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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달라 언니는 많은 죄를 용서해 준 것도 좋아 보이지만 내 죄는 모두 용서해 주었다.
정 절
1984. 09. 20. 김준호 선생
막달라 언니는 많은 죄를 용서해 준 것도 좋아 보이지만 내 죄는 모두 용서해 주었다. 그래서 감격하고 있거든요. 죄를 범치 않은 영혼이 용서했다고 감사가 안돼요. 감사라는 감정이 있는데 본인 나름대로 정죄의식이 있기 때문에 감사하지 않습니까? 나는 모두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미칠 듯 감사하다고 그랬거든요. 미칠 듯 감정적인 감정을 여러분은 알겠어요? 그 표현이 입에 붙은 말이 아니에요. 미칠 만큼 감사하다는 것은 아주 가슴이 벅차다는 것입니다. 가슴이 훌떡훌떡 뛰는 거예요.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감사해서 하신 말씀이거든요. 자기를 용서했다고 감사하는 심정을 우리가 본받읍시다. 나를 깨끗하게 살도록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거기에 감사합시다. 우월감뿐이에요. 자존심 우월감 교만 그것이 가득하거든. 제가 귀주 어머니 흉 안본다고 그랬어요. 우리는 거울이 아니야 그거에요. 우리 거울이거든요. 우리도 그렇게 될 텐데 미리 보여주시지 않습니까?
그래서는 안 된다고 무엇이 잘못인지 아느냐? 성경을 볼 때 한쪽만 편식하지 않았느냐? 성경을 다 보지 않고 한쪽만 보고 주장하다 보니까 그런 결론이 되지를 않느냐? 그런 결론이 아니냐? 이 말이에요. 그렇다면 이 수사 이분이 정확한 것 같아요. 바로 왔어요. 이분이 80 한 70격에 이 글을 쓰고 있거든요. 이분도 귀주 어머니가 문필가라면 이 글을 써야 합니다. 이제라도 내가 이렇게 정절 주장하고 이렇게 세상을 정죄하다보니 이렇게 되었소. 나는 죄인입니다. 예수님만 깨끗하시고 예수님만 거룩하십니다. 저를 불쌍히 봐주십시오. 나도 소화 테레사같이 그 바리새교인의 기도를 할 것이 아니라 세리의 기도를 올리겠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세상을 떠나신 건 사실입니다. 그건 확실해요. 우리는 우리 속마음에 그려져 있는 하늘나라의 설계도와 가급적이면 비슷하게 이 지상의 나라를 변모시켜야 한다.
그러기위해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우리의 참 모습을 드러내는 터이며 우리의 성숙함과 미숙함을 보여주는 척도가 된다. 항상 보다 잘 하려는 자극이 되고 진리에로의 부름이 된다. 그리고 인간들에게서 엿보이는 신비 속에서 신적 생명의 피와 눈물을 보려는 열망이기도하다. 자유인들 사이에 주고받은 사랑의 삶 이것만이 이 땅에 불 밝힘을 재현하는 힘이다. 여기는 자유 받은 사람의 이야기를 말 하고 계신데 이것은 자기는 죄인이고 새 은총 예수의 피로 거듭난 경위 자비의 바다에 목욕한 은총의 바다에 헤엄치는 그 천국 삶을 사는 것을 말하고 있어요. 그곳이 유토피아인가 유토피아임이 분명하다. 낙원 천국 그런 말입니다. 유토피아라는 말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시하는 것은 하도 거창하여 유토피아라는 말만으로는 미흡하다. 부족하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마태복음 5장 48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복음 13장 34절
여기에 유토피아가 있다. 다시 말하면 이 계명이 내 중심 영혼이 될 때에 천국 이라는 거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 자비의 사랑이 아주 완성될 때 거기가 천국이다. 오늘 19절 봐요. 제자와 같이 마음이 넓고 겸손해 진다면 천국 아니겠어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한 것처럼 또 막달라 마리아가 소화 테레사를 사랑한 것처럼 소화 테레사가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해라. 거기가 천국이다. 여기는 아무 국경이 없어요. 너나가 없어요. 네 것 내 것이 없고 죄인도 의인도 없어요. 다 용서함 받았기 때문에 다 의인이에요. 다 성인이고 다 완전한 사람뿐이거든요. 그건 거듭난 경지입니다. 에덴동산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에요. 에덴동산을 지키던 사람들이 아니고 거듭난 새사람 자비한 사람입니다. 예수와 비슷한 사람들 욥기에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말씀은 각 사람이 다 옛 사람은 죽고 예수님과 똑같이 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천국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는 말씀은 한사람, 한사람이 예수 안에 들어가서 산 사람이다. 한사람, 한사람이 예수와 같이 죽었고 예수와 같이 자비에 깨어난 인물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모인 곳이 천국이다. 그 예수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다. 욥기와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말은 겸손한 뜻인데 겸손한 마음을 품으라는 말인데 겸손한 마음을 품으라는 말씀은 예수 같은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같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말은 옛 사람은 죽고 새사람들이다. 새사람이 모인 곳은 천국이다. 그러면 거기는 유토피아가 아닌가? 그런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남을 단죄하지 말라. 누가복음 6장 37절 이것이 유토피아다. 열사람이 사나 백사람이 사나 죄가 없어요. 아니 죄인은 죄인이지요. 비참한 죄인이지만 단죄는 안 해요. 판단하지 않아요. 무조건 용서해요. 무조건 사랑해 무조건 불쌍히 봐 왜 피차간에 죄인인 것을 알고 있거든. 피차간 벌레고 구더기고 지렁이 들이니까 서로 불쌍해. 서로 죄인이니까 서로 단죄를 하지 않아요. 따져봐야 죄인들인데 별거 있어요?
