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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列國志 제115회
진경공(晉景公)은 산발한 귀신에게 쇠망치로 얻어맞고 입으로 선혈을 토하며 쓰러졌다. 내시들이 급히 부축하여 침전(寢殿)으로 모시고 갔다. 한참 후에 경공은 깨어났고, 신하들은 우울한 기분으로 돌아갔다.
한 내시가 경공에게 말했다.
“상문(桑門)에 용한 무당이 있는데, 대낮에도 귀신을 본다고 합니다. 그를 불러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상문의 무당은 晉侯의 부름을 받고 침전에 들어오자마자 말했다.
“귀신이 있습니다!”
경공이 물었다.
“귀신이 어떤 형상인가?”
“머리를 산발하고 키는 10척이 넘으며, 손으로 가슴을 치고 있는데 매우 노한 기색입니다.”
“네가 말한 형상이 과인이 본 것과 똑같다. 귀신이 말하기를, 과인이 자신의 자손을 잘못 죽였다고 하는데, 그 귀신이 누구인지 모르겠다.”
“선대에 공을 세운 신하인데, 그 자손이 아주 처참하게 화를 당했습니다.”
경공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렇다면 조씨(趙氏)의 조상이 아닌가?”
옆에 있던 도안가(屠岸賈)가 아뢰었다.
“이 무당은 조씨의 문객입니다. 이 일을 빌미로 조씨의 원한을 풀려는 것이니, 주군께서는 믿지 마십시오.”
경공은 한동안 말없이 있다가 다시 무당에게 물었다.
“푸닥거리를 하면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가?”
무당이 말했다.
“너무 노했기 때문에, 푸닥거리를 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인의 명이 얼마나 남았는가?”
“소인이 죽음을 무릅쓰고 직언(直言)을 올리겠습니다. 주군께서는 햇보리를 맛보지 못하실 겁니다.”
도안가가 말했다.
“보리는 한 달만 있으면 익을 것이다. 주군께서 비록 병이 나기는 했지만 정신은 왕성하신데, 어찌 그렇게 된단 말이냐? 만약 주군께서 햇보리를 맛보신다면, 너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도안가는 경공이 뭐라고 하기 전에 무당을 꾸짖어 쫓아냈다. 무당이 떠난 후, 경공의 병은 더욱 깊어졌다. 晉나라의 많은 의원들이 와서 진맥했지만, 아무도 무슨 병인지 알지 못하여 감히 약을 쓰지도 못하였다.
대부 위기(魏錡)의 아들 위상(魏相)이 여러 대신들에게 말했다.
[위기는 위주(魏犨)의 둘째 아들이다.]
“제가 듣건대, 秦나라에 고화(高和)와 고완(高緩)이라는 명의(名醫)가 있는데, 편작(扁鵲)의 의술을 전수받아 음양의 이치에 통달하여 안팎의 병을 잘 치료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지금 秦나라의 태의(太醫)가 되어 있는데, 주군의 병을 치료하려면 그 사람들이 아니면 안 됩니다. 왜 그들을 초청해 오지 않습니까?”
[편작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화타(華陀)와 함께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의로 일컬어지는데, 제63회에 등장했었다.]
대신들이 말했다.
“秦나라는 우리와 원수인데, 어찌 우리 주군을 치료하기 위해 명의를 보내주려 하겠소?”
위상이 또 말했다.
“환난을 구제하고 재난을 함께 나누는 것은 이웃나라 간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제가 비록 재주 없지만 세 치 혀를 놀려 반드시 명의를 데려오겠습니다.”
대신들이 말했다.
“그렇게만 한다면, 백관이 모두 그대에게 절을 올리며 감사할 것이오!”
위상은 행장을 수습하여 秦나라로 갔다. 진환공(秦桓公)이 찾아온 까닭을 묻자, 위상이 아뢰었다.
“과군께서 불행히도 광병(狂病)에 걸렸는데, 상국에 고화과 고완이라는 명의가 기사회생(起死回生)의 의술을 지니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신이 과군을 구하기 위해 특별히 그들을 청해 가고자 왔습니다.”
