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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호 목사 / 신앙안의 불 신앙! (민 20:2-13)
신앙이라는 말과 불신앙이라는 말은 매우 영적인 말입니다. 불신자들은 신앙이라는 말의 의미를 모릅니다. 물론 불신앙이라는 말의 의미도 모릅니다. 신앙이라는 말과 불신앙이라는 말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신앙이라는 가치가 성립됩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에게 불신앙이라는 말도 성립이 됩니다. 이 말을 더 해석하면 신앙 안에 불신앙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안에 불신앙이 있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에게 가서 불신앙을 찾으려 하면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그 사람들은 불신앙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믿음 밖에 있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을 배반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이다' '불신앙이다' 하는 이 말은 우리들이 논할 문제이고 우리가 극복할 문제입니다.
불가해한 일들
성경에 보면 사람의 이성으로나 환경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입니다. 이들은 초대교회의 신실한 성도들이었습니다. 은혜를 받고 하나님 앞에 밭을 팔아서 교회에 연보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밭을 팔았습니다. 그러나 연보를 드릴 때 그만 탐심이 나서 절반은 드리고 절반은 감추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성령께서 크게 분노하시고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즉석에서 처단해 버렸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가혹한 일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이해해 보려해도 하나님이 어떻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저렇게 가혹하게 다루시는가, 요즘 뿐 아니라 초대교회 때도 도적질한 사람도 있고 강도질한 사람도 있는데 그들은 멀쩡하게 살려두면서 연보를 좀 떼먹었다고 사도들과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참혹하게 교인을 처단하시는 것은 너무한 일이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하나는 모세의 종말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다루실 때 므리바 물에서 한 번 실수한 것을 가지고 "너는 이스라엘을 이끌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도 이해할 수 없는 가혹한 처사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라고 하셨습니다. 200만 명 가까이 많은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 한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야 할 사람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갈 서열을 정한다면 이의 없이 모세가 제1번일 것입니다. 모세를 제외하고 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간단 말입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모세의 행동에 대하여 "너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징계를 내렸습니다. 이 사건도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여러분, 만약 하나님이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다루듯, 또는 모세를 다루듯이 우리들을 다스린다면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 나아올 수 없을 것입니다. 모세가 어떤 사람들에게 큰 손해를 끼치는 실수를 한 것도 아닙니다. 모세가 강도짓을 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향하여 "나의 거룩함을 이스라엘 목전에 나타내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이 이스라엘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어이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사회의 지성인이라고 자청하는 어느 교수는 성경에 이러한 대목을 가지고 하나님을 비판했습니다. 하나님은 잔인한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 어떻게 100세에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줘 놓고 또 다시 죽여서 바치라고 하느냐, 그런 잔인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라고 합니다. 모세를 다루는 하나님,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처단한 이 하나님을 보면 감히 무서워 그 분께 가까이 갈 수가 없는 공포의 하나님 같다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성경뿐 아니라 이 세상사도 어이없는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이주일씨가 죽었는데 우리들에게 웃음을 많이 선사하고 간 코미디언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웃음만 준 사람이 아닙니다. 온 청중들을 많이 울리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의 생애에 웃을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쓰라린 상처가 있습니다. 아들이 미국에서 유학을 하는 중에 한국에 다니러 왔다가 교통사고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졸지에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 아들을 잃은 상처가 너무 커서 한 때 공연도 못하고 방황을 했습니다. 그가 공연을 할 때 그 아들이 생각나서 그만 각본에도 없는 순서를 해서 많은 사람을 울리기도 했습니다. 마치 멀쩡하던 아들이 죽으러 나온 것처럼 잠시 다니러 나왔다가 그런 일을 당하니까 유행가 가사를 빌어서 '잊어야지 잊어야지 어차피 떠난 자식' 그렇게 노래를 했다고 합니다. 그 노래를 들은 청중들이 다 울었답니다.
