득점력이 좋은 스트라이커들 모두 ‘암살자’ 아니면 ‘킬러’와 같이 죽음과 연관된 별명을 가지고 있지만, 뮬러에게는 ‘낫을 든 사신’이 더 어울린다.
그라운드 밖의 뮬러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다. 바이에른 근처의 뇌르틀링겐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방직공이 되려고 했다.
축구는 취미에 불과했지만 그는 결국 프로 선수가 됐다.
엄청난 수의 관중 앞에서 마법과 같은 골 결정력을 선보이면서도 뮬러는 항상 겸손했으며 수줍음이 많았다.
그러나 폭탄과 같은 그의 골 결정력(서독 대표팀 62경기 출장 68골, 바이에른 뮌헨 소속으로 분데스리가 427경기 출장 365골)은 전설로 남았다.
폭발적인 득점력 덕택에 그는 다른 선수들이 범접하기 힘든 수의 트로피들을 안았다.
1974년 월드컵, 1972년 유러피언 챔피언십, 3연속 유러피언 컵(1974~1976), 4회의 리그 타이틀, 컵 위너스 컵, 독일 컵.
그리고 더 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국가대표팀과 클럽에서 뮬러와 함께 뛰었던 폴 브라이트너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우린 매 경기 자신감에 차 있었어요. 축구가 쉽게 느껴지면서도 뭔가 웃겼어요. 경기가 아무리 안 풀려도 그가 딱 한 순간, 한 번만 공을 건드리기만 하면 골이 터질 거라는 느낌이 있었죠. 게르트 뮬러가 팀에 있다면 전술이란 게 필요 없어요. 그가 없다면 전술적으로 완벽한 경기를 펼친다고 해도 승리할 수 있었을지, 아니 최소한의 도움은 되었을지 의문이네요. 우리 팀의 성공을 위해선 뮬러가 필요했고, 우리에겐 그가 있었죠.”
완벽한 조화 : 베켄바워와 뮐러는 다르지만 완벽한 조화를 보여줬다. 뮐러는 베켄바워를 딱 한마디로 요약했다. "누구도 그와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눈앞에 드러나는 위대함에도 불구하고 뮬러는 세간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실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조차도 점점 줄어드는 게 현실이다.
뮬러가 잉글랜드 출신이었다면 각종 거리와 축구경기장에 그의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또한 셀 수 없는 책들과 영상들이 그의 신비함과 상징성을 조명했을 것이다.
독일에도 그의 동료인 귄터 네처와 프란츠 베켄바워에 열광하는 무리들이 생겼지만, 뮬러에게 돌아오는 관심은 얼마 되지 않았다.
월드컵 우승 후
74/75 유러피언컵 우승. 게르트 뮐러는 결승골의 주인공
이는 뮬러가 축구계의 그레타 가르보(1930년대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활동했던 스웨덴 출신의 전설적인 영화배우.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36세에 돌연 은퇴한 뒤 1990년 사망하기까지 철저한 은둔생활을 했다)였기 때문이다.
브라이트너는 뮬러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프란츠 베켄바워나 요한 크루이프처럼 쇼 비즈니스에 발을 들이려 하지 않았어요. 그는 슈퍼스타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개인적인 삶을 선호했고, 가족들과 조용히 살고 싶어했죠.”
그러나 뮬러 역시 젊은 시절에는 음반을 녹음하기도 했다.
뮬러는 ‘Dann macht es Bumm’(이제 쾅하고 터진다)라는 노래를 부르며 한 손에 축구공을 들고 다른 팔엔 상반신 누드의 금발 미녀를 끼고 서 있어야 했다.
그의 표정은 분명 창피해 죽으려는 얼굴이었다.
게르트 뮐러와 폴 브라이트너
(브라이트너:11/12시즌 챔스대진 추첨자)
땅딸막한 체구의 뮬러는 나무통만한 허벅지를 지녔었다. 당시만 해도 전통적인 센터 포워드라고 생각하기는 힘든 몸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전혀 축구 선수 같지 않았다.
그가 1964년 바이에른 뮌헨에 입단했을 때, 당시 감독인 카요브스키는 뮬러가 역도선수 같다고 비웃으며 경기에 내보내지 않았다.
10경기를 벤치에서 보낸 후 클럽의 회장이 개입해 그의 출전 기회를 만들었다.
프라이부르크와의 경기에 나선 뮬러는 2골을 넣었고, 이후 계속해서 골을 넣었다.