진환공이 말했다.
“晉나라는 도리를 지키지 않고 누차 아군을 공격하였다. 우리나라에 비록 명의가 있다 하나 어찌 너희 군주를 구해 주겠느냐?”
위상이 정색하여 말했다.
“명공(明公)의 말씀이 틀렸습니다! 秦과 晉은 이웃나라로서, 우리 헌공(獻公)께서는 秦의 목공(穆公)과 혼인으로 우호를 맺어 대대로 친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목공께서는 우리 혜공(惠公)을 군위에 세워 주시고서는 또 한원(韓原)에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제50회에, 진목공은 진헌공의 딸 백희와 혼인하였다. 제56회에, 진목공은 이오(진혜공)가 군위에 오르도록 도와주었다. 제59회에, 秦軍과 晉軍은 한원에서 전쟁을 하여, 혜공이 秦軍에게 사로잡혔다. 하지만 한원 전쟁은 혜공이 애초에 다섯 상을 바치겠다고 진목공에게 약속하고서 지키지 않았으며, 또 晉나라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는 秦나라에서 주는 곡식을 받고서도 秦나라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는 곡식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잘못이 晉나라에 있었는데, 위상은 마치 秦나라에 잘못이 있었던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 뒤에 문공(文公)을 군위에 세워 주시고서는 또 사수(汜水) 남쪽에서 맹약을 배신했습니다. 끝이 좋지 않았던 것은 모두 秦 때문이었습니다.
[제71회에, 문공은 진목공의 도움으로 晉나라로 돌아가 군위에 올랐다. 제86회에, 문공과 진목공은 함께 정나라를 정벌하기로 하고 晉軍은 함릉에 주둔하고 秦軍은 사수(氾水) 남쪽에 주둔했는데, 진목공은 정나라 촉무의 변설을 듣고 문공에게 알리지도 않고 회군하였다.]
문공께서 돌아가신 후, 목공께서는 또 맹명의 말을 듣고 우리 양공(襄公)이 어리다고 업신여겨 효산(崤山)으로 출병하여 우리나라를 기습하여 패전을 자초하였습니다. 우리는 秦의 세 장수를 사로잡았지만, 죽이지 않고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맹세를 어기고 우리 왕관(王官) 땅을 탈취하였습니다.
[제89회에, 秦나라 맹명·서걸술·백을은 효산에서 晉軍에게 패전하고 사로잡혔는데, 위상의 말대로 秦軍이 晉나라를 기습한 것이 아니라, 晉軍이 효산에 매복하고 있다가 본국으로 돌아가는 秦軍을 기습하였다. 제90회에, 진양공은 맹명·서걸술·백을을 석방하였다. 제92회에, 맹명은 晉나라를 침공하여 왕관성을 함락하고 효산의 시신들을 수습하였다.]
우리 영공(靈公)과 秦의 강공(康公) 때 우리가 숭(崇)나라를 한번 침공하자 秦은 즉시 우리 晉을 침공했습니다. 우리 경공(景公)께서 노(潞)나라에 죄를 물었을 때, 명공께서는 또 두회를 보내 潞나라를 구원하려 하였습니다.
[제100회에, 진영공 때 조돈이 조천을 시켜 秦나라의 속국인 숭나라를 침공하자, 秦軍은 晉나라의 초(焦) 땅을 공격하였다. 이때에도 晉이 먼저 침공했다. 제110회에, 진경공은 순림보로 하여금 노(潞)나라를 정벌하게 하였고, 진환공(秦桓公)은 두회를 보내 潞나라를 땅을 빼앗게 했는데, 두회는 위과에게 죽음을 당했다. 이 경우도 潞나라를 놓고 서로 차지하려고 싸운 것이지, 秦나라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秦은 패전하고서도 반성할 줄 모르고, 승전하고서도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우호를 버리고 원수가 된 것은 秦 때문이었습니다. 명공께서 생각해 보십시오. 晉이 秦을 범했습니까? 秦이 晉을 범했습니까?