동해안 수해사건을 보면서 제가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승용차들이 앞에 산사태가 나는 것을 피해가려고 대기하고 있는데 또 산사태가 나서 차 10여 대가 매몰이 됐습니다. 산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당하고 있는 그 차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심정을 상상해 보십시오.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 성경 밖에도 어이없는 일이 많고 성경 안을 보아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갑니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에게 무엇을 따졌습니까?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충성된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너희들이 나를 믿지 아니했다" 즉 너희들 안에 불신앙이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를 향하여 "목사, 네 안에 불신앙이 있어" 그 말입니다. 아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모세와 아론을 보고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를 못합니다. 모세가 못 믿고 있다면, 아론이 못 믿고 있다면 누가 믿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이 말씀 앞에 항변할 것입니다. '하나님, 저 믿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 한 주간에 하나님을 안 믿는다는 말을 한 마디도 안 했습니다. 제가 사람들 앞에 하나님이 안 계신다는 말도 한 마디도 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주일을 기억하고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이렇게 항변할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상담실에 불러놓고 "당신, 하나님을 믿고 있지 않소" 이렇게 한다면 여러분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두번째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라고 했습니다. 믿지 아니한 실체가 무엇입니까? 백성들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아니한 것, 그것이 불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위로, 삶의 모습으로 우리가 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지 못한 불신앙자들입니다. 이 대목에 가서는 우리가 믿는 자가 못 될 수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을 뭇사람들에게 드러내지 못한 불신앙자로서 이 자리에 앉아 있음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자기 자리를 벗어났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하나님 자리에서 순종해야 하는데 잠시 하나님의 자리를 옮겨버렸습니다.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 자신의 백성들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다루어야 할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지금 하나님의 자리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하고 있습니다. "이 패역한 너희여"라고 불렀습니다. 패역하다는 말은 굉장히 저주스러운 말입니다. '이 포학한 자들이여' '망할 자들이여' 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화가 나도 다른 사람을 향하여 망할 자들이라고 내뱉으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이 망하면 나도 망합니다. 그러므로 모세에게서 나온 말은 망령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이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4장28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귀에 들린대로 행하리니" 우리의 원망을 하나님 귀로 다 듣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망, 불신앙의 소리, 우리의 말로 저지른 불신앙을 하나님은 한 마디도 거르지 않고 우리의 말을 다 듣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식이 부모 앞에서 한숨을 쉬는 것도 불효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원망하면서 하는 말, 이것이 하나님 귀에 들리는 말입니다. 모세가 자기 위치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백성을 자기 마음대로 저주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어겼습니다. 8절에서 "이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명하라고 했습니다. 말씀의 역사로 물을 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11절에 보면 지팡이로 두 번 쳐서 물을 냈습니다. 이것은 말씀의 역사를 삭감해 버렸습니다. 모세의 행동만 보입니다. 지팡이로 두 번 치는 모세의 이 행동은 화가 난 행동이고 망령된 행동이고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를 가로막는 행동이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너는 나를 믿지 아니했다"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독자적으로 싸워야 될 믿음의 영역을 모세가 져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대로 섬기라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섬겨야 합니다. 루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 하나님을 하나님 자리에서 섬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리를 옮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부모의 자리에 모시고 섬겨야 합니다. 부모의 자리를 침범하면서 용돈을 드리고 좋은 선물을 드리는 것은 효도가 아닙니다. 부모의 자리를 침범하면 안됩니다. 모세는 여호와의 자리를 침범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의 백성인 줄 착각했습니다. 망하게 해도 하나님이 하시고 흥하게 해도 하나님이 하실 주권이 있는데도 모세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분노하며 저주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테니스 게임을 좋아합니다. 직접 하는 것 보다 구경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세계그랜드슬램 같은 게임을 가끔 중계방송으로 봅니다. 얼마 전에도 US오픈이 있었는데 거기에 남자는 샘프라스 하고 에거시, 여자는 비너스 윌리엄스와 세레스 윌리엄스 자매가 결승전을 했습니다. 제가 한 게임만 보았는데 세계 최고의 테니스 게임을 보고 내 나름대로 무아경에 심취를 합니다. 우리나라와 시합시간대가 맞지 않기 때문에 새벽에 게임을 보면서 즐겼습니다. 왜 테니스 게임을 즐기는가 하면 테니스 게임은 철저하게 혼자 하는 게임입니다. 골프도 케디가 늘 따라다니고 탁구도 코치가 가까이 앉아서 동작 하나 표정 하나까지도 간섭합니다. 