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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 5,1-8>
형제 여러분,
1 여러분 가운데에서 불륜이 저질러진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이교인들에게서도 볼 수 없는 그런 불륜입니다.
곧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데리고 산다는 것입니다.
2 그런데도 여러분은 여전히 우쭐거립니다.
여러분은 오히려 슬퍼하며, 그러한 일을 저지른 자를 여러분 가운데에서 제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3 나는 비록 몸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영으로는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는 것과 다름없이, 그러한 짓을 한 자에게 벌써 판결을 내렸습니다.
4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제 여러분과 나의 영이 우리 주 예수님의 권능을 가지고 함께 모일 때,
5 그러한 자를 사탄에게 넘겨 그 육체는 파멸하게 하고 그 영은 주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한다는 것입니다.
6 여러분의 자만은 좋지 않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린다는 것을 모릅니까?
7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입니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8 그러므로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사악이라는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6,6-11>
6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7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8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나 서자
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10 그러고 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11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앞 장면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며,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루카 6,5).
이어지는 오늘 복음에서도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지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루카 6,9)
그들이 입을 열지 않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손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합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루카 6,8)
예수님께서는 어둠 속에 숨어있는 저희를 빛으로 불러내십니다.
당신 면전으로 불러내십니다.
자비와 치유에로의 부르심입니다.
생명과 구원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손을 뻗어라.”
(루카 6,10)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란?
마치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 가슴에 자기 뜻을 꼭 움켜쥐고 있듯이,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이며, 움켜쥐고 있는 바람에 형제들과 주고받고를 못하고 있는 불통을 의미합니다.
또한 자신을 꼭 쥐고 있어서 완고해져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느님과 형제들과 단절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묘한 것은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손을 꼭 쥐고 태어납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에덴에서부터 쥐었습니다.
‘선악과’를 손에 움켜쥐었고, 교만과 불순명과 탐욕을 움켜쥐었습니다.
곧 ‘손 오그라든 이’는 죄에 물든 모든 그리스도인의 표상입니다.
사실 선악과를 따먹고 높아지려 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추락이었습니다.
금단을 어기고 자유를 행사했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속박이었습니다.
욕심을 부려 자신을 채웠지만, 그것은 오히려 단절과 죽음이었습니다.
결국 움켜쥐는 것은 추락이요 속박이요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니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은 단지 움켜 쥔 것을 놓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놓고서 고통과 은총의 못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께서 손을 펴시어 십자가에서 못을 받아들이시고 구원의 피, 화해의 피를 흘리심을 의미합니다.
이제 첫 아담이 움켜쥔 손을 펴시고, 새 아담이 되심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은 구원을 받아들임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는 손을 펴고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사랑을 건네주기보다 자애심과 이기심을 채웠던 우리의 손을, 위로하기보다 돌팔매질했던 우리의 손을 뻗어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이제는 움켜쥔 것을 놓아야 할 일입니다.
마음을 풀고 손을 펴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마음에 품고 구원된 자로 살아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손이 당신 구원과 사랑을 건네는 손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손을 뻗어라.”
(루카 6,10)
주님!
주고받을 줄 아는 복된 손이 되게 하소서!
주고 싶은 것만 주고 받고 싶은 것만 받는 손이 아니라, 주고 싶지 않아도 주고 받고 싶지 않아도 받는 손이 되게 하소서!
선악과를 움켜쥔 탐욕과 불순명의 손이 아니라, 못과 창을 받아들인 사랑과 신뢰의 손이 되게 하소서!
움켜 쥔 것을 나누어주고, 손을 뻗어 당신의 사랑과 구원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굽은 마음을 퍼라>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시며 당신의 능력을 통해서 오그라든 손을 이전처럼 성하게 하셨습니다(루카 6,10).
손을 뻗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 주는 행위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주는 것을 받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손을 뻗어 서로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손을 편다는 것은 본인뿐 아니라 모두가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 기쁨이라면 더 많이 누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생각하는 안식일의 본질적 의미보다는 규정과 규율에만 얽매여 있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그 사람들입니다(루카 6,7).