지금 과군께서 병이 나셔서 이웃나라에서 의원을 청하려 했는데, 백관이 모두 말하기를 ‘秦은 우리와 절교했기 때문에 필시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秦君께서 여러 번 잘못하긴 했지만, 어찌 후회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이번에 제가 가서 명의를 빌려옴으로써 선군의 우호를 회복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명공께서 만약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우리 백관의 생각이 맞게 됩니다. 이웃은 서로 환난을 구제해 주는 우의(友誼)가 있어야 하는데, 명공께서는 그걸 버리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원은 사람을 살리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명공께서는 그걸 배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은 명공께서 그런 일을 하지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진환공은 위상의 말이 기개가 있고 해명이 분명한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경의를 표하며 말했다.
“대부께서 바른 견해로 과인을 책망하시니, 감히 그 가르침을 듣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진환공은 즉시 태의 고완을 불러 晉나라로 가게 하였다. 위상은 진환공에게 사은하고 고완과 함께 晉나라로 돌아가 밤을 새워 신강(新絳)으로 달려갔다.
婚媾於今作寇仇 혼인으로 맺은 우호가 지금은 원수가 되었으니
幸災樂禍是良謀 상대의 재난을 즐거워하는 것이 좋은 계책이었네.
若非魏相瀾翻舌 위상의 뛰어난 변설이 아니었더라면
安得名醫到絳州 어찌 명의가 강주(絳州)로 갈 수 있었겠는가?
그때 진경공의 병은 아주 위독하여 밤낮으로 秦의 명의가 오기만을 갈망하고 있었다. 어느 날 경공의 꿈속에, 콧구멍에서 작은 아이 둘이 튀어나왔다. 한 아이가 말했다.
“秦나라의 고완은 당세의 명의인데, 만약 그가 와서 약을 쓰면 우리는 필시 상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다른 아이가 말했다.
“우리가 황(肓)의 위, 고(膏)의 아래에 숨으면, 그도 우리를 어찌하지 못할 거야.”
잠시 후 경공은 가슴이 너무 아파 누워 있을 수도 없고 앉아 있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고(膏)’는 가슴 밑의 작은 비게, ‘황(肓)’은 가슴 위의 얇은 막(膜)을 가리킨다. 심장과 횡격막 사이의 부분이다. 이곳에 병이 침입하면 낫기 어렵다고 하여 ‘고황(膏肓)’은 잘 낫지 않는 고질병이나 오래되어 고치기 어려운 고질적인 병폐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된다.]
그때 위상이 고완을 데리고 궁으로 들어왔다. 고완은 진맥을 한 다음 말했다.
“이 병은 고칠 수 없습니다.”
경공이 물었다.
“어째서 그렇소?”
“이 병은 고황(膏肓) 사이에 있기 때문에, 뜸을 뜰 수도 없고 침을 놓을 수도 없습니다. 약을 쓴다 해도 약효가 미치지 못합니다. 이는 천명(天命)인 것 같습니다.”
경공이 탄식하며 말했다.
“그대의 말이 내 꿈과 합치하오. 진정 명의로다!”
경공은 고완에게 후한 예물을 주고 秦나라로 돌려보냈다.
그때 강충(江忠)이라는 어린 내시가 있었는데, 경공의 시중을 드느라 고생이 심했다. 아침에 자신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경공을 등에 업고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잠에서 깨어 주변 사람들에게 꿈 얘기를 했는데, 그때 마침 도안가가 병문안을 하러 궁으로 들어오다가 그 얘기를 들었다.
도안가는 경공에게 강충의 꿈 얘기를 하며 경하하였다.
“하늘은 양(陽)으로서 밝은 것이며, 병은 음(陰)으로서 어두운 것입니다. 하늘 위로 올라갔으니, 어두움을 떠나 밝은 곳으로 간 것입니다. 주군의 병은 필시 점차 나아질 것입니다.”