역도선수같은 몸매의 게르트 뮐러
사실 뮬러는 방직공이 되지 않고 축구 선수가 된 것을 아주 감사하게 생각해야 했다.
그에게는 타고난 주력으로 치고 나간 뒤, 좁은 공간을 파고들어 다른 선수들을 제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무게 중심을 낮게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큰 도움이 됐다.
뮬러가 한 가지 더 갖추고 있었던 것은 바로 독일인 특유의 목표 의식이었다. 브라이트너는 독일인만의 목표의식을 이렇게 설명한다.
“독일인이 어떤 스포츠를 배울 때는 오직 이기기 위해 하는 겁니다. 남미 선수들처럼 발재간을 부리는 선수는 없습니다. 아마추어, 프로팀, 성인 팀, 유소년 팀, 국가대표팀 모두 마찬가지죠. 그리고 그것이 독일 축구의 성공 원동력입니다.”
1970년 발롱도르 수상
브라이트너는 뮬러 역시 같은 목표 의식을 지녔었다고 지적했다.
“그가 사는 이유는 승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기술적으로 뛰어나지 못하다고 하지만, 그는 분명 ‘뛰어난 기술을 지녔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뮬러는 굉장한 선수였어요. 완벽한 선수였고, 특히 헤딩은 더 뛰어났죠.”
축구팬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그의 기록은 고향팀인 TSV 뇌르틀링겐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62/63시즌 뇌르틀링겐은 총 203골을 넣었는데 당시 17세였던 뮬러는 이 중 180골을 터트렸다.
그는 1970년 월드컵 유럽 예선과 본선에서 경기당 2골씩을 넣었고, 1965년부터 1978년까지 바이에른의 시즌 최다 득점을 독식했다.
국가대표팀에서 보여준 골 결정력을 비교할 때 뮬러는 페렌츠 푸스카스(84경기 83골)나 호마리우(74경기 56골)의 기록을 뛰어넘는다.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뮬러가 세계 최고의 수비수들을 상대로 뛴 경기에서도 꾸준히 득점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는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18경기를 뛰었고(유러피언 컵 결승전 3회, 월드컵 본선과 유로 대회 본선 15회), 그 18번의 경기에서 21골을 넣었다.
그를 막을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수비수가 있을까?
분데스리가 득점왕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기이하게도 모두가 그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뮬러는 자신을 막는 상대 수비수들이 그저 컨디션이 좋지 않을 뿐이라고 착각하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1975년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 리즈 유나이티드의 수비수 폴 마들리는 뮬러의 연기에 완전히 놀아났다.
이미 중반을 넘긴 시점이었다. 리즈는 훌륭한 경기를 펼치며 바이에른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는데, 정당한 골이 무효 판정이 난 데다 페널티 킥 기회마저 심판의 오심으로 날리며 굉장히 화가 난 상태였다.
게다가 바이에른의 로스가 찬 운 좋은 장거리 포에 얻어맞아 한 점을 뒤지고 있었다.
그때 뮬러는 자신에게 찾아온 단 한 번의 기회를 주저 없이 마무리 지으며 승부를 결정지었다.
사실 기회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뮬러는 공과 마들리에 비해 한참 처져 있었다.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 뮬러는 가공할만한 스피드를 선보이며 전방으로 뛰어들었고, 마들리를 지나쳐 발 안쪽으로 공을 골문에 밀어 넣었다.
수많은 결승골의 주인공
뮬러의 위대함이 빛났던 또 다른 순간을 살펴 보자.
그는 마치 영국의 코미디 캐릭터 ‘미스터 빈’처럼 어수룩한 모습으로 1974년 월드컵을 맞이했다.
유고슬라비아와의 경기에서 낮은 크로스가 올라오자 그는 어정쩡한 자세로 몸을 날렸다.
뮬러는 공에 한참 못 미치는 듯, 우스꽝스럽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그의 발끝에 공이 닿았고, 공은 그대로 수비수와 골키퍼를 지나 골망을 갈랐다. 황당하겠지만, 그 경기도 그렇게 끝이었다.
이런 어리숙한 모습을 두고 혹자는 비열한 행위라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악당 역할을 한다고 해서, 배우가 악당이 되는 것은 아니다.
뮬러는 진정한 신사였다. 월드컵 결승전에서 주심 잭 테일러는 그의 완벽한 골에 오프사이드 반칙을 판정하며 무효화했다.
그러나 뮬러는 단 한 번의 항의 없이 덤덤한 표정으로 경기를 계속했다. 어떤 축구 선수가 그럴 수 있을까?
