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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월에 개봉된 영화 <수학여행>은 우리의 나이 든 세대의 추억을 강력하게 소환한다. 불과 55년 전 우리의 서해(西海) 낙도와 서울의 풍물과 인정이 영화에 가득 넘치기 때문이다. 영화를 연출한 유현목 감독은 1955년 <교차로>로 영화감독으로 존재를 알린다. 유현목을 영화로 인도한 사람은 대구 출신 감독 이규환(1904-1982)이었다.
이규환은 <임자 없는 나룻배>(1932)를 연출하여 이름을 날렸고, 식민지 조선의 문화-예술계가 암흑기에 접어들었던 태평양전쟁 시절엔 일제에 협력하는 대신 영화를 아예 접고 만주(滿洲)에서 막노동한 것으로 유명하다. 해방 이후 귀국한 이규환은 대표적인 고전의 영화화 <춘향전>(1955)부터 마지막 영화 <남사당>(1976)에 이르기까지 26편의 영화를 연출한다.
이규환의 조연출로 영화계에 발을 담근 이가 유현목(1925-2009)이다. 영화 인생 40년 동안 유현목은 모두 50편을 연출하여 당대 감독들과 비교할 때 비교적 과작(寡作)의 연출가로 알려져 있다. 유현목이 연출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 계기는 1961년 <오발탄>이 계기였다.
<오발탄>은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나 1946년 월남한 이범선의 단편소설 <오발탄>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유현목 자신도 황해도에서 월남한 연출가였기에 영화는 더할 나위 없는 사실성을 바탕으로 한다. 원작만큼 영화가 설득력을 얻었는지는 미지수나, 5.16 군부가 영화 상영을 금지한 것으로 미뤄보면 시대 상황에 대한 각별한 천착은 주목할 만하다.
유현목은 그 후로도 다양한 문학작품을 영화로 만들었는데, 박경리의 <김 약국의 딸들> (1963), 손창섭의 <잉여 인간> (1964), 황순원의 <카인의 후예> (1968), 유치진의 희곡 <나도 인간이 되련다> (1969), 방영웅의 <분례기> (1971), 선우휘의 <불꽃> (1975), 윤흥길의 <장마> (1979),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1980) 등을 본보기로 거명할 수 있다.
<수학여행>의 시간과 공간
영화의 시간은 1968년 봄에서 여름을 지나고, 수학여행이 실제로 진행되는 10월 초하루부터 4일까지의 기간이다. 10월 1일 배편으로 수학여행을 시작하는 37명의 학생이 경험하는 서울의 풍광과 다채로운 경험이 영화의 뼈대를 이루는 사건이다. 영화 앞부분의 시간과 사건은 나흘 동안 이어지는 수학여행을 위한 전초기지(前哨基地)로 작동하는 셈이다.
영화의 공간은 전교생이 37명에 지나지 않는 선유도(仙遊島) 국민학교다. 영화 해설자가 알려주는 것처럼 육지에서 150리 60킬로미터 떨어진 섬이 선유도다. 선유도는 고군산군도에 속하는 야미도, 신시도, 무녀도, 장자도, 방축도 등 16곳의 유인도 가운데 하나다. 2018년 초에 신시도와 선유도를 잇는 연륙교(連陸橋)가 완성되어 요새는 자동차로도 찾아갈 수 있다.
하지만 2018년에서 50년 전인 1968년 선유도와 육지를 잇는 유일한 교통편은 1주일에 한 번 들르는 배편이 유일했다. 그래서 섬 아이들은 배가 들고 날 즈음이면 해변으로 달려 나가서 뭍으로 나가고 싶은 간절한 바람을 노래하곤 했다. 아이들은 자동차나 기차는 물론 자전거나 달구지조차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낙후한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자라난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37명 전교생은 하나의 교실에서 수업받는다. 동생을 업고 수업에 들어온 아이도 있고, 여기저기 장난치고 싸움박질에 말다툼하는 아이들도 있다. 이런 정황을 3년 동안 경험하고 있는 김 선생은 선유도의 순박한 아이들에게 육지의 발전된 문물을 몸소 보고 듣게 함으로써 삶의 새로운 전기(轉機)를 마련해주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힌다.
아아, 옛날이여!