경공은 그날 가슴 통증이 조금 나아진 것 같아, 도안가의 말을 듣고 몹시 기뻐하였다. 그때 내시가 와서 말했다.
“전인(甸人)이 햇보리를 바쳤습니다.”
[‘전인(甸人)’은 왕전(王田)과 공물(供物)을 관장하는 관직이다.]
경공은 햇보리 맛을 보기 위해, 요리사에게 햇보리를 찧어 죽을 끓여 오라고 하였다. 도안가는 상문의 무당이 조씨의 원한을 말한 것을 괘씸하게 여기고 있던 차에, 경공에게 아뢰었다.
“지난번에 무당이 주군께서 햇보리를 맛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제 그 말이 틀리게 되었습니다. 그 무당을 불러 주군께서 햇보리를 맛보시는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경공은 그 말을 듣고 상문의 무당을 궁으로 불러들여, 도안가로 하여금 꾸짖게 하였다.
“햇보리가 여기 있는데, 너는 어찌 주군께서 맛보지 못할 것이라고 했느냐!”
무당이 말했다.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경공의 안색이 변하자, 도안가가 말했다.
“소인이 어디서 감히 저주를 하느냐! 당장 참수하라!”
도안가는 좌우에 명하여 무당을 끌어내게 하였다. 무당은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작은 술법에 밝아 화를 자초하였구나!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좌우에서 무당의 수급을 바치자, 마침 요리사가 보리죽을 가지고 왔다. 그때가 정오였다. 경공이 보리죽을 막 먹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배가 아프고 설사가 날 것 같아, 강충을 불러 말했다.
“나를 업고 측간으로 가자.”
강충이 경공을 측간에 내려놓자, 경공은 가슴이 또 아파서 견디지 못하고 측간에 빠져 버렸다. 강충은 더러운 것도 아랑곳없이 경공을 건져냈지만,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결국 경공은 햇보리를 맛보지 못했으니, 상문의 무당만 헛되이 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것은 도안가의 죄이다.
상경 난서(欒書)는 백관을 거느리고 세자 주포(州蒲)를 받들어 장례를 지내고 군위에 옹립하였다. 그가 진여공(晉厲公)이다. 강충은 꿈속에 경공을 업고 하늘에 올라갔는데, 현실에서도 경공을 업고 측간으로 갔다. 그래서 대신들은 강충의 꿈이 맞았다고 여기고, 강충을 순장(殉葬)하였다. 강충은 꿈 얘기를 했기 때문에 죽음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경공이 귀신의 쇠망치에 맞아 죽었기 때문에, 晉나라 사람들은 조씨 가문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일과 관련이 있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난씨(欒氏)와 극씨(郤氏) 가문이 도안가와 친하게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한궐(韓厥) 혼자서는 고장난명(孤掌難鳴)이어서 조씨의 원한을 풀어줄 수가 없었다.
[제114회에, 한궐은 조씨를 위해 조삭의 아들 조무를 궁에서 빼내 정영에게 주어 기르게 하였다.]
그때 송공공(宋共公)이 상경 화원(華元)을 晉나라로 보내 조문하고 신군(新君)의 즉위를 축하하였다. 화원은 난서와 상의하면서 말했다.
“晉과 楚가 강화를 해야만 남북 간의 전쟁을 그치고 백성을 도탄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제110회에, 화원은 초나라에 인질로 가서 6년 간 머물다가, 주정왕(周定王) 18년에 송문공 포(鮑)가 훙거하고 그 아들 송공공 고(固)가 즉위하자 송나라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화원은 초나라 공자 영제와 시사(時事)를 논하면서, 晉과 楚가 강화를 맺어야 천하가 태평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晉나라 장수 난서와 친한 사이로서 예전에 그 일에 대해 서로 얘기를 나눈 적도 있었다고 하였다.]
난서가 말했다.
“초나라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자중(子重; 영제)과 친하니, 그 일을 맡을 수 있습니다.”
난서는 자신의 어린 아들 난침(欒鍼)을 사신으로 삼아, 화원과 함께 楚나라로 보냈다.
