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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삼층석탑...]
[해인사 삼층석탑 안내문...]
[석탑위 상륜부의 보개와 보륜...]
[대적광전앞 양쪽에 세워져 있는 돌기둥...]
[대적광전 오르는 계단이 이렇게...]
[명안문이란 현판이 걸린 구광루의 모습...]
[궁현당 처마 선의 아름다움...]
[심검당이라는 현판도 걸려있는 관음전...]
[대적광전에서 내려다본 삼층석탑과 구광루의 모습...]
[대적광전 철조 관음보살과 중앙에 목조 문수보살, 우측 목조비로자나불...]
[대적광전 본존 비로자나불상, 좌측엔 목조비로자나불, 우측엔 목조지장보살...]
대적광전 본존 비로자나불상은 1769년에 조성되었고, 그 왼쪽에 있는 또 하나의 목조 비로자나불상은 가운데의 본존불을 모시기 전까지의 본존불이다. 이 목조 비로자나불상은 그 좌우의 보현보살상, 문수보살상과 더불어 삼존불로서, 고려시대에 가지가 셋인 큰 은행나무 한 그루를 가지고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 삼존불은 처음에는 경상북도에 있는 금당사(金塘寺)에 모셨다가,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 가야산의 용기사(龍起寺)를 거쳐, 1897년 지금처럼 그 밖의 불상들은 정확한 조성 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은데, 모두 조선시대 후기에 봉안한 것이다.
[대적광전 좌측엔 목조 지장보살, 중앙엔 목조 보현보살 우측엔 철조 법기보살...]
[대적광전 동쪽에 걸린 금강계단(金剛戒壇)현판...]
다른 사찰도 마찬가지 이지만 대적광전은 마하비로자나불을 봉안한 불전으로 대광명전, 대적전, 비로전, 화엄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대적광전의 적광(寂光)은 번뇌를 끊고 적정(寂靜)한 자리에서 발하는 진지광명(眞智光明)을 의미한다. 대적광전은 때로 광(光)자를 뺀 대적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대적(大寂)이란 여래가 일체의 산란한 마음을 여의고 드는 선정을 의미한다. 그리고 비로자나불을 모셨으나 주불전이 아닌 경우에는 그냥 비로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때로 화엄전으로 칭하기도 하는 것은 비로자나불이 화엄장세계의 교주이기 때문이다. 이제 대장경이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대적광전 서쪽에 걸린 법보단(法寶壇)현판이 걸려있고...]
이곳 대적광전 마당에서 한없이 몇바퀴를 돌며 여기저기 눈맞춤을 한 후 이제 한창 공사 중인 대장경판전 보수공사장을 지나 대장경이 모셔있는 곳 중 임시로 참배하는 곳을 마련해 놓았기에 그 쪽으로 이동을 한다. 이곳에서부터는 학생들도 많고 또 연로하신 분들도 많아 오르는 속도가 나질 않는다. 때마침 담벽 밑에는 맥문동이 많이 피어있어 꽃도 찍으며 천천히 법보전(法寶殿)이 있는 곳으로 올라간다. 이곳에서 10년이 다되게 계속 공사하는 목적은 고려 팔만대장경 청소와 판가 보수가 주목적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또 문화재청과 합천군청의 지원을 받아 제원조사와 요즈음에 맞게 DB작업도 한다는 내용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대장경은 고려시대에 두 차례에 걸쳐 국가사업으로 간행되었다. 먼저 간행된 구판대장경은, 1011년에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거란의 침공을 물리치려는 발원에서 시작하여 1087년까지 무려 77년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그 무렵으로서는 중국의 장경에 견주어 내용이 완벽한 것이었다. 그러나 팔공산 부인사에 봉안된 이 구판 대장경은 고종 19년인 1232년에 몽고군의 방화로 그만 불타 버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5년뒤인 1236년에 다시 본격적으로 대장경 간행 불사를 추진하여 1251년에 그 완성을 보게 되니, 16년에 걸친 이 큰 불사의 결실이 바로 지금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고려대장경이다. 라고 해인사에서 알려준다.
[장경판전 보수공사를 알리는 안내문...]
