부른 자아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믿음, 의사가 준 희망, 경찰관이 준 사랑 등으로 선장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10년 만에 조현병에서 벗어납니다.
그리고 공부하여 최고의 정신과 의사가 됩니다.
두 대의 버스에 동시에 탈 수는 없습니다.
다른 것을 타려면 지금 탄 것은 버려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자아라는 나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뜻으로 내 뜻을 죽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시지프스 신화가 있습니다.
시지프스는 신의 명령에 불복종하여 영원히 돌을 산꼭대기로 굴려야 하는 벌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명에 불복종하게 만드는 것은 나 자신밖에 없습니다.
나 자신을 가지고 목표를 이루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 돌을 버려야 합니다.
나 자신을 죽이게 하지 못하는 목표는 그것이 어떤 목표이건 가짜 목표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시련의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항상 찬미하십시오!>
지금 우리는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했던 대재앙 코로나19 바이러스 이후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타격이 컸던지 후폭풍이 만만치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돌아가신 분들, 후유증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기신 분들, 승승장구하던 사업을 하루아침에 접어야 했던 분들...
길고도 긴 캄캄한 터널 안에서, 너무나 큰 벽 앞에서 아파하고, 슬퍼하고, 너무나 무거운 십자가 앞에서 쓰러지고 좌절하는 분들에게 오늘 복음은 큰 희망으로 다가가리라 믿습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복음 14장 27절)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 고통에, 우리의 절망에, 우리의 십자가에 의미를 부여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슬픔과 눈물이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님을 확증하십니다.
오늘의 이 십자가는 예수님의 참 제자로 거듭나게 되는 가장 확실한 도구임을 밝히고 계시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 우리의 잘 되기만을 원하시는 하느님, 우리의 나날을 축복하시는 하느님께서 도대체 왜 십자가를 건네시는 것일까요?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더 큰 상급을 안겨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예비조치로 십자가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꽃이 기후가 좋은 풍토에서만 아름답게 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겨울의 모진 추위, 여름의 혹독한 더위, 강한 비바람... 이 모든 것에 시달린 이후에야 비로소 꽃은 피어납니다.
대작을 창출해내는 예술가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멋진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일부로라도 자기 자신의 생활에 상처를 내기도 합니다.
대작을 부화해내기 위해 스스로 칩거합니다.
사회와 단절됩니다.
식음까지 전폐하며 작품에 몰두합니다.
그 결과가 대작인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인생의 풍랑 앞에서 절대로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지금 내 눈앞에 보이지 않겠지만 지척에서, 내 바로 오른편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언제라도 손 내밀 준비를 갖추고 계십니다.
역풍을 만날수록 더욱 필요한 것은 아버지께 대한 믿음입니다.
그분을 향한 전적인 신뢰심입니다.
인생의 역풍을 만날 때 마다 꼭 기억하십시오.
손만 내밀면 다가오실 지척의 거리에 주님께서 서계십니다.
갖은 걱정, 근심, 두려움, 다가올 십자가에 대한 부담, 미래에 대한 공포 등 쓸 데 없는 에너지 소모를 피하십시오.
돌아보면 삶은 온통 감사거리로 가득 찼습니다.
십자가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온통 은총의 꽃밭입니다.
다양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감사와 기쁨, 행복함, 편안함, 안정감으로 온통 채색해야할 소중한 우리 인생입니다.
결국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 한 가지가 있습니다.
고통의 바다 한가운데서도 항상 기뻐하십시오.
역경의 산맥을 넘어가면서도 항상 감사하십시오.
시련의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항상 찬미하십시오.
주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비록 십자가를 보내시지만, 언제나 내 곁에 함께 서 계십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제자답게 - 사랑,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 버림>
“주님,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저희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실어 주소서.”
(시편 90;14,17)
시공을 초월하여 아주 오래 전, 오늘 제1독서의 지혜서 말씀에 공감합니다.
인간 누구나의 깊이에서의 실존적 체험일 것입니다.
