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1.17.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다니12,1-3 히브10,11-14.18 마르13,24-32
가난을 사랑합시다
<가난하나 존엄한 품위의 삶>
“당신이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고,
당신 오른쪽에서 길이 평안하리이다.”(시편16,11)
오늘 전례력으로 연중 제33주일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제정한 ‘제8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아마 오늘도 교황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미사를 집전하실 것이며 점심식사에는 매해 하는 것처럼
올해도 로마의 가난한 사람들 1천여명을 초청해 함께 식사할 것입니다.
가난을 사랑했던 성 프란치스코를 닮은 교황이야 말로 현대판 예언자입니다.
교황의 엊그제 예술가들에게, 어제는 젊은이들에게, 도서관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주신 말씀도 멋졌습니다.
“너희는 하느님 창조활동의 협력자들이다.”
“삶에서 결코 물러나지 말고, 계속 꿈을 키워라.”
“너희 도서관이 만남의 오아시스가 되도록 하라.”
올해 교황 담화문의 주제 성구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기도는 하느님께로 올라갑니다.”(집회21,5참조)
바로 이 담화문을 교황은 ‘가난한 이들의 수호자, 파도바의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인
2024년6월13일에 발표했습니다.
가난을 사랑하는 이는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고 예수님에 이어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6,20)
주님의 참행복 서두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시고”(루카4,18ㄴ) 역시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실 때 맨 서두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최우선의 관심사가 어디있는지 한눈에 들어옵니다.
하느님 마음을 그대로 반영하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교황의 올해 담화문중 감동적인 부분을 소개합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우리는 모두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느님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기에 우리는 모두 구걸하는 사람들입니다.
구걸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겸손한 마음이 요구됩니다.
참으로 가난한 이는 겸손한 이입니다.
참으로 가난하고 덕이 있으며 겸손한 사람이 되십시오.
의지가지없는 가난한 이는 하느님께 힘을 얻고 그분께 모든 신뢰를 둡니다.
기도의 진정성은 애덕 안에서 확인됩니다.”
가난은 인간의 본질이며 이를 깨달을 때 저절로 겸손입니다.
이런 가난한 인간의 본질은 미사시 주님의 성체를 모시기 위한 가난한 빈손의 행렬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늘 대할 때 마다 감동하는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흡사 너나할 것 없이 하느님앞에 줄서있는 가난한 거지들같습니다.
담화문에서 인용된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의 유엔총회에서의 연설내용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저는 기도하는 가난한 수녀일뿐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제 마음에 당신 사랑을 채워주십니다.
그리하여 저는 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가난한 이에게 그 사랑을 전해 줍니다.
여러분도 기도하십시오. 기도하면 여러분곁에 있는 가난한 이들을 알아봅니다.”
끝부분에는 베네딕도 요셉 라브로 성인에 대한 내용도 각별한 감동이었습니다.
“프랑스에서 로마로 순례를 온 그는 생애 마지막 몇 년을 가난한 사람들 가운에서 가난하게 지내면서
성체앞에 기도하고 묵주기도와 성무일도를 바치며 신약성경과 준주성범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방랑자로서 정주하는 곳 없이 콜로세움 폐허의 한 귀퉁이에서 잤습니다.
그의 삶은 하느님께 올리는 끊임없는 기도였습니다.”
마지막 결론 부분도 긴 여운으로 향기처럼 남아있습니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바뇌에서 발현하시어 ‘나는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이다.’라는 잊지 못할 메시지를 남겨주신
지극히 거룩하신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께서 이 여정에서 우리를 지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가난을 사랑합시다. 베네딕도 규칙에 보면 정결을 사랑하라, 단식을 사랑하라,
거룩한 독서를 사랑하라 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듯 수행을 사랑하고 무엇보다 가난을, 겸손을 기도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조선시대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추구했던 선비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된 사치스럽지 않다), 백제의 미학이자 조선의 미학이며 한국인의 미학을 대변하는
이 말마디처럼 존엄한 품위의 가난을 살았던 옛 선비들의 삶이 참 그립습니다.
