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공원에 가면 애완견 관련 플래카드가 어김없이 붙어 있습니다. 목줄을 채운 애완견만 동반 가능하다든지, 배변처리 않으면 과태료를 매긴다는, 허용하면서도 규제를 하는 곳이 많습니다만 어떤 공원은 아예 애완동물의 출입을 허용 않기도 합니다. 최근 들어 목줄 채울 시 동반출입을 허용하던 공원 중 아예 애완동물 동반을 허용 않는 쪽으로 플래카드를 바꾸어 건 곳도 간간이 보입니다. 아마도 애완견이 사람을 물고 심지어는 주인도 물어 죽인 사건이 나는 등 애완동물 사건사고가 빈발하는 가운데 연예인이 키우는 개에 물린 유명 음식점 대표가 사망하면서 관심이 지대해지고 지탄하는 분위기까지 나오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애완동물을 키우고 있습니다. 관련 산업이 급성장하고 있습니다. 애완동물을 키우는 국민이 천만 명에 달한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누구를 좋아하고 무엇을 선호하고 어떻게 사느냐는 개인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한다고 다른 이들도 좋아해야한다는 당위성은, 그들 때문에 타인이 불편함을 감수해야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은근히 강요받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수년 전 제 아이가 대학 졸업하면서 집으로 들어올 때 기르던 애완동물을 데리고는 못 들어온다고 하였고, 결국은 한 달 뒤에 다른 이에게 맡기고서야 들어온 적이 있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애완동물을 키우던 지인들 중 일부가 제게 강력하게 항의였던 적도 있습니다. 오늘 이 글도 항의하는 분이 적지 않을 것이고, 표현을 하지 않지만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시는 분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그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불편함을 표현 않고 살아주셨기 때문이지, 애완동물이 곁에 있고, 산책을 같이하는 것이 결코 좋아서가 아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애완견이 반려견이 되었습니다. 알만한, 아니, 그리해서는 안 될 방송사에서마저 ’반려견‘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제 생각은 인천일보에서 더 상세하게 다루어주셨기에 아래에 모셔와 가름합니다. 애완견, 반려견 호칭을 떠나, 사람을 물 수도 있는, 이미 물었던 경험이 있는 개들을 그 후에도 반려동물이라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사고의 바탕 하에서 집이 아닌 공공장소에서도 목줄을 하지 않거나, 덩치 큰, 야생성이 니남아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개에게 입마개를 하지 않은 상태로 산책하는 모습들을 보게 되는데, 그럴 땐 어쩔 수 없이 멀리 돌아갑니다. 괜히(?) 주인-아빠, 엄마라 해야 하나요?- 한 마디 걸었다가 돌아올 반응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는 가족일 수도 있겠지만 타인에게는 절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제발 잊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반려견의 아빠 엄마일지 모르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오빠란 호칭을 붙여 그들의 부모를 견공으로 만드는 건 절대 해서는 안 될 행위, 말입니다.
얼마 전의 사고 이후 최시원법 청원이 봇물을 이루고, 법 제정 얘기가 들끓었지만 금세 조용해졌습니다. 사고 며칠 뒤에도 목줄을 하지 않은 채 개와 같이 나가는 그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 논란이 되었지만 그 또한 잠잠해졌습니다. 애완동물은 좋아하는 이들의 집안에서만 가족일 뿐, 타인들은 백만에 하나라도 그런 생각이 없음을 반드시 인식하기를 바랍니다. 누군가가 사람 이상으로 좋아하는 개 때문에 다른 누군가의 가족이 다치고, 불안해하고 위협을 느끼고, 죽는 일이 재발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은 저만의 것은 아닐 테지요. 혐연권이 인정되었듯이, 혐견권도 인정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빨리 법제화가 되어 공원을 마음 편안하게 걸어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가 사랑하는 애완동물 때문에 누군가의 가족이 –사람이- 불안해하고 불편해하고, 다치고 죽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연히 그리 되겠지요.
애완동물 키우는 가까운 지인들로부터 좋지 않은 소리를, 눈총을 받을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만 왜 굳이 이런 글을 올리는지를 다시 한 번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주었으면 합니다.
다행히 큰 공원에서는 이런 불안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아직도 근린생활공간 곳곳에서 견공을 피해 길을 돌아가는 경우가 있지만 말입니다. 이번 주엔 네 곳의 자연을 돌아보았는데 그 중 한 곳에선 애완견 동호회 모임인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애완견을 한 마리에서 네 마리까지 모시고 왔더군요, 다행히 멀리 떨어져 있었고, 다 돌아보고 철수하던 시점이라...
경주 도리마을, 경상북도산림환경연구원에서 가을에 젖어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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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팔공산의 단풍도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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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만습지, 긴 말이 필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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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축제를 준비하고 있었던 주초의 대구수목원 풍경입니다. 28일에 축제가 시작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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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견'은 적절한 표현인가(모셔온 글)====================
짝이 되는 동무를 뜻하는 '반려'란 소중한 의미를 갖는 말이다. '인생의 반려자', '평생의 반려자'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적으로 배우자를 지칭하는 반려자는 배우자 이외 어떤 가족구성원에게도 사용되지 않는 말이다.