"어떠한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죽어야 할 인간의 생각은 보잘 것 없고, 저희의 속마음은 변덕스럽습니다.
썩어 없어질 육신이 영혼을 무겁게 하고, 흙으로 된 이 천막이 시름겨운 정신을 짓누릅니다.
저희는 세상 것도 거의 짐작하지 못하고, 손에 닿는 것조차 거의 짐작하지 못하고, 손에 닿는 것조차 거의 찾아내지 못합니다."
흡사 “헛되고 헛되다”로 시작하는 코헬렛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예나 이제나 불확실해 보이는 인간의 본질은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답은 하느님입니다.
물음만 있고 하느님 답을 모르기에, 인정하지 않기에, 끝없는 방황이요 비극적 불행한 인생입니다.
주님께서 지혜를 주시지 않으시고, 그 높은 곳에서 주님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누가 주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는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그렇게 해 주셨기에 우리의 길이 올바르게 되고, 우리가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으며, 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 모든 인간 문제의 결정적 답이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하느님의 지혜이자 우리의 주님이요 스승이요 영원한 도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인간답게 산다” 막연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주님의 제자답게” 산다, 구체적으로 분명합니다.
이렇게 살 수 있도록 주님은 가르침을 주시며 성령을 통해 부단히 깨달음을 선사하시어 끊임없는 자아초월의 여정을 통해 하느님께 가까이 이르면서 점차 하느님을 닮게 합니다.
다음 어제 새벽 산책중 떠오른 '천복(天福)일세'란 고백시도 성령의 선물입니다.
“푸른 하늘은 바다
흰 구름은 섬
산(山)속에 살면서도
날마다
바라보는
바다와 섬
무수히 빛나는 바다의 별들
천복(天福)일세!”
- 2022.9.3.
마침 새벽 일찍 일어난, 피정 온 한 젊은 자매는 푸른 하늘의 흰 구름과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 이게 인간입니다.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인간 신비의 비밀을 찾고 싶은 것이 인간입니다.
과연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솜씨에 경이감驚異感을 체험해 본 적이 있으신지요?
문득 아주 오래 전 써놓은 '정주(定住)'란 시도 생각납니다.
제 시는 한결같이 고백시에 속합니다.
“산(山)처럼
머물러 살면
푸른 하늘
흰 구름
빛나는 별들
아름다운 하느님
배경(背景)이 되어 주신다”
- 1997.8.12.
무려 25년 전 오늘 지금 여기 불암산 기슭 요셉 수도원에서 쓴 시라는 생각이 참 놀랍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이것이 영원 체험임을 깨닫습니다.
성령을 통한 깨달음의 은총으로 천복을 누리는 삶임을 알게 됩니다.
고맙게도 주님은 오늘 복음을 통해서 당신의 제자답게 사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 “사랑하라!”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아무것도 주님 사랑보다 앞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참으로 마음을 다해, 갈림없는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이웃에 대한 집착없는, 자유롭게 하는, 생명을 주는 아가페 사랑이 가능하니 이 또한 주님의 은총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깊은 뜻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글자 그대로 친지나 자신을 미워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히브리어 문법상 “누구든 주님이신 당신보다 친지나 자신을 더 사랑하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로 바꿔 읽어야 합니다.
제 행복기도 중 한연이 떠오릅니다.
“주님, 당신은 너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이타적 순수한 아기페 사랑도 가능합니다.
바로 이런 경지의 바오로 사도를 우리는 제2독서에서 만납니다.
옥중에서 얻은 아들 오네시모스를 종이 아닌 형제로 받아들여 달라는 필레몬에게 보내는 바오로의 간곡한 편지에서 그의 형제애가 빛납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비로소 아가페 형제애임을 깨닫습니다.
“나는 내 심장과 같은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그가 잠시 그대에게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마도 영원히 돌려받기 위한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이제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아들이듯이 그를 맞아들여 주십시오.”
얼마나 정중한 사랑의 편지인지요!
바오로의 순수한 사랑, 형제애가 빛납니다.
