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외적으론 순전히 영어 공부에 도움이 되겠지, 라는 입장이었고 뭔가 보고 있으면 외로운 밤, 술값이 좀 줄어들겠지, 라는 속마음도 있었지만,
다 상관없이 TV = 재미있잖아, 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영국 생활을 조촐히 어학연수로만 있어서 어학 연수생 입장의 경험만 주절주절 늘어대는 것 같아 한계가 느껴지지만, '유학생' 일기는 런던여름님 게시물이 있으니까 너무 좋은 것 같아요. ㅋ)
어쨌거나 그 날따라 In the Mood For Love라는 왕가위 감독 영화를 TV에서 해준다고 Metro에 나와 있었고 좋아하는 영화를 런던 TV에서 보는 느낌은 어떨까, 하면서 고무되면서 TV라는 걸 산다면 바로 요 타이밍이다. 하고 외치며 잽싸게 TV를 사러 갔던 것이었다.
브릭레인 마켓의 번잡한 사거리에 접어들기 전 TV를 들고 올 체력을 보강하기 위해 그 유명한 브릭레인 베이글 베이커리에서 맛이 딱 떨어지는 치즈케익을 하나 사먹고
당분을 만땅 채운 다음
왼쪽 골목으로 꺾어져 평소에 담배사러 가서 TV 들을 점찍어 두었던 창고건물 속으로 들어갔다.
아, 역시나 그곳에서는 각종 싸이즈의 TV들이 각종 맛의 술 종류들처럼 새끈한 자태들을 뽐내고 있었다. 그 중 에서 어떤 사람 좋아 보이는 인디언이 늘어놓은 TV들 앞에 나는 멈춰섰다. 그 중에서 나는 가장
큐트하고 심플한 놈을 찍었다. 놈은 PC모니터라고 해도 속아 넘어갈 만한 생김새였다.
“오옷! 요 귀여운 놈 얼마에여?”
“단 돈 50 파운드!”
“앗! 깎아 주세여.”
“인디언은 TV값을 깎아주는 법이 없소.”
“-_-;;”
나는 당장 50 파운드를 냈다. 팔랑, 하고 꺼낸 50파운드 위에서 영국여왕이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거기 있는 모든 TV들은 깨끗한 화질을 자랑처럼 떠벌이고 있었다.
내가 고른 건 다른 TV에 비해 그렇게 잘 나온다고 생각되지 않았지만, 들고 가기 딱 괜찮아 보였다. 더 큰 것도 50 파운드였지만, 혼자 들다간
베쓰날 그린 어느 길가에서 커다란 TV를 끌어안고 허리가 부러진 채 쓰러지는 슬랩스틱 쇼! 를 할까봐 참았다.
‘아, 영국에서 왕가위 영화를 보는 일이 내 삶에 일어나겠구나.’
‘피쉬앤칩스 냄새에 찌든 내 영혼에 동양적 사랑의 진수가 가슴 가득 스며들 생각을 하니 아무리 작긴 해도 꽤나 무거웠던 TV가 갓 사귀기 시작한 애인을 처음으로 안은 것처럼 가뿐하구나’
하고 중얼거리며 나는 TV를 들고 왔다.
그러나 집에 와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TV를 켰을 때, 나는 마리아나 해구 밑바닥에 내 모든 심정을 가라앉혀버렸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TV에 딸려있던 동그란 안테나따위는 도대체 아무런 방송도 잡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파는 곳에선 그렇게 잘 나왔었는데!
나는 이대로 포기하기가 싫었다.
‘TV를 샀으면 반드시 시청을 해야한다. 포기하면 안 된다.
낮선 남의 나라 영국에 왔으면 반드시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포기하면 안 된다.
인생을 살면 허무해지지 말아야 한다. 포기하면 안 된다.’
부랴부랴 나는 근처의 전파사 같은 가게들을 찾아 허겁지겁 돌아다녔다. 안테나! 안테나! 나는 심해의 가장 깊은 곳에 가라앉아버린 내 피 같은 50 파운드와 상심을 잡아내기 위한 안테나가 필요했다.
하지만 근처의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았고, 나는 결심하고 시내까지 한달음에 나갔다. 어차피 지르는 김에 안 오는 15번 버스 안 기다리고 튜브까지 타는 초강수를 썼다.