‘군맹무상(群盲撫象)’은 불가(佛家)의 <열반경(涅槃經)>에 나오는 고사성어(故事成語)다. 인도의 경면왕(鏡面王)이 맹인(盲人)들에게 ‘코끼리’가 어떤 동물인지 가르쳐 주려고 그들을 궁중으로 불러 모은다. 그리고 신하를 시켜 코끼리를 끌어오게 한 다음 소경들에게 만져 보라고 한다. 얼마 후 경면왕은 소경들에게 묻는다. “이제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겠느냐?” 소경들은 입을 모아 대답한다. “알았나이다.” 결과는 독자 제현이 이미 아실 터다.
김 선생은 선유도 아이들을 서울로 수학여행 보내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운다. 그것은 6학년 수남의 남다른 의지에서 출발한다. 수남은 서울 간 수자 누나가 소식이 없자 서울행을 결심하는 당찬 소년이다. 수남은 해가 서녘으로 넘어가는 땅거미에도 바닷가에서 굴을 따서 서울 가는 차비를 마련하려고 한다. 김 선생은 그런 아이들을 진정으로 가르치는 남다른 교사다.
다른 교사들 같으면 의무적으로 복무하는 1년이 끝나기 무섭게 선유도를 떠나는데, 그는 서울에 아내와 아이를 두고 있으면서도 선유도 학교와 아이들에게 몰두한다. <수학여행>에서 감독이 보여주려는 대목은 같은 시공간을 살아가는 아이들이 겪어야 하는 차이와 그런 차이가 잉태하는 차별의 결과로 보인다. 지금은 사라진 ‘낙도(落島)’란 어휘가 새삼 아프게 다가온다.
배편으로 뭍으로 나가려 해도 상당한 비용이 드는데, 하물며 3박 4일의 서울 수학여행에 동의하는 학부모가 하나라도 있을 것인가?! 김 선생은 이내 실의(失意)에 빠진다. 단 한 사람의 학부모도 선뜻 동의하고 나서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비용도 비용이려니와 아이들이 담당한 노동력 손실도 적잖은 까닭에 주민들은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 것이다.
실의에 잠겨 낮술을 들이붓는 그에게 구원의 손길이 다가온다. 목소리 큰 마을 영감이 사람들에게 호통을 치면서 어린애들을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김 선생의 뜻을 받들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수학여행을 위한 집단노력에 참가한다. 토끼와 닭, 돼지를 길러서 비용을 마련하고, 조개를 잡아서 돈을 만드는 눈물겨운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노력으로는 비용 전부를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고전 그리스 비극에 나오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기계 타고 오는 신)’의 등장이 필연적이다. 김 선생의 갸륵한 노력과 아이들의 정성에 감동한 교육장이 해결사로 등장한다. 여기서 사건 하나가 추가되는데, 그것은 선유도와 군산을 잇는 연락선의 뜻하지 않는 고장이다. (하지만 독자도 아시다시피 이런 영화는 행복한 결말로 끝나야 하기에 평안한 마음으로 영화를 보셔도 좋겠다.)
선유도 아이들의 서울
선유도 마을 전체에서 육지를 밟아본 사람은 절반 정도라고 전한다. 그러니까 반 남짓 되는 주민들이 육지에 대한 아무런 표상도 없이 태어나 불귀(不歸)의 객이 되는 세상이 1968년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문제는 돈이었다. 시집가고 장가들다 보면 누구나 한 번은 육지에 갈 것이라 말하는 그들의 표정은 그다지 어둡지 않다. 하지만 나날이 커가는 아이들은 다르다.
아이들 마음에 알알이 들여와 박힌 육지를 향한 더욱이 서울을 그리는 마음을 어른들은 막을 수 없다. 여행을 앞두고 병을 얻은 아이마저 함께 가겠다고, 전혀 아프지 않다고 길길이 뛰는 모습에서 예전의 추억을 떠올리는 관객도 적잖을 듯하다. 군산에서 아이들을 태운 열차가 서울로 달릴 때 들에 있던 사람들이 다정하게 손을 흔든다. 지금은 완벽하게 사라진 풍경이다.
