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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성시대* 차분한 20대들의 알흠다운 공간 원문보기 글쓴이: 2015 다 이루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2011.6.20이후 적용 자세한사항은 공지확인하시라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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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베개 -장준하저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고상만저
장준하, 묻지못한 진실 ( 장준하 의문사 사건 조사관의 대국민 보고서)
장준하 선생님 의문사 진상조사는 현재는 불능으로 판명되어있음
-즉 의문사인지 아닌지 판단 할 수 없음 이 공식적 진상조사 기록임 -
2003년 출범한 제 2기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
당시 장준하 의문사 사건 팀장이 었던 고상만은 이 불능사유에 대해
당시 불능으로 판명한 것은 알수 없어서가 아님
조사할 것이 너무 많은데 할 수 없었던 <수사권이 없음 > 이유도 있고
이것을 의문사다 라고 판명해 버릴 경우
나중에 다시 조사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의문사라는 증거는 충분하나 후일을 위해 불능으로 유보시켜 놓은 것임 이라고 말함
자 그럼 장준하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겠음
장준하 선생님은 사상계를 통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지만
박정희 독재는 더욱 심해져 갔고
선두에서 날선 비판을 가했던 장준하선생님은
당연히 정권으로 부터 탄압을 받음
세무조사등 온갖 괴롭힘으로
마치 장준하 선생님이 부정을 한것처럼 보여져
사상계 독자수가 줄어들었고
<아들들이 7년 돌날라서 지은 집도 다 뺏겼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부정축재 한 언론인으로 공표함 >
그렇게 부패한 언론인으로 낙인찍어
부패언론인 정치 금지법에 걸어서 정치진출 막아버림
<근데 장준하 선생님은 원래 정치는 안하려고 했음 >
사상계 필진들을 다빼가버려서 고립 시켰고
사상계를 사고 반품하는 짓으로 부도 위기로 몰렸으며
장준하 선생님은 치욕스러운 시기를 보냄
그런 온갖 괴롭힘으로 점점 고립된 장준하 선생님은
제도권 밖에서의 투쟁은 한계를 느끼고 정치일선으로 나섬
윤보선 지지 유세를 했는데
이때 베트남 파병을 반대하는 연설에서
박정희가 친일 장교 출신이라는 점과
남로당 공산당이라는 것을 유세다니시면서 말씀하심 bb
그러다 국가원수 모독죄로 또 투옥
< 왜 때문에 있는 사실 그대로 말했는데.... ???>
그런데 이때
1968년 6월 8일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음
투옥하시던 중에 국회의원 출마를 결심하심
그래서 옥중에 출마하시는데
자 이때 중요한 인물 하나가 나타남
기억해야하는 인물임
선거운동을 대신 해주셨던분이 함석헌 선생님이고
이때 선거운동 사무실에 한 남자가 찾아와서
장준하 선생님 선거를 돕고 싶다고 하고 와서 도왔는데
그 사람이 바로 김용환이라는 인물임
이 김용환이라는 인물은 이때 당시의 일을 말하기를
" 나는 선생님이 당선 되시고 나서부터 쭉 옆에서 모시다가
1975년 1월에 백만인 선언으로 구속 되실때까지 곁을 지켰다
그러니 나와 장준하 선생님의 인연은
1967년 선거 운동 부터 1975년도 1월까지이며
나는 이 기간동안 장준하선생님 옆에서 비서역할을 하며 가까이에서 모셨다."