뮬러는 특유의 골 결정력으로 인해 세간의 관심을 끌었지만, 때로는 굉장히 멋진 골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 중 한 골은 1974년 유러피언 컵 결승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나왔다.
뮬러는 높이 날아온 크로스를 완벽하게 잡은 뒤, 좁은 각도에서 아틀레티코의 골키퍼 머리 위로 공을 찔러 넣었다.
그러나 뮬러 생애 최고의 골은 이날 경기의 두 번째 골이었다. 바운드가 걸린 스루 패스를 겨우 잡아낸 뮬러는 골키퍼를 완전히 속이는 로빙슛을 구사했다.
그라운드로 떨어지던 공은 하늘 높이 솟아올랐고, 그 각이 어찌나 컸던지 크로스바 아래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들어갔다.
데니스 베르캄프라도 이 골에는 감탄을 금치 못했으리라.
1974년 월드컵 결승
초자연적인 존재 :
그는 또한 '전술이 통하지 않는 존재' 라는 무시무시한 별명도 가졌다. 그리고 그의 초자연적인 능력은 서독이 위대한 네덜란드를 넘어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도록 만들었다.
유로72 최우수 선수, 게르트 뮐러
게르트 뮬러는 때로 초자연적인 능력까지 발휘하는 듯했다. 이러한 능력은 뮬러 자신에게도 불가사의였다.
“전 수비수가 언제 실수를 할지, 아니면 언제 긴장을 풀지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한 번은 이런 고백을 하기도 했다.
“제 안의 누군가가 지시를 내려요. ‘뮬러, 이쪽이야.’ ‘뮬러 저쪽으로!’”
그렇다면 수년간 뮬러와 함께 뛰었던 브라이트너는 그의 비밀을 알고 있을까?
“아니요. 제가 보기엔 뮬러 본인도 자신의 비밀을 모르는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고 나니 궁금함조차 사라졌죠. 독일에서는 그냥 뮬러에게 ‘제7의 감각’이 있다고 해요. 그는 수비수가 공을 어디로 걷어낼지 그 수비수보다 먼저 알고 있었죠.”
게르트 뮬러의 특별함을 증명하는 궁극적인 순간은 1970년 월드컵 준결승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나왔다.
독일의 공격 상황, 우베 실러는 이탈리아의 페널티 박스 안으로 헤딩 패스를 연결했다.
그러나 페널티 박스 안에서는 골키퍼를 포함하는 이탈리아의 철벽 수비진 4명이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게르트 뮬러의 ‘제7의 감각’이 빛을 발했다. 뮬러는 특유의 급가속을 발휘하며 골문에서 1미터쯤 떨어진 곳으로 뛰어갔다.
뮬러가 수비수 파브리지오 폴레티가 실수를 범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어 골키퍼 알베르토시가 공을 처리하는데 주저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리가 없다.
70년 월드컵 준결승전
뮬러는 두 이탈리아 선수 사이의 공간으로 밀고 들어갔다. 득점은 불가능해 보였다.
물리적인 공간 자체가 없었고 골키퍼가 골문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뮬러는 가까스로 공에 머리를 갔다 댔고, 공을 살짝 옆으로 쳐냈다.
이 대목부터 모든 것이 영화 속의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이어진다. 수비수 폴레티는 위치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한다.
알베르토시는 점프를 하지만 공에 미치지 못하고, 그대로 땅으로 고꾸라진 채 공을 잡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그리고도 공을 쳐 내지 못한다.
1979년 바르셀로나의 매력적인 영입 제의를 거절한 뮬러는 그만 바이에른의 새 감독과 사이가 틀어져 버렸다.
결국 그는 점차 추락해가는 미국 프로축구 MLS의 전신, NASL의 포트 로더데일 스트라이커스에 입단한 뒤 1982년 기력을 완전히 소진한 채 축구화를 벗었다.
그다지 사교적이지 못했던 뮬러는 바이에른으로 돌아온 후 거의 은둔 생활을 했다. 그는 끊임없이 술을 마셨으며 종일 TV를 봤다.
통장 잔고 역시 점차 줄어갔다. 1991년 그는 생물학적으로 거의 죽은 사람이었다.
건강한 간은 감마 GT 검사에서 10에서 70 사이를 유지하는데, 당시 뮬러의 간 수치는 2400이었다.
게르트 뮐러와 달리 화려한 축구인의 삶을 살고 있는 베켄바워
바이언을 지탱하는 힘. 루메니게, 회네스 그리고 게르트 뮐러
그는 과거의 팀 동료인 베켄바워와 회네스 덕분에 목숨을 건졌고, 둘은 그에게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도록 종용했다.