연로한 부모를 평생 모시고 사는 자식도, 시부모와 평생을 의지하며 함께 사는 며느리도 반려자는 되지 못한다. 반려란 말이 짝이라는 한정된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평생을 함께 할 부부가 상대방을 일컫는 말이 반려자인데, 동물에게 반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참으로 받아들이기 거북하다. 동물이 인간과 부부처럼 지낸다는 것도 아니다. 개가 아무리 사랑스럽고, 외로움을 달래주는 평생의 친구라 해도 배우자에 써야 하는 반려란 말을 붙이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백번 양보하여 외로운 사람과 동고동락하며 반려자의 역할을 대신해주는 개라는 의미에서 반려견이란 말을 수용한다 하더라도, 이는 혼자 여생을 보내는 자들이 기르는 개에게나 비유로 사용할 수 있는 정도이다. 가족이 함께 키우는 개에게는 비유조차 적절하지 않다.
개는 사람과 함께 살 수 있도록 길러진 까닭에 사람에게 사랑을 받을 만한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보다 사람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도 있는 동물이라 여겨진다. 그래서 그런 인간과 동물 사이를 규정하여 동물을 좋아하니까 가까이 두고 귀여워하거나 즐기는 것을 애완이라 하고, 그런 동물을 애완동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애완견은 인간이 아끼고 사랑하는 개라는 아무런 하자가 없는 단어이다. 애완견으로는 그 의미규정이 부족하여 완전히 사람처럼, 그것도 배우자처럼 그런 의미를 담은 단어로 칭해야 한다는 것인가?
우리가 개와의 공존을 말하는 것은 개를 개로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개를 사람의 반열에 올려놓듯 사람의 사고 속에서 규정하는 것은 개를 개로 인정하지 않는 인간의 욕심이라 할 수 있다. 혹여 개들에게 사람의 짝이 되라고 하면 많은 개들이 슬퍼할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언어선택에 민감한 편이다. 단어에 조금의 부정적인 의미만 있어 보여도 바로 이를 지적하며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은 별 나쁜 의미도 아닌 것 같은데, 어감이 안 좋고 차별어라며 많은 단어를 새 단어로 교체한다. 별 문제도 없어 보이는 기존 단어들의 의미에 사형선고를 내리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늘 써오던 단어를 사용하다가 표현의 실수에 휘말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언론에서도 속어는 물론 정상어의 지위를 얻지도 않은 신조어마저 너무나도 쉽게 사용해 버린다.
검증도 없고 인정도 받지 않은 신조어를 아무렇지 않게 써버리는 방송을 공영방송에서 바른 언어사용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언론매체에 노출되면 그 단어는 정상어로서 지위를 확보하게 되고 국민들 사이에도 쉽게 전파되어 언어 오남용이라는 부작용을 낳게 된다.
기왕이면 어감이 좋은 언어를 선택하여 사용해야 하겠지만, 너무 과장되거나 의미를 포장하는 듯한 언어사용은 바람직하지 않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나 쓸 법한 영웅칭호를 붙이는 것도 아니고, '국민' 배우(가수·타자·여동생)처럼 연예인이나 운동선수에게 붙이는 비유적 표현도 경솔하다. '꽃미남·꿀벅지·종결자·끝판왕'처럼 '꽃~, 꿀~, ~자, ~왕, ~남/녀' 등의 조어 역시 자극적이거나 극단적이어서 경박한 느낌을 준다. 새로운 표현을 사용하는 데 제대로 된 성찰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우리 사회는 조급함에 빠져 차분한 음미도 없이 멀쩡한 것에까지 손을 대며 개혁했다가 만족해하는 경우가 많다. 공정사회를 부르짖으며 칼을 쉽게 빼들어도 안 되겠지만, 칼을 뺐다 하여 무라도 잘라야 한다는 식으로 무의미한 칼질을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비정상을 정상으로 개선해야 한다며 정상을 비정상으로 바꿔놓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부조리나 비정상은 내용을 개선할 일이지 명칭을 바꾼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개를 반려견이라 하면 버려지는 유기견의 문제가 해결되겠는가.
일상에서 늘 사용하던 단어들을 그저 순수하게 받아들여 그 단어들의 의미를 깎아내리거나 왜곡시키는 일은 멈춰야 한다. 언어에 대한 너무 과장되거나 지나친 포장도 자제해야 한다. 언어는 변하는 것이지만 동물에 짝이란 의미의 말까지 붙여야 한다는 것은 지나치다. 키우는 개, 기르는 개, 애견, 애완견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인천일보(모세종 인하대 교수의 시론)-‘17년 8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