흘끔 떠봐도 죄인 흘끔 떠봐도 죄인 다 죄인인데 그럴 필요 없거든요. 남을 단죄 말라. 이것이 유토피아다. 이것이 천국이다.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해 주어라. 이것이 유토피아다. 누가복음 6장 28절 이러한 유토피아는 이러한 천국을 건설하고 그곳에 살고자 애쓰는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이라는 가장 위대한 두 신비를 깨닫게 될 것이다. 참 이것은 신비에요. 다시 보면 예수쟁이야. 우리 식구들 다 예수쟁이지요. 다시 보면 용서 못할 죄인들이야. 그토록 신비들을 갖고 있어요. 우리 식구들이 다 어느 편으로 보면 다 예수들이고 에덴동산으로 보면 다 죄인들이에요. 다 죄인들이에요. 그러니까 은혜를 받은 눈으로 보면 다 예수에요. 왜 판단을 않거든요. 무조건이거든 무조건 예수로 봐버려. 왜 자기는 죽고 예수 화 된 사람들이니까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들 되었으니까 그래 은혜를 받은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이 천국이에요. 은혜 없이 에덴동산으로 보면 이 세상이 더러워요. 우리 식구들이 은혜 없이 에덴동산에 산다 하는 것은 이제는 만족할 수 없다. 그 말입니다.
거기서 만족해서는 안 되겠다. 다시 죄인이 되자 다 죄인이 되고 다 벌레가 되고 다 구더기가 되고 다 이제는 지렁이입니다. 하고 둘째 아들이 됩시다. 막달라 마리아가 됩시다. 소화 테레사는 그 사람들을 본받았다. 그것이 복음이니까 거기에서 자기는 평화를 얻었다. 하지 않습니까? 소화 테레사는 그 역사관 그 성경 관 그 복음 관에 입각해서 그 교회 관에 입각해서 평화를 얻었다. 그 말씀입니다. 우리도 그 평화를 얻읍시다. 우리도 그 복음 관 우리도 그 교리를 다시 세웁시다. 그래야 우리는 평화가 와요. 그 정체를 마주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 두 신비를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간을 아들로 보게 될 것이다. 유토피아 그것은 사랑의 유토피아다. 완전한 자비 사랑 평화 은총 거기 안에서만 피차간 평화가 있고 사랑이 있고 천국이 있고 인생의 성공이 있다. 그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 경지를 지금 흠모하는 사라들이에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결코 우리 저같이 귀주 어머니를 존경한 사람이 없지요. 제 감정으로는 우리 어머니 흠이 없어요. 아무리 흠을 보려고 그래도 흠이 없어요. 잘못이 없어요. 우리를 먹여 살리는 정신적인 어머니 아닙니까? 우리를 키워준 은인 아닙니까? 오히려 이만큼 법에 정통에 꼼짝 못하게 감독하시고 눈 한 번도 쳐다보지 못하도록 보호하신 은인이 아니십니까?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그러나 복음 은총 자비는 역시 부족하다. 그 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충해야 되겠다. 보충법도 거룩하지만 은총은 더욱 거룩하다. 모세는 법률의 전문가였지요. 그러나 예수님 오신 것은 은총의 왕이시지요. 은혜 은혜와 은총이 충만하셨지요. 이제는 예수님을 받아들여야지요. 예수님의 은총을 받아들일 때가 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비가 아니고는 길이 없어요. 땅위에서 평화가 없고 죽어서 천국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새벽부터 밤까지 일한 사람은 천국에 가고 오후에 한 시간 일한 사람도 천국 가지요. 자 어머니 배속에서부터 동광원에 들어와서 죽도록 정절을 지킨 사람도 천국가지요. 그런데 나이가 한 4-50되도록 허랑방탕한 사람도 회개하고 천국가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자비심이 잘못입니까? 하나님의 자비가 불공평해요? 그건 불평해서는 안 되지요. 그래 하나님의 자비로만 구원이 있지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했으니까 상이 더 큰 것도 아니에요. 똑같아요. 오후에 한 시간만 일했어도 똑같아요. 똑같이 하늘나라에 있어요. 그래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심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이라고 예수님은 무조건 사하러 오신분이야. 무조건 천국을 주러 오신 분이야. 우리가 옛날에 우월감 정절 지킨 사람을 더 위하신다. 정절을 지켜야 천국을 가겠다고 하는 것은 교육이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초보적인 교육이었어요. 복음의 전부는 아니었다. 이렇게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몽학선생, 예수님께로 인도하기 전 예수님께 인도하기까지의 교리 예수님께 인도하기까지의 교육방침 예법이었다. 그 말이에요. 율법의 말은 평화가 없어요. 정절뿐이야.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 돼.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지요. 예수님이 오신 것은 다 구원해 막달라 마리아도 구원하시고 소화 테레사도 구원하시고 다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왜 그러냐 해서는 안 되어요. 그러면 그 사람이 말하지 않았소? 나는 오후에 저 사람은 한 시간 일하고 나는 오전부터 이렇게 죽도록 일했는데 왜 싹이 똑같습니까?