두 친구는 뮬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바이에른에서 코치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1992년 이후 그는 현재까지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있다.뮬러는 지금 젊은 날에 경험하지 못한 평화로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단순하지만 조심스럽게 계획된 삶을 살고 있으며, 인터뷰에도 거의 응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을 굉장히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나서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지만, 돈을 위해서 가끔 TV 광고에 출연하기도 한다.
이제 그는 새로운 별명을 얻었다. ‘가만히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남자’다.
최근 출연한 한 은행 광고에서 그는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팬을 눈앞에 두고도 절대 입을 떼지 않는다.
끊임없이 떠들던 팬은 이내 포기하고 그를 떠난다.
제자 토마스 뮐러와 함께
토마스 뮐러와 함께 우유 CF. 이름이 같아 생긴 우연..같은 인연
명예 : 2006년 독일 월드컵 직전 월드컵 골든슈를 전달받은 뮐러
최근 게르트 뮬러의 이름이 스포츠지에 오르내리는 것은 그의 골 기록이 위협받을 때뿐이다.
2006년 브라질의 호나우두는 그간 이어지던 그의 월드컵 통산 최다 골 기록을 깨뜨렸다.
그러나 호나우두의 기록은 뮬러의 기록보다 결정력 면에서 훨씬 뒤처진다.
뮬러가 2번의 월드컵에서 13경기에 나서 14골을 넣은 데 반해 호나우두는 3번의 월드컵에서 19경기에 나서 15골을 넣었다.
지난해 12월 유럽축구연맹(UEFA)은 AC 밀란의 필리포 인자기가 유럽 클럽 대항전 총 98경기에 출전해 63골을 넣었다고 발표했다(이는 인터토토컵과 슈퍼컵까지 포함된 기록이다).
그러나 이 역시도 UEFA의 실수로 뮬러의 3골이 누락된 탓이었다.
게르트 뮐러의 월드컵 최다득점 기록을 깬 호나우도
월드컵 득점 역사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르다
게르트 뮐러의 한시즌 최다골 기록을 위협하는 메시, 한계를 모르는 위대한 선수
아직도 뮬러는 자신의 뛰어난 장기 중 하나를 유지하고 있다. 무게 중심을 낮게 유지하는 것 말이다(영미권에서도 잘난 체하거나 허영심 많은 사람에게 방방 뜬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브라이트너는 뮬러의 근황을 이렇게 전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되찾았어요. 사람들은 뮬러가 거칠고 무뚝뚝한 사람일 것이라 예상하지만, 아니에요. 그는 부드러운 사람입니다. 만약 단 한 명의 절친한 친구가 필요하다면, 게르트 뮬러로 충분합니다. 그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고 충직한 사내입니다. 그에 대해 말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져요.”
폭격기는 긴 임무를 마치고 평화롭게 착륙한 것이다.
바이에른뮌헨 리저브팀 수석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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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넘게 굳건히 지켜졌던 게르트 뮐러의 기록들.
첫댓글 빠르고 날렵했지만 절대 특출나지 않았고, 키가 크지도 않았으며 힘이 세지도 않았습니다. 발재간이 좋은 건 더욱 아니었죠. 그러나 탄탄한 기본기를 지녔고, 골넣는 능력만큼은 역대 최고였습니다. (메시가 뮐러의 득점 기록을 경신하기는 했지만, 박스 안에서의 움직임과 위치선정은 뮐러가 한 수 위라 생각합니다. 결정력은 뮐러가 살짝 위.) 전 이런 스트라이커를 좋아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원샷원킬 유형의 스트라이커가 드문 추세라. 안타깝네요. (개인적으로는 본문에 잠깐 언급된 토마스 뮐러를 유심히 보고 있습니다.)
저도 인자기나 뮐러같은 선수들 정말 좋아합니다 참 유니크하죠 ^^ 특히 인자기 같은 선수는 드리블도 할줄 모른다고 혹평도 받곤하는데 박스 안에서의 위협감과 결정력은 세계최고이니 이런 선수들을 보면 참 즐겁습니다 ^^
이분은 펠레 마라도나와 같은 급으로 보기는 힘든가요? 월드컵이나 클럽 득정왕기록을 모두 갖고 있었던 분이고 월드컵 우승 유로 우승 등등 수상경력도 화려한데... 선수생활이 좀 짧아서 인가
동시대에 크루이프와 베켄바워가 존재했죠.
기록상으론 뮐러가 크루이프나 베켄바워 보다 앞서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