사라진 풍경과 인정과 사람은 그리움을 낳기 마련이다. 지나간 모든 것은, 그것이 악연이든 처절한 기억이든, 화사한 추억이든 우리 내면에 켜켜이 쌓여있다가 홀연히 과거의 시공간과 인간들을 불러낸다. 거기에는 어떤 악의나 놀라운 술수도 없다. 그저 그립고 보고 싶은 마음뿐이다. 길이 길에 연하여 끝없는 것처럼, 인생 행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서울에 도착한 아이들이 겪는 문화적 충격은 실로 대단하다. 거리에 차고 넘쳐나는 사람들, 자동차 행렬과 전차의 자태가 아이들의 정신을 놓게 한다. 고층 건물들을 올려다보는 아이들의 목울대가 손에 잡힐 듯하다. 중세 고딕 성당을 올려다보는 관광객의 젖혀진 목과 아스라한 높이가 시나브로 겹친다. 거리에서 광장에서 아이들은 놀라고 흥분하며 동요한다.
그들이 감동한 대상 가운데 하나가 전차다. 서울 전차는 1899년 5월 20일부터 운행을 시작했는데, 경교 (적십자병원 돈의문) - 종로 – 동대문 (흥인지문) - 보제원 (제기동) - 청량리 (홍릉) 구간 약 8km로 구성돼 있었다. 모든 구간은 단선으로 운행됐고, 1968년 11월 30일 전차 운행은 종료된다. 그러니까 선유도 아이들은 서울 전차의 거의 마지막 승객이 된 셈이다.
앞과 뒤가 구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차는 아이들의 비상한 호기심을 자아낸다. 마찬가지로 ‘남대문’에 문턱이 있느냐 없느냐를 둘러싼 치열한 논쟁도 객석의 웃음과 동정을 불러온다. 저런 세월을 살았구나, 하는 측은지심이 절로 들기 때문이다. 만화(漫畫)가게 풍경은 또 어떤가?! 단돈 2원으로 텔레비전을 보려고 주머니를 여는 아이들의 얼굴이 화면 가득하다.
전기(電氣)를 모르던 아이들이 돌아가면서 백열전구를 껐다가 켰다가 하기를 되풀이하는 장면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텔레비전에 나온 김 선생의 명령에 따라 아이들이 한밤중에 창경원(昌慶苑)으로 달려 나가는 장면도 아프게 다가온다. “얘들아, 모여라!” 하는 구령 소리에 여관에 있던 아이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 나가는 풍경은 눈물겨운 것이다.
선유도 아이들과 종로 아이들
김 선생의 사범학교 동창 윤 선생은 서울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그는 종로 국민학교(國民學校) 교사로 김 선생의 처지를 동정한다. 누구나 꺼리는 낙도 근무를 자처한 친구가 겪는 어려움에 마음이 쓰이기 때문이다. 그런 윤 선생에게 김 선생은 교직의 만족과 사명감을 힘주어 설파한다. 윤 선생의 배려로 선유도 아이들은 서울 아이들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영화를 보면서 뭔가 아쉽고 석연치 않은 대목은 여기서부터다. 서울 어린이들과 학부모들이 보여주는 지극한 인도주의적인 태도가 무척이나 미심쩍은 게다. 김 선생이 윤 선생과 협의하러 학교에 들어간 사이 쏟아지는 비를 피해 있던 선유도 아이들을 서울 아이들이 우산을 씌워 학교로 하나둘씩 데리고 들어오는 장면은 뭔가 만화영화 느낌이 물씬 풍긴다.
더욱이 서울 어린이들이 자치적으로 결정한 선유도 어린이 하룻밤 숙박 계획에 어느 학부모 하나 거부 의사를 보이지 않는 것도 희한한 노릇이다. 너무도 각박했던 시절에 저토록 훈훈하고 정겨운 사해동포주의를 아낌없이 실현한 사람들이 정말로 존재했단 말인가?! 영화는 거기서 더 멀리 간다. 계획에 없던 두 학교의 자매결연식이 성대(盛大)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수학여행>에서 계속 입길에 오르는 대상이 손수레인데, 자매결연 식장에서 문제의 손수레가 선유도 학생들에게 선물로 주어진다. 12월의 산타클로스를 대신하는 서울 어린이들과 학부모들과 교사들의 선행과 아량에 관객들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이쯤에서 살피면, 영화의 주인공인 선유도 어린이들이 일방적인 수혜자로 그려지는 것이 적잖게 석연치 않다.
그런 측면을 상쇄하는 기제로 나오는 게 서울 어린이들의 선유도 방문계획이다. 선유도 아이들을 재워준 서울 어린이들이 이번에는 선유도 어린이들의 집을 찾아오겠다는 것이다. 무엇이 아쉬워서 서울 어린이들이 열차와 배편으로 고군산군도의 선유도를 찾아 장시간 여행을 감행할 것인지 궁금하다. 아이들이 말하는 아름다운 낙조(落照)인가 혹은 넘쳐나는 소라고둥인가?!