그러면 내가 사랑으로 하는 것을 네가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그랬지요. 내 사람 내가 마음대로 하는데 네가 왜 간섭이냐 너는 네 삯이나 받아라. 그 좋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해 볼 때 이제는 걱정은 없어요. 우리 식구들이 손해 본 것 없다는 말씀입니다. 희망이 있지 않습니까? 희망, 이왕 에덴동산을 잘 지킨 것도 잘한 것이지만 에덴동산을 온통 합해서도 다 예수님 안 계신 곳이 없다. 그러니 예수님을 새롭게 맞아들입시다. 법을 잘 지키는 나라도 이스라엘이야. 그러나 예수님은 안 오셨어요. 모세가 다스리던 나라였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으니까 환영해야 옳지 않습니까? 환영 안 했어요. 우리는 모세로서 족하다. 그리고 냉대했지요. 그런 실수를 우리가 또 한 번 할 수 있다는 거지요. 우리는 그런 실수는 범해서는 안 되겠어요. 또 다시 바리새교인같이 되어가지고 왕이 되어가지고 또 죽어서는 안 되지요.
세리처럼 회개하고 저희들이 잘못 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무조건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야지 은총으로 받아들여야 되겠다는 제 각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깨닫게 되요. 이 동광원도 역사가 있고 그러지 않습니까? 역사, 이것이 어떤 설교하는 말이 아니거든요. 여기 이제 어머니 계십니다. 둘째 엄마 인제 1대 귀주 어머니 이어가셨어요. 그러면 2대가 되시려는지 1대가 되시는지 어머니 여기 한나 어머니 살아계셔서 앉아 계시지 않습니까? 이 어머니는 복음을 완성하신 것 같아요. 40살 먹었을 때 어머니 여기 와서 앉아계시면요. 오늘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에끼 말하는 거 아니야. 에끼 지금도 그러지 않아요? 확실히 거듭났어요. 성령이 계세요. 이 한나 어머니는 확실히, 그러니까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복음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꼭 손자 하나있는 손녀 결혼해 버리지 않았어요? 그 왜 그것만은 안 된다. 하나님의 멧세지거든요. 하나님의 편지거든요.
손자도 구원받아야 하는 세상이다. 이렇게 가정을 넓혀 버렸어. 오늘 동광원 사람만 구원받는다. 그 주장이 무너져버려 우리 손자도 구원 받는다. 그러니 가정이 확 넓어져가지고 전 인류가 구원받는다고 하는 그 복음을 펴신 것입니다. 지금은 동광원이요. 전 인류에 대하여 공헌할 수 있는 그런 그 사명을 받게 되요. 옛날에는 정절을 지킨 사람이 구원받는 공로자였지요. 지금은 누구든지 구원받는 다고 하는 그 대 복음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십니다. 하나님의 계획 그렇게 되요. 어디 좋습니까? 좋지요. 아버지가 둘째아들 낳을 때 불행해요. 그러나 둘째 아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 성경말씀에 둘째 아들을 용납했다는 대목이 빠져버리면 이 성경이 아니라는 겁니다. 도로 구약이 되어버려요. 도로 구약이야. 그러니까 구약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겠다. 이제는 복음을 받아들여야 해요.
이 역사적으로 동광원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때에 우리가 살고 있어요. 그래 받아 들였어요. 어머니가, 한나 어머니께서, 옛날 교회라 면요, 손자가 결혼했으면 죽었습니다. 죽었어, 못살아요. 가슴이 아려 와서 이제는 가슴을 넓혀버렸어. 용서해 버렸어. 그래 마음속에도 자비심이 에라 그것 불쌍하다. 아이고, 불쌍하다. 그 마음뿐이라고 미운마음이 없어요. 지금 옛날 마음 같으면 밉지요. 그러나 지금은 미운 마음이 없어요. 왜 복음이야, 복음 무조건이야. 아 그거 불쌍한 자식 불쌍하다. 아버지 저것을 불쌍히 봐 주십시오. 축복도 하거든 지금은 그래 이 어머니가 오래 사신 것이 참 동광원의 완성이에요. 어머니의 영혼이 평화를 얻고 돌아가시는 것이 곧 동광원의 구원이거든. 거기 계시니까 그렇지 않아요? 그래 이것은 역사적인 구원의 성취라고요.
