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매사추세츠 주 홉킨턴에서부터 보스턴 백배이 구역까지 42,2 km을 달리는 유명한 국제 마라톤 대회가 있다. 1897년부터 시작한 대회로서 우리나라와 깊은 인연을 갖고 있는 대회다. 해방 후 어수선한 국내시기에 이 대회가 1947년에 열렸는데 베를린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후 일본국적으로 우승의 경력이 남아 있는 손기정 선수, 생전에 이를 대한민국으로 고치기 위하여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를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손기정 선수가 감독직으로 비장한 마음으로 참여한 보스턴 대회에서 서윤복 선수는 세계기록으로 1위를 하게 된다. 또한 1950년에 열린 대회에서는 대한민국 선수 함기용(咸基鎔)이 1위, 송길윤(宋吉允)이 2위, 최윤칠(崔崙七)이 3위로 세계를 제패함으로써 보스톤 마라톤 대회는 대한민국과 깊은 인연을 맺는다.
1947 보스톤 이란 영화는 이 대회에 참석하기 위한 준비과정과 시합 전반과 우승의 결과에 대한 모습을 그려낸 영화이다. 감독은 강재규 주인공은 모두 4 사람으로 구성된 영화로서 감독 강제규, 배우 손기정(하정우), 코치 남승룡(배성우) 선수 서윤복(임시완), 한국 교민 백남호(김상호)가 주인공을 이루며 이 영화를 이끌고 있다.
명절날, 개봉 영화를 보는 것은 오랜 우리 집 전통에서 이어지는 일이다. 딸 내미는 친정 집으로 오면서 영화 예약을 끝내고 오는 중이라는 말과 함께 예약된 시간까지 알려 주었다. 서둘러 외출 채비를 차린 후 도착하자마자 영화관으로 가기 위하여 전철을 이용하여 극장으로 갔다. 극장은 약 6분 거리에 있어 경우 2 정거장에 있어 오고 가는 동선 참 편리한 곳이다. 넘치지는 않지만 한가하지도 않은 극장 관람하기에 딱 좋은 분위기였다. 음료수와 팜 콘을 준비한 후 지정된 좌석에 앉았다. 광고를 하는 시간이 이어지자 이 영화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당시 뉴스에 채록되어 전해오는 손기정 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반추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손기정 선수와 관련된 생각을 하기 시작하였다.
1912년 5월 29일 평북 신의주에서 태어난 손기정 선수는
어릴 때부터 달리기를 좋아하여 점원, 인쇄공 일을 하면서도 달리기를 계속했으며, 16세에 일본 고학길에 올랐고 20세에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만학의 길을 걸었다. 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마라톤 선수생활을 시작하여 1935년 일본에서 열린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1차 예선대회에서 우승한 후, 같은 해 4월과 5월 서울에서 열린 국내 마라톤 대회에서 모두 우승했다. 그해 11월 일본에서 열린 베를린 올림픽 대회 최종예선을 겸한 전(全) 일본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여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대표선수로 선발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를 잘 견디어 내 숱한 스포츠 일화를 남겼다.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서 2시간 29분 19초의 세계신기록으로 우승,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했다. 당시 세계무대에 알려지지 않은 신인으로서 제10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대회 우승자인 아르헨티나의 자발라, 영국의 하퍼, 핀란드의 타미라 등 쟁쟁한 우승후보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2위를 차지한 영국의 하퍼는 레이스 도중 손기정에게 "서두르지 말라"는 충고를 보내주기도 하여 스포츠맨십의 귀감으로 전해졌다. 3위는 한국의 남승룡이 차지했다. 경기 후 한 기자가 반환점부터 그토록 스피드를 낸 이유를 묻자, "인간의 육체란 의지와 정신에 따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한다"라고 대답하여 그의 스포츠맨십은 후배선수들에게 많은 교훈으로 남았다. 그러나 시상식 게양대에 일장기가 오르고 일본국가가 연주되자 우승자의 모습에는 치욕의 표정이 역력했다. 또 그는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출전했는데, 동아일보의 이길용 기자는 일장기를 없앤 사진을 실어 민족혼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는 "당시 한국인들이 개인적으로 명성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했지요. 그러나 스포츠는 예외였습니다. 베를린으로 출발하기 전부터 나는 '꼭 1등을 하겠다'라고 단단히 마음먹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전 세계인은 '손기정은 한국인임을 알게 될 테니까요"라고 그때를 회고해 그의 애국심에 고취된 정신력을 엿볼 수 있게 했다.
