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계엄군의 발포
제 1 절 차량탈취(21일 오전)
10:00
- 각종 차량에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는 플래카드를 붙이고 다님.
- 전남대 정문 4만 명, 후문에 1만 명 집결, 차량으로 전남대에
주둔한 공수부대 공격, 정문이 돌파되어 교내 3백 미터까지 시위대가 진입했으나 공수의 반격으로 후퇴.
- 광주 공단내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탈취한 장갑차와 군납품용 지프, 트럭 등이 시내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 장갑차를 이용, 군저지선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페퍼포그와 최루탄에도 아랑곳없이 가톨릭센터 건물 앞까지 진출했다. (월간조선, 1985. 7)
- 가톨릭센터 앞에서 군장갑차 1대
피습 파괴. (전교사 작전일지)
- 군중은 수만 명이었고 숫자는 계속 늘어나 10시쯤에는 10만여 명 운집.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9시쯤 또 다시 김범태, 전남대 상대 3년 김상호(21) 등 4명의 남학생이 도청으로 들어와 현관에 서 있던
장지사를 만나 빨리 나와달라고 재촉하고 나섰다. 장지사는 도청 현관에서 고성능마이크를 준비하라고 지시하고 대기중이었다.
이때
구용상 광주시장이 시위군중 앞에 나타났다. 도지사가 늦어져 욕설이 나오자 부하로서 조금이라도 상황의 악화를 막아보려는 듯 그는 핸드마이크를 들고
나와 자제를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중들은 '당신은 필요없어. 비켜요, 비켜' 하며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군중들이 도지사가 도착하지 않자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때 대대장인 두 명의 중령이 필자에게 다가와 '빨리 지사님을 나오시게 해서 사태가 나빠지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우리도 협상이 이루어지면 계엄분소장에게 건의해서 협의사항이 꼭 성사되도록 하겠읍니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끝내
장지사는 나오지 않았다. 만약 이때 장지사가 시위군중 앞에 나왔더라면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오지 못했다.
뒤에 이 일로 그는 많은 비난을 받게 된다.
장지사의 출현이 늦어지자 군중들은 조금씩 앞으로 전진해 왔다. 공수부대와의 간격이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그때
학생들은 카빈총과 쇠파이프, 식칼 등으로 무장한 후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빼앗아 온 장갑차와 군용차량을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오전 10시 10분 뒤쪽, 그러니까 도청 광장쪽에
있던 공수부대에게는 실탄이 지급되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된 일이지만 이때 사병 1명당 10발씩 지급되었다.
시위군중과의 대화가 불가능해졌을 때, 장지사는 도청 본관 3층 지사실 옆 복도에 있었다. 필자도 함께 있었다. 실탄이 지급되고
있는 광경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10일간의 취재수첩)
- '광주시민 단결하라' 외치고, 여고생들도 태극기 들고 앞장. 주부,
꼬마들도 각목, 갈쿠리 등을 데모대에 건네주고, 도청 도경이 고립돼 군, 경은 헬기로 진압 화기 공급, 고속버스 시내에 못 들어오고 있음.
(월간조선, 1985. 7)
-21일 오전 10:00 도지사 면담 대기중, 학생들 카빈총 무장하고 있었던
상황.(김영택 기자)
11:00 시위군중 계속 집결
- 호남동
천주교회에서 김성용, 조철현, 장옥석, 이영수, 이천수, 박상수, 백용수, 남재희 등이 회합, 광주사태를 논의하다가 김성용 등 신부들이 장백의를
입고 태극기를 앞세우고 윤공희 대주교의 선두로 도청에 들어가자고 결의한 다음,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자', '비상계엄 철폐', '민주인사
석방' 등 플래카드를 준비. (공소장)
- 김경국, 전용호, 김성섭, 윤개원, 박용준, 정재호, 이영주 등은 광천동 650 빈
가게에서 미리 준비한 등사기를 이용하여 윤개원이 문안을 작성하고 박용준이 필경한 '5.18 광주사태 때 광주시민들이 입은 피해상황'을 내용으로
하는 '투사회보 제2호' 를 2천여 매 프린트. (공소장)
- 도청 광장에는 경찰 헬기가 자주 착륙하고 또 이륙하고 있었다. 함락
직전의 탈출작전처럼 보였다. 헬기가 착륙할 때는 주로 보급품이 내려졌다. 이륙할 때는 부상자와 각종 서류상자가 실렸다. (10일간의 취재수첩)
- 폭도들은 APC 1대, 2 1/2 톤 1대, 지프차
1대, M16 1정을 휴대하고 광주교도소 쪽으로 이동중에
있음(광주교도소 2,640명 중 강력범 300, 사상범 180, 잡범 2,160, 경계:31사 96연대 1대대 13/446명).
(계엄사 상황일지)
* "20일 아침. 영암에 돌아온 나는 시위가 지방까지 확대되리라 보고 오전 11시 경 박병권, 김희규,
김석규 씨 등을 영암읍 '수진다방'으로 불러 시국에 관한 모임을 가졌다. 나는 '영암에서도 자체적으로 광주시민들에게 성원을 보내야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회의결과는 '일단 관망을 하다가 상황이 바뀌면 그때 대처방안을 정하자'는 쪽으로 결정지어졌다."(구술 : 유광열,
현사연 조사)
-21일 오전 11:00 광주교도소 이동중, M16 무장확인(계엄사
상황일지)
이상 보배드림 논객 이면박님이 아래 전남대 5.18연구소 사이트에서 발췌하신 글
http://altair.chonnam.ac.kr/~cnu518/zb41pl7/bbs/view.php?id=ja_01&page=1&sn1=&diu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