또 한분 계세요. 여기, 배주 어머니, 일이년 전만해도요, 딸 하나 둔 것 결혼해가지고 얼마나 가슴이 타들어가고 절망하고 울고 눈물이 아마 다섯 동이는 더 나왔을 거야. 아홉 동하고 닷 되는 나왔어. 그런데 그년 봄에 장로님이 탁 마음을 넓혀버렸어. 구원 있다. 다 구원 한다. 다 용서 한다. 그래가지고 어휴 한숨을 쉬고는 아이고 이제 살겠소. 이제 살겠다고 아휴 내 딸도 구원받는다니 이제는 다리를 쭉 펴고 잠을 자겠습니다. 이제는 희망을 갖겠어요. 배주 어머니가요. 이것이 복음이에요. 이제는 복음을 받아 들였어요. 동광원이 이제는 세례 줘도 부끄럽지 않아요. 지금 부끄럽지 않다고, 그러니까 모든 영혼을 구원하신 예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신 우리 장로님께서는 모두 회개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복음을 말씀하고 계신다. 복음, 옛날에는 에덴복귀 교리를 주장하셨어요. 에덴에 복귀하자하는 교리에 집착하셨지요. 그건 두려운 사상입니다.
지금은 에덴 복귀를 주장하시지 않아요. 이미 에덴을 떠난 인류가 다 구원받자. 다 예수의 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근본적인 복음을 설하고 계세요. 그래 우리가 그 점을 이렇게 같이 인정하고 같이 가셔야지요. 누구든지 다 보냅니다. 아까 그리 가서요. 불행한 자식치고 어찌 깨끗한 사람이 있으랴. 다 버려. 다 그러면 누구든지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는다. 예수님의 피로 죄 씻음을 받고 거듭난다. 새 사람이 된다. 거기에 누가 죄가 더 있고 덜 있냐? 따질 것이 무엇이냐? 판단할 것이 없다. 다 판단해봐야 다 죄인 아니냐? 그러니 용서뿐이다. 사랑뿐이다. 불쌍히 보는 마음뿐이다. 불쌍히 보자. 그 성령을 우리가 받았습니다요. 그 성령대로 사는 것이 유토피아다. 그 사랑으로 사는 것이 천국이다. 그런 결론을 내리신분이 이 사막에서 편지를 쓰신 분이에요. 이런 동지가 있기 때문에 확실해요. 장로님 말씀이 전혀 헛소리 아니에요.
회개의 길 복음주의라고 그럴까 일치를 본 것이에요. 이거 주장이 사막에서 편지한 분과 베드로 성인의 말씀과 장로님 말씀과 일치를 봤다는 것은 이건 세계적인 종교화 되요. 종파 파벌 아니겠습니까? 우리 주장이 없어져 버렸어요. 이제는 특별한 은혜를 받는 사람은 깨끗하게 사는 사람은 특은이고 참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고 아침부터 밤까지 일한 사람이지요. 애써서 피 흘려 일한 사람이고 대다수는 오후에 한 시간 일하고 구원받지 않습니까? 회개해야 구원받지 않습니까? 다 구원받게 하겠다. 다 구원이 있다. 예수님이 다 불쌍히 보신다. 다 용서 하신다. 그러니 모두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아침부터 밤까지 일했다고 해서 그걸 섭섭히 생각해서는 안 되겠다. 그걸 동감하고 감사해야겠다. 그런 비유가 있지 않습니까? 몇 장에 있습니까? 찾아 읽어 보세요.
마태복음 20장 1절로 16절 하늘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이른 아침에 나갔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돈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아홉 시쯤에 다시 나가서 장터에 할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당신들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그러면 일한 만큼 품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니 그들도 일하러 갔다. 주인은 열 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오후 다섯 시쯤에 다시 나가 보니 할 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어서 왜 당신들은 하루 종일 이렇게 빈둥거리며 서 있기만 하오? 하고 물었다. 그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주인은 당신들도 내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차례로 품삯을 치르시오 하고 일렀다.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그런데 맨 처음부터 일한 사람들은 품삯을 더 많이 받으려니 했지만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밖에 받지 못하였다. 그들은 돈을 받아 들고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하고 따졌다. 그러자 주인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보고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하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따라 읽으십시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니라. 찬송 부르십시다.
요한복음 23장 39절부터 43절까지 보십시다. 또 한 번 마태복음 24장 41절부터 44절까지 한 사람이 두 가지로 풀어서 말하는데 여기 보십시오.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 공동번역이지요. 내가 굉장한 계시를 받았다. 해서 잔뜩 교만해 질까봐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하나 주셨습니다. 이건 분명히 하나님이 주셨다. 이렇게 말씀을 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하나 주셨습니다. 왜 잔뜩 교만해 질까봐 똑같은 사실인데 다시 설명한 것은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나를 줄곧 괴롭혀 왔습니다. 그럼 병은 똑같은 병을 두고 설명은 두 가지 말을 하셨어요. 잔뜩 교만해 질까봐 병을 하나 주셨는데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찌르는 것 같은 것을 주셨다. 그렇게 설명하심과 동시에 그것은 그 말은 똑같은 병입니다. 그 병은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나를 줄곧 괴롭혀 왔습니다. 그 효과는 대단히 좋았어요.