완성된 고려대장경은 처음에는 강화도에 모셨으나,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져서 서울의 지천사로 옮겼다가 그 뒤 조선시대 태조 임금 때인 1398년에 해인사로 다시 옮겨 모신 것이다. 대장경의 경판에 쓰인 나무는 섬 지방에서 벌목해 온 자작나무와 후박나무로서, 그것을 통째로 바닷물에 삼 년 동안 담그었다가 꺼내어 조각을 내고, 다시 대패로 곱게 다듬은 다음에야 경문을 새겼는데, 먼저 붓으로 경문을 쓰고 나서 그 글자들을 다시 하나하나 판각하는 순서를 거쳤다. 고 한다.
[담벽도 멋지게 해놓았지만 심어놓은 맥문동도 멋을 더해주고...]
대장경을 만드는 데에 들인 정성과, 한치의 어긋남과 틀림도 허용하지 않은 그 엄정한 자세는 요즈음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도 없거니와 상상하기조차 힘든 것이었다. 곧, 글자를 한자씩 쓸 때마다 절을 한번 하였다고 하니, 그렇듯이 끝간 데 없는 정성을 들임으로써, 서른 명 남짓한 사람들의 솜씨로 쓴 무려 52,382,960개에 이르는 구양순체의 그 글자들이 한결같이 꼴이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마치 한 사람이 쓴 듯이 일정하며, 한 글자도 잘못 쓰거나 빠뜨린 자가 없이 완벽한 장경을 이루고 있다. 고 알려준다.
[멋지게 그리고 많이 피어있는 맥문동...]
경판의 마무리까지 세심하게 손을 본 이 대장경은 그 체제와 교정이 정확하고 조각이 섬세하고 정교하여서도 그렇지만, 이미 없어진 거란장경의 일부를 비롯하여 중국 대장경에는 없는 경전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어서도, 중국 최고의 대장경이라고 일컬어지는 만력판이나 또 후세에 만들어진 어떤 대장경도 따라올 수 없는 독보적인 빼어남을 지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하여 고려대장경은 특히 근대에 만들어진 일본의 신수대장경을 비롯한 현대의 불교 대장경들의 으뜸가는 보기가 되기에 이르렀다. 고한다.
[풀협죽도가 탐스럽게 피어있어...]
대장경을 만들 무렵에 고려 왕조는 여러 차례에 걸친 오랑캐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런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임금과 귀족과 백성이 나라를 구하겠다는 한결 같은 마음으로 다시 이루어 놓은 것이 팔만 대장경이다. 오늘날 몇몇 경솔한 사학자들이, 칼과 창을 들고 오랑캐와 맞서 싸우는 대신에 대장경을 만들기에 힘을 쏟은 그때의 염원을 무기력한 시대사조로 그릇 되이 평가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대장경 간경 사업은 역사의 맥을 바로잡아 이어 가려는 민족의 염원이 그토록 간절하고 컸다는 것을 드러내는 민족 의식의 총화라는 데에서 그 의미가 빛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세계 정신사의 산맥에 우뚝 솟아난 한 봉우리이기도 하며, 아울러 세계의 인쇄술과 출판물에 끼친 영향 또한 지대한 것이다. 라고 해인사에서 전해준다.
[경판전이 모셔진 중앙에 법보전(法寶殿)이...]
법보전 건물은 수다라장에서 약 16미터 동북쪽에 떨어져 앞의 건물과 같은 규격으로 나란히 놓여 있고 중앙칸 위에 '法寶殿(법보전)' 이란 현판을 달고 그 아래 분합 살문을 달아 출입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이 중앙칸은 안쪽 높은 기둥열이 있는 곳까지 벽을 쳐서 비로자나불상과 양측에 문수, 보현의 협시 보살을 봉안하여 예불을 드리도록 되어있다.따라서 경판장에 출입하는 문은 수다라장과는 달리 분합문이 있는 칸의 좌우 양 협칸에 두 짝 판문으로 달아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건물의 규모나 가구 형식은 수다라장과 같다고 볼 수 있지만 실제 익공 쇠서가 전면에서는 몽땅하게 부리가 잘렸고 측면에서는 쇠서 부리가 남아 있었으며, 뒷면에서는 경사지게 직선으로 잘려 있어 수리할 때 에 변형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법보전안에 모셔진 탱화...]
