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15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사순절 셋째 주일)
야곱의 우물에서
출17:1~7; 롬5:1~5; 요4:5~15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 본문에서 야곱의 우물가에서 전개되는 한 여인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내적으로 텅 빈, 영적으로 공허했던 어떤 인생의 이야기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면의 더 깊은 갈증을 감춘 채 육신의 갈증을 채우고자 우물에 물을 길러 나왔던 여인이 “영원에 이르게 하는 샘물”인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 여인이 발견한 새로운 삶은 요한복음이 말하려는 “영원에 이르게 하는 샘물”의 근원을 이야기해 줍니다.
지난 주일에 보았던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한 밤의 대화가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우리가 충분히 알지 못하는 이야기인 것처럼, 오늘 야곱 우물가에서의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도 너무나 잘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한, 아니 충분히 살고 있지 못한 이야기이지요.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라는 것을 요한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이 발견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 “그리스도”를 우리가 어떻게 체험하고 살아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오늘 사마리아 수가(숙카르)라는 마을의 한 여인이 물을 긷던 곳은 ‘야곱의 우물’이었습니다. 아주 상징적인 대목이지요. 이 ‘야곱의 우물’은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오랫동안 물을 마시던 마을 공동우물이었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큰 자긍심을 주는, 전통을 자랑하는 우물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바빌론 포로기 이후에 혼혈이 되었다고 해서 유대사람들에게 멸시받고 이방인 취급을 당하던 사람들이었지요. 그랬기 때문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 야곱의 우물을 고집스레 붙잡고, 그래도 “우리의 조상은 야곱이야” 라는, 한 가닥 자부심을 붙잡을 수 있는 상징적인 장소였습니다.
바로 이런 곳에 한 여인이 물을 길러 나옵니다. 그것도 아무도 나다니지 않는 한 낮, 정오에 말입니다. (이 여인이 맺는 관계들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어쨌든, 이 여인은 가장 기본적인 생존의 욕구를 해결하려고 이 우물로 나왔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이 감추고 있는 더 깊은 욕구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삶이 내적으로 텅 비어 있었고 영적으로 공허하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여인이 삶과 접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녀가 길어 올리고 있던 “야곱의 우물”마저 그녀에게 지루한 일상의 반복이 되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에이브러햄 매슬로우는 욕구를 단계별로 보면서, 하위에 있는 결핍 욕구가 채워져야 상위에 있는 성장욕구가 발동한다고 보았습니다. 가령, 생존의 욕구나 안전에 대한 욕구가 채워져야 자존감에 대한 욕구나 자기실현의 욕구가 드러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의미요법의 창시자인 빅터 프랭클은 사람이 내적인 공백을 채우는 일, 삶의 고유한 의미를 발견하는 일이 오히려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라는 것을 설파했습니다. 그는 배고픔을 해소하려는 욕구나 성적 충동을 만족시키려는 욕구, 또는 지위를 얻고 권력을 쟁취하려는 욕구 등은 ‘의미를 추구하는 근본적인 욕구’에 비하면 이차적인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이것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것들을 가지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는 강제수용소의 혹독한 생활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삶에 대한 아무런 의미를 느끼지 못했던 이들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왜 사는가를 아는 사람은 어떤 삶도 거의 모두 참아낼 수 있다.”
프랭클은 식욕이 가장 강렬한 욕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경우는 의미추구를 저지당하거나 포기했을 때에 한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삶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강제수용소에서 우리는 그와 반대되는 현상들을 수없이 목격하였다. 같은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한 사람은 인간 이하로 전락하는 반면 다른 사람은 참으로 영웅적인 덕성을 성취하는 것을 보았다.”
오늘 사마리아 여인이 드러내는 욕구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그녀의 방어벽을 뚫고 들어가자 그녀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이 얼마나 지루한지를 여실히 표현합니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 않고, 또 물을 길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이 말을 좀 더 뜻을 살려 옮기면 이렇게 됩니다. “그 물을 저에게 좀 주십시오. 그러면 날마다 물을 긷는 이 지루한 고역을 되풀이하기 위해, (다시 말하면,) 매일의 삶을 의미 없이 되풀이하기 위해 이곳에 올 필요가 없겠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 여인의 공백을 보시고 여인에게 의도적인 접근을 합니다. 이른 아침에 우물가에서 친교를 나누고 마을 아낙네들과 일상의 친근한 잡담을 나누기를 거부했던 여인에게 웬 낯선 남자가 말을 겁니다. 그것도 유대 남자가!