그러다
75년 1월 아버지 병환때문에 장남으로서 보살피기 위해
고향인 충남 당진에 내려가
중학교 시간강사로 취직을해 있다가
여름방학을 맞아 장준하 선생님에게 인사를 드리기위해
서울로 올라온것이
1975년 8월 16일 이다
1975년 8월 16일 김용환은
장준하 선생님과 자주 산행을 하던 호림사 사람들을 찾아갔음
그리고 그곳 사람들에게 장준하 선생님에게 인사 드리려고 하는데 같이 가자고 하자
호림산악회 회원중 한 사람이
내일 장준하 선생님이 산행에 오시기로 했으니
그곳에서 뵙는 것은 어떠냐는 말을 했고
다음날 장준하 선생님을 찾아 간것임
장준하 선생님은 매주 일요일 마다 산행을 하셨는데
광복군 출신인 선생님은
원래 등산을 좋아 하셨으며
도청을 피해 회의를 하는 명목도 있었음
당시 선생님을 따르던 백기완등 제자들과 산행을 하며
도청을 피해 이야기를 나누고 사람들과 교류 했던 것
-사족 백기완 선생님은
바로 이분이심
지금도 시위에 가면 맨앞에 이 백발의 노인분이 앉아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음... ㅠㅠ
지금은 얼마전 골절상으로 부상을 입으셔서 입원하셔서 못나오셨지만
모든 시위에서 더울때도 영하 18도 그 추운 겨울에도
한복을 입고 맨앞에서 2~3시간 계속되는 촛불시위 맨앞에 앉아 계심
추위에 움직이지도 못하시고 부축해서 일어나시고 걸으시면서도 항상 나와서 맨앞에 서심
이분이 5,18 추모시로 지은 시"묏비나리-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 -
일부에 곡이 붙여 진것이
"임을위한 행진"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이노래임
장준하 선생님은
1975년 8월 광복절을 전후해서 중요한 일을 계획 중이셨음
그해 1월 구속후 병보석으로 풀려 나신이후
중대한 결심을 하셨던 시기임
박정희 독재 권력을 깨기 위해
그 전 부터 하던것이 백만인 서명운동 이었는데
여기에 서명한 사람은 당대 모든 지식인들과 학생들
김수환 추기경님
법정스님
김대중 전대통령
윤보선 등
정치 문학 종교 재야인사 모두와
거의 모든 대학생들이 서명함
-요즘 하는 서명의 차원이 아니였음 -
군부 독재 시대 긴급조치 까지 발동된 상황에서
당시에는 친구랑 술자리에서 경제가 어려워
이말을 했다고 박정희 정권 모독이라고 끌려가 옥살이를 한 사람이 있던
극악한 시기에
독재 유신 철폐하고 민주주의 회복하라는 서명을 받으러 다닌것임
서명을 받는 곳에는 그걸 막는 군부가 있었고
그게 시위로 이어졌음
그러니 백만인 서명은 백만인 시위나 다름 없었고
점차 시위 동력이 커졌음
이 일로 75년 1월 구속 되시는데
심장이 안좋아 병보석으로 풀려나심
< 원래 선천적으로 심장이 안좋아서 광복군에 합류하려고 일본군을 탈출했을 때도
심장병 때문에 죽을 고비를 겪었음 >
병보석으로 풀려나 병원에 계셨을 때도 침대밑에
서명 용지를 두고 문안오는 사람에게 서명 하라고 하셨음
그러나 이것 말고 장준하 선생님이 준비 하신
다른 일이 있었던 듯 함
< 결과 적으로는 바로 이일 때문에 죽임을 당하신 것으로 추측 >
준비 하셨던 일은 어떤 일인 지는 모르나
당시 김수환추기경님 법정스님도 어떤일을 준비 하는 줄을 모르셨다고
그냥 장준하 선생님이 각자 분야에서 일만 맡기시고 다른말 없으셔서
큰 그림은 장준하 선생님 본인만 생각하고 계셨던 일이었음
김수환 추기경님
법정스님등
각 분야 큰 어르신들께 사람을 모아 달라는
그런 준비를 좀 해 달라고 말씀 하셨다고 함
사람이 많이 필요하니
영향력 있는 인사들에게
사람을 좀 많이 모을 준비를 해달라고 하셨음
그리고 돌아가시기 이틀전
8월 15일
김구 선생님이 암살 당하기 이틀전 6월 24일 자신에게 맡기신
태극기를
<이후 6.25 전란에 어머니와 큰딸을 잃은 그 난리에도 이 태극기를 지키셨음 >
이대 박물관에 기증하심
그리고 할아버지 아버지가 목사셨던
독실한 기독교인 장준하 선생님은
부인 김희숙 여사가 천주교인데
천주교로 개종을 하시고
부인과 혼배 성사를 올리심
< 천주교인 김희숙여사는 혼배성사가 소원이셨음 >
그리고 아버지와 김구선생님 묘소에 성묘를 하고 벌초를 혼자 하심
<평소에 성묘를 가지 않으셨음 >
그리고 가장 중요한일
당시 가택 연금 상태에 있었던 김대중 전대통령을 찾아감
<장준하 선생님은 김대중 전대통령을 지지 하지 않았음
앞에 말했듯이 윤보선 전 대통령을 지지 했고
야당대표로 김대중 전대통령이 대표가 되자 탈당까지 했음 >
그런데 돌아가시기 약 20여일 전에
그런 자신의 정치적 노선을 꺾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찾아 간것임
장준하 선생님도 24시간 감시 도청을 당하고 있는 상태 였음
김대중 전 대통령은 73년 일본에서 중장정보부에 납치 되어
바다에 수장 되는 것을 미국이 구함
그 이후 쭉 정치활동이 금지 되어
한국에서 가택연금 상태였으니
집 앞에 군인이 있는 것은 물론
당연 도청 감시 상태 였는데
이곳을 찾아 가셨음
이건
박정희에게 선전포고 였음