그래서 나는 교만에 빠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 잔뜩 교만해 질까봐 병을 하나 주셨는데 두 가지 해석을 했어요. 하나님께서 주셨다. 또 하나는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나를 괴롭혔다. 그래 이 병이 둘은 아니거든요. 몸도 하나요. 병도 하나인데 그 자기 체험을 두 가지로 설명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점을 지금 유의하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꾸 이렇게 여러 가지 헤매는 시험이 있다면요. 두 가지로 보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만 주셨다. 이렇게만 봐버리면 교만해 진다할까 자랑이 되지 않겠어요? 사탄이 주었다고만 풀어버리면 낙망하고 낙심하고 절망하지요. 한쪽에 치우치기 때문에 똑같은 생활을 하면서 한사람은 교만해지기 쉽고 한사람은 절망해지기 쉽다. 그 두 폐단이 있습니다.
그러니 똑같은 사실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은혜를 받는 동시에 이것은 내가 교만하니까 사탄이 나를 이렇게 했다. 그렇게 자기가 정죄를 받는 것이지요. 그 두 가지, 두 가지 은혜가 받아질 때 그 사람의 영혼이 건전하겠다. 그렇게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러면서 그 대조적인 말을 찾아보느라고 똑같은 십자가에 달린 죄수 두 명을 예를 들어 봤어요. 거의 똑같은 시간에 십자가에 못 박혔지요. 같이 아프지요. 거의 같이 죽지요. 그런데 한 사람은 어떤 태도를 품습니까?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중 하나도 예수를 모욕했다.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요. 당신도 살리고 우리도 살려보시오. 똑같은 사람인 데요. 똑같은 십자가인데 똑같이 아플 텐데 그런 마음을 왜 먹었냐? 그 말이에요. 그 사람은 삽시간입니다. 인생의 시험인데 똑같이 아프고 똑같이 죽어가는 마당에 한 사람은 이상하지 않아요?
또 다른 죄수는 너도 저분과 같은 사형선고를 받은 주제에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느냐? 우리가 한 짓을 보아서 우리는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저분이야 무슨 잘못이 있다는 말이냐 하고 꾸짖고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는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럼 고생이라는 건 똑같이 고생했어요. 두 사람이 슬프다면 똑같이 슬픈 일을 당했습니다. 억울하다면 똑같이 억울한 십자가를 지었을 것이고 또 아프다면 똑같이 아팠을 텐데 한 사람은 어떤 마음을 품었기에 예수님을 모욕할까? 죄수중 하나는 예수를 모욕했다. 또 똑같은 마음인데 또 한 죄수는 어쩌면 이렇게 겸손해요. 그 죄수를 꾸짖으시면서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 저를 꼭 기억해 주십시오.
어쩌면 어린양같이 그렇게 유순할까? 그 점이, 점이 남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 식구들 이야기에요. 이 방에 모인 사람들 이야기에요. 똑같이 짠 김치에 밥 한술 똑같이 보리밥 먹었는데 어째 한사람은 교만한지 모르겠어요. 어째 한사람은 그렇게도 겸손한지 똑같이 살면서 똑같이 잠자고 똑같이 밥 먹고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성경을 배웠는데 어째 한사람은 거만해지고 왜 한사람은 겸손해지냐? 그 이치, 이치를 상고해 보는 겁니다. 또 아까 보셨지요. 마태복음 24장에서 40절 이하의 말씀, 또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맷돌을 갈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다면 거기부터 봐야겠어요.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아까 강도 두 사람 이야기와 거의 같은 이야기에요.
또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그 점, 그 점에 대해서 우리가 공부, 성경말씀 공부도 하시니까 이 두 가지 사람 똑같은 사실인데 왜 두 가지 사람이 나타나느냐? 가라지는 주인이 뿌렸는데 왜 밤사이에 주인이 씨앗을 뿌렸는데 왜 밤사이에 가라지가 나왔느냐? 그것은 주인이 뿌린 것이 아니라고도 설명했고 그것은 마귀가 뿌렸다고도 설명한 바가 있기는 있어요. 그건 똑같은 성경말씀을 배웠는데 왜 한사람은 자꾸 자꾸 교만해지고 어째 한 사람은 자꾸자꾸 겸손해 질까? 똑같은 말씀을 배우고 이 현필 선생님은 한번은 이렇게 설명을 하십디다요. 그 말씀 전에 했지요. 성경을 가르쳐 주신다고 해놓고 석 달을 안 가르쳐주시고 아침마다 성경 말씀에 관한 준비 말씀을 해요. 여러분 봄비가 옵니다. 저 봄비가 오면 산 나무는 저 비를 맞고 생기가 돋아 무럭무럭 자라지만 고목이 저 비를 맞으면 더욱 썩습니다.