[동북쪽 끝에 자리한 사간정...]
수다라장과 법보전 사이 서북 끝과 동북 끝 양쪽에서 서로 마주보는 향으로 세워진 작은 경판장으로 각각 정면 2칸, 측면 1칸, 맞배3량집이다. 이들 건물 역시 익공형 주심포계의 집이지만 익공 쇠서가 수다라장과 같이 보머리와 붙지 않고 떠 있기 때문에 좀더 주심포에 가까운 형식이다. 또 벽체 역시 출입을 위한 판물가 살창으로 되어 환기를 원활히 하도록 하였다. 이상 해인사 대장경판전은 4동으로 국보 제 52호로 지정되어 있고 이 안에는 국보 32호인 고려대장경판 81,258매 및 국보 제 206호인 고려각판 2275매를 보존하고 있다.
[서북쪽 끝에 자리한 사간장...]
[수다라장 들어가는 중간 출입문인데 공사중이라...]
[장경판 청소중이라고...]
[해인사 고려각판 안내문...]
[가지런히 소장되어 있는 장경판들...]
[좌측 법보전실과 우측 수다라장 그리고 중앙에 동사간전...]
[법보존쪽 장경판을 들여다 보고 있는 여학생...]
[나도 들여다 보니 이렇게 보였고...]
[통퐁에 신경을 많이 쓴 것으로 보이는 건물이고...]
[장경판전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서...]
경장이란 부처님께서 따르는 제자와 일반 대중을 상대로 설파한 내용을 기록한 경을 담아 놓은 광주리란 뜻이고, 율장은 제자들이 지켜야 할 계율(戒律)의 조항과 그밖에 공동생활에 필요한 규범을 적어 놓은 율을 담은 광주리란 뜻이다. 노장은 위의 경과 율에 관하여 스님들이 이해하기 쉽게 해설을 달아 놓은 글, 즉 논을 담은 광주리란 뜻이다. 처음엔 이 세 가지 종류의 부처님 말씀을 기록하기 위해 다라수 외에도 나뭇잎, 대나무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하였는데 부처님이 태어난 아열대 지방의 기후는 너무 덥고 습하여 오랫동안 보존 할 수 없었으므로 못쓰게 되면 다시 만드는 일을 반복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기록의 내용은 조금씩 달라지고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여러 종파들은 제각기 다른 대장경을 기록으로 남겼으며 대표적인 것이 지금 산스크리트어 혹은 빨리어로 기록된 뜨리삐따까이다. 라고 정의를 내려준다.
[합천 학사대 전나무...]
[합천 학사대 전나무 안내판...]
[천년이 넘은 고목인데도 푸르름은 못지 않은 전나무...]
[정말 세월이 느껴지는 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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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현당앞에 피어있는 파초...그 꿈은 무엇일까?...]
[구광루 우측끝의 쪽목 해인호국도장이란 현판이...]
[해인사 안에 마련된 가람배치 안내도...]
[다사 종각을 한번더...]
[종각의 기둥들이 정겨워 보이고...]
[종각옆 감로수터엔 어지럽게...]
[보경당에 자리한 커다란 안내문...]
[다시 내려와 구광루와 안녕을...]
[구광루 우측 입구에 해인대도장이라는 현판...]
[보경당과도 아쉬운 인사를...]
[봉황문 좌측의 금강역사...]
[봉황문 우측의 금강역사...]
[일주문 쪽으로 내려가며 아직도 미련이...]
[천년고목과 다시 눈맞춤 인사를 하고...]
[내려가며 만난 공주님들 잘들 계신가?...]
[계곡을 내려가며 또 한장...]
우선 다행스럽게 무사히 사찰을 한 바퀴 돌아온게 너무 기쁘다. 그러나 우리가 돌아본 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이제 시작이 반이라 했으니 시간이 나는대로 같이 해 많은 암자들과 또 가을의 풍광 겨울의 운치등을 꿈꾸며 다음 여행지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볍기만 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