박정희가 가장 두려워한 인물이 딱 두사람 이었는데
한 사람은 정치인 김대중
한 사람은 언론인 장준하
하지만 이둘은 정치와 언론으로 활동 방향이 달랐고
<그래서 더욱 장준하 선생님이 정치 못하게 막기도 했음 >
장준하 선생님이 정치를 하신 이후에는 노선이 달라서
둘이 합세하지를 않았음
그런데
선전포고 하듯이
장준하선생님이 자기 정치 노선을 꺾고 김대중 전대통령을 찾아간것임
물론 이날 두사람이 나눈 대화는 모두다 중정(중앙정보부)에 기록되어있음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 8월 14일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1975년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본부의 이름으로「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을보냄
중요한 선언을 하겠다고
선전포고 하심
<이 일은 원래 예정 보다 미루어졌는데
김영삼 전대통령이 당시 김대중과 함께 야당대표 인사였음
동남아 체류중이라
그가 돌아오는 이후에 하는 것으로 미루어졌음 >
즉 이렇게 선언하고 다음날
금요일에
이대에 태극기를 기증하셨고
8월 16일 토요일 김용환이 갑자기 나타났으며
8월 17일 일요일
사망 하심
<참 운명이란 것이 8월 17일 이날은 장준하 선생님이 광복군으로
1945년 8월 17일 미국oss 첩보부대에 합류해 작전에 투입되어 고국 땅을 밟은 날임 >
근데 8월 15일 광복으로 이 작전은 이루어 지지 않았고
17일 고국에 들어왔다가 철수함
그리고 이후 1945년 12월경에 김구 선생님을 모시고 정식으로 들어옴
.
그러니 오랜시간 고국을 떠난 장준하 선생님이
처음 고국땅을 밟은 날은 사실 8월 17일이고
그 이후 8월 17일 매해 당시 같은 첩보부대였던 광복군 동료들과
이날을 기념하시기도 했음
그런데 그런 축일이 돌아가신 날이 되버림...
다음편 1975년 8월 17일 장준하 의문사 그것이 알고 싶다 < feat. 사건의 재구성 >
1.< 그때 그시절 > 독립운동에서 민주화 운동까지 프롤로그 그리고 윤동주
http://cafe.daum.net/subdued20club/ReHf/1127019
2.<그때 그시절> 독립운동에서 민주화운동까지 반드시 알아야할 인물 장준하 <feat 박정희가 가장 두려워한 인물>
http://cafe.daum.net/subdued20club/ReHf/1127207
3.[그때 그시절] 독립운동에서 민주화 운동까지 - 김구와 장준하 (feat 일본군이 먹다 남은 음식을 개처럼 받아먹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
http://cafe.daum.net/subdued20club/ReHf/1127704
4.[그때 그시절] 독립운동에서 민주화 운동까지 - 1950년판 컨트롤비트 첫번째 (feat.사상계)
http://cafe.daum.net/subdued20club/ReHf/1129356
5. [그때 그시절] 독립운동에서 민주화 운동까지 - 1950년판 컨트롤비트 두번째 (feat.사상계
http://cafe.daum.net/subdued20club/ReHf/1129468
7.[그때 그시절] 1975년 8월 17일 장준하 의문사 그것이 알고 싶다 < feat. 사건의 재구성 김용환 >
http://cafe.daum.net/subdued20club/ReHf/1131934
8.[그때 그시절] 1975년 8월 17일 장준하 의문사 그것이 알고 싶다 < feat. 사라진 9시간 >
9.[그때 그시절] 1975년 8월 17일 장준하 의문사 진상조사 위원회 < feat. 근접한 진실 >
http://cafe.daum.net/subdued20club/ReHf/1133340
10. [그때 그시절] 1975년 8월 17일 장준하 의문사 (feat .오후 3시 의문의 괴전화 )
http://cafe.daum.net/subdued20club/ReHf/1135900
11.[그때 그시절] 세명의 거짓말쟁이와 유골이 말해준 진실 (feat.장준하 죽음 그후)
12.[그때 그시절] 친구를 가슴에 묻고 민주주의 투사가 된 목사님 문익환- 프롤로그 (feat.문성근)
* "빨간 글씨는 새빨간 거짓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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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성시대* 차분한 20대들의 알흠다운 공간 원문보기 글쓴이: 2015 다 이루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내용 흥미롭게 읽고있었는데 1편부터 흐름을 알아야되겠구나 밤샐각
고마워 1편부터 차근차근 읽어봐야겠다
빨간 글씨... 진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