예수님은 이 여인이 드러내는 욕구의 수준을 보았습니다. “내 삶은 매우 지루하고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 없이 되풀이 되는 나날을 생각해 보면,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이 여인과 말을 계속 이어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갑자기 말문을 돌려 남편의 이야기로 돌립니다. 짐작컨대, 이 남편의 문제는 이 여인이 가진 가장 커다란 상처요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남편이 다섯이나 있고 지금 살고 있는 사람도 제 남편이 아니라니요! 이 여인이 대단한 여인이라서 계속해서 남편을 갈아치웠던 것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가부장적이 사회에서 그런 일은 얼토당토않고 이 여인은 다섯 남자한테 쫓겨났고 이제 여섯 번째 남자에게서 쫓겨날 날을 기다리고 있는 한 많은 여인이었을 거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남편은 이 여인이 의존했던 대상이요, 그래서 그렇게 따지만 우리도 열 남편 스무 남편은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석합니다.
그 추측이 어쨌든, 우리는 이 여인이 지금 자기가 대면하여 보기 싫었던, 그래서 다른 모든 관계마저 망가뜨렸던, 자신의 상처, 괸 고름과 맞닥뜨리게 된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여인은 당황하여 주제를 종교적인 토론으로 끌고 가려 합니다. 갑자기 종교적인 토론으로 대화 주제를 바꾸지요.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의 방어전략에 말려들지 않습니다. 여인이 제시한 대화의 주제를 받아들이시되, 그 주제를 그녀와의 관계로 끌어들이십니다.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런 논쟁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가 이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사람을 찾으신다.”
이 말은 이런 말입니다. “너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추상적인 관념 속에서 맺지 말아라, 네가 지금 접촉하여 생기를 경험하고 앞으로 진보하며 삶의 충만한 의미를 찾는 자리, 서로 사랑하고 친교를 나누며 힘을 북돋우고, 자유로워져서 더 큰 열정과 연민을 갖고 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도적으로 선택하여 응답해 가는 그 삶이 너의 예배 자리다.”
예수님께서 주시려고 했던 “생수”, 그 여인이 발견했던 “그리스도”(“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요4:29))는 우리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그리스도”를 발견합니다.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생수)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엄청난 깊이를 갖는 말입니다. 깊은 층이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발견한 그리스도를 우리의 일상의 삶 속에서도 발견하지 않으면, 우리는 진정 예수님에게서도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한 낮 정오에 야곱의 우물에서 물을 긷는 지루한 일도,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일일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이 한 낮선 유대 남자와 길게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 삶의 무의미성을 직면하는 일도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일일 수 있습니다. 전통과 습관이 아니라, 토론과 머리가 아니라, 예배드리는 형식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이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일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이 물동이를 놓아두고 동네로 들어가 교류가 없었던 동네 사람들에게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 말하였던 그 대담한 행동이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길일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 땅에 “그리스도”를 만나러 잠시 와서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예수님에게서 그리스도를 보았고, 동시에 예수님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이르도록 초대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는, 어디 높은 저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종교관념 속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얼마나 의미 있는 생기와 접촉하는가에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삶이 의미 충만한 것이 되려면, 우리가 얼마나 의미없이 공허하게 살고 있는가를 대면해 보아야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지루하게 야곱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서 성령님은 역사하십니다. 능동적 초월의 역량이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그래서 지금 있는 그대로의 너의 모습을 부인하지 말고 포함하여 넘어서라고 추동하십니다. 우리는 이 초대, 이 두르림을 계속 받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사마리아 여인이 참 복이 있는 여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여인은 지루한 일상을 무릅쓰고 정오에 물을 길러 우물로 나왔다는 것(얼마나 귀찮았을까요?), 웬 낯선 유대 남자의 갑작스런 개입에 바로 돌아서지 않았다는 것(얼마나 불쾌했을까요?), 남편을 불러 오라는 뒤통수치는 이야기에 바로 샷터를 내려버리지 않았다는 것(얼마나 가슴이 후벼 파지는 아픔을 대면해야 했을까요?), 계속해서 예수님과 말을 이어나갔다는 것(이쯤 되면 뭔가가 자신을 끌어주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겁니다.)!
사랑하는 살림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 저는 빅터 프랭클의 이야기를 하면서 “삶의 의미”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만, 저는 오늘 심리치료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오늘 우리 안에서 샘솟는 생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야곱의 우물에 뿌리내리고 거기서 많은 자양분을 얻어 여기까지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소중히 하여 그것을 포함하고 간직하지만 버리고 넘어서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입니다. 우리를 여기까지 이끈 포용과 자비,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발현해야 할, 우리 안에 있는 포용과 자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