화원은 먼저 공자 영제(嬰齊)를 찾아갔다. 영제는 난침이 나이는 어리지만 용모가 비범한 것을 보고 화원에게 물었다.
“이 청년은 누구입니까?”
화원이 대답했다.
“晉나라 중군원수 난서의 아들 난침입니다.”
[제114회에, 극극이 죽고 난서가 중군원수가 되었다.]
영제는 난침의 재능을 시험해 보기 위해 질문을 했다.
“상국(上國)의 용병법은 어떠합니까?”
난침이 대답했다.
“정(整)입니다.”
“다른 장점은 무엇입니까?”
“가(暇)입니다.”
[‘整’은 가지런하다는 뜻이고, ‘暇’는 여유가 있다는 뜻이다.]
“남들이 어지러울 때 나는 가지런하고, 남들이 분주할 때 나는 여유가 있다면, 어떤 싸움에서도 승리하지 못하겠는가? ‘整’·‘暇’ 두 글자는 간단하지만 병법을 다 얘기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때부터 영제는 난침을 더욱 존중하였다. 영제는 화원과 난침을 초공왕(楚共王)에게 인도하였다. 晉과 楚는 강화를 맺기로 하고 날짜를 정했다. 마침내 晉나라 사섭(士燮)과 楚나라 공자 파(罷)가 宋나라 서문 밖에서 만나 삽혈하고 맹약을 맺었다.
[제112회에, 사섭은 상군대장이 되었다.]
楚나라 사마 공자 측(側)은 자신과 의논하지 않고 晉나라와 맹약을 맺은 것에 대해 크게 노하여 말했다.
“남북이 서로 통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는데, 자중(子重; 영제)이 멋대로 맹약을 맺어 혼자 공을 세우려 했구나! 내가 반드시 晉을 이길 것이다.”
공자 측은, 무신(巫臣)이 오자(吳子) 수몽(壽夢)과 晉·魯·齊·宋·衛·鄭의 대부들을 종리(鐘離)에 모아 회맹하려는 것을 탐지해 내고, 초공왕(楚共王)에게 말했다.
“晉이 吳와 우호를 맺은 것은, 필시 우리 楚나라를 도모하려는 것입니다. 宋과 鄭도 晉을 따르고 있으니, 이제 우리 楚나라를 따르는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제113회에, 楚나라 굴무는 鄭나라에 가서 하희와 혼인하고 晉나라로 망명하여 이름을 무신으로 고쳤다. 무신은 晉나라가 吳나라와 우호를 맺게 하고, 아들 호용을 보내 병거로 싸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吳나라의 군장 수몽은 왕호를 참칭하였다.]
공왕이 말했다.
“과인은 鄭나라를 정벌하고 싶은데, 宋나라 서문에서 맹약을 맺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宋과 鄭이 우리 楚나라와 맹약을 맺은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그런데 저들은 우리와의 맹약을 저버리고 晉나라에 붙었습니다. 오늘의 일은 이익이 있으면 진격하는 것입니다. 맹약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초공왕은 공자 측으로 하여금 군대를 일으켜 鄭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鄭나라는 다시 晉나라를 배신하고 楚나라를 따랐다. 주간왕(周簡王) 10년의 일이었다.
[주간왕은 주정왕(周定王)의 아들이며, 이름은 이(夷)이다.]
진여공(晉厲公)은 크게 노하여, 대부들을 소집하여 鄭나라 정벌을 의논하였다. 그때 난서가 국정을 맡고 있기는 했지만, 삼극(三郤)이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삼극이란, 극기(郤錡)·극주(郤犨)·극지(郤至)였다. 극기는 상군원수, 극주는 상군부장, 극지는 신군(新軍) 부장이었다. 극주의 아들 극의(郤毅)와 극지의 아우 극걸(郤乞)도 대부로서 국정에 참여하고 있었다.
