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추홀에 관하여
고려시대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 실린 백제 건국 설화에
미추홀(彌鄒忽)이란 지명이 나온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과 소서노 사이에 태어난 비류와 온조 형제는
이복형제인 아우 유리에게 후계자 자리를 빼앗기자 추종세력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소서노(召西奴)는 기원전 66년 삼국시대 백제의 제1대
온조왕의 어머니이시다.
비류는 미추홀에 도읍을 정했으나, 미추홀은 물이 짜고
땅이 습해 살 만한 곳이 못 돼 비류는 후회 끝에 죽고 말았다.
백성들은 위례성에 자리 잡은 온조에 합류했다.
나라 이름을 백제라 명명했다.
미추홀은 ‘물의 고을’이라는 뜻이다.
문학산 중턱엔 예부터 내려왔다는 '우물'이 있다.
지금도 약수로 쓰인다.
문학산 일대가 그 당시 도읍지 터로 추정된다.
지금도 정상에는 백제시대 석축산성 일부가 남아 있다.
미추홀은 이후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었다.
고구려 땐 매소홀현(買召忽縣)
신라 때에는 소성(邵城)이라 고쳐 불렀다.
소성하면 인천의 막걸리 소성주를 떠울리게 한다
뒤에 경원군(慶源郡)이었다가, 경원부(慶源府)로 승격
그 후 인천으로 했다가, 다시 인주 (仁州),인주군 등 등으로
인천 남구의 명칭이 ‘미추홀구’로 바뀌었다.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했다고 한다.
남구가 애초 인천 남부지역 전체를 관할했지만
행정구 분할로 남동구와 연수구로 떨어져 나간 뒤엔
인천 중심부만 남게 되어 이름과 맞지 않는 데다
지역 정체성을 찾아 볼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어쨋든
<동-서-남-북>의 방위식 이름(동구,서구,남구,북구,중구)을
고유명사로 바꾼 것은 남구가 전국 최초다.
인천 남부경찰서와 남부소방서도
각각 미추홀경찰서와 미추홀소방서로 바뀌었다.
인천 시민들의 역사문화 정체성이 깨어나고 있음인가 싶다.
청원이 아버지 모시며 딸 하나, 아들 둘 코흘리게 부터 키워
시집 장가 보내며 30년 동안 이웃과 정답게 살던
제2의 고향 남구 숭의동 집,정원 한 켠 장독대 옆
석류나무 열매가 붉게 물들기 시작할 때면 어김없이
정원 잔디 밭에서 한우 불고기 파티를 연래 행사로 했다.
숭의동 집을 떠나온 지도 어언 7~8년,
닭장같은 아파트에선 그런 불고기 파티는 생각뿐이다
잠시 숭의도 고향집 생각에 젖어 본다.
* 한국 지명 사전(이민우 지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