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동 숲 속의 새 서당 골
김 홍 은
<잊을 수 없는 잣나무 숲길>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지칠 줄 모르고, 싫지가 않은 곳이 대학교의 입구인 잣나무 숲길이다. 이 길을 걸을 때마다 젊은이들에게는 늘, 새로운 생동감을 불어 넣어주는 학문의 길이기 때문에서인가 보다.
코스모스꽃이 유난히도 가득히 피어있는 안개 낀 아침의 캠퍼스는 내 마음도 가을의 들꽃으로 피게 만들어 준다.
아름드리 잣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에서 쏟아져 굴러 떨어지는 가을의 열매들이며, 깊은 산 속을 연상케 하는 낙엽 쌓인 산책로에는 가을의 젊은 사색들이 가랑잎 위로 뒹굴었다. 낙엽 속에 다리를 파묻고 책장을 넘기다 팔베개를 하고, 가을의 푸른 하늘을 바라보노라면, 시나브로 바람에 지는 낙엽이 공연한 서글픔으로 밀려와 와락 쏟아지는 감상에 젖던 학창시절 ―.
어디 이토록 아름답고 포근한 숲속이 또 있을까. 강의시간이 끝나면 수풀에 떨어진 알밤을 찾느라고 낙엽을 헤치며 친구들과 야단법석을 떨던 일이며, 하얀 자작나무 껍질에 수많은 사연을 적어 누군가에게 띄워 보내고 싶던 마음, 봄이면 두견새, 꾀꼬리, 뻐꾸기의 노래가 가득하게 합동강의실 창가로 들려오고, 배움의 목소리들은 모두가 잊을 수 없는 꿈인 듯 싶다.
학내 노력봉사로 농학과 실습 포장(圃場)에 모내기를 할 때면 악착같이 달라붙던 찰거머리 떼들을 모조리 잡아 강아지풀 줄기를 꺾어다가 홀랑 뒤집어 놓던 친구며, 대학 초년생이 조교선생님을 감히 짝사랑(?) 하던 K생의 이야기가 항상 잊혀지지 않는다. 모두들 친구들과 어울려 밤새워 술잔을 기울이며 듣고 싶은 대학시절의 추억담이다.
중간시험 준비에 여념이 없던 도서관 안에는 오직 학생들의 책장 넘기는 소리뿐인데, 대출받은 도서를 반납할 때 책속에 가만히 잡아넣은 왕매미가 ‘찍―’하고 우는 바람에 놀라 비명을 지르던 여직원. 그렇게도 싱겁던 친구들이 잣나무 숲길을 걸을 때마다 불현듯 생각이 난다.
그 잣나무 숲에도 이제 웅장한 건물들이 들어서 종합대의 면모를 새로이 하고 있음을 볼 때 또 다른 의미의 감격에 빠지곤 한다.
충북이 어떻게 하여 양반의 고을이 되었는지 잘 모르지만 타도에 가면 충청도 양반이 오셨다고들 한다. 상놈이란 소리를 듣기보다는 양반이라 하니 과히 듣기 싫지는 않다.
그러고 보면 충북대학교는 양반의 도에 있는 양반의 대학이라는 애칭이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기에 스승을 섬기는 정성이 다른 곳에 비하여 지극하다는 평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충청도 토박이 양반이신 조건상 교수님은 강의실에 들어오시면 1백여명의 꽉 들어찬 합동강의실이 물밑처럼 조용하여야만 인사를 주고받으신다. 하루는 선생님이 교탁 앞에 정자세를 하였는데도 뒷좌석에서 계속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참다 못하신 선생님은 ‘거 뉘집 자식이냐’고 호통이기보다는 탄식을 발하셨다. 우리는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 분은 어느 교수님보다도 말씀이 느리신 데다가 ‘뱀’을 ‘비이얌’이라고 읽어야 하고 당신의 이름을 ‘조건상’이 아니라 ‘조― 건상’이라고 불러야 맞다고 늘 주장하셨다. 넓은 바지통에 양복 품은 몸집에 비하여 크게 입으시고 중절모에 채권장사 가방보다도 더 큰 가죽가방을 무겁게 들고, 뚜벅뚜벅 걸으시는 선생님은 바쁘신 걸음걸이를 한 번도 보여주지 않으셨다. 학생들은 심술기도 반쯤 들어 선생님의 바쁘신 걸음걸이를 보고 싶어 가시는 걸음 앞에 소나기가 쏟아지기를 바랐지만, 애석하게도 끝내 졸업을 할 때까지 뛰시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엄격하시면서 인자하신 충북의 전형적인 아버지 상이라고 할까. 지금은 그 넓은 통바지가 보기 흉하다고 바지통을 줄이지는 않으셨는지 모르겠다.