영정조 시대 추사 김정희를 보완하며 오히려 능가한다는, 또 겸재 정선을 보완하며 능가한다는,
평생 가난속에 살았던 시서화詩書畵의 대가 능호관 이인상(1710-1760)이 아내를 잃고 바친 제문이
너무 아름다워 길다싶지만 전문을 소개합니다.
“아아! 내가 세상과 맞지 않아
궁하게 지내기로 맹세했건만
자질이 순수하지 못해
도道에서 멀었지요.
숙인淑人은 나의 아내이면서
나의 사우師友이기도 했지요.
나의 어리석음 깨쳐주고 슬픔을 위로했거늘
그 낯빛은 순하고 말씨는 순후했지요.
이 때문에 내가 치욕을 면할 수 있었거늘
내 어찌 그것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아아! 숙인이 부지런히 힘쓴 덕분에
나는 집안일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굶주려도 책을 팔지 않았고
추워도 꽃나무를 때지 않았지요.
시어머니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고
나의 오활(迂闊;사리에 어둠)함을 열어 주었지요.
이따금 내가 산수에 노닐 때면
기분이 좋아 글이 번드레해졌지요.
돌아와 내가 글귀를 들려주면
문득 충고하며
말이 화려하면
도道가 높지 못함을 일깨워 줬지요.
규중의 즐거움이
옛 도에 있었으니
나의 두엇 단아한 벗은
우리의 금슬을 익히 알았지요.
아아! 여자가 훌륭한 건
크게 슬퍼할 일이외다.
지아비가 슬기롭지 못하니
누가 그 훌륭한 행실을 자세히 전하겠습니까.
숙인은 정숙하고, 굳세고, 따뜻하고, 은혜로워
타고난 본성을 잘 지켰으며
사리에 맞는 온갖 말들은
고인古人의 말을 끌어온 게 아니었습니다.
정성스레 내게 한 충고들은
당신의 죽음과 함께 가려져 버릴 테지만
차마 사사로움 꾸밀 수 없어
당신의 일을 적지 않습니다.
아아! 농사짓기는 갈산葛山이 좋고
낚시하기는 구담龜潭이 좋거늘
거기서 살자던 당신과의 약속
그만 무덤에 묻고 말았구려
머리는 희어지고 마음은 끊어질 듯해
남은 생을 슬퍼합니다.
아아! 내가 영결하는 말을 하니
그대는 길이 슬퍼하지 마오.
말을 가려 하고 병을 조심하며
사귐을 끊고 화려함을 거두어
끝내 도道에 돌아가
경전으로 자식을 가르침으로써
그대의 마음을 따르겠다는
내 진실한 마음을 고합니다.
아아, 슬프외다!”<능호과 이인상 서화평석 2서예,648-651;박희병>
제 강론에 이렇게 긴 글 인용하기는 처음입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에 평생 극심한 가난중에도 끝까지 고귀한 품위를 지켰던 지어미의 삶이 너무 아름다워
그 지아비의 제문을 고스란히 인용했습니다.
이인상이 맘놓고 그의 천재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아내의 높은 덕임을 깨닫습니다.
도道는 말씀이요 진리요, 도를 통해 하느님은 옛 조상들을 이끄셨습니다.
도에 충실했던 옛 선인들, 그대로 다니엘 예언자의 말씀에 해당된다 믿습니다.
“책에 쓰인 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
그러나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무궁히 빛나리라.”
바로 창공의 광채처럼 별처럼 빛났던 성인, 성녀, 군자들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언젠가가 아닌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가난에도 불구하고 창공의 광채처럼, 별처럼 사는 것입니다.
언제나 종말과 같은 혼란이요 작금의 현실은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의 모두이자 길이요 희망이신, 구원자이자 대사제이신 예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히브리서 말씀이 더욱 우리를 용기백배하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이제 그분께서는 당신의 원수들이 당신의 발판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새삼 떠오르는 “2027년 한국에서 개최되는 가톨릭 세계 청년 대회” 성서 모토, 요한복음 말씀이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그러니 부화뇌동 경거망동하지 않고 희망의 그날을 앞당겨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나라 천국을 사는 것입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이 아신다.”
그러니 과거와 미래는 하느님께 맡기고 깨어 오늘 지금 여기서 구원의 현실을 앞당겨 사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날마다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가난중에도 우리 모두 깨어 품위있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21,36).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