성경도 이와 같아서 겸손한 사람이 배우면 날로, 날로 은혜가 많아지지만 교만한 사람이 이 글을 배우면 날로, 날로 더 교만해 집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그렇게 꼭 배우는 마음자리가 필요하다. 무조건 배워서는 안 된다 성경을 배울 마음자리가 있은 다음에 배워야한다. 그렇게 설명하시고 또 성경 안 가르쳐 주시고 시간이 끝나버렸다고요. 누가복음 1장을 놓고 석 달을 공부하셨는데 앞으로 전진을 안 하셔요. 또 마음을 준비시키고 또 한 시간 참석했는데 여러분 성경공부 하려고 모였지요? 내가 저 방에서 이방으로 오면서 봤습니다. 나무를 패 때고 도끼를 마당에다 내버렸는데 도끼를 썼으면 마당에 둬야 되겠습니까? 제자리에 두고 왔어야지요. 그 도끼가 거기 있으면 사람이 걸려 다치고 큰일이 나지 않겠습니까?
나무가 자기가 아쉬우니까 해서 때고 도끼는 휙 던져버리고 그 마음을 갖은 사람이 성경을 배우면 되겠어요? 그 마음 가지고는 성경 못 배웁니다. 또 그렇게 설명하시다가 그냥 나가버리고 안 가르쳐 주시고요. 그런 광경을 봤습니다. 제가 이 선생님 말씀을 생각이 나서 드리겠습니다. 육이오 사변 화학 산에 계실 때 모든 식구들은 거의 흩어졌고 막도 이제 곧 들어가려고 막을 다시 치기 전에 한 보름동안 노숙을 하셨는데요. 매일 장소를 바꿔서 주무셔야 합니다. 자꾸 찾아오는 사람이 김이라고 찾아올까봐 오늘 여기서 자고 내일 저 등성을 넘어가서 자고 갖은것은 이불은 있어야지요. 밤에 자려니까 이불이 두둑한 한 서너 명이 덮던 이불인데 밤에 몸을 빈 몸으로 이불을 가지고 다녔으니까 밤에는 이불속에 들어가 자지요. 아침에 보면 이불이 요에 흥건해요.
이슬이 적셔가지고 이불이 한 가닥 우기가 척척하니 짜면 물이 나올 만큼 이불이 젖었습니다요. 이불 속이니까 괜찮지요. 이슬 안 맞지요. 머리는 한 석 달 감지를 않았으니까 이렇게 뒤로 넘어가시고 그럼 숲속에서 종일 기도를 하십니다. 아주 번민을 하시고 괴로워 해 싸요. 가만히 뒤에서 기도하는 소리를 들어봤어요. 아버지 저는 그분과 그 맺힌 그 오해를 풀지 못하고 죽을 것 같습니다. 어찌할까요? 어찌할까요? 어떤 분하고 무엇이 맺혀있나 봐요. 곧 죽을 성 싶은가봐. 곧 아마 체포하면 죽을 것 같으니까 그분과 맺힌 것을 못 풀고 죽을 성 싶다. 그것을 그렇게 해요. 그런데 만나더라도 안 풀어졌나 봐요. 직접 찾아가서 얼굴을 뵙더라도 그 도저히 속사람 마음을 풀길이 없었던가 봐요. 그분과 자기가 맺힌 것이 있는데 이 선생님 문하에서 공부하던 사람들 끼리 오기는 있는 것 같아요. 지금 보면 누가 더 잘 믿느냐 그것이 있어가지고 서로 양보를 안 해줘요. 내가 잘 믿는다. 이 마음이 있어가지고 아무리 이 선생님이 그렇게 사과를 하고 잘못했다고 빌어도 용서를 안 해주는가 봐요.
그런데 그 마음을 서로 풀지 못하고 이제 죽을 성 부르기 때문에 이것을 어찌 할까요? 어찌 할까요? 그러면서 기도를 하셨어요. 닷새 엿새 그렇게 하시는데 하루는 아주 기뻐하세요. 해가지고 캄캄해야 둘이 만나서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해질 무렵까지 고민하던 분이 그날은 기뻐하시고 얼굴이 환히 평안하세요. 저녁에 그렇게 설명하세요. 아이고, 이제 안심이 됩니다. 내가 진 빚을 못 갚고 죽을까봐 벌벌 떨었는데 이제는 해결 났다고 왜 진작 몰랐는가 모르겠다고 예수님께 부탁하고 죽으면 될 것을 그걸 몰랐다고 저하고 그 사람하고 만나서 오해를 풀지 못하고 죽을까봐 벌벌 떨었는데 제가 예수님께 기도 올리면 예수님이 찾아가서 우리 둘 사이에 막힌 담이 헐어져버릴 것이 믿어졌다고 우리 둘이 풀지 못한 그 피차간 괴로움을 예수님이 대리자로서 찾아가서 그 풀어 주실 것이 믿어지니까 이제는 안심이 됩니다.