또한 분으로는 늘 자상하고 친절하며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거라고 학생들이 입을 모으던 독일어를 가르치시던 ‘페스탈로찌’로 별명이 나 있던 이희재 선생님.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고 기분파이면서 젠들맨인 영국신사로 통하던 연규횡 선생님. 파랑새 담배꽁초에 불을 붙이고 허공에 뿜어대던 애연가이시자 흙내음 물씬나는 시골농부와도 같이 소탈하신 데다 가끔 뒷머리에 새집을 지으신 채 깊숙한 사색의 발걸음을 옮기시던 백승언 선생님. 즐겨 태우시던 파랑새 담배를 무슨 담배로 바꿔 태우시는지, 헤어스타일은 어떻게 바뀌어지셨는지……. 한국 표준형이라고 자칭하시던 정대성 선생님께 스승날 호박꽃을 달아드렸을 때 그렇게도 기뻐하시던 웃음. 그분은 늘 인정스럽고 학생들을 잘 감싸 주셔서 형님같이 느껴진다고 해서 맏형님으로 알려졌었다.
흐른 세월만큼 나의 모교는 어딘지 옛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것 같다. 저 큰 도서관 건물은 좌석수가 모자라 새벽같이 달려와 줄을 서야 하고, 밤 11시에 도서관 문을 닫아도 돌아갈 줄 모르는 도서관 귀신들(?) 때문에 도서관 직원들이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그렇지만 속으로는 귀찮아 얼마나 죽을 지경일까. 역시 양반 학교고 보니 모두가 선비가 될 수 밖에 없었겠지만―.
<월악산의 하기실습>
천연기념물인 망개나무가 자생하는 경치 좋고 물 맑고 사람의 손때가 아직 묻지 않은 산깊은 월악산(1093m)이 충북대의 연습림이다. 충주에서 동남간 32㎞떨어진 인적 드문 이 산골, 마의태자와 덕주공주 남매가 금강산으로 돌아가다 이곳에 머물러 절을 지어놓고 갔다 하여 덕주공주의 이름을 딴 덕주사에는 보물 406호인 마애불상이 있다. 민비가 대원군에게 쫓겨나 은신처로 자리를 잡아 궁궐을 지었던 송계리는 지금은 주춧돌만이 남아 있고, 보물 94호인 ‘월악사자빈신사지구층석탑(月岳獅子頻迅寺址九層石塔)’이 있다. 언제 쌓은 성인지 잘 알 수 없으나 허물어져 가고 있는 성이 비바람에 시달려 돌이끼만 피어 있다.
머루 다래덩굴이 덮인 골짜기, 산삼 썩은 물이 흘러내려오는 산골물에 사슴처럼 목을 축이던 하기실습 때 땀에 젖은 러닝샤스를 벗어 맑은 물에 헹궈 바위에 널어 놓고 산바람에 땀을 들이던 미스터 충북들, 화전민들이 빚어온 기름이 동동 뜨는 강냉이 술에 모두들 흥이 겨워 양은으로 만든 요강단지를 들고 덩실덩실 춤을 추던 어깨춤. 월악산 같으신 이만우 선생님은 그 때 유난히도 흥겹게 덩달아 어깨춤을 추셨다.
나는 또 대학에서 슬픔도 배웠다. 꽃다운 41세의 젊음으로 학위를 받고 3개월도 못다 사신 채 눈을 감으신 나의 지도선생님은 나에게 깊은 슬픔을 주고 떠나셨다. 아래 시는 필자가 故 이구영 박사님 영전에 바친 시의 일부이다.
