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어 의(義)를 지켜야 할 까닭은 없다. 다만 나라가 선비를 기른 지 500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도 책임을 지고 죽는 사람이 없다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나는 위로는 황천으로부터 받은 올바른 마음씨를 저버린 적이 없고, 아래로는 평생 읽은 좋은 글을 저버리지 아니하고자 길이 잠들려 한다. 이 어찌 통쾌하지 아니한가. 너희들은 나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
매천 황현(梅泉 黃玹).
조선조의 선비들과 함께 지낸 올해는 필자에게 참으로 보람이 있는 한 해였다. 필자의 역량 부족으로 이 땅을 다녀가신 분들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는 반성과 함께 이제 연재를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연재를 시작할 때 누구를 다루어야 할지 막연했지만, 하나만은 확실히 정해 놓았다. 바로 맨 마지막에는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1910년)이라는 인물로 마무리를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매천은 누구인가? 1910년 조선 왕조와 운명을 함께한 사람이다. 필자는 20년 전 대학원 수업시간에 매천이 지은 《매천야록(梅泉野錄)》을 꼼꼼하게 읽은 경험이 있다. 그 경험과 매천에 대한 좋은 글(이은철, 임형택, 기태완, 이장희 등)들을 참조하여 이 글을 쓴다. 1910년 8월 29일! 우리는 이날을 국치일(國恥日)이라고 부른다. 조선 왕조가 517년 만에 망한 것이다. 우리 역사상 왕조가 망한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고구려, 백제, 그리고 통일신라가 망했으며, 고려조 또한 망한 경험을 우리 역사는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1910년의 망국(亡國)은 이전의 망국과는 성격이 달랐다. 1910년의 멸망은 외세(外勢)에 의해 병탄(倂呑)을 당한 결과라는 점에서 예전의 그것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이전의 망국은 왕조만 망한 것이었지만 이번 망국은 민족 자체가 사라지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역사상 초유(初有)의 사태를 바라보는 당시 사람들의 시선은 과연 어떠했을까? 어린 시절 필자는 당시 이 땅 모든 백의민족(白衣民族)의 후손들은 당연히 비분강개(悲憤慷慨)하였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1910년 당시의 모습은 내 생각과는 너무도 달랐다. 먼저 당시의 모습을 중계해 본다. 亡國의 풍경 1910년 여름, 조선 정부는 포상과 축제의 나날이었다. 수많은 벼슬아치들이 승진을 하였고, 훈장을 받았으며, 이미 죽은 자들에게는 벼슬이 추증(追贈)되거나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이 기회에 시호를 받지 못하면 바보라도 되는 듯 너도 나도 자기 조상의 시호를 받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8월 1일 송익필(宋翼弼) 등 26명에게 시호(追諡·추시)를 한 것을 시작으로 시호를 주기 시작하여 윤덕영(尹德榮) 등에게 자급(資級)을 승격시켜 보국대부(輔國大夫)로 하는 등 승진 잔치가 이어졌다. 윤덕영은 순종비(純宗妃)의 큰아버지가 된다. 고종(高宗)의 형인 이재면(李載冕)을 봉하여 흥친왕(興親王)으로 삼고 그 저택을 흥친부(興親府)라 칭하였다. 이 흥친왕은 책봉의 예를 행한 뒤 창기(娼妓)를 불러다가 종일 잔치를 열고 즐겼다. 망국에 즈음해 모든 사람이 비분강개하였을 것이라는 필자의 어린 시절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버린 이 기가 막힌 이야기들은 바로 《매천야록》이라는 책에 실려 있는 내용들이다. 매천은 이와 같은 사실을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당시에 합방론이 이미 정해졌는데도 증직(贈職)을 의론하여 미친 개처럼 쫓아다니니 나라가 어찌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윤덕영은 자기 인척에게 직각(直閣) 70여 자리를 임명하였다. 정2품으로 자계(資階)가 오른 자가 저자를 이루어 금관자(金貫子)가 거의 동이 날 지경이었다.> 금관자란 정2품의 품계에 오른 사람이 망건에 달아 당줄을 걸어 넘기는 구실을 하는, 금으로 만든 작은 고리를 말한다. 정2품은 판서(判書)급으로 오늘날의 장관 자리에 해당된다. 장관급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이 시장을 이룰 정도로 넘쳐나서 그들의 신분을 상징하는 금관자가 동이 날 정도였다니,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