[‘삼극’은 극극의 세 아들들이다. 제113회에, 진경공은 신삼군(新三軍)을 편성하여 6군 체제를 갖추는데, 지금 극지가 신군부장이라고 한 것을 보면, 신군은 중군·상군·하군의 3군 체제가 아니라 1군으로 바뀐 것이다.]
한편, 백종(伯宗)은 사람됨이 정직하고 직언을 잘 했는데, 진여공에게 여러 번 말했었다.
“극씨 종족의 세력이 너무 강성하므로, 그 가운데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를 분별함으로써 그 권세를 조금 눌러 놓아야 다른 공신들의 후손을 보전할 수 있습니다.”
[백종은 진경공(晉景公)의 모신(謀臣)으로서, 제111회에 진경공이 패업을 도모하려 하자 먼저 齊·魯와 친선을 맺을 것을 건의했었다.]
하지만 여공은 백종의 말을 듣지 않았다.
삼극은 백종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맺혀, 마침내 백종이 조정을 비방한다고 참소하였다. 여공은 그 말을 믿고, 백종을 죽였다. 백종의 아들 백주리(伯州犁)는 楚나라로 달아났는데, 楚王은 백주리를 태재(太宰)에 임명하여 晉을 도모하기 위한 계책을 함께 의논하였다.
진여공은 평소 성질이 교만하고 사치스러워, 안팎으로 총애하는 자가 아주 많았다. 밖으로는 서동(胥童)·이양오(夷羊五)·장어교(長魚矯)·장려씨(匠麗氏) 등의 미소년(美少年)들을 총애하여 모두 대부로 임명하였다. 안으로 총애하는 미희(美姬)와 애비(愛婢)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날마다 음란한 일을 즐기며, 아첨하는 자를 좋아하고 직언하는 자를 미워하였다. 진여공이 정사를 살피지 않게 되자, 신하들도 기강이 해이해졌다.
사섭(士燮)은 조정이 나날이 그릇되어 가는 것을 보고, 鄭나라를 정벌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극지가 말했다.
“鄭나라를 정벌하지 않으면, 어떻게 제후들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난서가 말했다.
“우리가 鄭나라를 잃으면 魯·宋 역시 배신할 것입니다. 온계(溫季; 극지)의 말이 옳습니다.”
[‘온(溫)’은 극씨의 봉지(封地)이다. 형제의 순서를 백(伯)·중(仲)·숙(叔)·계(季)라고 하는데, 극지는 극씨 형제 중 넷째이므로 ‘溫季’라고 하는 것이다.]
楚나라 항장(降將) 묘분황(苗賁皇) 역시 鄭나라 정벌을 권하였다. 진여공은 순앵(荀罃)을 남겨 나라를 지키게 하고, 친히 대장 난서와 사섭·극기·순언(荀偃)·한궐·극지·위기·난침 등을 거느리고 병거 6백승을 동원하여 호호탕탕(浩浩蕩蕩)하게 鄭나라로 쳐들어갔다. 한편으로 극주를 魯·衛에 보내 병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도우라고 요청하게 하였다.
[제102회에, 楚나라 투월초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양유기의 화살을 맞고 죽었으며, 투월초의 아들 투분황은 晉나라로 달아났다. 晉侯는 그를 대부로 삼아 묘(苗) 땅을 식읍으로 주었다. 이때부터 투분황은 묘분황(苗賁皇)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하였다. 순언은 순림보의 손자인데, 처음 등장한다. 순앵은 제107회에 楚軍과 싸우다가 사로잡혔는데, 제113회에 楚나라 곡신·양로의 시신과 교환되어 晉나라로 돌아왔다.]
정성공(鄭成公)은 晉軍의 세력이 크다는 것을 듣고 성을 나가 항복하려고 하였다.
[제113회에, 정양공(鄭襄公) 견(堅)이 훙거하고, 정도공(鄭悼公)이 즉위했었는데, 이제 정성공으로 바뀌었다. 정성공의 이름은 곤(睔)이고, 정도공의 아우이다.]
대부 요이구(姚鉤耳)가 말했다.
