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들은 신령한 봉우리에 걸맞은 이름을 붙였다. 함양 영취산(靈鷲山·1,076m)은 백두대간에서 호남금남정맥이 갈래치는 봉우리여서 이름이 제격이다. 산세가 빼어나 대간 종주산행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만, 일반인들에겐 다소 생소하다. 경남 양산에도 같은 이름의 산이 있고, 창녕에도 있으니 헷갈릴 수도 있다.
영취산 아래에는 함양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원시 상태의 부전계곡이 있다. 오랫동안 산행을 한 사람들도 길 찾기가 어려워 감히 들어서기를 꺼려하는 깊은 계곡이다. 무더위가 맹위를 떨치는 날, 부전계곡을 찾아나섰다.
함양군 서상면 옥산리 부전마을 주차장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부계정사를 지나 산행 들머리인 식수대 부근 묘터~제산봉 능선~헬기장~안부 갈림길~894봉~덕운봉(950)~백두대간 덕운봉~논개 생가 갈림길~영취산~선바위 고개~부전계곡 상류~합수 지점~삼거리~용소~주차장까지 12㎞를 7시간 30분 동안 걸었다.
부전계곡은 조선 후기의 학자 부계 전병순(1816~1890)이 은거하고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기도 하다. 부계정사라는 옛 집이 그대로 있다. 노론 성리학자인 전병순은 평생을 함양에서 지낸 재야학자이다. 그는 위정척사(衛正斥邪)와 존화양이(尊華攘夷)의 당위성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한계를 인정하여, 훗날을 도모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고 한다.
산행은 사방댐 옆 음수대에서 시작한다. 오래된 묘 뒤로 산길이 나 있다. 제산봉 능선으로 가는 초입은 제법 험했다. 능선으로 곧장 오르는 길이 있을 법 했지만, 길이 자꾸 계곡을 파고드는 통에 가파른 된비알을 올라야 했다.
한 15분을 그렇게 오르니 뚜렷한 능선길이 나온다. 어느새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여기서 제산봉 갈림길이 있는 능선까지는 느긋하게 걸어도 40분이면 도착한다. 지척에 제산봉이 있으나 다녀올 여유가 없었다. 덕운봉으로 향한다.
능선길은 완만하다. 한층 고도가 높아진 때문에 주변 조망이 좋다. 원추리 노란 꽃이 환하다. 보라색 도라지꽃도 망울을 터뜨렸다. 10분을 더 걸어 헬기장에 도착했다. 상옥리가 일대가 한눈에 펼쳐진다.
헬기장을 지나면서 길은 안부로 살짝 내려선다. 묵은 헬기장도 있다. 힘든 부탁이겠지만, 사용하지 않는다면 자연으로 제대로 돌려줬으면 좋겠다. 보도블룩 등 인공구조물을 산정에서 만나면 기분이 좋지 않다.
안부에서는 일찌감치 부전계곡으로 내려서는 갈림길이 있다. 중간 하산로로 그만이겠다. 능선을 계속 고집해서 덕운봉이라는 팻말이 있는 곳에 다달았다. 부산낙동산악회에서 마련해놓은 것이다. 헬기장에서 꼭 한 시간이 더 걸렸다.
산죽밭을 지나 능선을 계속 오르니 어느새 백두대간이다. 여기에도 덕운봉이라는 이정표가 있다. 딱 10분이 지났다. 지형도상의 덕운봉은 지나온 곳이 맞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아마 산림청에서 대간 이정표를 만들며 편의상 적어놓은 것같다.
북쪽으로 뻗어나간 대간이 육십령에서 잘록였다가 남덕유에서 우뚝 솟았다. 남으로는 백운산이 바라다보이고 멀리 지리의 영봉에서 이어진 등줄기가 선명하다. 바야흐로 지리산을 벗어난 대간의 장쾌한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지점에 선 것이다. 영취산까지 걸음을 재촉한다.
13분쯤 걸으니 논개 생가로 내려서는 갈림길 이정표가 있다. 능선 오른편은 전북 장수군이다. 진주성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산화한 논개가 태어난 집이 장수군에 있다고 한다.
논개 생가 갈림길에서 영취산 정상석까지 35분 만에 도착했다. 영취산은 동쪽으로는 낙동강, 서쪽으로는 금강, 남쪽으로는 섬진강을 나누는 분수령이기도 하다. 백운산 방면으로 대간을 남하하며 7분을 더 가니 무룡고개로 가는 이정표가 나온다. 선바위 고개다. 이 고개에서 산행팀은 부전계곡으로 바로 하산한다.
산악회의 리본 하나가 달려 있어 길이 잘 나 있다고 착각을 한 셈이 되었다. 산죽을 헤치고 5분을 내려가도 산길은 희미했다.
하산로가 쉽기는 영취산에서 쉼터가 있는 1085봉까지 가서 능선을 따르거나, 1084봉 못미쳐 쌍폭계곡으로 가는 편이 더 편하겠다. 오지 체험을 즐길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면 산행팀의 경로를 따라도 무방하겠다.
계곡의 너덜바위는 온통 푸른 융단을 깐 것처럼 이끼가 덮였다. 작은 너덜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밟을 때마다 흔들렸다. 하지만 원시의 숲에서 뿜어내는 맑고 서늘한 기운은 오감을 살아나게 했다. 발 아래에서 숨은 물줄기가 콰르릉거렸다.
첫댓글 수고 많으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