그들은 마음이 오그라들어서 예수님의 활동을 방해하고 마침내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죽일 수 있을 것인지 의논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오그라든 자신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손뿐만 아니라 마음도 고치시는 분입니다.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골을 부리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것은 마음이 오그라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을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조롱거리가 되어도(예레 15,10), 뼛속에 가두어둔 주 하느님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예레 20,9) 아버지의 뜻을 따라 가실 길을 가셨습니다.
혹시라도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픈 것은 아닌지?
내가 만들어 놓은 하느님 상 때문에 다른 어느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닌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마음을 넣어주며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시길 청합니다.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주시길 희망합니다(에제 36,26).
그리하여 안식일은 물리적으로 쉬는 것보다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더불어 향유하는 것이라는 깨우침을 얻길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씀하십니다.
“십계명은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일에서든 트집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는 무엇인가 꼬인 사람입니다.
얽힌 것을 풀면 좋으련만 바른 것도 그릇 것으로 보니 그 사람은 불행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루카 7,32)
"움직여야 할 때 움직이고 멈추어야 할 때 멈추어야 하는 것이 삶이고. 움직여야 할 때 움직이지 않고 멈추어야 할 때 멈추지 않는 것이 죽음이다."
(이현주)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판단과 사람의 판단에 있어서 어느 판단을 따라야 할까요?
당연히 하느님의 판단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 우선시 되는 것은 하느님이시고 동시에 사람입니다.
사사건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여전히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긍정을 찾아내는 삶입니다.
긍정의 주 하느님을 생각하십시오!
행동은 마음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무엇이든 주님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굳건히 하여 참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불평으로 세상을 더럽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손을 뻗어 주님의 손을 꼭 잡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대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예수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야겠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하나 하나는 어찌 그리 명쾌하고 통쾌하고 상쾌한지 탄복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그때 주어진 상황이나 환경, 대상에 걸맞는 촌철살인의 말씀을 던지시니, 어떤 사람은 치가 떨리고 살이 떨리고 복수심에 부들부들 떨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십 년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통쾌함을 선사하십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그 자리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던지는 생명수 같은 말씀을 스펀지처럼 족족 흡수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저 호기심으로 그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반면에 강한 적개심과 복수심으로 이글거리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내면이 잔뜩 오그라든 사람들, 앞뒤가 꽉 막힌 사람들이었습니다.
은총이 폭포수처럼 내리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지만, 귀와 눈, 마음과 영혼이 닫힌 그들이었기에, 감동이나 회개, 새출발은 조금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또한 오늘의 첫째가는 조연,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손이 오그라들었지만 마음은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눈과 귀, 영혼이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외치십니다.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손을 뻗어라.”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만 그 말씀을 건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회당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 특히 마음이 오그라들 대로 오그라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오늘 우리 각자 역시 들으라고 건네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권고 말씀에 따라 어둡고 으슥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있지 말고, 환하고 넓은 중심에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앉아 계신 자리 가까이로 다가서야겠습니다.
구리고 쉰내 풀풀 풍기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예수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과 일치의 여정중인 우리들 - 그리스도 중심의 삶>
“주님, 당신의 정의로 저를 이끄소서.”
(시편 5,9ㄴ)
요즘처럼 공동의 집인 지구의 자연이 고맙고 사랑스럽게 여겨지긴 처음입니다.
하나뿐인 내 인생 아끼고 돌보듯 하나 뿐인 이웃 하나하나의 인생을, 하나뿐인 공동의 집인 지구의 자연을 아끼고 돌봐야 할 것입니다.
9월 1일부터 10월 4일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축일까지의 창조시기에 바치는 매 끝기도 후 기도문이 시작부터 참 정겹습니다.
“만물의 창조주이신 주님,
주님 사랑의 친교에서 주님 말씀이 나시어, 주님께 찬미의 노래를 부르는 생명의 교향악을 만드셨나이다.”
풀벌레 찬미 노래와 더불어 익어가는 열매들의 요즘 가을 시기에 참 적절한 기도문입니다.
때 되니 하늘에 별들을 달 듯 싼 배봉지안의 배들도 수확의 날이 가까워져 곧 하느님의 별들을 따듯 배들을 따게 될 것이고, 밤송이들도 벌써 벌어져 밤알도 떨어지고 있으며, 대추 열매들도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창조주 주님의 침묵중에 묵묵히 일하시는 모습이 놀랍고 고맙습니다.
제 유일한 선의의 경쟁 대상은 이런 주님이십니다.