1968년 서울과 한국
<수학여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치적인 색채를 배제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관객은 간접적으로나마 엄혹했던 그 시절을 대면한다. 1968년 1월 21일 이른바 ‘1.21 북한 무장공비 남파사건’ 혹은 ‘김신조 사건’으로 알려진 북한의 청와대 습격 사건이 그것이다. 박정희를 겨냥한 북한의 특별 공격조의 무장 행동이 한국인들의 간담(肝膽)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사건.
박정희는 이에 질세라 684부대, 일명 ‘실미도 부대’를 창설하여 평양의 주석궁으로 대원들을 보내 김일성의 목을 따오겠다고 공언한다. 이것을 바탕으로 2003년에 만들어진 영화가 천만 관객을 동원한 <실미도>다. 그리고 맞이한 한국군 창설 20주년 기념일이 1968년 10월 1일, 즉 수학여행 첫 번째 날이다. 아이들은 알지 못하는 긴장감이 넘쳐났던 시절 아닌가!
‘1968년 12월 5일 대통령 박정희’로 끝나는 <국민교육헌장> 제정작업이 한창 진행되던 무렵에 선유도 아이들의 수학여행이 시작된 셈이다. 그런 분위기를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첫날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려고 버스를 타던 학생의 신발 한 짝이 벗겨져 버스 밖으로 떨어지고, 그것은 승객의 발에 차인 끝에 버스 밑으로 들어가 버린다.
김 선생은 서둘러 신발을 찾아내지만, 버스는 이미 떠난 다음이다. 달리고 달려보지만, 그는 버스를 따라잡지 못하고 오히려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경찰에 붙들려 오가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아이의 신발을 들고 거리를 달리는 교사를 붙잡아 즉결에 넘기려는 경찰의 자세는 당대의 경직된 법 집행 절차를 보여준다. 어떤 예외도 없는 폭력적-억압적 사회질서의 단면이다.
1968년 한국과 세계
1968년 유럽은 프랑스와 도이칠란트에서 촉발된 68혁명이 유럽 전역을 휩쓸고, 그 열기(熱氣)가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파급된 시기다. 히피와 청바지, 통기타로 무장한 젊은이들이 베트남전쟁 반대, 모택동의 문화혁명 찬성 등을 구호로 외치고 ‘상상력에 자유를!’,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표어를 내걸었던 혁명의 도도(滔滔)한 물결.
그 이듬해 68혁명의 파고(波高)는 태평양을 건너 일본에 파급되었고, 급기야 ‘전공투’와 ‘적군파(赤軍派)’까지 잉태한다. 하지만 좁디좁은 대한해협은 68혁명의 물길을 굳건하게 막아낸다. 그리고 세계는 1969년 7월 20일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을 목격한다. 이런 세계사적인 흐름과 정반대의 길을 질주한 대한민국과 박정희 군사독재에 <수학여행>은 침묵한다.
1969년이 오기 전인 12월 5일 이후에 선유도 어린이들도 서울 어린이들도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느라 고생깨나 했을 터다. <헌장>을 외우지 못하면 집으로 가지 못하도록 교사와 학생들을 강제했던 전체주의적-폭력적인 정권의 억압은 끝을 모르고 질주한다. 하지만 사회 비판 정신으로 무장한 유현목 감독은 영화에 사회성 부설(敷設)을 극도로 절제한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김 선생의 아내가 보여주는 전근대적인 ‘여필종부(女必從夫)’의 희생적인 자세다. 1년만 기다려달라는 말을 남기고 선유도로 떠난 남편이 3년 넘도록 돌아오지 않아도 그녀는 인내한다. 윤 선생 배려로 서울로 전근할 기회가 생겼는데도 김 선생은 거절한다. 오히려 그는 아내에게 선유도에 함께 갈 것을 제안한다.
그렇다면 그녀의 선택은 무엇일까! 서울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선유도에 갈 것인가?! 아이 교육을 위해서라도 서울을 고집한 그녀의 의지는 실현될 것인가, 아니면 남편의 숭고하고 거룩한 교육자의 양심적인 대의(大義)에 동행할 것인가?! 이런 문제점을 안으로 끌어안은 채 유현목의 순진한 영화 <수학여행>은 1969년 1월 개봉되어 관객과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