1947년 선수생활을 마친 후 서윤복이 우승을 차지한 제51회 미국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감독으로 참가했고 1948년 제14회 런던 올림픽 대회 및 1952년 제15회 헬싱키 올림픽 대회에 임원으로 참가하는 등 육상지도자로 후진양성에 힘썼다. 1951~55년 조선방직주식회사 상무이사, 1956~70년 서울제분주식회사 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1966년에는 제5회 방콕 아시아 경기대회 한국선수단 단장으로 참가하여 한국이 종합 2위를 차지하는 데 공헌했다. 1948년 새로 조직된 대한체육회 부회장으로서 체육행정에 관여하기 시작하여, 1963년 대한육상경기연맹 회장, 1966년 대한 올림픽 위원회 상임위원, 1970년 대한육상경기연맹 고문을 지냈으며, 1985년까지 대한 올림픽 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냈다. 1981년에는 평화통일자문위원회 위원, 서울 올림픽 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냈다. 1981년 서독의 바덴바덴에서 개최된 국제 올림픽 위원회 제84차 총회에서 서울 올림픽 대회 유치를 위한 교섭단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국제 스포츠 지도자들과의 긴밀한 접촉으로 대회를 유치하는 데 공헌하기도 하였다.
1982년 마라톤 강화위원장을 지냈으며, 1992년 대한육상경기연맹 상임고문, 한국 올림픽 위원회 상임고문으로서 체육발전을 위해 힘썼다. 세계적인 체육인으로서 제20회 뮌헨 올림픽 대회 및 제21회 몬트리올 올림픽 대회 등에 특별초청되기도 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의 공로로 미국 헬무스 체육상을 아시아 지역 대표자격으로 수상했으며, 마라톤을 비롯한 국내 육상계 발전과 한국 체육 발전에 대한 공로로 1957년 대한민국 체육상,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국제육상경기연맹의 공로상(1968) 및 특별상(1982), 일본 오시마 스포츠 문화상 등을 받았다. 자서전인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과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대회 우승 당시의 일화와 소감을 기록한 아~~ 월계관에 눈물 등의 저서가 있다. 손기정 옹은 2002년 11월 15일 서울에서영원히 잠든다.
나라를 잃은 설음을 뼈저리게 느껴 던 손기정 선수는 우여곡절 끝에 보스톤 마라톤 감독직을 승락하고 준비하지만 수많은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참가비용 문제를 어렵게 해결한 후 현지로 달려 가지만 대한민국이란 국호가 없었던 시기라는 이유로 미국군정하에 있다는 이유로 대한민국 국기와 국호를 사용할 수 없고 성조기를 달고 뛰어야 한다는 육상관련 조직 방침에 손감독과 남코지와
선수는 출전을 포기해야 하는 지경에 달하게 된다. 이런 어려운 사정에 봉착한 손감독은 굴하지 않고 결국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사용하고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뛸 수 있는 자격을 얻는 순간 알게 모르게 국가라는 존재성에 대하여 그 중요함을 감동으로 받아드리는 순간에 봉착하며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영화다. 영상 곳곳에 깔려 있는 시대적 한계의 현실 과 시대적 배경과 배우들의 의상를 통해 과거의 시간을 재현하고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을 하고 자신의 조국의 이름과 태극기를 사용하지 못하여 생긴 마음의 상처를 극복하려는 손감독의 의지는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애국심을 모으게 도와준다.
강제규 감독이 중심이 되어 잔잔하게 풀어낸 영화는 보는 내내 감동을 이어준다. 특히 끝 지점에서 폭팔시키는 강 감독 특유의 기승전결 식의 감동적인 클라이맥스는 관객으로 하여금 영상미와 함께 씨나리오에 짜인 전체의 줄거리를 잔잔하게 마음에 오래 토록 남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누구에게나 권해 주고 싶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