“밤마다
가을 풀벌레 찬미 노래 들으며
둥글게 익어가는
가을 열매 형제들
청초하게 피어나는
달맞이꽃 자매들
반갑다, 고맙다
사랑스럽다.”
- 2022.9.4.
어제 써놓은 ‘찬미 관상의 형제자매들’이란 시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절로 떠오른 강론 제목은 '주님과 일치의 여정-그리스도 중심의 삶'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중심의 삶과 더불어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주님과 일치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회개한 성인은 있어도 부패한 성인은 없다며 다윗과 솔로몬을 비교한 교황님 말씀을 잊지 못합니다.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부단한 회개요 이를 위한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의 중심의 삶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것입니다.
부패인생을 발효인생으로 바꾸는 성령의 누룩, 그리스도 은총의 누룩입니다.
제1독서의 후반부 말씀이 적절한 도움이 됩니다.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입니다.
우리의 빠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묵은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
그리스도와 중심의 삶과 더불어 주님과 일치의 여정에 충실할 때 비로소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없는 빵이 되어 이 거룩한 미사축제를 지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회개와 더불어 부패를 막아주며 변질變質이나 변절變節됨이 없이 한결같이 순결과 진실의 누룩 없는 빵으로 살게 하십니다.
바로 이런 그리스도 예수님의 진면목이 오늘 복음에서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그대로 살아 계신 하느님의 현현顯現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며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과의 일치도 날로 깊어집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지식은 차고 넘쳤겠지만 주님을 통찰하는 지혜는 전무한 정말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봅니다.
사랑이 절대적이라면, 율법은 상대적입니다.
분별의 잣대는 사랑이요,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안식일법의 잣대가 아닌 사랑의 잣대로 보면 저절로 답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하고 이르십니다.
흡사 이 거룩한 미사시간, 마음이 오그라든 우리를 향해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일어나 가운데에서 서라.”
오늘 화두처럼 간직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정말 큰 죄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삶의 한복판, 중심 자리에 서서 다시 주님을 바라 보며 사는 것입니다.
이어 용기있고 지혜로운 주님의 단도직입單刀直入의 질문이 이들을 침묵시킵니다.
주님의 질문 안에 이미 답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안실일법 잣대가 아닌 무엇이 좋고 목숨을 구하는 일인지 사랑의 잣대로 하면 답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일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과연 예수님은 어떻게 처신하셨겠는가를 생각하면 정답은 저절로 나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중심의 삶과 더불어 주님과 일치의 여정이 우리 삶의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날로 주님과의 일치가 깊어질 때 분별의 지혜는 더욱 빛을 발할 것입니다.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 대한 유일한 답은 파스카의 그리스도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손을 뻗어라.”
주위의 무지한 이들을 둘러보시고는 손이 오그라든 장애인에게 말씀하시자 그 손이 성하게 됩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흡사 오그라든 마음의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오그라든 손을 뻗듯이 오그라든 마음을 활짝 펴라는 말씀입니다.
악의 저항은 참으로 집요합니다.
이 무지한 적대자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합니다.
무지의 악에 포로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입니다.
주님은 이들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진리와 사랑, 생명의 길을 가십니다.
동방영성에서 얼마나 많이 강조된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인지요!
참으로 이에 대한 유일한 답은 파스카의 그리스도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과 더불어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 일치의 여정이 무지와 허무에 대한 유일한 해법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주님과의 일치가 날로 깊어지는 우리들입니다.
“주님께 피신하는 우리들 모두 즐거워하며,
영원토록 환호하리이다.
주님 이름을 사랑하는 우리들, 주님이 감싸시니,
우리는 주님 안에서 기뻐하리이다.
하느님, 주님께서는 우리 의인에게 복주시며
사랑으로 방패 삼아 감싸 주시나이다.”
(시편 5,12-13)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의료보험에 가입했습니다.
치과에도 다녀왔고, 내과에도 다녀왔습니다.
의료보험이 없을 때는 큰 부담이었습니다.
의료보험이 있으니 치과에서도 내과에서도 부담 없이 진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내과에서는 위내시경, 장내시경도 하자고 했습니다.
내년에 한국에 휴가가면 하겠다고 했습니다.
