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보를 기억하는가.
지금은 가방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지만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는 누구나 책보에 책을 싸갖고 다녔다.
허리에 차거나 어깨에 둘러메고 다녔다.
여자애들은 이걸 손으로 받쳐 들고 다니기도 했다.
등허리에 매단 책보속의 함석필통이 요란하게 소리를 냈고, 새로 깍은 연필심이 얼먹어 부러 지러지기 일쑤였다.
책보는 책만 싸갖고 다닌 게 아니다.
도시락도 함께 싸들고 다녔다.
일본말인 변또로 통했던 도시락은 자칫 하면 김칫국물이 흘러 책에 지도를 그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김칫국물 냄새가 진동해도 누구하나 시비 거는 사람이 없었다.
반찬으로 싸온 고추장이 흘러 피범벅이 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래도 학교에서 먹는 도시락 맛은 집에서 먹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지금과 같은 겨울철엔 데걱 데걱 언 밥에 김치 한 조각을 반찬으로 먹었지만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운 좋게 난로를 피우는 날은 아침에 등교하는 순서대로 조개탄 난로 위에 도시락을 올려놓았다.
소사였던 영해아버지가 인상을 써가며 조개탄 한 바께스를 배급했지만 칼바람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개탄은 무연탄의 일종인데 잘 개어서 말려 놓은 모양이 조개처럼 생겨 그렇게 불렀다.
조개탄 난로는 빨갛게 불타며 추위를 녹여줬고 가끔은 고구마며 가래떡을 구어 먹기도 했다.
찌그러진 도시락은 노란색을 띠는 싸구려 알루미늄으로 만든 게 대다수였다.
국배판 책 크기만 한 도시락은 귀족용이었고, 내가 들고 다닌 것은 크기가 벼루만한 작은 것이었다.
반찬 그릇은 유리병을 쓰기도 했지만 그냥 도시락 안에 들어있는 것을 쓰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알루미늄이 부식돼 밥이 시커멓게 변색돼 있었지만 당연히 그런 걸로 알고 아무렇지도 않게 꾸역꾸역 밥을 먹었다.
겨울철이었지만 보리밥을 먹는 애들도 있었고, 그나마 못 싸오는 애들도 있었다.
반찬은 김치 혹은 깍두기 또는 생채가 대다수였다.
깻잎, 단무지, 무말랭이 볶음도 흔했다.
멸치 볶음과 고추장볶음을 들고 다닐 정도면 부로지아였다.
점심시간이 되면 잘 데워져서 밑에 있던 도시락은 누룽지까지 생겨버려 맛을 더해줬다.
하긴 점심시간 이전에 먹어 치우는 애들도 종종 있었다.
그때의 도시락은 밥맛이 아니라 더불어 생활 하는 공동체의 맛이었다.
도시락에 녹아 있는 문화의 맛이요, 친구들과 일체감을 느낄 수 있는 우정의 맛이요, 새벽 일찍 자식을 위해 곱게 싸주시는 어머니의 자애로운 사랑의 맛이다.
그러나 이젠 세월이 흘러 지금은 도시락에 관한 추억도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이제는 거의 급식 이라는 형태로 점심을 먹기에 이러한 도시락에 관한 애절한 정서는 사라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궁핍한 시절에 어머니가 정성으로 싸주시던 도시락 생각을 하다보니 이런 저런 추억이 아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