뉘 스승의 운명(殞命)을 믿겠는가
삼월이 가면 우리 실험실에서 웃음을 나누며 배움을 찾자 하시더니
스승의 그 말씀은
우릴 달래려 함이셨구먼요
복사꽃 봉오리져 곱게 물드는 밤
사르르 봄비에 젖던 창안
촛불을 밝혀두시고는
말 한마디 남김 없이 체온이 식어간
사월 초아흐레
피곤한 봄의 꿈이 다녀간 밤
심장이 멎고 호흡이 그치고 육체가 굳었다하여
그게 운명이고 숙명이고
그것이 죽음이라고
그래 뉘 스승의 운명을 믿겠는가.
(이박사님은 속리산 정이품소나무가 죽어가는 것을 살린 분이다.)
<열띤 개신축제>
9월 27일은 충북대 개교기념일이다. 내가 입학을 하였을 때 개교기념일은 임시 공휴일로 되어 있었고, 학생들의 활동도 그리 없었다.
나는 2학년 때 문예반을 맡아 달라는 학예부장의 부탁을 받고 대학에서 처음으로 갖는 시화전을 시내 크로바다방에서 열었다. 또 음악과 여학생들도 함께 9월 27일 밤에는 ‘시와 음악의 밤’을 가졌다. 4학년 때는 몇몇 친우들과 창문학동인회의 발족을 보아 회장을 맡았다. 그 때 학우들과 가졌던 문학토론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이제 30회의 창문학동인회 시화전을 갖는다 하니 가슴이 뿌듯함을 느끼게 한다. 또한 시문학 정통파인 지도선생님을 모시고 있는 후배들이 부럽다. 웅장한 학생회관에서는 40여 개가 넘는 서클이 활동하는 숨소리가 들리고, 개신축제의 젊은 함성은 충북의 메아리로 울려 퍼져가고 있지 않은가.
충북대는 종합대로 승격되면서 비약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이 발전에 잊을 수 없는 일화가 하나 있다. 정범모 박사가 총장으로 오면서 하신 일 중의 하나가 장학금 모금이었다.
그리하여 2억원의 장학금이 모였는데 이 금액 속에는 한 할머니가 기탁한 1억 2천여 만원이 포함되어 있다. 이 분이 김유례 할머니인데, 빈대떡 장사로 60 평생을 번 돈 전부를 충북대에 장학금으로 희사한 것이다. 그 크고도 깊은 마음을 무어라고 쓰는 것 자체가 욕되게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구름을 얻은 용처럼 웅비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충북대 학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할머니의 마음이 우리 충북대 동문들의 가슴깊이 어려있는 한 충북대의 발전은 더욱 기대될 것이다.
강의실에서 실험실에서 밤 9시까지 야간수업을 하고 돌아가는 개신동의 잣나무 숲속은 새 서당골로 이름을 바꿔야 할까 보다. 송화가루가 가득히 날리는 서당골 넓은 잔디밭에는 청송같이 푸르고 잣알같이 여물어가는 알찬 젊은이들 …….
충대의 꿈을 키워주는 시계탑을 바라볼 때 가슴속 깊이 울리는 초침소리를 들으며 잊었던 그 시절을 더듬어 오늘도 젊음으로 살아간다.
< 주간조선(1982년 9월호?) . 충북대학교를 소개한 글로 발표 작품입니다.>
첫댓글 오랜동안 아무도 글을 올리지 않아, 20여년전에 발표한 학교를 소개하였던 글을 오렸습니다 .
빈대떡장사로 번 돈 1억 2천여만원을 장학금으로 기부하신 할머니의 사연이 가슴을 찡하게 합니다. 마음의 그릇이 얼마나 크시면...
아름다운 추억 속에 슬픈 추억도 곱게 승화시키셨네요, 젊음을 바라보시며 젊은 마음으로 건강하세요, 저는 이 치료 받느라고 지옥을 들락거립니다.
교수님 좋은 추억 되돌아 보시며 젊은 마음으로 사시고 늘 건강하시기를 기원 합니다.
80 년대 젊음을 만끽하던 그당시 캠퍼스의 싱그러움이 상상 되군요 ^^* 가슴 뭉클한 사연도 감동이었어요.
교수님의 충북대 사랑에 질투심이 일어 나네요. 마음과 몸과 혼을 다해 사랑하셨으니 보기에 너무 좋습니다. 저도 교수님처럼은 못되지만, 제 전공에서 이루어낸 일들과 함께해 온 제자들을 사랑하고 아끼며 살아가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