그래서 토튼햄의 아고스에서 사온 V자 안테나. 요걸 꽃으면 TV가 반짝하고 잘 나와서 오순도순 나를 즐겁게 해주겠지, 내 영국생활은 값진 것이 되겠지, 내 인생은 허무해지지 않겠지, 라는 생각에 나는 집에 오는 길이 즐거웠다.
그러나! 그 안테나를 꽃자 아까보단 나았지만, 화면에 나오고 있는 게 인간인지 에일리언인지 구분이 안 가는 상태로만 잡혔다. 갖은 방법으로 가장 잘 잡힐만한 위치로 TV와 안테나를 옮겨대다가 나는 V자 안테나를 남극과 북극 방향으로 놓고 왼쪽 47도 오른 쪽 17도 각도를 유지한 후 TV를 거실의 테이블 위에 의자를 하나 더 놓은 높이에 올렸을 때 채널포 였던가 파이브였던가가 잡히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가끔씩 지지직거리고 자막을 알아볼 수도 없었던 그 TV로 결국 In The Mood For Love를 다 보았다. 인간승리였다. 안테나 값에, 열 받아서 마신 맥주 값까지 수 억이 깨졌지만, 해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 집에선 카나리 와프의 빌딩 군 때문에 깨끗한 화질로 TV를 본다는 게,
미국이 패권주의를 포기하는 것만큼
어렵다는 걸 랜드로드 아저씨가 창고에서 꺼내 준 외부용 대형 안테나까지 설치하고서야 알게 되었지만 어떤 채널은 안테나 각도 몇, 하는 공식들을 발견해서, 아쉬운 대로 긴긴 크리스마스 휴일 같은 밤을 심심하지 않게 보낼 수 있었다.
나중에 이사 간 집에선 뭐 안테나를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모든 채널이 클린하게 나와 인생의 어느 순간 필사적으로 기울이던 노력들이 허무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아버렸지만 지금이야 지나간 일이니까 추억처럼 관대한 시선을 던질 수 있어서 나름 좋다.
그러나 아무리 추억해도 영국에선 재미있는 TV 프로그람 같은 건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딱 두 개 있었다면 Jack Dee아저씨의 주옥같던 선곡들이 흐르던 짧은 프로그람과 매주 무슨 순위를 매기던 프로그람. 그 프로는 역사상 가장 비호감이었던 영화배우 순위.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가수 순위 등등을 꼽았는데 항상 예상했던 사람이 4위나 5위에 덜컥 나와 그렇다면 1위는 누구란 말인가 하고 채널을 못 돌리게 했었던 저질 프로그람이었다.ㅋ
여하간 방에서 엉덩이를 긁으며 반 쯤 드러누워 코리안 시리즈 야구중계를 보다가 지금 내 방도 케이블 신청 할 돈 없어서 그냥 대충 보다보니 잘 안 나와서 런던의 그 TV 생활이 떠올랐다. 응원하는 팀인 베어스가 떨어져 대체 팀으로 예전 베어스 감독님이셨던 김인식 아저씨를 선택해서 응원하던 한화가 결국 져서 안타까웠지만, 그것도 추억이고 모든 것이 추억이다. 추억의 자산 가치는 실로 위대하다.
첫댓글 인디언은 TV값을 깎아주는 법이 없소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추천... 붐 업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TV 대여가 편하고 경제적이지 않나요? 저도 집에까지 들고 오다가 TV 담아준 박스가 터져 고생한 기억이 나네요,,,
항상 님의 글 너무 재밌게 읽습니다. 타고난 글 솜씨도 부럽구여. 한국에서 책은 발간 하셨나요?
아직, 준비중입니다 ㅠㅜ 거 쉽지 않네요...하지만 언젠가는! ㅋ
피시앤칩스 냄새에 찌든 내 영혼에 동양적 사랑의~~우와 이 구절 읽을때 배꼽빠지는 줄 알았어요.. 15번진짜안와님 영사카페의 최고의 별입니다^^* 같이 다시 런던 꼭 가요 :)
우기시지 그러셨어요, 저는 미니 키보드(건반) 8파운드 주고 우겨서- 샀는데-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