“鄭나라는 소국으로서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으므로, 마땅히 강한 나라를 택하여 섬겨야 합니다. 어찌하여 아침에는 楚를 섬기고 저녁에는 晉을 섬겨, 해마다 침략을 당하고 있습니까?”
정성공이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
“신의 생각으로는, 楚나라에 구원을 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楚軍이 와서 우리가 협공하여 晉軍을 격파하게 되면, 몇 년 동안은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정성공은 요이구를 楚나라로 보내 구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초공왕은 宋나라 서문에서 晉나라와 맹약을 맺었기 때문에 출병하고 싶지 않았다. 초공왕이 영윤 영제에게 묻자, 영제가 대답했다.
“실은 우리가 신의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晉軍이 쳐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또 鄭나라를 비호하여 晉軍과 싸우게 되면, 백성을 힘들게 할 뿐만 아니라 승전을 보장할 수도 없습니다. 기다려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앞에서 공자 측이 서문에서의 맹약을 어기고 정나라를 정벌하였고, 그래서 정나라는 다시 晉나라를 배신하고 초나라를 따르게 되었다.]
공자 측이 말했다.
“鄭나라가 우리 楚나라를 차마 배신할 수 없어 이렇게 위급을 고한 것입니다. 지난번에 齊나라를 구원하지 못했었는데, 이제 또 鄭나라를 구원하지 못한다면, 우리 楚나라에 귀부할 나라가 하나도 없게 될 것입니다. 신이 비록 재주 없지만, 군대를 내주시면 어가를 모시고 진격하여 공을 세우겠습니다.”
공왕은 크게 기뻐하며, 사마 공자 측을 중군원수에 임명하였다. 영윤 공자 영제를 좌군대장, 우윤(右尹) 공자 임부(壬夫)를 우군대장으로 삼았다. 공왕은 친히 양광(兩廣)을 거느리고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북쪽을 향해 진격하였다. 하루에 백리를 행군하여 바람처럼 빨랐다.
[당시에 보통 하루에 행군하는 거리가 30리라고 하였다.]
초마(哨馬)가 晉軍으로 달려와 보고하자, 사섭이 난서에게 말했다.
“주군께서 아직 어리고 국사(國事)를 잘 모르시니, 우리가 楚軍이 두려워서 피하는 것처럼 하면 주군의 마음을 경계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주군께서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나라가 조금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난서가 말했다.
“楚軍이 두려워 피한다는 오명을 나는 받을 수 없습니다.”
사섭은 물러나 탄식하며 말했다.
“이번 전쟁에서 패하면 다행이지만, 만일 승전한다면 바깥은 평안해지겠지만 필시 안에서 근심이 생길 것이다.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그때 楚軍은 이미 언릉(鄢陵)을 지났다. 晉軍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어, 팽조(彭祖) 땅 산등성이 아래 주둔하였다. 양군은 각기 영채를 세우고 대치하였다.
다음 날은 6월 갑오일(甲午日)로서 대진(大盡)의 그믐날이었다. 대진의 그믐날은 군대를 움직이지 않는 날이었다.
[음력은 29일인 달과 30일인 달이 있는데, ‘대진(大盡)’은 30일인 달이다.]
晉軍은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새벽 4시경 아직 하늘도 밝아오지 않았는데 홀연 영채 밖에서 함성이 크게 진동하였다. 영채를 지키던 군사가 황급히 달려와 보고하였다.
“楚軍이 우리 영채 앞으로 쳐들어와서 진세를 벌렸습니다.”
난서가 크게 놀라며 말했다.
“적군이 이미 아군을 압박하여 진을 펼쳤으니, 아군은 진을 벌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교전해도 승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영채를 굳게 지키면서, 적을 격파할 계책을 세워야겠습니다.”
여러 장수들은 의논이 분분하였다. 정예병을 선발하여 적진을 돌파하자는 자도 있었고, 병력을 옮겨 후퇴하는 자도 있었다.
첫댓글 楚와 晉의 대결은 어떠할런지?
그래,또한 晉나라에서 병거 전법을 배운
吳나라는 어떠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