바오로 사도가 누굽니까?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은 자기 삶의 전부라 고백한 분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우선적으로 사랑할 때 이런 아가페 형제애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
예외없이 누구나에게 해당되는 구원의 둘째 원리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도, 남의 십자가도 아닌 제 십자가입니다.
제 운명의 십자가, 제 책임의 십자가입니다.
누구의 십자가를 부러워할 것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어차피 내 인생, 내 어깨에 지고 가야 합니다.
아모르 파티(Amor Fati)는 “운명을 사랑하라”는 라틴어이며, 운명에運命愛라 칭하기도 합니다.
더불어 두 라틴어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를 살라”입니다.
천국의 열쇠와도 같은, 제 운명의 십자가, 제 책임의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가야 주님의 제자가 되고 비로소 생명의 구원입니다.
이래야 제 십자가는 무거운 짐이 아닌 가벼운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제 십자가를 가볍게 해달라 기도할 것이 아니라 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을 주십사, 더욱 주님을 사랑하게 해 주십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모두를 버려라!”
역시 평생 버림의 여정입니다.
34년 정주하다 보니 쌓이는 것들이, 모아지는 것들이, 채워지는 것들이 점차 많아집니다.
반대로 하루하루 날마다 내 소유를, 소유욕, 명예욕등 온갖 끝없는 탐욕을 버리고 비워야 합니다.
또 이웃과 소유물은 나눠야 합니다.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의 인생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역시 예외없이 “누구든지”입니다.
과연 날로 무거운 짐이 되는 인생입니까?
날로 가벼워지는 홀가분한 자유로운 인생입니까?
이 또한 똑같은 원리입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포기와 버림이 아니라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자발적 포기와 버림이 뒤따를 때 삶의 무게는 저절로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참 보물이신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갈 때 날로 깊어지는 주님맛에 세상맛은 시들해질 것입니다.
세상 것들이 시시해져 버려 저절로 이탈의 사랑이 가능해집니다.
바로 이 셋이 주님의 제자답게 사는 구원의 길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닮아 참내가 되는 생명의 길, 진리의 길입니다.
“누구든지” 말마디에서 보는 바처럼 예외없이 인간 누구에나 적용되는 구원의 세 원리입니다.
참으로 무지와 허무, 무의미의 어둠에서 벗어나 빛의 삶, 자유인의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제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으며 날마다 제 소유를 버리고 나누고 비우는 삶이 가능해집니다.
이렇게 자유로워질 때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사랑 실천에 항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답게, 주님의 제자답게,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게 해주십니다.
“주님, 저희 날수를 헤아리도록 가르치소서.
저희 마음이 슬기를 얻으리이다.
돌아오소서, 주님!
당신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시편 90,12-13)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애잔한 음성과 멜로디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고 싶어 하는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가을을 시작하면서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구를 생각하세요.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꾸시나요.
깊은 밤에 홀로 깨어 눈물 흘린 적 없나요.
때로는 일기장에 내 얘기도 쓰시나요.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나의 사랑을 믿나요.
그대 생각하다 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하루 중에서 내 생각 얼마큼 많이 하나요.
내가 정말 그대의 마음에 드시나요.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귀여운가요.
바쁠 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나요.
내가 많이 어여쁜가요.
진정 날 사랑하나요.
난 정말 알고 싶어요.
얘기를 해 주세요.”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고 싶은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들고 싶어서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어서 일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성공, 명예, 권력’의 길을 가려고 합니다.
그 길을 찾는 방법을 알고 싶어 합니다.
학교에 다니면서, 그것도 모자라 학원까지 다니면서 우리는 성공의 길, 명예의 길, 권력의 길을 알려고 합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는 책도 있었고,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읽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원칙이 있었다고 합니다.
목적지를 알고 가는 배는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끝을 생각하면서 일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소중한 것을 먼저 했다고 합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모두가 이기는 길을 찾았다고 합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혁신과 개혁을 통해서 더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먼저 경청하고 자신의 뜻을 전하였다고 합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정신적인 것들을 추구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면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이 주어집니다.