예수님 저는 평생 죄만 짓고 못 풀고 갑니다. 예수님이 대신 다 풀어주십시오. 그러니까 영원히 내가 진 빚은 못 갚고 가지만 예수님이 대신 갚아 주시라고 이렇게 미뤄지니까 기도를 올리게 되었으니 이렇게 해결이 났다고 기뻐하십디다. 그 점이지요. 그 점이에요. 그런 점이 사람과 사람끼리는 영영 안 되는 일이 많이 있어요. 돈 같은 건 갚으면 되지만 돈도 아니고 쌀 같은 건 갚아버리면 되는데 그것도 아니야. 누가 잘 믿느냐? 이 시샘이 생겨가지고 두 사람 사이에 말로서는 도저히 화목이 안 되어요. 사람끼리 풀어지지가 않아요. 그러니 실상은 이것이 답답하지요. 꼭 둘이 화목하고 죽고 싶은데 화목이 안 돼. 그렇다면 걱정이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시고 화목을 시켜주시리라. 그렇게 믿어지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어주시고 피를 흘려주셨으니 예수님께서만 우리 두 사람의 오해를 풀어주실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 제 빚을 대신 갚아 주십시오. 그길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그 빚을 갚아줄 것이 믿어지니까 마음이 평안하다. 그렇게 해석하십디다. 그러고 평안하시더라고 덕이 안 되니까 아무개라고는 지명할 수 없어요. 선생님이 누구하고 걸려서 그랬다. 그 말 할 수 없지요. 본인이 그렇게 되려고 된 거는 아니에요. 아주 조심하고 깨끗하게 모시고 존경을 하고 섬기고 그랬건만 오해가 걸리니까 이 한나 어머니 살림하실 때 거기 부흥회 할 때 한번 가봤어요. 그러니 그 어른들이 몇 명 있지 않습니까? 이 세종 선생님 문하에 몇 분 살아계신데 이 방에 들어가면 서로 못 들어가요. 서로 양보하느라고 그렇게 서로 조심해요. 들어가십시오. 아니 들어가십시오. 들어가십시오. 서로 앞에 안 들어가려고 이렇게 서로 그러니 답답해서 옆에서 보기에는 저는 쑥 들어 가버려요. 속이 없으니까 함부로 들어오지요.
그런데 그 분들은 서로 먼저 안 들어가요. 그렇게 서로 윗자리를 양보해요. 그 말씀 하나 하면 서로 안 해요. 말씀 하십시오. 말씀 하십시오. 말씀 하십시오. 하룻밤에 한분이 없어져 버렸어. 안계셨어. 말을 시켜놓고 말을 하는 거 그 꼴은 못 봅디다. 서로 그러니까 말을 하시오. 먼저 하시오. 말을 하면 삐치니까 나가버리고 먼저 하시라면 않고 먼저 말씀 하시지요. 하지도 않고 겸손한 사람이 먼저 말을 해버리면 그 사람은 나가버리고 그렇게 서로 희생합디다. 그것이 열두제자 아니었을까요? 이 세종 선생님 제자들도 그랬어요. 그것이 인간 아니겠어요? 그것이 인간이야. 누구 잘못이 아니라고요. 성령을 받기 전에는 다 그런가 봐요. 그렇게 됩디다요. 그러니 걸려서 된 일 같아서 그것이 죽을 성 부르니까 그렇게 황송하게 생각하시고 어떻게 했으면 마음에 평안을 드리고 가야겠는데 도저히 가능성이 없다. 아무리 제가 잘못했다고 빌어도 풀어지지 않으니 그렇게 걸려있기 때문에 예수의 피가 아니고는 도저히 화목이 안 되겠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에 대한 그 은총과 그 능력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께 부탁 하고나니 이렇게 마음이 평안합니다. 그런 말씀을 제가 들어본 일이 있어요. 자 그런데 오전에는 제가 실덕했지요. 안계시니까 이야기 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귀주 어머니하고는 제가 몇 번 이야기 했어요. 어머니 단점에 대해서 제가 혹시 제 삼자하고 예배 석상에서 말씀 하더라도 제가 어머니 흉이 아니지요. 아이고, 그렇지, 아무 오해 없다고 그러십디다. 이것이 남의일이 아니라 되는 거거든요. 남의 일이 아니야. 모두 우리 앞에 떨어진 문제거든요. 그래 이것이 말이 아니에요. 실제 문제거든요. 실제 문제인데요. 이 시간에는 배주 어머니 여기 와계시니까 흉내 낸다고 삐치지 마세요. 나오셨어요. 안 나오셨어요.