평소에는 잘 모르고 지내는데 병원엘 가면 몸의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치과에서는 잇몸이 약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잇몸이 약한 것을 알고는 있지만 특별한 방법이 없기에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내과에서는 혈압이 높다고 하고, 콜레스트롤도 있다고 합니다.
그것도 특별한 방법이 없기에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큰 이상이 없는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병을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병이 생기지 않도록 면역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규칙적인 식사, 적당한 운동, 긍정적인 생각, 나눔과 봉사는 우리 몸과 마음의 면역력을 키워주는 백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교구장님께서 사제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멀리 미국에 있지만 교구를 사랑하시고, 사제들을 사랑하시는 교구장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교구장님은 사제들의 의견을 경청하셨고, 먼저 시급한 것들을 시행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직분을 떠나서 사제들이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주임신부, 부주임 신부, 보좌 신부는 직책이 다를 뿐이지 모두가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성직자이기에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같은 마음으로 수도자들과도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줄어들고 있는 성소자들을 생각해서 신학생 양성에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신학생들은 사제들의 삶을 보고 성소를 결정한다고 하였습니다.
성직자국을 신설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교구에 기도사제들을 두겠다고 하였습니다.
타교구 공소에 사제를 파견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협력사제 제도도 시행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여러 모임을 신설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토론의 장에서 사제들의 의견을 경청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교구장님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교황님께서는 ‘시노드’를 통해서 지역교회의 현안과 의견을 경청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어쩌면 그만큼 지금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의 상황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제 독신 문제, 여성 사제 문제, 성 소수자 문제, 교구장 임기제 문제, 안락사 문제, 낙태 문제’ 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법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는 문을 열고 있지 않습니다.
성공회, 개신교, 원불교와 같이 다른 종교에서는 이런 문제들에 문을 열고 개방하고 있습니다.
사제의 결혼을 허용해도, 여성에게 성직자의 문을 개방해도, 성 소수자들에게 성직의 기회를 주어도, 교구장의 임기를 정해도, 안락사와 낙태를 허용해도, 그것으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갈등과 분열이 커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소비와 자본 그리고 물질이 안개처럼 우리 주위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켜도, 인간의 양심과 영혼을 녹슬게 해도 우리는 무관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입니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사악이라는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
새 반죽은 제도와 법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새 반죽은 순결과 진실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의로움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베네딕토 성인이 했던 것처럼, 프란치스코 성인이 했던 것처럼, 우리 시대에는 영성이 더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영성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영성은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지 못하다고 말씀하시는 분을 종종 봅니다.
이에 사람들은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부족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진짜 이유가 믿음이 없어서일까요?
그보다는 나 자신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이 이해를 위해 사람들 간의 사랑을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내가 받는 사랑의 크기에 따라서 기쁨의 강도가 바뀔까요?
그보다는 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기쁨이 더 커졌던 기억이 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사랑에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것에 크게 기뻐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받는 것이 먼저가 아니었습니다.
늘 주는 것이 먼저였고, 이런 사랑을 통해 우리는 큰 기쁨과 행복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주는 것이 아닌, 받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게 되면, 여기서 사랑의 결핍이 나타나고, 형식적인 사랑의 실천만을 입으로 말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주는 사랑에 집중하고, 이 사랑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충만하게 누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논쟁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냐 사람에게 사랑을 전하는 것이 우선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유다인에게 율법은 그 어느 것보다도 귀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어기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했습니다.
이러다 보니 율법이 곧 하느님이 되었습니다.
성경 외경인 ‘나자렛인들의 복음서’라는 책에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오른손으로 밥벌이하는 장인이었습니다.
이 오른손이 가족의 밥줄일 정도로 중요했습니다.
그런데도 율법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고쳐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병자를 앞에 놓고 치유의 합법성 문제를 따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가장 강조하시는 것은 사랑이었고, 하느님께서 전해주신 율법 역시 그 사랑에 기초해야 했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고 따라서 법 중의 법은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는 법이 됩니다.
그런데 알맹이는 빼고 법조문 글자에만 집착하면서 사랑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입니다.
형식적인 사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 자신이 받을 사랑에만 집중해서도 안 됩니다.
그 모든 것을 다 지워버리고, 자신이 주는 사랑만을 남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하느님의 사랑이 보이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충만히 받게 됨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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