그러기에 밤을 새우면서 그 길을 찾으려고 합니다.
한국을 떠나 이민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성공’은 모두가 선망하는 삶의 길입니다.
으뜸가는 가르침인 종교는 대부분 ‘지혜의 길’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은 대부분 고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 원치 않는 사람과 함께 해야 하는 고통,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 의지와 다르게 행동하는 고통이라고 합니다.
그런 고통은 집착에 있다고 합니다.
그 집착을 버리면 비로소 깨달음의 세계가 열린다고 합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각으로 몸과 마음을 가꾸어야 한다고 합니다.
유교에서는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불쌍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마음, 자신의 공적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마음, 잘못을 겸허하게 뉘우치는 마음,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마음을 키워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 의, 예, 지’의 마음입니다.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은 한양의 4대문을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서 숭례문, 흥인지문, 홍지문, 돈의문으로 정했습니다.
‘인, 의, 예, 지’의 바탕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했으며 한양의 중심에 ‘보신각’을 설치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에게 또 다른 길을 이야기합니다.
천년도 하느님 앞에서는 마치 지나간 어제와 같다고 합니다.
인생은 풀잎 끝에 맺힌 이슬방울과 같다고 합니다.
덧없고 허무한 인생의 길입니다.
그 길에서 참된 진리를 찾는 것이 지혜의 길입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고 그 높은 곳에서 당신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누가 당신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해 주셨기에 세상 사람들의 길이 올바르게 되고 사람들이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으며 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참된 지혜는 하느님께로부터 온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지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지혜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참된 지혜는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아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참된 지혜는 경쟁에서 이겨 성공하는 이들이 얻을 수도 있습니다.
참된 지혜는 욕심을 버리고 ‘인, 의, 예, 지, 신’의 마음을 가지면서 시작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참된 지혜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참된 지혜는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복음을 읽다 보면, 예수님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나자렛 사람’이 쓰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히브리어 ‘노쯔리’와 아람어 ‘나즈란’로 쓰는데, 사실 이 단어는 예수님을 비하하는 표현이었습니다.
즉, ‘나자렛 것’, ‘나자렛 놈’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비하하면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런 비판에 예수님께서 활동을 멈추셨을까요?
이런 비판이 늘어남에 따라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현대의 정치인들도 자기의 지지도가 떨어지게 되면, 활동에 제약받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활동을 전혀 멈추시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위협까지도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의 판단보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윤공희 대주교님의 ‘북한교회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공산 치하에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사람들, 죽음의 위험에서도 신자들과 함께하기 위해 피난 가지 않는 신부님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과거 순교자들이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고백했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우리의 지금 삶 안에서는 분명 종교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신앙인답지 않게 사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자랑스럽게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말할 수 있는 모습입니까?
많은 사람이 주님을 따르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이제야말로 하느님 나라가 곧 올 것이고, 주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그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는 기대에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수난과 죽음을 겪은 다음에야 돌아올 영광이었습니다.
즉 순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 길이 어렵다는 것을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시지요.
사실 자기 부모,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그리고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당신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에 정말로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십계명의 제4계명에 ‘부모에게 효도하라’라고 하지 않습니까?
유교 사회 뿌리가 깊은 우리만큼 조상의 핏줄을 귀하게 여기는 유다인에게 효도는 중요한 사상이었습니다.
‘미워하다’라는 표현은 ‘뒤로 돌리다, 2차적으로 생각하다’라는 뜻의 표현입니다.
결국 극한 상황에서 필요하다면 부모까지도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예수님 다음 자리에 두어야 한다는 뜻이고, 궁극적으로 자기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탑과 전쟁의 비유를 통해서 주님으로부터 맡은 일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심사숙고를 요구하는 진지함과 어떤 난관도 참고 견디어야 하는 인내심이 요구됨을 전해주십니다.
이렇게 주님을 따르는 데는 지혜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를 버리지 않으면 지혜로움과 주님께 대한 사랑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이제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