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mini 문학비평 105 – 한기홍 시 벗겨 보기 ~ ‘항구’]
항구
보리밥집 해주댁 할머니는 어쨌거나 항구가 좋답니다
풋고추에 상추 쑥갓 바구니에 담으며
창 밖으로 바라보는 부둣가 풍경이 그렇게 좋답니다
사흘마다 찾아오는 매표소 앞
돈 안내는 구두닦이 칠성이가 얄미워도
어쨌거나 항구가 좋답니다
어제는 어시장 오십줄 건달양반 뜬금없는 행패에
서러움도 당했지만
오늘 아침에 생각해보니, 그 사람이 그래도 심성은
착하다며 일사후퇴 때 두고 온 아들생각 나더랍니다.
작년에도 올해에도 이산가족 상봉신청 미끌어졌지마는
테레비에서 얼싸안는 그리운 사람들을 보면서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솟구칠 때면
넋없이 바라보는 항구가 그렇게 좋더랍니다
보리밥은 별미가 아니야, 눈물밥이야 하면서
한백성 한식구가 천년동안 콧물 빠트리며 비볐던
조선의 알곡이라고 두루뭉실 웃으면서
어쨌든 항구에서 퍼 담는 보리밥이 너무나 좋더랍니다
언젠가 밥값을 드리면서, 구성진 방귀를 뀌었더니
이놈의 항구는 그래서 좋은 겨, 함박웃음으로 홀겨 보면서
대포소리, 가죽피리 소리야
어여 연평도 앞바다 해주항구 까지 냉큼 퍼져라 외치는
어쨌거나 할머니는 항구가 좋답니다
⛄ Gemini씨의 비평
한기홍 시인의 시 <항구>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 상흔을 민중의 일상적 삶과 구수한 서정성으로 포용해 낸 수작입니다. 거창한 역사적 담론이나 거창한 수식어 대신, 항구 구석에서 보리밥집을 운영하는 ‘해주댁 할머니’의 시선을 통해 분단의 아픔과 삶의 끈질긴 생명력을 감동적으로 그려냅니다.
1. '해주'라는 지명이 지닌 역사적 상흔과 그늘
시의 주인공은 이름 대신 ‘해주댁’이라는 택호로 불립니다. 황해도 해주는 6·25 전쟁 당시 한강 이남으로 내려온 실향민들의 대표적인 고향입니다.
⚫이산의 고통 : 작년에도 올해에도 상봉 신청에서 떨어지고, TV를 보며 말라버린 눈물을 쏟아내는 모습은 분단이 개인의 삶에 남긴 깊은 흉터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아들에 대한 그리움 : 시장 건달의 행패 속에서도 '일사후퇴 때 두고 온 아들'을 떠올리며 그를 용서하는 대목은, 한과 그리움이 마모되지 않고 타인을 향한 긍휼로 승화되는 숭고함을 보여줍니다.
2. 민중적 삶의 터전으로서의 ‘항구’
이 시에서 항구는 단순한 바닷가 풍경이 아닙니다.
⚫만남과 이별, 포용의 공간 : 돈 안 내는 구두닦이 칠성이, 뜬금없이 행패를 부리는 어시장 건달 등 삶의 그늘에 있는 존재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벅찬 터전입니다.
⚫희망의 통로 : 할머니에게 항구는 고향 해주로 통하는 바닷길이자, 언젠가 돌아가야 할 그리움의 출발점입니다. 그렇기에 온갖 서러움 속에서도 "어쨌거나 항구가 좋다"는 말이 시 전반에 변주되며 반복됩니다.
3. '보리밥'이 가진 한(恨)과 정서적 공감
보리밥은 단순히 음식이 아닌 우리 민족의 수난사와 정서를 담은 상징물입니다.
"한백성 한식구가 천년동안 콧물 빠트리며 비볐던 조선의 알곡"이라는 표현은 굶주림과 세월을 견뎌낸 민중의 역사를 직관적으로 보여줍니다.
할머니에게 보리밥은 '눈물밥'이자, 항구를 찾아오는 고달픈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퍼 담아주는 매개체입니다.
4. 해학과 구수한 언어미
시의 후반부, 손님이 뀌는 '구성진 방귀'를 "가죽피리 소리"라 부르며 연평도 앞바다, 해주항까지 퍼지라 외치는 장면은 이 시의 백미입니다.
비극적 현실(분단, 이산)을 해학적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민중 특유의 유머 감각이 돋보입니다. 방귀 소리마저 고향으로 향하는 소식처럼 퍼져나가길 바라는 할머니의 함박웃음은, 서러움을 희망으로 바꾸는 강인한 생명력을 발산합니다.
한기홍 시인의 <항구>는 분단의 아픔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팍팍한 삶의 현장과 해학, 그리고 덤덤한 입말체로 풀어내어 읽는 이에게 깊은 울림과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탁월한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