배주 어머니 괜찮아요. 내가 쳐다보면 아니까 지금 이 시간에 혹시 섭섭하더라도 그 뜻은 아세요. 저를 성인같이 존경한 분이 배주 어머니라고, 또 저는 배주 어머니가 아니고는 어머니가 없다고 할 만큼 어머니를 존경하지요. 두 사람이 이렇게 왔어요. 이번에 한번 둘이 걸렸어요. 그래 그저께 풀었어요. 여기서 불효자식입니다. 어머니 용서해 주십시오. 뭘 그러냐고 내가 잘못했소. 그래 어머니가 나가버렸어. 그러면 화목하지 않았소. 어떻게 걸렸냐? 이것이 남의 일이 아니라고 배주 엄마하고 저하고 둘이 걸린 것이 남의 일이 아니에요. 여러분 일이에요. 그러니까 한 가지 일을 봐서 열일을 치료할 수 있어요. 한 가지 일을 봐서 열 가지 일을 미리 깨달을 수 있다. 그 말씀입니다. 간단히 설명하면 그래요. 제가 오랜만에 개화도로 들어갔어요. 제가 제일 아끼고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 배주 어머니가 가만 눈치를 보니까 말을 안 들어도 눈치가 있거든.
아 우리 어머니는 고아가 되어있어요. 이 방으로 가서 주무시다가 저 방으로 가서 주무시다가 어머니 방이 없어요. 아 그래서 어머니 편이 되지요. 마음이 그래서 우리 어머니를 편케 모셔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장로님 세휘자 같이 제일 온순하고 사람이 덕이 있고 말이 없으니 이 배주 어머니 앞으로 모시면 어떨까요? 아 그거 좋지. 그러시더라고요. 설명을 서로 안하지. 아무 설명 없이 그 이튼 날 명령을 했나 봐요. 배주 어머니 세휘자 한 테로 가시오. 장로님도 설명 안 하시는 분 아니에요? 앞도 뒤도 없이 이래 버리시니 어머니 혼자 생각 했겠지요. 내가 어디가 미워서 그곳으로 가라고 하는가? 나는 여기서 못 사는가? 나는 왜 이렇게 싫어하는가? 그래 억지로 가셨는가봐. 이해가 안 되시고 가서 생각하니 참 기가 막힐 것 아니요? 나는 개화도 에서 못살게 하고 이리로 보내버렸다고 생각했다. 합시다. 그러면 섭섭하지 않으시겠어요?
그래서 좌우간 무슨 영문인지 이유를 모르니까 저를 만나가지고 한번 이야기를 해야 쓰겠다. 하고 생각을 하셨던가 봐요. 그러자 본원에서 저하고 둘이 마주쳤어요. 저는 이제 본원을 석 달 만에 한번 가지 않습니까? 갔는데 저녁 예배시간에 종을 쳐요. 예배시간에 참 본원에서는 한 사람도 와서 성경말씀을 하라고 하시던지 예배 인도하라는 말 한사람도 없어요. 본원에서 오신 분 몇 사람 계시지요. 그러니까 인제 무색하지 않아요? 객지에서 있다가 왔으니까 아 예배 인도 하시오. 이래야 되는데 가야 옳은지 안가야 옳은지 안가도 못쓰겠고 가도 못쓰겠고 인제 자꾸 눈치를 보지 않겠어요? 예배 인도하시오. 하는 말도 없고 그러다가 나가봐야 할 텐데 모처럼 왔는데 안 가 봐도 못쓰겠다. 하고 이러고 있는데 어머니가 들어오셨어요.
인제 어머니는 오래 참았던 이야기니까 종치는 소리 안 들어. 어떻게 나를 개화도 에서 곡성으로 가라고 했소? 들어앉자 따진단 말이야. 아 종칩니다. 그 나중에 말하시오. 종치니까 간다고, 아 나하고 이야기 하지 어디로 가냐고 아 종친단 말이요. 아 나하고 말하지 내 마음도 안 풀어주고 누구하고 뭔 말을 하냐고 그래서 아주 당황이 되어가지고 언제까지나 죽을 잡술라 그래요. 밥 먹어야지, 그러고 그냥 예배 보러 가버렸어요. 그래 예배 인도를 하고 그 다음에 사람이라는 것이 영이 있으니까 부끄럽습디다. 내가 어머니 마음에 섭섭하게 해드렸구나 싶어서 전은 이렇고 후는 이렇습니다. 하고 설명을 못하고는, 들어앉자 언제까지 죽을 잡수려고 그래요? 밥을 먹어야지. 하고 홱 나가버렸으니 어머니가 얼마나 섭섭할까? 그러고 눈치를 보지요. 살살, 그래 곡성을 갔거든요.
예배를 다 보고 소감을 이야기 하십시오. 하니까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 하십디다. 내가 준호를 성인인줄 알았더니 이번에 보니까 얼굴이 빨개 지그만. 아갸갸, 내가 몰라 봤구나. 깜짝 놀랐어. 그러면 그렇지. 그때 실덕을 했는데 내가 부끄럼을 타는데 내가 미안해 죽겠는데 금방 아십디다. 어머니 마음에 그랬구나. 내가 성인으로 봤는데 말 좀 하자니까 얼굴이 빨개 얼굴빛이 변하더라고 세상에 저렇게 속에 있는가 모르겠다. 그런 심정을 풀었다고 꼭 그런 심정을 말을 안 해요. 그렇게 이야기를 하신 것이라 그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