그러나 테니스는 코치는 있지만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쉬는 시간에도 코치에게 가서 작전구상을 하는 것이 없습니다. 혼자 땀을 닦으면서 혼자 작전을 세웁니다. 철저히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게임입니다. 공을 하나 치는데도 전력을 다합니다. 테니스는 이겨도 요란하지 않습니다. 이긴 자나 패자나 같이 가방을 메고 유유히 떠나는 게임입니다. 굉장히 고독한 속에서 신비로움이 있는 게임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홀로 감당할 게임을 포기하고 삽니다. 학연, 지연, 혈연, 누군가를 붙잡고 좋은 일이 없는가, 내가 넘어가야 할 인생게임을 내가 감당하지 않고 자꾸만 복식게임을 하려고 합니다. 자꾸만 단체경기에만 포함되어 가지고 몫을 챙기려 하는 오만함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철저한 테니스 게임을 감당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극복해야 할 불신앙은 내가 감당해야 될 고독한 테니스 게임입니다. 남이 와서 내 안의 불신앙을 해소해 줄 수 없습니다. 내가 해야 됩니다.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했다" 이 대목에 가서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가 외형상으로는 불신앙자가 아닙니다. 적어도 주일을 기억하고 예배생활을 하고 있고 불신자 앞에서 전도도 하고 기도도 하는 우리들이 왜 불신앙자들입니까? 우리는 누가 보아도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모세를 향하여 "너희가 나의 거룩함을 이스라엘 목전에 나타내지 아니했다"는 이 말씀은 매우 의미 깊은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우리에게 요구하는 최고 가치의 영적 기준입니다. 우리의 불신앙은 어디서 극복해야 하는가 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함이 드러나야 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드러나야 됩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드러나야 됩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변화를 일으켜야 합니다. 이스라엘 목전에 하나님의 거룩이 드러나야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변화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듬어지는 변화가 일어나야 되는데 그것을 모세와 아론이 가로챘다는 것입니다.
위장의 가면을 벗으라
'불의한 신앙인'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불의한 방법으로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불신앙적인 동기로 충성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가식되고 위장된 불신앙을 철저하게 평가하시고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불신앙을 신앙으로 위장하여 하나님의 교회에 처신할 수는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그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모세의 행동이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인으로서 행한 것입니다. 모세가 지금 불신앙으로 하나님 말씀을 어기면서 했지만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불신앙이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온 것은 이스라엘 백성과 짐승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긍휼이지 모세의 불신앙이 정당화되는 기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불신앙으로 해도 충성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심판하십니다.
토마스 프리드먼이라는 언론인이 있는데 이 사람이 유명한 말을 만들었습니다. '랙써스와 올리브나무' 글 제목입니다. 이 랙써스는 일본 도요다의 고급 승용차 브랜드입니다. 프리드먼은 이 랙써스를 어떤 개념으로 썼는가 하면 세계화, 렉써스는 세계 어디서든지 잘 팔리는 승용차이고 또 고급 승용차로 통한다는 것입니다. 지구촌 어디를 가도 랙써스 승용차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올리브나무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하면 지역주의, 편견주의입니다. 올리브나무는 중동이라는 지역에서만 잘되는 나무니까 중동지역주의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랙써스는 세계화인데 올리브나무는 지역주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올리브나무를 가지고 랙써스 사고를 하고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편견주의와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세계화가 된 것처럼 부르짖는 것을 빗대어 이 말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용호가 10년 선고를 받았습니다. 10년 선고는 중형입니다. 제가 이용호 10년 선고를 신문에서 보면서 자꾸 다른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습니다. 진승현, 최규선, 김홍걸… 여러분, 이 사람들을 가만히 보니까 이 프리드먼의 비평에 벗어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프리드먼이 김홍걸을 알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유형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용호도 벤처의 이름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벤처사업이라는 것이 세계화를 부르짖는 사업입니다. 첨단기술로 21세기에 노동시장, 경제시장을 어떻게 한다는 등 말마다 랙써스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최규선 그 사람의 거동이 굉장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오늘날 비극적이지만 한결같이 대통령 아들과 직간접으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대통령 아들이라는 올리브 나무를 붙잡고 그들은 랙써스를 행사한 것입니다. 기술도 아니고 재능도 아니고 대통령 아들이라는 올리브나무를 잡으면 된다는 방식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님도 이렇게 믿겠습니까? 올리브나무를 하나 잡으려고 합니까? 누구를 붙잡고 신앙의 테니스게임을 하려고 합니까? 혼자 넘어가야 할 싸움인데 어떤 올리브나무를 찾아다니느냐는 것입니다.
맺는 말
우리는 모든 사람 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됩니다. 그런데 랙써스를 표방하면서도 올리브나무를 붙잡고 사는 오늘의 부패상을 보면서 예수님을 믿는 것도 그렇게 될까 두렵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지 아니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거룩이 우리의 삶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어야 됩니다. 거기에 세속의 나무가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우리의 삶 한 가운데 자리잡고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야 불신앙이 극복되는 것입니다. 이 축복을 우리가 누리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